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1550
2월15일 [연중 연중 제6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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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월15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루카 9장 22-25절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오징어 덮밥 3인분>
어제 재의 수요일 점심때까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단단히 각오를 했기에 점심때까지는 아예 물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었지요.
점심식사도 최소한 간단히 요기만 했습니다. 계속 식탁에 앉아 있으면 유혹이 생길 것 같아 빨리 일어섰지요. 그런데 문제는 저녁 식사 시간이었습니다.
평소에는 별로 식욕이 없었는데, 하필 오늘따라 왜 그리도 입맛이 당기던지 신기했습니다. 그래도 꾹 참아야했지요. 밥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이 먹고 끝내려고 했는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사탄의 소행인지 갑자기 고봉으로 가득 담긴 한 양푼이 제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오늘 따라 국물이 걸죽한 오징어 볶음이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손이 저절로 움직였습니다. 3인분은 족히 될 밥에 국물이 "왔다!"인 오징어 볶음을 넣어 열심히 오징어 덮밥을 만들었지요.
"아차!" 하고 정신을 차리는 순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오징어 덮밥 3인분은 이미 하나도 남지 않았고, 아침의 굳은 결심을 완전히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오징어 덮밥이란 유혹 앞에 완전히 제 정신을 잃은 제 모습이 한심한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오늘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제자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자기를 버리기
2. 매일 제 십자가를 지기
3. 예수님 뒤를 따르기
자기를 버린다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이 사순기간 우리가 가장 노력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란 새로운 가치관을 우리 안에 형성시키기 위해 어제의 낡고 닳아버린 우리 자신과 결별한다는 것입니다.
그릇 안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 그릇의 가치는 천차만별입니다. 고급 향유가 가득 담긴 그릇은 향유 못지않게 소중하고 가치 있게 여깁니다. 그러나 개밥을 담는 그릇은 사람들의 발길에 자주 차이면서 홀대받는 개밥그릇일 뿐입니다.
우리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 하실 때 우리 역시 덩달아 가치 있는 사람, 존엄성 있는 인간, 아름다운 그릇으로 평가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의미는 각별한 새로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기 위해 낡고 퇴색되어 초라해진 우리 자신을 비우는 일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운 어제의 나와 작별하고 다시 한번 일어서는 일입니다. 목숨이 붙어있음을 하느님께서 아직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는 표시로 여기는 일, 다시금 우리의 몫을 살아내는 일, "내 몫이려니" 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일이야말로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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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 30, 20)
매우 부자였던 어떤 아랍 사람이 사막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식량이 다 떨어졌습니다. 이틀간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결사적으로 걸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사막 가운데의 한 작은 샘터를 발견하고 거기에 이르렀습니다. 급히 물을 마시고 보니 얼마 전에 거기에 천막을 쳤던 흔적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혹시 천막을 치고 머물렀던 사람들이 아무런 음식 조각이라도 떨어뜨린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자세히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놀랍게도 어떤 주머니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얼른 그것을 만져보니 손에 떡처럼 단단한 것이 만져졌습니다.
그 사람은 미친 듯이 주머니를 헤쳐서 열었습니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속에 있는 것을 한 움큼 움켜서 꺼내 보니까 그것들은 아주 좋고 큰 진주알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손에 한 움큼 쥐었던 진주들을 사방에 던져 뿌리며 외치면서 죽어갔습니다. “겨우 진주였단 말인가?”
결국 사람의 목숨을 유지하게 해 주는 것은 약간의 물과 음식이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이 27%입니다. 자동차, 핸드폰, TV, 선박 등의 수출을 늘이기 위해 FTA란 것을 체결하며 우리농촌 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브에누스아이레스에는 영국에서 본 오래된 지하철이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지하철을 영국 다음으로 만든 나라가 아르헨티나 라는 것입니다. 유럽에서 전쟁할 때 식량이 부족해서 각 나라들이 금을 싣고 와서 고기와 곡식으로 바꾸어 가서 세계에서 5번째로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나라도 세계 경제공황이나 전쟁과 같은 일이 벌어지면 핸드폰을 뜯어먹어야 할 일이 머지않은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다른 나라들의 경제 상황에 따라 우리 경제도 휘청휘청 하는 이유가 너무 수출에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나라뿐만 아니라 사람에게서도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선택하며 진정 중요한 것을 버리는 사례가 허다합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10원도 채 안 되는 액수 때문에 부부가 자살한 사건이 최근 인도에서 있었습니다.
인도 동부 서벵골 주에 사는 한 부인이 차(茶)를 사기 위해 남편 옷에서 50파이세(미화 1센트)의 동전을 꺼내간 것이 발단이 되어 부부가 싸움이 난 것입니다. 화를 이기지 못한 남편이 독약을 먹고 자살하자 부인도 5개월 된 딸을 남겨둔 채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또 전에 어머니가 야구방망이 등으로 아이를 전국1등 만들기 위해서 두드려 패다가 오히려 아이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전국 1등이라는 허상과 아이의 삶, 또 자신의 생명과 바꾼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모세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이 말은 생명과 행복을 택하든, 죽음과 불행을 택하든 결국 우리가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신자가 돈을 버는 일에 바빠서 냉담하다가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해 죽었다고 합시다. 아마 그 사람은 진주를 먹으며 사는 고통을 당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생명이고 행복인지 선택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있는데도 죽음과 불행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지금 여자의 삶은 100년 전에 하인 300명을 데리고 사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밥해주는 하인, 청소해주는 하인, 빨래해 주는 하인, 불 때주는 하인, 또 TV만 틀어도 얼마나 많은 하인들이 나옵니까?
2천cc 차 한 대는 말 200마리가 끄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음악을 연주해주고 길도 안내해 주고 하는 삶은 예전의 왕보다도 화려한 삶입니다. 그런데도 왜 계속 물질, 물질만을 선택하며 살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라고 말씀하시며, 당신 자신이 ‘생명의 양식’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체를 택하든, 세상의 명예나 재물, 쾌락을 택하든 둘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십자가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삶이란 ‘아낌없이 주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으로 주신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신 당신을 선택하려면 당신처럼 매일매일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베풀지 않으면 썩어서 죽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마치 흐르는 물처럼 받은 것을 내 보낼 때 새로운 생명으로 채워지게 되어있습니다.주기 싫어 모으려고 하는 것이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콩나물이 물을 흘려버리지 않으면 썩는 것처럼, 사해도 물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내보내지 않아서 죽음의 바다가 된 것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놓고 선택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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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9,22-25 :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신다. 인간은 세상에서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하고 무언가 더 누리려는 욕심이 있다. 그러나 온 천하를 얻을 수 있더라도 자기 목숨과 바꾸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선 내가 살아있고 나서야 가치가 있는 것이지, 내가 없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당신을 닮는 것만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하느님 안에 있을 때만이 진정으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즉 한 마디로 한다면 우리 인간은 하느님을 떠난 삶으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고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만 자유로운 것이다.
이 행복과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이 된다. 하느님의 모상을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하느님의 모상은 매일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잘 짐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즉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주님을 닮아가면서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과거를 모두 잊고,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내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상대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나 자신이 가장 큰 십자가이며, 이 십자가는 다른 누구도 대신 져줄 수가 없는 나만이 지고 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십자가도 꼭 나만이 질 수 있는 것이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성시켜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 생명을 우리가 마음대로 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생명이 살아 있는 한 자신의 안일만을 위해 이기적인 삶을 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과 능력을 그리고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생명을 영원히 살릴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입으로만 주님을 부르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이 주님께로부터 멀리 있다면 주님께로부터 우리도 외면을 당할 것이다. 주님께서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마 우리가 그분을 외면하여 바라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순시기가 이제 진정으로 우리에게 은총의 때가 될 수 있도록, 즉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시기가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영광의 부활에 우리도 기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는 은혜를 청하면서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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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생명을 찾아가는 길>
오늘 제1독서는 말합니다.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 39,19-20) 행복하려면 선택과 결단을 분명히 하고 주님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선택은 매우 중요한 과제요 고통이 뒤따르는 도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마땅히 많은 고난을 겪으실 것입니다."(루카 9,22) 그분은 우리 모두의 목숨을 건지시려고 고난과 죽음을 자원하여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분의 거룩한 선택이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당신과 같은 선택과 처신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인간다워지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무사안일하게, 그리고 잠든 채 세상살이에 끌려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을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9,23-24)
이 말씀은 정신을 바짝차리게 하는 강한 역설입니다. 쉽고 편안한 삶을 피하고 일상의 어려움을 받아들일 때 참 행복이 찾아든다는 것입니다.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지 말고, 사랑을 위해 자기 목숨마저 내놓을 때 영원히 산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이신 주님을 따라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십자가가 바로 행복의 열쇠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버리라” 하십니다.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고, 자신의 뜻과 욕구충족을 앞세우려는 태도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애착과 이기심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는 ‘거짓 자아’를 폐기처분하라는 말씀이지요. 자기 자신을 버릴 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갈라 2,20) 행복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 하십니다. 사랑으로 죽음까지 받아들이신 예수님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온갖 고통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곧 내가 만들어내는 고통, 타인으로부터 오는 고통, 남을 대신하여 겪는 고통, 신앙 때문에 겪는 고통을 기꺼이 수용하라는 것이지요.
결국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으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이들과 세상을 향해 자신의 시간과 재물과 능력을 내놓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지요. 목숨을 구하려고 발버둥 칠수록 죽음의 구렁에 빨려들 뿐입니다. 생명과 행복 안에 머물도록 매일 순간마다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 삶의 항구한 법칙입니다.
