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2월1일 목요일 [(녹)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수도회] 가난으로 선포하는 기쁜 소식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열왕 2,1-4.10-12
† 복음 마르 6,7-13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도
이런 선교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선교 활동에서 가장 필요한 자세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은 온갖 종류의 이기주의, 자신을 과시하려는
욕망, 방종과 게으름에 대한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지요. 대신
하느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야만 합니다. 또한 선교 활동을 하며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
방해, 무시 등도 감수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여도
실망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점을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때로는 함께 활동하는 이들과 의견
차이가 생기고, 갈등마저 심해집니다. 그러니 선교 활동을 하는 이는
모든 이에게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하지요(1코린 9,22 참조).
이를 위해 자신을 꾸준히 단련시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려고 노력해야만
하지요. 아울러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진정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끊임없이 청해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작용하실 때만이,
우리가 하느님을 보는 눈이, 그리고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보는
방식까지도 다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2018년 나해 2월1일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제1독서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솔로몬아,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2,1-4.10-12
복음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7-13
지난달에 있었던 사제서품식에 참석하면서 내 자신이 사제서품 받은
것이 엊그제만 같은데 신부가 된 지 벌써 20년 차에 접어들었더군요.
벌써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싶으면서 깜짝 놀라게 됩니다. 아무튼
20년째 사제로 살다보니 또 인터넷이나 방송 등에서 활동을 하다 보니
종종 저를 알아보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내 자유가 없어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어떤 신부님의 말씀이
문득 생각납니다.
“나를 알아보는 분들이 많아서 함부로 살 수가 없어. 그래서 감사해.
나쁜 짓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잖아.”
남들의 시선에 집중하면서 사는 것이 피곤한 것 같지만, 오히려 죄를
멀리하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이유가 될 수 있어서 오히려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누군가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공짜로 무엇인가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관심과 사랑에 대해 부담감을 갖게 되는 것은
여기에 책임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책임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내가 받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 관심과 사랑은 조만간 사라질 수밖에 없으며, 외면 받고 있음에 큰
아픔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이 땅에 직접 오셨고, 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
큰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집중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함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면서 당연히 주님의 뜻에
맞게 살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그런데 너무할 정도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 6,8.9)
이렇게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세상에 파견되는 것에 대해 제자들은
철저하게 따릅니다. 분명히 고생길이 훤하게 열린 것 같은데도 제자들은
그 어떤 불평 없이 주님의 뜻대로 선교 활동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렵고 힘든 명령이라도 기꺼이 따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주님의 명령을 받아 세상에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온갖 불평불만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또한 어렵고 힘든 이유만을 찾으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주님의 사랑에 집중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내 자신을
사랑하시는지를 그래야 주님의 뜻을 더욱 더 충실히 실천하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져도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성공은 아니다. 이는 곧
두려움이 없어야 성공이라는 것이다.
지금 갑곶성지에서는 인천교구 사제들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만으로는 안 됩니다.
바닷가 마을에 사는 한 어부는 대구 잡이로 부모를 봉양하면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대구가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기후 변화로 인해 그 지역 어종이 바뀌었고 이제는 대구는 없고 청어가
나타난 것이었지요. 이에 어부들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청어가 대구보다
작아서 그물 사이로 다 빠져나가기 때문에 더 촘촘한 그물이
필요했습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촘촘한 그물을 짜고 있을 때, 이
어부는 말합니다.
“나는 내 그물이 손에 익어서 좋아. 그래서 새 그물을 짜지 않고 그냥
이 그물을 사용할거야.”
어떻게 되었을까요? 항상 허탕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열심히 바다에
나갔지만 아무 것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그물은
촘촘하지 않아서 청어들이 그냥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한다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시대의 흐름을 읽어야 합니다.
피정 미사 중에...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가난으로 선포하는 기쁜 소식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2월1일 연중 4주간 목요일 마르 6,7-1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7)
가난으로 선포하는 기쁜 소식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을 선포하는
태도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6,7). 제자들은
회개를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며, 많은 병자를 고쳐줍니다
(6,12-13).
