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9/12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7 - 필리핀 법원, 에스트라다에 종신형(종합)
필리핀 법원은 12일 조지프 에스트라다(70) 전 대통령이 재임중 부정축재를 저질렀다며 종신형을 선고했다.필리핀 산디간바얀 반부패 특별법원은 6년여에 걸친 심리 결과 에스트라다가 대통령 재직시에 뇌물과 리베이트 등을 받는 방법으로 수천만 달러를 축재한 혐의가 인정된다며 이같이 판결했다. 또 법원은 공판 기간 동결됐던 그의 은행계좌에서 8천700만 달러를 몰수했다. 에스트라다는 유죄가 최종 확정되면 종신형과 공직수행 자격정지 등의 처벌을 받게 된다. 이날 재판장의 판결이 나오자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은 피고석에 주저앉았다. 이어 기자들과 만나 "내 친구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비곡직에 따른 판결을 기대하고 사법부에 나 자신을 맡겼다"며 "하지만 이 법정은 나를 기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 부서였다"라고 법원을 힐난했다. 그의 변호인은 즉각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은 법원의 추가 명령이 나오기 전까지 앞으로 가택연금 상태에 처하게 된다.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은 2001년 1월 글로리아 아로요 현 대통령이 주도한 '2차 피플파워' 시민운동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축출당했다. 축출된 뒤 그는 자신의 후임자인 아로요 현 대통령과 가톨릭교회, 비즈니스 엘리트 등 세력이 자신의 대중적 기반을 시기해 모함에 빠뜨렸다고 항변해왔다.이날도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은 필리핀을 자발적으로 떠나는 대가로 처벌을 면하게 해주겠다는 아로요 대통령의 제의가 2차례 있었으나 거절했다는 폭로성 주장을 내놓았다.아로요 정부는 이날 판결이 "법의 지배"에 따른 것이라며 크게 환영했다. 정부 대변인은 "우리는 국가가 제대로 운용되고 경제가 발전하며 평화가 득세하기를 바란다"며 "오늘의 슬픈 에피스도로 인해 이런 목표로부터 우리들이 이탈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은 필리핀 영화제에서 5차례나 남우주연상을 차지한 영화배우 출신 정치인이다.영화 속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배역을 맡아 대중적 인기를 끌어모았으며 1969년 산후안시 시장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된 뒤 상원의원을 지냈다. 1998년 5월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40%의 득표율로 당선됐다.(마닐라 AP.AFP=연합뉴스) shin@yna.co.krhttp://www.idhn.co.kr/print_paper.cgi?action=print_paper&number
=41355&title=%C7%C1%B8%B0%C6%AE
2005 - 삼성, 50나노 16기가 낸드플래시 메모리 개발
삼성 ‘50나노 16기가 낸드플래시’ 개발
삼성전자는 12일 세계 최초로 50나노 기술을 이용한 16기가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이 제품은 손톱 크기의 칩 1개에 신문 200년분이나 MP3 파일 기준 노래 8,000곡을 저장할 수 있다. 이같은 대용량 플래시 메모리 개발에 따라 일반 노트북컴퓨터 하드디스크를 칩 1개로 대체할 수 있는 ‘디지털 페이퍼시대’가 눈앞에 펼쳐지게 됐다.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 사장은 이날 서울 신라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세계 최초로 16기가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개발했다”면서 “반도체 칩이 종이의 정보 저장·전달 기능을 대체하는 ‘디지털 페이퍼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선언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60나노 기술을 적용한 8기가 제품에 이어 이번에 50나노 16기가 제품을 세계 처음으로 개발함에 따라 세계 반도체 업계 선두주자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또 1999년 이후 매년 메모리 반도체 용량이 2배씩 늘어나는 신제품을 개발해 ‘1년에 메모리 용량이 2배로 늘어난다’는 이른바 ‘황의 법칙’을 다시금 전세계에 입증했다. 16기가 개발에 사용된 50나노(1나노는 10억분의 1m) 회로선폭 기술은 머리카락 2,000분의 1 두께의 극미세 회로를 이용해 반도체를 설계한 삼성전자만의 최첨단 기술이다. 삼성전자는 이 기술을 이용해 16기가 메모리 칩 1개에 1백64억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어넣었다. 이 제품은 내년 하반기 중 양산된다. 이 제품이 양산되면 현재 A4용지 절반 크기의 노트북 하드디스크의 크기·무게를 10분의 1 이하로 줄일 수 있다. 황사장은 “이번에 개발한 50나노 기술은 16기가뿐 아니라 기존 8기가나 4기가 제품에도 적용 가능해 원가를 대폭 줄일 수 있다”면서 “2010년까지 3백억달러 규모의 시장이 창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문규기자 park003@kyunghyang.com〉/경향신문 2005-09-12 18:18:3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09121818301
[삼성전자 반도체 개발 연혁]
2006-09-11 - 삼성전자, 40나노 32기가 플래시 첫 개발
2005-09-12 - 삼성, 50나노 16기가 낸드플래시 메모리 개발
2004-09-09 - 삼성전자, 세계최초 90나노미터 D램 양산
2004-08-19 - 삼성전자, 64M P램 세계 첫 개발
2001-02-07 - 세계최초 4기가 디램 반도체 제품기술 개발
2000-09-29 - 세계최고속 그래픽 메모리 출시
2000-05-27 - IMT-2000채용 16M S램 첫 개발
2000-01-04 - 288M D램 첫 개발
2005 - 홍콩 디즈니랜드 아시아서 2번째로 개장홍콩의 야심에 찬 관광진흥 프로젝트인 홍콩 디즈니랜드가 12일 공식 개장했다.
홍콩 정부와 미국 월트디즈니사는 12일 쩡칭훙(曾慶紅) 중국 국가 부주석과 도 널드 창(曾蔭權) 홍콩 행정장관, 로버트 아이거 월트디즈니 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홍콩 디즈니랜드 개장식을 거행했다.
관람객들은 개장식이 끝난 직후인 오후 1시부터 입장하기 시작했다.
홍콩 디즈니랜드는 월트디즈니의 11번째 테마파크이자 도쿄에 이어 아시아의 2번째 디즈니 테마파크로 홍콩 정부와 월트디즈니사 합작으로 약 200억홍콩달러(한화 2조6천억원)를 들여 6년만에 건설됐다.
홍콩 최대 섬인 란타우섬 북부 페니베이에 자리잡은 디즈니랜드는 판타지랜드 등 4곳으로 구성된 테마파크와 호텔 2채, 쇼핑몰, 음식점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개장에 앞서 전용 열차 노선도 개통됐다.
주로 중국 본토와 동남아의 가족 관광객을 겨냥하고 있는 홍콩 디즈니랜드는 동서양의 조화를 주제로 전통적인 디즈니 캐릭터 주인공들과 함께 중국과 기타 아시아 문화를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홍콩 정부는 올해 디즈니랜드 방문객을 560만명, 15년 후에는 1천만명으로 예상 하면서 개장 후 40년간 디즈니랜드는 홍콩에 1천485억홍콩달러(19조원)의 순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홍콩 디즈니랜드는 면적 126㏊로 디즈니 해외 테마파크 중 가장 작고 입장료는 350홍콩달러(약 4만6천원)로 5개 해외 디즈니랜드 중 가장 싸다.
