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 양을 먹이라(2)
세 번의 질문과 세 번의 대답
요 21:15-17 / 인명진 목사
여러분 모두 때때로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이 늘 머릿속에 맴도는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늘 우리의 마음속에 맴돌고 이 뜻이 무엇일까 골똘하게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제목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늘 떠나지 않고 맴도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늘 떠나지 않고 맴돌아야 합니다. 무엇인가 한 가지 생각에 매몰되어서 그 생각에 매여서 그 생각을 골똘하게 생각하는 그런 생각의 끝이 있어야 한다, 제목이 있어야 하는데 불가(佛家)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화두(話頭)라고 합니다.
최근에 이르러서 저는 요한복음 21장의 말씀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빙빙 맴도는 화두가 되었습니다. 저의 생각의 화두는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베드로에게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되풀이해서 기록된 말씀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똑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한 적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똑같은 질문을 왜 세 번이나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질문하셨는데 시차를 두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루걸러 한 번씩 하신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서 물어보면 대답했고 대답하면 다시 물어보셨습니다. 물어본 내용도 다른 것이 아니라 똑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장소에서 다른 상황에서 질문하신 것도 아니고 똑같은 자리,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질문을 연속해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도대체 왜 그러신 것일까요?
베드로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일까요?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시종일관 똑같은 대답을 세 번 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꼭 듣고 싶어하셨던 대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똑같은 대답을 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왜 똑같은 질문을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왜 그러셨는지 성경에는 그 이유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 천국에 가서 예수님께 물어보아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 한 번 생각해보라고 우리들에게 기도의 제목으로 남겨놓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왜 베드로에게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셨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기 위해서 먼저 어떤 상황 속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오늘 본문의 상황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보는 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베드로는 그의 고향 갈릴리로 돌아가 옛날처럼 동료들과 고기를 잡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기록은 복음서마다 조금 다르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에서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읽은 21장 2-3절 말씀에 보면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자마자 갈릴리로 돌아가서 동료들과 함께 어부가 되어 옛날의 삶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먼 길을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마치신 그 자리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 번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편에서 상황을 설명하자면 예수님께서 붙잡혀 가셨을 때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자기에게 해가 있을까 염려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베드로는 그러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와야 한다고 하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이 죽는 곳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큰 상을 주셨고 수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이 막상 붙잡혀 가셨을 때는 앞에 나서지 않고 비겁하게 멀찍이 십자가를 따라갔습니다. 적어도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서도 똑같은 일이지만 저 사람만은 저렇게 하면 안 된다, 저 사람은 나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에게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뜰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마침 대제사장의 여종이 뜰밖에 와서 베드로에게 너도 그 사람 중 한패가 아니냐고 묻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는 절대로 예수와 한 패가 아니라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에게 결정적인 실수입니다. 어떤 성서학자는 이때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고 해석합니다. 물론 그럴듯한 추측이긴 하지만 조금 억지스러운 느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갔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베드로는 무서워서 예수님의 무덤 근처에 가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용감하게 예수님이 묻혀있는 무덤으로 찾아간 사람들은 갈릴리의 여인들이었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도 아니고 예수님을 삼년 동안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 근접도 못하고 자기에게 손해가 될까 벌벌 떨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낙향을 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에 대해서 복음서마다 조금 내용이 다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평시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십자가에 죽지만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을 몇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평상시에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무덤가에서 기다려야 하는데 베드로는 그냥 고향으로 내려가고 만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믿음이 있었다면 며칠이라도 예루살렘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인간적이 도리입니다. 명색이 수제자인데 뒷수습도 해야 합니다. 아니 예수님의 수제자가 아니라도 인간적으로도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일종의 배신인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를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그 먼 길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이른 아침에 찾아오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괘씸하기 그지없다, 섭섭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가지셨을 것입니다. 배은망덕하다, 배신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 베드로를 그렇게 믿고 의지하여 수제자로 삼고 하늘의 열쇠까지 주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런 베드로는 잊어야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혹시 어쩌다가 베드로를 만나게 되어도 더 이상 상대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세상에 한 번 속지 두 번 속느냐는 말이 있는데 베드로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적어도 한번쯤 마음먹고 베드로를 만나서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끔하게 야단을 쳐야 될 사람이었습니다. 멀리 갈릴리까지 일부러 찾아갈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그런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고 하셨는데 여러분 같으면 베드로에게 그런 중요한 일을 또다시 맡길 수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들 같으면 도저히 그렇게 못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갈릴리로 베드로를 찾아가서 같이 음식을 드셨습니다. 음식은 마음 편한 사람과 같이 먹습니다. 원수와 마음이 불편한 사람과 같이 음식을 먹는 것은 참으로 거북스러운 일입니다. 음식은 마음 편한 사람과 같이 먹는 것입니다. 마음이 불편했던 사람에게 밥이나 같이 먹자는 것은 화해를 하자는 것입니다. 음식을 같이 먹는 것은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가 예배가 끝난 후에 음식을 같이 나누어먹는 것은 음식을 먹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식구가 된 사람으로 마음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한 번도 식사를 안 하고 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나는 당신들과는 마음을 주고받을 일이 없다고 오해를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데도 주일 오후에 음식을 같이 먹는 것은 우리는 같은 믿음의 식구이기 때문에 마음을 주고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음식을 같이 드셨다는 것은 이미 베드로와 예수님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어보실 처지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그동안 한 일을 보면 모릅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합니까? 생각해보면 베드로는 그런 질문을 받을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습니까? 물어보나 마나한 질문입니다. 질문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지 아무나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누군지 몰라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어려움을 당하셨을 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베드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아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새삼스럽게 베드로를 만나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고 질문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양심이 있다면 예수님이 자신이 한 일을 모르시는 것도 아니고 다 알고 물어보시는 말인데 무슨 염치로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는 대답을 뻔뻔하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세 번씩이니 말입니다.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말을 하기 전에 ‘죄송합니다. 부끄러워서 뵐 낯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해야 인간적인 도리이고 순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기록에 보면 베드로는 그런 말 한 마디 없이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는 똑같은 말을 줄기차게 세 번씩이나 대답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이 비상식적인 질문과 대답 대화의 내용을 그대로 기록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뜻과 기독교 신앙의 신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과거, 베드로의 실수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우리들 같으면 꼭 해야 했던 말 “너는 왜 나를 배신했느냐? 네가 수제자라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인간적인 도리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대제사장의 여종 앞에서까지 나를 부인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한마디 책망이라도 하시고 따지셔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르고 그러신 것이 아니라 다 아시면서도 그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과거에 대해서 따지고 묻지 않으신 것은 베드로가 실수하고 잘못을 저질렀지만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멀리서 따라가고 비겁하게 갈릴리로 도망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한 연약한 인간의 실수로 생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속마음을 다 아신 것입니다. 사람이 부족해서 잠시 실수한 것이지 여전히 베드로는 그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란 것을 아신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기의 배와 그물과 부모와 처자를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는가, 어떻게 3년동안이나 그렇게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녔는가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사랑했던 과거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그 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실수와 잘못은 일시적이고 연약한 인간으로서 있었던 일이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야 너에게 그런 실수가 있었던 것을 내가 다 알고 있다.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말씀은 질문이 아니라 평생 동안 예수님을 사랑했던 베드로의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베드로에 대한 신뢰의 표시였던 것입니다. “베드로야 너의 잘못을 다 안다. 물론 네가 잘못한 것은 있지만 그것은 단지 잠시 너의 실수였고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은 예수님은 베드로의 겉으로 드러난 잘못 그것을 문제 삼지 않으시고 베드로의 속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들은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겉으로 드러난 것을 문제 삼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문제 삼는다면 예수님께서도 베드로가 잘못했던 것 그것을 문제 삼아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그의 속마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정말로 네 마음까지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떠났는가 네 마음이 아직도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겉으로 드러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고 물으신 것입니다. 네가 그런 잘못을 했지만 그런 실수를 했지만 네 속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내가 실수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인지라 부끄럽고 예수님께 죄송하기 그지없지만 제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 내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쉽게 베드로가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주님 앞에 당당하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내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주님 앞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다 아시는 주님 앞에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대답할 수 있는 베드로는 대단한 사람이다, 위대한 신앙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고 겉모습이 다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속마음을 다 아십니다. 오늘 우리의 속마음을 다 아시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자식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돈보다 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제가 인간인지라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르지만 속마음으로 주님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무엇보다 주님을 제일로 생각하며 사는 것을 주님이 다 아시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저의 진심이며 부끄럽지 않은 사실이라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설교하는 저는 과연 그럴 수 있는가? 여러분은 과연 그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밖에 없다, 돈도 자식도 명예도 주님과 바꿀 수 없다고 우리 속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 앞에 베드로처럼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베드로처럼 그런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제가 평생 동안 예수님을 믿고 목사로서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물으시면 “제가 부족한 것도 많고 주님을 부인한 때도 있고 십자가를 멀리 따라간 적도 있지만 제 마음은 늘 주님을 제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자식이냐 주님이냐 물으시면 망설임 없이 주님을 선택할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세상의 명예와 물질과 주님을 놓고 선택하라시며 주님을 선택할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베드로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럴 수 있으면 성공입니다.
