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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박정희일생
해뜨는 저녁 추천 0 조회 95 12.12.10 11: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박정희

박정희

 
박정희 전 대통령의 초상화

임기: 1963년 ~ 1979년 10월 26일

전임: 윤보선(제4대)
후임: 최규하(제10대)

출생: 1917년 11월 14일
일제 강점기 한국 경상북도 선산군
사망: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정당: 민주공화당
배우자: 김호남, 육영수
자녀: 박재옥, 박근혜, 박서영, 박지만
박정희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
별명 호 중수(中樹)
태어난 곳 한국,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525번지
죽은 곳 서울특별시 중구 궁정동 안가
복무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 1945년-1963년
최종 계급 예비역대장
근무 육군

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음력 9월 30일)[1] ~ 1979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제5 · 6 · 7 · 8 · 9대 대통령(1963년 ~ 1979년 10월 26일) · 군인 ·교육인 ·정치가이며, 호는 중수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의 생애

         어린 시절 (1917 ~ 1932)

박정희는 1917년 음력 9월 30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1978년~현재: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의 금오산 자락에서 몰락 양반 출신으로 대한제국 말기에 효력부위를 지낸 아버지 박성빈(朴成彬, 당시 46세)와 어머니 백남의(白南義, 당시 45세)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박정희의 위로는 박동희(22세), 박무희(19세), 박귀희(15세), 박상희(11세), 박한생(7세), 박재희(5세)가 있었다. 아버지 박성빈은 영락한 양반 계급으로 동학 농민 운동에도 참여했다 하며 처가 문중의 산지기로 호구지책을 삼으며 술로 소일했다.[1]

박정희는 어머니가 원치 않는 자식이었다. 45세에 임신한 데다, 딸과 며느리가 임신 중이었고, 집안은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남의는 박정희를 낙태하기 위하여 온갖 민간요법을 총동원하였으나, 박정희는 결국 태어났다. 태아 시절에 겪은 시련 탓인지 아버지와 형들이 기골이 장대한 데 비해, 박정희는 왜소하고 까만 얼굴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가끔 큰 누나의 젖을 먹기도 했다.[2]

8세가 된 박정희는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구미공립보통학교 시절, 1등을 하면 급장을 시켜주는 새로운 제도 덕분에 공부를 잘하던 박정희는 3학년 때부터 내내 급장을 맡았다. 이때 박정희의 급우 가운데 그로부터 맞아 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었다고 같은 반 동기생이었던 박승룡이 회고한 바 있다.[2] 당시 박정희는 나폴레옹이순신위인전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소년시절에 교회에 다니기도 했지만[3] 뒤에 박정희는 종교를 바꾸게 되었다.

구미공립보통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한 박정희는 1932년 그해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다. 총 응시자는 조선인, 일본인 합하여 모두 1,070명이었다.[4] 당시 박정희의 집은 가난하여 학비를 댈 엄두도 못냈고, 그의 가족들은 내심 그의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으면 하였다. 그러나 구미공립보통학교의 담임선생님들과 교장선생이 방문하여 박정희의 부모님를 설득하여 대구사범에 응시하게 하였다. 누이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박정희가 시험에서 떨어지도록 빌었다고 한다. 합격하고 진학 못하면 한이 생긴다고 하여 불합격을 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합격하였고, 입학성적은 51등이었다.[4]

         교육 활동 (1932 ~ 1940)

만주군 시절의 박정희

1932년 4월 1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제 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이때 입학정원 100명이었는데 이 중 한국인 90명, 일본인 10명이었다.[4] 대구사범을 졸업하기 1년 전인 1936년 4월 1일, 세 살 아래인 김호남과 결혼했다. 앓고 있던 아버지가 죽기 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해서 강제로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사범을 졸업했다. 1937년 4월 1일 만 20세의 나이에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5] 박정희는 여기서 1940년 2월까지 재직하였다.[6] 박정희가 교사로 근무중인 1938년 9월 4일 아버지 박성빈이 67세로 사망하였다. 그는 그리하여 학생들에게 사범학교에서 배운 대로 은근히 민족혼을 일깨워주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출처 필요]

