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의 파괴 - 나토 스타일 : 유고 전쟁 16주년(3)
1999년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의 중요한 특징은 공장과 설비에 대한 정밀 타격이다. 내가 전쟁 직후 유고슬라비아에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파견되어 확인한 것은, 당시 폭격이 매우 조직적이고 철저했다는 것이다. 나토가 파괴한 곳 중 우리가 방문한 곳은 모두 군사적으로 가치가 없는 곳이었다. 사실, 일반적 규범은 국영이나 노동자들이 협동하여 운영하는 공장과 같이 많은 사람을 부양하는 곳은 폭격에서 제외된다. 여기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목적은 많은 인구를 빈곤에 몰아넣어 정부가 서방의 의도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발칸에서 가장 크고 상징적인 공업단지는 자스타바(Zastava, 세르비아의 유일한 자동차회사)로 유고슬라비아 안에서 움직이는 자동차의 95%를 생산하고 있었다. 크라구예바치(Kragjevac) 도시 중심에 위치한 이 공업단지는 기계와 설비도 생산하고 있었다.
파괴된 자스타바의 자동차 도장 공장ⓒ그레고리 일리치
나토의 폭격에 ‘인간방패’로 맞섰던 노동자들
자스타바의 노동자들은 나토가 이곳을 타격목표에서 제외하도록 만드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공장을 구하기 위해서, 그들은 공장을 둘러싸는 인간방패(human shield)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나토가 전쟁을 시작하고 3일 뒤, 자스타바의 노동자와 관리자들은 해외의 노동조합들과 클린턴 미국 대통령, 블레어 영국 총리, 울브라이트 미 국무장관과 여러 서방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들, 자스타바의 노동자들과 자유를 사랑하는 크라구예바치 시민들은, 살아있는 방패를 만들었다” “교대시간이 되어도 경보음이 울려도 사스바타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일터를 떠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가족을 먹여 살리고 그들에게 나은 미래를 줄 그들의 몸뚱아리를 그곳에 남겼다” 편지는 나토 지도자들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이 공단에 대한 공격은 수천 명의 죽음은 물론 그들의 가족에 대한 지대한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끼칠 것이다”
제3세계 노동조합들의 지지 편지가 쏟아졌지만 막상 서방세계는 침묵했다. 날이 지날수록 나토가 조직적으로 공장과 일터를 파괴하고 있다는 증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토가 인간의 생명을 경시한다는 것이 증명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현명하게도, 자스타바의 노동자들은 공장내부에 인간방패를 만드는 대신 공장 주변을 원형으로 둘러싸기로 했다. 공장 내부에서는 여전히 일이 진행되었다.
4월 9일 새벽 1시가 지나자마자, 나토는 노동자들의 편지에 답했다. 크라구예바치를 향해 크루즈 미사일이 일제히 날아든 것이다. 자스타바의 수출 책임자인 드라간 스탄코비치(Dragan Stankovich)는 그의 아파트에서 지진과 같은 첫 폭발을 느꼈다. 하늘이 붉게 변하면서 그는 공장이 폭격을 당하지 않기를 기원했다. 그의 아파트는 자스타바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급히 공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첫 공격으로부터 십분 뒤, 다음의 미사일 공격이 가해졌다.
스탄코비치는 우리에게 말했다. “나는 매우 가까이 있었지만 폭탄을 보진 못했어요. 그냥 한떼의 버섯구름만 보였어요. 폭발장면과 큰 불만 볼 수 있고 아무것도 들리지는 않아요. 강한 빛과 열기뿐이었어요. 핵폭탄의 버섯구름을 떠올렸지요” 발전소, 조립, 도장, 단조 설비가 모두 파괴됐다. 124명의 노동자가 부상을 입었지만 기적적으로 한 명도 죽지 않았다. 구급차와 소방차가 급히 현장에 도착했고 부상자들을 구조했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여성은 지역 병원에서 만난 기자에게 도전적으로 선언했다. “나는 클린턴에게 말할 수 있어요. 우리는 새 공장을 지을 것입니다. 그가 모든 것을 파괴할 수는 없어요.”
