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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
몇 편의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밥을 먹기를 거부하고, 폭력적이기도 하고, 다른 아이들과 사귀지도 못하고, 언어발달도 지체되는 등의 많은 문제가 있는 다양한 아이들이 나왔고 그들은 전문가들의 노력으로 신기하게 정상의 아이들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양한 문제의 다양한 아이들이 등장하는 것에 비해서 그런 아이들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변화되면 그만입니다. 엄마가 조금 더 아이에게 관심과 애정을 주고, 아빠가 조금 더 참으며 아이와 놀아주면
문제가 있는 아이들은 전부 보통 아이들처럼 변해갔습니다.
여기에서 ‘폭력보이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방영되었던 언어발달 미숙으로 공격성이 매우 컸던 민석이라는 아이가 변화되는 장면은 코끝이 찡할 정도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아이와 대화해 주지 않아 언어발달이 늦어졌고, 결국 아무와도 소통이 되지 않아 마지막 수단인 폭력으로 아이들과 선생님, 부모님께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민석이의 문제는 바로 어머니의 무관심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떼어놓고 일을 하기 위해 핸드폰을 쥐어 주었고, 아버지는 아이와 노는 것을 힘들어해 역시 핸드폰을 쥐어주고 TV만 보았습니다. 물론 핸드폰을 먼저 쥐어주었던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이제 아이가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스마트폰뿐이었고 그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낯선 사람도 그것만 보여주면 앞뒤 안 가리고 쫓아갑니다.
부모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그런 아이들은 이렇게 쉽게 세상의 다른 것들에 지나친 애착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먼저 부모가 변화되었습니다. 핸드폰을 치워버리고 어머니는 많은 칭찬과 애정을 민석이에게 보여주었고, 아버지는 무뚝뚝한 표정을 버리고 우스운 가발을 쓰고 민석이와 놀아주었습니다. 그러자 핸드폰을 찾지도 않고 폭력성도 싹 사라졌고 다른 아이들과도 사이좋은 민석이가 되었습니다. 아이에게 유일하게 필요했던 것은 부모님의 관심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몇 년째 계속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놓지 않고 있습니다. 자살률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문제가 많은 사회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나라의 경쟁 사회구조 문제라고 합니다. 혹은 경제가 너무 어려워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현재 경제문제로 가장 많이 거론되고 있는 그리스나,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은 가난한 나라 아이티는 자살률에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자살률이 높은 것은 아직까지 우리들이 ‘무엇 때문에 살아야하는가?’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근본적으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살아야하는가?’의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이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마치 우주에 붕 뜬 사람처럼 불편하고 불안하고 발붙일 곳이 없는 불안감에 싸여 살아가게 됩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부모의 관심을 확인받기 위해 부모를 귀찮게 하는 이유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출처를 모릅니다. 그냥 자아를 인식하게 될 때에 이미 세상에 던져진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정체성을 갖고 싶어서 자신의 뿌리를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줄 사람은 오로지 부모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열매라면 무슨 열매인지는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알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자신이 나온 바로 그 뿌리, 부모를 찾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그 아버지, 어머니가 자신의 뿌리인지 어떻게 확신을 가지게 될 수 있을까요? 존재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버지, 어머니의 애정을 시험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귀찮게 하는 것인데, 그 욕구를 채워지지 못할 때는 심한 불안감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 불안을 잊기 위해서 무엇에든 집착하게 되고 막무가내의 성격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체성의 위기는 사춘기 때 다시 한 번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는 몸도 부모님보다 커지고 힘도 세지고 아는 것도 부모보다 많게 되어 자신의 뿌리인 부모가 자신들보다 더 작게 보이게 됩니다.
정체성이란 자신의 뿌리를 알고 어디로 돌아가야 함을 아는 것인데, 사춘기 때는 아무래도 자신들이 돌아가야 할 원천이 부모로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들이나 이성, 혹은 게임 등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친구들로부터 배신을 당했다고 느꼈을 때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절대적인 고독감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을 때 한 친구가 “너한테는 예수님이 함께 계신데 뭐가 걱정이야?”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아무런 의식도 하지 않았던 그 진리, 이것이 붕 떠있던 저의 발을 다시 땅에 붙이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 변모하십니다. 제자들은 도대체 그 분이 하느님인지 인간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어쩌면 그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느님이지만 조금 있다가는 인간 중 가장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무 위에 달려 죽어야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비켜가게 하소서.”라고 하시며 죽어야 할 당신 운명을 받아들이기 힘겨워하십니다.