홍콩=연합뉴스 /조선닷컴 2005.09.12 14:59 05'
http://www.chosun.com/se/news/200509/200509120234.html
2002 -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가 조작했다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발표
"인혁당재건위 사건 중앙정보부가 조작"
1974년 중앙정보부가 “북의 지령을 받은 지하공산조직으로 민청학련의 배후조직”이라고 발표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은 조작됐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韓相範)는 12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 수사에 참여했던 경찰관과 피의자들이 수감됐던 교도소의 교도관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중정이 사건 관련자들에게 구타와 물고문, 전기고문을 자행했고 피의자 신문조사와 진술조서를 위조해 사건을 조작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군사법원에서 8명이 사형선고를 받은 뒤 20여시간 만에 형이 집행돼 ‘사법살인’이라는 오명을 얻었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조작됐다는 피해자측의 주장은 있었지만 국가기관이 수사 관련자들의 진술을 기초로 조작 사실을 확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진상규명위는 “당시 경찰 수사관 4명 모두 ‘자백 이외에 조직결성 관련 증거가 없었다’고 진술했고 검찰에서 제출한 증거목록에도 지하당 결성에 관한 증거 자료는 없었다”며 인혁당 재건위 조직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진상규명위는 “중정 수사팀장인 윤모씨가 수사관들에게 ‘물건(조작사건)을 만들어라’고 지시한 일이 있다는 진술을 당시 수사관들로부터 확보했다”며 “피의자들이 혐의사실을 부인하더라도 중정 수사팀이 고문을 하면 그 다음에는 별다른 저항 없이 시인조서를 작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진상규명위는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중정 수사관들이 수시로 입회했고 관련자들이 검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혐의 사실을 부인하면 지하보일러실로 끌고 가 고문을 했으며 검사가 물으면 혐의 사실을 인정하도록 강요했다는 당시 수사관들의 진술도 공개했다. 진상규명위는 “재판을 맡은 군사법원 재판부도 피고인이 부인한 사실을 정반대로 기록하거나 고문에 관한 발언을 기록에서 누락시키는 방식으로 공판 조서를 위조했으며 죽음을 앞두고 한 유언마저 조작했다”고 밝혔다. 진상규명위는 진술조서와 피의자 신문조서가 날조되고 재판 과정에도 위법한 점이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당시 수사관과 변호사의 진술도 함께 공개했다.김준곤(金焌坤) 상임위원은 “기존의 형 선고를 변경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나올 경우 재심 사유가 되는데 이번에 밝혀진 내용은 상당 부분 이에 해당된다”고 말했다.한편 ‘인혁당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는 이날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진상규명위 조사를 통해 유신체제 하에서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조작된 사건임이 드러났다”며 “이번에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재심 청구를 적극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진상규명위는 3선 개헌이 있었던 1969년 이후의 사건에 대해서만 조사하도록 규정한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에 따라 1차 인혁당에 대해서는 조사하지 못했다.황진영기자 buddy@donga.com▼인혁당 사건 일지▼1964년 6월 3일 비상계엄령 선포8월14일 중정, 1차 인혁당 사건 발표1965년 9월5일 인혁당 관련자 26명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속9월21일 대법원, 6명에 징역 1년형 선고하고 6명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 선고 1974년 4월25일 중정, 민청학련을 범죄단체로 규정하고 배후 에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1975년 4월8일 대법원 판결. 사형 8명, 무기 7명, 징역 20년 4명, 징역 15년 4명4월9일 8명 사형 집행/동아닷컴 2002-09-12 18:23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00000000162/3/70000000000162/20020912/7862149/1
- Palatine (Fantasy) Personalities - Serena
Williams (tennis) postal stationery card
1999 - 세레나 윌리엄스, US오픈테니스 우승. 흑인 여선수 41년 만에 그랜드슬램 달성
17세 11개월의 세레나 윌리엄스(미국.세계6위)가 새 테니스 여왕으로 등극했다. 세레나는 1999년 9월 12일 뉴욕 아서애시스타디움에서 열린 US오픈테니스 여자 단식 결승에서 마르티나 힝기스(스위스, 세계1위)를 2대0으로 누르고 우승했다.
데뷔 2년 만에 딴 메이저 타이틀이었다. 무엇보다도 1958년 알세아 깁슨(미국) 이후 41년 간 흑인 여자선수에게 난공불락이었던 그랜드슬램을 정복하고 남녀를 통틀어 아서 애시(미국)이후 31년 간 흑인 선수에게는 '금단의 열매'이었던 US오픈을 거머쥐었다는데에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것도 아서 애시의 이름을 딴 경기장에서 이루어졌다. 이 같은 경사에 미국 클린턴 대통령도 전화로 축하를 했다. /조선
1996 - 브라질의 대통령 에르네스토 가이셀(Geisel, Ernesto) 사망
가이셀(가이젤) [Geisel, Ernesto Beckmann, 1908.8.3~1996.9.12]
브라질의 대통령(1974~79).
직업군인이던 가이셀은 1930년 제툴리우 바르가스가 주도한 군사쿠데타에 가담했다. 브라질의 민간정부는 무너지고 독재가 시작되었다. 가이셀은 군과 행정부의 요직에 있으면서 15년간 바르가스를 도왔으나 1945년에는 바르가스 정권을 전복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15년간 대통령 직속 군참모부 차장, 국가석유위원회 군사대표위원 등을 역임하며 과단성있는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다. 1964년의 군사쿠데타에 참여한 뒤, 움베르투 카스텔루 브란쿠 대통령 밑에서 내각의 수반이 되었으며 1969년에는 석유공사 페트로브라스를 맡아 사업규모를 확장하고 생산을 크게 증대시켰다.
