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월28일 [(녹) 연중 제4주일 (해외 원조 주일)]
[수도회] 진정 자유로운 삶의 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신명 18,15-20
○ 제2독서 1코린 7,32-35
† 복음 마르 1,21ㄴ-28
◈ 오늘의 묵상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시편 저자의 말씀은 참된 신앙인이 향해야 할 중요한 영의 감각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내가 가진 감각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려고 하는지에 따라 우리 인생의 가치와
태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회당에 모인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란 것은, 그들이 듣고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이었습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란, 사람들이
혐오하고,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소외된 이를 뜻합니다.
영이 더러운 사람은 영이 맑은 사람을 보면 시기와 질투가 납니다.
비교되는 자신을 보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그런 더러운 영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한 분으로 알아본 것은 당연합니다. 자신이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하는 분이 나타나셨으니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꾸짖으시자
더러운 영이 달아났고,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습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하고 칭송하면서도 자신들의 더러운
면도 밝혀질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을까 싶습니다.
우리도 맑은 영을 가진 사람을 보면 왠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서로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알고, 서로의 영을 맑게 해 주는 사람들이 만나면 빛이
납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전히 더러운 영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성령께 의탁하면 우리는 맑은 영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을 충실히 섬길 수 있는 행동하는 신앙인
2018년 나해 1월28일 연중 제4주일 (해외 원조 주일)
제1독서
<나는 예언자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18,15-20
제2독서
<처녀는 거룩해지려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7,32-35
복음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ㄴ-28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을 보면서 대신 아파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면서 종종 ‘차라리 내가 아프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괴로워한다면
상대방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요? ‘내가 더 잘 챙겼더라면... 내가 더 잘
했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한들 아픈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러한 예를
하나 들어봅니다.
급한 마음에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뛰어가다가 어떤 분과 부딪쳐서
그분이 들고 있던 짐이 바닥에 모두 떨어졌습니다. 너무나 미안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도망쳤습니다. 대신 계속해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분이 상처받지 않도록 해주세요.’
이렇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를 했으니까 괜찮다고 할까요?
아닙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계속해서 불편한
마음에 힘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망가지 않고 얼른 그의
짐을 정리해주고는 “진심으로 죄송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바로 그 순간 죄책감은 사라질 것입니다.
맞습니다. 생각만으로는 문제의 원인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바로 행동을
할 때에 문제의 원인이 사라질 때가 더욱 더 많습니다. 이는 우리들이
자주 범하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종종 제게 사람들과의 관계가 너무
힘들다는 말씀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미움이 너무 커서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나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견디기
힘들다고... 등등 도저히 그 관계가 해결될 것 같지 않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제가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한참을 생각하십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세요.
“기도밖에 없지요.”
정말로 기도밖에 문제의 해결 방법이 없는 것일까요? 앞서 누군가
부딪쳤을 때 미안하다는 마음을 갖고 기도만 하면 죄책감이
해결되던가요? 아닙니다.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행동을 통해서 문제가
해결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며 말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마르 1,24)
이때 예수님의 대답은 어떠하셨나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라는 꾸짖음이었습니다. 사실 어렵고 힘든 상황이
처해졌을 때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저를 완전히 멸망시키려는
것입니까?’라는 우리의 기도와 비슷합니다. 바로 악의 유혹에 빠져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제1독서는 “그가 내 이름으로 이르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내가 직접
추궁할 것이다.”(신명 18,19)라고 강한 어조로 우리에게 말합니다.
따라서 침묵 안에서 기도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하고
동시에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지금 당장 행동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더러운 영도 복종하는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하면서 행동한다면
못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종종 생깁니다. 그런데 불안의 모양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안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시각일 뿐입니다. 따라서 권위를 가지고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 뜻에 맞는 행동을 한다면 분명히
그 불안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 모두가 걱정 없이 살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십니다
(1코린 7,32 참조). 그래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서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35) 생각만으로는
어떤 걱정과 불안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충실히 섬길 수 있는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것도 당신을 불안하게 하지 못하며, 어떤 것도 당신을 두렵게
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가진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하느님만으로 족합니다(아빌라의 데레사 성녀).
