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 갈대가 노래하는 곳
김정희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평생 야생동물을 연구해온 과학자 델리아 오언스가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 내놓은 첫 소설이다. 이 아름다운 소설을 읽으며 습지는 어떤 곳일까 상상해 본다. 습지 하면 늪이 먼저 떠오른다. 발걸음을 떼어놓으려 할수록 몸이 점점 더 가라앉아 버릴 것 같은. 아니면 땅 위에 물기가 가득해서 밟을 때마다 발이 물속에 빠질 것 같은. 습지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이런 습지에 외로운 소녀 카야가 산다. 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먼저 떠나고 이어서 형제들도 떠나고 마지막엔 아버지까지 모두 떠나버리고 혼자 남은 여섯 살 카야. 카야를 데려다가 학교에 보내려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가고 숨기를 반복한다. 홍합을 따고 물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이어가며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사람들은 습지에 사는 이 소녀를 손가락질하며 외면하지만, 마찬가지로 차별받던 흑인 점핑과 메이블 부부는 사람들 모르게 카야를 돌봐준다. 자연에서 만나는 생물들 또한 카야의 벗이 되어준다. 사람은 떠나도 자연은 늘 그 자리에 있다. 습지는 카야의 어머니가 되어주었다.
첫사랑 테이트는 카야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책도 가져다준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 가기 위해 도시로 떠난다. 그는 떠났지만 그에게 글을 배워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카야에게 책이라는 친구가 생겼다. 카야는 새의 깃털과 조개껍데기를 수집하며 자연과 하나가 된다. 습지 생물을 연구하고 책도 펴낸다. 그리고 시도 쓴다.
테이트가 떠난 자리에 체이스가 들어오지만, 이 사랑은 불행을 품고 있다. 이 불행이 습지의 풍경과 함께 이야기를 끌어간다.
작가는 빛나는 묘사로 습지에 대한 음습한 이미지를 바꿔 놓는다. 책장을 넘기며 반딧불이의 불빛을 보고,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이 소설은 자연에 대한 위대한 찬사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한다고 한다. 머릿속에서만 상상했던 소설 속 습지의 풍경을 화면에서 어떻게 담아냈을까 궁금하다. 아름다운 대자연의 모습이 화면 가득 펼쳐질 것 같아 기대가 된다.
내가 사는 안산에는 갈대 습지가 있다. 시화호의 수질 개선을 위해 조성한 인공습지다. 수많은 생물이 살고 있고, 온갖 철새들이 날아든다. 물속에 발을 담그고 서 있는 갈대숲 사이를 걸으며 바람을 따라 부르는 갈대의 노래를 듣는다.
갈대숲 사이에서 새 깃털을 모으는 어린 카야가 보인다. 저 멀리서 카야가 배를 타고 다가올 것만 같다.
라디오 같은 사람
화랑유원지 안에 새로 문을 연 안산산업역사 박물관 견학을 하러 갔다. 집 가까이에 이런 박물관이 있어 참 좋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박물관 앞에는 옛날 안양에서 반월 공단까지 운행하던 33번 버스가 그때 그 모습으로 서 있고 소금을 나르던 열차도 소금가마를 싣고 출발 준비를 하고 있다.
전시실에 들어서니 안산의 역사부터 반월 공단에서 생산했던 상품, 기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옛날 거리를 누비던 삼륜차, 포니2 자동차 등도 볼 수 있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빨간 옷으로 한껏 치장하고 서 있는 신진 퍼블리카. 너도나도 그 앞에서 한껏 포즈를 잡는다. 반월 공단에는 부품공장이 많다. 그래서 반월 공단을 한 바퀴 돌면 자동차 한 대가 완성된다고 한다.
옛날에 쓰던 라디오, TV, 전화기, 학습 전과, 백과사전, 타자기, 솜틀기, 보온병, 삼보컴퓨터까지 오래된 물건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어렸을 때 보고 쓰던 물건들이 벌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을 정도로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세월이 화살 같다는 표현이 실감이 난다.
우리 집에는 손바닥만 한 몸에 제 몸의 두세 배나 되는 건전지를 업고 있던 라디오가 있었다. 그 라디오를 어디든 들고 다니면서 들었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같은 심야방송도 열심히 들었다. TV가 나오고 컬러TV로 바뀌면서 라디오는 TV에 밀려 생명을 다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다양한 채널로 방송되고 있다. 온종일 클래식만 틀어주는 채널도 있다.
TV는 눈을 화면에 고정하고 제 앞에 꼼짝 못 하게 붙들어두지만, 라디오는 저만 바라보라고 하지 않는다. 귀만 열어두면 눈은 어디를 보든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움직이면서 들을 수도 있어 자유롭다.
사람 사이에서도 늘 자기만 바라보라고 하는 사람은 피곤하다. 언제 어디서나 자기가 주인공이 되려고 하는 사람, 다른 사람이 주인공인 자리에 가서도 자기를 주인공으로 만들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영화 「가스등」에서처럼 자기에게 상대방을 묶어놓는다. 자신에게만 관심을 둘 것을 요구하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다른 사람과 접촉도 못 하게 한다. 어디에서든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옛날에 마을에 TV가 한 대뿐이던 때가 있었다. 그 TV는 네 다리로 온갖 폼을 잡고 서서 온 동네 사람을 다 모아놓고 자기만 바라보라고 했다.
시대가 바뀌어 집집마다 거실 한 가운데 TV가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요즘은 거실 한쪽 벽면 전체가 TV 화면인 집도 있다. TV에 한 번 눈길을 빼앗기면 그 후 시간은 모조리 그놈의 것이다. 하릴없이 시간을 빼앗긴다. 내 의지대로 TV 스위치를 딱 끄고 일어나기란 정말 힘들다. 주말에는 거의 하루종일 TV를 켜놓는다. 심지어 광고까지도 열심히 보게 만든다. 아기들은 혼자서 놀다가도 광고가 나오면 놀이를 멈추고 TV에 집중한다. 광고를 보다 보면 야식을 시켜 먹게 된다. 아니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게 만든다. 무언가에 홀린 듯 밤에 그렇게 야식을 먹고 자는 날이면 아침에 일어날 때 속이 엄청나게 쓰리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가끔
‘저는 TV를 보지 않아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책을 많이 읽고 자기 분야에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다. 우리 집도 어느 날 TV를 없앴다. 그 이후로 책 읽고 생각할 시간이 많아졌다. 산책할 시간도 생겼다. 마음이 훨씬 평화로워졌다.
요즘은 TV를 꼭 한자리에 앉아서만 보지 않아도 된다. 스마트폰이 그 기능을 제공한다. 전철을 타면 많은 사람이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으로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라디오는 자기만 바라보라고 하지 않는다. 다른 무언가를 하면서 귀만 열어놓으면 된다. 조용한 음악 방송은 작업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상대방을 자신에게 붙들어놓지 않고 자유롭게 놓아둔다. 열심히 들어도 되고 그냥 흘려들어도 된다. TV가 나오면서 특히 컬러 방송을 하면서 라디오의 시대는 갔다고들 했지만, 라디오는 오히려 채널을 늘리며 우리 곁에 조용한 친구로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런 라디오처럼 상대를 자유롭게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사람, 그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사람, 조용한 클래식 FM처럼 귓가에 조용히 흘러드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좋다. 라디오 같은 그 사람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