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유류가 생명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생긴 수정란이 자궁에 내려앉아 자라면 아기가 된다. 시험관 아기도 마찬가지다. 시험관에 정자와 난자를 수정시켜 배아를 만들긴 하지만, 실험실에서 아기를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배아는 엄마의 자궁에서 길러진다. 엄마가 아기를 낳는다는 공식은 생명의 절대 규칙이다.
그런데 영국 케임브리지대와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줄기세포 연구를 이끄는 막달레나 제르니카-괴츠 교수는 지난 8월 네이처에 낸 논문에서 또 다른 ‘생명 레시피’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 제르니카-괴츠 교수는 쥐의 배아줄기세포(ESC)와 영양 배아줄기세포(TSC), 유도된 배외내배엽줄기세포(iXEN)를 조합해 합성 배아를 만들었다.
정자와 난자 없이 만들어진 이 배아는 이스라엘 바이츠만연구소의 분자생물학자인 제이콥 한나 박사가 만든 인큐베이터에서 배양됐다. 8.5일 동안 성장하면서 박동이 시작된 심장을 형성했다. 신경관과 신경 줄기, 전뇌와 중뇌 영역을 갖춘 머리, 내장과 꼬리까지 관찰됐다. 줄기세포로 만들어진 합성 배아를 쥐의 임신 기간 절반인 8.5일까지 성장시켜낸 것이다.
자궁 속에서 배아는 엄마 몸에서 화학적 신호를 읽어 들여 차츰 형체를 만들어간다. 제르니카-괴츠 교수는 다양한 줄기세포 조합과 한나 박사의 기계를 이용해 이 신호를 모방했다. 그 결과, 합성 배아는 자연 배아와 흡사하게 성장했다. 하지만 100% 똑같은 건 아니다. 장기 크기에서 차이가 있고 부분적인 결함이 있었다. 이 합성 배아를 쥐의 자궁으로 옮겨서 자라게 한다고 해도 완벽한 아기 쥐가 되지는 못한다.
그래도 이 합성 배아를 대량으로 만들어 활용한다면 배아 연구의 속도도 매우 빨라질 것이다. 또한 인간 세포로 만든 합성 배아가 자연 배아와 똑같은 장기 형성 단계까지 간다면, 더는 환자들이 장기 기증인을 기다리다 목숨을 잃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장기의 대량 배양이 가능해질 테니까.
2017년 미국 미시간대 생명과학자 지안핑 푸 교수는 사상 최초로 배아줄기세포를 배양해 합성 배아를 만들었다. 합성 배아는 원시선을 만드는 단계까지 갔다. 원시선은 척추 형성의 첫 징후로 인간 발생의 첫 단계로 취급된다. 그리고 지난해 3월엔 호주 모나쉬대학교와 미국 텍사스남서부 메디컬센터가 각각 인간의 배반포와 유사한 합성 배아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배반포는 수정된 뒤 5일 후 형성되는 세포 덩어리로 이 배반포가 자궁에 착상하면서 여러 신체 기관이 만든다.
지난해 4월엔 중국 쿤밍대학과 미국 소크생명과학연구소가 원숭이 배아에 인간 만능줄기세포를 주입해 ‘키메라’ 배아를 만들었다. 키메라는 다른 종을 섞어 만든 잡종의 세포나 배아 등을 말한다. 이 세포는 2주 이상 생존했다. 원숭이 배아에서 인간 장기를 키워낼 수 있을까. 성공만 한다면 수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놀라운 연구다. 다만, 인간과 동물의 혼종이 나올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모든 나라들이 예외 없이 동물 배아를 인간의 자궁에 착상시키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그동안 생명과학 연구를 제약했던 강력한 규칙이 ‘14일 규칙’이다. 인간 배아에 대해선 수정된 뒤 14일을 넘겨서 배양하거나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다. 1979년 영국에서 제안된 이 규칙은 가장 공신력 있는 생명과학기관인 국제줄기세포연구학회의 가이드라인에도 엄격히 명문화됐다. 지금은 시험관 아기가 보편화 됐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체외수정은 충격적인 기술이었다. 1978년 세계 첫 시험관 아기인 루이스 조이 브라운이 태어나면서 인간 배아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84년 영국의 윤리철학자 메리 워녹 주도로 인간 배아 연구에 대한 최소한의 규칙이 만들어졌다. ‘14일 규칙’도 그때 채택됐다. 인간 배아는 수정된 뒤 14일이 지나면 원시선이 나타난다. 원시선을 시작으로 장배 형성이 본격적으로 일어난다. 장배형성은 척추, 장기 등 인간의 신체를 형성하는 주요 기관들이 DNA에 새겨진 대로 발생하는 걸 말한다. 14일이 지나면 ‘인간다움’의 기본적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정자와 난자가 만든 수정란은 분할을 거듭하다 뽕나무 열매를 닮은 상실기를 거친 뒤, 자궁에 착상하고 배반포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착상 직후 몇 주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놀랍게도 알려진 게 거의 없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인간 발생의 첫 몆 주를 알지 못한다는 뜻에서 ‘블랙박스’라고 부른다. 그 뒤 인간 형태가 나타나고 크기가 커지면 초음파로 구조를 엿볼 수 있지만 초기의 태아는 초음파로도 거의 잡히지 않는다.
이 때문에 생명과학자들은 ‘14일 규칙’을 풀어달라는 요구를 끊임없이 해왔다. 드디어 지난해 6월 국제줄기세포연구학회는 이 규칙을 폐지했다. 14일 규칙이 폐지되면서 인간 배아 연구의 범위가 크게 확장됐다. 다만 연구자들이 혹시 닥칠지 모르는 백래시(backlash, 반발)를 걱정하는 분위기여서 당장 놀라운 연구가 잇따를지는 않을 것으로 학계는 전망하고 있다.
영화 <아일랜드>를 보면 부유하고 병든 인간이 자신의 장기를 대체할 인간을 키우는 미래상을 묘사하고 있다. 영화는 생명과학의 발전이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로 우리를 데려갈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지나친 상상일지 모르지만, 배아 공장을 만들어 아기를 대량 생산해내고 영화처럼 장기 배양용 인간을 양산하고 두려움 모르는 인간 병기를 찍어내는 일이 혹시 생기지 않을까.
불안한 대중을 설득하지 않고 규칙을 없앤 이 결정이 어떤 결말을 낳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이미 인간-동물 합성 배아가 만들어지고, 실험실에서 생명의 씨앗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기술까지 온 현 상황에서 말이다. 대중의 불안감에 불을 지필 일이 생긴다면 생명과학 분야의 발전엔 큰 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 미국 헤이스팅스센터의 윤리학자 조세핀 존스턴은 “14일 규칙을 없애는 건 대중의 신뢰를 흔들 수 있다. 연구자들은 이 규칙을 폐지하는 것이 인류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설득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