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뿌리를 찾아서 2008.11.13.목
본관별 종류-김씨(17)
▲ 용안김씨(龍安金氏)
시조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1567-1596)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큰 공을 세워 익호장군(翼虎將軍)에 오른 인물이다. 용안김씨는 원래 광산김씨에서 갈라진 지파다.
용안은 전북 익산시 용안면의 지명이다. 원래 함열현이었으나 고려 충숙왕 때 용안현으로 고쳤다. 1914년 익산군 용안면이 되었다.
용안김씨족보(무오보.戌午譜)에 의하면 시조 김덕령은 광산김씨 분관조(分貫祖) 김흥광(金興光)의 31세손이다.
김덕령은 광주시 충효동 성안마을에서 광산김씨 습독공 김붕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충용군(忠勇軍)이란 군호(軍號)까지 받았다. 그러나 간신의 무고로 옥사했다. 그의 부인 이씨도 벼랑에서 투신하여 자결했다. 홀로 남은 아들 김광옥(金光沃)은 전북 익산군 용안면에 피신, 본관을 용안으로 하고 신분을 감추고 살았다.
그 뒤 외숙인 이인경(李寅卿)의 임지인 평안남도 숙천군 근처 안주군 운곡면 쇠꼴이란 곳에 정착한다. 이곳이 그의 제2의 고향이고 후손들의 영원한 고향이 되었다.
김덕령이 용안김씨의 시조라는 사실은 신라김씨 대종사(大宗史)와 양주김씨(陽州金氏)의 족보에 의해 밝혀졌다. 그 이전에는 김덕령의 후손임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용안김씨는 해방 당시까지 평안남도 안주군 운곡면 일대에 15대까지 번창하며 살았다. 그러나 남북 분단으로 인해 소수의 후손들이 월남하여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실정이다.
용안김씨는 조선시대에 김익수(金益秀,1788.戊申生).순조16년(1816), 김응간(金應簡,1792.壬子生).철종12년(1861) 등 2명의 사마시 과거 급제자가 있다. 용안김씨는 1985년에는 50가구 244명, 2000년에는 159가구 500명이 있다.
▲ 우봉김씨(牛峰金氏)
시조는 김알지 이다. 신라 경순왕의 셋째 아들인 김명종의 아들 김욱 을 중시조로 한다. 김욱 은 고려 성종 때 시어사로 공을 세워 수지의후에 봉해지고 다시 우음(우봉)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우봉으로 하였다. 김욱 의 5세손인 김원길이 고려 원종 때 도위로 공을 세워 우봉군에 봉해졌으므로 본관을 우봉으로 했다는 기록도 있다.
김항일은 고려의 문하시중, 김관의는 좌정승, 김질 은 대제학을 지냈다. 김서덕, 김우서는 조선의 판서, 김지남. 김경문은 중추부지사를 지냈다.
과거 급제자는 김세익(金世益, 1876 丙子生) : 문과(文科) 고종28년(1891) 증광시 병과(丙科), 김탁(金鐸, 1876 丙子生) : 문과(文科) 세종14년(1432)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김택남(金澤南, 1659 己亥生) : 무과(武科) 숙종15년(1689) 증광시 병과(丙科), 김시련(金時鍊, 1850 庚戌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22년(1885) 식년시 삼등(三等), 김정회(金鼎會, 1793 癸丑生) : 사마시(司馬試) 순조34년(1834) 식년시 삼등(三等), 김학례(金學禮, 1802 壬戌生) : 사마시(司馬試) 순조19년(1819) 식년시 일등(一等), 김백련(金百鍊, 1844 甲辰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4년(1867) 식년시 삼등(三等), 김경문(金慶門, 1673 癸丑生) : 역과(譯科) 숙종16년(1690) 식년시, 김찬문(金纘門, 1691 辛未生) : 역과(譯科) 숙종36년(1710) 증광시, 김완서(金完瑞, 1708 戊子生) : 역과(譯科) 영조1년(1725) 증광시 등 모두 120명이다. 문과 2명, 무과 1명, 사마시 4명, 역과 92명, 의과 2명, 음양과 3명, 율과 1명, 주학 15명이다.
본관 우봉(牛峰)은 황해북도 금천군의 옛 지명이다. 2000년에 총 915가구 2,980명이 있다.
▲ 울진김씨(蔚珍金氏)
시조 김순건(金順乾,1518~1578)은 신라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인 김숙흥(金叔興)의 6세손 김덕재(金德載, 경주김씨 병판공파)의 6세손으로 자는 유중(裕中)이다. 후손들이 본관을 울진으로 했다. 시조 묘소는 함주군 주지면 운양동에 있다.
본관 울진(蔚珍)은 경상북도의 지명이다. 지금의 울진군은 옛 울진현(蔚珍縣)과 옛 평해군(平海群)이 합해 이루어진 지역이다. 2000년에 총 4가구 11명이 있다.
▲ 웅천김씨(熊川金氏)
시조 김중재(金重材)는 관직이 수의부위에 올랐다. 그의 선조가 신라 말에 견훤이 고구려를 침범하자 이를 물리치고 웅신(웅천)현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문헌이 없어져서 이름은 전하지 않고 있다. 묘소는 개성에 있다.