1974년 3월 15일 군사과두체제에 의해 대통령직에 오른 가이셀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치자유화와 문민화에 착수하여 1974년 총선을 허용하고 야당지도자들과 회동하는 한편 검열을 완화했다. 그는 '실용적 민족주의'라는 새로운 경제정책을 내놓았는데, 수출 중심의 정책을 광업·농업·교통 등 국내산업 중심의 정책으로 전환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수차례 민간정부로의 정권이양 의사를 비쳤음에도 불구하고 가이셀과 보수파 측근들은 총선이 군부의 재집권을 어렵게 만들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이에 따라 더이상의 민주화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으며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도 1979년 이후 심해졌다. 가이셀은 1979년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으나 후계자로 내정된 주앙 바티스트 피게이레두 후보를 지지했다. /브리태니커
비코 [Biko, Stephen (Bantu) "Steve", 1946.12.18~1977.9.12]
[책갈피 속의 오늘]1977년 남아공 인권운동가 비코 고문사
스티브 비코는 1977년 8월 도로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떠오르는 흑인 인권운동가로 “검은 것이 아름답다” “당신은 지금 존재만으로 충분하다. 한 인간으로 자신을 바라보라”고 흑인에게 호소하곤 했다. 1960년대 초 흑인 지도자 넬슨 만델라와 로버트 소부퀘가 수감된 뒤 남아공 흑인 운동은 구심점을 잃은 채 비틀댔다. 이때 비코가 흑인의 자긍심과 존엄성을 고취시키기 위해 흑인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나탈대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그는 남아프리카학생동맹(NUSAS)에서 활동하다가 이 단체가 흑인 학생의 요구를 대변해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탈퇴했다. 1968년 남아프리카 전흑인학생연합(SASO)을 설립해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으며 1972년 퇴학당한 뒤 전업 활동가로 나섰다. 비코는 여러 조직과 운동을 이끌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남아공 백인정부의 탄압을 받는다. 보안관찰 처분으로 집필과 정치활동을 금지 당했고 거주가 제한됐으며 여러 혐의로 수차례 체포와 구금을 겪었다.1977년 ‘최후의 체포’를 당한 비코는 보안경찰 건물인 샌럼빌딩 619호로 끌려갔다. 쇠창살에 묶인 채 22시간이 넘도록 고문과 구타를 당한 그는 심각한 뇌손상을 입고 만다. 경찰은 의식이 없는 비코를 알몸 그대로 랜드로버 뒷좌석에 방치한 채 1500km나 떨어진 병원으로 싣고 갔다. 그리고 이튿날인 9월 12일, 서른 살 짧은 생이 끝났다.경찰은 사망 원인이 7일간의 단식으로 인한 쇼크라고 발표했지만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젊고 유망한 흑인 지도자의 죽음은 남아공에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잔혹한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정책에 세계 각국의 비난이 쏟아졌다. 비코의 장례식에는 1만5000명이 넘는 조문객이 몰려들었는데 미국과 서유럽 지역의 대사와 외교관도 자리를 함께했다.고인의 절친한 친구이자 남아공 신문 ‘데일리 디스패치’의 편집장이던 도널드 우즈는 시신 공시소에서 촬영한 비코의 사진을 공개했다. 머리 부분의 심한 상처는 의문사라는 덮개를 들추는 명백한 증거였다. 남아공 정부는 우즈에게 비코와 같은 보안관찰 처분으로 대응했고 공개 활동을 금지시켰다. 우즈는 삼엄한 감시 속에 국외 탈출을 감행했고 영국 망명 생활 동안 비코의 삶과 투쟁을 담은 책을 출간했다.차별과 억압에 당당했던 ‘검은 거인’ 비코. “열등감에서 벗어나라”는 그의 강인한 목소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동아닷컴 2008-09-12 02:44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80912/8629954/1
1974 - 이디오피아 군정, 셀라시에 황제 폐위
에티오피아를 44년 간 통치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1974년 9월 12일 초라한 폭스바겐을 타고 궁궐로부터 쫓겨났다. 이로써 그의 통치는 끝이 났다. 셀라시에 왕정을 전복한 `그림자`라는 명칭의 군부조직은 셀라시에를 부정부패와 다수의 국민들을 절대빈곤 상태로 몰고갔다는 혐의로 고발했다. 무혈 쿠데타 지도자들은 셀라시에의 아들 아스파 와센 왕자를 아디스아바바로 소환해 명목상 왕자로 세우고, 아만 안돔 중장이 이끄는 임시 군사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실각한 후 1974년 12월 테페리 벤티 준장이 이끄는 임시군사행정위원회(PMAC)에서 에티오피아를 사회주의 국가로 선포했다. /조선
셀라시에 왕정을 전복한 `그림자`라는 명칭의 군부조직은 셀라시에를 부정부패와 다수의 국민들을 절대빈곤 상태로 몰고갔다는 혐의로 고발했다.
무혈 쿠데타 지도자들은 셀라시에의 아들 아스파 와센 왕자를 아디스아바바로 소환해 명목상 왕자로 세우고, 아만 안돔 중장이 이끄는 임시 군사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실각한 후 1974년 12월 테페리 벤티 준장이 이끄는 임시군사행정위원회(PMAC)에서 에티오피아를 사회주의 국가로 선포했다. /조선
- 제10회 신문의 날 기념
1961 - 한국신문윤리위원회 발족
1961년 9월 12일 한국신문윤리위원회가 발족했다. 5·16군사혁명으로 언론에 대한 각종 통제가 심화되자 언론의 자율규제 필요성을 절감한 언론인들은 1961년 7월 그 기준이 될 신문윤리실천요강을 제정한데 이어 이날 신문윤리위원회를 발족시켰다.언론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자율적 통제가 첫째 목표였다. 발족초기에는 일반의 제소사건만을 심의, 결정했으나 1964년 언론파동을 계기로 위원수를 확대했고, 부설기관으로 심의실을 설치해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제소없이도 윤리위반기사를 자율적으로 심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1976년 10월 한국신문협회와 공동으로 신문광고윤리강령 등 실천요강을 제정하여 1977년 1월부터는 신문광고도 규제해 오고 있다. /조선
1960 - 폴 로브슨, 불가리아 공연
1960년 오늘 미국의 흑인 가수이자 배우인 폴 로브슨(Paul Robeson)이 공연을 열러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를 방문한다. 이때 그의 나이는 62살.로브슨은 미국 정부로부터 공산주의자로 몰려 9년 동안 해외여행을 금지당하다 2년 전인 1958년에야 여권을 발급받았다. 이후 로브슨은 5년 동안 유럽과 호주, 뉴질랜드에서 순회공연을 열었다.로브슨은 해외순회공연을 끝낸 뒤부터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주로 병상생활을 하다 1976년 78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YTN
- Landing of the Soviet rocket on the Moon, Sept. 14, 1959
1959 - 소련, 달 탐사선 루나 2호 발사
우주탐사선 루나 2호 발사
1959년 9월 12일 소련은 우주탐사선 루나 2호를 발사해, 최초로 달과 접촉하는 데 성공했다. 달은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천체라는 이유로 미국과 소련의 초기 우주과학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과 모험의 대상이 되었다. 소련은 루나 2호에 이어 2번째 무인 우주탐사선인 루나 3호를 같은 해 10월 4일 발사해 달로부터 6,880㎞ 떨어진 거리에서 달의 뒷면을 촬영(10월 7일)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로도 소련은 1970년에 무인월면차를 달 표면에 착륙시키는 등 우주탐사를 계속했다. 미국도 달 탐사에 적극적이었다. 1964~68년 3차례에 걸쳐 달 탐사선을 발사했으며, 1964~65년에는 3대의 레인저호를 달에 동체착륙시켜 총 1만 7,000장 이상의 달 사진을 얻어냈다. 이후 발사된 달궤도선과 탐사선 등은 달의 지형을 촬영하고 달의 환경에 대한 자료를 수집·전송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69년 7월 20일에는 아폴로 11호의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올드린이 달평원에 착륙해 인간의 직접적인 달 탐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1972년 12월까지 미국의 우주비행사들은 5차례에 걸친 달 탐사여행을 통해 표본 채취 등 각종 과학실험을 수행했다. /브리태니커
1956 - 홍콩 출신의 영화배우, 가수 장궈룽[張國榮] 출생
장궈룽 [장국영, 張國榮, Leslie Cheung, 1956.9.12~2003.4.1]
홍콩 출신의 중국 영화배우, 가수.
