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축제 · 기념일 백과 -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Bayreuth Festival ]
hanjy9713
2023.11.15. 19:46조회 16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 Bayreuth Festival ]
요약 독일 바이에른의 바이로이트에서 매년 7~8월에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를 공연하는 음악 축제
1. 축제 정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오페라 작품을 공연하는 음악 축제로, 매년 7~8월에 독일 바이에른 주 바이로이트(Bayreuth)에서 열린다. 바그너는 자신의 오페라를 제대로 펼쳐 보일 수 있는 공연장을 간절히 원했고, 마침내 1876년 그가 직접 설계한 리하르트 바그너 축제 극장(Richard-Wagner-Festspielhaus)이 바이로이트에 세워졌다. 극장 개관을 기념해 바그너의 대표작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 전곡이 초연된 이후, 매년 여름 한 달여 동안 리하르트 바그너 축제 극장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작품들을 공연하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점차 연례 행사로 발전해갔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주요 레퍼토리는 바그너의 후기 오페라 십여 작품으로, <니벨룽의 반지> 전곡을 비롯해 <탄호이저>(Tannhäuser),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 <파르지팔>(Parsifal),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Die Meistersinger von Nürnburg),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ende Holländer) 등이며, 바그너 음악에 최적화된 극장에서 대규모로 편성된 교향악단이 펼치는 연주가 특징이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바그네리언’(Wagnerian)이라고 불리는 바그너 음악 애호가들의 지지를 받으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Salzburger Festspiele),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과 함께 유럽을 대표하는 3대 음악제로 자리 잡았다.
2013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탄호이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작품을 공연하는 음악 축제로, 매년 전 세계 바그너 애호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개최되고 있다.
2. 축제 유래
리하르트 바그너는 오랫동안 자신의 오페라를 비롯해 독일 오페라를 전문적으로 공연할 장소를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바이에른 주 동북부 바이로이트에 있는 바이로이트 마르크그라프 오페라하우스(Markgräfliches Opernhaus Bayreuth)를 방문했으나, 로코코 양식으로 화려하게 지어진 이 극장 역시 바그너가 추구하는 오페라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고민에 빠진 바그너는 결국 오랜 시간 계획해온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바이로이트에 전용 공연장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2세(Ludwig II)가 재정적으로 후원한 축제 극장은 바그너가 직접 설계를 맡았으며 실행은 건축가 오토 브뤼크발트(Otto Brückwald)가 맡았다.
리하르트 바그너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바그너는 시와 음악과 무대가 하나를 이루는 음악극(Musikdrama)을 창조하고, 이러한 음악극의 공연에 최적화된 극장을 직접 설계했다.
바그너가 극장을 설계할 때 중요하게 고려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그는 다채로운 음들을 구성해 새로운 유형의 음악을 만들어야 하는 당대의 요구에 따라 오케스트레이션(orchestration,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곡법)이 커지고 복잡해진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둘째, 그는 오페라의 웅장한 문학적 구성이 무대 위에서 충분히 표현되게 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바그너는 우선 오케스트라를 무대보다 깊고 낮은 곳에 배치해 관객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했다. 이로써 오케스트라의 음은 천장에 반향돼 관객에게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반면, 무대에 선 가수의 음은 관객에게 명확하고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효과를 얻었다. 좌석 배치에 있어서는, 측면 벽에 발코니석이나 박스석을 두지 않고 모두 무대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배치했다. 또 공연 때는 객석의 조명을 모두 꺼서 관객이 무대에만 집중할 수 있게 했다.