결국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정말로 주님을 제일로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 때문에 베드로처럼 배와 그물과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일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아름다운 신앙의 삶으로 예수님을 감동시켜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이 있다면 설사 우리의 삶에 실수가 있고 잘못이 있다고 해도 예수님은 베드로의 잘못을 묻지 않으시고 따지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의 잘못과 실수도 모른 척 하시고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알고 있다 위로해주시고 사랑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과 물질 사이에서 분명하게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주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돈을 더 좋아하는지 하나님을 더 좋아하는지, 자식을 더 좋아하는지 하나님을 더 좋아하는지 하나님은 우리의 속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당당해야 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대로 살지 못하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실수하고 죄짓는 일을 밥 먹듯 하는 사람이지만 우리가 꼭 마음속에 다짐할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향한 일편단심,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고 비교할 수 없는 진실된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이 그의 양이었습니다. 어린 양떼였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이 양떼를 누구에게 맡길까 생각하시다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때로는 실수도 했고 부족한 사람이지만 죄를 지었지만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주님께서는 가장 소중한 일, 가장 귀한 일을 그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 물어보셨습니다. 그 마음이 한결같아야 똑같은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세 번 물어보아도 세 번 다 똑같이 부끄럽지 않게 당당하게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이렇게 저렇게 많은 실수도 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러운 일을 하며 죄를 밥먹 듯이 짓고 살아가지만 “제가 한결 같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제 인생에 가장 소중한 분이라는 마음만은 변치 않고 살았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정조를 지키면서 살았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세 번 물어보셔도 똑같은 대답을 할 수 있는 믿음의 삶, 베드로와 같은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이용하나요? 사랑하나요?
요 21:15-17 / 강문호 목사
로스엔젤레스 북쪽에 빅 베어 산이 있습니다.
척 스미스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갈보리 교회 수양관이 그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그 곳으로 200여명이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24시간 동안 침묵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200여명이 24시간 동안 침묵을 지킨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모임은 처음이었습니다. 24시간이 끝나는 때에 나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눈이 30cm 가량 쌓여 있었습니다. 눈위에서 앞에 나무를 붙들고 섰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24시간 침묵을 지킨 입술로 제일 먼저 무슨 말을 할가요?”
그리고 나도 모르게 말했습니다.
“주님! 사랑해요.”
그리고 눈위에 엎어졌습니다.
“주님! 사랑해요.”
그리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주님 이용하여 은혜도 받고, 지혜도 얻고, 기도도 응답되고, 남보다 머리가 될 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주님을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로 제일 먼저 가셨습니다.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찾고 계신 중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도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 하였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부활 후 다시 만날 때도 역시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을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리라고는 감히 생각도 못 하였기에 주님이 오셨는데도 주님인 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고기가 153 마리 잡혔습니다. 그 때 한 제자가 예수를 예수로 알아보고 외쳤습니다.
“주시다.”
베드로는 고기를 잡다가 이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예수님에게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같이 생선을 구워 떡과 함께 조반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대화가 베드로와 오고갔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먹이라.”
이것이 오늘 대화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주님을 이용하였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곁에서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신비로웠습니다. 주님 곁에서 진리를 듣는 것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도 하였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내가 뉘게로 가오리까?”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도 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위한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한 내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팬이었지만 주님의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베드로는 이제 주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군중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인산 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병고침을 받으려고 몰려 든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되었는 지 성경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하고 병고침받고 끝났습니다.
예수님이 해외에 꼭 한번 가셨습니다. 마가복음 7장 이야기입니다. 두로 지역입니다. 한 여인이 와서 애걸하였습니다. 딸이 귀신들렸는 데 고쳐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들으시고 고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이들만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이용하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보니 왕이 될 것같았습니다. 인기가 최고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행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고 계셨습니다. 오병이어 시간 후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요청하였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주세요.”
예수님이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장관자리 하나 하고 싶다는 말이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이들뿐이었습니다. 오늘 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지 많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어떤지 한번 점검하는 시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이용하나요? 사랑하나요?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일가요?
1.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 7:9)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예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사랑한다는 말은 그 분의 말을 잘 따르는 것이 그 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느 성도가 전도를 하였습니다; 한 명이 빤질빤질하면서 도저히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끈질기게 찾아갔습니다. 그 사람은 귀찮아서 떼어 버려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래침을 뱉아 놓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이 가래침을 먹으면 내가 한번 교회 나가 주지요.” 그 순간 십자가 환상이 나타나며 주님이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영혼을 구원하려고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그까짓 것을 못 하겠니?”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두 손가락으로 그 가래침을 들어 입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서슴치 않고 삼켰습니다. 그 사람은 엄청난 감동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무엇이기에 내 가래침을 삼키는가?”
그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장 큰 명령은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아끼는 것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책이 얼마 전에 베스트 셀러였습니다. 그 곳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사회학과 교수가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볼티모어의 유명한 빈민가로 가서 청소년 2백 명의 생활환경을 조사하라는 숙제였습니다. 학생들은 빈민촌으로 들어가서 청소년들을 조사하여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조사서를 만들어 제출하였습니다. 평가서는 거의 동일하였습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전혀 미래가 없다. 너무 가난하여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25년이 지났습니다. 이 학교에 사회학과 교수가 우연히 이 연구 조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수는 학생들에게 2백 명의 청소년들이 25년이 지난 현재 모습을 조사하여 오라는 숙제를 냈습니다. 조사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 동안 죽은 아이와 이사간 아이가 20명이었습니다. 나머지 180명 중에서 176명이 대단히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변호사, 의사와 사업가등 상류층이 많았습니다. 교수는 놀라서 그 조사를 더 진행시켰습니다. 교수는 그들을 한 사람씩 만나 직접 물어 보았습니다.
"당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답은 모두 한결같았습니다.
"여 선생님 한 분이 계셨지요."
그 여교사가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교수는 수소문 끝에 그 여교사를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에 아이들을 가르쳤기에 빈민가의 청소년들을 이처럼 성공적인 인생으로 이끌었습니까?”
늙었지만 아직도 빛나는 눈으로 여교사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비결은 정말 간단합니다. 그 아이들을 사랑했답니다."
사랑은 놀라운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제일 계명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느 병원에서 생긴 이야기입니다. 임종하고 있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심장 마비를 치료하느라고 강한 진통제가 들어가서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습니다. 노인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희미하게 말했습니다. 그 때 해병대 군복을 입은 청년이 들어섰습니다. 간호원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할아버지! 기다리던 아들이 왔어요.”
노인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군인은 그 손목을 꼭 잡았습니다. 그런 상태로 시간이 흘렀습니다. 간간히 간호원이 들어 와서 상태를 확인하고 돌아 갔습니다. 그 군인은 밤새도록 그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간호원이 들어와서 그만 하고 눈 좀 붙이라고 하여도 말없이 노인의 손목을 잡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노인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청년은 간호원에게 물었습니다.
“이 분이 누구신가요?”
간호원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당신 아버지가 아닌가요?”
청년이 말했습니다.
“전혀 아닙니다.”
“그러면 왜 손목을 그렇게 꼭 잡고 밤을 새우셨나요?” 청년이 말했습니다.
“내가 이 분의 손목을 잡자 이 분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내 손을 꼭 쥐어 주었습니다. 나는 그 눈빛을 실망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임종까지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이용하지 말고 주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기에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갈보리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몇 년전 미국 텍사스 달라스에서 성막 쎄미나 171기를 하였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 교회에서 4년간 일하시던 전 송자 전도사님을 만났습니다. 호텔보다 더 좋은 집이었습니다. 그 곳에서는 호텔비가 하루에 223불이었습니다. 그래서 싼 모텔로 나가려는 데 그럴 바에는 그 집에서 머믈자고 하여 그 집에서 5일을 머믈렀습니다.
그 때 김 대중이라는 분과 같이 그 집에서 머믈게 되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주 독특한 분이었습니다. 몸에 암이 6가지나 있어서 6번 수술을 하였습니다. 달라스에서 10시간 정도 거리인 뉴올리언스에 살고 계신 분인 데 달라스 병원에 특별한 관계가 있어서 치료 받으러 와서 이 집에서 머믈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한국 정계에서, 그리고 미국 정계에서 알아 주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습니다. 지금도 죽을 고비를 순간 순간 넘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나를 죽이지 않고 살려 주시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셨습니다. 홍제동에서 가난할 때 교회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 때 산기슭에 무허가 교회를 세웠습니다. 브럭크로 교회를 세울 때 수 주를 모든 일을 전폐하고 현장에서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 때의 열정이 가끔 그리워집니다. 나는 죽을 둥 살 둥 수없이 많은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 때 교회를 세운 공로를 하나님이 인정하셔서 지금의 위기를 이기게 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교회 사랑이 예수님 사랑입니다.
