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 위의 삽화
문희숙
문밖엔 유행가와 농담이 뒹굴었다
뭉툭한 댓돌 위엔 길과 길의 화석들
오후의 라디오에선 백일홍 피는 소리
폐허와 폐허가 동거하는 나른한 집
저녁을 쓸어내던 몽땅한 대빗자루
일몰의 그물에 기대 반눈 뜬 채 졸았다
늘어진 벽시계도 긴 잠에 녹아 있다
봄비에 눈을 뜨는 가죽나무 새순 너머
까치가 졸고 있는 집 풀밭 위에 누운 집
-《시와소금》2022.봄호
겨울 야상곡
문희숙
한 번 떠난 바람은 다시 오지 않았네
얽힌 나뭇가지에 부리 묻고 누인 날개
느슨한 활처럼 나는 게으르고 위험했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한통속으로
머리가 꽃밭*이네 유행가네 진창이네
문간에 수북한 날들 갈 데 없는 그 겨울
쓸쓸한 뒤통수는 일몰에 붙잡혔네
넝마 같은 이불 위로 조금씩 새는 지붕
빗소리 무릎 젖는 밤 목이 탔네 도무지
*현실성 없는 긍정에 대한 냉소적 신조어
일몰
문희숙
오랜 입구를 향해 그가 흙을 끌어내린다
흙을 향해 터벅터벅 모두가 내려간다
어둠에 고삐 맨 마차를 타야 할 신부로서
내 넝마의 가을도 등고선을 넘었다
한 켤레의 유혹과 혼돈이 스쳐 가고
노을이 헤엄쳐 온다 나는 곧 맨발이다
천국 사재기
문희숙
나는 아무 옷이나 입고 사는 옷걸이
사각 유리 안에서 삶을 파는 마네킹
생이란, 상처의 벽돌로 천국을 짓는 위무慰撫
나는 이 도시에서 사계절을 다려 입고
영혼의 즙을 짜는 연금술의 도제공
찬란한 광고판 아래 품바의 거리에서
나는 지금 떠도는 유령을 둘러쓰고
아무 데도 없으나 존재하는 저 바람
안개가 서식하는 곳 천국을 사러간다
미완
문희숙
사과 먹은 엄마가 나를 반 만 낳았다
반쪽 황무지에서 반으로 접힌 내가
그리운 오두막집을 슬쩍 그려 보았다
나는 외눈박이 꽃 해가 뜨고 질 동안
마을의 수용소에서 자화상을 그린다
깨끗한 휘발유처럼 타오르던 한때를
메뚜기 쳐다보듯 뱀이 나를 보았을 때
뱀은 이미 술래였고 나는 독안에 든 새
에덴의 동굴이었고 나는 아직 반이다
분재나무 미인대회
문희숙
전족을 한 여자들 화분위에 앉았다
굽 높은 구두 신고 잔도에서 부은 발
꼿꼿이 생의 모반을 마주하고 있었다
영하의 하늘 아래 새파란 눈 뿌리고
단단한 쇠줄에 고인 한 뼘 흙 속에는
어두운 생채기들이 먼 길을 바라본다
피사에선 사탑이 하루만큼 기울고
꽃핀 적벽 앞에는 꼬부라진 감옥들
정원의 미학을 위해 그물 속에 묶였다
-《시와소금》2022.봄호
ㅡㅡㅡㅡ문희숙 시인ㅡㅡㅡㅡ
*1960년 밀양시 삼랑진 출생. 1970년 밀양 아랑제 백일장 초등부 시조 입상. 1970년 이후 시조 공부 시작 중고등부 일반부 등 시조 백일장 다수 입상. 1996년 《중앙일보》 지상 백일장에서 ‘봄비’로 연말 장원 등단. 2007년 오늘의 시조 제1회 젊은 시조 시인상 수상.
* 2008년 저서 「정완영 연구」 펴냄. 2016년 시조집 『짧은 밤 이야기』 간행. 2017년 통영문학상 ‘김상옥시조문학상’ 수상.
* 2017년 시조집 『둥근 그림자의 춤』 간행. 2021년 연구서 『길 위의 길』(공저) 발간. 2021년 시조시학상 수상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