갑곶 앞바다가 녹고 있습니다.
무엇을 쫓아야 할까요?
인류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건강 문제는 ‘풍요의 질병’이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더군요. 비만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이 비만이 치명적인 일상 질환인 당뇨병, 심장병 등을
가져오고, 이로 인한 의료비 지출, 생산력 상실, 사망에 따른 손해액이
자그마치 매년 2조 달러에 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많은 것을 갖는다고 해서, 즉 풍요로움이 행복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모든 것을 가지려면 아무것도 갖지 않아야 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소유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있습니까?
풍요로움을 쫓는 삶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를 쫓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행복이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어제 새벽 성무일도를 바치다가....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진정 자유로운 삶의 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1월28일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신명 18,15-20; 1코린 7,32-35; 마르 1,21ㄴ-28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진정 자유로운 삶의 길
제1독서는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는 죽어야 한다.”
(신명 18,20)며 모든 죄의 뿌리는 우상숭배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상숭배는 생명의 하느님을 떠나는 죽음의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우상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주인이
되려 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육과 세속의 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도록, 세상일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고 주님의 일을 걱정하라'
(1코린 7,32-34)고 권고합니다. 온전히 주님께 마음을 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 회당에서 ‘말씀’과
‘행적’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체험하도록 해주십니다. 그분께서
마귀들린 사람을 해방시켜주시자, 사람들이 이를 보고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마르 1,27)이라며 몹시 놀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준수와 전통을 강조하던 율법학자들과 달리,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와 기쁨으로 다가올 희망을
선포하셨지요. 그분께서는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소통하시며 하느님
체험으로 가르치셨지요. 그 결과 그분의 가르침은 말씀을 듣는 사람들
안에 근원적인 변화와 자비를 불러일으킨 것입니다(1,23-28).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진정한 자유의 길이 무엇인지 성찰해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아닌 것들에 시간과 돈과 정력을 쏟으며
살아갑니다. 매일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SNS 사용에 시간을
물쓰듯 합니다. 하느님과는 무관한 가상현실에 정신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알콜, 게임, 도박, 성, 마약, 스마트폰 등에 중독된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돈과 권력과 재물의 우상뿐 아니라, 수많은 세상일들에
대한 걱정으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궁극적인 자유 자체이신 주님과
상관없이 살므로써 자신을 '영혼의 감옥'에 가둬버리곤 하지요. 이런
뜻에서 우리는 영적, 정신적 노예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참 자유를 바란다면 나를 사로잡는 온갖 우상을 버리고 생명의 하느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더러운 영의 반응은 실은 하느님과 단절된 우리
모습이며, 하느님과 무관하게 자기 의지를 제멋대로 사용하려는 삶과
태도를 말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서 정화해 나가실 온갖 형태의
억압적인 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내쫓고
자유와 생명을 선사하러 오셨습니다(1,25).
따라서 진정 자유를 원한다면, 예수님처럼 온 마음과 정성과 혼을 다해
사랑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와 선을 드러내어 주님과
일치함으로써, 우리는 영혼의 감옥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회적
차원에서도 되어야겠지요. 말씀과 행동이 온전히 일치되어, 너와 나
그리고 이 사회에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드러내는 순간이야말로
경이로운 창조의 때요 진정한 자유의 때입니다.
오늘도 우상을 버리고 주님의 일만을 걱정하며, 하느님의 말씀과 자비,
선을 드러냄으로써, 진정한 자유 안에 머무는 기쁜 날 되길 바랍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오늘 내게 불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2018년 나해 1월28일 연중 제4주일 해외 원조 주일
오늘 내게 불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참으로 특별한 나라임이 틀림없습니다.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해외 선진국들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던 나라였습니다.
있어서는 안될 동족간의 비극 이후, 흔적도 없이 파괴된 나라, 아무것도
없던 나라, 지구상 최빈국이자 최우선 원조국으로 분류되던
나라였습니다.