나는 쏘련 카자크스탄 가라간다 교회에서 성막 쎄미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성막 쎄미나 역사상 가장 많이 모였고 가장 인상깊은 쎄미나같습니다. 5000명 가량이 모였습니다. 담임목사는 김 인걸 목사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두 번 오셨었습니다. 형은 사할린에서 기차를 타고 오다가 얼어 죽었습니다. 그런데 김 인걸은 살았습니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고혈압으로 세 번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선교사 유 의경 목사님이 오셔서 전도하고 안수기도를 하였는 데 깨끗이 나았습니다. 신학교에 갔습니다. 목사가 되었습니다. 큰 교회를 하나님이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런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라간다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지금 3,000명이 모이고 있습니다. 30만 가라간다를 구원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쏘련 전역에 10,000 교회를 세우자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3,000명 들어가는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또 혈압으로 쓰러졌습니다. 다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끝이라고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조금만 거동할 수 있으면 미국 워싱톤으로 가서 세계 최고의 의술로 수술을 한번 해보자고 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 비행기를 탔습니다. 비행기가 공중으로 치솟자 다시 혈압이 극도록 올라서 다 죽게 되었습니다. 비행기에 누워 사모님은 붙들고 기도만 하였습니다. 목사님도 오직 예수님만 불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심장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말했습니다.
“무엇하러 왔습니까? 이상이 한 곳도 없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교회를 사랑하며 1,000 교회를 지으려고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나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는 완벽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여 주십니다. 교회 사랑이 예수님 사랑입니다. 우리 갈보리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3.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1)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여 영혼을 구원하라고 하시는 명령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명령이 우리의 최초의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유언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 옛날 이야기 중에 청개구리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모말을 듣지 아니하는 청개구리가 있었습니다. 동으로 하라면 서로 가고, 이리 오라면 저리 가는 청개구리었습니다. 단 한 번도 부모말을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어느날 부모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양지 바른 곳에 묻히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양지에 묻어 달라고 하면 청개구리는 물가에 묻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유행하였습니다.
“아들아! 내가 죽으면 시냇가의 묻어 다오”
부모에게 오늘들은 청개구리는 평소에 순종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유언만은 들어주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정말 부모의 시신을 시냇가에 묻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비가 오기만 하면 부모 시체가 떠내려 갈까 두려워 개굴개굴 울어 대는 것입니다.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도 유원은 듣는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유언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18-20)
부모의 유언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유언은 더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은 영혼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전도팀이 있었습니다.
금요일마다 모여서 전도 나가는 데 전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금요일 목사님이 전도팀을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오늘 전도를 못 하면 우리 교회 나올 생각하지 말아요. 그리고 나를 목사로 부르지도 말아요.”
전도하고 돌아 와서 그들이 둘러서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뭐 하는 거예요?”
그들중에 한 명이 말했습니다.
“아저씨! 우리 어느 교회로 갈가 의논중이예요.”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유언을 이루어 드리는 사랑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혼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 어떤 마을에 얼굴이 아주 험상궂은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그 노인을 싫어하고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한 소녀만은 얼굴이 흉한 그 노인을 늘 웃음으로 대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안녕하세요?”하고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전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소개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 노인은 지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노인은 40만 불(5억 원)의 재산을 자기에게 늘 미소를 보내며 전도하여 준 그 소녀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전도는 서로 축복입니다.
양 병희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영안 교회 집회하면서 들은 은혜의 이야기입니다.
옆에 초등학교가 있습니다. 그 학교에서 어느 날 소방 훈련이 있었습니다. 4명 여자들이 사닥다리 차 바구니에 들어 가서 9층 높이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바구니를 유지하고 있던 쇠줄이 끊어져서 바구니가 거꾸로 되었습니다. 4명 여자들이 그대로 쏟여져 내렸습니다. 3명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한 명 이 혜숙 집사님만 살았습니다. 그런데 전도의 사명을 받은 집사님이었습니다. 전도 열심히 하는 그 집사님만 살아났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전도 잘 하니까 하나님이 데려가기 아까워서 살려 주셨다.”
전도 잘 하면 자기가 상급을 받습니다. 전도는 주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이용하지 말고 사랑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요?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17 / 이동휘 목사
1.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그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가를 물어 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오직 베드로의 사랑만을 물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는지 묻기 시작하여 그에 대한 사랑으로 물음이 끝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베드로, 너는 내가 깨어 기도하라.” 고 너에게 명한 나의 경고가 얼마나 슬기로웠는지 이제 알겠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그리하여 자기 과신을 버리고 이제 나의 권고에 귀 기울이겠느냐? 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나를 주는 그리시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느냐?” 라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질문들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 바로 나의 인격에 대하여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있느냐?” 는 한 가지 질문만 했습니다. 주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이름,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의 이름을 부르심으로, 그에게 베풀어진 은혜를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만 그의 사랑에 대해서 물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만을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느냐?”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회개는 축복에 이르게 하는 아름다운 일로 반드시 필요하지만, 제자가 스승을 사랑한다면, 자기가 과거에 선생을 부인했던 일을, 영락없이 상한 심령으로 통회할 것이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베드로의 사랑을 질문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를 새롭게 하시려는 예수님의 지혜였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신앙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고 맹세하며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믿음에 대해 질문하실 법했는데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이 심히 중요한 질문이긴 하지만, 베드로가 사랑을 맹세했을 때, 그의 믿음까지 입증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믿을 것이요 주님을 믿지 않는 자는 누구라도 그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다른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이 한 질문에 다른 모든 것들의 초점을 맞추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가장 근본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중요한 한 가지 일이라는 것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질문이 첫째도 중요하고, 둘째도 중요하고, 셋째도 중요하며,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 번씩이나 거듭거듭 물으시며 강조하셨습니다. 말뚝을 거듭거듭 두들겨 박듯이, 이 사상과 사랑을 베드로의 마음과 영혼 깊은 곳에 심어두시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결같은 목소리와 눈동자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오직 사랑에 대해서만 세 번씩이나 질문한 것을 볼 때, 사랑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점검해 보시려면, 다만 여러분의 가슴을 향해, 오직 여러분의 사랑을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여러분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분에 대하여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까? 다른 모든 것은 그냥 지나쳐 버리더라도 이 질문에 대해 “주여, 그러하외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고 자신있게 대답하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몸소 물으시되, 베드로가 근심할 때까지 질문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제자로 인정되는 한, 그는 가장 가혹한 질책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자신이 관대한 대접을 받고 있음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근심케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참된 심령에게는 대개 고통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는 아직 낫지 않은 베드로의 상처를 건드려서, 다 치유될 때까지 질문을 반복하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가슴에 피를 홀리게 했기 때문에, 자신도 가슴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세 번 부인했으니 세 번 고백해야 했으며, 그렇게 하므로 베드로 마음에 남아있던 근심을 기억하여 끄집내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저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러분을 근심시키고 제 자신을 근심시킬 이 질문을 던질까 합니다. 위로하는 일이 좋은 일이긴 합니다만, 때로는 근심시키는 일이 더 좋은 일일 수 있습니다. 달콤한 음식이 항상 최상의 음식이 아니며, 때로는 맛이 없고 쓴 약이 필수적일 때도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마음으로 근심하게 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이 질문을 던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근심이 일어날 때까지 자신을 향해 이 질문을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참된 사랑은 다소간 고통을 느낍니다. 다만 가식과 외식하는 자들만이 이러한 심각한 질문이나 마음을 드러내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식적으로 편안함을 느끼며, 결국 자기 마음을 속이는 자들이 되기보다는, 근심하다가 올바르게 되는 일이 더 낫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근심케 하시는 질문들은, 그 질문 자체에 우리 자신을 치유케 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을 살피시어, 여러분 각자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신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홀로 있는 여러분을 찾으셔서, 여러분 앞에 계신다고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손으로 여러분을 어루 만지시며 온화하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묻는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그 질문에 압도당하여, 왜 그런 심문조의 질문을 하실까 하고 부끄러움으로 떨면서, 갖가지 이유를 생각하려 들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세 번이나 거듭하여, 분명히 여러분에게 그것도 여러분에게만 하신다면,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살펴보아야겠다고 느끼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저는 여러분에게 이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직접 지금 여러분 마음에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질문을 목사가 묻는 것이라거나, 목사가 성경에 있는 질문을 던진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으로, 십자가에 고난받으시고 피흘려 죽으심으로, 여러분을 죽음과 지옥에서 구원하셨던 바로 그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각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무리 가운데서 바로 여러분을 각자를 가리키며 뚫어지게 바라보시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 그런 질문을 하게 되는지를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물으셨으니 여러분도 개인적으로 대답하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두지 마십시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너의 가슴이 나사렛 예수를 향하여 참되게 고동치고 있느냐? 자, 베드로야, 예냐, 아니냐, 네가 그러하외다. 답했는데 정말이냐? 정말이냐? 정말이냐?” 예수님이 정말로 우리 앞에 서셔서 우리 각자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는 것처럼, 이 말씀이 오늘 아침 저와 여러분의 가슴에 사무치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은혜를 내리셔서 이 일에 대하여 엄숙하게 질문하며, 정직하게 증거하고, 참된 답변을 하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 예수께서 성도 여러분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시는 이유 중, 첫 번째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여러분 가슴에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교회 신자로서 공식적인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합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공적인 모든 일들을 진심으로 행합니다. 이러한 교회 성도들이 수많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경배, 찬양한다고 맹세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가슴은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동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가슴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머리로 알 뿐입니다. 사랑 없는 종교란 회칠한 무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새 없는 빈 새 장과 같습니다. 