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한테 전화다
아들한테 전화다.
‘엄마 뭐하셔요.’
‘으응, 네 전화 받고 있잖어.’
‘그런 거 말고 뭐하셨냐 고요.’
나도 아들이 묻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다. 여름철엔 시원할 때 밭에 나가고, 더울 땐 집안에서 쉬라고 한다. 겨울철이면 미끄러운 길 넘어지면 고생하니까 조심하고,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하라는 신신당부의 말이다. 이틀이 멀다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저도 싫겠지만, 잔소리라고 여기지 말라는 것은 진심인 것 같다.
몇 해 전 겨울이었다. 청주에서 대전으로 출퇴근하던 아들이 퇴근하면서 상주까지 온다는 것이다.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졌단다. 나는 하룻밤 자고 가리라고 생각했다. 저녁을 먹은 후 다음날 출근해야 하니 처자식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단다. 날씨도 춥고 길도 미끄러운데 이왕 왔으니 하룻밤 자고 가면 좋으련만, 어미의 섭섭한 마음은 아량 곳 없이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나서 나를 힘껏 안아준다. 등판 때기가 넓은 아들이 껴안아 주면 푸근했다. 엄마가 해준 저녁밥을 오랜만에 맛있게 먹었단다. 그리고 부모님 건강하시고 행복하게 지내시라며 남남처럼 깜깜한 밤길에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켜고 대문을 빠져나갔다.
참으로 살가운 자식이었다. 과거는 추억 속에 있는 망상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서른 해가 지나간 그 시절, 대문 앞에서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어린 아들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힘겨운 암투병생활을 했다. 아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6~7년간을, 1년 반주기로 재발이 되었다. 세 번째로 뼈로 전이가 되어서 서울 원자력 병원에 다시 입원하기 위해 떠나던 날 아침이었다. 아들은 책가방을 메고 나에게 각 봉투를 내밀었다. 서울 가서 읽어보라며 대문을 박차고 학교에 가던 뒷모습을 보고 왈칵 눈물을 쏟아내었다.
그 안에 돈이 들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하였다. 병원에 입원하니까 짬짬이 시간 나면 책이라도 읽으라고 시집을 넣어줬다고 생각했었다. 시를 좋아하던 아들이었다. 병원에 입원하고 여러 가지 검사와 항암제 주사를 맞고 지쳐서 봉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문득 생각이 나서 가방에서 꺼내 뜯어 보았다. 편지와 빳빳한 만 원권 80만 원이 들어 있었다. 엄마가 없는 세상을 저 혼자서 어찌 살아가겠느냐고 했다. 병든 엄마라도 내 곁에 있다면 더없는 행복이라고,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매일 하느님께 간절하게 기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명절 때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 받은 세뱃돈이었다. 이모, 삼촌, 지인들이 아들 손에 쥐여줬던 용돈이었다. 한 푼 한 푼 아껴서 저축하던 그 돈을 몽땅 찾아서 엄마 병원비에 보태라고 준 것이다. 편지와 돈을 가슴에 품고 병실이 떠나가도록 울고 또 울고 말았다. 마침 담당 의사 회진시간이었다. 목청이 터지도록 우는 내 소리를 듣고는 힘이 넘쳐나는 것을 보니 그 힘으로 살아남으면 되겠다고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눈에서 불이 번쩍 났다. 아! 힘이 생기면 병을 이길 수 있겠구나. 토하더라도 음식을 먹어야지. 걸을 수 없다면 지팡이라도 짚고 다녀야지. 다짐하였다.
병원에서는 내가 퇴원하기 전 앞으로의 치료는 어렵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세 번째 뼈로 전이가 된것이었다.
두 번째 재발이 되었을 때 나는 시장을 다녀오다가 언덕길에서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눕지 못할 정도로 가슴이 뜨끔뜨끔하며 화끈화끈 열까지 났다. 가까운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가슴에 금이 갔다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 누워있기를 이주가 지났는데도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서울 원자력 병원에 가서 진찰한 결과 뼈로 전이가 된 상태였다. 넘어졌다고 금방 재발이 왔겠는가 싶었다. 암이라는 몹쓸 병이 나를 야금야금 죽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었으리라.