1876년 8월 13일, 리하르트 바그너 축제 극장의 개관을 기념하는 첫 번째 무대로 <니벨룽의 반지> 전곡이 공연됐다. 이 기념 공연에는 독일 황제 빌헬름 1세(Wilhelm I),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Pedro II),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2세,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를 비롯한 전 유럽의 명사들이 참석했다. 또한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에드바르드 그리그(Edvard Grieg), 표트르 차이콥스키(Pyotr Tchaikovsky) 같은 음악가들도 몰려와 일대 성황을 이뤘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양식의 새로운 극장에서의 공연인데다,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는 바그너가 추구하던 낭만주의 음악과 독일 서사문학이 결합한 음악극(Musikdrama) 양식의 총체로서 의미가 큰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4부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을 포함해 <니벨룽의 반지> 전곡이 연주된 것은 처음이었던 만큼 음악 애호가들의 주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니벨룽의 반지> 공연이 성공을 거두자 애호가들은 바그너의 새로운 작품을 갈망하게 됐으며, 1882년에 바그너의 마지막 오페라 <파르지팔>이 초연되면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본격적인 음악제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3. 축제 역사
1876년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전곡 초연으로 시작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1883년에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뒤 바그너의 부인 코지마 바그너(Cosima Wagner)를 비롯해 아들, 며느리, 손자와 증손녀에 이르기까지 바그너 집안이 4대에 걸쳐 이끌어오고 있다.
먼저 코지마 바그너가 1883년부터 리하르트 바그너 협회(Richard Wagner Verband)의 후원을 받아 음악제를 운영했다. 그녀가 맡은 1906년까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한 해 또는 두 해씩 걸러서 열렸는데, 그녀는 바그너가 생전에 추구한 음악적 이상을 강조해 ‘바그너보다 더 바그너답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예술적 성취를 높였다. 특히 코지마는 1882년 두 번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바그너의 마지막 오페라 <파르지팔>이 리하르트 바그너 축제 극장의 음향 조건을 기반으로 작곡됐음을 강조하며 바이로이트에서만 연주하도록 제한을 두었다.
<파르지팔>은 1903년이 되어서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Metropolitan Opera) 같은 다른 곳에서 공연될 수 있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바그너다운 연주’를 구현한다는 명목으로 음악가의 인격과 창조성을 억압하고 정당한 개런티를 지급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음에도, 코지마의 노력으로 당대의 이름 있는 음악가들이라면 꼭 한 번 서기를 원하는 무대가 됐다.
1908년부터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예술 감독직을 이어받은 아들 지크프리트 바그너(Siegfried Wagner)는 지나치게 ‘바그너다운 연주’를 추구한 코지마의 방식에서 벗어나 점진적으로 변화를 추구했다. 그러나 음악제의 권위적인 모습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지크프리트가 페스티벌을 담당한 기간 중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 여파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사회 분위기를 위축시켜 1914년부터 십 년 동안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열리지 못했다.
1930년 지크프리트가 일찍 세상을 떠난 뒤, 1931년부터 지크프리트의 영국인 아내 비니프레트 바그너(Winifred Wagner)가 음악제를 운영하면서부터는 바그너 애호가로 유명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됐다. 이 때문에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숱한 비판과 더불어 한층 유명세를 떨치게 됐다. 문학가이자 평론가인 토마스 만(Thomas Mann)은 바이로이트 극장을 ‘히틀러의 궁정 극장’(Hitlers Hoftheater)이라고 비꼬았으며, 결국 비니프레트는 음악제를 나치의 문화 선전장으로 전락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히틀러와 얽힌 악연의 여파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여러 해 동안 중단됐다. 리하르트 바그너 축제 극장은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그 일대를 점령하면서 점령군을 위한 위문 공연과 종교 행사 공간으로 사용됐다. 그러다 1951년, 바그너의 손자인 빌란트 바그너(Wieland Wagner)와 볼프강 바그너(Wolfgang Wagner)가 공동으로 예술 감독을 맡으면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맞이했다. 빌란트와 볼프강은 축제 극장을 재단장하고 새롭고 탁월한 연출을 바탕으로 음악제를 부활시켰다.
특히 빌란트 바그너는 “축제 극장은 본질적으로 과거에 사로잡힌 박물관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다”라며 독일의 전통 미학에 충실했던 이전의 무대와 연출 양식을 과감히 포기하고, 모더니즘과 미니멀리즘을 반영해 단순화된 무대 장식과 의상을 도입하는 등 혁신을 꾀했다. 1951년 7월 29일, 빌헬름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ängler)의 지휘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했고, 그 다음날인 7월 30일에 한스 크나퍼츠부쉬(Hans Knappertsbusch)가 지휘하는 <파르지팔>이 전쟁 후 처음으로 무대에 오른 바그너의 작품이 됐다. 이후 <니벨룽의 반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공연이 8월 26일까지 이어지며 오늘날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과 같은 모습의 음악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51년부터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연례 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1966년부터 2008년까지는 볼프강 바그너가 단독으로 예술 감독을 맡았는데, 그는 실험과 재해석을 더욱 장려했다. 아우구스트 에버딩(August Everding), 괴츠 프리드리히(Götz Friedrich), 파트리스 셰로(Patrice Chéreau) 같은 젊은 연출자를 영입해 창의적인 분위기를 불어넣었고,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 주세페 시노폴리(Giuseppe Sinopoli), 아담 피셔(Adam Fischer), 크리스티안 틸레만(Christian Thielemann) 같은 젊은 지휘자로 하여금 기성 악단과 다른 공연을 하도록 이끌었다.