3일이 지나고, 새벽 2시 45분에 또 다른 미사일 공격이 있었고, 10분 후에 또 한번의 공격이 있었다. 당시 공장에는 적은 인원만 배치돼 있었고 16명만이 부상당했다. 하지만 두 번의 공격으로 자스타바에서 가장 큰 6개의 공장이 잿더미가 됐다. 놀랍게도 개인용 소총을 생산하는 공장은 전혀 폭격을 받지 않았다. 나토의 목적이 유고슬라비아의 산업 파괴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사실이다. 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공장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울었다. 그것은 살던 집이 불타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스탄코비치에 의하면 크라구예바치 공업단지는 2만 8천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으며, 자스타바와 연계된 유고슬라비아의 다른 공장에서는 8천 명을 고용하고 있었다. 이 공장들은 대부분 폭격을 당했다. 스탄코비치는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재난 중에서도 인도주의적 재난이 가장 큰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자스타바에 부품을 공급하던 공장의 노동자와 그 가족까지 포함하면 20만 명이 생계대책 없이 남겨진 것이다.
자스타바의 책임자 중 한명인 미로슬라브 조르제비치(Miroslav Djordjevich)는 애처롭게 말했다. “노동자들에게 공장은 생명입니다. 우리의 모든 꿈은 4월 9일과 12일 단지 15분간의 폭격으로 모든 것이 날아가 버렸어요.” 다른 사람을 고의로 죽이거나 다른 사람의 것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하지만 몇 달 동안 자신이 행한 학살을 흡족하게 쳐다보는 서방 지도자들의 얘기를 들어온 나는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마치 심장을 공격하듯이 산업시설을 폭격한 나토
발전소는 자스타바에 전기와 압축공기, 뜨거운 물과 증기를 공급하고 있었다. 발전소의 파괴가 끼친 영향은 그것만이 아니다. 발전소는 도시에 열과 에너지를 공급하는 역할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탄코비치는 “학교와 병원, 약 1만5천 개의 집이 사스타바의 발전소에 의존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발전소 위 20~30미터 지점에서 폭발한 미사일은 건물의 지붕을 찢고 변압기, 터보 압축기, 제어실을 파괴했다. “박살났다” 한 노동자는 우리 일행에게 말했다. “모든 것이 박살났다. 수리하기 위해서는 전부 들어내야 한다.”
발전소를 복구하는 것은 긴급한 일이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노동자들은 이미 파편들을 치우고 두 개의 터보 압축기를 고쳐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변압기가 파괴되는 바람에 절연에 쓰였던 2톤가량의 맹독성 화학 물질이 대지와 주변의 강으로 흘러들어갔다.
단조공장은 4번의 폭격 끝에 폐허가 됐다. 가동 중일 때는 자동차, 농기계, 철로 등에 쓰이는 부품들을 만들던 곳이다. 지붕은 완전히 날아갔다. 산더미 같은 파편들과 부서진 기계, 뒤섞인 철제 등이 우리를 맞았다. 철제 조각들이 곳곳에 매달려 있었다. 3층으로 이뤄진 사무공간도 직격을 당했다. 위층에 남은 것들은 위태롭게 매달려있었다.
인근에 있는 좀 더 오래된 단조공장도 황량한 모습이었다. 공장의 두꺼운 콘트리트 벽에는 폭격으로 인한 구멍이 나 있었고 지붕은 대부분 사라졌다. 미사일 공격으로 콘트리트 벽이 무너지면서 열관리 모듈을 덮쳤고 그 파편에 맞아 몇몇 노동자들이 다쳤다. 조르제비치는 “나토는 밑그림도, 좌표도 갖고 있어요. 그들은 우릴 조이스틱처럼 가지고 놀았던 겁니다”고 강조했다.
조르제비치에게 도장공장은 자스타바의 자랑이었다. 현대적인 로봇공정 라인을 갖춘 이 곳의 파괴는 다른 곳보다 심각했다. 매우 충격적이었다. 4개의 미사일이 공장의 지붕을 날려버렸고 잔해는 카펫처럼 깔려있었다. 조르제비치는 이곳의 발전된 기술을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그들은 이 곳을 직격했어요. 마치 사람의 경우에 심장을 공격하듯이.”