우리 모두 매순간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일상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불의에 저항함으로써 행복의 길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기꺼이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모든 것을 얻고 영원한 생명의 정원으로 들어가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내가 버리지 못하고 내놓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는 오늘이기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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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하느님의 뜻과 자기 뜻을 식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뜻과 사람의 뜻은 무엇이 다릅니까? 사람의 뜻은 자신을 위하는 것입니다. 반면 하느님의 뜻은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십자가를 피하려고만 합니다. 달콤한 유혹에만 익숙해 있기 때문이지요. 달콤한 유혹은 무엇입니까? 편안한 신앙생활입니다. 희생 없이 축복만 받으려는 마음입니다. 물론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기대를 하지요. 바라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고, 기왕이면 사업도 잘되고, 건강도 주어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바람입니다.
반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시련과 고통을 통해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별을 보는 것이지요. 별은 과거부터 길을 가리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동방 박사들을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으로 인도한 것도 별이 아니었습니까?
별을 보려면 어둠이 있어야 합니다. 어둠은 고통과 절망, 시련, 나아가 죽음을 뜻하지요. 이러한 어둠을 극복함으로써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사무처장/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데아퀴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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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밤송이 김기현 요한 신부님]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하고 대비할 수 있는 선택과 실천을 해 봅시다.>
특이한 게임쇼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쇼에 이름은 ‘어떤 대가를 치르겠는가?’ 쇼입니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쇼가 시작됩니다. 사회자는 천만 달러의 주인공이 될 사람의 이름을 불렀는데, 놀랍게도 당신의 이름이 불려집니다. 당신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무대에 올라가 사회자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당신은 한 가지 대가만 치르면 됩니다. 하나만 선택 하세요~ 그러면 여기 있는 천만 달러가 모두 당신 것입니다.”
그리고 목록을 제시합니다.
‘자녀를 다른 집에 입양시킨다. ... 일주일간 매춘부 노릇을 한다. ... 미국 시민권을 포기한다. ... 가족을 버린다. ... 낯선 사람을 죽인다. ... 성전환 수술을 받는다. ... 배우자를 버린다. ... 국적을 바꾼다.’
목록의 내용이 당신의 심장을 요동치게 하고, 정신을 혼란케 합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대답을 들을 순 없겠지만, 미국에 사는 다른 사람들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설문 조사 결과 네 명 중에 한 명은 ‘천만 달러를 준다면, 가족을 버릴 수 있다.. 교회를 버릴 수 있다... 일주일간 매춘부가 될 수 있다...’ 하고 대답을 했고, 다섯 명 중에 한 명은 ‘미국 시민권을 포기할 수 있다... 배우자를 버릴 수 있다... 자녀를 입양시킬 수 있다...’ 하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응답자의 2/3가 대가를 치르겠다고 한 건데요. 그들과 같이 탐욕스러웠던 사람이 복음에도 나오는 거 같습니다.
루카 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인데요. 그는 유례없는 풍년으로 곡식창고를 더 늘리고 부를 축적합니다. 그의 관심사는 ‘이제 남은여생 골프나 치고, 낚시나 하면서 편하게 보내야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누구 차지가 될까요? 어쩌면 장례를 치르는 동안 한쪽에서 가족들이 그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움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는 세상의 것을 얻으려고 했지만, 결국 빈손이 되어 땅 속에 묻히게 됩니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떠나가게 되는데요. 우리의 모습도 그와 다르지 않은 거 같습니다.
언제가 빈손으로 떠나게 될 텐데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움켜쥐고 욕심을 내고 분주하게 살다보면, 죽음 이후의 ‘영원’을 준비하고 대비하는 일은 미루고 또 미루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지혜로운 선택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오늘 하루, 죽음 이후의 영원을 준비하고 대비할 수 있는 지혜로운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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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뜻입니다. 재물이든 권력이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대로 모두 얻고,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부유하게 산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인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들이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것들이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또 이 말씀을,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의 방식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지상의 허무한 것들을 얻는 방식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온 세상을 얻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히려 방해만 될 뿐입니다.
“온 세상도 얻고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는 없는가?”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상에서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렇게 둘 다 누릴 수는 없는가?”)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이 말씀은, “지상의 부귀영화만 추구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지상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을 얻는 일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중간 지점도 없고, 절충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영원한 생명만 추구해야 합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8,25).”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부유했던 사람들도 있었지 않은가?”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부유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맞지만, 끝까지 부유하게 살면서 부귀영화를 누린 성인 성녀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누구든지’는 예외가 없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모두 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날마다’는 ‘끊임없이’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는 혹시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감수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나를 따라야 한다.’는 ‘나만 따라야 한다.’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길이 언제나 항상 어렵고 힘든 길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신앙생활이 정말로 그렇게 어렵고 힘들기만 한 생활일까? 고난과 시련만 있어서 항상 고통스럽고 고달프기만 한 생활일까? 만일에 실제로 그렇다면 누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성모님께서는 마리아의 노래에서 이렇게 찬미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8).”
‘기쁨’은 예수님의 뒤를 끝까지 따라갈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만일에 기쁨이 없다면 신앙생활은 참을 이유가 없는, 삭막한 고역(苦役)이 됩니다. 이 기쁨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서 옵니다. 예수님 뒤를 끝까지 잘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믿음, 그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희망, 그리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예수님의 사랑, 옆에서 함께 가면서 우리를 도와주는 가족과 이웃과 동료들의 사랑. 우리가 예수님 뒤를 따라가기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은, 어쩔 수 없어서 참고 견디는 일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하는 일이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일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기쁨의 공동체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요한 11,15).”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 (루카 10,17).”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그러면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거나 헛되이 애쓴 것이 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설령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가 되어 여러분이 봉헌하는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진다 하여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필리 2,14-18).”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신앙인의 ‘기쁨’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주는 만족감이나 즐거움과는 차원이 다른, 영원하고 참된 기쁨입니다.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얻을 수 없는 그런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기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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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칼 들지 않은 살인자에 맞서>
루카 9,22-25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칼 들지 않은 살인자에 맞서>
물불 안 가리는 날강도나
사람 목숨을 업신여기는 살인자가
예수님을 배척하거나 죽이지 않습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모든 이를 품어야 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입니다.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칼 들지 않은 살인자입니다.
손에 쥔 칼로 말미암아
칼 든 살인자는 찾기 쉽지만
보이지 않는 칼을 품은
칼 들지 않는 살인자는 쉬 드러나지 않습니다.
칼 든 살인자의
손에 쥐어진 칼보다
칼 들지 않은 살인자의
보이지 않는 칼이 훨씬 날카롭습니다.
칼 든 살인자는
법에 따라 처벌을 받지만
칼 들지 않은 살인자는
법망을 교묘히 피할 수 있습니다.
칼 든 살인자는
몇몇 사람을 죽이지만
칼 들지 않은 살인자는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칼 든 살인자보다
갈 들지 않은 살인자들이
더욱 잔인합니다.
칼 든 살인자보다
칼 들지 않은 살인자가
공동체에 더 큰 해악을 끼칩니다.
칼 든 살인자보다
칼 들지 않은 살인자가
공동체에 더욱 치명적입니다.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칼 들지 않는 살인자들의 편이 되기를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부하십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는
예수님의 벗들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칼 들지 않은 살인자들에게
예수님은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는
예수님의 벗들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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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
어떤 장군이 전쟁중에 적군에 패해서 도망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큰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전쟁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적군에게 등을 돌려 도망을 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웠고,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자살을 위해 사람들이 없는 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칼로 목숨을 끊으려는 순간, 바로 앞에 자신보다도 큰 먹이를 물고 가는 개미 한 마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개미는 물고 가다가 먹이를 놓치고 또다시 먹이를 물고 가다가 또 놓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흥미를 느낀 장군은 자살할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개미를 계속해서 따라갔습니다. 개미는 먹이를 자그마치 79번이나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80번째에 개미굴로 먹이를 들고 들어가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장군은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나는 이제 겨우 한 번 밖에 실패하지 않았는가? 저 하찮은 미물인 개미도 79번이나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결국 성공했는데, 단 한 번 실패로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개미를 통해 용기를 얻은 그는 다시 돌아갔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고통과 시련으로 큰 좌절감에 빠지신 고운님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내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을 닮은 삶,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에게 주어진 고통과 시련이라는 십자가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몇 차례의 실패를 경험한다 할지라도 이 십자가를 팽개쳐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건너편에 구원의 길이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자신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피하려 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고운님들! 저는 몇 년전에... 코 수술 때문에 서울성모병원에 며칠간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수술을 하고 두 코를 솜으로 막고..병원 복도에서 운동을 하다가... 백혈병을 않고 있는 어린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 아이는 누구의 죄 때문에 아픈 것입니까?"
아이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그때 주님은 속삭이셨습니다. 요한 복음 9장3절 말씀입니다.
"저 사람이(아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지금 병원 안에 수많은 병자들, 특히 눈매가 초롱초롱한 어린 아이 환자들...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가정 안에서 소중한 사람들이 병으로 쓰러져있고... 또한 어떤 이유에서든지 마음이 아프고 힘들어서 하루 하루 겨우 버텨내며 살고 있는 고운님들과 가정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할까?라는 마음 속에서 서서히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겠지!라는 생각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부터인가...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을 위해서 쉼 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느낀것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아픈 그들은 모두 죄인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놀라운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가 까닭없이 울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그것은 바로 나를 위해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까닭없이 주어진 십자가가 있다면, 누군가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그 십자가를 잘 짊어지고 가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그러면서 매 주일 미사 강론 전에...저와 신자분들끼리 서로 마주보며 외치는 말입니다
"당신을 보니 마치 예수님을... 성모님을 보는 것 같습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어느 누군가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성령 충만한 자비로운 삶을 살아가는 은혜로운 사순시기가 되시기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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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부산본원 김종오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의말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제 십자가를 지고’ 갈 줄 아는 만큼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제 십자가’는 자신의 인간적 한계와 불완전성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인간적 한계와 불완전함에서 오는 고통의 십자가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제각기 다른 우리의 고통은 서로 다름을 드러내고, 그 다름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서로 다른 ‘복된 아픔들’입니다.