광둥어[廣東語]로는 쳉국윙으로 발음하고, 영어식 이름은 레슬리 청(Leslie Cheung)이다. 1956년 9월 12일 홍콩에서 '홍콩의 직물왕'으로 불리는 이름난 직물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려서 부모가 이혼하고, 부모 중 누구도 가정을 돌보지 않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3세 때 영국 유학 길에 올라 리즈대학교에서 직물학을 전공하였으나,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1976년 홍콩 ATV가 주최한 음악 콘테스트에서 2등으로 입상하면서 가요계에 데뷔한 뒤, 1989년 가요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모니카》《당년정(當年情)》 등의 노래로 아시아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고, 1987년에는 앨범 《서머 로맨스》로 홍콩 텔레비전 '올해의 최우수 앨범 판매량' 대상을 받았다.1978년 《홍루춘상춘(紅樓春上春)》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데뷔해 1980년대 중반까지 15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으나, 그다지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다 1986년 우위썬[吳宇森] 감독의 《영웅본색(英雄本色)》에 저우룬파[周潤發]와 함께 출연하면서 배우로서도 이름을 얻기 시작하였다. 이후 청샤오둥[程小東] 감독의 《천녀유혼(倩女幽魂)》(1987), 우위썬 감독의 《영웅본색 2》(1987),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의 《아비정전(阿飛正傳)》(1990), 《동사서독(東邪西毒)》(1994), 천카이거[陳凱歌] 감독의 《패왕별희(覇王別姬)》(1993),《풍월(風月)》등에 출연하여 좋은 연기를 펼침으로써 아시아를 넘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밖에 마지막 출연작인 《이도공간(異度空間)》(2002)을 비롯해 《종횡사해(縱橫四海)》(1990), 《금지옥엽(金枝玉葉)》(1994), 《색정남녀(色情男女)》(1996), 《친니친니[安娜瑪德蓮娜]》(1998), 《성월동화(星月童話)》(1999) 등 4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홍콩전영금상장영화제 최우수남우주연상(1989), 도쿄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1993), 홍콩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남우주연상(1994)을 받았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갖춘 배우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2003년 4월 1일 홍콩의 한 호텔에서 투신자살하였다. /네이버
1953 - 이승만 대통령, 족청계 제거에 관한 담화 발표
1953년 9월 12일 이승만 대통령이 족청계 제거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9월 10일 이범석(李範奭, 1900~1972)의 족청계인 조선민족청년단 소속 진헌식 내무장관과 신중목 농림장관을 농민에게 세금을 과다부과했다는 구실로 전격 파면조치하고, '총국민대회'를 열어 당내 실세였던 족청계를 완전 숙청했다. 대신 이기붕(李起鵬, 1896~1960)을 자유당 2인자로 지명했다.
9월 17일, 이 대통령은 족청계가 장악하고 있던 대한청년단도 해산, 모든 청년단체와 함께 민병단에 편입하도록 지시했다. 이로써 한때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내무장관, 부통령후보 등을 역임하고 권력 2위에 있던 이범석과 그의 족청계는 정치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족청'은 1946년 10월 9일 이범석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청년운동단체로 창립 당시에는 300명에 불과하던 회원수가 9개월 후에는 20만 명, 2년 후에는 무려 120만 명의 대조직으로 발전했다. 정부수립 이후 이 대통령은 족청의 조직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것을 우려해 1948년 12월 19일 통합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을 조직하도록 한 후 족청을 이에 합류하도록 지시했다. 족청은 창단 2년 여 만인 1949년 1월 15일 대한청년단으로 통합, 해체되었으나, 해체후에도 계속 결속력을 유지해 자유당 내에서 막강한 세력을 행사했다. /조선
1953 -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제1서기에 피선
1953년 9월 12일 흐루시초프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에 선임됐다. 흐루시초프는 3월 5일 스탈린 서거 후 수상 말렌코프 당서기 사임 후부터 급속히 세력을 키워 당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정식으로 제1서기로 임명됐다.
흐루시초프는 1894년 크루스크주의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해인 1917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모스크바 지하철공사 감독으로 활약한 공적으로 1935년 모스크바 당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됐다. 스탈린 시대에는 당 방침에 충실히 활동해 1939년에 정치국원, 1949년부터 당서기 지위에 올랐다. /조선
1951 - 조지 마셜 미국 국방장관 사임
세계 名裝열전〈12〉조지 C 마셜(미국) -하-
1938년 마셜은 준장으로 진급, 육군의 참모장군 역할을 맡았다. 그의 직책은 전쟁성의 전쟁계획수립 국장이었다. 전쟁성의 핵심자리였다. 이때 그는 미래의 군 지도자 역할에 자신감을 품고 비망록에 자기에게 감명을 주고 뛰어난 잠재력을 지닌 장교들의 이름을 꾸준히 기록하기 시작했다.39년 9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를 육군참모총장에 발탁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마셜 장군보다 계급 ·지위가 더 높은 선임장군 32명을 제치고 그를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한 것이다. 유능한 대통령만이 명장을 식별해 낼 수 있는 혜안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2002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 때 한국의 거스 히딩크 감독이 대표선수 선발 기준으로 허명(虛名)과 연륜·학력· 지연보다 능력 위주로 삼았던 것과 같은 원칙이다.마셜은 모든 것을 앞서가면서 미리 준비했다. 그는 미국이 미래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이에 철저히 대비했다.그는 전쟁에 대비해 전략을 짜는 한편 병력 증강과 군대를 적절히 무장하고 장비를 증강하기 위해 예산편성권을 가진 국회에 직접 적극적 로비를 벌이기도 했다.마셜은 처음 2개월간 육군참모총장 서리로 일하다가 39년 9월1일 나치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정식 참모총장으로 전쟁계획 ·작전수행권을 100% 장악했다. 그는 자신의 지도 아래 새로운 사단 편성 ·군사훈련 ·군장비 조달 ·고위 군지휘관 선정 등을 직접 꼼꼼히 챙겼다. 고위 군지휘관 선발 때는 미리 메모해둔 비망록이 요긴한 도움이 되었다. 그의 이런 군비 증강 노력 결과 병력은 4년 내 200만 명에서 무려 830만 명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그는 군편제를 3대 사령부 체제로 분류, 지상군 사령부 ·육군행정사령부 ·육군항공대사령부 등으로 개편했다.일본이 41년 12월7일(일본 날짜 12월8일) 새벽 해 ·공군 합동작전으로 진주만을 기습 폭격하고 미국이 선전포고하자 마셜은 전쟁계획을 긴급히 수정 ·보완했다. 미국은 당시 번영과 풍요를 구가하면서 전쟁을 잊고 평화에 도취해 있었다. 하와이 미군 장병들은 일본의 선의만 믿고 진주만 기습 때 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평화에 도취해 있다가 어이없이 허를 찔린 것이다. `전쟁시에는 평화를 생각하고 평화시에는 전쟁을 준비하라'는 격언을 실감케 하는 비극적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그는 루스벨트 ·트루먼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군사 자문역을 겸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마셜 장군보다 네 살 아래다. 마셜은 워낙 기획력이 뛰어나 군사문제라면 모든 것을 100% 맡겨도 안심할 만큼 트루먼 대통령을 편하게 해주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59년 마셜이 별세하자 “저 세상에서 나는 마셜의 부관(副官)이 되어 마셜을 모시고 싶다”고 말할 만큼 마셜을 존경했다.마셜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 일선부대를 총지휘하려는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지만 매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통령 등 그의 상사들은 그가 일선에서 지휘하는 것보다 본토에서 군참모 ·고위 전략가로서 조국을 위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역할이라는 것이 거부 이유였다.마셜의 가장 중요한 특장 중 하나는 그가 모신 두 대통령과 인간적으로 언제나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두 대통령과 원만한 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대권(大權)을 잡으려는 정치적 야망을 품지 않고 오직 직업군인으로서 국가에 봉사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기 때문이다.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는 참모총장직을 물러나면서 아이젠하워 장군을 그자리에 추천하는 미덕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셜의 은퇴는 며칠 가지 않았다. 그가 참모총장을 사퇴한 지 10일 뒤 트루먼 대통령은 그에게 대통령 특사로 중국에 가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군과 장제스(蔣介石) 국부군(國府軍) 간의 내전을 말리는 중재 역을 맡아달라고 설득했다.그는 이 역할을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47년 1월 그를 국무장관으로 발탁했다. 같은해 6월 5일 그는 유럽경제재건 프로그램인 마셜 플랜을 작성 ·발표했다. 폐허가 된 유럽 동맹국과 독일 등 적국들의 경제 재건 ·부흥을 위해 미국이 천문학적 액수를 퍼붓는 거대한 전후 재건계획이었다. 이 재건계획은 서유럽 지역에 대한 공산세력의 확산을 막는 데도 목적이 있었다.그는 과로로 건강이 나빠지자 국무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50년 다시 그를 국방장관에 기용했다. 마셜은 이 자리에서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등 유엔군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옹호했다. 그는 51년 공직에서 완전 은퇴했으며 59년 10월16일 워싱턴에서 세상을 떠나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그가 제2차 세계대전 전략을 수립 ·집행, 승리로 이끈 핵심적 역할을 했음에도 명성 면에서 아이젠하워 ·맥아더보다 뒤진 것은 오직 전쟁 중 일선부대를 지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적 총명과 순수한 군인정신, 세계적 전략가로서의 풍부한 지성이 오늘날 미군을 세계 최강 군대로 성장시키는 데 가장 영향력 있는 역할을 했다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여영무 www.libertyclub.org> /국방일보 2002.10.29
http://kookbang.dema.mil.kr/kdd/GisaView.jsp?menuCd=2004&menuSeq=8&menuCnt=
30917&writeDate=20021128&kindSeq=1&writeDateChk=20021029
George Catlett Marshall
3rd United States Secretary of Defense
In officeSeptember 21, 1950 – September 12, 1951
President Harry S. Truman
Preceded by Louis A. Johnson
Succeeded by Robert A. Lovett
http://en.wikipedia.org/wiki/George_Marshall
1948 - 국회, 연호를 단기로 확정
단기(檀紀)는 단군왕검이 즉위하여 단군조선을 개국한 해인 서기전 2333년을 원년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기원이다. 단기가 국가의 연호로 처음 채택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이다.