제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는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쳤다 한다. 음악 시간에는 <황성옛터>, <심청의 노래> 등을 가르쳤고 기타도 쳤다고 한다. 일본인 동료 교사들과의 마찰도 있었다 하며,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한번은 수석교사였던 일본인 야나자와(柳澤)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비하하자 의자를 집어던진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 중에 오가와(小川)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박정희에게 계속 트집을 잡아 논쟁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 박정희가 신경군관학교에 재학 중 군도를 차고 문경을 방문했을 때, 오가와가 무어라 했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교장을 찾는 일본인에게 불친절하게 대하는 등 일본인 동료 교사들과 마찰을 빚곤 했다. 1939년 10월 박정희는 만주 목단강성에 있는 만주군 관구사령부내 장교구락부에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시험에 응시하였다. 시험과목은 수학, 일본어, 작문, 신체검사 등이었는데, 1940년 1월 4일자 만주국 공보에 '육군군관학교 제2기예과생도 채용고시합격자공보'가 발표되었다. 박정희 는 조선인이 11명 포함된 만주계 240명 합격자 중 15등으로 합격하였다.[출처 필요][7] 보통학교 교사직을 하며 일본인 교사, 일본인 교직원과 계속 마찰을 빚게되자 1940년 2월 박정희는 교사직을 그만두었다.

        청년기 (1940 ~ 1945)

1940년 4월 박정희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이때의 박정희의 동기생들 가운데는 5·16에 가담한 사람이 없었으나, 간도 용정의 광명중학 출신의 선배 기수에서 5·16을 지지하게 되는 등, 이 때의 인맥은 박정희의 지지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8]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친 박정희는 1942년 10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다. 1944년 4월 박정희는 300명 가운데 3등의 성적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한다. 그리고 7월에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되었다. 이때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 등은 훗날 5·16 군사 정변의 동지가 된다.

박정희는 1942년 3월 예과 졸업생 240명 중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 시기에 박정희는 집안을 따라 다카키 마사오(일본어: 高木正雄)로 창씨 개명하였고, 만주군관학교 2기생 졸업앨범과 일본 육사 졸업앨범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고 한다.[9], 1945년 3월 작성되어 구미 면사무소에 제출된 《임시육군군인군속계》[10]에서도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병적기록부의 제출자인 박정희의 셋째형 박동희 또한 ‘다카키 토히로’(高木東熙)로 표기되어 있다.

조희연의 저서에 따르면, 이후 박정희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창씨개명을 하였다. 재미 언론가 문명자도 1999년 자신이 발간한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서 “만주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기 마사오. 그 곳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며 주장하였다.[11] 2005년 도쿄대학교에서 출판한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 2판에는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로 소개되었다.[11] 이러한 주장에 대해 김병태 건국대학교 명예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였다”며 연관성을 지적하였다.[11]

조선총독부및소속관서직원록에는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가 1935년 박정희가 수학했던 대구사범고등학교의 기숙사 학생감(學生監)으로서 6등급 공무원으로 근무했음이 기록되어 있다.[12]오마이뉴스》와 《한겨레》는 이에 대해 자료로 입증된 사실이 없거나 공식 기록으로 확인된 바 없으며 다카키 마사오로 한 차례 개명한 사실만 확인했다고 밝혔다.[9][13]


박정희는 만주 보병제8사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근무하였고,[14] 1945년 8월 해방 직전에 싱릉에서 중국 국민당의 부대에 체포되어 북경으로 끌려갔다는 주장이 있다.[15] 이후 해방조선으로 질서정연한 귀국을 하기 위해 장교경험자를 찾고 있던 광복군에 편입되어, 북경의 한국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귀국하였다.[16]

     광복 직후(1946 ~ 1950)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고 광복이 되자 그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1946년 졸업, 광복을 맞은 한국의 군대에서 다시 소위로 임관해 군인 생활을 시작한다. 박정희와 2기생도들은 1946년 12월 14일에 졸업하였다. 교육 중 동기군번 69명이 탈락하고 194명이 졸업하였고, 군번은 성적순으로 받았다. 1등은 신재식 (육군소장, 군수기지사령관 역임)이었고, 박정희는 3등이었다.[출처 필요][7]

