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의 머리를 향해 플라스틱 필통을 힘껏 휘둘렀다.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교실에 남아 있던 아이들이 일순 얼어붙었다. “야, 씨! 너 죽을래?” 녀석은 책상에 기댔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기세로 손까지 치켜올렸다. 나 역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쳐! 쳐봐! 나도 가만있지는 않을 테니까.” 예상치 못한 내 호기로움에 당황한 녀석은 욕을 일갈하며 교실을 뛰쳐나갔다. 소란에 비하면 싱거운 마무리였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갈 채비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한 남자애가 내 책상에 몸을 기댔다. 핸드볼 선수였던 학교에서 싸움을 제일 잘한다는 아이였다. 나는 자타공인 ‘모범생’이었기에 같은 반이었지만 그전까지 우리는 서로 말 한번 나눈 적이 없었다. 덩치도 크고 피부가 햇볕에 그을려 까무잡잡했던 녀석이 방글거리며 물었다. “너 아빠 없다며?” 그 말을 듣자마자 내가 한 행동은 손에 잡힌 필통을 휘두르는 일이었다.
나는 한 번도 아빠를 가져본 적이 없다. 엄마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혼했고, 딸은 당신이 혼자 키웠다. 어릴 때 내게 아빠와 가장 흡사한 존재는 알콜 중독자였던 큰외삼촌이었다. 매일 술을 마셨고 외숙모는 일찌감치 도망쳤다. 몇 명의 여자들이 있었지만 외삼촌의 폭력을 오래 버틴 사람은 없었다. 남자 어른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정립되기도 전에 나는 ‘저런 아빠라면 없는 게 낫지.’라고 확신했다.
자라면서 엄마에게 단 한 번도 아빠에 대해 묻지 않았다. 내 궁금함이 엄마에게는 큰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결정이 최선이었을 거라고 무작정 믿었다. 왜 아빠와 이혼했는지조차 질문하지 않는 나를 보고 엄마는 독하다고 했다.
그때까지 타인으로부터 아빠의 부재 여부에 대해 질문받은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서 벌어진 소란 이후 아빠가 없다는 게 내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걸 인지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두려움이 삶을 송두리째 삼키는 경험이었다. 앞으로 상처받을 일이 생길까 겁이 났다.
속상해할까 봐 엄마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대신 그날 이후 내 일기장은 자살과 가출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찼다. 때마침 사춘기와 맞물려 세상이 온통 흔들렸다. 말수가 없어지고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시간이 길어졌다.
하루는 방바닥에 엎드려 문제집을 풀고 있었는데 정각을 알리는 뻐꾸기시계 소리가 유달리 시끄럽게 느껴졌다. 순간 참지 못하고 “짜증나 미치겠네!”라고 말해버렸다. 사춘기여서 그러겠지 하고 묵묵히 나를 견뎌왔던 엄마도 그 순간 폭발했다. 엄마는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서 나를 때렸다. 그러다 “요즘 도대체 왜 이러니!” 하며 울기 시작했다. 착했던 딸의 반항기 가득한 모습이 꽤나 절망스러웠나 보다. 하지만 온몸이 흔들리도록 맞으면서도 나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그저 엄마의 이혼으로 힘들어진 건 난데 왜 엄마가 울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 뒤로도 몇 번 먹기를 거부했고 말대꾸하는 일이 여러 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이상하게도 더 이상 짜증이 나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가 가슴 시리고 창밖으로 보인 파란 하늘도 마냥 설레기만 했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행했던 가출과 자살은 시도조차 한 적 없이 사춘기가 끝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엄마는 회사 식당에서 나의 저녁 도시락을 쌌다. 그리고 퇴근길에 학교로 가져다주셨다. 저녁 시간에 교문으로 달려가면 항상 엄마가 도시락 가방을 들고 기다리고 계셨다. 덕분에 야간 자율학습 전, 친구들은 차갑게 식은 도시락을 먹었지만, 나만은 항상 뜨끈한 밥과 매일 다른 반찬을 먹을 수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마다 친구들은 내 주위로 몰려들어 따끈한 반찬을 나눠 먹었다.
지금은 이혼한 가정이 예전만큼 드물지 않다. 초등학교 방과 후 영어 강사로 일할 때였다. 어버이날이라 영어로 부모님께 감사카드를 써보는 활동을 했다. 칠판에 ‘Dear Mom and Dad’로 시작하자고 글씨를 썼을 때, 1학년 남자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전 아빠가 없는데 어떻게 해요?” 순간 당황한 건 나뿐이었다.
“너 아빠 없어? 그럼 엄마한테 쓰면 되잖아!” “OO도 이혼했나 봐. XX도 아빠랑 산다던데.”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웅성거렸다. 나는 빠르게 정신 차려야 했다. “얘들아 이혼할 수 있잖니. 그럼 OO는 ‘Dear Mom’으로 시작하면 되겠다.”고 말해주었다. 수업은 무사히 끝났고 누구도 질문한 아이를 놀리지 않았다. 나만 속으로 놀랐을 뿐이었다.
‘Attitude is Everything.(모든 것은 태도에서 결정된다.)’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본인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주변은 그 분위기를 따르기 마련이다. ‘아빠 없는 아이’라는 타이틀은 내가 스스로에게 붙인 명찰이었을 뿐 남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만약 그때 내가 필통을 휘두르지 않고 울어버렸다면 어땠을까? 상황에 주눅 들어 약한 모습을 보였다면 나는 일명 ‘학교 짱’이었던 남자애에게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날 필통은 나를 지켜준 자존의 방패가 되었다.
엄마는 늘 내가 당신 인생에 가장 큰 자랑거리라고 한다. 당신이 장 키워서 내가 이리 잘 자랐다고. 그럴 때마다 나는 농담으로 “엄마, 난 혼자 씩씩하게 잘 컸어.”라고 말하지만 사실 나도 안다. 여름날 예쁜 밀짚모자를 씌워주고 겨울엔 새빨간 코트 깃을 칼같이 세워 입혀주었던 엄마의 정성. 퇴근길에 곧장 집으로 가 쉬는 대신 버스를 갈아타며 딸내미의 저녁 도시락을 배달했던 엄마의 사랑. 그 모든 날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나는 아빠가 없지만, 엄마 역시 남편이 없다. 생계를 위해 쉼 없이 일을 하며 혼자 자식을 키우느라 젊은 날의 엄마는 얼마나 피로했을까? 엄마의 노고를 마흔이 훌쩍 넘어 깨닫다니 죄송할 뿐이다. 때로는 딸에 대한 기대와 애정이 지나치다 싶어 부담스럽다가도 엄마가 자랑할 만한 딸로 성장한 것 같아 다행이다.
아이와 외출하고 들어오는 시장통에 엄마가 좋아하는 싱싱한 멍게가 보였다. 아이는 빨리 집에 가자 재촉하지만, 엄마가 생각나서 나는 지갑을 열었다. 갓 손질한 멍게를 사가지고 엄마에게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내가 건네는 건 그저 멍게, 그것만은 아니니까. “엄마! 멍게 사왔어!”
첫댓글 지금은 이혼이 흉이 아니지만 그전에는 숨기는 일이 었지요
어머니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맞아요
워낙에 많이 일어나는
일이 되어버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