이 때 예수님을 도와주는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유아기를 거칩니다. 자신의 뿌리가 이스라엘인지 이집트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습니다. 그러나 결국 참 부모가 이스라엘임을 깨닫고 이집트인을 죽입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사춘기를 겪습니다. 이스라엘 인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이방인 여인과 혼인하여 살아갑니다.
그러고 있을 때 불붙은 떨기나무를 봅니다. 자신의 참 성소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공자는 ‘지천명(知天命)’이라 하였습니다. 즉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백성을 죄에서 이집트에서 구원해 내는 일입니다.
물론 결국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기는 하지만 믿음이 완전하지는 못하여 가나안 땅 안으로는 이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40년 동안은 하늘의 뜻을 알고 살았기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 다시 시나이 산의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지금 자신처럼 죽음의 땅인 이집트, 즉 영혼들이 갇혀있는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는 이미 사춘기를 벗어나 하늘의 뜻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그의 아내 이제벨의 잘못을 지적하며 몇 년 동안 비를 내리지 않게도 하고, 또 갈멜산에서는 바알의 예언자 450명과 대결을 하여 그들을 칼로 쳐 죽입니다.
이렇게 세상과 싸워 승리하고 모세가 하느님을 만났던 시나이산으로 향합니다. 물론 40일간의 여정에 천사가 나타나 빵과 물을 주며 그의 기운이 회복되도록 도와줍니다.
결국 모세와 마찬가지로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제자 엘리사에게 자신의 능력을 남겨놓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나중에 아버지께 가시기 위해 엘리사로 대표되는 교회에 당신 권능을 맡기시고 승천하시는 예표입니다.
이 두 예언자가 말하는 단 하나는,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하는데, 하느님께 돌아가기 위한 방법은 바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제 부모를 알아 그 부모로부터 왔고 그 부모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유아기 때입니다. 사춘기 때는 그 부모를 벗어나 참 부모인 하느님을 인식하고 그 분께로부터 나와 그 분께 돌아가야 함을 아는 것이 사춘기의 방황을 종식시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믿음을 키워나간 것과 같이, 엘리야가 40일 동안 광야를 걸은 것과 같이 죽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결코 아버지께 다다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길을 고 난 후에는
아버지께 영광스럽게 다시 돌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과 같이,
엘리사와 그 제자들이 엘리야의 대를 잇는 것과 같이, 교회가 새로이 탄생되어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게 되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아버지는 이런 결정을 내리는 그리스도에게 참된 정체성, 즉 당신의 아드님이 되심을 장엄하게 선포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께서 타볼산은 내려오시는 모습은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땅 이집트로 들어가는 모습과, 시돈 지방에서 숨어살다가 아합과 이제벨,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과의 싸움을 하기 위해 갈멜산으로 향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마치 어린왕자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뱀에 물려야 했던 것처럼, 아버지께 돌아가기 위해 뱀에 물리기 위해 내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뱀은 결국 그 분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지만 동시에 그 발꿈치에 머리를 밟히게 됩니다 (창세 3, 15). 그렇게 그리스도는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 사탄의 무리에 갇혀 있던 당신 백성들을 구해내십니다. 죽음의 문턱을 지키고 있던 사탄의 머리가 부셔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모든 뜻을 이룬 아드님을 당신께로 불러올리십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부여받는 이들의 운명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당신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기 전까지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그 일이 완수되기 전까지는 이런 모든 일들을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분께서 승천하시고 난 이후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도 적어도 한 번은 타볼산에 올라 내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선택해야하는 그런 시간이 반드시 필요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40이란 숫자가 이제는 아버지의 뜻을 위해 나의 뜻을 죽여 가는 시간을 의미함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40과 가장 가까운 이미지는 ‘십자가’입니다. 누구도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한 주간도 나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더 따랐습니까?
그래서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셨습니까? 그러면 이제 39일 남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흔들림 없는 정체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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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혁(노르베르토) 신부님
중학교 시절 제게는 유난히도 좋아하던 헐렁한 바지가 있었습니다. 그 바지의 이름은 당시에 유행하던 힙합바지였습니다.