소위로 임관한 박정희는 본부가 춘천에 있던 8연대로 발령받았다. 8연대는 1947년 2월, 미군이 38선 경비업무를 일부 이관하면서 다섯 곳에 경비초소를 설치하게 되었다.[출처 필요] 당시 경비중대장은 경비사관학교 1기인 김점곤 중위가 중대장으로 있었다. 원용덕 연대장이 장교들을 소집하고 경비초소(CP)의 위치와 소대장의 배치장소를 의논하였는데 미군 고문관 브라운이 소대장의 서열에 따라 배치하면 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면전에서 미국놈이 왜 간섭을 하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미국놈'이란 욕을 알아들은 브라운은 고소하였고 원용덕 연대장이 미국놈은 애칭이며 욕이 아니라고 변명해도 통하지 않았다. 브라운은 타이피스트한테 들어서 안다며 미국놈은 욕이라 하며 박정희의 징계를 요구하였으나 원만한 원용덕이 적당히 달랬다.[출처 필요][7]

1948년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연루 혐의를 받는다. 당시 경향신문은 그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는 남로당에 가입한 장교들에 대한 정보를 군 수사대에 넘겨, 실형은 면하고 예편하였으며 사상전향을 하게 된다. 그 이후,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한국 전쟁 중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다.

     6.25 이후(1950 ~ 1959)

1950년 육영수와 결혼하였다. 1950년 육군 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3년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였으며[17] 1955년 7월 14일 제5사단 사단장, 1957년 제7사단 사단장 등을 지냈다. 1959년 7월 1일 제6관구사령관, 1960년 1월 21일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 12월 15일 제2군 부사령관을 지냈다.

     5·16 군사정변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결심했던 데에는 그가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던 시절 4.19 혁명이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져있다. 박정희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군사정변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1950년대에 이미 이승만을 축출하려는 쿠테타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4.19 혁명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9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역임 후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김종필 중령을 비롯한 지지 세력을 규합하였고,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새벽, 반공·친미·구악 일소·경제 재건 등을 명분으로 5·16 군사 정변를 일으켜서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을 붕괴시켰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장도영이 의장에 자신은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개편한다.

    집권 과정 (1961 ~ 1962)

박정희가 초창기부터 군사정변의 최고 지도자는 아니었다. 당일로 ‘군사 혁명 위원회’를 설치하고, 장도영을 의장으로 자신은 부의장으로 취임하였다. 거사 3일째인 5월 18일 군사 혁명 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6월 10일에는 비밀 첩보 기관이자 동시에 국민 감시 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를 발족시켰다. 그 후 소위 알래스카 토벌작전이라 불리는 반혁명 사건을 조작하여 군부 내의 반대 세력을 숙청, 7월 3일에는 장도영마저 이에 관련시켜 의장직에서 추방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9월 9일 수출조합법을 공포하였고 9월 30일 공업표준화법을 제정하여 수출과 공업화에 대한 준비를 한다. 보리와 밀 품종개발을 시도하여 1963년 1월에 성공을 거두었다.[3]

 제3공화국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1962 ~ 1963)

1962년 3월 17일 수출진흥법 등 16개 법령을 공포하여 수출진흥정책을 수립하였고, 제2공화국 정부가 기획 중이었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고 울산 공업 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하며 경제 발전을 모색한다. 또한 그해 1962년 3월에 혁명위원회가 구정치인을 정죄하는 구정치인 정화법이 발표되자 이것에 반발한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박정희는 대통령 권한 대행직을 물려 받았다. 같은해 7월부터 8월 김현철을 후임으로 임명하기 전까지는 공석인 국무총리급의 지위인 내각수반을 역임하였다.

    제3공화국 초기 경제부양 노력 (1963 ~ 1967)

1966년의 세계 정상들과 만난 박정희 대통령(왼쪽에서 3번째)

1963년 4월 17일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다.[3] 그해 중반 군에 복귀한다는 이른바 혁명 공약과는 달리 강원도 철원 비행장에서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후,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5대, 6대 대선에서 민주당으로부터 사상 공세를 당했으며 5대 대선에서는 15만 표의 근소한 차이로 민주당의 윤보선에 근소한 차이로 신승하면서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박정희에 대한 지지율은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월등한 것으로 드러났다.[출처 필요] 1963년 9월 25일 직업재활원을 개원하였고[3] 1964년 베트남 전쟁 당시 일부 야당의 반대를 무릎쓰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단행하였으며, 1964년 8월 제1이동외과병원(130명)과 태권도 교관단(10명) 파월을 시작으로 주월한국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 방공포병대대(호크유도탄부대)를 창설하고 백마부대 등 한국군을 파견한다.[3] (→한월 관계)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등을 통해 국가 기틀을 다질 자금을 마련했으나 6.3 한일협정 반대에 부딛친다. 이후 국토 종합 개발 계획 등을 실시하고 식량 증산 계획과 벼품종 개량 등을 시도하여 경제 부양을 시도한다.