1948년 9월 12일 국회 133명의 재석의원 중 106명의 찬성을 얻어 의결, 확정된 '연호에 관한 법률'은 이어 9월 25일 '법률 제4호'로 공포됐고 여기에서 단군기원(檀君紀元)이 대한민국의 공용연호가 됐다.
그러나 1961년 12월 2일부 법률 제775호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대한민국의 연호는 서력기원으로 한다"고 하고, 부칙에서 "본 법은 1962년 1월 1일부터 시행한다. 법률 제4호에 관한 법률은 이를 폐지한다"고 법제화함으로써 단군기원이 폐지되고 서력기원이 채택됐다. /조선
1943 - 독일 파라슈트부대, 감금중인 무솔리니 구출
무솔리니(Mussolini, Benito Amilcare Andrea, 1883~1945)는 1939년 5월 독일과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나치스 독일 ·일본과 함께 국제파시즘 진영을 구성하였다. 1940년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영국과 프랑스에 대항하였으나 각지의 전투에서 패전하고 1943년 7월 연합군의 시칠리아섬 상륙과 함께 실각하여 체포, 감금되었다. 그 해 9월 독일군에 의하여 구출되어 북부 이탈리아에 나치스 괴뢰정권을 조직하였으나, 독일 항복 직전인 1945년 4월 25일 이탈리아의 반(反)파쇼 의용군에게 코모 호반에서 체포되어, 28일 정부(情婦)와 함께 사살되었다. /naver
- Henri Breuil
1940 - 라스코 동굴벽화 발견
[어제의 오늘]1940년 라스코 동굴벽화 발견
ㆍ전설 찾아 나선 소년들이 발견
선사시대의 초기 인류는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인간과 자연 생태계가 진화 과정을 거친 것처럼 인류의 예술적 감각도 단순한 형태에서 복잡하고 정교한 영역으로 진화된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같은 추론이 합리적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1940년 프랑스 도르도 지방의 몽티냐크 마을에서 발견된 라스코 동굴 벽화는 인류가 초기에 간결하고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정교하고 사실적인 형태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기존의 통설을 완전히 뒤엎었다.
라스코 동굴에서 발견된 800여점의 벽화와 암각화는 각종 동물들을 사냥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 벽화와 쌍벽을 이루는 이 동굴 벽화는 약 1만7000년 전 구석기 시대에 존재했던 인류가 그렸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사실적이고 세밀한 묘사가 특징이다. 모든 동물들의 모습이 매우 역동적이며 다양한 색감을 동원해 화려하게 채색돼 있어 현대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상당히 세련된 수준의 기법이라는 평가다. 라스코 동굴 벽화의 발견은 순진한 소년들의 오래된 전설과 소문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됐다. 몽티냐크 마을에 사는 4명의 10대 소년들은 중세시대의 고성으로 이어지는 비밀통로가 있다는 전설을 믿고 이를 찾아 나섰다. 소년들은 라스코 언덕 풀숲에서 커다란 구덩이를 발견하고 주변을 파헤친 끝에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 입구가 점점 넓어지더니 천장이 높은 커다란 공간이 나타났다. 램프 불빛에 비쳐진 동굴의 벽에는 온갖 짐승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소년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학교 교장에게 이 놀라운 탐험 결과를 이야기했다.결국 당시 프랑스 최고의 고고학자인 앙리 브뢰이가 조사단을 이끌고 동굴을 정밀 탐사하게 됐다. 조사 결과 이 동굴은 여러 개의 갈래 동굴과 우물 등을 가진 주거지로 빙하기 말기 인류가 추위를 피해 살았던 곳으로 판명됐다. 이 동굴의 존재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전쟁이 끝난 뒤인 48년 관광명소로 개발돼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전기를 가설하고 굴을 파헤쳐 통로와 계단 등을 설치했다. 관광객들의 발길에 짓밟혀 동굴 안의 유물이 훼손되고 벽화가 부식되기 시작하자 프랑스 정부는 63년 벽화 보존을 위해 동굴을 폐쇄했다. 지금은 원래 동굴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복제동굴을 만들어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유신모기자 simon@kyunghyang.com> /경향닷컴 2009-09-11 17:52:2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9111752275&code=100100
치욕의 엽서 한장
일본은 1929년 9월 12일부터 10월 21일까지 "조선박람회" 개최라는 미명아래 우리나라의 역사를 이어 온 궁궐 경복궁을 마구 헐어냈다. 그 자리에 박람회 장소도 만들고 조선총독부도 지어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엽서까지 발행하였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역사의 한 장면인가? 이 엽서는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잘 쓰여지지 않았으나, 일본인들 한테는 꼭 한 장씩 가지고 싶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 엽서는 국내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희귀엽서이다.
(원본 소장 태극기 연구가 송명호) /민상이의태극기이야기
http://myhome.naver.com/yunmsz/koreanflag/stempflag.htm
1929 - 라트비아의 시인, 극작가 라이니스(Rainis, Jānis) 사망
라이니스 [Rainis, Jānis, 1865.9.11~1929.9.12]
본명은 Jānis Pliekšāns.
라트비아의 시인·극작가.
그의 작품은 문학성이 뛰어나며 민족자유와 사회의식에 대한 주장이 잘 나타나 있다.
1891~95년에 소작인들에게 사회의식과 계급의식을 불어넣으려는 뜻에서 신문 〈디에나스 라파 Dienas Lapa〉를 발행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저작물에 감화를 받아 사회정의와 민족자유를 위한 투사로서 작가의 길로 뛰어들었으나 그의 철학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삶을 끊임없는 에너지의 변환으로 파악했다. 부분적으로는 러시아의 검열 때문에 정치적·개인적 자유의 이념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상징을 사용했다. 그러나 반정부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897년 프스코프로 추방되었고 다시 슬로보트스크로 쫓겨났다. 1903년에 돌아와 1905년 혁명에 참가했으나 혁명이 실패하자 스위스로 이주했고 마침내 라트비아가 독립한 뒤 1920년에야 귀국했다.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사에이마(의회)에 당선되었고 교육부장관(1926. 12~1928. 1)과 국립극장 총책임자(1921~25)를 지냈다.