그것도 남들과 달리 평범한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성격 탓에 빨간 색깔의 바지를 입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지 색깔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슈퍼마켓으로 달려가 락스 한 병을 사와 대야에 붓고 바지를 담궈 놓았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토록 멋 지게 입고 다니던 빨간색 바지는 흰색 바지로 변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새 옷을 산 것과도 같은 기분이 들어 마냥 신났습니다. 그런데 눈과도 같이 희었던 옷은 조금씩 때가 타더니 나중에는 너무나도 더러워져 세탁을 해야 할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기도 하던 중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과도 같이 하얘져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모습을 전해줍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하셨다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당신의 부활의 표지입니다. 이는 예수님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 하느님 나라의 부활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그 복된 영광의 순간을 자주 체험합니다. 그것은 바로 고해성사의 은총을 통해서입니다. 자신의 과거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면, 사제의 기도로써 우리가 지었던 모든 죄는 사해지고 우리의 영혼은 갓 태어난 아기와도 같이 순수해 집니다.
하지만 흰색 바지가 입을수록 때가 타고 더러워지듯이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해성사의 은총을 통해 깨끗해진 영혼은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통해 조금씩 더러워지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오늘 사순 제2주일에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이유는 이 사순시기 동안 세상의 온갖 것으로 더러워진 영혼을 깨끗하게 씻기 위함 인 것 같습니다.
사순시기를 은총의 시기라고 말하는 이유는 다른 그 어느 시기보다도 자신의 영혼을 돌보고 빛과도 같이 하얗고 해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주님의 부활을 아니 우리 자신들의 부활을 준비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 은총의 사순시기에 우리의 죄를 용서 받고,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도 같이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부활을 준비할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 청하며, 앞으로 다가올 부활을 준비 하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부활 잔치에 한 발 한 발 다가가게 될 것이며, 언젠가는 세상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큰 기쁨과 행복을 하느님과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김상혁(노르베르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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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 신부님
나의 뒷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집 세 채도 괜찮다고 허락된다면 어디일까? 하나는 고향에, 또 하나는 서울에, 그리고 또 하나는 제주도나 설악산이 있는 속초가 아닐까?
속초에 살려면 2월의 폭설과 3월의 바람을 조심해야 하지만, 오늘 베드로가 “괜찮으시다면 제가"(마태 17,4) 초막 셋을 지어, 예수님과 같이 살고 싶다고 고백하는 곳은 타볼산이다,
베드로는 산이 좋아서이기보다 예수님이 너무 멋져 보이시어, 같이 살고 십다고 고백한다. 너무 멋지신 예수님의 모습은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시게" 변하신 모습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파라오로부터 야훼 하느님을 향하여, 억압의 이집트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을 탈출시킨 모세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한 엘리야와 이야기하고 계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로, 그 신원이 밝히 드러났다,
회개와 속죄로 신앙생활을 쇄신하며 희생과 극기를 실천하는 사순절에 난 데 없이 초막과 빛나는 얼굴은 왜 나올까?
모세와 엘리야는 왜 나타나고, 하늘의 소리는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그 정확한 답을 오늘의 미사 감사송에서 듣는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엿새 전에 미리 알러주시고, 이제 그 거룩한 산에서 당신 영광을 그들에게 보여주셨으니,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게 됨을 증명해 주셨나이다"라고 노래한다. -
한알의 밀알이 썩어
예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사순절의 의미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영광의 부활이라는 관점에서 수난의 의미를 알아듣도록 해준다.
무엇보다 제자들의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해주려는 교육적인 의도를 담고, 또한 제자들도 곧 당하게 될 수난에 잘 참여하게 하기 위하여 미래에 받게 될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준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거룩한 변화‘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 재현하는 미사 성제 안에서도 볼 수 있다, 미사 성제 안에서 예수는 한알의 밀알 모습으로. 땅에 떨어진다. 땅에 떨어진 밀알은 썩어 열매 더부룩하게 달린 밀 이삭으로 변모된다.
이 밀 이삭은 또다시 그 형태를 달리하는 밀가루로, 밀가루는 빵으로 변모되어 우리 손으로 제단에 올려진다. 이 빵은 사제의 손과 기도를 통하여 ’거룩한 몸(聖體)'으로 변화된다.
성체는 우리의 양식으로 또 우리가 받아 모심으로 ‘우리 몸'으로 변모한다.
그렇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아야 될 것도 있어야하지만, 바람직한 모습으로 변하기도 해야 한다, 오늘 복음 안에서 만나는 ‘거룩한 변모'를, 매 미사 안에서도 체험하는 우리 또한 변모되어야 한다.