당시 교회나 수도회를 통해서도 원조가 이루어졌었는데, 구호품이나
구호식량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던 풍경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저도 제몸이나 취향에 전혀 맞지 않던 엄청 크고 튀는
색상의 옷을 배급받아 입고 어색해하던 시절이 아스라히 떠오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이제 우리 대한민국은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탈바꿈했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만
하더라도, 전에는 늘 로마나 독일, 미국이나 스페인 등에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참 많이도 썼습니다.
이제는 상황이 정 반대가 되었습니다. 고마운 분들의 협조에 힘입어
‘한국 살레시오 선교국’이 설립되었고, 여러 나라에서 저희 살레시오
선교국에 도움을 청하는 편지나 도움에 감사하는 편지가 답지하고
있습니다.
큰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 나누는 교회로 탈바꿈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우리 가족만, 우리 교회나 국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시야를 넓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류 공동체
전체를 한 가족으로 바라보는 보편애는,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태도임이 분명합니다.
요즘 와서 ‘미니멀리즘’, ‘미니멀라이프’, ‘미니멀리스트’라는 단어들이
자주 대두되고 있습니다. 다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더 큰 것을 소유할
수 있을까 발버둥치는 세상의 시류를 거슬러 어떻게 하면 작고 소박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생활 방식입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수도자 출신 교황으로서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계시는 삶의 스타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화두이기도 합니다.
교황님께서는 특유의 청빈한 삶을 통해 많은 소유를 자랑이요 미덕으로
여기는 이 세상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셨습니다. 진정 가치있는
대상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부차적인 대상들을 미련없이 버리고
내려놓는 극단적 미니멀리즘을 살고 계신 것입니다.
내 삶과 일상을 촘촘히 한번 돌아보면 심각한 측면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극단적 물질만능주의에 함몰되어
살아왔습니다. 천박한 소비향락주의, 비인간적 자본주의에 깊이
젖어들어 살아왔습니다.
물질만능주의가 우리에게 끼치는 폐해는 심각합니다. 우리 삶 안에서
보다 가치있는 대상들, 보다 의미있는 대상들을 철저하게 짓밟습니다.
그저 돈, 돈, 돈이 최고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많이 움켜쥐려고
발버둥칩니다. 돈보다 훨씬 상위에 위치한 그 많은 대상들을 깡그리
무시됩니다. 그저 무엇이든 모으고 쌓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결국 자녀들 앞에서도 돈, 돈, 돈이 최고라고 강조했으니, 많은 어르신들,
임종을 앞두고, 아직 눈을 버젓이 뜨고 있는 가운데서도, 남겨진
유산이나 부동산 앞에서 염치불구하고 막장 드라마를 쓰고 있는
자녀들의 볼썽사나운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삶의 스타일을 많이 바꾸어야겠습니다. 남아있는 내
인생 안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우리 삶을
재구성해봐야겠습니다. 물론 노후가 비참해지지 않도록, 미리 넉넉하게
노후 자금을 마련하는 일, 그것처럼 더 중요한 것은 없겠습니다. 그러나
돈을 하느님 위치까지 올려놓고 숭배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 돈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 앞에
보여줘야겠습니다. 없이 살아도, 소비향락주의에서 벗어나, 적게
쓰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줘야겠습니다. 나도
부족하지만 더 가난한 인류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나누는 아름다운
표양을 보여줘야겠습니다.
과감하게 버리고 나누기 위해 한번 깊이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오늘
내게 불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나를 설레게 하지 않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오늘 나와 무관한 것을 무엇입니까? 내 삶 안에서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할 가장 큰 가치는 무엇입니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 27)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1월28일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 27)
얼음과 울음 사이에 아픈 눈물이 있습니다.
밀양 세종병원 화재 참사로 너무도 아까운 목숨을 잃은 우리의
소중한 이웃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은 언제나 진실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참된 사랑이 만들어 내는 참된 가르침입니다.
