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남정맥26) 방장산 - 이 밤의 끝을 잡고
달포 만에 산으로 가는 아침 길에 아직 여명이 트지 않은 먹먹함과 함께 코 끝을 스치는 공기가 알싸하게 다가온다. 늘 새롭기 마련인 발걸음이지만 세상에서 맺은 인연들이 발목을 잡아 두 번이나 거른 산행길이 생경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추석연휴 기간 동안의 헝클어진 몸을 가다듬으려 어제 밤 헬스클럽에서 무리를 했는지 옆구리까지 결리지만, 나는 또 다시 산의 자연치유력을 굳건하게 믿고 발걸음을 가볍게 내딛는다. 잠시 몸을 맡긴 지하철에는 어제의 긴 밤을 뒤늦게 마무리하는 집단과 하루를 일찍 시작하려는 사람들로 색다른 군집을 이룬다. 그래서 세상은 다양성과 차별성을 가지고 또 흘러가는 것이겠지. 재미있는 세상이다.
남도 멀리 가는 행보이니 당연히 이동시간이 짧을 수야 없겠지만, 나는 오히려 이 시간을 반기는 입장이다. 늘 부족하기 마련인 잠을 보충하고 MP3 음악을 즐기며 차 안에서의 긴 시간을 향유한다. 휴게소에서 행장을 추스르고 또 다시 토끼잠을 즐긴 뒤에야 나는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 들녘이 농부의 마음을 대신하고 있고, 해무리가 감싼 듯 여린 구름 사이로 보이는 태양이 가냘퍼 보인다. 귓가에는 휘파람 소리가 생동감이 넘치는 콰이마치Kwai March가 시원하게 흐르며 어린 시절의 가을운동회를 추억하게 만든다. 이어지는 황야의 무법자 테마 뮤직은 잠시 머물렀던 미국 남서부의 모뉴먼트 밸리Monument Valley를 연상시킨다. 시간의 여유로움과 음악에 편승하여 나는 시공간을 초월한 사유의 서핑Surfing을 즐긴다. 그렇게 그렇게 나는 산으로 갔다.
▼ 오늘은 들국화, 모싯대와 철없는 철쭉까지 온갖 야생화와 함께 동행하는 산행이었다
보성의 오도재에서 시작된 산행은 짧은 오르막을 치오르는 것으로 막을 올렸다. 그래, 오랜만에 나서는 산행은 처음부터 시련으로 압박 받는 것이 좋아. 나는 심호흡을 들이키며 빨리 산에 적응하려 애쓴다. 10여 분만에 350봉에 오르고 왼쪽 어깨너머로 가야 할 능선이 아스라이 보인다. 오늘 산행은 초입부터 들꽃이 생글생글 웃으며 반긴다. 최후미권에 속해 있음을 잘 알면서도 들국화 예쁜 얼굴에 매료되어 접사촬영을 시도한다. 그 빛깔도 다양한 쑥부쟁이와 깊은 산중에 난데없는 코스모스, 그리고 철없이 가을에 피어난 철쭉까지 정말 다양하고 수려한 야생화가 등산로 주변에 지천이다. 젊은 시절 눈길도 주지 않던 볼품없는 들꽃이 그렇게 예쁘고 자연의 섭리까지 느껴지는 것은 오늘 산행의 또 다른 감상이었다.
정맥길의 등산로치고는 방화선 목적인지 나무와 들풀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아 그야말로 고속도로 수준이다. 오늘은 코스도 무척 짧은 편이고 능선의 오늘내림도 적어 운행이 용이하다. 경사가 제법 매서운 임도를 지나 어느새 오늘의 주봉인 방장산에 다다랐다. 저 아래 남녘으로 누렇게 곡식이 익은 황금벌판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보성의 득량만이 보인다. 오늘 산행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들꽃 경연과 산과 들, 그리고 바다까지 조망하는 눈이 축복받은 산행이었지만, 역광과 투명하지 않은 시야가 바다 모습을 아련하게 만들고 있다. 다 얻을 수야 없는 것이 세상이치이기는 하지만 먼 행보에 아쉬움이 남는다. 방장산 정상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산우들과 맛난 점심을 먹는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속담이 있기도 하지만 산에서 먹는 음식이 맛이 없었던 기억은 한 번도 없었고 오늘도 예외는 생기지 않았다.