생명이 떠나버린 앙상한 뼈다귀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 생활의 일반적인 경향이 너무 외적인 데만 치중하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생활이 극히 적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가장 축복받은 신앙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장 충실하게 전하는 신앙이요, 가장 진실한 회개는 그의 상처를 보고 우는 회개이며, 가장 감미로운 사랑은 사랑하는 그 분의 놀라운 인격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완전한 사랑이시며, 그를 사랑하는 것이 참된 종교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그를 전혀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안식일의 주인인 주님을 잊어버린다면, 주일 성수를 해도 헛되며,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의 성전를 사랑해도 헛되며, 신랑을 사랑하지 않으면 혼인잔치를 사랑하는 것은 헛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교회 임원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베드로는 사도였으며 그것도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는 교회의 주춧돌이었음에도, 그를 향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제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 30을 탐했으며 그 큰 돈은 자기 선생을 팔기에 적당한 돈으로 생각했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가롯 유다라는 이름은, 교회에서 높은 직책을 가진 자라도 파멸에 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 일람표에는 성도 여러분의 이름이 있을 지라도 어린양의 생명책에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임원 여러분에게도 “주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제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사랑받던 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은밀한 가운데 행하여진 주님의 어떤 기적들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으며,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도 보았습니다. 그분이 영광 가운데서 변화하시는 모습을 보았으며, 겟세마네동산에서 심한 고민에 빠진 예수님도 보았는데, 이렇게 특별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님은 대표자격인 베드로에게 물어보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도 이들과 같이 영적으로 특별한 사랑을 받으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특권들을 경험하고 누리고서도, 주를 향하여 발뒤꿈치를 든 자가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진정으로 그분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이 보고 즐기는 것으로는, 여러분이 진정으로 그를 사랑한다는 확실한 보장이 되지 않습니다. 특이한 체험을 하기는 쉽지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졌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가장 열심이 많은 자에게도 이 질문이 필요 합니다. 베드로는 과격한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행하는 일에 얼마나 적극적이었습니까! 베드로는 성급하게도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주여, 만일 주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마 14:28). 이 얼마나 용감합니까? 얼마나 큰 믿음이 있습니까? 그 열심이 불 같지 않습니까? 이 본문 내용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무리들을 보내는 동안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러 홀로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바다 한 가운데 이르게 되었을 때, 큰 풍랑에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위경에 빠진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제자들이 이를 보고 놀라 유령이라며 무서워합니다. 이에 즉시 예수께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베드로가 “(마14:28)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라며 예수께 말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라” 고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갑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자, 베드로가 무서워하는 순간 물에 빠져갑니다. 베드로가 급히 소리칩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마14:31)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참으로 대단히 열심을 가진 제자였습니다. 열심이 가득한 자를 향하여,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하시는 성도들에게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의 열심이 식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베드로같은 열심히 있을지라도,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은 해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떠밀려 열심을 가진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 열심을 낼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거룩한 열심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에 의한 열심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열심으로 많은 일을 할 수는 있습니다만, 하고 나서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열성적인 행동이라고 해서 반드시 진실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여전히 “주를 사랑하는가?”라고 물어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크게, 그리고 확실하게 자기를 부인한다고 해도, 그것이 주님에 대한 사랑을 증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경우처럼,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사오니”(마 19:27)라고 말할 수 있지만,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는가?” 라고 물으셨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재물이었지만, 베드로에게는 전부였으며, 그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세상적인 어떤 재물도 받지 않고, 다만 선한 뜻을 위하여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때로는 능욕도 당하고, 비난도 받았고, 더 많은 비난을 받을 줄 알았지만, 그는 충성스러웠으며 끝까지 고난을 받으려 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당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 줄 아시면서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말하기 조심스럽습니다만, 순교시대에 자기 몸을 불타도록 던진 자라도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 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본질적인 것은 사랑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에는 오직 첫째로 사랑으로만 채워져야 합니다. 이 귀중한 것이 여러분의 가슴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제 가슴에도 사랑이 없을까봐 두렵습니다. 이 시간 개인적으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3년 넘도록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배웠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많은 말씀을 가르치신 스승이셨고, 베드로는 그의 제자였습니다. 참으로 베드로는 이처럼 위대하신 선생님으로 부터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과정을 다 마친 뒤에 그의 선생님은 그를 일평생 감당할 일을 맡기기 전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아야 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이 성경책을 수없이 읽을 수도 있습니다. 교리를 배우고 신앙생활에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성경에 능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급기야는 심령이 수많은 책장처럼 말라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여러분이 읽고 있는 책들을 덮으시고 “가만히 앉아 있거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모든 책과 지식보다 너는 나에 대하여 따뜻하고 인간적이며 생명력 있는 사랑을 가지고 있느냐?” 고 물어보시는 것은 유익합니다. 성경을 잠시 덮고 그리스도를 향한 여러분의 마음의 상태를 많이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사랑하는 것은 더 귀중합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신비 중의 신비인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고, 말씀으로 세상에 오신 그 분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지식은 교만하나 사랑은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베드로는 이적을 행했으며, 더 큰 기사를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 모든 일을 행하였다 해도, 그의 사랑은 점검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전무후무하게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갔다 하더라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방금 그는 일백 쉰 세 마리나 되는 많은 물고기가 담긴 큰 그물을 바닷가로 끌고 왔습니다. 탁월한 기술과 힘찬 투지로 그 전부를 바닷가 얕은 곳으로 끌어왔지만, 이것이 그의 사랑을 증명하지는 않았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큰 물고기로 가득 찬 그물을 바닷가로 끌어온 복음 전파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위대하고 성공적인 사역자들이었습니다만, 그렇다 할지라도 주님에 대한 사랑을 물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네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으되 나를 사랑하느냐? 내 명령대로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졌으되 나를 사랑하느냐? 수다한 고기를 바닷가로 끌어 왔으되 나를 사랑하느냐?” 성도 여러분,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라는 말씀은 성도 여러분에게 주시는 엄숙한 경고입니다. 폐일언하고 사랑하는 여러분들,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아무리 탁월하며 봉사나 고난에 있어 특별하다 할지라도, 이 질문만은 피할 수 없습니다. 가슴을 활짝 펴서 주님의 질문에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거듭거듭 물으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여러분을 근심케까지 하시더라도, 겸손하고 담대하게, 진실되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3. 다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아니면 우리의 모든 지난 고백은 거짓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성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심장을 도려내면 즉사하고 말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참되며 첫째가는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여러분은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없는 복음은 결코 복음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그리스도가 떠난 성경은 여러분에게 생명력 없는 글자일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약속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도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십자가 예수를 통해 용서를 얻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아 의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4. 현재, 그리고 장차 바른 일, 일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래에 올바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 생을 마치지 않았으며, 우리 앞에는 수많은 순례길이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모든 일이 올바르게 진행될 것이며, 예수를 향한 사랑이 없다면 일은 올바르게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베드로는 어린양을 먹여야 하며 양을 치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참된 목자가 갖추어야 될 첫 번째 조건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당신의 어린양을 먹이며 양을 치는 자로 삼으시려고, 베드로가 합당한 요건을 갖추었는지를 판단하는 시험관으로 행하시면서, 베드로의 지식이나 구변에 대해 질문하시지 않고, 그의 사랑을 확인하셨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목자가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조건도 사랑하는 마음이요 두 번째, 세 번째 조건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목사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쓰임 받는 모든 사역자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분을 위하여 일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 임원으로 믿음이 어린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거나 섬기는 일 모든 일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주님을 위해 유익하게 쓰임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여러분의 마음이 그리스도께 진실하지 않다면, 여러분은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끝까지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곧 순교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가 임했습니다. 베드로는 억지로 띠 띠고 원치 않는 곳으로 끌려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순교에 합당한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합니다.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는 것이, 너무나도 황송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럴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는 십자가형을 받았으며, 강하고 깊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정복자보다 더 담대했습니다. 사랑이 영웅을 만듭니다. 성령께서 사랑을 불붙게 하실 때에 용기 또한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장차 여러분에게 사랑이 크게 필요할 때가 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수많은 고난을 받아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동안 한 순간도 여러분을 조롱하거나 핍박하는 자가 없다면, 특별한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 세상에 살아갈 동안 많은 시험을 당하기도 할 것이며, 놀랍게도 여러분의 가족이 여러분의 원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머뭇거리는 여러분을 주시하며 심지어 여러분 앞에다 거치는 돌을 둘 것입니다. 그 때를 위해 먼저 마음 속에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불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강렬하게 사랑하지 않는다면,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것입니다.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겸손하여 섬기는 삶이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없이는 자기 부인과 겸손이 불가능합니다. 바르게 일하고,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바르게 살고 바르게 죽기 위해, 온 마음으로 예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경건 생활에 구심점을 지니지 못하게 되어, 결국 경건의 능력과 올바른 믿음을 끝까지 붙잡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좋아하는 것을 버릴 수는 있지만, 사랑하는 것은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또 심리적으로 확실 하다고 믿는 바는 부인할 수도 있지만, 진리로 여기며 깊은 사랑으로 받아들인 것은 결코 부인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끝까지 인내하려면, 반드시 사랑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사랑은 격려 하는 힘이 큽니다. 신앙생활에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김으로 여러분들이 판단할 수 없는 큰 난점들을 극복하며, 이해 불가능한 일을 해냅니다. 불신앙은 주저앉아 재어보고 계산하나 사랑은, 강렬한 사랑은 불가능을 비웃으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더 불가능한 것도 성취시킵니다. 사랑은 대군이라도 철저하게 쳐부수며, 사랑은 어떤 장벽이라도 뛰어 넘습니다. 그리고 믿음, 신앙과 함께 할 때 사랑은 전능합니다.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사랑 위에 임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사랑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사랑이 없다면 여러분은 무력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에게 활력을 주어 원수를 정복케 하는 능력은 사라지고 맙니다. 사랑이 없으면 변화의 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게 합니다. 사랑의 눈은 유리창처럼 예수님의 형상을 받아들이며, 사랑의 마음은 깊은 감수성으로 그 형상을 영접하여, 인간 전체가 그 형상의 감화를 받습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것을 닮으며 자라갑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없이는 하늘의 형상을 결코 지닐 수 없습니다. 사랑의 날개로 성도 여러분을 품어 주시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되시기 바랍니다.
