시인에 관한 시 모음
+ 시인
제 상처를 핥으며 핥으며
살아가는 사람
한번이 아니라
연거푸 여러 번
연거푸 여러 번이 아니라
생애를 두고
제 상처를 아끼며 아끼며
죽어가는 사람, 시인.
(나태주·1945-)
+ 시인
배 고플 때 지던 짐 배 부르니 못 지겠네
(김용택·1948-)
+ 시인
시가 직업이길 나는 원했지만
나의 직업은 허가받지 못한 철부지 공상이었다
시인이 되기엔
시보다 사람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산봉우리에 걸리는 저녁놀처럼
아름답게 사람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호반새 삭정이를 물고 둥지로 날아가듯
사람 사는 거리와 집들
세상과 골목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이란 아무에게도 알려서는 안 될
비밀한 이름
그때 나의 직업은 시인이 된다
잎새 뒤에 숨어서 명주실 뽑아내는 은빛 누에처럼
(이기철·1943-)
+ 김삿갓
시란
시인에게 굴레를 씌우는 것이 아니라
씌워진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떠나는 괴로움과
떠도는 외로움
시인은 출발부터가 외로움이다
불행하게도
벼랑을 맴돌며 노래함이
시인의 숙명이라면
기꺼이 그 숙명에 동참하겠다고
맹세하마
(이생진·1929-)
+ 시인 K의 두꺼운 노트
그는 읽고 또 읽었다
풀잎들의 잎맥을
그는 보고 또 보았다
폭포에서 뛰어내리는 물방울들을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새끼 고양이의 눈물은 왜 따스한가
그리고 썼다
자신을 뺀
온 우주에 관해
(이성미·1967-)
+ 시인이 되려면
시인이 되려면
새벽하늘의 견명성(見明星)같이
밤에도 자지 않는 새같이
잘 때에도 눈뜨고 자는 물고기같이
몸 안에 얼음세포를 가진 나무같이
첫 꽃을 피우려고 25년 기다리는 사막만년청풀같이
1kg의 꿀을 위해 560만 송이의 꽃을 찾아가는 벌같이
성충이 되려고 25번 허물 벗는 하루살이같이
얼음구멍을 찾는 돌고래같이
하루에도 70만 번씩 철썩이는 파도같이
제 스스로를 부르며 울어야 한다
자신이 가장 쓸쓸하고 가난하고 높고 외로울 때
시인이 되는 것이다
(천양희·1942-)
+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솥발산 산자락에 살면서부터
마당에 놓아둔 나무 책상에 앉아
시(詩)를 쓴다, 공책을 펼쳐놓고
몽당연필로 시를 쓴다
옛 동료들이 직장에서 일할 시간
나는 산골 마당이 새 직장이고
시가 유일한 직업이다
월급도 나오지 않고
의료보험 혜택도 없지만
나는 이 직장이 천직(天職)인 양 즐겁다
나의 새로운 직장 동료들은 꽃들과 바람과
구름, 내가 중얼거리는 시를
풀꽃이 키를 세우고 엿듣고 있다
점심시간,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바람이 공책을 몰래 넘기고
구름이 내 시를 훔쳐 읽고 달아난다
내일이면 그들은 더 멋진 시 보여주며
나에게 약을 올릴 것이다
이 직장에서 꼴찌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열심히 마당으로 출근한다
(정일근·1958-)
+ 시인
시를 청탁하는 전화가 왔다.
말라비틀어진 나무에 링거병을 달아준 것같이
가슴이 마구 뛰놀았다.
시침을 떼고,
고료부터 물었다.
죽은 나무가 꽃이라도 피울 기세로!
아직 살아 있다는 듯이!
한때 시를 쓴 적이 있었지만,
곧바로 쓰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 후로 몇 년간
청탁을 물리치는 게
진통제가 필요할 만큼 고통스러웠다.그나저나,
십칠 년 전이나 지금이나
시인들은 무대포로 살고 있군.
아니,
고료가 한 푼도 안 올랐다니
나는 십칠 년 전이나 마찬가지로
현역이었군.