인간적 한계와 불완전성을 거부하며 지고 가는 십자가는 고통 뿐입니다. 자신을 거부하면 ‘제 십자가’를 이웃에게 전가하게 됩니다. ‘제 십자가를’ 거부하는 만큼 우리는 이웃에게 고통만 안겨줍니다.
‘제 십자가를 지는 삶’은 고통스럽지만 곧 선물로 바뀝니다. 인간적 한계와 불완전함을 수용하며 ‘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때, 우리의 고통은 ‘복된 아픔’이 되어 이웃에게는 선물이 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가야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우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게 됩니다. ‘제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주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요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가 이웃에게 선물이 되는 시기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는 이웃을 위한 선물을 보따리를 지고 떠나는 순례자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는 만큼 우리는 세상과 이웃의 고통을 공감하는 자비와 연민의 선물이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감으로써 우리는 인간적 한계와 불완전함에서 오는 고통 속에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고통이 많은 만큼 은총도 풍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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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올림픽 개막식을 보았습니다. 아름다웠고, 독창적이었고, 우리의 것들을 표현했습니다. 개막식을 준비했던 모든 분들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제게 감동을 준 것은 순식간에 변한 태극 문양의 모습입니다. 드론들이 펼친 환상적인 모습들입니다. 성화대에 점화한 김연아 선수입니다. 개막식을 보신 분들이면 저와 비슷한 감동을 느꼈을 것입니다. 외신들이 보도한 남과 북의 공동입장도 있습니다. 올림픽이 평화를 기원하는 것이라면,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인 남과 북이 공동으로 입장하고, 단일팀을 구성한 것은 분명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교구청에는 여러 부서들이 있습니다. 서품식을 준비할 때도 성소국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관리국의 예산 지원, 사무처의 인사명령, 평화방송의 중계, 명동성당의 전례 지원, 신학교의 신학생 지원, 홍보국의 미디어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이번 서품식을 위해서 수고하신 신부님들을 위해서 점심 도시락을 준비했습니다. 작은 정성이지만 신부님들도 고마워하였습니다. 이 모든 지원이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성소국 직원과 성소 후원회 봉사자들의 역할입니다. 서품식을 위한 주무 부서이기 때문입니다.
남과 북의 평화와 화합을 위해서도 많은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강대국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한국과 동맹인 미국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 할 것입니다. 힘이 세지면 우리를 침략했던 일본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념이 다른 중국과 러시아의 양해도 분명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의 나라들은 모두 자국의 이익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한반도의 평화와 화합을 대할 것입니다.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남과 북의 의지입니다. 아울러 더 중요한 것은 남한 사회의 합의입니다. 시간이 걸리고,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천히 디딤돌을 하나씩 놓는 심정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를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 할 것이다.” 우리가 선택을 하면 하느님께서 도움을 주실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어떤 선택입니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주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 굶주린 이, 아픈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선택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저는 지난 역사를 통해서 희망을 봅니다. 우리는 오천년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있었지만 그것을 이겨낸 끈기와 저력도 있습니다. 흐르는 강물을 봅니다. 강물에 떠밀려 가는 것들은 거의 생명이 없는 죽은 것들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떠밀려 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세상이라는 강물에 떠밀려서 사는 것도 자유입니다. 그러나 세상이라는 강물을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더 큰 자유와 용기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는 고민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설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저도 어머니와 형님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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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난 설날 아침입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기도를 하고, 세배를 하였습니다. 늘 세배 돈을 받기만 하던 조카가 할머니에게 세배 돈을 드렸습니다. 작년에 취직을 했기 때문입니다.
세배 돈을 받는 시기에서 세배 돈을 드리는 때가 오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때가 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카들이 결혼을 해서 아이들을 낳으면 저도 할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 우리는 모두 그렇게 나이를 먹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시간은 상대적입니다. 천년도 지나간 어제처럼 느낄 수 있고, 긴 인생도 마치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은 시간을 길이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시간을 의미와 가치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 역시 길이의 시간이 아닙니다. 의미와 가치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라면 하루를 살아도 영원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았다면 번뇌와 아픔이 가득했어도 영원을 사는 것입니다.
설날 아침이었습니다. 새벽바람을 맞으며 의정부 천변을 걸었습니다. 40분을 걸으면서 새벽 운동을 나온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은 한 해의 시작을, 하루의 시작을 운동으로 열었습니다. 아마도 건강한 한 해를 보낼 것입니다.
한 시간 정도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명동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책을 보았습니다. ‘보이는 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분이 좋았습니다.
스마트 폰으로는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루가 모여서 일주일이 됩니다. 일주일이 모이면 한 달이 됩니다. 한 달이 모이면 1년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창한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하루하루 생활하는 삶의 태도와 습관이 중요합니다.
오늘 성서말씀도 우리에게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계명을 선택할 것인지, 본인의 욕심과 세상의 것들을 선택할 것인지 정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마치 물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생기가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는 일 마다 잘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것을 따라가면 멸망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 중에 선택을 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명확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주님의 뜻을 따라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서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것인지, 남을 탓하고,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원망하고 하느님과 멀어지는 신앙생활을 할 것인지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길을 따라 갈 수 있도록 우리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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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루하루 삽시다>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세월흘러 나이들어가니 간간히 들리는 부음訃音 소식입니다. 어제 70대 초반의 사촌형과 주고 받은 카톡 내용입니다.
-“어제는 시동리의 초등학교 동창 서울 사는 조대희가 집에서 역기 운동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네. 콜레스톨이 높으면 뇌졸중, 뇌경색, 심장마비가 오지. 핏속에 불순물이 혈관을 타고 돌다가 혈관을 막아 절명하게 만드네. 조심해가며 살아가야 하네.”
“조대희가요! 제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그 나이에 웬 역도인가요. 아마 경찰 근무했지요. 덧없는 인생, 참 허무虛無하네요.”
“그저께 작고하여 어제 경희대 의료원에서 장례를 지냈네. 허무하지. 이렇게 한사람씩 잊혀져 가는 거라네.”-
참 허무한 인생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어제 ‘재의 축복과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중 응송 후렴입니다.
“저희가 모르고 죄를 지었을지라도 뉘우치며 살고자 하오니, 갑자기 죽음을 맞지 않게 하시고, 회개할 시간을 주소서.”
아프고 약한 인생에 대한 무한한 연민과 더불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한일전 여자아이스하키 4:1 패배에도 불구하고 격찬이 쏟아졌다 합니다. 감동의 원인은 남북선수 모두가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예전 병고病苦중 돌아 간 형이 깊이 공감한 시편 한 구절도 생각납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시편 90,10).
이런 말씀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야 겠다는 자각自覺을 갖게 합니다. 마침 어제 써놓은 짧은 잠언같은 ‘하루만 산다’라는 체험적 고백의 글이 생각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강론을 쓴다/미사를 봉헌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하루만 산다
“아, 감사하다. 하루를 살았다!”/고백하며
하루 마친후/잠자리에 든다
하루하루가/인내와 겸손/비움의 수련이구나-
그렇습니다. 하루하루 살 때 환상은 걷쳐 삶은 단순, 투명해집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신명기에서 모세는 우리 모두에게 시공을 초월한 충고 말씀을 주십니다. 무려 ‘오늘’ 이란 말마디가 4회 나옵니다. 하느님께는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영원한 오늘’만 있을뿐입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30,19-20ㄴ).
바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 말씀입니다. 생명과 축복은 선물膳物이자 동시에 선택選擇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선물로 주어지는 생명과 축복을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주 우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매달려야 삽니다.
분도 성인도 그의 규칙에서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마라.’는 말씀과 더불어,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일인 기도보다 앞세우지 마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하느님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오늘 복음에서 구체적 ‘생명의 길’, ‘축복의 길’, ‘구원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들어도 ‘사람이 되는 길’, ‘성인聖人이 되는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외없이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구원법칙입니다. 모두에게 활짝 열린 구원의 길, 생명의 길입니다. ‘주님 사랑’으로 ‘날마다’ 1.자신을 버리고, 비우고, 내려놓고, 2.제 책임의 십자가, 운명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3.주님을 충실히, 항구히 따르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구원의 세요소입니다. 셋 모두가 동사動詞로 이루어진 아주 구체적 수행입니다. 셋 모두여야지 하나 둘만 빠져도 실격입니다. 이 모든 수행의 원동력은 주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살아야 구원의 나날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끝으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좌우명 애송시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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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학창시절에 시험을 보는데 생각보다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요.
‘나만 이렇게 어려운 것이 아닐 거야. 다른 아이들도 어려워서 많이 틀렸을 거야.’
그런데 예상과 달리 100점을 맞은 친구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저는 몇 문제를 틀렸지요. 이때 저는 자랑스러웠을까요? 아니면 부끄러웠을까요? 너무나 부끄러웠고 자꾸만 친구들의 100점 맞은 시험지만 생각나면서, 나도 100점을 맞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지요.
여기서 친구들의 100점은 제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단지 부러움의 대상일 뿐, 저의 점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런데도 친구들의 100점 점수만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저의 점수를 가리고만 싶은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었지요.
제 자신이 열심히 했든 열심히 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나의 점수인 만큼 소중하게 여겼으면 어떠했을까 싶었습니다. 부끄러워도 저만의 점수이니까요.
사실 지금의 삶 안에서도 이렇게 남의 것만을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요? 분명히 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러워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지금의 삶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의기소침해하면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갑니다.
부러움의 대상은 절대로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대신 나의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나의 사랑, 나의 꿈, 나 삶 등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단순히 부러움을 뛰어넘어서 지금보다 더욱 더 기쁘게 행복한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참, 여기에 하나 더 반드시 신경 써야 할 나의 것이 있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내가 부러워하는 남의 십자가가 아니라 나만의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솔직히 어렵고 힘든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들은 주님께 불평불만을 던집니다.