     3선 개헌과 유신전야 (1967 ~ 1971)

1967년 윤보선 등을 근소한 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하여 제6대 대통령이 된다. 1967년 12월 농어촌개발공사를 창립하였고 1969년 2월 농업기계화 8개년 계획을 확정하고 그해 11월 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을 승인한다.[3] 1969년 3선 개헌안을 국민투표를 통해 통과시키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이기고 3선에 성공한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였고, 1970년 4월에는 새마을 운동을 제창, 시작하였으며 그해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였다. 같은해 8월 21일 관세청을 개청하였으며 1971년 10월 25일 내수용 생산업체에서도 수출을 의무화할 것을 지시하였다.[3] 1972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고 1월 27일 제3차 인력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하였다. 2월 9일에는 녹색혁명을 추진, 통일벼를 개발하였으며 쌀의 국내 자체생산 및 완전 자급자족은 1976년에 달성한다. 1972년 7월 4일 7. 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1972년 8월 3일 기업사채 동결 등 긴급 명령을 발표하였다.[3]

 제4공화국

    10월 유신 (1972 ~ 1973)

1972년 박정희 정권이 헌법을 개헌한 일인 10월 유신을 단행해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긴급 조치권, 국회의원 정수 1/3에 대한 실질적 임명권, 간선제 등 막강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6년 연임제의 제4공화국 헌법을 제정 통과시킨다. 긴급 조치 1호에서 9호를 발동하여 개헌 논의 일체를 금지하고, 반정부 세력에 대한 정치 활동, 언론 및 표현의 자유에 심대한 제한을 가하였다.[3] 1973년 1월 중화학공업정책 육성을 선언하였고 공업진흥청을 신설하였으며 3월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온산, 창원, 여수~광양, 군산~비인, 구미 등 5개 대단위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수립하였다. 1973년 중반 기능공 양성정책을 수립하고 1973년 10월~1974년 12월에는 이리 수출자유지역을 착공하였다.[3]

    새마을 운동

1973년부터 새마을운동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켰다. 유신 선포후인 1973년 1월 16일 박정희는 대통령령 6458호로 내무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4개의 과를 두었으며 3월 7일 대통령 비서실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했다. 이후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교육을 강화했다. 1973년 5월 31일 경기도 수원에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을 신설 건립하여, 이전까지 농협 대학에서 개설하여 운영하는 독농가연구원에서 실시해 오던 새마을 운동을 위한 농촌 지도자 교육과 양성 등을 맡게 하였다. 1972년 1490명, 1973년 4354명 으로 피교육자 수가 증가하였으며 그 이후로 매년 6천명 이상이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18] 1973년부터 지원금을 대폭 늘려 71년 41억원, 72년 33억원에서 격증하여 1973년 215억, 1974년 308억원, 1979년에는 4252억원까지 정부 예산 지원을 늘렸다. 또한 민간단체의 지원과 성금도 꾸준히 들어와 1972년 17억원에서 1979년 2032억원의 지원금이 들어왔다. 박정희가 만든 '새마을노래'는 방송매체를 통해 아침, 저녁에 방영되었고 국민운동화된 새마을 운동의 성공 사례는 일간신문에 소개되기도 하였다.[19] 1973년 9월 21일 경제 4단체는 새마을운동을 생산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공장에 도입하는 방안을 토의하였으며 11월 21일 제1차 새마을 지도자 대회가 열려,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킬 것을 결의하는 등의 노력이 지속되었다.[19]

    긴급조치 시대와 집권 말기 (1975 ~ 1978)

김대중 납치사건과 제 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경제 위기 등으로 유신 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는 높아만 갔다. 박정희는 이러한 움직임을 차단하고자, 1975년 인혁당 재건 사건 관련자(2007년 재심에서 무죄 확정)를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하여 8명을 대법원 확정 판결 이튿날 사형 집행하는 등 정권 반대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5월 13일에는 유신헌법에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였다.

