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월 5일
✿1982년1월5일 야간통행금지
1945년 9월 7일부터 맥아더 장군의 포고령에 따라
시작해서 1982년 1월 5일에 해제되었다.
처음에는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20시
부터 5시까지 야간통행금지를 시작하다가
통행금지 시간이 22시부터 4시로 바뀌었다.
그러다 6.25 전쟁
직후부터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961년부터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된
1982년까지의 통행금지 시간, 즉 통상
적인 시간은 0시부터 4시까지였다.
다만 1960년 4.19 혁명,1979년 부마
항쟁 당시와 박정희 대통령 사망으로 인한
계엄령이 발동될 때는 밤 22시부터 4시까지
통금시간을 2시간 늘린 적도 있었다
▶2011년함바 운영권 로비 의혹 사건
함바(건설현장 식당) 비리’ 로 기소된 전현직 경찰 총수나 고위 간부들이 접견실이나 집무실에서 ‘검은 돈’ 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강희락 전 경찰청장은 함바집 브로커로부터 건설 현장 민원 해결과 경찰관 인사 청탁 등의 명목으로 지난 2009년 4월부터 12월까지 총 18차례에 걸쳐 모두 1억9000만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아 구속 기소 되었다.
이후, 이길범 전 해양경찰청장, 장수만 전 방위사업청장이 기소되었다.
검찰에 따르면 이 전 청장은 지난해 5~6월 접견실에서 세 차례에 걸쳐 유씨로부터 여수에 짓는 해양경찰학교 건설현장 식당을 수주할 수 있도록 강평길 전 여수 해경서장에게 부탁해달라는 명목으로 모두 2천500만원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또한, 장 전 청장은 함바 브로커로부터 청탁과 함께 금품을 수수하고, 대우건설 서종욱 사장에게서는 사업상 편의를 봐달라는 청탁과 함께 1천만원 상당의 백화점 상품권을 수수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는 국방획득체계 개선 작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다가 일명 ’함바 비리’ 에 연루됐다는 의혹 등을 받고 취임 6개월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검찰은 또 브로커 유씨로부터 건설현장 민원 처리 등의 명목으로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김병철 전 울산청장을 불구속 기소하고, 고소 사건 청탁 대가로 금품을 챙긴 이동선 전 경찰청 경무국장을 구속 기소했다.
SH공사 사장으로 재직하던 2007년에서 2008년 사이 브로커 유씨에게서 SH공사가 발주한 건설공사 현장의 식당 운영권을 달라는 청탁과 함께 9차례에 걸쳐 4천500만원을 받은 최영 강원랜드 사장도 구속 기소되었다.
구치소로 향하는 강희락 전 경찰청장.
▶2010년中, 최초 소수민족 외교부 부부장
몽골족 출신 푸잉 대사
푸잉(傅瑩) 중국 소수 민족 외교부 부부장(차관).
▶2000년 17세의 티베트 불교 지도자 카르마파 라마, 인도로 탈출
라마교 3대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당시 14세 소년인 제17대 카르마파가 2000년 1월 5일 티베트를 탈출했다. 1992년 중국에 의해 17대 카르마파에 추대된 우기엔 트린리 도르제(14)는 비구니인 누나(24) 등 5명의 추종자와 함께 눈덮인 히말라야 산맥 1400km를 8일 만에 넘어 인도에 도착한 것으로 밝혀졌다.
카르마파는 인도에 있는 교리 선생 방문을 위한 비자 발급을 중국 당국이 거부하자,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월 8일 인도 북부에 있는 달라이 라마 망명정부를 방문했다. 카르마파는 판첸 라마에 이은 서열 3위의 라마승으로 7살 때 중국당국에 의해 추대됐다.
카르마파의 탈출은 지난 1959년 중국통치에 반대하는 티베트인들의 민중봉기가 좌절된 이후 당시 최대 종파인 겔루파 소속 달라이 라마와 제16대 카르마파가 인도로 망명한 이후 최대 탈출사건이었다. 특히 카르마파는 달라이 라마를 대신한 티베트 불교 지도자로 중국이 ‘이용’해온 인물이란 점에서, 중국에 충격과 함께 커다란 골치거리로 떠올랐다.