‘주님, 제가 짊어질 십자가가 너무나 크고 무겁습니다. 다른 사람은 이렇지 않은데 왜 저의 십자가만 이렇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다른 이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지요. 대신 자신의 십자가만 보고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하시지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바로 진정으로 목숨을 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러움의 대상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십자가를 잘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데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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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억 버는 방법}
‘인생은 한 방이다.’라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에 1억 버는 방법을 알려 주는 책이 있다는 친구의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는 곧바로 서점을 찾아가 여점원에게 물었습니다. 여점원은 창고에서 책을 가지고 와서 건네주었습니다. 책의 제목은 ‘1억을 하루에 버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책을 받아들고 감탄한 이 남자는 묻습니다.
“와~~ 이거 진짜에요? 1억을 정말로 하루에 벌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여점원은 또 한 권의 작은 책을 건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손님, 이 책에는 부록도 같이 있네요. 아마 부록도 꼼꼼하게 보셔야 할 거에요.”
여점원이 내민 부록의 제목은 이러했습니다.
‘감옥에서 심심찮게 보내는 방법 365가지’
하루에 일억을 번다는 것, 그 방법은 감옥에 갈 일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탕주의와 같은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물질적인 것들에 행복을 찾으려고 하면 절대로 찾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더 많은 물질적인 것들을 계속해서 찾기 때문에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이 세상 삶을 모두 마치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를 대비해서 어떤 행동을 하고 계십니까? 혹시 이 역시 한 방의 사랑을 실천하면 된다는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한 방을 찾는 삶이 아니라, 꾸준히 한 단계 한 단계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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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재의 수요일’을 지내고 맞이하는 첫 날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실 분임을 밝혀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일어날 일 네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수난을 당하신다는 것이요, <둘째>는 버림을 받으신다는 것이요, <셋째>는 죽임을 당하신다는 것이요, <넷째>는 죽은 후에 살아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는 모두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하느님의 권능이 개입할 것임을 시사해줍니다. “반드시”(이백주년 성서; “마땅히”)라는 단어는 이 모든 것이 필연성이나 당위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당신을 따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요, <셋째>는 이를 지속적으로 날마다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주권이 오직 하느님께만 있음을 믿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신뢰를 둔다는 것이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 지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애기를 가슴에 품듯 끌어안는다는 원어의 뜻대로 자발적으로 기꺼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린다거나 자기 십자가를 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왜 하는가?’ 가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이것들을 행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인생의 길에서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인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서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결단이 요청됩니다. 생명과 죽음의 결단이 요청됩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 24)
<제1독서>에서도 바로 이 생명과 죽음의 길에서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길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 30,20)
오늘, 우리가 자신을 버리더라도 예수님을 위하여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더라도 예수님을 사랑하여 사랑으로 짊어진다면, 바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분께 매달리는 일이 될 것이요,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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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반신부의 복음 묵상
<십자가는 천국의 열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기도입니다. “나의 빈약하고 연약함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만 주님께 바라는 굳센 믿음으로 실망하지 않겠습니다. 원컨대 저 십자가의 능력이 내게 힘을 주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이 십자가를 감당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십자가는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예수님께서는“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4).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버리면 모두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면 답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앞에서 당신의 뜻을 버렸기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아니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알퐁소 성인은 “당신이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를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힘들게 고생하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그러나 막상 일상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주장, 뜻을 양보한다는 것이 정말 마음 같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 공로를 내세우지 말고 또 내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 놓는다.”“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 11,26;30,19-21).
마땅히 생명과 행복을 선택해야 하지만 그것이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양보하는 것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그 시작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요까짓 것’ 하는 것이 정말 대단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고까짓 것’일 수 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신중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어렵고 힘든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 지금은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가 더없이 큰 축복임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 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여러분을 져줄 것입니다”(성 토마스 아 켐퍼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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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제가 유기서원기를 보낼 때 저의 어머님(이정숙 사비나)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몇 차례 들려주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어머님께서 들려주신 이 말씀은 어머니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뜨거운 체험을 통해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는 "너도 죽어라!"는 어머니의 마음이었습니다.
'죽어야 살 수 있다!' 이 진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진리입니다. 너를 위해 내가 죽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다는 것! 내가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된다는 것! 정말 말처럼 쉽지도 않고, 죽지 않고 싶어하는 나 때문에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 30,19)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당신의 온 지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선택했고, 이런 주님께로 당신의 온 지체가 향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도 살고 모두를 살리는 만인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당신멋져!'라는 건배사 구호가 있습니다. 이 말은 다음 말에 앞 글자를 따서 만든 말입니다.
당당하게
신나게
멋지게
져주면서 살자!
그런 사순시기가 되었으면 좋겠고, 그래서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함께 부활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시기와 함께하는 설명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기쁘고 행복한 설명절 보내시길 기도드립니다. 주변에 어려운 이웃들에게도 눈길을 주시면서...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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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복되어라, 주님께 믿음을 두는 사람>
어제부터 시작된 이 사순절은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우리 삶의 무게들과 함께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사순절 동안의 대부분의 복음과 독서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씀은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역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9,23-24)
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살아온 것은 십자가를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하면 십자가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지요.
또 우리는 목숨을 살리고 싶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어서 예수님께 다가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하지 말고 ‘십자가를 매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목숨을 잃는 사람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이해하기 힘 든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인도의 유명한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의 일화입니다.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지방 강연을 가려던 간디가 올라탔습니다. 그 순간 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져 플랫홈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기차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간디는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습니다. 함께 동행하던 사람들은 간디의 그런 행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유를 묻는 한 승객의 질문에 간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머지 한 짝마저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안타까워하며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가슴에 품고 있다면 아마도 아쉬움은 계속해서 남아있을 터이고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은 한 짝마저 던져 주었을 때 필요한 사람에게 주었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은 오히려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사서 고생을 하고 사서 고민을 합니다. 따져보면 우리가 고민하는 것들, 즉, 자녀, 돈, 건강, 학업, 사업 등에서 기인하는 대부분의 걱정들은 90%가 스스로의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걱정은 10%도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실제로 일어나는 일보다는 스스로 만든 생각 속의 걱정으로 속을 끓이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정신 훈련 전문가인 샤르마 박사는 사업가들이 염려하는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통계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사업가들이 갖고 있는 근심, 걱정, 불안, 초조의 세계를 분석해 보니 그 가운데 54%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것이요, 26%는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과거 행동에 대한 것이요, 8%는 그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사람들의 견해나 비판에 대한 것이요, 4%는 그들이 즉각 해결할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단지 6%만이 그들이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실제적인 걱정거리였던 것입니다.(송봉모, ‘일상도를 살아가는 인간’98쪽)
그렇습니다.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하는 걱정은 거의 대부분이 쓸데없는 걱정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혼자서 이 세상 근심을 다 짊어지고 사는 것처럼 태산같은 한숨을 몰아쉬면서 걱정만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간디의 예화에서 보듯이 걱정할 필요 없이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얼른 잊어버리든지 남은 한 짝을 빨리 던져주든지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부딪혀지는 문제들은 걱정만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마주해야 풀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는 모세의 유언이 나옵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주는 유언으로 신명기 내용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이 내려다보이는 요르단강 바로 앞까지 와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서 죽어가며 모세는 이러한 유언을 합니다. 유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신명30,15-18)
우리는 자신의 욕망대로 살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고 성공한 것 같이 여기지만 그것이 죽음의 길이라고 모세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뜻대로 살면 손해볼 것 같지만 바로 그것이 생명의 길이라고 오늘 제1독서는 말합니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30,19-20)
우리가 삶의 과정에서 질 수밖에 없는 많은 문제들의 해결책이 이렇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간디가 그랬고 모세가 그랬으며, 예수님께서 그러셨지요.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극복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문제에 부딪히게 되고 또 그것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을 지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걱정이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이고, 실제로 관심을 가져야 될 문제는 아주 적은 분량인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적극적으로 지고 따를 때 풀려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된 제자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3)
그것이 생명의 길이요 부활의 길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살면서 근심과 걱정이 앞서는 일들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그것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출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셨던 바로 그 길이 생명의 길이요, 부활의 길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로 나아가는데 있어서의 여러 걸림돌들, 잘못된 습관이나 지나친 욕심, 또 이웃 간의 단절을 불러오는 악행들을 고치고 제거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부활이 좀 더 큰 결실로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대로 몸소 실천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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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한다."(루카 9, 23)
생명의 해답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오늘도 날마다
제 십자가를
만나게 됩니다.
십자가를 통해
제자신이 누군지를
알게됩니다.
십자가와
분리될 수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십자가 없는 삶은
교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듯
겸손으로
나가야합니다.
겸손은
제 십자가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우리 목숨을
구할수 있는 것은
십자가뿐입니다.
모든 목숨은
십자가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목숨은
십자가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죽지만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의 얼굴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십자가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다시 밝아지는
구원의 신비입니다.
구원의 방식은
십가의 방식뿐임을
이 사순시기는
다시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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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십자가가 은총이라면 다른 것은 오죽하겠습니까.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삶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면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날마다 깊어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우리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나를 빚으시고 이끌어 가시는 주님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인정하기위해서는, 우리의 십자가는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을 향하라고 주님을 따르라고 우리에게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까닭은 자신의 방식을 아직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이 신앙의 존재하는 우리들임을 다시금 절절이 깨닫게 됩니다.
그야말로 날마다 은총이며 날마다 주님의 날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분노 안에서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는 우리를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자신을 버리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날마다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와 강하게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고 부드러워진다면 십자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이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않기에 십자가는 십자가일 뿐입니다.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저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주저앉아 있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다시금 넘어지고 쓰러지는 아픔과 고통이 있더라도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생명입니다.