▼ 등산로에서 내려다 본 황금들판과 저 멀리 남해바다 득량만의 모습
방장산에서 주월산으로 가는 길은 노래가 절로 나오는 흥겨운 길이었다. 우선 길이 편하고 산과 들 바다가 모두 보이고 등산로 주변에는 심심하지 않을 만큼 들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수는 적었지만 억새가 간간이 나타나며 구색 갖추기와 가을산의 정취를 돋우고 있다. 이 맘 때쯤이면 산에서 늘 내가 느끼는 무아지경의 경지에 접어들어야 할 터인데,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적절한 육체적 피로감과 더불어 마음까지 산에 빠져들면서 느끼게 되는 산에 대한 완벽한 적응과 텅 빈 머릿속,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과 신비감을 느끼는 그 자연과의 교감을 나는 오늘 갖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일찍 잠에 들려고 뒤척이는 사람처럼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그게 노력한다고 이루어질 일이 애초에 아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랜만에 나선 산길이어서 그런지 오늘 산행에서는 아직도 발걸음이 어눌하지만, 정작 더 어색한 것은 마음이었다. 정맥길은 코스마다 별다른 특징이 없고 피사체도 적어 산행기에 쓸 이야깃거리나 사진도 찍기 어렵기는 하지만, 오늘은 정말 산행기 줄거리도 제목조차도 아직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 세상이치요 자연의 섭리이기도 하지만, 최근 들어 부쩍 감퇴하는 기억력에 몸서리를 치고 가끔씩 적재적소에 알맞은 단어추출력의 한계에 허둥대고 있었다. 습한 날씨에 방전되는 배터리처럼 지식과 정보의 유출과 재충전의 한계를 극복하려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참으로 묘한 것은 수십 년 전 학창시절 읽은 책은 구절마저 또렷이 기억되지만, 몇 달 전 본 책들은 제목과 지은이마저 엉켜 나오기 일쑤였다. 가을볕이 따스한 오늘 아름다운 산길을 걸으면서도, 몸도 마음도 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 들꽃이 군락을 이루며 반기는 가을냄새가 물씬 풍기는 오솔길의 정취
그리 산행 속도가 늦은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상대적으로는 거의 최후미권에 속해 있었다. 주월산을 지나 내리막으로 내려서며 바라본 건너편 광대코재 능선의 산자락이 병풍처럼 서있다. 힘듦을 느낄만한 오늘 산행길은 아니었지만 오르막에서 유난히 속도가 처지는 것을 보면, 오랜만에 산에 든 것을 확실하게 입증하고 있었다. 무남이재에서 숨을 돌리고 급한 오르막의 산비탈을 치오른다. 가다 서기를 수 없이 반복하며 삼십여 분만에 겨우 광대코재 정상에 올라섰다. 고개이름이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의아하게도 오늘 산행 중에 가장 높은 곳이다. 선자령에서 갸우뚱했던 고개가 오늘은 더욱 혼란스럽다. 선자령이야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며 잘못된 부름이 굳어졌다고 하면 그만이겠지만, 작명도 우습게 해놓은 광대코재가 힘든 오르막에서 웃음을 자아낸다.
광대코재에서부터는 그야말로 정맥길다운 거친 산길이 시작되었다. 유연성 좋은 나무가 내 팔을 감으며 친근감을 표시하지만 나는 교분을 나눌 마음의 여유가 없다. 한여름을 지낸 무성한 풀이 발아래 길을 가리고 나의 걸음을 새색시 신행 모양으로 만든다. 불쑥불쑥 나타나는 가시덩굴이 내 얼굴에 오늘 산행의 인증표식을 그리려고 덤벼든다. 올 여름 유난이 잦았던 태풍의 후유증으로 쓰러진 나무들이 등산로 곳곳에 개선문을 만들어 놓았다. 때로는 우회하기도 하고 어느 곳에서는 어쩔 수 없이 굴욕적인 자세를 강요당한다. 무뎌진 감각 탓으로 머리에 작은 혹을 달기도 하고 때로는 등에 진 배낭이 작은 충돌을 대신 맡기도 한다. 나야 혹이 생기든 엎드려 기든 잠시 불편함을 감수하면 되겠지만, 태풍으로 애써 가꾼 농작물을 잃고 양식장을 망치게 된 농부와 어부의 마음은 과연 누가 보듬어주어야 하는가.