5. 마지막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성도 여러분은 이미 대답하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리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가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답하는 그 순간, “내 양을 먹이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곧 바로 주님을 위해 일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있는 곳에는 일하려는 욕망도 있다는 것을 몸소 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크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나를 사랑하는데 아무 일도 맡기지 않으면 그 마음이 괴로우리라.”고 생각하시고, “가서 내 어린양을 먹이라. 가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주님을 경배하고, 봉사하는 일을 회피하거나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주님을 위한 일거리를 찾아서 잡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대부분 많은 성도들은 에배와 설교를 즐기는 것 외에,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다면, 남에게 선을 행함으로 그 사랑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뭇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와 그에 필요한 일을 시작하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에게로 나아가며, 잃어버린 자들과 방황하는 자들에게로 나아가, 죄인들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으로 섬김을 통해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이것은 여러분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느냐는 시금석이며, 여러분의 고귀한 삶을 시험하는 것이고,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았느냐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지금 나가서 그의 양을 치며, 그의 어린양을 먹이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증거를 보여드릴 수도 없고, 예수님의 사랑을 누리고 있다는 어떤 말이나 생각도 다 부질없는 것입니다.
일군들이 사랑으로 일하면 기쁘게 주인을 기다립니다. 주인이 몇 주간 출타했다가 드디어 귀가했습니다. 방을 아주 깨끗하게 정돈하고 주인을 위하여 식탁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화단에서 활짝 핀 아름다운 꽃을 꺾어서 갖다 놓았습니다. 물론 그 음식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솜씨로 마련되었다 할지라도, 식탁의 배치를 특별하게, 그리고 새롭게 합니다. 어느 것을 보아도 주인에 대한 사랑이 표현되어 있고, 애정과 경의를 나타냅니다. 사랑이 돋보이므로 주인은 그 식사를 말할 수 없이 기뻐합니다. 이제 사는 날 동안 모든 일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의 손길에 꽃이 만발하며, 그분 보시기에도 아름답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담긴 손과 머리와 눈으로 일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생각하며, 사랑으로 기도하고, 사랑으로 말하며, 사랑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면 여러분은 그 사랑의 힘과 기쁨으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높이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시 91:14)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랑을 입게 될 것이며, 재물을 얻어 그 곳간에 채우게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 8:21)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가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랑하시어 그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요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예수께서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사랑하신 것같이 성도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계시는 성도 여러분, 항상 그 사랑 안에 거하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 16: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사랑의 하나님께서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성흥모 목사
오늘의 교회력은 부활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해마다 부활절 세 번째 주일이 되면 즐겨 사용하는 설교본문이 요한복음21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오늘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한 주간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나타나셨습니다. 의심이 많은 도마에게 제8일에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나타내셨습니다. 11명의 제자들 중에 7명이 제자들이 함께 고기를 잡을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7명의 제자들 중에는 시몬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쌍둥이라는 뜻을 가진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있었습니다. 갈릴리 가나사람 나다나엘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가나 사람 나다나엘이란 사람은 바돌로매라는 제자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들, 곧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습니다. 사도요한은 그의 이름이 들어가는 자리에 다만 세베대의 아들들이라고 하여 자신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제자 두 분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했습니다. 아마 주님을 기다리면서 소일 삼아 고기를 잡으러 간 것 같습니다. 영원히 어부로 돌아가겠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하고 갈릴리 바다로 나가서 배에 올라 그물을 내려 보았지만,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눅5장에 보면 베드로와 안드레, 세배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밤새도록 고기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다음 날 아침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처럼 같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셨지만 제자들은 그 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제자들은 “없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하셨습니다. 3년 전 그 때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는데,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물을 배의 오른 편에 던졌는데, 잡힌 물고기가 너무 많아 그물을 끌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사도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다만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적어놓고 있습니다. 자신이 기록하는 복음서에 자신의 이름을 쓰기가 거북하여,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겉옷을 벗고 있었는데, 사랑하시는 제자가 저 분이 주님이시라는 말을 하니, 시몬 베드로는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려 수영하면서 뭍으로 올라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 200 규빗, 약 100m쯤 되었기에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펴 있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떡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렸는데,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153마리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고기를 한 번에 잡았지만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예수님이 7명의 제자들에게 말씀했습니다. “와서 아침 식사를 먹으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당연히 앞에 계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셨기에 “당신이 누구냐?”고 감히 물어보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떡을 가져다 제자들에게 주시고, 구운 생선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이번으로 세 번째였습니다. 부활하신 첫 날에 10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한주간이 지나서 도마까지 함께 있을 때에 나타나셨고, 이번 갈릴리 바닷가에서 7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에게 나타나시고,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10명의 제자들, 11명의 제자들, 7명의 제자들, 그리고 오백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신 것을 합하면 12번 정도 나타나셨습니다.
4복음서에 단편적으로 나타나신 것들을 날자 별로 정리를 하거나 시간대 별로 짜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부활 자체가 초자연적이고 신비로운 사건이기에 4복음서에 흩어진 여러 사건들을 억지로 짜 맞추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지만, 항상 마음에 무겁고, 예수님 뵙기에 두렵기만 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얼굴을 들지 못하는 제자는 시몬 베드로입니다.
시몬 베드로라는 제자는 항상 선두에 서야 하고, 자기가 제자들 중에 가장 수제자라고 믿었고, 신앙고백도 먼저 해야 하고, 어떤 다짐이나 결의도 먼저 하였고, 항상 선두에 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격도 다혈질이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 보다 실수도 많았습니다.
며칠 전에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나섰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칭찬의 말씀을 주시지 않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힘 있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주님을 버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중에 예수님은 가룟유다에 팔리고 대제사장의 하속들과 군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칼을 꺼내어 휘둘렀습니다. 베드로가 휘두르는 칼에 맞아 대제사장의 하속인 말고라는 사람의 귀가 잘려졌습니다. 예수님은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면서 말고의 귀를 도로 붙여 낫게 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다른 제자 한 사람과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다른 한 사람의 제자는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다른 제자 한 사람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대제사장의 집을 드나든 일이 있어 문을 지키는 사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이 시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가는데,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고 부인하였습니다. 그 때 날이 추운 관계로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불을 쬐고 있었는데, 베드로도 함께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불을 쬐고 있었던 사람 하나가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는 또 부인하였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었는데, 그 종이 와서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또 부인하였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보면 첫 번째 부인은 그냥 부인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맹세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세 번째 부인할 때는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거짓말을 하려니, 점점 더 강도를 세게 해야만 곧이들을 것 같아 저주하는데 맹세도 하고 저주도 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그 때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심히 부끄러웠습니다. 여러 날 통곡하고 뜬 눈으로 지새웠습니다. 그는 실패자요, 배신자요, 얼굴을 들고 주님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못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곧 우리의 실패요, 베드로의 상처는 곧 우리 모두의 상처입니다. 그는 지칠 대로 지친 사람입니다.
지금 갈릴리 바닷가에서 7명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허기진 제자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며 지친 제자들에게 음식을 먹이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셔야 하는데, 먼저 섬기시고 있습니다. 추운데 불을 피어놓고 있었습니다. 따뜻하게 몸을 녹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이 먼저였습니다. 책망은 뒤로 하고, 먼저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조반을 먹은 후에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세 번 부인한 제자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상처투성입니다. 병든 사람입니다. 믿음과 사랑도 소망도 용기도 긍지도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붙잡아주시면 일어날 것이고, 주님이 나가라고 하시면 한 마디 변명도 못하고 일어나 예수 공동체에서 떠나야 할 판이었습니다. 병들고 상처받아 지친 영혼을 향하여 사랑하느냐고 물어보고 있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시는 말씀은 여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기 있는 배나 그물이나, 생싱한 고기와 같은 이런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열심에 우열을 가린다고 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지만 낙심한 베드로를 다시 회복시키려고 하시는 예수님은 베드로의 위신을 회복시키고 기운 차리게 하여 수제자의 반열에 돌아오게 하시고 있습니다.
시몬은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이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사랑이란 말은 ‘아가파오’라는 말인데, 베드로는 ‘필레오’라는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아가파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최선의 사랑이요,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필레오라는 사랑은 우정이요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용하신 말은 그리스어가 아니라, 아람어였기 때문에, 사도요한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달리 사용한 것뿐이지, 같은 의미로 말하고 대답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실패하였고, 의기소침한 가운데 있지만, 아직도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하고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다. 죄송하다는 말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그 한 마디로 족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두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을 베드로에 다시 “내 양을 치라”고 이르셨습니다.