한알의 밀알에서부터 거룩한 빵으로 변모되어 내게 오신 예수님 모습에, 내 생활과 얼굴을 비추어 보며, 그에 맞갖은 나의 변모를 이루어야 한다, “괜찮으시다면" 나의 가장 아까운 그 무엇까지도 나누고 희생할 결심을 해야한다.
내 방에는 루오가 75세 때 그린 ‘거룩한 얼굴'이 박혀 있는 상본이 있다. 나의 서품날짜와 기념 성서 구절이 뒤에 박혀있는 사제서품 기념상본이다.
루오의 이 ’거룩한 얼굴'은 나의 사제생활과 얼굴이 어떻게 변모하여 왔는지를 묻고 있다. 앞모습뿐 아니라 뒷모습까지도 거룩한지 묻고 있다. 반성의 기도시간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남에 대해 뒷말을 하지 않았는지? 자존심으로 모이고 열등감으로 뒤틀리지는 않았는지?
예수와 유다의 얼굴
“악마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면 된다"는 말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제일 고심했던 인물은, 예수와 유다의 얼굴이었다.
다빈치는 성당의 청년 성가대원인 베드로 반디네루를 예수님의 모멜로 삼았다. 유다의 얼굴을 찾기는 더욱 어려웠다.
어느 날 로마 거리에서 그 얼굴을 찾았다.
화실에 데려와 살펴보니 전에 알던 사람같았기에 이름을 물었다.
“당신은 전에 나를 모텔로 하여 그린 적이 있습니다. 내가 바로 베드로 반디네루 입니다."
예수님 얼굴이 그동안의 교만과 방탕으로 유다 같은 얼굴로 변한 것이다.
괜찮으시다면 이 사순절에 우리 모두 거울 옆에 예수님 얼굴을 붙여보자.
그리고 거울을 불 때마다 예수님 얼굴에 내 모습도 비추어 보자. 뒷모습까지도 거룩하고 아름다운지 물어보자.
김현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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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광하 신부님
그분과 같이 되리라는 희망
산 위에서
등산을 할 때 자주 느끼는 일입니다. 산 주위의 경관과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오를 때에는 정상까지의 산행이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함께 오르는 일행이 있을 때에도 선두에 서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오를 때에는 그리 많은 힘듦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후미에 떨어져 오를 때에는 무엇을 볼 겨를이 없고 그저 앞사람 엉덩이만 보고 오를 뿐입니다. 그 때에는 산행이 너무 힘듭니다. 정상까지 올랐더라도 그저 소리 한번 외치고 내려올 뿐입니다. 누군가 이번 산행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는다면 마음 속에서는 앞사람 엉덩이만 보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천국을 향한 산행에서 낙오를 하거나 힘에 겨워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까닭을 이탈리아의 ‘마르티니’ 추기경께서는 사냥개의 비유로 재미있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냥개들이 사냥꾼들에게 사냥감을 몰이해 주기 위해 사냥을 떠났을 때, 어떤 사냥개가 사냥감을 발견하여 동료 사냥개들에게 알려주어 일제히 사냥감을 향하여 달려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친 사냥개들이 낙오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사냥감을 쫓는 사냥개들은 동료 사냥개들의 소리가 아닌 자신의 눈으로 직접 사냥감을 목격한 사냥개들이라고 합니다.
천국을 향한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 입문할 때에는 분명 누군가의 도움을 받습니다. 부모님이나, 이웃들, 선배 신앙인들의 권고와 선교의 도움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교회에 들어와서도 주변 신앙인들로부터 계속적인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견진을 받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주님을 뵈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지치지 않고, 낙오하지 않고 영광스러운 천국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럴 때 우리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이유 없이 기적을 베푸시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베푸신 모든 기적들은 우리들도 행할 수 있고 따를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오늘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기적은 신앙 여정에 지친 우리들에게 분명한 목표가 무엇이며, 무엇을 보고 따라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산 위에 오르시어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께서는 고난 중에 영광의 부활과 승천이 현존함을 보여주신 것이며, 우리에게도 그 같은 희망을 살라 하신 것입니다.
산 아래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때 곁에 있었던 두 인물, 모세와 엘리야는 하느님 구세사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이며, 엘리야는 예언서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엘리야도 지극히 인간적인 산 아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부르심의 소명을 받았을 때 모세는 계속하여 걱정과 두려움에 머뭇거리는 약한 인간성을 보입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딥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주님께서 보내실 만한 이를 보내십시오”(탈출 4, 10; 13).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으로 온갖 기적을 행했던 엘리야는 이제벨의 심부름꾼 협박에 두려운 나머지 목숨을 구하려고 도망가다가 광야에서 죽기를 간청하며 이 같은 나약한 하소연을 털어 놓습니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1열왕 19, 4~5).