특히 1976년, 극장 건립 100주년 기념 음악제(Jahrhundertring; Centenary Ring)에서 피에르 불레즈와 파트리스 셰로라는 두 프랑스인이 보여준 공연은 ‘바이로이트 습격 사건’이라 불릴 만큼 획기적인 방식의 공연이었다. 당시 이십 대이던 젊은이 파트리스 셰로의 연출이 너무나 파격적이고 현대적이었기 때문에 그에 반대를 표한 단원들과 솔리스트들이 연주를 거부해 음악제를 앞두고 연주자들이 대거 교체되는 스캔들이 벌어졌을 정도였다. 이후 2009년부터는 바그너의 증손녀인 에바 바그너-파스키에(Eva Wagner-Pasquier)와 카타리나 바그너(Katharina Wagner)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운영을 맡고 있다.
4. 축제 특징
1) 공연 프로그램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바그너의 오페라만으로 구성된다. 초기작인 <요정>(Die Feen), <연애 금지>(Das Liebesverbot)와 <리엔치, 마지막 호민관>(Rienzi, der Letzte der Tribunen)을 제외하고 중·후반기 작품 7편(<니벨룽의 반지>는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 <발퀴레>(Die Walküre), <지크프리트>(Siegfried), <신들의 황혼>의 4부로 구성되며 각 부를 독립된 작품으로 보면 10편이다)을 매년 번갈아 무대에 올린다. 애초에 음악제가 <니벨룽의 반지> 전곡 초연으로 시작된 만큼 이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
2013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발퀴레>
1876년 리하르트 바그너 축제 극장의 개관 기념 공연은 바그너의 대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전곡 초연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니벨룽의 반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니벨룽의 반지>는 네 공연으로 나뉘어 진행되는 대작이므로 통상 한 가지 구성으로 4~5년 정도 공연하고, 이후 1~2년간은 새로운 구성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정해 공연하지 않는다. 따라서 <니벨룽의 반지>를 공연하는 4~5년을 ‘반지의 해’, 공연을 쉬는 1~2년을 ‘반지 안식년’이라고 구분한다. 예컨대 2013년은 2년간 안식을 마치고 새로운 구성으로 <니벨룽의 반지>를 연주하는 ‘반지의 해’의 첫해였다.
일반적으로 ‘반지의 해’에는 <니벨룽의 반지>와 함께 다른 작품 두세 편을 함께 공연하며, ‘반지 안식년’에는 5~7개의 작품이 공연된다. 반지 안식년인 2012년에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로엔그린>(Lohengrin), <탄호이저>(Tannhäuser), <파르지팔>,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공연됐으며, 반지의 해인 2013년에는 <니벨룽의 반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로엔그린>이 공연됐다.
음악제 기간에는 일반적으로 1일 1회, 오후 4시 또는 6시에 한 작품씩 공연되는데, <니벨룽의 반지>는 대작인 만큼 전체 4부를 하루에 1부씩 순차적으로 공연한다. 각 공연에서 보통 한 막은 70~90분 정도이며 막이 끝날 때마다 60분간 막간 휴식 시간을 갖는다. 공연은 대부분 3막으로 구성되므로 공연은 밤 10시가 지나서 끝이 난다.
한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바그너의 작품이 아닌 곡이 공연되기도 한다. 바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Choral)인데, 이 작품은 1872년 5월 22일, 리하르트 바그너가 축제 극장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 바이로이트 마르크그라프 오페라하우스에서 직접 지휘를 맡은 작품이었다. 이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성격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1933년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가, 1951년과 1954년에는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1953년에는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 1963년에는 카를 뵘(Karl Böhm), 그리고 2001년에는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을 연주했다.