세 번째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세 번을 같은 말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시니, 베드로가 근심하였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같은 말로 부탁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명하셨습니다. 먹이고 치라는 말을 억지로 구분하여 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먹이는 것과 치는 것은 같은 범주에 속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주의 백성들을 어린 양으로 보셨습니다. 나약하고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 반드시 목자가 있어야 안심하고 자랄 수 있는 어린 양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앞날을 내다보시면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었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시고 있습니다. 배신한 제자인 줄 뻔히 알면서도 한 마디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네가 또 나를 배신할거냐?” “그렇게 목숨이 아깝더냐?” 그런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인 줄 믿느냐” 그런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에 걸쳐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사람이기에 “저는 주님을 사랑할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얽매여 사랑하는 제자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답은 예전에 사랑한 사람이라느니, 사랑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느니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 현재, 오늘 사랑하고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반석이 될 만한 사람도 아니었고,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영성이 치유되지 않으면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세 번씩이나 질문하고 확인하면서 주님은 베드로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있습니다.
요13:36-37에서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13:38)고 하셨습니다.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상처를 치료하려면 역시 세 번의 질문과 확인으로 베드로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치유하시고, 회복시켜서 다시 수제자의 반열에,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순교할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세 번째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는 근심하였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보여드릴 수 없어 근심하였습니다. 왜 자신 있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우리 주님이 나의 연약함을 잘 아시고 있습니다. 모자라고 부족한 면도 알고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세상과 짝하고 세상을 더 사랑하고, 어쩌다, 생각나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사랑해주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을 목양할 수 없습니다. 어린 양들이라고 하지만 다 귀엽지가 않습니다. 다 순종하는 것도 아닙니다. 양들이라고 하는데, 다 양들이 아니라, 뿔나고 모난 염소도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면 목양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면 소명감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헌신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주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다만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인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이 서로를 사랑합니다. 그 사랑도 주님을 사랑할 때에 진정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놀라운 이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랑한다는 고백 한 마디가 질병을 이겨내고, 절망을 떨쳐버리고 담대하게 도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위력은 정말 위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고백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순간 그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실패와 절망의 밤을 보내고 있었지만, 우리 주님은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성가는 참으로 저의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오늘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십시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붙들어주셨습니다. 한량없는 은혜요, 갚을 길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며 주님의 몸되신 교회를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건강, 물질, 명예, 모든 것을 동원하여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예수님
송기성 목사
“아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10여일 동안 중구용산지방 목회자 내외들과 더불어 동방교회 성지순례 및 연수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서방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조하는 것에 비해 동방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더 강조한다고 합니다. 마침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베드로,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탄의 밀 까부르듯 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족하여 넘어진 실패의 자리에서 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기까지 충성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로 하여금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재기와 하나님의 영광은 베드로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얼마든지 실패하고 실족한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처럼 인생의 실패와 낙망은 도리어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인생의 재기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회가 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1. 주님께서 부르신 이름은 베드로가 아니라 시몬이다.
갈릴리 서해안 도시인 디베랴 바다에서 밤새 헛 그물질을 했던 제자들에게 조반을 먹으라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똑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베드로야’라고 부르시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은 베드로가 주님께 그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기 전에 불리워졌던 그의 옛 이름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는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함으로써 베드로, 곧 반석이라는 그의 이름값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를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을 찾아 오신 것은 그를 책망하시거나 정죄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사실 그의 옛 이름을 세 번씩이나 부르신 주님 앞에 설 명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 그대로를 용납해주시고 용인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힘 입어 다시 시작하게 된 줄 믿습니다.
미국에서 목회하는 어느 한인 목회자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밤 11시쯤 속이 좋지 않아 약을 사러 나갔습니다. 쏜살같이 운전하여 약을 사 가지고 오다가 교통경찰에 걸렸습니다. 경찰은 운전면허증 등을 요구했고, 그는 “내가 뭘 잘못했느냐?”라며 뻔뻔스럽게 물었습니다. 경찰은 속도위반에 정지신호위반이라며 직업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저… 목사입니다.” “최근 5년간, 같은 위반으로 경찰에 걸린 적이 있습니까?” 그는 사실 속도위반도 했고, 정지신호위반도 했습니다. 경찰은 그의 불량한 운전습관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주의를 주었다고 합니다. “경찰이 교통위반 딱지를 발부하는 이유는 당신의 운전습관이 달라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않는군요. 목사님,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변화를 요청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당신은 변화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4:22~24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옛 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삽니다. 그래서 변화가 없고 실패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새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in the likelness of God)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살기 때문에 심령도 새롭게 되며 생활도 새롭게 되는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신 이름은 베드로가 아니라 요한의 아들 시몬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과 같은 사람은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허물과 과오를 용납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베드로처럼 그 반석 같은 신앙으로 세상을 이기고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의 아들 시몬을 부르신 주님과의 만남을 새롭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마음껏 감사하며 찬양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주님께서 받으신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대적인 사랑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물으신 것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이 사람들’이란 ‘이것들’(these, R.S.V)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본문은 세 가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네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네가 이것들 곧 배와 그물과 고기 등을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다 주님을 향한 사랑은 차별화된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처음 두 번 사용한 단어는 ‘아가파오’였는데, 베드로는 ‘필로스’로 대답하였습니다. 흔히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이타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하며, 필로스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 조건적인 사랑, 우정에 가까운 사랑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이 실패한 경험도 있어 주님께 인간적인 필로스 사랑으로 대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째 물으실 때에는 ‘아가파오’라고 하지 않으시고, ‘필레이스’ 사랑으로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번에도 주님을 필로스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정작 원하신 사랑은 아가페 사랑이지만 베드로의 필로스 사랑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주님께서는 더 이상 절대적인 사랑을 받으려 하지 않으시고 상대적인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받으신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이 아니라 차선적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랑의 사람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라며 귀한 사명을 주시고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번 해외 연수 여행 중에 마케도니아 스코피에에 있는 테레사 수녀님 기념관(The Menorial House of Mother Teresa, 1910~1997)에 들렸습니다. 그곳에서 수녀님이 그 일생을 대변하듯 고백한 글을 읽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아주 많은 종교가 있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따른다. 나는 그리스도를 따른다. 예수는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의 배우자이시고, 나의생명이시며, 나의 유일한 사랑이시고, 나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며, 나의 전부이시다.” (There are so many religions and each one has its different ways of following God. I follow Christ… Jesus is my God, Jesus is my Spouse, Jesus is my Life, Jesus is my only Love, Jesus is my All in All, Jesus is my Everything. -Mother Teresa-)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은 곧 최선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아멘!
주님께서 받으신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대적인 사랑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과 같은 사람은 신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헌신적인 사랑을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인간적인 사랑, 조건적인 사랑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대적으로 최선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의 아들 시몬을 부르시고 사랑을 원하셨던 주님과의 만남을 새롭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에 최선을 다해 헌신하며 충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동방교회 영성의 특징은 만남과 관계를 중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관계를 통해서 요한의 아들 시몬이 다시 시작할 수 있었듯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을 친히 찾아 오십니다.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고기를 잡게 하시고, 조반을 먹게도 하십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요21:9)라고 하시며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부르신 이름은 베드로가 아니라 시몬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받으신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대적인 사랑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회 40년 5개월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동제일교회에선 8년 11개월 곧 거의 9년간을 목회 하였습니다. 저는 제가 무슨 자격이 있고 권한도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아들 시몬을 다시 만나 주시고, 다시 시작하게 해 주신 주님 앞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아울러 다시 시작하는 마음과 자세로 목회에 임하며 주님과 여러분을 섬기고자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요 21:15-23 / 김광일 목사
■ 시카고 무디 성경학교의 교장이었던 조지 스위팅 (George Sweeting)목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설교를 많이 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삶이 변화되기 때문이다. 스위팅 목사는 주디(judy)라는 여자에 대해 말했다.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다. 사랑받고 싶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다. 아이가 넷이나 생겼으나 여전히 만족스러운 사랑을 만나지 못했다. 그 때 옆집 아주머니가 주디를 성경공부에 초대했다.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 사랑에 대한 복음을 들었다. 평생 동안 찾았던 사랑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주신 분을 찾았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 사랑이 무엇인지 맛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로 찾은 사랑에 기쁨이 넘쳤으나 하나님을 떠나 있는 남편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렇다고 남편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신시킬 자신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그녀에게 지혜를 주었다. 남편한테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말해 줄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니 자기 삶에 바꿔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걸핏하면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고,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했던 그녀에게 성령께서 혀를 절제하는 법과 말할 때를 가르쳐 주셨다. 집안일에 더욱 신경을 썼다. 식사 준비를 세심하게 했고, 몸도 가꾸어 날씬해졌다. 남편이 출근하면 잠을 잤으나 그 뒤로는 아이들이 등교하기 전 시간을 이용해 함께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주디를 녹이고 변화시키자, 남편과 아이들을 향한 사랑도 저절로 표현이 되었고 차츰 가정 전체를 녹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남편이 문밖으로 나섰다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주디를 안아주었다. 몇 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얼마 후 주디가 다섯 살 난 아이를 침대에 누이려는데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는 우리 집이 참 좋아. 예수님을 사랑하게 돼서 그런 것 같아. 그치?” 이 말을 듣고 주디는 감격하여 울었다.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는 줄 가족들에게 보인 것이 너무도 기뻤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이 질문으로 깨달은 바가 있다. 자신은 그동안 나름대로 예수님을 사랑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실상은 자기를 위해 예수님을 따랐다는 사실을, 자신의 욕심에 매달리면서 예수님을 좇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고백하였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베드로의 태도가 변했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사랑은 고백이 아닌 실천이다. 과거에 했던 것, 앞으로 할 것이 아니라 현재 해야 하는 행동들이다. 실천이 없는 사랑의 말은 감동을 주지 못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면서부터 자신에 대한 확신이 무너졌다. 감히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면 베드로가 대답한 ‘주님을 사랑하는 줄’ 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를 표현한 복음성가가 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사랑의 고백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을 동기로 하는 일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즉 사랑의 실천을 나타내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줄’에 대한 모습을 베드로는 어떻게 보였을까?