(장정일·1962-)
+ 시인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었다는데
그 시인 언제 나를 떠난 것일까
제비꽃만 보아도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
어쩔 줄 몰라 하며 손끝 살짝살짝 대보던
눈빛 여린 시인을 떠나보내고 나는 지금
습관처럼 어디를 바삐 가고 있는 걸까
맨발을 가만가만 적시는 여울물소리
풀잎 위로 뛰어내리는 빗방울 소리에 끌려
토란잎을 머리에 쓰고 달려가던
맑은 귀를 가진 시인 잃어버리고
오늘 하루 나는 어떤 소리에 묻혀 사는가
바알갛게 물든 감잎 하나를 못 버리고
책갈피에 소중하게 끼워두던 고운 사람
의롭지 않은 이가 내미는 손은 잡지 않고
산과 들 서리에 덮여도 향기를 잃지 않는
산국처럼 살던 곧은 시인 몰라라 하고
나는 오늘 어떤 이들과 한길을 가고 있는가
내 안에 시인이 사라진다는 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최후의 인간이 사라지는 거라는데
지팡이로 세상을 짚어가는 눈먼 이의
언 손 위에 가만히 제 장갑을 벗어놓고 와도
손이 따뜻하던 착한 시인 외면하고
나는 어떤 이를 내 가슴속에 데려다놓은 것일까
(도종환·1954-)
+ 길 위에서 16 - 무명시인에게
이 땅의 시를 채록하면서
이름 없는 시인의 혼이
더 고독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에도 권력이 있는가,
현란한 언어의 유희에
나는 식상했다
이름 없는 시인을 사랑한다
야생화를 사랑하였듯이 꽃에
삼류가 있었던가
허공에 매달린 거미줄 같은
당신의 시 한 편을 찾아 나선다
(최병무·시인, 1950-)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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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가요? 시인에 대해 감이 잡히나요? 제가 아는 ‘시인’에 관한 시들을 몇 편 더 같이 봅시다.
시인 - 최영철
여름이 채 가기도 전에 매미는
제 외로움을 온 천하에 외치고 다녔네
해밝으면 곧 날아갈 슬픔을
비는 너무 많은 눈물로 뿌리고 다녔네
아무데나 짖어대는 저 개
사랑이 궁하기로서니
그렇게 마구 꼬리를 흔들 일은 아니었네
그 바람에 새는
가지와 가지 사이를 너무 빨리 지나쳐 왔네
저녁이 오기도 전에 바위는
서둘러 제 몸을 닫아벼렸네
입만 꾹 다물고 있었으면 좋았을걸
붙잡던 손길 다 뿌리치고
물은 아래로 저 아래로 한정 없이 흘러가고 있네
천둥의 잘못은 너무 큰 소리고
제 가슴을 두드리며 울부짖은 것이네
시인의 잘못은 제 가난을 밑천으로
너무 많은 노래를 부른 것이네.
시인추방 - 최일화
그는 열변을 토했다
자장면집이 너무 많다
태화루, 중화루, 만리장성이 모두 어렵다
너도 나도 칼국수집, 추어탕집, 순대국집을 내면
너도 못살고 나도 못산다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이 사람은 결국 차기에 낙선했다
요새는 시인이 너무 많다
몇 명만 남기고 모두 추방하자
그러면 시집은 잘 팔리고
시인도 저명한 정치가와 둘러앉아 만찬을 할 것이다
삼십 명만 남겨놓자
그만큼만 남겨서 정부정책 나팔수로 삼자
그러면 인천은 아마 시인 없는 도시가 될 것이다
나는 독재자 플라톤과 다르다
절반의 국민이 시인이어도 좋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시 쓰고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시 쓰고
부엌에서 설거지하며 시 쓰고
노점에서, 절간에서, 감옥소에서 시 쓰고
세상에 시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나?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진짜 시인
알토란같은 시인을
하늘이 그렇게 많이 세상에 낼 리가 없다
시인의 밭에 가서 - 김화순
비 오다 활짝 갠 날, 김포 대곶리 시인의 텃밭에 가서 나는 보았네. 엉덩이 까고 펑퍼짐하게 나앉은 비닐 모판 위 배추들. 하나같이 큰 손바닥만한 잎들에 구멍 숭숭 뚫려 있었네. 제 둥근 몸 안에 벌레를 키우고 꼿꼿이 서서 가을을 당당히 걸어가는 속이 꽉 들어찬 아낙들
그렇지, 사는 일은 빈틈없는 생활에 구멍 숭숭 내는 일이 아닌가 몰라. 벌레가 먹을 수 있어야 무공해 풋것이듯이 생활도 벌레를 허용할 수 있어야 자연산 인간일 수 있다는 생각. 그렇지, 사는 일이란 시인의 밭에 자라고 있는 배추처럼 자신의 몸이 기꺼이 누군가의 밥이 되는 일 아닌가 하는 그 푸른 기특한 생각, 들판 가득 향기처럼 번지고 있었네.
