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일 : 2024년 5월 11일
21번째 성지순례는 1.김제순교성지 → 2.초남이성지 → 3.전주숲정이성지 → 4.전주 옥터 → 5.치명자산성지 → 6.서천교.초록바위 → 7.전동성당 이렇게 다녀 왔습니다.
" 18세의 나이에 부친 조화서 성인과 함께 한 순교의 길 "
서천교 성지
[전주교구]
이곳은 성 조윤호 요셉(趙~, 1848-1866년)이 1866년 12월 23일 치명한 곳이다. 18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한 조윤호는 충청도 신창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나 돈독한 신앙 생활을 어려서부터 익혔다. 1864년 부친을 따라 전주 근처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한 후 이 루치아와 결혼한 그는 1866년 12월 5일 부친 조화서 베드로(趙~, 1815-1866년), 정원지 베드로(鄭~, 1846-1866년), 이명서 베드로(李~, 1821-1866년) 등과 함께 성지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전주 감영에서 부친과 여러 차례에 걸친 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부친인 조화서는 일찍이 최양업 신부의 복사로 전교 활동을 도왔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로 부친 조 안드레아(성 조윤호의 조부)가 순교하자 충청도 신창으로 이주해 한 막달레나와 결혼, 아들 윤호를 두었고 이 때 최양업 신부의 복사로 최 신부의 전교와 성무 활동을 보필했고 그 후 전주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주했다.
마침내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체포된 이들 부자는 혹독한 고문과 배교의 강요 속에서도 서로 격려하며 오직 진리만을 말하기로 다짐했다. 옥에서 아버지는 아들 윤호에게 "네 마음이 변할까 염려된다. 관장 앞에서 진리대로 말하여라." 하고 격려했고, 이에 아들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버님께서도 조심하십시오."라며 죽음의 두려움보다는 배교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 것을 서로 독려했던 것이다.
특히 아버지 조화서는 후손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하는 체하며 자신을 회유하려는 관장의 유혹에 여러 번 넘어갈 뻔했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마침내 조화서는 모든 유혹과 형벌을 이겨내고 12월 13일, 전주 전동 성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정이에서 성지동과 대성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리고 아들 조윤호 역시 부자를 한날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지 않던 당시의 관례에 의해 부친이 참수된 지 열흘이 지난 12월 23일 인근의 서천교 밑에서 순교했다.
조선 시대에는 처형에 있어서도 몇 가지의 원칙이 있었다. 참수를 하는 죄인에게는 하루 전에 쌀밥과 고기반찬을 주며 이승에서의 마지막 잔치상을 차려주기도 하고 참수 후 사흘 간은 누구도 그 시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법도 있었다. 또 다른 당시의 관례는 같은 날 부자를 처형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정해져 있어 아무리 대역죄인도 부자의 관계에 있다면 몇 일간에 여유를 두고 처형을 하였다. 성 조윤호 요셉도 그런 경우이다.
조윤호 성인이 받아야 할 처형방법은 참으로 참혹한 것이었다. 다름아닌 서천교 밑에서 빌어먹던 거지들에게 조윤호 요셉의 목을 감은 끈을 서로 조르게 한 것이다. 결국 거지들에게 죽임을 당한 그는 후에 아버지 조화서와 함께 시복 시성되는 영광을 얻었다. 당시 거지들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질질 끌고 다니며 거렁뱅이 짓을 하곤 했는데 이들의 시체가 하도 참혹해서 거지가 끌고 가면 누구든지 겁에 질려 밥을 주었다고 한다.
이렇듯 굳건한 믿음으로 순교의 길을 택한 이들 부자는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전주교구는 2006년 5월 서천교 인근 순교터에 조윤호 성인 순교 기념 모자이크 벽화를 설치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10월 31일)]
" 성 남종삼의 아들과 홍봉주의 아들이 수장되어 순교한 곳"
초록 바위 성지
[전주교구]
초록바위는 188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南鍾三, 1817-1866년)의 14세 된 아들 명희(明熙)와 순교자 홍봉주 토마스(洪鳳周, ?-1866년)의 아들이 수장된 곳이다.
이 두 가정은 온 가족을 처형하거나 노비로 삼고 가산을 몰수하는 혹형을 받았는데, 이 두 아들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당시의 관례대로 전주 감옥에 수감했다가 나이를 채워 전주천에 밀어 넣어 죽였다.
성 남종삼은 한국 교회사 안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올랐던 인물이다. 정약용의 학통을 이은 남인계의 농학자(農學者)이며 충주 부사를 지낸 부친 남상교(南尙敎)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22세 때인 1838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영해 현감(寧海縣監)을 지냈고 철종 때에 승지(承旨)가 되어 국왕을 보필했다. 고종 때에는 그의 학덕으로 말미암아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한 바 있다.
그는 러시아의 남침이 강화됨에 따라 야기된 국가적 위기에 직면해 당시 집권자인 흥선 대원군에게 프랑스 주교의 힘으로 프랑스, 영국 등과 조선이 동맹을 맺어 이를 제어하도록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당시 국내에서 전교 활동을 하던 베르뇌 주교, 다블뤼 부주교 등과 흥선 대원군의 회동을 주선키로 했으나 때마침 두 주교의 지방 사목 여행으로 공교롭게도 이들에게 연락이 되기까지 수개월이 소요되었다.
그 동안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대원군은 오히려 천주교 박해로 급변하게 되어 1866년,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억되는 병인박해를 벌이게 되었다.
결국 서울 인근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연행된 남종삼 성인은 홍봉주, 이선이, 성 최형 베드로, 성 정의배 마르코, 성 전장운 요한 및 성 베르뇌 주교, 성 다블뤼 부주교 등과 함께 문초를 당하고 그 해 3월 7일(음력 1월 21일) 홍봉주와 함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되었다.
이어서 남종삼의 부친 남상교 아우구스티노는 공주 진영으로, 장자인 남명희는 전주 진영으로 잡혀가 공주와 전주에서 각각 순교했고, 처 이조이(李召史) 필로메나와 막내아들 남규희 그리고 두 딸은 경상도 창녕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 창녕에서 노비 생활을 하던 이조이 역시 9년 후 옥리에게 목 졸려 치명하고, 당시 14세의 어린 나이에 붙잡혀 갔던 명희는 전주 감옥에 수감한 뒤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 1867년 가을 이곳 초록바위에서 전주천에 밀어 넣어 수장시킨 것이다.
바로 이 때 남종삼과 함께 러시아의 남침을 물리치는 방법은 프랑스, 영국과 조약을 맺는 길뿐임을 흥선 대원군에게 건의했던 홍봉주의 아들도 남명희와 함께 초록바위에서 순교하였다.
홍봉주 토마스는 충남 예산 출신으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홍낙민(洪樂民, 1751-1801년) 루카의 손자이며, 부친인 복자 홍재영(洪梓榮, 1780-1840년) 프로타시오 역시 기해박해로 순교한 바 있다. 모친 정조이(丁召史)는 초대 명도회장(明道會長)이며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맏형인 약현(若鉉)의 딸로 기해박해 때 남편과 함께 순교했다.
전주교구에서는 삼대와 사대에 걸친 두 소년 순교자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고자 2006년 5월 싸전다리 부근 전주천변 도로 옆에 순교 기념 모자이크 벽화를 설치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11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