그의 첫번째 시집 〈우울한 저녁의 오랜 감상 Tālas noskanas zilā vakarā〉(1903)은 폭넓은 경험을 보여주며 사랑을 다룬 섬세한 서정시가 몇 편 수록되어 있다. 다른 책에는 혁명적 투쟁이 상징수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끝과 시작 Gals un sākums〉(1912)에는 헤겔의 변증법철학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 희곡작품에서는 민담에서 얻은 모티프를 상징적으로 사용해 자신의 정치 이념을 나타냈다.
그밖에 셰익스피어와 실러, 하이네, 푸슈킨의 작품과 괴테의 〈파우스트 Faust〉를 번역했고 그러는 가운데 라트비아의 문학적 어휘를 풍부하게 했으며 또한 단어의 축약형을 쓰기 시작했다. /브리태니커
- Guinea Bissau, 1000 Pesos (1978. Banknote)
1924 - 기비니사우의 민족해방운동가 아밀카르 카브랄(Cabral, Amilcar) 출생
카브랄 [Cabral, Amilcar (Lopes), 1924.9.12~1973.1.20]
기비니사우의 민족해방운동가이자 농업경제학자.
바파타 출생. 중등교육을 마치고, 1948년 포르투갈로 건너가 리스본대학에서 농학 ·수력학을 공부하였다. 1952년 귀국하여 1954년까지 식민지정부에 근무하였고, 그 후부터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리스본을 거쳐 앙골라로 가서 앙골라해방인민운동의 창설에 참여하였고, 그후 귀국하여 1956년 아프리카기니-카보베르데독립당(PAIGC)을 동생인 L.A.카브랄과 창설, 서기장이 되었다. 1963년 PAIGC를 지도하여 무장투쟁에 돌입, 국토의 4분의 3을 해방시키는 등 큰 성과를 올렸으나, 독립 직전에 PAIGC 본부가 있던 코나크리에서 암살당하였다. /naver
1913 - 미국의 육상선수 제시 오언스(Owens, Jesse) 출생
오언스 [Owens, James Cleveland "Jesse", 1913.9.12~1980.3.31]
앨라배마주(州) 댄빌 출생. 오하이오주립대학교 졸업. 8.3m의 멀리뛰기 세계기록은 1960년 로마 올림픽대회까지 경신되지 않았다. 1935년 경기대회 때 1시간 15분 동안에 100야드에서 세계 타이기록을, 220야드와 220야드 허들에서 세계신기록을, 도움닫기 멀리뛰기에서 8m 13cm로 세계기록을 연속하여 세웠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대회에서 100m, 200m, 멀리뛰기, 400m 릴레이에서 우승하여 4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흑인 스프린터이다. 베를린 올림픽의 꽃으로 일컬어진 그 활동에 ‘갈색 영양(羚羊)’이란 별명이 붙여졌다.
그가 세운 100m의 10초 02 세계기록은 20년 후인 1956년에, 200m의 20초 03 세계기록도 13년 후인 1949년에 갱신되었다. /naver
- Brasil, 100 Cruzados (Banknote)
1902 - 브라질의 대통령 주셀리누 쿠비체크(Kubitschek, Juscelino) 출생
쿠비체크 [Kubitschek (de Oliveira), Juscelino, 1902.9.12~1976.8.22]
브라질의 대통령(1956~61).
새 수도 브라질리아의 건설과 같은 야심적인 공공사업을 추진함으로써 유명해졌다. 쿠비체크는 디아만티나 신학교를 마친 후 미나스제라이스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여 1927년에 졸업했다. 파리·빈·베를린에서 외과수련의 과정을 밟았다. 1932년 미나스제라이스 주에 있는 육군 의무반의 외과반장이 되었고, 1934~37, 1946~50년에 미나스제라이스에서 연방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0~45년 벨로리존테 시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도시계획 및 진료소와 공공 서비스 시설의 건립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1951~55년 미나스제라이스의 주지사 시절에는 고속도로 건설, 발전소 설립, 농공업의 개발에 주력했다. 그는 대통령에 출마해 '동력·수송·식량'을 공약으로 유세활동을 벌였다. 대통령 재임중에 총연장 1,440㎞에 달하는 밀림횡단 고속도로 건설에 착수했고, 미래의 수도 브라질리아를 건립했다. 그러나 그의 정부는 급속한 인플레이션에 성공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북동부의 한발피해 지역을 복구하는 데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1962년 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1964년 사회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다. 같은 해 군사혁명정부가 권력을 장악하자 망명했다. 1967년 브라질로 돌아와 은행가로 활약하다가 1976년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브리태니커
1898 - 이탈리아의 정치가 주세페 사라가트(Saragat, Giuseppe) 출생
사라가트 [Saragat, Giuseppe, 1898.9.12~1988.6.11]
이탈리아의 정치가. 이탈리아의 노동자사회당(PSLI)을 창당했다. 1944~64년에 여러 장관직을 거쳤으며, 1964~71년 이탈리아 대통령을 역임했다. 사라가트는 토리노대학교에서 경제학과 무역학을 공부했으며 1922년 사회당에 입당했다. 그는 파시스트에 반대해 1926년 추방되었다가 1943년 로마로 돌아왔으나, 나치 점령당국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그뒤 탈출했다. 사라가트는 1944년 해방 후 최초로 구성된 이바노에 보노미 내각에서 무임소장관을 지내다가 1945~46년 파리 주재 대사로 부임했다. 그는 1946년 전후 이탈리아 헌법을 제정한 제헌의회 의장으로 당선되었다. 1947년 사회당 당대회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에 반대했으며 PSLI를 결성하기 위해 탈당한 반대파들을 이끌었다. 얼마 후 그는 알치데 데 가스페리 밑에서 부총리를 지냈다(1947. 12~1948. 5). 그는 1948년 4월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다시 부총리와 해상무역장관을 지내다가 1949년 10월 당의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사임했다. 1951년 PLSI는 자신들이 공산당이나 그밖의 좌익 사회주의 단체들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것을 다시금 천명하기 위해 당명을 이탈리아 사회민주당(PSDI)으로 바꾸었다. 사라가트는 1954~57년 다시 부총리를 지내다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한 정부의 입장에 반대하여 사임했다. 그무렵 그는 '좌파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자'는 구상으로 좌익 사회주의자를 포함한 연립정부를 제안했다. 1959~60년에 안토니오 세그니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지냈던 사라가트가 사임하자 내각도 붕괴되고 말았다. 그는 1963년 불필요한 낭비라는 이유로 이탈리아 핵발전소 반대운동을 벌였다. 그뒤 알도 모로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좌파에 문호가 개방되는 것을 확인했다. 1964년말 사라가트는 안토니오 세그니의 뒤를 이어 대통령(상징적 지위이며 중재자 역할)이 되었다. 그는 1971년 대통령직을 사임했으며, 1976년 자신이 오랫동안 이끌어온 PSDI 서기장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1898 - 미국의 화가 벤 샨(Shahn, Ben) 출생 샨 [Shahn, Ben, 1898.9.12~1969.3.14]
이탈리아의 정치가.
이탈리아의 노동자사회당(PSLI)을 창당했다. 1944~64년에 여러 장관직을 거쳤으며, 1964~71년 이탈리아 대통령을 역임했다. 사라가트는 토리노대학교에서 경제학과 무역학을 공부했으며 1922년 사회당에 입당했다. 그는 파시스트에 반대해 1926년 추방되었다가 1943년 로마로 돌아왔으나, 나치 점령당국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그뒤 탈출했다.
