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역사소설 영 작가 이영호 벨라도입니다.
영(贏-남을 영)이란 무엇인가?
부수 貝(조개패), 총 획수 20획의 글자이다
어떻게 생긴 글자인가
이쁘긴 한데 총 획수 20획, 글 쓰기가 복잡히다
나는 남을 영, 영이란
망구 왈패라(당나귀 라)로 기억하고 있다
망(亡)-망할 망, 구(口)-입구 그리고 조개 패(貝) 노새 라(나)
영(贏-남을 영)이란 어떤 뜻이 있는가?
1.(이익이)남다 – 상품 원가 + @
2.돈을 벌다 – 상품 원가*W@
3.성하다(盛 -- 상품 원가*WWW@)
역사소설 贏 에서 팔려고 내 놓은 상품이란 도데체 무엇일까?
여러분과 함께 찾아 봅시다.
소설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먼저 보이는 것이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학사님들이 마카오 상단을 꾸려 여행을 떠나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정말 장사꾼이었나? 그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들은 한국 최초의 신학사들이었다.
역사소설 영贏을 써 놓고 친구에게 보여 주었다. 그가 다 읽고 난 다음 내게 전해 주는 말씀, 삼장법사와 손오공처럼 이야기를 잘 풀어 갔다면 참 좋았을 터인데..., 억지가 많다는 이야기였다. 글 솜씨가 미숙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인정합니다.
사실 손오공 이야기는 황당하지만 그 이야기속에는 불교의 기본 내용들이 모두 있습니다. 역사소설 영贏 역시 미숙하지만, 만나는 짧은 사건속에 천주교회의 기본 교리를 품으려고 많이 노력하였습니다. 그런 시도가 지나치면 문맥이 끊어지고 방향을 잃어 전전긍긍 안절부절 했던가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계속 끓어 갈수 있었던 것은 시문(詩文) 때문이었습니다. 시문(詩文)은 비록 짧고 간결하지만, 그 안에는 중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역사 이야기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대변하는 철학도 함께 살아 숨쉬고 있었다.
동서양의 공통점은 내가 누구지? 그리고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넘어 선 영원한 행복에 대한 갈망입니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더 낳아지고 있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행복할 거야....!
중국의 철학은 내가 누구인가 보다는 자신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더 커보입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태여나면서 부터 체력 단련을 열심히 합니다. 남녀노소 구별하지 않을뿐더러 시와 때도없이 신나게 춤을 춥니다. 공원 또는 광장에서 처음보는 아가씨인데도 브르스, 탱고, 차차차등 권하면 절대로 사양하지 않습니다. 음악이 끝나면 정중히 인사하고 한 치의 미련없이 각자 제 갈 길을 가버립니다. 전문적인 체력 단련, 소림사 스님들의 수련도 유명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운동, 체력단련한다고 영원히 살아갑니까? 생명을 조금 연장할 뿐입니다.
중국인들은 건강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먹습니다. 생고기도 먹지만 구어 먹고 삶아 먹고 뛰겨 먹습니다. 뿐만아니라 탕제로 만들기도 하고 가루 또는 환으로도 만듭니다. 동물, 식물, 광물, 더구나 독극물도 건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즐겨 먹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죽어 갔습니다.
그러다가 그들 중 누군가 소리칩니다. 인간의 육신은 그렇게 죽어가는거야. 약초는 성장하다 죽어가는 것처럼 인간도 죽어가는거야. 그렇지만 인간에게는 영원히 죽지 않는 신령한 존재가 있단다. 신령한 존재는 자연속, 돌과 나무등에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신령한 존재가 인간의 육체에서 빠져 나와 자연속의 신령한 존재와 소통한다면 인간 역시 죽지 않고 영원히 살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물 좋고 경치 좋은 곳마다 생겨난 곳이 바로 도선사입니다. 모두 도사가 되기 위해서 였습니다.
도선 사원은 불교의 깊은 내용을 도교식으로 풀어 낸 곳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또 소리칩니다. 불교에서 이름 난 고승들만이 해탈의 경지에 오르고, 자연의 신령들과 통하는 도선사의 길은 정말 어렵고 고달픕니다.
고승이 아니더라도, 도선사가 아니더러도 누구라도 쉽게 죽지 않고 천당에 갈 수 있어요. 내가 천국 문턱까지 갔다가 왔거든..., 날 따라와봐요!!! 그곳이 바로 도원계곡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또 소리칩니다. 난 누구도 못 믿겠다. 우리 조상들은 자손을 저버리지 않을 거야. 이런 이유로 조상을 신으로 모시는 풍습이 생겨났습니다.
