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로동선이라는 말이 있다. 여름 화로,겨울 부채처럼 격이나 철에 맞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긍정적인 뜻도 있다. 당장은 쓸모없어도 훗날을 생각해 미리 준비한다는 애기다. 대칭되는 격언이 하선동력이다. 여름 부채,겨울 달력같이 철 맞춰 하는 인사를 의미한다. 시시한것으로 생색 내는 것을 꼬집는 말로도 쓴다. 그렇듯 누구나 달력을 쉽게 주고 받았다. 새 달력 챙기기는 묵은해 보내고 새해 맞는 해넘이 의례였다.
어릴 적엔 방마다 달력이 걸려있었다. 매일 한 장씩 뜯어내는 일력은 안방 차지 였다. a4 크기 하얀 습자지에 큼직하게 날짜를 찍었다. 뜯어낸 종이는 신문지보다 부드러워 화장지로 그만이었다. 어른들은 담뱃잎을 잘게 썬 봉초 '풍년초'를 말아 피웠다. 아이들은 붓글씨 연습을 하곤 했다. 큰 달력 매끈한 종이는 새 학기 교과서 해지지 말라고 덧싸는 겉표지로 썼다. 은행 달력이 그중 귀한 선물감이었다.
연말 달력은 소시민의 상징이었다.4.19세대 시인 김광규가 1979년 겨울 선술집에서 옛 대학 친구들을 만났다.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넥타이를 매고 다시모였다/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그리고 친구들은 흩어졌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달력 인심이 갈수록 박하다. 탁상 달력이 고작이고 큰 달력은 아예 구경하기 힘들다. 하긴 달력을 집벽에 못 박아 건 지가 오래됐다. 달력은 이제 스마트폰으로 들어가고 있다. 달력 앱이 일정 예고 까지 해주는 세상이다. 그래도 어촌에선 달력이 요긴하다. 들물과 날물 시간이 적힌 물때 달력을 보고 갯가일이며 고기잡이를 나간다. 농사와 대소사를 음력에 맞춰 사는 사할린 동포에겐 음력 달력이 큰선물이다.
스마트폰 앱이 낯선 세대에겐 여전히 탁상 달력이 편하다. 앉은 채 한눈에 한달 살이를 볼수 있다. 네모 칸이 큼직해 이것저것 써넣을 수 있는 것이 좋다. 탁상 달력이 마지막 한 장 까지 왔다. 뒤로 넘긴 열한장을 뒤집어 본다. 칸마다 연필 볼펜에 붉은 사인펜 메모가 빼곡하다. 갖은 약속과 집안 기념일 잊어버릴까봐 청첩장 받자마자 써둔 혼사들 때맞춰 가고 싶은 여행지...몇은 새 달력에 옮긴다.
제삿날과 아내 생일은 양력으로 환산해 표시 한다. 미처 못간 여행지들도 적어 둔다. 또 한해가 저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