사라가트는 1944년 해방 후 최초로 구성된 이바노에 보노미 내각에서 무임소장관을 지내다가 1945~46년 파리 주재 대사로 부임했다. 그는 1946년 전후 이탈리아 헌법을 제정한 제헌의회 의장으로 당선되었다. 1947년 사회당 당대회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에 반대했으며 PSLI를 결성하기 위해 탈당한 반대파들을 이끌었다. 얼마 후 그는 알치데 데 가스페리 밑에서 부총리를 지냈다(1947. 12~1948. 5). 그는 1948년 4월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다시 부총리와 해상무역장관을 지내다가 1949년 10월 당의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사임했다. 1951년 PLSI는 자신들이 공산당이나 그밖의 좌익 사회주의 단체들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것을 다시금 천명하기 위해 당명을 이탈리아 사회민주당(PSDI)으로 바꾸었다. 사라가트는 1954~57년 다시 부총리를 지내다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한 정부의 입장에 반대하여 사임했다. 그무렵 그는 '좌파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자'는 구상으로 좌익 사회주의자를 포함한 연립정부를 제안했다. 1959~60년에 안토니오 세그니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지냈던 사라가트가 사임하자 내각도 붕괴되고 말았다. 그는 1963년 불필요한 낭비라는 이유로 이탈리아 핵발전소 반대운동을 벌였다. 그뒤 알도 모로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좌파에 문호가 개방되는 것을 확인했다. 1964년말 사라가트는 안토니오 세그니의 뒤를 이어 대통령(상징적 지위이며 중재자 역할)이 되었다. 그는 1971년 대통령직을 사임했으며, 1976년 자신이 오랫동안 이끌어온 PSDI 서기장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1898 - 미국의 화가 벤 샨(Shahn, Ben) 출생
샨 [Shahn, Ben, 1898.9.12~1969.3.14]
미국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화가.
1898년 리투아니아의 카프나스에서 출생하였다.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8살 때 가족이 모두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에 정착하였다. 1913년부터 4년간 석판화공의 도제로 일하며 야간에 중학교를 다녔으며, 그 후로는 석판화공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뉴욕대학, 뉴욕시립대학을 거쳐 내셔널 아카데미 오브 디자인에서 공부하였다. 1925년과 1927년에 프랑스·이탈리아·에스파냐·아프리카 북부를 여행하면서 조지 루오(Georges Rouault)의 영향을 받았다. 1930년에 아프리카를 주제로 한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 당시는 미국의 경제공황 시기로서 실업과 사회불안 속에서 사회비판을 주제로 하는 예술경향이 표현되었다. 1931년에는 샨이 이제까지의 심미적인 예술개념을 거부하고 사회적 주제에 대해 직감에 따라 《드레퓌스 사건》,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템페라, 1931~1932, 휘트니미술관) 등의 시리즈를 구아슈나 수채화로 그려 자신의 명확한 의식과 스타일을 굳혔다. 노동운동가 E.무니에의 투옥에 항의하는 15장의 구아슈 시리즈(1931~1932)가 멕시코의 D.리베라에게 인정받아 록펠러센터의 프레스코 벽화제작에 조수로 채용되어 《교차로에 선 사람》을 제작하였는데, 이 공동 제작은 그후에 샨이 그린 여러 벽화의 기초가 되었다. 한편 경제공황 속에서의 도시 빈민과 민중의 억눌린 삶을 그림으로써 대변하였다. 《광부의 아내》(1948)는 그 대표작으로, 붉은 벽돌담을 배경으로 광부의 아내가 클로즈업되고 뒤쪽에 손자를 안고 앉아 있는 광부 할머니, 벽돌담 사이에 직사각형으로 뚫린 문, 그리고 문 바깥에 헬멧을 쓰고 검은 옷을 입은 두 명의 광부와 채탄창고 혹은 제련공장이 보인다.그 밖에 《해방》(1945), 《굶주림》(1946) 등을 통해 빈곤 속에 방치된 어린이를 그려 삶의 고통과 슬픔을 작가의 따뜻한 시선으로 보여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주로 석판화가나 사진작가로서도 활동하였다. /naver
1897 - 프랑스의 물리화학자 이렌 졸리오퀴리(Joliot-Curie, Irène) 출생
졸리오퀴리 [Joliot-Curie, Iréne, 1897.9.12~1956.3.17]
이렌 졸리오 퀴리는 남편인 프레데리크 졸리오 퀴리와 함께 노벨 화학상을 공동수상한 프랑스의 물리화학자이다. 그녀는 노벨상 수상자였던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의 딸로서, 인공적으로 만든 새로운 인공 방사성 원소를 발견하여 남편과 함께 1935년 노벨 화학상을 공동수상했다. 그들은 1928년에 공동으로 논문을 발표했는데, 연구과정 중에 질소·인·알루미늄과 같이 보통 방사성 원소가 아닌 원소들의 방사성 동위원소를 얻었다. 이 발견으로 화학적 변화와 생리적 과정을 추적하는 데 인공적으로 만든 방사성 원소들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것은 곧 여러 분야에서 응용되었다. 이들 부부는 중성자와 양전자가 생성되는 것도 관찰했다. 이렌은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책임을 중요시해서 1934년 사회당에, 1935년 파시즘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의 경계위원회에, 그리고 1936년에는 인민전선 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과학연구 부서의 정부 차관으로서 J. 페랭과 함께 나중에 국립과학연구소가 된 단체의 기금마련을 도왔다. 이렌은 행정관리로서 그녀의 과학적 경험과 능력을 활용해 원료 취득·우라늄 조사 및 추적장치 건설 등 여러 일에 헌신했고 1946년에는 라듐 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1956년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 퀴리처럼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브리태니커
"이렌 졸리오 퀴리는 부모인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가 이루어낸
방사능 발견으로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에 태어나,
말 그대로 방사능과 함께 자라났다.
결국 그녀 자신도 온 생애를 방사능 연구에 바쳤다. "
- 제임스 채드윅, <네이처>에 실린 사망기사에서
1894 - 콜롬비아의 3선 대통령 라파엘 누녜스(Núñez, Rafael) 사망
누녜스 [Núñez, Rafael, 1825.9.28~1894.9.12]
콜롬비아의 3선 대통령.
1880년부터 죽을 때까지 콜롬비아 정치를 지배한 독재자이다.
법과대학 재학시 자유당에 들어가 정치에 입문했고 하원의원으로서 콜롬비아 최초의 자유주의 헌법(1853)을 기초하는 데 참여했다. 자유당의 장기집권 기간 동안 여러 대통령 밑에서 각료로 일했다. 1863년 유럽으로 건너가 다양한 정부형태를 연구했으며 정치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급진적인 사상을 대부분 포기하게 되었다. 1875년 콜롬비아로 돌아왔고 이듬해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지만 급진당이 후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낙선했다. 1880년 자유당과 보수당 온건파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1880~82)에 당선되었다. 1884년 급진당과 자유당이 반발하자 보수당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여 2번째로 대통령(1884~86)에 올랐다. 1886년의 헌법으로 누녜스 정권은 강화되었고 50년에 걸친 보수당 지배가 시작되었다. 그는 ' 재생'이라는 이름 아래 지방자치를 중앙집권으로 전환하고,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했다.