이렇듯 인간적으로 나약하고 믿음이 부족했던 모세와 엘리야였지만, 주님 약속의 희망을 믿고 천상 영광의 산을 향하여 올랐던 그들은 끝내 그 영광에 도달합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며, 엘리야는 하느님의 산 호렙에서 영광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죽지만 그 육신을 하느님께서 거두어 주십니다. 엘리야는 불 병거를 타고 하늘로 살아 승천하게 됩니다. 비록 인간적인 나약함이 있더라도 우리 역시 영광스러운 변모가 가능함을 모세와 엘리야는 보여 주었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에 함께 나타났던 그들은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수 있으며, 산 아래에서 살고 있지만 산 위의 영광을 향한 여정과 등반에 지치지 않고, 낙오하지 않으며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뒤 보여주는 밝은 모습은 그 같은 사실이 이미 산 아래에서 가능함을 보여 줍니다. 신자분들이 힘겨운 세상살이와 신앙의 여정에 지쳐있다가도 여러 피정의 기회를 통하여 다시금 환히 변모되는 모습은 산 아래의 지상 삶에서부터 예수님을 닮은 영광의 변모가 가능함을 일깨워 줍니다.
분명 우리 역시 세상에서 빛처럼 변모될 수 있습니다.
배광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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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호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오늘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후 당신의 아름다우신 모습을 제자들에게 미리 현시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의 이 아름다우신 변모를 통하여 우리 자신이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어려운 십자가나 삶에 있어서 자신을 죽일 때 예수님과 같은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음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세 가지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어디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첫 번째는 항상 잠만 자는 시기로 이 시기에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를 말합니다. 이 시기를 살아가는 아기에게는 손, 발, 눈 등과 같은 기능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영양만 섭취하면 됩니다.
그러나 어머니 뱃속의 아기에게 눈이 필요 없다고 눈이 생기지 않거나 손이 필요 없다고 해서 손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 아기는 두 번째 단계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 단계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단계를 말합니다. 첫 단계에서 모든 것이 잘 형성되었다면 둘째 단계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렵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셋째 단계를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랑, 자비, 정의’와 같은 정신적인 것들이 필요합니다.
요즘처럼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생각하는 세태에서 정신적인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지금을 살아가는 데 자비가 왜 필요하며,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정의’는 나 자신만을 위하여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둘째 단계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그러한 정신적인 가치가 필요하지 않지만,
셋째 단계를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것들이 지금 나의 삶 안에서 반드시 형성되어야 합니다.
지금 삶 안에서 사랑, 자비, 정의와 같은 것들이 내 안에서 기형으로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 번째 삶 안에서 기형으로 살아간다면 아마도 하느님 나라에 재활원이 있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복직관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하느님을 우리가 직접 뵈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상사병이 나도록 죽도록 사랑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직접 뵙고 살아야 할 하느님을 보지 못하면 그만큼 힘이 든다는 말이겠죠.
하느님을 직접 뵙기 위하여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아름다운 모습과 같은 나의 모습을 위하여 지금 우리에게는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들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배종호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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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백 요아킴 신부
"빛나는 구름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도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 5)
예수님께서 세 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습니다.
그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의 장면과 흡사합니다. 우리도 세례 때 주님의 성령을 받고,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딸이다."라는 주님을 말씀을 듣고 영광스럽게 다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 딸입니다.
사순절은 자신을 희생하고 보속하고, 참회하고 속죄하는 시기입니다.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고 십자가의 길을 바치며, 자신의 삶을 조용히 돌아보는 이 때에,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라니, 뭔가 잘 어울리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아직 영광의 모습을 보기에는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기에는 너무 빠른 것이 아닐까요? 원래 주님의 거룩한 변모축일은 8월 6일입니다.
