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파 하동주
1. 생애 및 머리말
거제도 출신의 성파(星坡) 하동주(河東洲 1869~1943) 선생은 영남(嶺南)의 서예 대가로 현재 경상도에서 활동하는 서예인들의 큰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던 분이다. 근대서예사의 실질적 개창자로 이름을 남긴 분들의 실제 스승으로서 1910년대 이후 다채로운 활약을 보였다. 비록 근대적 표현 방법이나 서법의 독자성을 뚜렷이 빛내지는 못하였으나 전통서체로서 한 시대를 대표하며, 근대 서예계 형성에 큰 기여를 하신 분이다. 1869년 2월1일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437번지 하지호(河志灝 1827~ 1886)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성파(星坡)는, 경남 마산 진주 등으로 나가서 명성을 떨쳤고 1943년 11월5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결같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체를 써 온 동양의 명필로, 거제도가 배출한 자랑스러운 예술인이다.
그의 나이 60세를 넘긴 때부터 전국적인 서예가로써 그 명성이 절정에 달하였다. 조선 말기와 구한말에는 대부분 실제 출생년도보다 늦게 호적에 올리는 경향이 있었지만, 성파의 호적상 출생연도는 1869년이다. 거제면사무소에 현재 기재되어 있는, 제적부(除籍簿) 기록인 1869년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919년 11월 18일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사 내용을 언급하면, “원래 하동주(河東洲) 선생은 통영군 거제면 하씨 성을 가진 분으로 호(號)가 성파(星坡)이고, 조선의 명필 前 참판 김정희(金正喜) 추사공(秋史公)의 제자인 하지호(河志灝)는 호(號)가 송곡공(松谷公)으로, 성파의 아버지이다. 성파는 1874년 6살부터 그의 선고(先考) 하지호(河志灝)의 전문으로 성과 한 추사공 서법을 배워 우금 40여 년에 손에 붓을 놓지 않아서 필정(筆精)이 귀신이 드러났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성파(星坡)는 추사선생으로부터 직접 필법을 사사한, 선고(先考) 하지호(河志灝) 공이 돌아가신, 18세 때인 1886년 유지를 받들어 본격적으로 서예에 입문하였고, 63세 때 영남루(嶺南樓) 편액을 쓰셨다 한다. 성파는 선고(先考)의 유훈을 소중히 가슴에 담아, “시와 글씨로써 선조의 업으로 삼는다[詩書遺業]”는 신념을 굳게 지키며, “담박해야 뜻을 밝힐 수 있다[澹泊明志]”는 정신으로 평생을 종이와 붓, 벼루와 함께 하셨다.
성파는 서예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43세 때인 1911년 12월 19일 거제군 거제공립보통학교(現 거제초등학교) 학무위원(學務委員)으로써 유공환(兪公煥), 조석근(曹錫瑾), 김경식(金敬植), 옥유환(玉有煥) 등과 함께 임기 2년 명예직을 역임하였다. 거제공립보통학교는 1907년 2월 10일 당시 고희준 거제군수가 주창해 김경식, 유공환, 염상수 등이 협력해 모은 기금 3,800환으로 사립 거제보통학교가 시초이다. 4년제 사립 거제보통학교로 출발하여 공립 거제보통학교(1911년), 거제성내심상소학교(1938년), 거제성내공립초등학교(1941년), 거제공립초등학교(1945년), 거제초등학교(1949년)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학무위원을 역임하던 당시 거제시 거제면 ‘반곡서원 동록당’과 학교 건물 ‘거제 기성관’ 편액문도 그가 쓴 글씨였다. 우리나라 관공립학교 학무위원은 1911년 처음 임명되었는데 지역사회의 덕망 있는 유지(有志)들로 구성하였다.
1910년경부터 성파는 이미 전국적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서울에는 소당 김석준(小堂 金奭準), 안동에는 소우 강벽원(小愚 姜璧元), 진주에는 성파 하동주, 대구에는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 등의 서체(書體)가 중국, 일본에서도 칭찬받기에 이르렀다. 성파의 옛 신문 기록을 종합해 보면 1911년, 1919년, 1920년 모두 주소지가 現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437번지로 되어있다. 선생이 50여 세를 넘긴 그때까지도, 거제시에 주소지를 두고 있으면서 경남 여러 지역으로 다니시며 활발한 활동을 하신 것으로 보인다. 이후 60세가 지난 후부터 전라도 순천, 해남, 전주, 경남의 밀양, 진주, 마산, 통영, 양산, 함양, 합천, 사천, 고성은 물론, 부산∙서울까지도 두루 다니셨다.
1930년대 신문기사를 보면, ‘원당 하성파선생의 유서전람회 개최’, 조선중앙일보사 전주지국 후원으로 “제2의 완당이라 칭하는 성파 하동주 선생”의 전람회를 개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32년 9월 16일 전남 순천 서화전람회, 1933년 7월 4일 전주 서예전람회 개최 등 대부분 경남과 호남에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한 선생은 1940년대 초까지 이어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양산 통도사, 고성 옥천사, 부산 범어사, 통영 안정사와 용화사 그리고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에 걸어 놓은 큰 글씨의 현판(懸板)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족자와 병풍 등이 있다.