이렇듯 제자들은 누구든지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도록 주님의
자비를 전하고 선포할 소명을 띠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각자의
처지에서 삶의 증거와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기쁜소식을 선포하고
고백하도록 불렸습니다. 어떻게 이 사명을 실행해나가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6,8-9)
지팡이는 야수와 강도들의 습격을 막는데, 신발은 돌이나 뜨거운
지열(地熱)로부터 발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옷을
두 벌 껴입는 것은 부유한 이들의 행동이었기에 금하셨습니다. 이는
"이중적으로 처신하지 말고 단순하게 걸어가라."(아우구스티누스)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복음선포에 필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입니다. 철저한
가난이야말로 하느님의 풍요로움 안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가난이야말로 복음선포의 신빙성을 보장해주는 살아있는 표지이지요.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낮추시고 비우신 하느님의 자비와 선과 기쁨은
가난이 아니고서는 선포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가난한 교회가 되어 하느님의 풍요로움을 증거하는 예언자적
소명에 충실하지 못한 듯합니다. 정치권력과 부당하게 결탁하고 사업을
벌여 재력을 키우며, 선교도 교회 유지도 돈을 앞세웁니다. 빈부격차에
따른 신자들 사이의 소외와 위화감 형성, 교회 세습화 등으로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장사터'로 바뀌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선포에 파견된 제자들에게 현세적인 것들에 의지하지
말고, 인정받기를 바라거나 성과에 연연하지 말라 하십니다(6,11).
가난한 자로서 주님의 사랑을 깊이 관상하고, 내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회개를 선포하라는 것이지요(6,12). 사랑이신 주님과의
뗄 수 없는 견고한 관계에 있을 때 사랑이 전파될 것입니다.
물론 복음선포가 늘 순조로울 수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6,11)
이는 누구에게나 주님의 진리와 자비를 선포해야 하지만,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을 거부하고 무시하는 이들과는 어떤 경우에도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도 하느님을 소유함으로써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 기쁨과 평화를
선포하는 주님의 참 제자로 살았으면 합니다. 교회 또한 재물과
권력에서 해방되어 가난한 이의 참벗이 되도록 회개해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열 두 제자들을 파견하심!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2월1일 연중 제4주간 목요일
복음: 마르 6,7-13: 열두 제자의 파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채비에 대해 말씀하신다. 최상의 준비는 소박한 음식과 인간의 허약한
몸을 가리고 덮어줄 옷 한 벌처럼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사도들은 길을 떠나며 주님의 말씀대로 전대도 지니지
않았고 여벌 옷도 없이 떠났다(8-9절). 두 벌을 껴입는다는 것은
이중적으로 처신하지 말고 단순하게 걸어가라는 말씀이다.
또한 배를 채울 양식이 부족할까 염려하며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마태 6,34 참조) 하느님의 섭리는 사도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마련해 주실 것을 믿으라고 하신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통하여 완전해지려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며 그 말씀을 듣는 이의 의지에 맡겨 두셨다.
그리고 손님에 대한 풍습은 손님에게 친절히 접대하는 것은 거룩한
의무 중의 하나였다. 낯선 여행자에 대한 손님 접대는 그들의 의무였던
것이다. 여행자를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천사를 대접하는
것이고, 하느님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손님을 거절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절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거절하는 행위는 바로 이방인들이나 하는 행위가 되고 그로 인해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발에 묻은 먼지를 턴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고”(루카 10,16),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마르9,37) 이것이 지금 사목을 하고 있는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 잘해 주라고 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우리 이웃들에게 하여야 할 바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사랑을 드릴 수 있으며, 그분께 진정한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 앞에 나 자신이 진정으로 복된 삶을 살며, 그리하여 참으로
하느님 안에 사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우리의 복된
삶으로, 생활로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도 그렇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은 우리 이기주의의 바람막이가 아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려 노력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만 의탁하며 이
순간을 살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 수원 교구 상하 성모세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원] 나쁜 남자가 되어라.|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2월1일 연중 제4주간 목요일 마르코 6,7-13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나쁜 남자가 되어라.
얼마 전에 한 여자 청년이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남자친구가 너무 착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연락 없이
다른 사람을 만나도 다 이해해주고 자기가 하자는 대로 다 따라주는
것이 못마땅해서 싸우다가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청년은 남자가 착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일까요?
“내 허락 없이 어떤 남자도 만나지 마라, 응? 오빠가 전화하면 재깍
재깍 받고!”
“오늘은 오빠가 먹자는 거 먹고, 오빠가 보고 싶은 영화 보자.”
“내일 시간 좀 내라, 바다나 보러가자.”
이런 남자를 소위 나쁜 남자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살아보면 후회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자는
이상하게도 이런 나쁜 남자에게 끌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항상 저자세로
다 이해만 해 주고 상대의 편의만 봐주려고 하는 남자는 왠지 매력이
떨어지게 되고, 나쁜 남자는 언제라도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자세를
지니고 있기에 무언가 내가 모르는 대단한 것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거미는 이미 자신의 거미줄에 걸린 하루살이들에겐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거미줄을 쳐서 더 큰 잠자리를 잡을지가 관심사입니다.