▶1997년반(反) 김일성 운동가 허진씨 별세
▶1995년케이블 TV 시험방송 시
▶1994년토머스 오닐 前 미국 하원의장 사망
▶1993년스코트랜드 세틀랜드 군도에서
유조선 좌초, 원유 2천400만 갤런 유출
▶1982년야간통행금지 해제
ㆍ37년만에 풀린 ‘족쇄’
충청도 사투리 특유의 가락을 잘 살려낸 유장한 문장으로 농촌 문제를 형상화한 작가 이문구의 <산너머 남촌>에는 노름꾼 심씨가 통금(通禁) 해제에 대해 소회를 밝히는 대목이 나온다. ‘늘 통금에 쫓겨 끗발 오를 만하면 아쉽게 일어서야 했던’ 심씨는 “그동안은 말로만 하루 24시간이었지. 우리가 실지로 쓴 시간은 하루 스무 시간밖에 더 됐나…”라고 내뱉는다.
야간통행금지는 자정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 통행을 금했던 제도로 줄여서 ‘통금’이라고 불렀다. 통금은 1945년 9월7일 미군정 포고령 1호에 따라 치안 및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시작된 이래 82년 1월6일 폐지될 때까지 모두 36년4개월 동안 실시되었다. 처음에는 서울과 인천이 대상지역이었으나 한국전쟁 휴전 이듬해인 54년 4월부터는 전국으로 확대되어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야간통행이 금지됐다. 61년에는 통금시간이 자정에서 새벽 4시로 축소됐고, 64년에는 제주, 65년에는 충북이 통금지역에서 제외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지만 통금제도 자체는 계속 유지됐다.
전두환 정권이 일부 해안·전방 지역을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통금을 해제한 것은 여러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광주시민의 피’ 위에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자신들의 정통성 결여를 보완하기 위해 갖가지 유화정책을 실시해야만 했다. 교복 자율화, 해외여행 자유화, 정치·사상범 사면복권 등도 통금 해제와 같은 맥락에서 이뤄졌다. 또한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 등을 위해서라도 통금 해제는 필수적이었다. 통금을 그대로 두고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를 치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통금 해제가 88 올림픽 유치 결정 이후 이뤄진 것도 이때문이었다.
통금이 있던 시절 밤 11~12시에는 귀가를 서두르는 인파로 인해 대중교통이 북새통을 이루었다. 0시 사이렌이 울리면 거리 곳곳에 철제 바리케이드가 설치됐고, 골목골목에는 2인1조 야경꾼들이 나무 딱따기를 치며 “통금!”이라고 길게 소리쳤다. 통금 위반자들은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을 물어야 했다. 71년 발표된 배호의 노래 ‘0시의 이별’은 곧바로 금지곡이 됐다. ‘남녀가 0시(밤 12시)에 헤어지는 것은 통금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1981년한국과학원(KAIS)과 정부출연기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통합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으로 명칭 변경
▶1981년경기도 양평 -32.6도,
온도 측정사상 최저 기온 기록
▶1979년中, 랴오닝성(遼寧省) 일대
고조선시대 청동기 유물 1백여점 출토
▶1974년일본-중국, 통상협정 조인
▶1973년김종필 총리, 존슨 미국 대통령과 회담
▶1971년민정당 창당(총재 윤보선)
▶1968년두브체크, 체코 공산당 제1서기에 선출
알렉산더 두브체크.
▶1967년청룡야구대회 개최로 학생 야구의 전기 마련
▶1965년정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1961년김상돈, 서울 첫 민선시장 취임
▶1959년신보안법반대데모 전국에서 발생
▶1958년독립운동가 임용상 사망
▶1957년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신중동 정책 발표(아이젠하워 독트린)
▶1956년티토, 니제르, 동서군사블록 비난
▶1954년미국,영국.프랑스, 대유고경제원조협정 체결
▶1953년이승만대통령 일본 방문, 요시다 수상과 회담.