한편, 경제정책의 성과의 성공으로 1978년 12월 10일 국민 1인당 GNP 1,117달러를 달성하였다.[3]

     자주국방, 안보 노력

박정희는 집권 초기부터 자주국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1962년 5월 5일 해양경찰을 발족하고 1968년 1월에는 기동타격대를 창설 1968년 4월 향토 예비군, 1975년 전투상비군부대를 창설하였다. 1965년 4월 3일 초음속 전투기를 도입하였으며, 동해안 등에 기지를 설치하였다. 1969년 1월 7개 시군의 고교생과 대학생에 군사훈련 실시를 시범적으로 정하였고, 71년 12월 전국에서 첫 민방공훈련을 실시하였다. 병기 개발에도 노력을 들였으며[3] 1975년 11월 함대함미사일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1977년 1월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음을 천명하였고 1978년 9월 26일 세계 7번째로 국산장거리 유도탄 등과 다연발로케트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3] 박정희는 핵개발 시도는 내외부적인 상황 때문에 좌절한 것으로 추정되나 이해당사자들이 생존해 있으므로 지금 현재로서는 파악이 어렵다.[20][21]

     말년

재무부·상공부 장관을 역임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은 그가 쓴 책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에서 만년의 박정희는 탈모현상으로 아침 샤워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빠졌고, 좌골신경통을 앓고 있어 통증이 심할때는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서류결재하였다고 한다. 또한 9대 대통령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임기 1년 전에 사퇴할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계자로서는 김종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22]

1978년 정권의 거수기인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제9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5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5개월 후 치러진 제10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집권 민주공화당이 야당인 신민당에 득표율에서 뒤지는 (다른 야당인 민주통일당까지 더하면 득표 격차는 8%에 이른다) 등 민심 이반의 조짐이 나타났다.[출처 필요] [22]

1979년 10월 YH 여공 신민당사 점거 농성 사건, 이에 항의하는 김영삼에 대해‘공작 정치’에 의한 신민당 당수 김영삼 제명사건, 부마 항쟁 등이 발생하였다. 또한 핵개발 등의 문제와 인권 문제 등으로 미국과 마찰을 빚었으며 인권 외교를 내세운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갈등 등으로 정권의 기반은 더욱 크게 흔들렸다. 10월 부마 항쟁이 발생했으며 부마 항쟁을 해병대를 동원해 진압한 직후인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 후 귀경하여,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가수 심수봉, 한양대생 신재순을 도우미로 불러 연회를 하던 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암살당하였다.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사망당시 박정희의 나이 만 62세였다.

약력

 사상

        사상, 종교적 편력

박정희는 최초에 민족주의적이었다는 제자들의 증언이 있으며, 만주군 장교로 활동하였고 광복 후에는 사회주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형 박상희의 죽음이라는 견해와 박상희의 죽음 이전에 자발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밝혀진 것은 없다. 광복 직후 남로당에서 활동하다 적발되어 일시적으로 직급박탈을 당하였다가 복귀하기도 하였다. 그 뒤 전향을 선언하였는데 진정한 전향인가 여부도 밝혀진 것은 없다. 1961년 5·16 군사정변미국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며 사상을 의심하기도 하였다. 제5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사상공세를 당하기도 했다.[출처 필요]

박정희는 소학교 당시 기독교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동급생이었던 한성도에 따르면 "박정희와 저는 처음에 유년 주일학교에 나왔다. 구미 보통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교회에도 나가게 되었다. 일요일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 하는 주일학교에 열심이었다. 소년들이 막 코흘리 개의 때를 벗을 무렵 성경책과 찬송가를 들고 한복차림으로 교회에 모여들던 시절이다. 우리가 제일 먼저 배운 것이 기도하는 법이었지요" 라고 하였다. 박정희는 무신론을 주장했던 사회주의 활동도 하였다.[출처 필요] 그러나 박정희가 종교적이거나 신앙적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박정희는 종교를 갖지 않았으나 불교신도인 부인 육영수 여사의 영향을 받아 친불교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24]

1972년 지폐 도안을 놓고 기독교 등 종교계와 갈등하기도 했다. 만원권 지폐가 처음 도안됐는데 한국은행에서는 만원의 주인공으로 석굴암의 불상(앞면), 뒷면이 불국사로 정하였고, 박정희의 친필 서명까지 하였다. 새로 발행된 만원은 그의 재가를 얻어 발행공고까지 냈다. 그러나 기독교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여론에서도 특정 종교를 두둔할 수 없다며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자 만원권의 주인공은 세종대왕으로 교체되었다.[25][26][27]