그 때의 장면과 복음 말씀을 우리는 오늘 듣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제생활 초기에는 오늘 복음이 사순절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너무나 어렵고 힘들고 져야 할 십자가도 많고, 매일 매일이 전투 같으니 생존경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어려운 세상에 신자로서, 주님의 제자로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인생고에서 생존경쟁에서 지치지 않도록 달련시키고 격려하기 위해,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너희도 시련과 고통을, 신앙과 기도로 잘 참아내면 이렇게 영광스럽게 승리하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이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의 부활을 바라보며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하늘나라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궂은 날이 있으면 맑은 날이 있고, 슬픈 날이 있으면 기쁜 날이 있듯이, 이 사순절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 부활절에 기쁘게 웃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자신과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고난의 길을 내다보시면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시련과 고통을 이기는 방법은 기도 밖에 없다는 것을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본 제자들은 그곳에 오래오래 머무르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지상낙원이요,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도 주님처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리구오리의 성 알퐁소는 "기도하는 사람은 거룩하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추하게 됩니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겸손과 기도가 회개의 첫 단계이고 회개란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 변화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회개의 은총을 얻고 삶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상의 성 비오 신부님은 억지로라도 기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얼마 전 얼굴학을 전공한 어떤 박사라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얼굴은 몸의 유전판이고 마음의 전광판이며, 생(生, 삶)의 이력서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면 건강한 지 안 건강한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편한지, 안 편한지 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인다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해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며 사는 사람은 늘 마음에 여유가 있고 평온해 보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남에게 잘 보이려고 억지로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상 기도생활에 충실하고 나누고 베풀면서, 가난하고 소박하게 살면 저절로 예뻐지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 앞에서도 좌절하지 말고 부활의 희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본래의 모습이, 하늘나라(천국)의 모습이 타볼산에서 제자들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도 이 사순절에 시련과 고통 앞에 조용히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산이나 계곡, 강이나 바다, 들길을 걸으면서 기도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합시다.
시련과 고통,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남은 사순절을 주님과 함께 거룩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오성백 요아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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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회개와 희생을 강조하는 사순시기이지만,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줍니다. 사순시기 동안 우리의 회개와 희생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한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겪으실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신 뒤, 거룩하게 변모됩니다. 거룩하게 모습이 변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의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이어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구약의 약속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것으로, 제자들에게 희망을 줍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목격한 이들은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입니다. 이들은 너무나 놀랐으며, 예수님의 부활 때까지 이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고향을 떠납니다. 아브람이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아브람의 응답은 구원의 축복이 됩니다. 물론 자신의 고향과 아비의 집을 떠나는 고통과 긴장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끊어버려야 했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있으면서 티모테오에게 주님을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며 용기를 줍니다. 복음 선포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우리의 공로로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만이 이루어주실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복음 선포라는 희생은 구원에 이르는 영광임을 가르쳐 줍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사순 제2주일의 독서와 복음은 우리의 고통과 희생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 이른다는 가르침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고통과 긴장을 통하여 모든 이의 구원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참 기쁨을 복음 선포를 통하여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주님을 따르는 고통과 희생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 이름을 미리 보여 줍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처럼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구원의 참 기쁨에 이르게 됨을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이루어주심을 믿는 믿음으로써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겪는 수많은 어려움과 두려움이라는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불멸의 생명이 환하게 드러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우리는 항상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의 빛에 비추어 끊임없이 변모되어 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 주시고, 그 거룩한 산에서 당신 영광을 보여 주시어,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럽게 부활한다는 것을 밝혀 주셨나이다.”(오늘의 감사송)
전장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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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마티아 신부님
믿음의 원동력
신부님, 다음에 봉성체 오실 때 요구르트 한 개만 사다 주세요. 먹고 싶은데 자주 이불에 소변을 본다고 어멈이 주질 않아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첫 보좌 신부시절 이야기입니다.
그 할머니는 십 년 이상 중풍으로 누워 계셔서 다른 이의 도움이 없이는 꼼짝도 할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오랜 투병생활로 몰골이 형편없고 한참 동안 입을 움직여야 겨우 몇 마디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성체를 받아 모시고는 항상 목놓아 서럽게 우셨습니다.
요구르트를 사달라는 할머니의 말씀이 오랫동안 나의 가슴을 아프게 때렸습니다.
그 후 봉성체를 갈 때마다 나는 요구르트를 한 개씩 몰래 사다드렸습니다.
그러면 할머니는 어린아이처럼 그것을 한 입에 다 드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갑자기 위독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고백을 듣고 이마와 손에 기름을 바르고 병자성사를 드렸습니다.
병자성사가 끝나자 할머니는 꼬깃꼬깃 접은 만 원짜리 지폐 한 장과 오천 원짜리 두 장을 내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할머니! 왜 이 돈을 저에게 주십니까?”