동양 사상의 원조는 공자, 맹자였다.
1-공자 BC 551-479, 맹자BC 371-289),
2-주희(朱熹, 1130년 10월 18일 ~ 1200년 4월 23일), 주자학 창시자, 그가 교통 정리를 합니다. 공자 이래 1500년간 흠짓 난 공자, 맹자 사상을 정리해 나갔습니다. 즉 불교 및 도교의 흔적들을 지워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즉 주자는 인성론에 있어서 불교적 사상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3-다산 정약용은 주희로부터 632년 이후 드디어 그가 유교에서 불교적 인성론 흔적을 찾아 완전히 삭제하고 새로운 인성론을 주장합니다. ((1762년(영조 38) 6월 16일-1836년(헌종 2) 2월 22일))
주희와 정약용은 유교적 사상 연구라는 기본틀은 같으나 내용은 전혀 다르다. 왜 그럴까? 이유는 아주 단순하며 명확하다. 주희는 천동설을 바탕으로 하고 그의 사상을 펼쳐 나가고 있으나, 정약용은 지동설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볼까요?
--주희에게는 동서남북 무한대로 펼쳐나가면 상대방과 마주 칠 일이 없다. 또한 정중의 개념이 명확하다.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정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약용에게 있어서 남북의 개념은 지동설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지구의 축의 개념으로 분명하게 있으나 동서의 개념이 없다. 왜냐하면 한 방향으로 계속 가면 본래 위치로 되돌아 오기 때문이다. 정중의 개념도 주희에게는 평면으로서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아니라 지구 중심 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천동설과 지동설은 그 근본이 다르다. 천의 개념도 전혀 다르다. 주희에게 있어서 천은 오묘한 존재, 만물의 근원인데 정약용에게 있어서 천(天)은 지(地)에 대비되는 텅빈 공간, 즉 하늘일 뿐이다.
--자연 관찰에 이어
인성론도 주희는 불교의 윤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주희는 불교적인 인성론으로 유교적 인성론을 풀어 보려니 설명이 어렵고 주장이 번복되고 충돌 되어 진다고 정약용은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윤회설로 보면 소, 돼지, 닭과 사람의 성은 같습니다. 성이 같다면 생각이 같아야 하는데...., 소에게 철학을 강의 한다면 알아 듣는 표시를 해야합니다. 그런데 입은 어둔해서 사람의 말을 못하고, 발은 굽으로 되어 있어 붓글씨를 쓸 수 없지만, 눈은 사람보다 크고 귀 역시 밝아 말뜻을 알아 듣는다고 끄덕 거려야 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저런 이유로 정약용이 유교에서 불교적 인성을 제거해 보니, 그 내용은 천주교의 인성론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면 성선설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의 행동이 악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영적인 자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결과에 대한 책임과 권리가 분명하여 주장하는 이론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정약용이 천동설을 바탕으로 시작된 유교를 지동설을 바탕으로 재해석 하여 원초적 유교로 복원한 시기가 바로 최초의 신학생들이 마카오 유학을 떠난 시기와 일치한다. 이것도 우연의 일치일까? 정약용의 유교적 사상의 재해석은 마태오 릿지의 보유론보다 한층 더 구체적인 내용을 품고 있는 것이다.
정약용은 유교적 입장에서 보면, 공자 및 맹자이후 오염된 유학을 바로 잡은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유학과 유교는 다르다. 유학은 학문이고 유교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유교의 하느님은 천주교의 천주님과 일치 한다.
정약용을 이어갈 학자는 금방 떠 오르리지 않는다. 유학의 시간은 멈춰 버린 듯 하다. 즉 김대건과 그의 동료들이 신학 공부를 위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시기에 동양 철학은 멈춰 버린 듯하다. 중국은 아편 전쟁등 근대화 바람에 이어 공산화되었고, 한국 역시 일제 강점기등 중국과 약간의 시차를 두고 격동의 시기를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성장이 잠시 지연되기도 하였지만, 그럼에도 상당한 발전을 거듭했다. 한편으로 한국에 천주교를 전해준 중국은 주희를 거처 정약용에 이르면서 시간이 멈춰버린 것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 공맹으로부터 시작된 동양철학은 주희를 거처 정약용에 이르러 하느님을 맞이하려는 순간 멈춰버렸다. 절묘한 시기에 역사의 시계가 멈춰버린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하느님 말씀, 로마로 가는 시간은 300년이 걸렸다. 그후 알프스 산을 넘어가는 시간은 500년이 걸렸습니다. 또다시 희말라야 산맥을 넘어 동방의 나라 조선으로 오는 시간은 1,000년의 세월이 흘러 갔던 것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이제 조선에서 로마로 가는 길은 탄탄대로로 펑 뚤려져 있는 것입니다. 동방의 나라, 늘 깨여있는 조선으로 가는 길을 안내한 사람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마태오 릿치였다. 그가 만든 길을 다듬고 튼튼히 보수한 사람은 바로 다산 정약용이었다.