 평가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현재 다방면에서의 이해당사자들이 존재하므로 명확한 설정이 어렵다는 맹점이 있다.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은 “장사하는 사람을 제일 낮춰 본 사농공상의 시대에 상업국가론은 혁명이었다”며 “박 전 대통령은 농업국가로부터 상업국가, 즉 무역국가로의 대전환을 이뤄 대한민국을 흥융하게 했다”고 평가했다.[28] 조갑제는 “박정희는 자신의 선천적 조건인 가난과 작은 체구의 문제를 극복하고 38명의 급우들을 통솔하는 데 상당한 능력을 발휘한 것 같다.”라며 “박정희 급장의 통솔 방식이 대통령 박정희의 통치술로 발전한 것”이라는 평가를 내린다.[29]

김정렴의 증언에 의하면 경제적으로는 검소하였다고 한다. 넥타이, 만년필, 전기면도기 세 가지를 빼고는 모두 국산을 사용하였으며 국산 넥타이를 매면 마디가 잘풀려서 상공부에 넥타이에 대한 특별지시까지 했으나 풀리지 않게 하는 납처리 기술을 로열티를 지불하고 도입할 처지가 못되어 생전에 국산 넥타이를 마음껏 매보지 못했다고 한다.[30]

최상천은 “피도 눈물도 예의도 없는 냉혈동물의 망나니짓을 지도력이라고 치켜세우는 데는 말문이 막힌다. 사적이익을 위해 일본에 봉사한 친일파의 수준이 아니라 모든 생각과 의식이 철저히 일본화된 천황주의자 " 라고 하였으며[31][32], 진중권은 자신의 저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전반에 걸쳐 조갑제의 박정희 전기를 파시즘적인 소설이라고 비하했다. 노회찬은 박정희의 경제개발독재를 빗대어 사회주의정책이라 평가하기도했다.[33]

박정희는 사망하였지만, 당시 이해관계 당사자들이 현재 생존해 있는 시점에서 아직은 박정희의 공과나 치적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경제 개발과 민주주의 탄압

박정희는 통일의 길을 조국 근대화에 있고, 근대화의 길은 경제적 자립이며 자립은 통일의 첫 단계라고 보았다. 이후 근대화를 통해 개발독재의 정당성을 확보하여 낙후한 조국을 구제하겠다는 목표을 가지고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한다. 박정희는 재임 기간 중 민족 중흥의 기치 아래 경부고속국도 건설, 수출 증대, 소득 증대, 저축 장려, 식량 자급 자족 실현, 새마을 운동 등을 통한 인프라 구축으로 일제 침략기와 6.25를 거쳐 황폐화된 한국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과 조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평이 있다.

그러나 강준만, 진중권, 한홍구 등 진보적인 학자들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군사 정변으로 전복한 집권 과정,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탄압, 극심한 반대자 인권 탄압 등에 대해서 부정적·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현대, 금성, 삼성 등의 여러개 중소기업이 재벌과 대기업으로 성장하고 포항제철로 대변되는 중화학 공업이 중추 산업으로 등장했다.

1997년 일어난 외환 위기 IMF 구제금융사건 이후, 박정희의 경제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일었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 정책은 중소기업간 성장의 불균형을 야기했고, 박정희는 아시아 각국의 독재자들과 같이 일본러시아를 모방한 관료주의 경제정책으로 산업전체를 독점하는 개발독재 형식의 정실자본주의의 양상을 띄고있었다. 미국 경영자들은 주주가치를 창출하는데 매진하는동안 , 아시아 경영자들은 현대 군벌들의 비위를 맞춰줘야 했다. 그 결과 경영자들은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자회사 분사나 합병 파트너 모색 등 재빨리 대처할 자유나 탄력성을 갖지못하고, 대기업과의 정경 유착으로 인한 한국 재벌의 관치금융 , 통제금융 의 의존적 총체적 부실이 결국 한국 경제의 부실로 이어져 외환 위기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는 해석이 있다.[34]