▶1953년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파리에서 초연
아일랜드의 극작가 사뮤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1953년 1월 5일 파리 바빌론극장에서 초연됐다. 아일랜드 출신으로 파리에 와서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고 있는 베케트를 주목할 사람은 물론 이 연극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당시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본은 연출가들 사이에서 돌고 돌아다녔지만 통속극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출가들의 외면을 받았다.
1953년 파리에서 초연된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장면.
공연 다음날 피가로지 1면에는 `광대들에 의해 공연된 파스칼의 명상록`이라고 대단한 호평이 실렸다. 극장은 연일 만원이었고 배우들은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고 희희낙락했다. 자신의 예술에 방해된다고 아무도 만나려 들지 않는 베케트를 촬영하기 위해 미국 텔리비전 방송팀은 아파트 8층에 사는 그의 모습을 찍으려고 사다리를 올릴 정도로 법석이었다. 공연이 성공하자 `기상천외한 작가` `불가능한 완전한 침묵의 작가` 등의 수식어가 그를 따랐다.
그는 한때 더블린에서 교수생활도 했지만 알지도 못하는 것을 가르칠 수 없다며 1938년 파리로 떠나 그곳에서 사망할 때까지 거주했다. 1969년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받기 싫다며 스톡홀름에도 가지 않고 수상연설도 하지 않은 작가였다.
▶1951년서재필 박사 별세
독립운동가 서재필 박사가 1951년 오늘, 87세로 미국에서 별세했다. 박사는 1864년 18세에 과거에 합격했으나 오직 '조국의 개화'에만 관심을 두었다. 일본에서 선진문물을 익혔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정변이 실패하자 그는 일본으로 망명했고 부모와 아내, 형은 음독 자살했고 동생은 참형됐다.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일본도 박사를 외면했고 서 박사는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명 '필립 제이슨'이라는 이름으로 1892년에는 콜롬비아 의과대학을 나와 의사가 됐다. 서재필은 미국 시민권을 받은 첫 번째 한국인이었고, 첫 한국인 미국 의사이기도 했다.
갑오경장 후 조선정부가 중추원 고문으로 초청하자 서재필은 1895년 12월 11년 만에 다시 조국을 찾았다. 귀국 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설해 자주 독립정신을 나라 안팎에 알렸다. 그러나 계몽운동에 위기를 느낀 정부가 출국을 요구하자 1898년 다시 조국을 떠났고, 광복후 미군정의 요구로 1947년 7월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으나 이승만의 적대로 1948년 인천항을 통해 조국을 떠났다.
▶1950년소설가 김동인 사망
이광수, 염상섭 등과 함께 한국 현대 소설사의 첫머리에 우뚝 솟아 있는 작가 김동인이 1950년 1월 5일 사망했다. 그는 1919년 신문학 최초의 동인지 ‘창조’를 창간했다. 한국 리얼리즘 또는 자연주의의 빗장을 연 개척자이기도 했다. 일제하에서 3·1운동의 격문을 만들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1942년에는 일왕에 대한 불경죄 죄명으로 6개월을 복역한 적도 있다. 그는 한국 문학사에 기념비로 남을 주옥같은 단편들을 남겼다.
사실주의 계열에 속하는 ‘감자’ ‘배따라기’ ‘김연실전’ ‘명문’ ‘태형’ ‘발가락이 닯았다’ 등이 있고, 탐미주의 계열 작품으로는 ‘광염소나타’ ‘광화사’ 등이 있으며, 민족주의적 색채를 보인 작품으로 ‘붉은 산’ 등이 있다. 그는 이광수의 계몽주의나 신경향파 및 카프의 사회주의 문학에 맞서서 ‘예술을 위한 예술’을 내걸고 탐미주의적 순수문학을 지향했다.
김동인이 한국 문학사에 끼친 공로는 그 소설들의 무르익은 구성 못지않게 문체에 있다. 그는 작중 인물의 호칭에서 영어의 he나 she를 ‘그’로 통칭하고, 용언에서 과거시제를 즐겨 사용해 문장의 시간 관념을 또렷하게 했으며,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현대소설의 문체를 개척했다.