그러나 김정희에게 직접 추사체를 배웠다거나 직접 동록 정혼성 선생께 전예서(篆隸書)를 전수 받았다는 전언은 사실과 다르다. 1851년 북청으로 유배 간 추사는 다음해 풀려나 1856년 과천에서 사망할 때까지 평생 거제도에 온 적이 없었으며, 거제의 동록 정혼성(東麓 鄭渾性, 1779~1843) 선생은 1843년 3월에 사망하여 하동주의 출생년도 1869년과 시대적 상황이 일치하지 않는다. 다만 성파의 부친 하지호는 1827년생이니 어린 시절 거제면 지역에서, 거제도 최고의 학자였던 동록 선생의 서당에서 한학과 서예를 배웠음이 틀림없다. 동록 선생은 당시 거제, 통영, 고성 인근 최고의 학자이자 명필가(名筆家)로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의 문하에서 공부했기 때문이다.
2. 서예 작품 및 평가
일생을 거제시와 진주시 인근지역에서 주로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고, 진주지역의 서예가로 활동한 은초 정명수와 도연 김정에게 추사체를 전수하여 지금까지 그 서맥(書脈)이 이어지고 있다. 추사체의 맥을 이은 전통 서예가로서, 추사체 특유의 강직함을 잘 살려 신(神)의 경지에 올랐다는 평을 받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서울 종로 선학원 법당 중앙선원(中央禪院) 편액, 양산 통도사, 고성 옥천사 백련암(白蓮庵), 부산 범어사 종루(鐘樓)와 관음전(觀音殿), 통영 용화사 용화전(龍華殿), 벽발산 안정사 명부전(冥府殿), 그리고 진주 월아산 청곡사와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아랑사 편액, 동래 범어사, 통도사 극락암의 원광(圓光), 진주 의곡사 대흥루, 경남 사천읍성(산성)의 수양루(洙陽樓), 보몽관(保朦舘), 경남 함안 여항산 원효암 독성각(獨聖閣), 칠성각(七星閣), 산령각(山靈閣), 함양 구천서원 은성재(恩成齋), 합천 신천서당 류하정사(柳下精舍), 사천시 다솔사 적멸보궁 (寂滅寶宮)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족자와 병풍 등이 있다.
어떤 이는 평하기를, "성파의 글씨는 혹독하게 완당을 모사(模寫)하여 신의 경지에 들었으나, 한스러운 것은 그 용의(用意)를 잡지 못하고 먼저 그 보(寶)를 보았다는 것이다." 이는 성파의 글씨가 추사 김정희를 모사하여 기교는 신(神)의 경지에 들었으나 글씨 쓴 사람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아, 격물치지(格物致知)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추사체의 획(劃)과 선으로 이어지는 공간 구성에 의한, 추상(抽象)의 경지에까지 도달하는 서축(書軸)을 이어받았고 추사의 서체를 전승∙계승 발전시켜 추사체를 더욱 안정(安靜)∙평온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그 서맥(書脈)을 잇게 한 분이셨다. 한편 추사 생존 시부터 추사의 글을 흠모하여 따라 쓴 분들이 많아서 추사서파를 이루기도 했는데, 특히 추사의 문하생이 너무 많아서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부분 추사의 제자들은 추사체를 전승해 이어가지 못하였지만, 오직 추사서를 흠모하여 연구하고 그 서맥(書脈)을 일으켜 지금까지 서예의 일가를 이룬 분으로는 성파만이 유일한 듯하다. |
첫댓글 유현쌤은
읽기에도 힘든 위의 글을 쓰시느라
재미있죠~ ㅎㅎ 재미없음 안하죠.
눈 아파라.
의문?(궁금)하면 오백원 아니고
오백나한이 되고, 공부하는거고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글씨.
왜 시작을 했던고???
동곡 선생의 정씨 가문이 사돈댁일가인 듯.
시외조부 어른이 거제군수였다니.
혼서지, 사주단자의 예법, 글씨가 예사롭지 않아 기억하고 있음.
오늘은 해인사의 희랑대사 승상,
청량사의 석조여래좌상을 봤어요.
사각형 대좌, 탑의 옥계석에 낙수면 없는
층급받침 같아서. 무식하니 궁금해 찾아보고 사각형 대좌가 꽤 있어요.
머리 속에는 온통 연꽃 대좌만 그렸으니
여태 눈 뜬 장님으로 다녔나.
눈도 어두워 글씨는 흑임자로 보입니다.
유현쌤도 제 나이 돼보슈.....
청량사의 석조여래좌상이 지금도 이렇게 모셔진거라면 건의해야 할 상태아닌가요.
석조여래좌상, 광배의 수평 받침돌을 좀더 안정적이게 놓는 방법이 있을 듯- 도깨비님이 정답 알고 계시죠~~~
길게 써서 죄송합니다^^
악어와 악어새??? @@
공부안할게요.
머리가 많이 아파요.
모르는게 많아서.
공부란 세월과 함께 쌓이는 주름과 같으니, 배웠다면 몸에 새겨 일상에 드러내야 한다.(논어, 조윤제 역).
예전에 답사 다니면서 했던 말 중에 하나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공부"라고 했었죠.
사람 한 명, 한 명을 아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어찌보면 전 문화재보다 사람에 더 관심이 많고, 문화재에 담긴 의미에 더 관심이 많은 부류인 거 같아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4.03.08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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