2) 리하르트 바그너 축제 극장(Bayreuth Festspielhaus)
바그너가 직접 설계한 축제 극장은 발코니석과 박스석이 없으며 좌석은 딱딱한 나무 의자로 되어 있다. 몹시 불편한 자세로 공연을 관람해야 함에도 관객들은 다른 극장과 사뭇 다른 음향과 분위기에 도취돼 공연에 집중하게 된다. 객석의 조명을 모두 소등해 무대만 빛나는 상황에서 무대 밑에 깊숙이 자리 잡은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연주는 극장을 아래부터 위로 서서히, 그윽하고 부드럽게 채우는 느낌을 준다고 한다. 테너 가수 만프레트 융(Manfred Jung)은 “나무가 소리를 들이마셨다가 흡수한 다음 돌려준다”고 하며 극장을 구성하고 있는 목재의 특수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리하르트 바그너 축제 극장
바그너의 의도대로 설계된 극장은 오케스트라가 무대 밑 깊숙한 곳에 자리하는 독특한 구조로 돼 있다. 이 때문에 지휘자는 ‘바이로이트 지휘법’이라 불리는 이 공연장만의 지휘법을 숙지해야 한다.
오케스트라가 객석에서 보이지 않도록 무대 밑에 자리 잡고 있어 악기 편성과 지휘법도 일반적인 방식과는 달라진다. 무대의 가수와 오케스트라는 서로를 보지 못한 채 양쪽 모두 지휘자에게 의존하며, 서로가 내는 소리가 엇갈려 들리기 때문에 지휘자는 ‘바이로이트 지휘법’이라 불리는 독특한 지휘법을 숙지해야만 한다. 처음으로 <니벨룽의 반지> 전곡을 녹음한 지휘자 조지 솔티(Georg Solti)는 “한 사람이라도 내게 단원 전체를 바라볼 수 없으며 모든 것을 듣지 못하는 상태로 지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줬다면 나는 차라리 (지휘를 포기하고) 의사가 됐을 것”이라고 했을 만큼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지휘하는 법은 난해하다고 알려져 있다.
3) 입장권 구하기
바그너 애호가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만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표를 구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예전에는 음악제 주최측이 각국 바그너 협회와 관련 단체에 표를 할당해 배부하고 개인 신청은 우편으로만 가능했다. 그마저도 몹시 까다로운 신청서를 써야 했으며, 수년 후에는 그나마 소수에게만 표를 배부했다. 그 때문에 각국의 바그너 협회에 가입하고 매년 회비를 내면서 예약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아야만 표를 구할 수 있었다. 2012년부터는 전해 9월에 개인이 인터넷 등으로 직접 신청할 수 있도록 바뀌었지만, 향후 10년 정도의 공연이 이미 예매돼 있을 정도로 바그네리언(Wagnerian, 바그너 음악 애호가들)들의 관심이 높아 표를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4) 하우스 반프리트(Haus Wanfried: 바그너 박물관)
바그너의 도시답게 바이로이트 시에는 바그너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바이로이트 시의 중심 대로 ‘리하르트 바그너 슈트라세’(Richard Wagner Straβe)를 비롯해 도시 곳곳에 그의 가족과 오페라 작품 속 주인공들의 이름을 딴 길이 있다.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2세가 지어준 하우스 반프리트는 바그너가 말년을 보낸 사저로 지금은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하우스 반프리트에는 바그너의 옷, 사진을 비롯해 음악제에 쓰인 무대 의상, 소품, 무대 모형 등 바그너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관련된 각종 자료가 전시되고 있으며, 뒤뜰 숲에는 바그너 부부의 무덤이 있다.
하우스 반프리트
바그너와 그의 부인 코지마가 말년을 보낸 하우스 반프리트는 현재 바그너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하우스 반프리트 옆에는 프란츠 리스트(Franz von Liszt) 박물관도 있다. 바그너의 장인이자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던 리스트는 말년에 딸 부부와 함께 지냈는데, 하우스 반프리트처럼 리스트의 사저도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Bayreuth Festival] (세계의 축제 · 기념일 백과, 류정아, 오애리, 김홍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