“이젠 나에게 이것이 필요 없어요. 신부님이 가지고 있다가 불쌍한 사람에게 써 주세요.”
나는 사제관으로 돌아오면서 ‘지금 외롭게 죽어가고 있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분은 자신의 전 재산을 준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후 할머니의 장례미사 때, 영정 사진 안에서 마치 천사처럼 밝게 미소짓는 젊은 시절의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나는 그분이 이미 하느님 나라에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전해 줍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미리 하느님 나라를 엿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천상의 모습으로 변모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여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고난을 이겨 내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기에 그냥 머물자”고 예수께 권고합니다. 베드로의 생각은 보통 사람의 마음입니다. 누구나 지금 이렇게 좋은데 변화가 두렵고 안주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주님의 뜻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족한 인간의 지식과 능력으로 안다고 하지만 보지 못하는 것이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주님의 영광스런 변모는 신앙인의 믿음을 굳게 하는 힘이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어느 날 예수님처럼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의 힘이 어떤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죽음 앞에서도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1고린 15,55)고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꿈 속에서 천국의 문에 도착했을 때 베드로 사도는 “지상으로 돌아가라. 여기에는 빈민굴이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요?
허영엽 마티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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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 신부
십자가 없는 예수
성서에 보면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제자들의 입장으로 보면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렸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를 돌아다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꾸짖으신 주님의 말씀은 정말 뜻밖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극단적인 표현을 본 제자들은, 이후 주님께서 두 번이나 더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셔도 다만 슬퍼하거나(마태 17,23) 깨닫지 못해 묻기조차 두려워했을 뿐(마르 9,32)이었습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준엄하게 꾸짖으셨던 것은 베드로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마태 16,23) 즉 십자가 없는 주님의 영광만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수난에 대해 첫번째 예고를 하신 지 엿새 후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십니다. 이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눈부시게 변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얼마 전 수난에 대한 첫번째 예고를 하신 것처럼 이번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영광의 모습을 예고하십니다. 수난에 대해서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했던 베드로가 이번에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계시는 주님(루가 9,32)께도 똑같은 말을 합니다.
“주님, 언제까지나 여기서 함께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여기에 초막집을 지어드릴 테니 그런 불길한 말씀 같은 것은 집어치우시고 천년만년 함께 사시지요.”
그러나 베드로의 이 말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한 말”(루가 9,33)에 지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이 이루려 하시는 일, 즉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주님의 영광은 존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 없는 예수’를 따르고 ‘십자가 없는 영광의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했던 어리석은 제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베드로도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이후 변모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강림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꾸며낸 신화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우리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분은 분명히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영광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그분을 가리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고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는 그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으므로 하늘에서 들려오는 그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이것으로 예언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의 어떤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예언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서 하느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전한 것입니다”(2베드 1,16-21).
최인호 베드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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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 신부님
지상에서 천상을 체험한 제자들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 많으시지요? 영화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는 주인공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이 배 위에서 날아가듯이 팔을 쭉 뻗던 장면일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그 장면을 알지만 그보다 더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거대한 여객선이 빙산을 들이받고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자 선장은 구명보트를 내려 먼저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태우라고 명령합니다. 구명정으로 옮겨 타는 중에 스트라스 부인은 보트가 부족하여 남편이 함께 탈 수 없음을 알고 내려달라고 부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만류하지만 스트라스 부인은 끝내 구명보트를 포기합니다.
"남편과 나는 서로 사랑하며 오랜 시간 인생을 함께 살아왔습니다. 남편을 떠나서 나 혼자만 살기보다는 마지막까지 남편과 함께 하렵니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보며 말합니다. 결국 부부가 나란히 침대에 누워서 손을 꼭 잡고 침몰하는 배와 함께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그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노부부의 사랑과 믿음이 죽음을 넘어선 사랑이 있음을 증명해주는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스트라스 부인인들 어찌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아비규환으로 침몰하는 배가 어찌 무섭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녀는 혼자 살기보다는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하는 죽음을 택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남편과의 깊은 사랑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큰 믿음과 깊은 사랑의 체험은 시련과 절망에서 더 빛을 발합니다. 시련이 클수록 사랑은 더욱 깊어집니다. 그러나 일생을 함께 살아왔어도 사랑과 믿음보다는 원망과 불신의 상처가 많았다면 시련의 시기에 그 한계가 드러나고 맙니다.