어느 날 집에 신부님이 방문하셨다. 아들이 성당에서 미사 때 복사를 하고 있었다. 성당과 우리 집은 가까이 있어 새벽 복사를 아들이 자청해서 하게 되었는데, 신부님이 엄마가 암 환자라는 것을 아시고 오셨다. 기도도 해주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신부님이 이런 말 한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며, 몸속에 있는 암 덩어리를 친구라고 여기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어차피 죽을 때까지 동행해야 할 건데, 친구로서 받아들이고 편안히 지내라는 것이다. 신부님 어머니도 나하고 똑같은 유방암을 앓으셨다며, 가족들이 수의도 마련해 놓았었는데, 그 후 10년을 더 사셨다고 하였다. 그러니 친구처럼 토닥거리며 살다 보면 누가 아느냐고, 어린 아들 결혼시킬 때까지 살 수 있지 않겠느냐며 큰 위로를 해주었다.
세 번째 뼈로 전이가 되었다. 항암 재투약을 마치고 퇴원을 했다.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서 그랬는지 퇴원해 집에 오니 주변의 지인들은 내 아들을 자기들 자식처럼 키워주겠다고 하며, 내가 죽음을 잘 준비하도록 안심시켜 주었다. 그런데 중학생이던 아들이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아무리 엄마 친구들이 할머니가, 나를 돌봐주고 키워준다고 한들 내 엄마만 하겠느냐며 목놓아 우는 게 아니던가. 퇴원해 집에 와서는 곧 죽을 사람처럼 누워만 있는 엄마 모습을 보며, 그 어린 가슴이 얼마나 타들어 갔을까. 자식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였던 못난 엄마였다.
죽고 사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 신앙인으로서 내 생명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겨 드린다고 기도하면서도, 마음만 간절할 뿐 몸은 따라주질 않았다. 음식을 먹을 수도 일어날 수도 못 할 만큼 너무나 나약해져 있었다.
아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녁 밥상 앞에 나를 앉혀놓았다. 할머니가 끓여준 죽이나 누룽지, 아니면 쌀밥을 한 수저 떠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목구멍에서 넘어가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삼켜야만 했다. 그 모습은 내가 아들이 젖을 떼고 밥을 먹기 시작했을 때, 아가에게 한 번이라도 더 밥을 먹여보려고 했던 행동과 똑같았다. 눈물 반웃음 반이 뒤섞인 밥상 앞에서 넘어가지 않는 음식을 나 자신을 위해, 아들을 위해 삼켜야만 했다.
엄마라는 이름은 강했나 보다. 한 여자였더라면 병을 이겨내지 못하였으리라. 누군가를 위해 베푼 가장 귀한 선물이 살아갈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줬다면,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진실한 한마디의 말, 감사하고 기뻐서 감격하는 행복한 감정들이 파도치게 하는 삶의 의미가, 내가 꼭 살아남으리라는 사랑이었으리라. 지금의 삶은 덤으로 살아가는 인생이다. 희망을 심어주던 아들은 어느 사이 쉰을 바라본다. ‘엄마 뭐하셔요.’ 물어오는 세심하고 사려 깊은 목소리. 이젠 아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어미가 되고 싶은데 몸은 노쇠해가고 있다. ‘응 네 전화 받고 있잖어.’ 어젯밤 아들이 사는 고장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고 한다. 속리산 백두대간만 넘으면 엄마가 사는 산촌에도 눈이 많이 내렸으리라고 여겼던지, 엄마 뭐 하고 있느냐고 묻는 아들 목소리. 그래, 조심해야지, 조심하며 지낼게, 고맙다는 말 밖에는.
첫댓글 ....아....깊은 물 님~ 그런 사연이 ...
결국 여자의 힘이 아니라 엄마의 힘으로 이겨내셨다는 말이네요.
기적을 이루셨네요...너무 착한 아들...그런 아들을 두신 님이 부럽다고 하면
사치일까요...;; 깊은 물 님 많이 힘드셨고 힘드시지만
그런 사랑스런 아들을 두셨다는 것에 위로를 받으셔요..
안 착한 자녀들 속만 썩이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요즘 안 그래도 모니카 성녀님에 대해 자주 묵상하고 있답니다^^
(은총의 사순절 되시기 바랍니다)
시인님.
착한 아들이라서 고맙고 감사하지요
사춘기시절에 엄마의 병고로 맘고생이 많았을터인데. 잘 커준 거는 하느님의 은총이었어요. 그리고
나를 위해 기도해주던 많은 교우들 덕분이지요
시인님
저도 모니카성녀를 존경하지요
그의 아들 아우구스티노~~~
시인님. 산촌의 사방은 빗소리에 봄이 온듯합니다
건강하시고. 좋은시 많이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깊은 물 이 좋은 계절에 깊은 물 님도 영성 깊은 수필 많이 쓰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