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의 제일 큰 언니 마리아 안나(Maria Anna):
1738~1789
여제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대공녀일때 출생했다. 성격이 섬세하고 몸이 약해 가끔 아팠고 아버지와 수집도 하고 과학 연구도 하며 평생 빈의 어머니 곁에서 지냈다고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태어날 당시 17살로, 여동생의 부모가 될수도 있었던 나이..
마리아 크리스티나 (Maria Christina): 1742~1798
여제는 이 딸을 매우 사랑하여 그녀만은 연애 결혼을 허락하고 많은
지참금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작센의 팔라틴 백작 알버트 공과 행복한 결혼을 한 그녀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여 가족들의 화목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전에 여기 사진 올린 적 있음.
셋째 언니 마리아 엘리자베트 (Maria Elisabeth): 1743~1808
앙투아네트의 자매들 중 가장 미인이라 각국의 왕들에게서 많은 청혼이 들어왔는데 구혼자로 폴란드 왕, 스페인 왕, 늙어빠진 프랑스 왕 루이15세 등이 있었다. 루이 15세와 결혼할 뻔하다가 1767년 천연두로
얼굴이 망가지자 결혼은 취소되고 티롤의 대저택이 딸린 수녀원에 들어가 원장이 되었다. 말이 수녀지 엘리자베트같이 신분높은 황실의
딸들은 뭐든 하고 싶은대로 자유를 누리고 살았다고 함.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1751~1767
나폴리의 왕과 결혼하기 전,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우선시하라는 어머니 여제의 말에 요제파가 성경에서는 여자가 결혼했을 때 그 여자는
남편의 나라에 속한다고 대답하자 여제는 진노하여 국가의 정책은 종교보다 우위라고 소리질렀다.
결혼 전 황실 납골당에 가서 선조들에게 기도하고 오라는 어머니의
명을 받고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그녀는 그 명령을 사형집행 명령으로 생각해 여동생 안토니아를 안고 울면서'네 곁을 곧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얼마 전에 천연두로 죽은 요제프 2세의 아내의 관이 있는 납골당에 있다가 천연두에 걸려 2주 후에 죽었다.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1746~1804
(초상화 못 찾았음-_-;;;)
그녀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결혼을 하게 해달라고 했으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끝내 정략적으로 1769년 프랑스와 스페인 왕의 조카인 파르마 공작 페르디난드 4세와 결혼시켰다.
경솔하고 놀기 좋아하며 방탕했던 그녀는 파르마 공국에서 권력을 쥐고 개인적인 취미를 즐기는 일을 더 좋아했다. 1771년에는 이탈리아의 개혁가인 장관을 파면시키기도 하고 궁정의 매일 열리는 의식을
폐지하였다. 이런 이유들로 그녀는 시댁인 스페인 프랑스 뿐 아니라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도 사이가 나빠져 첫 아들 탄생을 구실로
화해를 시도했다.
마리아 카롤리나 (Maria Carolina): 1752~1814
요제파는 죽었지만 여제는 나폴리 왕에게 다른 딸들인 아말리아와 카롤리나 중 며느리를 택하라고 했고 스페인 왕은 동생인 카롤리나 쪽을 택했다. 1768년 나폴리의 국왕인 페르디난도 4세의 왕비가 됨.
방탕하고 경솔하며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최우선하라는 철저한 교육을 받고 나폴리로 간 그녀는 거기서 스페인 예법이 국왕과 왕비를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여제에게 알린다. 이에
여제는 그것을 고치지 않으면 나폴리 궁정에 군대를 보낼 것이며 오스트리아 황녀가 초라하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라고 나폴리 수상에게 통보하게 된다.
이렇게 그녀는 강한 성품을 지녀 나폴리의 정치에 어머니와 함께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말년에 혁명 반대파에 서고 개혁에 실패했으며 나폴레옹이 침략해 나폴리 왕가의 몰락을 선언하자 오스트리아로
건너와 일생을 마침.
마리아 안토니아 (Maria Antonia): 1755~1793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 루이 15세의 정부 마담 드 퐁파두르와 친오스트리아파 신하들의 설득으로루이 15세는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천연두로 얼굴을 망친 언니 마리아 엘리자베트 대신 동생 마리아 안토니아를 손자 루이 오귀스트와 결혼시킨다. 그러나 프랑스로
오기 전 그녀를 지켜줄 퐁파두르 부인이 죽고 친오스트리아 파 대신들이 쫓겨나면서 그녀는 온갖 미움과 중상에 시달리게 된다.
그녀의 천진한 오락과 격식을 싫어하고 소박함을 좋아하는 성품은 비난과 중상모략의 대상이었으며 가장 사소한 행동도 가장 나쁘게 해석되었다.
특히 국왕의 딸들 아드레이드, 빅투아르, 소피가 반 오스트리아파로
그들은 프랑스 공주들이 살찐 것은 종교적인 신념의 실천에 의해 튼튼한 몸이라는 강점을 얻었기 때문이며 오스트리아 공주들은 게으르고 세속적인 즐거움에 자신들을 소비하기에 빈약하고 말랐다고 하는
등 악담을 하고 앙뜨와네트가 좋아하는 소박한 의상을 입으면 그것이
왕실의 품위에 어긋난다는 등의 비난의 연속이었다.
뒤바리 또한 국왕의 황태자비에 대한 애정을 없애기 위해 마리 앙뜨와네트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그녀를 비난하였으며 그녀가 여제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로 채 궁정의 화제로 삼기도 하였다. (그러니 앙투아네트한테 개무시 당하지 왕한테 질질 짜기는...)
앙뜨와네트가 시동생과 친하게 지내자 둘 사이가 부도덕하다는 추문을 퍼뜨린 사람도 뒤바리였다.
황태자도 부모가 오스트리아를 적대했을 뿐 아니라 그의 가정교사도
반 오스트리아 파라서 그에 영향을 받은 결과 아내에게 냉담하였다.
게다가 왕실도 황태자의 이 무관심을 은밀히 조장하였다.
이렇게 마리 앙뜨와네트는 화목한 가정속에서 자유롭게 살던 어린시절과는 너무나 다른 음모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생활의 자유도 없이
인형처럼 살아가게 된다.
1762년 호프부르크 궁에서 여제 일가가 6세의 신동 모짜르트의 연주를 듣고 있는 모습.
모짜르트를 안고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젊었을 땐 이렇게 예뻤다!) 주변 사람들 놀라 기절하든 말든 모짜르트가 갑자기 달려들어 안긴 거지만 여제는 상냥하게 신동을 안고 키스를 허락했다.
여제와 아들들. 남편의 죽음으로 공동 통치자가 된 장남인 요제프와는 말년에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서로 통치자 자리에서 폐위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차남인 레오폴트 2세는 어릴 때는 까다로웠지만 여제의
아들 중 가장 기대에 맞게 성장한 아들. 페르디난트 대공은 토스카나
대공 딸과 결혼해 오스트리아의 세력을 넓히고 막내인 막시밀리안 프란츠는 쾰른의 선제후가 되었다.(움직이기 힘들정도로 비만..그러나
어릴 때는 앙투아네트와 무지 닮았음)
앙투아네트의 오빠들은...안 올림. 담에...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 가족...
첫댓글 베르사유의 장미 다시 보고 싶당..
모얌.. 앉은 각도만 틀리구 다 똑같이 생겼자낭.. ㅋㅋ 다 똑같은 사람 아냥? ㅡ,.ㅡ
얼굴 다 틀리구먼....뽀뽀가 많이 아픈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