▶1949년트루먼 미국 대통령 페어딜 정책 발표
▶1948년킨제이보고서 `인간 남성의 성적 행동` 출판
유부남의 30∼45%는 아내 몰래 바람을 피웠고, 남성의 90%는 자위 행위를 했다." 인대애나 대학 동물학 교수였던 알프레드 C. 킨제이 박사가 1948년 1월 5일 펴낸 보고서 `인간 남성의 성적 행동(Sexual Behavior in the Human Male)`이 던진 폭탄선언이다. 킨제이는 10년 동안 미국 전역에서 1만 8,000명을 인터뷰하고 얻은 1만 2,000건의 자료를 토대로 이 보고서를 작성했다.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은 이 보고서는 곧 바로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은 온갖 도표로 이루어진 딱딱한 통계에 불과했지만 25만부 이상 출판됐고 12개국 이상에서 번역됐다.
보고서가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속에 담긴 다채로운 성생활 공개때문이 아니었다. 보고서 자체가 말 그대로 적나라했기 때문이었다. 책에 수록된 내용은 혼외정사, 동성애, 자위, 매춘 등에 대한 통계를 정확하게 제시해놓은 것으로, 당시까지 거의 금기시해 오던 주제였다.
킨제이는 5년 후 1953년 두번째 보고서인 ‘인간 여성의 성적 행동(Sexual Behavior in the Human Female)’을 발표했다. 이는 훨씬 더 자세한 연구서였지만 의회와 언론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 킨제이는 동료 학자들이나 의사들의 호응도 얻지 못했다. 사실 오늘날 학계에선 누구나 킨제이 보고서의 결점을 지적한다. 우선 보고서의 조사 대상자가 백인, 중서부 중산층, 대학생들에 치우쳤다는 것. 또한 조사에 응한 자원자들 중에는 죄수와 성범죄자들도 포함됐는데, 모두 정상적 신뢰도가 낮은 경우라는 것.
하지만 이같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킨제이는 남성과 여성의 성 생활을 밀폐시켰던 방문을 활짝 열어젖힌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또 ‘킨제이 보고서’는 아직도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고 가장 정확한 성보고서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킨제이는 원래 하버드에서 생물학을 전공했고, 인디애나 대학에서 동물학을 강의했다. 그가 교수로 재직하던 중 여학생회가 기혼 혹은 결혼을 생각 중인 여학생들을 위한 `결혼 강좌`를 개설해달라고 청원했다. 그 강좌를 맡은 킨제이는 결혼에 필수적인 성생활도 강의하려고 했지만, 인간의 성에 관한 연구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자료 수집에 착수했던 것이다.
▶1947년시인 홍사용 사망
▶1943년미국 흑인인권운동가 카이버 사망
▶1938년스페인 왕 후안 카를로스 출생
▶1933년미국 제30대 대통령 쿨리지 사망
▶1932년이탈리아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 출생
▶1928년파키스탄 대통령 줄피카르 알리 부토 출생
▶1925년제1회 전국빙상경기대회 개최
▶1923년임시정부 국무총리에 노백린 취임
▶1919년독일, 노동자당(후에 나찌당) 결성.
베를린의 20만 노동자 무장봉기
▶1910년멕시코동란 발발
▶1902년프랑스 `르몽드` 신문 창립자
위베르 뵈브 메리 출생
▶1899년필리핀, 아키날도장군 독립선언
▶1896년전국에서 민비 시해와 단발령에
저항하는 의병 봉기
▶1885년안전면도칼의 발명자 질레트 출생
▶1876년서독 초대 수상(1949-63)
콘라드 아데나워 출생
▶1874년미국의 생리학자 조셉 얼랜저 출생
▶1855년미국의 발명가 질렛 출생
▶1637년병자호란중 김준룡 청군 격파
▶995년고려, 관제(官制)를 개정,
6부상서(六部尙書)의 칭호 정함
▶675년일본, 최초로 점성대(占星臺) 세움
첫댓글 오늘의 역사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오늘의역사 잘 보고 갑니다.감사합니다 ~~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