과거 급제자는 김취행(金就行, 1739 己未生) : 문과(文科) 정조4년(1780) 식년시 병과(丙科), 김윤기(金允基, 1773 癸巳生) : 사마시(司馬試) 순조1년(1801) 식년시 삼등(三等), 김익기(金益基, 1773 癸巳生) : 사마시(司馬試) 순조5년(1805) 증광시 삼등(三等), 김홍해(金弘海, 1718 戊戌生) : 사마시(司馬試) 영조29년(1753) 식년시 삼등(三等), 김홍한(金弘漢, 1726 丙午生) : 사마시(司馬試) 영조29년(1753) 식년시 삼등(三等) 등 모두 5명이다. 문과 1명, 사마시 4명이다.
본관 웅천(熊川)은 경상남도 창원시·진해시 일부에 속한 옛 지명이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창원군에 편입되었다. 2000년에 총 119가구 347명이 있다.
▲ 월성김씨(月城金氏)
시조 김광우(金光佑)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의 15세손이다. 그는 조선 세종 때 덕천군수로 있으면서 조정에 직간하다가 성천으로 유배되어 살았는데 후손들이 고향인 월성을 본관으로 하였다. 경순왕의 셋째 아들 김명종의 17세손 김이진을 1세 조상으로 하는 월성김씨도 있다.
본관 월성(月城)은 경상북도 경주의 옛 지명이다. 1989년에는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55년에는 경주군과 통합하여 시로 승격했다. 2000년에 총 4,840가구 15,753명이 있다.
▲ 은율김씨(殷栗金氏)
시조 김상동(金尙銅)은 조선 명종 때 은율로 유배되었다가 사면되어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정주로 표류되어 정주에 정착하여 살았으며 본관을 은율로 하였다. 묘소는 평북 정주군 입표면 삼대산에 있다.
과거 급제자는 김명로(金命老, 1581 辛巳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1명이다. 무과 1명이다. 2000년에 총 62가구 315명이 있다.
▲ 은진김씨(恩津金氏)
시조 김전개(자는 백윤)의 아버지는 김사원이다. 김전개는 1553년(조선 명종 8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벼슬이 판관에 이르렀다. 1930년 평북 박천군 용계면 고창동에 36가구가 살고 있었다.
과거 급제자는 김창내(1854 甲寅生) : 문과(文科) 고종7년(1870) 식년시 병과(丙科) 1명이다. 문과 1명이다.
본관 은진(恩津)은 충청남도 논산시에 속해 있는 지명이다. 2000년에 총 69가구 230명이 있다.
▲ 음죽김씨(陰竹金氏)
시조 김도(金道)는 김씨분종보(金氏分宗譜)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사적(事蹟)이 없기 때문에 확실한 세계(世系)를 고증할 수 없다. 김도 는 무평사(武評事)를 지냈으며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음죽이라 하였다.
과거 급제자는 김진원(金振瑗, 1604 甲辰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윤(金潤, 1604 甲辰生)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별시 병과(丙科), 김계화(金戒化, 1606 丙午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진표(金晉標, 1657 丁酉生) : 무과(武科) 숙종10년(1684) 정시 병과(丙科), 김용중(金龍重, 1829 己丑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11년(1874) 증광시 삼등(三等) 등 모두 5명이다. 무과 4명, 사마시 1명이다.
본관 음죽(陰竹)은 충청북도 음성군과 경기도 이천시의 일부 지역에 있던 곳이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음죽군으로 승격이 되었으나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군을 폐지했다. 동면의 노평리 일부, 하율면의 총곡리 일부, 상율면의 팔성리 일부 및 석교촌 일부는 충청북도 음성군에 속했고, 나머지는 경기도 이천시에 병합되었다. 2000년에 총 8가구 28명이 있다.
▲ 의령김씨(宜寧金氏)
시조 김천극(金天極)은 신라 김알지의 후손으로 전하고 있으나 사적(事蹟)이 없기 때문에 확실한 세계(世系)는 상고할 수 없다. 그는 좌윤(左尹)으로 의령군(宜寧君)에 봉해졌다 하며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의령으로 했다.
과거 급제자는 김한종(金漢鍾, 1808 戊辰生) : 사마시(司馬試) 철종10년(1859) 증광시 이등(二等) 1명이다. 사마시 1명이다.
본관 의령(宜寧)은 경상남도 중앙부의 낙동강 하류 서안에 위치한 지명이다. 1896년 경상남도 의령군이 되었으며 1979년에 의령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0년에 총 425가구 1,342명이 있다.
▲ 의주김씨(義州金氏)
시조 김성갑은 구산군 으로만 되어 있으며 그에 대한 생존연대와 후손 등의 기록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1930년 경북 안동군 임하면 천전동에 10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2000년에 총 154가구 482명이 있다.
▲ 의흥김씨(義興金氏)
시조 김성갑(金成甲)은 신라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 김은열(金殷說)의 15세손으로 그는 귀성(龜城, 의흥의 옛 이름)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의흥으로 하였다.
과거 급제자는 김자이(金自貽) : 문과(文科) 태종14년(1414) 식년시 을과(乙科), 김종신(金從信, 1616 丙辰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영준(金英俊, 1609 己酉生) : 무과(武科) 인조14년(1636) 별시 병과(丙科), 김언희(金彦希, 1598 戊戌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등 모두 4명이다. 문과 1명, 무과 3명이다.
본관 의흥(義興)은 경상북도 군위군에 속해 있는 지명이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의흥군이 폐지되었고 의흥지역이 군위군에 편입되면서 의흥면이 되었다. 2000년에 총 58가구 190명이 있다.
( 정복규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