1. 사명을 감당하리라
■ 미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 중 1위로 선정된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Oprah Gail Winfrey)의 이야기이다. 빈민가의 흑인 사생아로 태어난 그녀는 9세 때 사촌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14세 때 미혼모가 되었다. 마약 복용으로 수감되기도 하면서 혼혈아로 인한 아픔 속에서 자랐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 삶이 달라졌다. 구약의 모세가 자신의 모델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과거가 미래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요소가 될 수 없다’고 믿었다. 주님을 사랑하면서 가난도, 부유도, 꿈도, 근심도 부딪쳐오는 모든 것들을 사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사명이다’라는 자서전에서 그녀는 인생철학을 이렇게 말한다.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남보다 더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남보다 더 설레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남보다 부담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짐이나 문제가 아니라 사명이다.” 윈프리는 단지 사명에 충성하였더니 오늘의 그녀가 되었다고 거듭 강조한다. 주님 사랑으로 사명을 감당할 때 비로소 완전한 인생이 만들어질 것이다.
15절 /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외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부활하신 주님의 시몬을 향한 첫 번째 말씀이다. 사랑의 고백을 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양을 먹이는 사명을 감당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어떠한 능력으로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가? 양을 맡기시면서 요구하신 것은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능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사람 때문에 힘들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이 아닌 사랑’을 묻고 계십니다. 사랑이 있어야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주님의 질문으로 사랑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한다. 양들을 사랑하되 자신을 소모하기까지 양을 치라는 사명이었다. 사명 감당하는 능력은 주님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 나의 힘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오로지 사명을 지배하여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순간부터 사명을 바로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고난을 극복하리라
■ 김일권 목사의 ‘일어나라 내 딸아’라는 책은 뇌성마미 딸을 일으켜 세운 감동적 수기이다. 태어난 지 3일 만에 뇌성마비 진단을 받고 각오하라는 의료진의 말에 그는 좌절하지 않고 기도로 마음을 다졌다. 하지만 장애아를 갖게 된 부모들의 고통처럼 김목사 부부에게도 문제가 생겼고, 교인들은 목회자가 뇌성마비 딸을 낳았다고 정죄어린 시선을 보내어 교회마저 사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사랑으로 극복하였다. 굳어지는 딸의 근육을 사랑의 손길로 풀어주었다. 선진 물리치료법도 배우고 발끝의 촉감을 느끼게 해주려고 자갈길을 걸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루에 수백 번씩 언어 훈련을 시켜 다섯 살 되던 해 드디어 ‘엄마, 아빠’를 부를 수 있게 하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기도하며 “우리는 승이를 사랑한다. 예수님은 승이를 더욱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밤마다 딸의 상상력과 지능개발을 위하여 동화를 들려주었다. 결국 다소 장애는 남았지만 정상에 가깝게 딸은 성장했으며, 의료진 모두가 기적이라고 환호하였다. 그 후 김일권 목사는 동화 작가로 데뷔하였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특수교육연구소를 설립하여 불행에 처한 뇌성마비, 자폐증, 정신지체, 다운증후군, 학습장애 등의 아이와 부모들을 돕고 있다. 그는 말한다. “남들은 애물단지로 여길지 몰라도 승이는 태어날 때부터 보물단지였고 결국 내게 보물을 안겨준 셈이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다소 굼뜬 동작과 학업 부진으로 딸이 힘겨워할 때 가슴이 쓰라렸지만 주님을 사랑하기에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18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부활하신 주님의 시몬을 향한 두 번째 말씀이다. 베드로가 앞으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것에 대한 예언이다. 베드로는 많은 고난을 당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기에 고난 앞에서 비굴하지 아니하고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다.
교회가 저절로 부흥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역으로 인한 고난이 있어야 한다. 사역의 위치에 따라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고난도 당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난을 극복할 것일까?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고난을 극복할 수 없다면 주님을 사랑하는 일부터 회복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받았는지 세워보아야 한다. 주님과 사랑을 확인할 때 비로소 고난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3. 끝까지 따라가리라
■ 파키스탄의 샤바즈 바티(Shahbaz Bhatti) 장관이 괴한들의 총격을 받고 2011년 3월 2일 암살을 당했다. 그는 소수 민족부 수장으로서 신성 모독법 폐지 등 소수민족과 종교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앞장서 왔었다. 그리고 내각 내의 유일한 기독교 신자로서 이슬람 과격 세력으로부터 여러 차례 살해 위협을 받았다. 피격당하기 얼마 전 미국 LA의 한 한인교회를 방문해서 이렇게 간증했다.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에서 최초의 그리스도인 장관이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하심과 핍박 받는 파키스탄의 기독교인들 그리고 형제들의 기도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장관으로 세우신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이라고 믿습니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리스도인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Follower of Jesus)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자기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위해 살고 예수님을 위해 죽고 싶다’고 말했다. 죽기 전 에 작성한 비디오 메시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기독교인과 소수 종교인들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죽게 될 것이다.” 샤바즈 바티, 그는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참된 제자의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22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부활하신 주님의 시몬을 향한 세 번째 말씀이다. 사랑은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이나 지식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알았고, 메시야로 깨달아 아는 은혜도 받았다. 하지만 예수님을 깨닫고 고백하는 차원으로는 결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수 없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더욱 예수님을 따르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의 시제는 현재형이다. 베드로에게 묻는 사랑의 여부는 ‘과거에 네가 나를 사랑했느냐’라고 묻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나를 사랑할 것이냐’고 묻는 미래적 사랑도 아니다. 주님께서 확인하는 사랑은 현재적 사랑이다. 그 현재적 사랑만이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게 만드는 능력이 될 것이다.
■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낸 한완상(韓完相) 교수는 사회학 학자이자 기독교인으로서 사람들에게 본이 되었다. 그는 대담을 하면서 사회학서적보다 신학서적을 더 많이 읽었던 감동적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예수는 말을 10을 하셨다면, 삶으로 100 이상을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어느 종교 창시자가 자신이 말한 것보다 삶으로 더 많은 것을 실천한 사람이 있습니까? 대체적으로 말은 100을 하면서 실천은 10도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생명을 죽이면서까지 사랑을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사랑을 가르치기보다 사랑을 실천하신 분이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좋아하고 그 분을 나의 주님으로 믿습니다.”