주님을 먼저 따라갈 때, 이 모든 것은 덤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믿고 삶을 사랑하는 은총의 사순시기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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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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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1550
2월15일 [연중 연중 제6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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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월15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루카 9장 22-25절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오징어 덮밥 3인분>
어제 재의 수요일 점심때까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단단히 각오를 했기에 점심때까지는 아예 물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었지요.
점심식사도 최소한 간단히 요기만 했습니다. 계속 식탁에 앉아 있으면 유혹이 생길 것 같아 빨리 일어섰지요. 그런데 문제는 저녁 식사 시간이었습니다.
평소에는 별로 식욕이 없었는데, 하필 오늘따라 왜 그리도 입맛이 당기던지 신기했습니다. 그래도 꾹 참아야했지요. 밥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이 먹고 끝내려고 했는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사탄의 소행인지 갑자기 고봉으로 가득 담긴 한 양푼이 제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오늘 따라 국물이 걸죽한 오징어 볶음이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손이 저절로 움직였습니다. 3인분은 족히 될 밥에 국물이 "왔다!"인 오징어 볶음을 넣어 열심히 오징어 덮밥을 만들었지요.
"아차!" 하고 정신을 차리는 순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오징어 덮밥 3인분은 이미 하나도 남지 않았고, 아침의 굳은 결심을 완전히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오징어 덮밥이란 유혹 앞에 완전히 제 정신을 잃은 제 모습이 한심한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오늘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제자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자기를 버리기
2. 매일 제 십자가를 지기
3. 예수님 뒤를 따르기
자기를 버린다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이 사순기간 우리가 가장 노력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란 새로운 가치관을 우리 안에 형성시키기 위해 어제의 낡고 닳아버린 우리 자신과 결별한다는 것입니다.
그릇 안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 그릇의 가치는 천차만별입니다. 고급 향유가 가득 담긴 그릇은 향유 못지않게 소중하고 가치 있게 여깁니다. 그러나 개밥을 담는 그릇은 사람들의 발길에 자주 차이면서 홀대받는 개밥그릇일 뿐입니다.
우리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 하실 때 우리 역시 덩달아 가치 있는 사람, 존엄성 있는 인간, 아름다운 그릇으로 평가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의미는 각별한 새로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기 위해 낡고 퇴색되어 초라해진 우리 자신을 비우는 일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운 어제의 나와 작별하고 다시 한번 일어서는 일입니다. 목숨이 붙어있음을 하느님께서 아직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는 표시로 여기는 일, 다시금 우리의 몫을 살아내는 일, "내 몫이려니" 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일이야말로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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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 30, 20)
매우 부자였던 어떤 아랍 사람이 사막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식량이 다 떨어졌습니다. 이틀간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결사적으로 걸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사막 가운데의 한 작은 샘터를 발견하고 거기에 이르렀습니다. 급히 물을 마시고 보니 얼마 전에 거기에 천막을 쳤던 흔적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혹시 천막을 치고 머물렀던 사람들이 아무런 음식 조각이라도 떨어뜨린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자세히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놀랍게도 어떤 주머니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얼른 그것을 만져보니 손에 떡처럼 단단한 것이 만져졌습니다.
그 사람은 미친 듯이 주머니를 헤쳐서 열었습니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속에 있는 것을 한 움큼 움켜서 꺼내 보니까 그것들은 아주 좋고 큰 진주알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손에 한 움큼 쥐었던 진주들을 사방에 던져 뿌리며 외치면서 죽어갔습니다. “겨우 진주였단 말인가?”
결국 사람의 목숨을 유지하게 해 주는 것은 약간의 물과 음식이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이 27%입니다. 자동차, 핸드폰, TV, 선박 등의 수출을 늘이기 위해 FTA란 것을 체결하며 우리농촌 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브에누스아이레스에는 영국에서 본 오래된 지하철이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지하철을 영국 다음으로 만든 나라가 아르헨티나 라는 것입니다. 유럽에서 전쟁할 때 식량이 부족해서 각 나라들이 금을 싣고 와서 고기와 곡식으로 바꾸어 가서 세계에서 5번째로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나라도 세계 경제공황이나 전쟁과 같은 일이 벌어지면 핸드폰을 뜯어먹어야 할 일이 머지않은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다른 나라들의 경제 상황에 따라 우리 경제도 휘청휘청 하는 이유가 너무 수출에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나라뿐만 아니라 사람에게서도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선택하며 진정 중요한 것을 버리는 사례가 허다합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10원도 채 안 되는 액수 때문에 부부가 자살한 사건이 최근 인도에서 있었습니다.
인도 동부 서벵골 주에 사는 한 부인이 차(茶)를 사기 위해 남편 옷에서 50파이세(미화 1센트)의 동전을 꺼내간 것이 발단이 되어 부부가 싸움이 난 것입니다. 화를 이기지 못한 남편이 독약을 먹고 자살하자 부인도 5개월 된 딸을 남겨둔 채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또 전에 어머니가 야구방망이 등으로 아이를 전국1등 만들기 위해서 두드려 패다가 오히려 아이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전국 1등이라는 허상과 아이의 삶, 또 자신의 생명과 바꾼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모세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이 말은 생명과 행복을 택하든, 죽음과 불행을 택하든 결국 우리가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신자가 돈을 버는 일에 바빠서 냉담하다가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해 죽었다고 합시다. 아마 그 사람은 진주를 먹으며 사는 고통을 당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생명이고 행복인지 선택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있는데도 죽음과 불행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지금 여자의 삶은 100년 전에 하인 300명을 데리고 사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밥해주는 하인, 청소해주는 하인, 빨래해 주는 하인, 불 때주는 하인, 또 TV만 틀어도 얼마나 많은 하인들이 나옵니까?
2천cc 차 한 대는 말 200마리가 끄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음악을 연주해주고 길도 안내해 주고 하는 삶은 예전의 왕보다도 화려한 삶입니다. 그런데도 왜 계속 물질, 물질만을 선택하며 살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라고 말씀하시며, 당신 자신이 ‘생명의 양식’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체를 택하든, 세상의 명예나 재물, 쾌락을 택하든 둘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십자가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삶이란 ‘아낌없이 주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으로 주신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신 당신을 선택하려면 당신처럼 매일매일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베풀지 않으면 썩어서 죽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마치 흐르는 물처럼 받은 것을 내 보낼 때 새로운 생명으로 채워지게 되어있습니다.주기 싫어 모으려고 하는 것이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콩나물이 물을 흘려버리지 않으면 썩는 것처럼, 사해도 물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내보내지 않아서 죽음의 바다가 된 것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놓고 선택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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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9,22-25 :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신다. 인간은 세상에서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하고 무언가 더 누리려는 욕심이 있다. 그러나 온 천하를 얻을 수 있더라도 자기 목숨과 바꾸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선 내가 살아있고 나서야 가치가 있는 것이지, 내가 없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당신을 닮는 것만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하느님 안에 있을 때만이 진정으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즉 한 마디로 한다면 우리 인간은 하느님을 떠난 삶으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고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만 자유로운 것이다.
이 행복과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이 된다. 하느님의 모상을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하느님의 모상은 매일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잘 짐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즉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주님을 닮아가면서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과거를 모두 잊고,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내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상대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나 자신이 가장 큰 십자가이며, 이 십자가는 다른 누구도 대신 져줄 수가 없는 나만이 지고 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십자가도 꼭 나만이 질 수 있는 것이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성시켜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 생명을 우리가 마음대로 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생명이 살아 있는 한 자신의 안일만을 위해 이기적인 삶을 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과 능력을 그리고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생명을 영원히 살릴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입으로만 주님을 부르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이 주님께로부터 멀리 있다면 주님께로부터 우리도 외면을 당할 것이다. 주님께서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마 우리가 그분을 외면하여 바라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순시기가 이제 진정으로 우리에게 은총의 때가 될 수 있도록, 즉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시기가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영광의 부활에 우리도 기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는 은혜를 청하면서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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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생명을 찾아가는 길>
오늘 제1독서는 말합니다.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 39,19-20) 행복하려면 선택과 결단을 분명히 하고 주님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선택은 매우 중요한 과제요 고통이 뒤따르는 도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마땅히 많은 고난을 겪으실 것입니다."(루카 9,22) 그분은 우리 모두의 목숨을 건지시려고 고난과 죽음을 자원하여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분의 거룩한 선택이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당신과 같은 선택과 처신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인간다워지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무사안일하게, 그리고 잠든 채 세상살이에 끌려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을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9,23-24)
이 말씀은 정신을 바짝차리게 하는 강한 역설입니다. 쉽고 편안한 삶을 피하고 일상의 어려움을 받아들일 때 참 행복이 찾아든다는 것입니다.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지 말고, 사랑을 위해 자기 목숨마저 내놓을 때 영원히 산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이신 주님을 따라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십자가가 바로 행복의 열쇠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버리라” 하십니다.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고, 자신의 뜻과 욕구충족을 앞세우려는 태도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애착과 이기심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는 ‘거짓 자아’를 폐기처분하라는 말씀이지요. 자기 자신을 버릴 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갈라 2,20) 행복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 하십니다. 사랑으로 죽음까지 받아들이신 예수님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온갖 고통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곧 내가 만들어내는 고통, 타인으로부터 오는 고통, 남을 대신하여 겪는 고통, 신앙 때문에 겪는 고통을 기꺼이 수용하라는 것이지요.
결국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으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이들과 세상을 향해 자신의 시간과 재물과 능력을 내놓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지요. 목숨을 구하려고 발버둥 칠수록 죽음의 구렁에 빨려들 뿐입니다. 생명과 행복 안에 머물도록 매일 순간마다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 삶의 항구한 법칙입니다.