▼ 태풍의 후유증으로 쓰러진 나무가 개선문 형상을 하고 도처에 자리잡고 있다
오늘 산행도 바야흐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저 아래에 내가 타고 온 버스가 보이고 건너 편에는 다음 구간의 존제산이 우뚝 서있다. 너른 들판의 곡식이 풍요를 넉넉하게 표출하고 있고, 제법 커 보이는 대곡제 저수지도 가을 들판 풍경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늦은 오후의 골바람이 설렁설렁 일어 시간의 흐름을 대변하며 내 귓전을 간질인다. 산자락 아래에는 초록색이 유난히 뚜렷한 골프장이 주변경관과 대별되는 모습을 시현하고 있다. 계절 깊숙이 들어선 남도 마을에 가을임을 나타내는 과일인 감나무가 보일 만도 한데 애써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오늘 산행 적응이 잘 안 되는 나는 오늘 감枾을 볼 수 없어서 산행이나 산행기에 대한 감感을 잡을 수 없다고 투정도 아닌 억지를 부리고 있다.
무릇 술꾼들은 밤이 깊어 술자리가 익어가면 흔히 아는 이야기를 새것인양 꺼내놓고 이죽거린다. 더구나 그 날 안주가 백합구이나 꼬막이 등장하기라도 할라치면, 늘 인물과 돈 그리고 힘을 나열하고는 오늘 산행지 인근의 몇몇 지역을 대별시키고는 줄긋기를 시켰다. 술좌석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이유도 없고 근거 없는 해석을 공론화시킬 필요도 없지만, 나는 어쨌든 산행시작부터 주눅이 들어 있었다. 조금 다리가 풀렸음을 직감하면서 고흥지맥 분기점을 지난다. 기울어가는 가을 저녁 햇살을 등 뒤로 받으며 산길을 내려선다. 많지는 않더라도 그 동안의 등산 경험이나 산행이력도 잠시 동안의 산행 휴지기를 쉽사리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오늘 산에서 절감한다. 이미 익히고 있는 지식이나 사회에서의 경험도, 인생의 연륜도 결코 내세울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산은 오늘도 내게는 스승이었다.
▼ 이 밤의 끝을 잡고…
산 속에서 길을 걸으며 오늘 산행에 대한 특징을 잡아 산행기의 시놉시스Synopsis를 전혀 구성하지 못한 나는 기나 긴 귀경길이 결코 길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등산을 하다 보면 이유 없이 산행이 서투른 날이 있기도 하지만, 오늘은 스쳐가는 산길에서 바라보는 경관에서 마주하는 들꽃에서 영감을 얻지 못한 채 그냥 서울로 돌아왔다. 먼 남도 산행이었지만 예상보다는 훨씬 이른 시각에 집에 도착하였다. 산행 뒷마무리를 하고, 가을 깊은 밤에 산행기를 쓰려 낮에 찍어둔 사진과 마주하고 앉았다. 흘러가는 세월을 묶어둘 수 없으매 나는 먹는 밤栗의 끝을 잡고 시간과 씨름하며 낑낑거렸다.
¶ 2012. 10. 6. [언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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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좋은 글을 선사하여주셔서....
볼품없는 글, 감명깊게 좋은 글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은 댓글이 글쓰는 이에게는 커다란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늘 아름다운 산행 즐기시기를...^^
언마청님은 오늘은 저를 무척이나 깜짝 놀라게 하십니다.
그날 로봇님의 사진에도 전혀 보이시질 않아 참석을 못하셨는줄 알았습니다.
지금 보니 명품산행기가 오래전에 올려져 있었군요.
역시 대단한 글과 사진입니다. 산행기에 듬뿍 담겨진 인정어린 여유와 유머, 전문여행사진작가이십니다.
잘 보고 가며 다음부턴 참석하시면 미리 연락을 주십시요.
그래야 제가 못가도 명품산행기는 꼭 볼수있으니 말입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파이띵!!!
하하, 분에 넘치는 과찬의 말씀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늘 나누는 말씀입니다만, 산을 가까이 하지 못하니 몸도 둔하고 머리도 굳어지는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사는 게 바빠서 못 뵈니 무척 궁금하고 뵙고 싶습니다.
호남 길에서 뵈올 수 있기 바랍니다. (되도록이면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