마음을 모아도 어려운 시기에 아픈 기억까지도 되살아나서 설상가상의 어려운 상황을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에 있어서 좋은 체험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좋은 체험을 가진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시련이 왔을 때 더 깊은 사랑과 믿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관계 뿐만이 아니라 신앙인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항상 좋은 시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련이 찾아오는 때가 있습니다. 이 때 하느님에 대한 깊은 체험이 있는 사람은 시련이 성숙의 시기이자 은총의 시기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깊지 않고 신앙생활이 건성이었던 사람은 시련의 파고에 그대로 휩쓸려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깊은 체험을 갖는다는 것, 이것은 참으로 은총이고 복입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닥쳐올 시련을 대비해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좋은 체험을 만들어 주시지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는데 깜짝 놀랄 일들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여 해처럼 빛나고 난데없이 1000여 년 전에 죽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제자들은 모두 놀라고 겁에 질렸고 베드로가 얼떨결에 초막 셋을 지을 테니 여기에 머무르자고 청합니다. 베드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빛나던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을 일으켜 세워 하산을 서두르신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 17,9)하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황홀한 광경을 체험으로 심어주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기 전에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를 하셨습니다. 예고된 수난에 강력히 반발했던 베드로는 졸지에 걸림돌이 되어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탄의 처지로 전락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이 지나면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가르쳐 주시는데 그것이 타볼산에서의 천상 체험인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제자들 역시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될 때 부활의 영광이 그들에게도 주어진다는 확신의 표징이 타볼산의 체험입니다.
좋은 체험을 통한 하느님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으면 고통의 십자가의 길에서 쓰러지기가 쉽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에 대한 좋은 체험들을 쌓을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알기 위해 배우고 수련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굳센 믿음과 노력은 어느 날 나에게 깊은 신체험의 은총을 입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세상이 달라 보이는 타볼산의 은총이 여러분에게도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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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찬근 루카 신부
진정한 변신
우리는 사순절의 가운데 와 있습니다.
사순절 첫날 재의 수요일에 우리는 머리에 재를 얹었습니다. 재를 얹은 이유는 언젠가 재가 되어버리는 허무한 인생을 경고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사순절에는 그냥 그렇게 살아가던 일상을 멈추고 광야에 나가 인생의 진실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얼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셨답니다. 우리들의 얼굴은 어떻습니까? 빛이 납니까?
하느님 자녀의 얼굴입니까 영원을 사는 사람들의 얼굴 맞습니까? 나이가 들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데 지금 얼굴로 괜찮겠습니까?
현대 사회는 이미지 시대랍니다. 약간의 성형을 하고, 머리 스타일을 바꾸고, 안경을 바꾸고, 옷차림을 바꾸면 일도 잘되고, 스타도 되고, 대통령도 넘보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변신이 아니고 눈속임에 불과합니다.
얼굴이나 외모에 대해 이런 생각은 어떨까요? 못생긴 얼굴을 만드신 분은 하느님이시고 그 못생긴 것이 내 탓이 아니니 부끄러워하거나 자신 없어 할 일이 아니며, 잘 생긴 얼굴을 만드신 분도 하느님이시고 그것 또한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니 자랑하거나 남을 무시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므로 타고난 외모보다는 사람의 내면이 드러나는 눈빛과 표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왜 그렇게 성형외과가 많아진 것입니까? 성형된 자기와 돈 그리고 명예를 빼면 도대체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정한 자기는 어디 갔습니까?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어떤 스님을 만나 함께 술을 잔뜩 마시게 되었답니다. 그 사람이 술에 취해 곯아떨어지자 짓궂은 스님은 그 사람의 머리를 홀랑 깎아버리고 가버렸답니다.
한참 뒤 술에서 깨어난 그 사람이 시원해진 자기 머리를 만지며 하는 말,
“어? 중은 여기 있는데 나는 어디 갔지”
예수님은 오늘 어떤 높은 산에서 진정한 변신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빛을 내는 엄청난 변신 말입니다. 그 변신은 외모의 일시적 변신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달리하는 변신입니다.
예수님은 그로써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도 늘 그런 ‘존재적 변신’을 추구해야 합니다.
좀 더 선하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내면의 본성을 찾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늘 겉 꾸며진 모습으로 익명 속에 안주하는 삶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우리지만 우리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의 빛나는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변신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나약하고 안일한 나를 죽여 나가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쉬운 길은 우리를 나약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항상, 힘을 길러주는 힘든 길을 택해야 합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고찬근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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