우리 모두 매순간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일상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불의에 저항함으로써 행복의 길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기꺼이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모든 것을 얻고 영원한 생명의 정원으로 들어가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내가 버리지 못하고 내놓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는 오늘이기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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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하느님의 뜻과 자기 뜻을 식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뜻과 사람의 뜻은 무엇이 다릅니까? 사람의 뜻은 자신을 위하는 것입니다. 반면 하느님의 뜻은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십자가를 피하려고만 합니다. 달콤한 유혹에만 익숙해 있기 때문이지요. 달콤한 유혹은 무엇입니까? 편안한 신앙생활입니다. 희생 없이 축복만 받으려는 마음입니다. 물론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기대를 하지요. 바라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고, 기왕이면 사업도 잘되고, 건강도 주어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바람입니다.
반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시련과 고통을 통해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별을 보는 것이지요. 별은 과거부터 길을 가리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동방 박사들을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으로 인도한 것도 별이 아니었습니까?
별을 보려면 어둠이 있어야 합니다. 어둠은 고통과 절망, 시련, 나아가 죽음을 뜻하지요. 이러한 어둠을 극복함으로써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사무처장/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데아퀴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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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밤송이 김기현 요한 신부님]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하고 대비할 수 있는 선택과 실천을 해 봅시다.>
특이한 게임쇼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쇼에 이름은 ‘어떤 대가를 치르겠는가?’ 쇼입니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쇼가 시작됩니다. 사회자는 천만 달러의 주인공이 될 사람의 이름을 불렀는데, 놀랍게도 당신의 이름이 불려집니다. 당신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무대에 올라가 사회자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당신은 한 가지 대가만 치르면 됩니다. 하나만 선택 하세요~ 그러면 여기 있는 천만 달러가 모두 당신 것입니다.”
그리고 목록을 제시합니다.
‘자녀를 다른 집에 입양시킨다. ... 일주일간 매춘부 노릇을 한다. ... 미국 시민권을 포기한다. ... 가족을 버린다. ... 낯선 사람을 죽인다. ... 성전환 수술을 받는다. ... 배우자를 버린다. ... 국적을 바꾼다.’
목록의 내용이 당신의 심장을 요동치게 하고, 정신을 혼란케 합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대답을 들을 순 없겠지만, 미국에 사는 다른 사람들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설문 조사 결과 네 명 중에 한 명은 ‘천만 달러를 준다면, 가족을 버릴 수 있다.. 교회를 버릴 수 있다... 일주일간 매춘부가 될 수 있다...’ 하고 대답을 했고, 다섯 명 중에 한 명은 ‘미국 시민권을 포기할 수 있다... 배우자를 버릴 수 있다... 자녀를 입양시킬 수 있다...’ 하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응답자의 2/3가 대가를 치르겠다고 한 건데요. 그들과 같이 탐욕스러웠던 사람이 복음에도 나오는 거 같습니다.
루카 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인데요. 그는 유례없는 풍년으로 곡식창고를 더 늘리고 부를 축적합니다. 그의 관심사는 ‘이제 남은여생 골프나 치고, 낚시나 하면서 편하게 보내야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누구 차지가 될까요? 어쩌면 장례를 치르는 동안 한쪽에서 가족들이 그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움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는 세상의 것을 얻으려고 했지만, 결국 빈손이 되어 땅 속에 묻히게 됩니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떠나가게 되는데요. 우리의 모습도 그와 다르지 않은 거 같습니다.
언제가 빈손으로 떠나게 될 텐데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움켜쥐고 욕심을 내고 분주하게 살다보면, 죽음 이후의 ‘영원’을 준비하고 대비하는 일은 미루고 또 미루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지혜로운 선택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오늘 하루, 죽음 이후의 영원을 준비하고 대비할 수 있는 지혜로운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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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뜻입니다. 재물이든 권력이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대로 모두 얻고,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부유하게 산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인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들이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것들이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또 이 말씀을,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의 방식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지상의 허무한 것들을 얻는 방식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온 세상을 얻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히려 방해만 될 뿐입니다.
“온 세상도 얻고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는 없는가?”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상에서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렇게 둘 다 누릴 수는 없는가?”)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이 말씀은, “지상의 부귀영화만 추구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지상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을 얻는 일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중간 지점도 없고, 절충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영원한 생명만 추구해야 합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8,25).”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부유했던 사람들도 있었지 않은가?”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부유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맞지만, 끝까지 부유하게 살면서 부귀영화를 누린 성인 성녀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누구든지’는 예외가 없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모두 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날마다’는 ‘끊임없이’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는 혹시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감수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나를 따라야 한다.’는 ‘나만 따라야 한다.’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길이 언제나 항상 어렵고 힘든 길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신앙생활이 정말로 그렇게 어렵고 힘들기만 한 생활일까? 고난과 시련만 있어서 항상 고통스럽고 고달프기만 한 생활일까? 만일에 실제로 그렇다면 누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성모님께서는 마리아의 노래에서 이렇게 찬미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8).”
‘기쁨’은 예수님의 뒤를 끝까지 따라갈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만일에 기쁨이 없다면 신앙생활은 참을 이유가 없는, 삭막한 고역(苦役)이 됩니다. 이 기쁨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서 옵니다. 예수님 뒤를 끝까지 잘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믿음, 그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희망, 그리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예수님의 사랑, 옆에서 함께 가면서 우리를 도와주는 가족과 이웃과 동료들의 사랑. 우리가 예수님 뒤를 따라가기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은, 어쩔 수 없어서 참고 견디는 일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하는 일이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일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기쁨의 공동체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요한 11,15).”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 (루카 10,17).”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그러면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거나 헛되이 애쓴 것이 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설령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가 되어 여러분이 봉헌하는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진다 하여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필리 2,14-18).”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신앙인의 ‘기쁨’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주는 만족감이나 즐거움과는 차원이 다른, 영원하고 참된 기쁨입니다.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얻을 수 없는 그런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기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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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칼 들지 않은 살인자에 맞서>
루카 9,22-25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칼 들지 않은 살인자에 맞서>
물불 안 가리는 날강도나
사람 목숨을 업신여기는 살인자가
예수님을 배척하거나 죽이지 않습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모든 이를 품어야 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입니다.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칼 들지 않은 살인자입니다.
손에 쥔 칼로 말미암아
칼 든 살인자는 찾기 쉽지만
보이지 않는 칼을 품은
칼 들지 않는 살인자는 쉬 드러나지 않습니다.
칼 든 살인자의
손에 쥐어진 칼보다
칼 들지 않은 살인자의
보이지 않는 칼이 훨씬 날카롭습니다.
칼 든 살인자는
법에 따라 처벌을 받지만
칼 들지 않은 살인자는
법망을 교묘히 피할 수 있습니다.
칼 든 살인자는
몇몇 사람을 죽이지만
칼 들지 않은 살인자는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칼 든 살인자보다
갈 들지 않은 살인자들이
더욱 잔인합니다.
칼 든 살인자보다
칼 들지 않은 살인자가
공동체에 더 큰 해악을 끼칩니다.
칼 든 살인자보다
칼 들지 않은 살인자가
공동체에 더욱 치명적입니다.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칼 들지 않는 살인자들의 편이 되기를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부하십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는
예수님의 벗들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칼 들지 않은 살인자들에게
예수님은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는
예수님의 벗들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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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
어떤 장군이 전쟁중에 적군에 패해서 도망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큰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전쟁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적군에게 등을 돌려 도망을 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웠고,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자살을 위해 사람들이 없는 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칼로 목숨을 끊으려는 순간, 바로 앞에 자신보다도 큰 먹이를 물고 가는 개미 한 마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개미는 물고 가다가 먹이를 놓치고 또다시 먹이를 물고 가다가 또 놓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흥미를 느낀 장군은 자살할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개미를 계속해서 따라갔습니다. 개미는 먹이를 자그마치 79번이나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80번째에 개미굴로 먹이를 들고 들어가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장군은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나는 이제 겨우 한 번 밖에 실패하지 않았는가? 저 하찮은 미물인 개미도 79번이나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결국 성공했는데, 단 한 번 실패로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개미를 통해 용기를 얻은 그는 다시 돌아갔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고통과 시련으로 큰 좌절감에 빠지신 고운님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내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을 닮은 삶,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에게 주어진 고통과 시련이라는 십자가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몇 차례의 실패를 경험한다 할지라도 이 십자가를 팽개쳐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건너편에 구원의 길이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자신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피하려 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고운님들! 저는 몇 년전에... 코 수술 때문에 서울성모병원에 며칠간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수술을 하고 두 코를 솜으로 막고..병원 복도에서 운동을 하다가... 백혈병을 않고 있는 어린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 아이는 누구의 죄 때문에 아픈 것입니까?"
아이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그때 주님은 속삭이셨습니다. 요한 복음 9장3절 말씀입니다.
"저 사람이(아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지금 병원 안에 수많은 병자들, 특히 눈매가 초롱초롱한 어린 아이 환자들...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가정 안에서 소중한 사람들이 병으로 쓰러져있고... 또한 어떤 이유에서든지 마음이 아프고 힘들어서 하루 하루 겨우 버텨내며 살고 있는 고운님들과 가정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할까?라는 마음 속에서 서서히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겠지!라는 생각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부터인가...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을 위해서 쉼 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느낀것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아픈 그들은 모두 죄인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놀라운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가 까닭없이 울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그것은 바로 나를 위해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까닭없이 주어진 십자가가 있다면, 누군가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그 십자가를 잘 짊어지고 가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그러면서 매 주일 미사 강론 전에...저와 신자분들끼리 서로 마주보며 외치는 말입니다
"당신을 보니 마치 예수님을... 성모님을 보는 것 같습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어느 누군가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성령 충만한 자비로운 삶을 살아가는 은혜로운 사순시기가 되시기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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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부산본원 김종오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의말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제 십자가를 지고’ 갈 줄 아는 만큼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제 십자가’는 자신의 인간적 한계와 불완전성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인간적 한계와 불완전함에서 오는 고통의 십자가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제각기 다른 우리의 고통은 서로 다름을 드러내고, 그 다름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서로 다른 ‘복된 아픔들’입니다.