우리는 조선교구 창설 이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최양업 야고버 신부님에 이어 86분의 주교님(현직 주교 27분, 원로14분, 선종 45분)이 탄생하셨습니다. 우리만 잘 먹고 잘 살면 됩니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가야합니다. 김대건, 최양업 신부님이 신부가 되기까지 먹여주고 입혀 준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중국 신자들이었습니다. 쓸쓸한 여행자들에게 배부르게 먹여주고, 따뜻한 잠자리 제공한 사람들은 바로 중국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때 그분들은 우리 신부님들에게 자선을 베풀면서 당부하는 말씀은 한결같이 기도중에 우리를 기억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중에 그들을 기억합니까? 여러분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수 많은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계십니다.
1990년 말, 늦은 가을, 여행중에 심양 대주교, 김패헌 바오로 주교님을 만났습니다. 아주 얇은 양복에 로만칼라를 하고 계신 노사제처럼 보였습니다.
그분 말씀을 요약하면, 정부가 모든 관리비용을 책임질 터이니 신자들로부터 한 푼도 받지 마라. 만일 중앙 공산당 정부의 이 법을 어기면 사제는 성당에서 퇴출당하고 성당은 그 즉시 문을 닫겠다. 이런 제도가 40년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각 성당은 성당을 지키기 위해 신부님들은 봉헌금과 교무금을 중단했습니다. 정부가 약속한 관리비는 한푼도 제공되지 않았다.
신부님들의 식사 제공은 그의 가족들이 몰래몰래 제공했습니다. 수도자들은 어떻게 되었나? 소리없이 굶어 죽어가는 수도자가 수도없이 많았다. 제가 방문하였을 때에도 수녀님이 교구청에 계셨는데 그 당시는 집에 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돈이 없어 수도복을 입지 못하고 형제자매들의 입던 옷을 구하려 외출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중국 교회 수도 성소는 끊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사제 성소는 단절될 수 밖에 없었다. 신학교를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40년 만에 신학교 문이 열렸지만, 사제 성소가 메말라 가고 있다. 신자들이 신앙 때문에 공산당으로부터 부당한 처우, 즉 공산당 당원이 될 수 없어 직장과 사회로부터 퇴출 당하여 생계가 어렵고 기초 수업 조차 받을 수 없는 신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고 있다.
우리를 돕던 중국 신자들은 이 지경에 이르렀다. 김대건, 최양업 신부님을 돕던 그들의 말을 다시 한 번 떠 올립니다. 기도중에 우리를 기억해 주십시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합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경제적으로도 여유만만합니다. 철학과 신학적으로도 풍부합니다. 이제 다시 250년전 시대로 되돌아 갑시다. 중국 신자들이 우리보다 훨씬 앞서 가면서 당부하던 말, 기도중에 우리를 기억해 달라는 부탁을 잊어도 될까요? 그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86분의 주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었을까요?
한국천주교의 발전, 경제 성장, 그리고 교회의 철학과 신학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아시아 전체를 이끌어 갈 문화 유산, 동양 철학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중에 다산학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산 정약용이 불교 학자라고 억지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는 주자학에서 불교의 인성론을 제거한 분입니다. 그는 불교학자가 아니다. 어떤이는 또 유학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유학자의 신분을 넘어 새로운 유교의 모습을 보여준 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최초로 유교 신학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좀체로 발견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주장하는 유교적 부분은 천주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철학에서 신학으로 가는 다리를 단단히 만들어 논 학자, 정요한입니다.
한국천주교회가 아시아 전체를 이끌어 가려면 정약용의 보유론에서 출발하여도 손해 볼일은 없을 것입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그 일을 요구하는 듯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 신자들이 우리에게 요구하였던 기도 내용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