참된 가르침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게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삶에 가장 소중한
가르침을 주시는 참스승이 계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삶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여기 이곳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를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르침은 삶다운 삶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우리 영혼을 깨어나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게합니다.
예수님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 우리를 끌어안고 갑니다.
참된 변화는 참된 가르침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얼어붙은 우리 마음을 먼저 여십니다.
살아 있는 가르침이란 예수님의 삶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을 내면화하는 은총의 기쁜 주일 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4주일
오늘은 해외원조주일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음을 봅니다. 아울러 그런 분들을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도와주고 따뜻한 도움의 손길, 사랑의 손길을
주시는 분도 많이 있음을 봅니다. 그런가 하면 많은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고마워 할 줄 모르고, 다른 이웃을 돕는 일에 인색하고,
오히려 소외된 이와 버림받은 이 그리고 가난한 이를 은근히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내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과
나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아르헨티나에서 문한림 주교님께서 오셨습니다. 작년에
저는 해외 선교 사제와 선교체험을 하는 신학생들을 방문하기 위해서
남미엘 갔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문한림 주교님께서 저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고, 신학원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한국을 방문하시면서 저를 만나기를 원하셨고, 저는
기쁜 마음으로 주교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영이 참 맑은 분이십니다. 저는 주교님의 말씀과 삶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한국에서 온 신학생들을
공항까지 직접 맞이하러 가셨습니다. 신학생들은 주교님께서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숙소로 올 수 있었습니다. 매일 강론 동영상을
홈페이지에 올리셨습니다. 본당 사목을 하시지는 않지만 주교님의
강론 동영상을 많은 분들이 보고 있었습니다. 화장실 청소도 하시고,
식사도 직접 준비하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한국의 사제와 신학생들이
아르헨티나에 와서 선교를 하고, 사목을 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겸손하신 주교님을 보면서 새로운 권위를 볼 수 있었습니다. 따뜻한
주교님을 보면서 참된 목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가 말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을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가 있으면, 그 예언자는 죽어야 한다.” 저는
‘주제넘게’라는 말씀이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해결할 수 없는
세상의 일들에 마음을 많이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기
보다는 다른 것들에 더 많은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기 보다는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을 먼저 하였기
때문입니다.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면, 성실하게 강론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성사를 정성껏 집전하지 않는다면, 매일 정해진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건강을 돌보지 않는다면 ‘주제넘게’ 사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다가옵니다. 사제와 수도자라면 더러운 영은
더욱 기를 쓰고 다가오려고 할 것입니다. 더러운 영을 물리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그것을 ‘원리와 기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원리와 기초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원리와 기초는 4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태어난 목적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다.’라고 말을 합니다.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듯이, 종은 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듯이, 사람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둘째는 세상의 재물입니다. ‘이 재물은 모두 하느님께서 만드셨고
사람들은 이 재물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쓸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버릴
것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재물은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사용하면 된다고 합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남을 해치기
위해서, 양심을 속이면서 사용하면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셋째는 삶의 기준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다.’라고 말을 합니다. 오랜 동안 수도자로서
살아온 분들에게도 어려운 일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분들도
이 부분에서는 자신 없어 합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고 말을 합니다. 자는
것도, 사는 것도, 먹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와 같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길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도 바로 이런 원리와 기초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혼인을 한 사람도, 혼인을 하지 않은 사람도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혼자 사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면 내세울 것도 아닙니다. 혼인 생활을 해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에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비행기로 가는 길, 기차로 가는 길, 자동차로
가는 길, 걸어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어떤 길로 가든지, 중요한 것은
부산이라는 목적지입니다. 비행기로 가도 목적지가 다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걸어간다 하더라도 목적지가 같으면 언젠가는 도착하게 돼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가르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리와 기초’를 중심으로 한 가르침입니다. 환자를
치유하는 것도, 기적을 행하는 것도, 악령을 내쫓는 것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예언자는 자신의
권위와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말을 합니다.
1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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