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말 >
블로그를 처음 시작한 것은 2013년 4월입니다.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페이스북으로 우연히 알게 되었고, 관심이 생겼는데 겹치는 친구는 한 명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대신 그 사람이 오랫동안 운영해온 블로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적어놓은 몇 년치 글을 다 읽고 나니 저는 이미 사랑에 빠져있었지요.
그래서 시작했습니다. 블로그도 인스타도요.
너를 내 세상에 초대하고 싶었는데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는, 그저 낱개의 점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나를 알아봐달라고.
나에게 글은 너를 향해 나부끼는 찢어진 깃발 같은 것.
가난한 사랑 노래
1.
하루는 네가 술에 취해서, 이번 달 카드값을 막느라 월세를 동생에게 빌렸다고 씁쓸하게 웃었어.
차마 울지 못해 웃었겠지.
가난한 얘긴 아무리 가까운 사람에게라도 하기 힘든데, 네가 네 한 달 치 가난을 나에게 알려줘서 사실 기분이 좋았다고 하면 난 못된 애야?
그런 네 바닥을 얼마든 더 보고 싶다고 하면 난 모자란 앤가?
2.
나는 사실 네가 나만큼은 벌었으면 좋겠어.
사실 조금 더 벌면 좋겠어.
그래서 내가 너랑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너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네가 하고 싶은 게 생겨도 내 눈치 보지 않고 말할 수 있게.
우리가 하고 싶은 게 늘 검소하고 순수할 순 없으니까.
나는 이제 이런 내가 속물이라고 생각 안해.
이 세상 누구도 손가락만 빨며 살고 싶어 하지 않잖아. 그렇다고 내가 크루즈를 타고 세계여행을 가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선택지 앞에서.
고민에서, 자유로웠으면 좋겠어.
그것뿐.
3.
나는 너한테서 나는 가난의 냄새가 너무 싫었어.
은유가 아니라 네 옷에선 늘 쿰쿰한 냄새가 났어.
볕은커녕 환기도, 습도 조절도 제대로 되지 않는 반지하 원룸.
그 원룸 벽면에 틈도 없이 쌓아 올린 다이소 플라스틱 서랍장, 2단 행어.
그 안에서 제대로 숨 쉬지 못해 모든 냄새가 배 버린 옷들.
널 만나면 네 옷에서, 속옷에서 그 반지하의 냄새가 났어.
현관이 부엌이고, 부엌이 식당이고, 그 방인지 복도인지 알 수 없는 공간 구석에 높인 접이식 상. 너에겐 식탁이자 책상이고 TV장이었지. 셀로판지로 꾸민 그 합판에 올려 둔 노트북이 TV를 대신 하는 방. 노트북으로 밀린 예능을 보다 그대로 식탁 앞에서 잠들어버리는 방.
그 모든 공간이 네 옷에 냄새로 녹아있었어.
나는 그게 끔찍하게 싫었어.
페브리즈조차 가릴 수 없는 가난의 냄새.
내가 사준 명품 브랜드 향수도 뚫고 나오는 우리의 처지.
처지의 민낯.
내가 속물이라고 네가 날 욕이라도 하면 좋았을 텐데.
아님 내가 조금 더 능력 있는 집안 막내딸이면 좋았을 걸.
우리는 그 어느 것도 타고나지 못했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진 못했지만 이라도 날카로웠어야 하는데. 혀라도 교활했어야 하는데.
[ 김나연, 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
자주 곱씹는 에세이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가닿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오늘 서점가서 읽어봐야지
사실 '너'가 아니라 '나'일지도.
이거 보구 바루 책 구매함ㅎ ㅎ
우와...
글 너무 좋다...
읽어보고싶어짐
추석에 사서 읽어봐야지
와 글 너무좋아..
엥 나 저 책읶는데 왜 첨 보지
다시 봐야겠다
저 에세이의 내용인거지?
맞아 전문 모두 다 '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에서 발췌했어~
땡큐~~읽어봐야지
이거 보고 도서 구매했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