선도적 지식인이었던 그는 정치·경제 정책에 관한 저작과 몇 권의 시집을 남겼다. 농장에 머물면서 보고타의 보좌역들에게 빈번히 직무를 위탁했고 농장에서 죽었다. /브리태니커
1888 - 프랑스의 샹송가수, 영화배우 모리스 슈발리에(Chevallier, Maurice) 출생
슈발리에 [Chevallier, Maurice, 1888.9.12~1972.1.1]
프랑스의 정감있는 뮤지컬 코미디 스타.
1930년대초 뮤지컬이 영화의 한 장르로 자리잡는 데 큰 몫을 한 재치있고 세련된 영화배우로 잘 알려져 있다. 지팡이를 들고 밀짚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과장된 프랑스어 억양으로 말하는 것이 특징이었던 신사풍의 배우로, 연극인으로서 국제적인 명성도 얻었다.
1901년 파리에서 카페의 가수로 연예활동을 시작했으며, 1920년대 프랑스 뮤지컬 레뷰의 유명한 연예인이었고 프랑스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가 처음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 〈파리의 순진한 사람 The Innocents of Paris〉(1929)은 명랑하고 매력있는 인기 뮤지컬의 표본이 되었고, 그뒤 가끔 자네트 맥도널드와 함께 공연하면서 같은 유형의 뮤지컬 〈사랑의 퍼레이드 The Love Parade〉(1930)·〈당신과의 한 시간 one Hour with You〉(1932)·〈오늘밤 사랑해주세요 Love Me Tonight〉(1932)·〈즐거운 과부 The Merry Widow〉(1934) 등에 출연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를 순회하며 연예인 생활을 계속했다는 이유로 인기가 떨어지기도 했으나, 전쟁이 끝난 뒤 적국에 협력했다는 혐의를 벗었다. 후기 영화로는 〈오후의 사랑 Love in the Afternoon〉(1957)·〈지지 Gigi〉(1958)·〈캉캉 Can-Can〉(1960)·〈화니 Fanny〉(1961) 등이 있다. 50년 이상을 연예계에 헌신한 공로로 이유로 1958년 아카데미 특별상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 'Iphigenia'
1829 - 독일의 화가 안젤름 포이어바흐(Feuerbach, Anselm) 출생
포이어바흐 [Feuerbach, Anselm, 1829.9.12~1880.1.4]
독일의 화가.
낭만적 고전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린 19세기 중반의 중요한 독일 화가들 중 한 사람이다. 고전을 연구한 고고학자의 아들이며 철학자인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조카였다. 뒤셀도르프와 뮌헨에서 미술을 공부한 뒤 파리에 2번 다녀왔는데, 파리에서는 토마 쿠튀르의 공방에 들어가 일하면서 쿠르베와 들라크루아의 영향을 받았다. 1855~73년 이탈리아에서 살았으며, 그의 대표작들은 주로 이 시기에 나왔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미술과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의 회화에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서정적이고 애조를 띤 이상화된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가장 중요하고 독창적인 작품은 1860~65년 난나 리시를 모델로 해서 그린 조각 같은 형태의 초상화 연작(예를 들면 〈난나 Nanna〉, 1861, 슈투트가르트 주립미술관])과 그의 계모 헨리트 포이어바흐를 모델로 한 라파엘로풍의 초상화들이다. 1873년 빈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으며, 그 아카데미의 건물에 〈거인족의 몰락 Fall of the Titans〉을 그렸다. 이것은 그의 그림들 중 가장 서투른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포이어바흐는 이 작품에 대한 가혹한 비평에 낙담한데다가 병에 걸려 1876년 빈을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브리태니커
1819 - 프로이센의 장군 게프하르트 폰 블뤼허(Blücher, Gebhard von) 사망
블뤼허 [Blücher, Gebhard Leberecht von, 1742.12.16~1819.9.12]
프로이센의 군인.
로스토크 출생. 1756년 처음에는 스웨덴군(軍)에 복무하였으나 7년전쟁(1756~1763) 때 프로이센군의 포로가 된 이래 프로이센군으로 복역하였다. 1793∼1794년의 대 프랑스 전쟁에서 전공을 세우고, 1794년 하(下)라인지구군단 사령관, 뮌스터 군정장관이 되었다. 1806년의 예나 전투에서는 후방 사령관이 되어 군을 지휘하였고, 틸지트조약 후에는 포메라니아군 사령관으로서 프로이센 개혁과 해방전쟁을 주장하다가, 1811년 나폴레옹 1세에 의해 파면되었다. 1813년 해방전쟁의 개시와 함께 프로이센 ·러시아 연합군의 사령관이 되어 각지에서 선전(善戰)하였으며,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을 격파, 1814년 3월 파리에 입성하였다.
그의 신속 과감한 작전을 높이 평가하여 이 때부터 그를 ‘전진 원수(前進元帥:Marschall Vorwarts)’라고 부르게 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자 다시프로이센군의 야전군 사령관이 되었고, 워털루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나폴레옹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등 해방전쟁의 최종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해방전쟁의 영웅으로 불렸다. /네이버
1764 - 프랑스의 작곡가 장 필리프 라모(Rameau, Jean-Philippe) 사망
라모 [Rameau, Jean-Philippe, 1683.9.25~1764.9.12]
프랑스의 작곡가 ·음악이론가.
디종 출생. 일찍부터 하프시코드와 오르간 연주자로 활약하였고, 1723년 파리에 정주하면서부터는 극장에 내놓을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호평을 받았다. 만년에는 프랑스의 악단을 통솔하는 궁정실내악 작곡가가 되었고, 죽기 직전에 귀족에 봉해졌다. 기악 작곡가로서의 그는 F.쿠프랭(1668∼1733)과 함께 표제적(標題的) 경향의 모음곡을 다수 작곡하였으며, 발레 ·오페라 분야에서는 J.B.륄리에 의해 기초가 확립된 프랑스의 국민적 오페라 ·발레양식을 더욱 발전시켜, 음악적으로 보다 우월하게 하는데 공헌하였다. 음악이론가로서 그의 큰 업적으로 지목되는 저서 《화성론》(1722)은 음악의 표현력을 추구한 작품으로, 3도구성(三度構成)의 화음을 확실하게 한 근대 화성학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역작이다. /네이버
- 'Francois I', by Jean Clouet
1494 -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François I) 출생
프랑수아 1세 [François I, 1494.9.12~1547.3.31]
프랑스의 국왕(재위 1515∼1547).
코냐크에서 태어났다. 프랑스르네상스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앙굴렘 백작 샤를 드 발루아의 아들로서, 1514년 국왕 루이 12세의 공주 클로드와 결혼, 루이 12세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천성이 명랑하고 활달하였으며, 낙천적이고 무인(武人)의 호방함을 지닌 한편, 기지와 우아한 감각도 지녔다. 즉위하자마자 이탈리아에 원정, 마리냥에서 승리를 거두어 밀라노를 손에 넣었다. 1519년, 독일 황제의 선거에 출마하여 합스부르크가(家)의 카를 5세에게 패배하였다. 이어서 카를 5세에게 도전, 1525년 이탈리아의 파비아에서 싸움에 져, 포로가 되어 유폐되었다.
이듬해 1526년 석방되자 다시 카를과 전쟁을 벌여, 싸움은 1544년의 화의(和議) 때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왕은 이탈리아를 통하여 고대의 학문과 예술에 심취, 루아르 강변에 르네상스 양식의 성관(城館)을 세우고, 고전학자들을 초빙하여 ‘휴머니즘(인문주의)’의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nave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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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첫댓글 우표에 대한 상식 많이 얻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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