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났던 내 청춘/ 조영안
친정집 거실과 마주하고 있는 가운데 방에는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가 여러 개다. 깔끔한 성격의 아버지가 자식들의 결혼사진과 빛바랜 흑백의 할머니 사진을 나란히 걸어 두었다. 갈 때마다 그것을 보며 할머니께 인사한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사진 한 장이 없다. 얼굴도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고추밭에 터 팔았다고 생일날이면 오일장 가셔서 큰 간 갈치 한 마리를 새끼줄에 매달고 오셨던 분이다. 사진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항상 아쉬웠다. 그나마 할머니는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큰방에 가면 아버지와 엄마의 사진이 있다. 곱게 차려입고 찍은 영정사진이다. 한때는 걸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큰 남동생한테 말했던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그냥 두라고 한 게 벌써 10년이나 되었다. 묘하게도 지금은 더 정감있게 다가온다. 사진이 전해주는 느낌은 이렇듯 시시때때로 달라지나 보다.
요즘은 사진을 찍어도 디지털로 저장되어 굳이 인화하지 않는다. 옛날에는 아이들 백일, 첫돌은 기본이고 입학, 졸업 때도 사진으로 남기는 게 당연했다. 인화해서는 거실이나 방 천장 아래 액자에 넣었다. 식구가 늘어갈 때마다 이중, 삼중으로 겹치기도 했다. 오가면서 수시로 눈길이 갔다. 친구 집에 놀러 가도 한참 동안 쳐다보곤 했다. 가족의 구성이나 화목한 정도를 짐작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때가 정감이 있었다.
나는 유난히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예쁘게 나오지 않아 카메라를 원망했던 적도 많았다. 속된 말로 사진발이 전혀 받지 않았다. 여고 2학년 때 문학회 회원들과 무인도로 나들이 갔다. 선배가 가지고 온 기타를 메고 풀밭에 다소곳이 앉았다. 흰 벙거지 모자를 쓰고, 줄무늬 초록색 티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때와는 달리 너무 예쁘게 나와 나 자신조차 "너. 누구니? 정말 예쁘다." 했다.
그 후로는 예쁘게 나온 사진을 한 장도 건질 수 없었다. 모두 맘에 들지 않아 서랍에 넣어 두었다. 스무 살이 넘어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했다. 구례 화엄사로 직원 야유회를 떠났다. 마산을 떠나 남해고속도로 섬진강 휴게소에 들렀다. 누군가 단체 사진을 찍자고 했다. 이어서 개인 사진을 찍는데 나는 이번에도 잔디밭에 앉았다. 청색 모자를 쓰고, 보라색 상의에 청바지를 입었다. '그래, 이 사진이다.' 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찍은 사진 중에서 두 번째로 마음에 들었다.
세 번째 사진은 역시 결혼사진이다. 화장발 덕분에 가장 아름답게 꾸미긴 했으나, 사진이 내 맘에 쏘옥 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 소장품으로 정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한 장도 남지 않았다. 지금은 면사포를 쓴 내 모습만 남편의 지갑에 남아있다. 나는 그 사진이 있는지도 몰랐다.
딸아이가 초등학생 시절, 백일장에 나가 3년 연속으로 초등부 최우수상을 받았다. 두 번째 참여한 대회의 시제가 '사진'이었다. 세 가지 주제로 쓴 글에 우리 결혼사진 이야기가 있었다. 남편과 심하게 다툰 날, 사진을 모두 찢어버렸다. 그런데 딸아이의 글에 아빠 지갑에 엄마 얼굴만 반쪽 들어 있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는 가족사진이 없어 친구 집에 가면 부러웠다는 내용과 날마다 할아버지 영정사진을 닦는 할머니를 애틋하게 바라본 이야기도 들어 있었다. 앞으로 가족사진을 찍으면 할아버지 영정사진을 들고 맨 앞자리에 앉을 거라는 찡한 내용으로 글을 마무리했다. 지금도 잘하고 있지만 이럴 때면 딸아이가 참 대견해 보인다.
네 번째는 큰아이를 낳고 젖을 내놓은 채로 수유하고 있는 장면이다. 남편이 몰래 찍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 사진이 맘에 들었다. 엄마와 아이의 평화로운 표정과 뽀얀 젖무덤에 묻혀 젖을 먹고 있는 아기는 환상적이었다. 부스스하게 부기가 내리지 않은 내 모습도 예쁘게만 보였다. 아마도 한 생명을 탄생시킨 엄마였기에 그렇게 밉지 않았나 보다.
이제는 사진에 나를 담기보다는 찍어 주는 걸 더 좋아한다. 어쩌다 카메라 앞에 서게 되어도 뒤쪽에 서거나 잘 안 보이는 곳에 서서 얼굴을 숨긴다. 단체 사진을 찍으면 항상 중앙에 서거나 앞쪽으로 서라는 지적을 받는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없다. 너무나 변해 버린 나를 더 이상 남기기 싫다. 그래서일까. 인물 사진보다 풍경을 주로 찍는다. 사진을 찍는 지인이 있어서 조언도 많이 받았다. 출사를 나갈 때 따라다니면서 배운 덕에 멋진 풍경 사진은 많이 저장해 두었다. 뚱뚱하고 못난 나지만, 한 번쯤은 남기고 싶다. 맘에 드는 넉 장의 사진을 보물인 양 간직하고 있다.
다섯 번째로 멋진 나를 찍을 날이 언제일지는 모르겠다. 꼭 맘에 드는 넉 장의 사진, 힘들고 지칠 때면 이 예쁜 사진들을 본다. 빛났던 내 청춘의 모습이기에.
첫댓글 실패를 거듭해야 성공한다는 말은 사진에도 통합니다.
자꾸 찍어야 자신이 이쁘게 나오는 순간을 알게 됩니다.
저처럼요. 하하하!(실물보다 사진이 이쁘게 나온다는 말을 듣는 1인이 접니다.)
그래도 자신이 없답니다. 한 번쯤은 멋진 사진을 남겨야 하는데 도전 해보려구요.
사진이 역사죠. 저도 오늘 한번 쭉 훑어 봐야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는 앨범에 사진 정리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지요. 역사 맞구먼요.하하
저도 방학이면 사진 정리하는 게 일이었죠.
요즘은 모두 저장이 되니까 앨범을 정리할 필요가 없더군요. 사진첩은 거의 보지 않는답니다.
저도 이쁜 사진만 봐요. 안 이쁘게 나온 건 저 아니예요. 도전해 보시면 가끔 걸립니다.
그러지 않아도 노력중이랍니다. 하하하.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게 정답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부족한 글을 매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네요.
지나온 자취는 사진이 증명해주더군요.
조영안님의 사진은 르노아르의 그림처럼 따뜻하고 정겹습니다. 사진구경 잘 했습니다.
반갑습니다.
사진구경 어디서 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