시인 본색(本色) - 정희성
누가 듣기 좋은 말을 한답시고
저런 학 같은 시인하고 살면
사는 게 다 시가 아니겠냐고
이 말 듣고 속이 불편해진 마누라가 그 자리에서 내색은 못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구시렁거리는데
학 좋아하네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닭 중에도 오골계(烏骨鷄)!
시인 - 김남주
세상이 몽둥이로 다스려질 때
시인은 행복하다
세상이 법으로 다스려질 때
시인은 그래도 행복하다
세상이 법 없이도 다스려질 때
시인은 필요 없다
법이 없으면 시도 없다
+ 시인
시인은
웃어야 된다
벌이 되고 나비가 되고
꽃이 되어야 한다
시인은
바람이 되고 바다도 되고
험준한 산맥이 되어
지켜보아야 한다
시인은 누구보다
마지막에 울어야 한다
한 방울 비가 되어
모두에게 가야 한다
(송정숙·시인)
+ 시인은
어디서나 문 열고
단 하나의 말을
찾아나선 이여
눈 내리는 빈 숲의 겨울나무처럼
봄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이여
마음 붙일 언어의 집이 없어
때로는 엉뚱한 곳에
둥지를 트는 새여
즐거운 날에도
약간의 몸살기로
마음 앓는 이여
잠을 자면서도
다는 잠들지 않고
시의 팔을 베는
오늘도
고달픈 순례자여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시인의 영혼
겨울 햇살이 하루를 접고 붉은 석양이 내릴 무렵
나의 언어도
강에 일렁이는 물 비늘 속으로 눕는다
겨울 산 벌거벗은 민둥으로
영혼을 흔드는 시를 날려보내자
돌 틈을 흐르는 계곡물이 사강(沙江)에 다다를 때
이미 사해(死海) 속으로
시인의 언어가 죽어버린다 해도
시는
영혼을 흔들어 태어나고
언젠가는 다시 시인의 영혼으로 돌아온다
시는
인생의 둘도 없는 보물이 되어
보석처럼 빛이 반짝이는 삶을 만들어 간다
시인은 살아있는 영혼 속에서
영혼을 흔드는 시를 노래한다
떠난 후
가난한 영혼의 그림자가
바람처럼 살다간 흔적으로
(조사익·시인)
+ 시인의 일상
갖는 것은 즐거움
버리는 것은 상쾌함
즐거움을 누린 만큼
쾌감도 느껴야만 한다.
스스로를 비우는 자는 상쾌하다.
내 몸 안의 숙변을 뿜어내듯이,
스스로 버리지 못한 욕심
곽 막힌 체증과도 같다.
담는 즐거움
덜어내는 상쾌함
내 안에만 머무를 때
돈도, 지식도, 음식도 썩고 만다.
먹는 것은 즐거움
배설하는 것은 쾌감
담았을 때의 쾌감만큼
비우는 즐거움을 누리자.
세상 만물 내 안에 담았다가
즐겁게 내어주는 큰 그릇이 되자.
즐거움이 나에게서 상쾌하게 넘치게 하자.