착한남자는 이미 걸려든 하루살이와 같고 나쁜 남자는 걸려들지 않는
잠자리와 같습니다. 이미 잡힌 하루살이에게는 관심이 줄어들고 잡히지
않은 것에 더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물론 모든 여자가 다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 순전히
저의 생각일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왠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나쁜 남자가 되라고 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고는 지팡이도 보따리도 돈도 여벌옷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냥 자신을 받아들이는 집에 들어가 신세를 지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집은 제자들에게 옷과 음식과 돈을
대주어야합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그 고을을 떠나면서 경고의 표시로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먼지’는 가장 보잘 것 없는 것 중의 보잘 것 없는 것의
표징입니다. 창세기 3,14절에서는 뱀이 벌을 받아 평생 기어 다니며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 먼지이고, 3,19절에서는 죄를 지은 인간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하십니다.
시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편 30:10 “제 피가, 제가 구렁으로 떨어지는 것이 무슨 이득이
됩니까? 먼지가 당신을 찬송할 수 있으며 당신의 진실을 알릴 수
있습니까? 따라서 발이나 몸에서 먼지를 털어내는 것은 ‘지금까지 나는
먼지와 같은 당신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나누어 주려고 하였지만
받으려 하지 않았기에 나는 당신들로부터 더럽혀진 내 자신을
씻어버립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먼지로 남아있게 되는 것에는 더 이상
내 책임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교를 하다가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툭툭 털고 나와
버리십시오. 그들은 저자세로 계속 자신을 대해주기를 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지,
그들에게 비굴해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만큼하고 아니면 툭툭 털고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들도 이런
자세에서 우리가 무언가 대단한 것을 지니고 있음을 짐작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그들이 ‘나를 통해서 저들이 어떤 이익을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할 만큼 하시고 유다에게
“이제는 네 할 일을 하여라.”라고 하시며 그를 놓아버리십니다. 그를
영원한 지옥으로 넘겨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마지막으로 베푸는 하나의 경고요 초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는 그리스도께 후회하고 돌아왔다면 그리스도는
기쁜 마음으로 유다를 맞아들이셨을 것입니다.
은총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총을 받고 세상에 전해주기 위해서 파견 받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주는 사람에 합당한 자세를 지닐 줄도 알아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연중 제4주간 목요일
2018년 나해 2월1일 연중 제4주간 목요일. 마르 6,7-13
오늘은 서품식이 있는 날입니다. 33명의 사제와 21명의 부제가
탄생합니다. 새 사제와 부제님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오늘 서품을 받는 분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 같습니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의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한 유언이지만, 오늘 서품을 받는 새
사제들이 마음에 담아야 할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들을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오늘 교구장님께서는 새
사제들에게 서품을 주십니다. 그리고 교구 사제들의 권한이 담긴
임명장을 주십니다. 새 사제들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어진
직무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름을 대면 금세 알 수 있는 가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많은
히트 곡을 낸 가수가 처음에는 음반사의 심부름꾼이었다고 합니다.
성실하게 일을 하는 젊은이를 눈여겨 본 사장님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젊은이는 노래를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사장님은 젊은이에게 노래를 한 곡 주었습니다. 젊은이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노래를 아주 잘 불렀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수가 되었습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 하느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아담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부끄러움에 몸을 감춘 아담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아담에게 낙원은 이미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밝은 태양도,
싱그러운 바람도, 들의 꽃도 아담에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이
끊어진 연처럼 아담은 중심을 잃어버렸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의정부 어머님께 다녀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시청
역에서 내렸습니다. 늦은 밤, 역에서 내려 명동까지 걸어오는데 잠시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걷다보니 광화문 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청계천 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명동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길에는
이정표가 있기에 방향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글을 쓸 때도 그렇습니다. 몇 번씩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해도 전혀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엉킨 실타래처럼 생각이 하나의
흐름으로 가지 못하고, 우왕좌왕 갈팡질팡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맡겨 드리지 못하고, 나의 생각을 짜 내려고 할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어느 한 순간 하나의 주제가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뻥 뚫린
고속도로처럼 생각이 정리되고 글이 써지곤 합니다.
정말입니다. 우리의 몸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출세, 성공, 권력, 재물의 변두리를 맴돌면 나의 마음도 그곳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교육, 가치, 목표는 철저하게 경쟁과
성공의 신기루를 행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탐욕의 독버섯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성공과 출세의 대열에서 이탈한 사람들은
절망과 좌절의 덫에서 방황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있어야 할 곳을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들을 알려 주셨습니다.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외로운 이들, 죄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아픈 이들을 치유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서품을 받는 젊은이들에게 물어 보실 것 같습니다.
‘너 어디에 있느냐?’ 또 저에게도 물어 보실 것 같습니다. ‘가브리엘
너 어디에 있느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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