예수에게 사랑은 말이 아닌 실천이었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닌 동사이다. 사랑의 말이 많은 곳이 행복한 곳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 이뤄지는 곳이 행복한 곳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주님의 사랑을 무한히 받은 자들이다. 과거에도 현재도 앞으로도 사랑을 넘치게 받을 자이다. 그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닮아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 사랑하는 줄을 나타내시기 바란다. 부디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으로 그 사랑을 보이시기 바란다. 고난을 잘 극복하여 주님 사랑하는 줄로 증거 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끝까지 주를 따라가는 모습이 되어 주님 사랑하는 줄이 나타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너는 나를 따르라
요 21:15-25 / 서명성 목사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 저 사람만은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면 그 충격이 클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관계로 연결되는데 만약 믿었던 사람에게 그런 상처를 받았다면 그 관계는 더 이상 지속되기 힘듭니다. 그런 사람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들의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같으면 어떻게 하실까요?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고 주님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니 배신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와 관계를 끊으시고 다시 보지 않으셨습니까? 찾아와서 멱살을 잡으셨습니까? 그것으로도 속이 풀리지 않아 때려주었습니까? 전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 사람을 위하여 따뜻한 조반을 차리셨습니다. 그 조반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걸으시면서 그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그 사람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그 사람은 주님을 끝까지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심지어 그분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했습니다. 실제로 그 사람은 주님을 위하여 순교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였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베드로가 사명자로 회복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각자에게 적용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명자로 굳게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5-17절)
베드로는 모두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기는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마 26:33). 또한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노라고 말했습니다(요 13:37).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상처를 씻어주길 원하셨습니다. 조반을 마친 후에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셨을 때, 베드로는 ‘이제 올 것이 왔구나’하며 속이 뜨끔하였을지 모릅니다. 주님은 그에게 ‘이 배신자,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너는 나를 세 번씩이나 부인했느냐’하며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시고 공생애 동안 주로 베드로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시는 이유는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사랑과 감격을 회복하라는 겁니다. 주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를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본문에 제일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사랑. 일곱 번 나옵니다. 설교자들 중에는 ‘사랑’을 뜻하는 헬라어에 신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agapao와 친구 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phileo가 있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두 단어를 선택하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두 번은 주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의미하는 agapao로 물었는데 베드로는 그보다 정도가 약한 phileo로 대답하였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질문하실 때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입장을 고려해 phileo를 사용하시며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니 베드로가 phileo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그런 의도로 세 번째 질문을 하셨다면 베드로가 안심했어야 하는데 본문을 보니 근심하였다고 합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agapao, phileo 두 단어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려고 이 질문을 하신 것이지 사랑의 정도를 확인하시려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회복시켜 사명자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이 사람들’로 번역된 touton은 남성 복수 지시대명사가 될 수 있고 중성 복수 지시대명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남성 대명사라면 ‘이 사람들’이 되고 중성 대명사라면 ‘이것들’이 됩니다. “이 사람들”로 번역한다면 함께 식사하던 다른 여섯 제자들을 가리키고, ‘이것들’로 번역한다면 베드로에 관련된 삶 전체, 즉 가정이나 사업, 사역 등이 다 포함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 때마다 베드로는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신다고 대답하였는데 세 번째로 같은 질문을 하시자 베드로는 근심합니다. 아마 베드로는 얼굴이 뜨거워지며 간신히 대답하였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던지십니까?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의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세 번 부인하였기에 주님에 대한 사랑을 세 번 고백하게 함으로 그가 가진 죄책감을 씻겨주시고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세 번의 사랑 고백이 베드로에게 고통스러운 과거를 기억나게 했지만, 이는 그의 영적 회복과 주님의 백성들에 대한 지도력 회복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습니다. 언제나 행동과 반응이 빠른 베드로였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반복되는 사랑의 확인 앞에 그는 자신에게 있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과연 진짜인지 생각해보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진심을 주님께 전합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도 아십니다.’‘사랑’, 그 단어는 예수님이 베드로로부터 가장 듣기 원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수많은 단점,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있는 겨자씨만한 믿음을 보십니다. 베드로와 대화를 나누면서 주님은 베드로 속에 감추어져 있는 주님에 대한 사랑을 끄집어내십니다. 그러자 베드로의 마음이 열리고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사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갑자기 일어난 주변 상황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주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진심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회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따라가려면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은 주님을 먼저, 그리고 더 사랑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과의 사랑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에게 자신의 양들을 맡기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할 때마다 주님은 그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말씀하십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명령하실 때는 ‘먹이라’하시고 두 번째는 ‘치라’하셨지만 그것은 같은 단어의 반복을 피하려는 것뿐이지 단어의 선택에 특별한 의미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이 맡기신 양을 잘 돌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사랑하시고 베드로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는 것입니다.
작년 성지답사 중에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는 Tabgha라는 마을을 들러서 그곳에 있는 Church of the Primacy of Saint Peter(베드로 수위권교회)를 방문했습니다. 4세기 후반에 세워진 비잔틴 교회의 벽면을 보존하면서 1933년에 갈릴리 호숫가에 다시 세워진 이 교회 안에는 ‘주님의 식탁’(Mensa Christi)이라고 불리는 돌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물고기와 빵으로 아침 식사를 드신 후에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는 대화를 나누셨다고 합니다. 당시 장면을 머리에 그려보면서 감격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교회당 마당에는 베드로가 열쇠와 지팡이를 든 형상의 석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16:13-20에 나오는 대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고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형상화하였습니다.
“스스로 띠 띠고 ... 남이 네게 띠 띠우고”(18절)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막 14:31)라고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장담했으나 예수님이 체포되셨을 때 그들은 모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제 주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이나 고백한 베드로는 진심으로 주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장차 일어날 일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무엇인가 중대한 사실을 말씀하실 때 자주 사용하시는 표현입니다. ‘띠다’라는 동사는 흘러내리는 옷을 허리띠로 묶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나온 ‘띠고’는 과거 습관적인 동작을 가리키는 미완료시제로서 젊었을 때는 상당 기간 동안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신의 혈기와 육체적 정욕을 따라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남이 네게 띠 띠우고”에서 ‘띠우고’는 타인에 의해 띠를 매는 행위를 가리키는데 미래 시제로 되어있습니다. 베드로가 늙어서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띠 띠우고 그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네 팔을 벌리리니’라는 표현은 베드로가 죽임당하는 방식, 즉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 모습을 십자가에서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요한은 그 예언의 의미에 대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라는 주석을 덧붙입니다. 이는 요한이 복음서를 쓸 당시에 베드로가 이미 예수님의 예언대로 죽음을 맞이했음을 말해줍니다. 또한 베드로의 죽음에 대한 사실이 초대교회에 널리 퍼져 있었음도 알려줍니다. 베드로는 그가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벧후 1:14)라고 했을 때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주후 64년 로마 황제인 네로의 박해 때에 순교하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죽음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십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2절)
예수님과 대화를 하며 걷던 베드로가 문득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는 모습을 봅니다. 이 글의 저자인 요한은 자기를“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소개하며 최후의 만찬 때도 예수님 품에 안겨 있었다고 합니다. 요한을 보니 베드로가 갑자기 그의 장래에 대해 궁금해져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나는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데 요한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복음서 어디를 보더라도 베드로가 요한에 대하여 드러내놓고 시기하거나 견제하였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그 동안 예수님 곁에 있던 요한의 존재를 은근히 의식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그러한 호기심을 채워주지 않으십니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를 살려둔다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알 바 아니야. 너는 나를 따르기만 하면 돼. 내가 너에게 준 사명, 나의 양 무리를 섬기는 사명만 잘 감당하면 돼.’같이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내용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 대화 내용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왜곡됩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라는 표현을 오해해서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졌습니다. 그 소문이 베드로의 죽음에 관한 말씀과 더불어 초대 교회에 퍼진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잘못된 소문을 정정합니다.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쓸 때는 그가 이미 늙어서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자기가“죽지 않겠다”가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였음을 강조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성격 차이만큼이나 그들의 소명과 사역의 형태 또한 달랐습니다. 같은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고 목양을 했지만 베드로의 두드러진 사역은 전도였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는 오순절에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전도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했습니다. 또한 그 후에 오천 명의 회심자를 한꺼번에 얻었습니다. 또한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함으로 이방인 전도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주로 교회를 회복하고 세우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복음서를 완전하게 보충하고 서신서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교회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요한은 사도들 중 유일하게 순교를 당하지 않고 가장 오랫동안 지상에 남아 어린 교회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대립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서로 가는 길은 다르지만 예수님을 충성스럽게 따른 제자들이었습니다.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24절)
이 복음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바로 자신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관한 자신의 모든 증언이 참되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증언의 책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증언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분을 처음 소개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 그분이 보여주신 표적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분이 가르쳐 주신 교훈을 직접 귀로 들은 제자들과 많은 사람의 증언을 소개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요한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행적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 이외에도 많아서 그것을 다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책을 수용하기에 부족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문학적 과장법으로, 예수님에 대한 전승이 많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또한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 자료를 선택적으로 사용했음을 말해 줍니다. 20:31에서는 자료를 선택한 기준에 대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계속 믿게 하는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성품과 행하신 모든 일들 속에는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의 은혜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참 구원과 진리의 빛을 얻고자 하는 이들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자가 되려면
-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세 번 반복하여 물으셨습니다. 믿음생활은 첫째도 사랑, 둘째도 사랑, 셋째도 사랑입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전에 베드로가 실패했던 이유는 “내가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며 자신이 근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이제는 내가 사랑의 근거가 아니라 주님이 근거가 됩니다. 내 결심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신뢰가 근거가 됩니다. 베드로의 사랑 고백에 이어 사명이 그에게 주어집니다. 사랑만이 사명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믿음의 행위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찬양, 기도, 헌금, 봉사로 나타나는 예배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들어가 있지 않으면 주님 보시기에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의무감이나 공로를 세우기 위해 억지로 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사랑으로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주님의 질문입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도 베드로처럼 육체에 져서 주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자책감에 빠진 분들은 없습니까?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하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함으로 베드로가 원래의 모습을 찾게 된 것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믿음으로 고백할 때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셔서 복음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힌 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삽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것이 우리의 본성을 거스릅니다. 우리는 편안한 길, 희생을 최소로 하는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자발적으로 고난과 희생의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그 고난의 길이 영광의 길로 이어짐을 확신해야 합니다. 사명을 말하면서 편안한 길만 선택하고 순종과 희생을 회피하고 있지는 않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뒤에 부활의 기쁨과 영광이 있다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가슴에 품어, 그 진리가 우리를 이끌게 해야 합니다.
- 끝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있는 것은 사명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전하는 것도 사명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사랑으로 주신 사명의 길을 가야 합니다. 믿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실패를 인하여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일이 크든 작든,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충성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의 흔적을 가질 뿐 아니라 우리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 각자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이 받은 사명에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명 감당의 척도는 성공이 아니라 충성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성도는 사명을 주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처음부터 끝까지 신실하게 따라가야 합니다.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더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주님을 따르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끝까지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며 맡겨진 사역에 충성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며 용서를 경험하고 회복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붙들고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을 끝까지 성실하게 따르는 제자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함께 지어가는 교우들, 땅 끝까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