자동차 조립 라인의 피해도 역시 심각했다. 잔해를 치우는 것만해도 위험할 정도였다. 지붕이 무너졌을 때 이 곳에서 일하던 45명의 노동자가 다쳤다. 조르제비치는 “이 곳이 작동될 때는 정말 아름다웠어요. 그런데 지금 보세요. 쳐다보기가 슬프죠.”
오후 9시가 다 되어서 트럭공장과 부품 공장을 둘러보기에는 어두워졌다. 우리는 대신 우리의 차량이 헤드라이트를 비출수 있는 컴퓨터 센터로 갔다. 이 곳도 폐허였다. 두 개의 미사일은 건물을 뿌리채 들어올려서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1천만 달러쯤 되는 두대의 IBM컴퓨터도 사라졌다. 공격이 이뤄졌던 밤에 컴퓨터 센터는 운영되고 있지 않았다. 건물안에 있던 두 사람은 공습 경보가 울리자 대피소로 몸을 숨긴 덕분에 인명 피해는 없었다.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자스타바의 미래는 완전히 바뀌었다
자스타바의 전체 피해는 10억 달러로 추산됐다.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재건을 위해 재정을 투입하기에는 부담스런 액수였다. 그러나 그것이 재건을 위한 노력을 막을 수는 없었다. 2000년 1월까지 자스타바의 잔해 중 80퍼센트가 노동자들의 놀라울 정도의 자발적 노력으로 제거됐다. 오래지 않아 그들의 영웅적인 노력은 작은 규모의 생산을 일으켰다.
그 후로도 재건이 계속됐지만 2000년 10월 CIA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고 나서 자스타바의 미래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저돌적으로 전체 경제의 민영화가 추진되면서, 새로운 정부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노동자들에게 2/3에 해당하는 노동자의 정리와, 자스타바의 완전 폐쇄 중에 하나를 받아들이라! 민영화 장관 알렉산더 블라호비치(Aleksandar Vlahovich)는 “우리는 이 일을 매우 엄정하게 처리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설비가 파괴되고 제재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추진된 민영화 프로그램은 지역의 노동자들을 과잉 상태로 몰아갔다. 자스타바의 노동자들은 그들이 다시 고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 우려했다. 세르비아의 재무장관 파블 페트로비치(Pavle Petrovich)는 그들의 우려를 경멸적으로 무시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보호 시스템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배워야 한다.” 노동자들에게는 다른 선택이 존재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정부의 요구에 응했고, 이 과정에서 직장을 잃은 이들에게는 소액의 보조금이 제공됐다.
자스타바는 2008년에 민영화가 되고 곧 피아트의 자회사가 됐다. 결국 피아트-크라이슬러의 완전소유가 됐다. 일단 피아트로 소유권이 넘어가자 이 이탈리아 기업은 처음에 약속했던 고용승계를 더 이상 지키지 않았다. 곧 남아있는 노동자의 절반을 정리했다. 노동자들은 이에 항의하여 시청을 점거했지만 허사였다. 그들은 빠르게 진압됐다.
노동자들을 게으른 기생충으로 묘사하는 신자유주의의 선전이 사회를 휩쓸었다. 정부는 보조금에 의존해 온 ‘국영’ 자스타바를 비웃었지만 피아트의 독점적 이권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정부는 노동자 한 명당 1만 유로를 지원했고, 첫해에는 판매 장려금을 지원했다. 심지어 피아트는 10년간 어떤 종류의 세금도 면제받았다. 피아트의 외국계 협력 회사에는 대지가 무료로 제공됐다. 정부가 무료로 인프라를 제공하는 면세 산업지구가 피아트를 위해 만들어졌다. 이 모든 것들은 ‘국영’ 자스타바가 받아왔던 보조금보다 결코 작지 않았다.
2001년으로 돌아가보자. 민영화장관 블라호비치는 “자스타바가 성공적인 국가개조의 훌륭한 사례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제는 외국기업이 경제를 지배하고 있고 노동자들은 최악의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다. 실업은 절망적인 수준이다. 그들은 한 때 자스타바의 자랑스런 노동자였다. 그들에 대한 경제적 강탈은 완료됐다.
*Gregory Elich의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대한 칼럼은 앞으로 더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