인간적 한계와 불완전성을 거부하며 지고 가는 십자가는 고통 뿐입니다. 자신을 거부하면 ‘제 십자가’를 이웃에게 전가하게 됩니다. ‘제 십자가를’ 거부하는 만큼 우리는 이웃에게 고통만 안겨줍니다.
‘제 십자가를 지는 삶’은 고통스럽지만 곧 선물로 바뀝니다. 인간적 한계와 불완전함을 수용하며 ‘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때, 우리의 고통은 ‘복된 아픔’이 되어 이웃에게는 선물이 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가야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우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게 됩니다. ‘제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주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요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가 이웃에게 선물이 되는 시기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는 이웃을 위한 선물을 보따리를 지고 떠나는 순례자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는 만큼 우리는 세상과 이웃의 고통을 공감하는 자비와 연민의 선물이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감으로써 우리는 인간적 한계와 불완전함에서 오는 고통 속에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고통이 많은 만큼 은총도 풍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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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올림픽 개막식을 보았습니다. 아름다웠고, 독창적이었고, 우리의 것들을 표현했습니다. 개막식을 준비했던 모든 분들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제게 감동을 준 것은 순식간에 변한 태극 문양의 모습입니다. 드론들이 펼친 환상적인 모습들입니다. 성화대에 점화한 김연아 선수입니다. 개막식을 보신 분들이면 저와 비슷한 감동을 느꼈을 것입니다. 외신들이 보도한 남과 북의 공동입장도 있습니다. 올림픽이 평화를 기원하는 것이라면,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인 남과 북이 공동으로 입장하고, 단일팀을 구성한 것은 분명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교구청에는 여러 부서들이 있습니다. 서품식을 준비할 때도 성소국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관리국의 예산 지원, 사무처의 인사명령, 평화방송의 중계, 명동성당의 전례 지원, 신학교의 신학생 지원, 홍보국의 미디어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이번 서품식을 위해서 수고하신 신부님들을 위해서 점심 도시락을 준비했습니다. 작은 정성이지만 신부님들도 고마워하였습니다. 이 모든 지원이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성소국 직원과 성소 후원회 봉사자들의 역할입니다. 서품식을 위한 주무 부서이기 때문입니다.
남과 북의 평화와 화합을 위해서도 많은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강대국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한국과 동맹인 미국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 할 것입니다. 힘이 세지면 우리를 침략했던 일본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념이 다른 중국과 러시아의 양해도 분명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의 나라들은 모두 자국의 이익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한반도의 평화와 화합을 대할 것입니다.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남과 북의 의지입니다. 아울러 더 중요한 것은 남한 사회의 합의입니다. 시간이 걸리고,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천히 디딤돌을 하나씩 놓는 심정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를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 할 것이다.” 우리가 선택을 하면 하느님께서 도움을 주실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어떤 선택입니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주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 굶주린 이, 아픈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선택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저는 지난 역사를 통해서 희망을 봅니다. 우리는 오천년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있었지만 그것을 이겨낸 끈기와 저력도 있습니다. 흐르는 강물을 봅니다. 강물에 떠밀려 가는 것들은 거의 생명이 없는 죽은 것들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떠밀려 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세상이라는 강물에 떠밀려서 사는 것도 자유입니다. 그러나 세상이라는 강물을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더 큰 자유와 용기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는 고민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설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저도 어머니와 형님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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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난 설날 아침입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기도를 하고, 세배를 하였습니다. 늘 세배 돈을 받기만 하던 조카가 할머니에게 세배 돈을 드렸습니다. 작년에 취직을 했기 때문입니다.
세배 돈을 받는 시기에서 세배 돈을 드리는 때가 오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때가 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카들이 결혼을 해서 아이들을 낳으면 저도 할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 우리는 모두 그렇게 나이를 먹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시간은 상대적입니다. 천년도 지나간 어제처럼 느낄 수 있고, 긴 인생도 마치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은 시간을 길이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시간을 의미와 가치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 역시 길이의 시간이 아닙니다. 의미와 가치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라면 하루를 살아도 영원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았다면 번뇌와 아픔이 가득했어도 영원을 사는 것입니다.
설날 아침이었습니다. 새벽바람을 맞으며 의정부 천변을 걸었습니다. 40분을 걸으면서 새벽 운동을 나온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은 한 해의 시작을, 하루의 시작을 운동으로 열었습니다. 아마도 건강한 한 해를 보낼 것입니다.
한 시간 정도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명동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책을 보았습니다. ‘보이는 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분이 좋았습니다.
스마트 폰으로는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루가 모여서 일주일이 됩니다. 일주일이 모이면 한 달이 됩니다. 한 달이 모이면 1년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창한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하루하루 생활하는 삶의 태도와 습관이 중요합니다.
오늘 성서말씀도 우리에게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계명을 선택할 것인지, 본인의 욕심과 세상의 것들을 선택할 것인지 정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마치 물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생기가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는 일 마다 잘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것을 따라가면 멸망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 중에 선택을 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명확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주님의 뜻을 따라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서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것인지, 남을 탓하고,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원망하고 하느님과 멀어지는 신앙생활을 할 것인지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길을 따라 갈 수 있도록 우리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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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루하루 삽시다>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세월흘러 나이들어가니 간간히 들리는 부음訃音 소식입니다. 어제 70대 초반의 사촌형과 주고 받은 카톡 내용입니다.
-“어제는 시동리의 초등학교 동창 서울 사는 조대희가 집에서 역기 운동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네. 콜레스톨이 높으면 뇌졸중, 뇌경색, 심장마비가 오지. 핏속에 불순물이 혈관을 타고 돌다가 혈관을 막아 절명하게 만드네. 조심해가며 살아가야 하네.”
“조대희가요! 제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그 나이에 웬 역도인가요. 아마 경찰 근무했지요. 덧없는 인생, 참 허무虛無하네요.”
“그저께 작고하여 어제 경희대 의료원에서 장례를 지냈네. 허무하지. 이렇게 한사람씩 잊혀져 가는 거라네.”-
참 허무한 인생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어제 ‘재의 축복과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중 응송 후렴입니다.
“저희가 모르고 죄를 지었을지라도 뉘우치며 살고자 하오니, 갑자기 죽음을 맞지 않게 하시고, 회개할 시간을 주소서.”
아프고 약한 인생에 대한 무한한 연민과 더불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한일전 여자아이스하키 4:1 패배에도 불구하고 격찬이 쏟아졌다 합니다. 감동의 원인은 남북선수 모두가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예전 병고病苦중 돌아 간 형이 깊이 공감한 시편 한 구절도 생각납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시편 90,10).
이런 말씀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야 겠다는 자각自覺을 갖게 합니다. 마침 어제 써놓은 짧은 잠언같은 ‘하루만 산다’라는 체험적 고백의 글이 생각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강론을 쓴다/미사를 봉헌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하루만 산다
“아, 감사하다. 하루를 살았다!”/고백하며
하루 마친후/잠자리에 든다
하루하루가/인내와 겸손/비움의 수련이구나-
그렇습니다. 하루하루 살 때 환상은 걷쳐 삶은 단순, 투명해집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신명기에서 모세는 우리 모두에게 시공을 초월한 충고 말씀을 주십니다. 무려 ‘오늘’ 이란 말마디가 4회 나옵니다. 하느님께는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영원한 오늘’만 있을뿐입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30,19-20ㄴ).
바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 말씀입니다. 생명과 축복은 선물膳物이자 동시에 선택選擇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선물로 주어지는 생명과 축복을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주 우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매달려야 삽니다.
분도 성인도 그의 규칙에서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마라.’는 말씀과 더불어,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일인 기도보다 앞세우지 마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하느님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오늘 복음에서 구체적 ‘생명의 길’, ‘축복의 길’, ‘구원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들어도 ‘사람이 되는 길’, ‘성인聖人이 되는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외없이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구원법칙입니다. 모두에게 활짝 열린 구원의 길, 생명의 길입니다. ‘주님 사랑’으로 ‘날마다’ 1.자신을 버리고, 비우고, 내려놓고, 2.제 책임의 십자가, 운명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3.주님을 충실히, 항구히 따르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구원의 세요소입니다. 셋 모두가 동사動詞로 이루어진 아주 구체적 수행입니다. 셋 모두여야지 하나 둘만 빠져도 실격입니다. 이 모든 수행의 원동력은 주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살아야 구원의 나날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끝으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좌우명 애송시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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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학창시절에 시험을 보는데 생각보다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요.
‘나만 이렇게 어려운 것이 아닐 거야. 다른 아이들도 어려워서 많이 틀렸을 거야.’
그런데 예상과 달리 100점을 맞은 친구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저는 몇 문제를 틀렸지요. 이때 저는 자랑스러웠을까요? 아니면 부끄러웠을까요? 너무나 부끄러웠고 자꾸만 친구들의 100점 맞은 시험지만 생각나면서, 나도 100점을 맞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지요.
여기서 친구들의 100점은 제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단지 부러움의 대상일 뿐, 저의 점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런데도 친구들의 100점 점수만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저의 점수를 가리고만 싶은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었지요.
제 자신이 열심히 했든 열심히 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나의 점수인 만큼 소중하게 여겼으면 어떠했을까 싶었습니다. 부끄러워도 저만의 점수이니까요.
사실 지금의 삶 안에서도 이렇게 남의 것만을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요? 분명히 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러워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지금의 삶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의기소침해하면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갑니다.
부러움의 대상은 절대로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대신 나의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나의 사랑, 나의 꿈, 나 삶 등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단순히 부러움을 뛰어넘어서 지금보다 더욱 더 기쁘게 행복한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참, 여기에 하나 더 반드시 신경 써야 할 나의 것이 있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내가 부러워하는 남의 십자가가 아니라 나만의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솔직히 어렵고 힘든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들은 주님께 불평불만을 던집니다.