우주의 만물은 모두
즐겁게
상쾌하게
흘러야 맛이다.
오! 나의 하느님!
오늘도
상쾌하게 버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나이다.
(정환웅·시인)
+ 시인
꽃은 피는 대로 보고
사랑은 주신 대로 부르다가
세상에 가득한 물건조차
한아름 팍 안아보지 못해서
전신을 다 담아도
한 편(篇)에 2천원 아니면 3천원
가치와 값이 다르건만
더 손을 내밀지 못하는 천직(天職).
늙어서까지 아껴서
어릿궂은 눈물의 사랑을 노래하는
젊음에서 늙음까지 장거리의 고독!
컬컬하면 술 한 잔 더 마시고
터덜터덜 가는 사람.
신이 안 나면 보는 척도 안 하다가
쌀알 만한 빛이라도 영원처럼 품고
나무와 같이 서면 나무가 되고
돌과 같이 앉으면 돌이 되고
흐르는 냇물에 흘러서
자국은 있는데
타는 놀에 가고 없다.
(김광섭·시인, 1905-1977)
+ 미인과 시인
아이들은 나를 보고
<미인>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1학년의 눈으로는
미인의 조건이 나 정도인 줄 알았다
어느 날 나보고
<미인>이라고 말해 주던
참 귀엽고 예쁜 아이들의
손을 꼬옥 붙들고
<얘들아, 미인이 뭐야?> 물으니
<선생님처럼 시를 잘 쓰는 사람이에요> 한다
아하, 그랬구나
그러면 그렇지
(권복례·교사 시인, 1951-)
+ 시인 본색(本色)
누가 듣기 좋은 말을 한답시고
저런 학 같은 시인하고 살면
사는 게 다 시가 아니겠냐고
이 말 듣고 속이 불편해진 마누라가 그 자리에서 내색은 못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구시렁거리는데
학 좋아하네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닭 중에도 오골계(烏骨鷄)!
(정희성·시인, 1945-)
+ 늙은 시인의 노래
삶의 푸념도
노래가 되고
지워버린 사랑도
추억이 되는
늙은 시인이 되고 싶어라
그리움의 날들이
하늘이 되고
기다림의 날들이
바다가 되어도
초연한 모습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늙은 시인이 되고 싶어라
약속 없는 기다림을
혼자 만들다가
붉은 노을에
눈시울을 적셔도
새겨진 주름을
웃게 만드는
늙은 시인이 되고 싶어라.
(박우복·시인)
+ 어느 시인에게
님께선 다음 생에도 사람되겠다 그러세요
이 세상 힘드셨어도 다시 가겠다 그러세요
세상에 다시 오셔서 시인이 되어 주셔요
사람을 사랑하느라 미처 못다 안아 주신
작은 풀꽃 작은 벌레 작은 돌멩이에게도
하나씩 이름 불러 葉書詩 적어 주셔요
님께선 다음 생에 꼭 다시 돌아오셔요
못다 적은 시가 아직 많다고 그러세요
못다 비운 그리움 두고 오겠다 그러세요
(강인호·시인)
+ 시인은 모름지기
공원이나 학교나 교회
도시의 네거리 같은 데서
흔해빠진 것이 동상이다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고 나 이날이때까지
왕이라든가 순교자라든가 선비라든가
또 무슨무슨 장군이라든가 하는 것들의 수염 앞에서
칼 앞에서
책 앞에서
가던 길 멈추고 눈을 내리깐 적 없고
고개 들어 우러러본 적 없다
그들이 잘나고 못나고 해서가 아니다
내가 오만해서도 아니다
시인은 그 따위 권위 앞에서
머리를 수그린다거나 허리를 굽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모름지기 시인이 다소곳해야 할 것은
삶인 것이다
파란만장한 삶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돌아와 마을 어귀 같은 데에
늙은 상수리나무로 서 있는
주름살과 상처자국 투성이의 기구한 삶 앞에서
다소곳하게 서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도둑놈의 삶일지라도
그것이 비록 패배한 전사의 삶일지라도
(김남주·시인, 1946-1994)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