‘주님, 제가 짊어질 십자가가 너무나 크고 무겁습니다. 다른 사람은 이렇지 않은데 왜 저의 십자가만 이렇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다른 이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지요. 대신 자신의 십자가만 보고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하시지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바로 진정으로 목숨을 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러움의 대상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십자가를 잘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데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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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억 버는 방법}
‘인생은 한 방이다.’라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에 1억 버는 방법을 알려 주는 책이 있다는 친구의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는 곧바로 서점을 찾아가 여점원에게 물었습니다. 여점원은 창고에서 책을 가지고 와서 건네주었습니다. 책의 제목은 ‘1억을 하루에 버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책을 받아들고 감탄한 이 남자는 묻습니다.
“와~~ 이거 진짜에요? 1억을 정말로 하루에 벌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여점원은 또 한 권의 작은 책을 건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손님, 이 책에는 부록도 같이 있네요. 아마 부록도 꼼꼼하게 보셔야 할 거에요.”
여점원이 내민 부록의 제목은 이러했습니다.
‘감옥에서 심심찮게 보내는 방법 365가지’
하루에 일억을 번다는 것, 그 방법은 감옥에 갈 일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탕주의와 같은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물질적인 것들에 행복을 찾으려고 하면 절대로 찾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더 많은 물질적인 것들을 계속해서 찾기 때문에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이 세상 삶을 모두 마치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를 대비해서 어떤 행동을 하고 계십니까? 혹시 이 역시 한 방의 사랑을 실천하면 된다는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한 방을 찾는 삶이 아니라, 꾸준히 한 단계 한 단계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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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재의 수요일’을 지내고 맞이하는 첫 날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실 분임을 밝혀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일어날 일 네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수난을 당하신다는 것이요, <둘째>는 버림을 받으신다는 것이요, <셋째>는 죽임을 당하신다는 것이요, <넷째>는 죽은 후에 살아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는 모두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하느님의 권능이 개입할 것임을 시사해줍니다. “반드시”(이백주년 성서; “마땅히”)라는 단어는 이 모든 것이 필연성이나 당위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당신을 따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요, <셋째>는 이를 지속적으로 날마다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주권이 오직 하느님께만 있음을 믿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신뢰를 둔다는 것이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 지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애기를 가슴에 품듯 끌어안는다는 원어의 뜻대로 자발적으로 기꺼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린다거나 자기 십자가를 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왜 하는가?’ 가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이것들을 행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인생의 길에서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인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서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결단이 요청됩니다. 생명과 죽음의 결단이 요청됩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 24)
<제1독서>에서도 바로 이 생명과 죽음의 길에서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길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 30,20)
오늘, 우리가 자신을 버리더라도 예수님을 위하여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더라도 예수님을 사랑하여 사랑으로 짊어진다면, 바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분께 매달리는 일이 될 것이요,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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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반신부의 복음 묵상
<십자가는 천국의 열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기도입니다. “나의 빈약하고 연약함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만 주님께 바라는 굳센 믿음으로 실망하지 않겠습니다. 원컨대 저 십자가의 능력이 내게 힘을 주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이 십자가를 감당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십자가는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예수님께서는“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4).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버리면 모두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면 답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앞에서 당신의 뜻을 버렸기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아니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알퐁소 성인은 “당신이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를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힘들게 고생하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그러나 막상 일상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주장, 뜻을 양보한다는 것이 정말 마음 같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 공로를 내세우지 말고 또 내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 놓는다.”“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 11,26;30,19-21).
마땅히 생명과 행복을 선택해야 하지만 그것이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양보하는 것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그 시작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요까짓 것’ 하는 것이 정말 대단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고까짓 것’일 수 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신중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어렵고 힘든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 지금은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가 더없이 큰 축복임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 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여러분을 져줄 것입니다”(성 토마스 아 켐퍼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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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제가 유기서원기를 보낼 때 저의 어머님(이정숙 사비나)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몇 차례 들려주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어머님께서 들려주신 이 말씀은 어머니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뜨거운 체험을 통해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는 "너도 죽어라!"는 어머니의 마음이었습니다.
'죽어야 살 수 있다!' 이 진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진리입니다. 너를 위해 내가 죽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다는 것! 내가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된다는 것! 정말 말처럼 쉽지도 않고, 죽지 않고 싶어하는 나 때문에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 30,19)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당신의 온 지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선택했고, 이런 주님께로 당신의 온 지체가 향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도 살고 모두를 살리는 만인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당신멋져!'라는 건배사 구호가 있습니다. 이 말은 다음 말에 앞 글자를 따서 만든 말입니다.
당당하게
신나게
멋지게
져주면서 살자!
그런 사순시기가 되었으면 좋겠고, 그래서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함께 부활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시기와 함께하는 설명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기쁘고 행복한 설명절 보내시길 기도드립니다. 주변에 어려운 이웃들에게도 눈길을 주시면서...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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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복되어라, 주님께 믿음을 두는 사람>
어제부터 시작된 이 사순절은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우리 삶의 무게들과 함께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사순절 동안의 대부분의 복음과 독서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씀은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역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9,23-24)
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살아온 것은 십자가를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하면 십자가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지요.
또 우리는 목숨을 살리고 싶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어서 예수님께 다가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하지 말고 ‘십자가를 매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목숨을 잃는 사람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이해하기 힘 든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인도의 유명한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의 일화입니다.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지방 강연을 가려던 간디가 올라탔습니다. 그 순간 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져 플랫홈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기차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간디는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습니다. 함께 동행하던 사람들은 간디의 그런 행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유를 묻는 한 승객의 질문에 간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머지 한 짝마저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안타까워하며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가슴에 품고 있다면 아마도 아쉬움은 계속해서 남아있을 터이고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은 한 짝마저 던져 주었을 때 필요한 사람에게 주었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은 오히려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사서 고생을 하고 사서 고민을 합니다. 따져보면 우리가 고민하는 것들, 즉, 자녀, 돈, 건강, 학업, 사업 등에서 기인하는 대부분의 걱정들은 90%가 스스로의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걱정은 10%도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실제로 일어나는 일보다는 스스로 만든 생각 속의 걱정으로 속을 끓이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정신 훈련 전문가인 샤르마 박사는 사업가들이 염려하는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통계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사업가들이 갖고 있는 근심, 걱정, 불안, 초조의 세계를 분석해 보니 그 가운데 54%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것이요, 26%는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과거 행동에 대한 것이요, 8%는 그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사람들의 견해나 비판에 대한 것이요, 4%는 그들이 즉각 해결할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단지 6%만이 그들이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실제적인 걱정거리였던 것입니다.(송봉모, ‘일상도를 살아가는 인간’98쪽)
그렇습니다.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하는 걱정은 거의 대부분이 쓸데없는 걱정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혼자서 이 세상 근심을 다 짊어지고 사는 것처럼 태산같은 한숨을 몰아쉬면서 걱정만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간디의 예화에서 보듯이 걱정할 필요 없이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얼른 잊어버리든지 남은 한 짝을 빨리 던져주든지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부딪혀지는 문제들은 걱정만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마주해야 풀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는 모세의 유언이 나옵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주는 유언으로 신명기 내용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이 내려다보이는 요르단강 바로 앞까지 와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서 죽어가며 모세는 이러한 유언을 합니다. 유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신명30,15-18)
우리는 자신의 욕망대로 살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고 성공한 것 같이 여기지만 그것이 죽음의 길이라고 모세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뜻대로 살면 손해볼 것 같지만 바로 그것이 생명의 길이라고 오늘 제1독서는 말합니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30,19-20)
우리가 삶의 과정에서 질 수밖에 없는 많은 문제들의 해결책이 이렇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간디가 그랬고 모세가 그랬으며, 예수님께서 그러셨지요.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극복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문제에 부딪히게 되고 또 그것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을 지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걱정이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이고, 실제로 관심을 가져야 될 문제는 아주 적은 분량인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적극적으로 지고 따를 때 풀려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된 제자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3)
그것이 생명의 길이요 부활의 길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살면서 근심과 걱정이 앞서는 일들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그것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출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셨던 바로 그 길이 생명의 길이요, 부활의 길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로 나아가는데 있어서의 여러 걸림돌들, 잘못된 습관이나 지나친 욕심, 또 이웃 간의 단절을 불러오는 악행들을 고치고 제거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부활이 좀 더 큰 결실로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대로 몸소 실천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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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한다."(루카 9, 23)
생명의 해답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오늘도 날마다
제 십자가를
만나게 됩니다.
십자가를 통해
제자신이 누군지를
알게됩니다.
십자가와
분리될 수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십자가 없는 삶은
교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듯
겸손으로
나가야합니다.
겸손은
제 십자가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우리 목숨을
구할수 있는 것은
십자가뿐입니다.
모든 목숨은
십자가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목숨은
십자가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죽지만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의 얼굴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십자가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다시 밝아지는
구원의 신비입니다.
구원의 방식은
십가의 방식뿐임을
이 사순시기는
다시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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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십자가가 은총이라면 다른 것은 오죽하겠습니까.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삶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면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날마다 깊어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우리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나를 빚으시고 이끌어 가시는 주님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인정하기위해서는, 우리의 십자가는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을 향하라고 주님을 따르라고 우리에게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까닭은 자신의 방식을 아직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이 신앙의 존재하는 우리들임을 다시금 절절이 깨닫게 됩니다.
그야말로 날마다 은총이며 날마다 주님의 날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분노 안에서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는 우리를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자신을 버리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날마다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와 강하게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고 부드러워진다면 십자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이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않기에 십자가는 십자가일 뿐입니다.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저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주저앉아 있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다시금 넘어지고 쓰러지는 아픔과 고통이 있더라도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생명입니다.
주님을 먼저 따라갈 때, 이 모든 것은 덤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믿고 삶을 사랑하는 은총의 사순시기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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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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