그 외에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학자로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김수행이 있다. 그는 공저인 《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에서 경제학적 분석을 통해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높은 착취율에 기반한 것이며, 실제 국민생활의 개선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상지대학교 교수인 홍성태도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을 '토건국가'적인 정책이라고 비판하였으며, GNP 성장위주의 정책 속에서 "저임금-저곡가 체제", "자연을 마구잡이로 이용하고 파괴하는 착취체계"의 이중의 착취 위에 건설된 것으로 평가하였다. 아울러 개발을 위해 그의 독재가 필연적인 것도 아니었으며, 경제정책은 독재의 구실일 뿐이었다고 비판한다[35]

세계은행 이사회에 한국에 관한 기조연설자로 초청된 김정렴은 " 강력한 정부주도의 '수출지향적 공업화 경제정책'으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김정렴에 의하면 박정희는 조국의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꿈과 미래상을 비전으로 국민에게 제시하였고 '잘살아 보자'고 호소하며 국민의 단결을 고무하였으며, 박정희시대의 한국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고 마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미르달이 정의한 '경성국가'였다 "며 평가하며 "덩샤오핑은 한국을 최빈국에서 중진국 선두주자로 끌어올린 박 대통령 집권 18년간의 실적을 높이 평가했다" 덧붙였다.[36] 한국은 이 기간 동안 절대적 빈곤에서 탈출하여 경제성장을 이루기는 했으나 이러한 경제성장은 인권, 민주주의, 사회복지 등 다른 모든 사회적 발전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 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출처 필요]

또한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반체제 인사들과 민주화 운동가들을 탄압하였다. 집권초에는 국가보안법을 시행하여 반국가활동을 규제를 위해 반공주의를 공고히 한다는 명목으로 권력의 기반을 닦았고, 미국의 닉슨 대통령의 닉슨독트린정책으로 중국과의 관계개선, 주한미군의 부분적 철수및 동아시아에서 냉전기류의 해체경향의 영향을 받아, 북한과 특사를 통해 7`4 남북 공동 성명 을 발표하고, 남북간의 관계를 모색하고 경제적 현실을 고려하여 '선건설 후통일' 정책에서 평화통일 3원칙을 통해 북한을 실체를 인정하고 남북간의 대한 경직된관계에 개선하여 '선평화 후통일' 정책으로 바뀌어 현재까지도 통일정책의 기본원칙이 되고있다. 이를 통해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를 내세워 전환점을 이룩하였으나 그 직후 남한은 유신체제성립, 북한은 김일성 독재체제 강화로 이어졌다. 그후 유신헌법을 통해 조국평화적통일을 추진한다는 명목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헌법기관을 설립하였다.

        대일 외교

군사정부는 실패를 거듭해왔던 한일협정 타결에 역점을 두었고, 1961년 10월 20일 재개된 제6차 회담은 급속히 진전되었다. 당시 한일협정에 대해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투쟁" 내걸고 시위가 일어나면서 연이어 1964년 6월 3일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시내 곳곳에서는 학생 시위대와 경찰, 군인 사이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이후 ' 6.3 학생운동 ' 으로 불렸다. 이때 정부에선 비상계엄령을 발표후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언론검열, 집회금지, 영장 없이 체포 구금 등이 이루어졌다. 한편, 이 사건으로 한일회담을 추진해오던 공화당 의장 김종필 이 사임하였다.

1965년 일본과 채결한 한일협정의 내용 중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불리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이 적절했는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일각에선 이 협정에 대해 ‘굴욕 외교’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결렬되어 오랫동안 결론이 나지않던 한일 협정을 완전타결을 보았다. 그를 통해 받은 대일 청구권 자금은 후일 한국 경제를 도약시키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으나, 지금까지도 종군 위안부 및 일제에 의해 징병 혹은 징용당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적절치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청구권문제와 같이 어업문제 , 문화재반환문제도 한국측의 지나친 양보가 국내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다. 현재, 일본 측에서는 한일 협정을 통해 모든 보상을 마쳤다는 공식 입장을 표명 중이다. 이에 대해 종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현재까지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 파병

1964년부터 파견된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향후 한국경제 발전의 원동력에 가속화가 되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기간에 파병 국군장병이 해외근무 수당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총 2억3556만 달러였다. 이 중 82.8%에 달하는 1억9511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되었고,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기여되었다. 전쟁에 조달할 군수물자 납품과 용역사업 투입 등으로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전 특수(特需)를 톡톡히 누렸다. 국군의 파병 대가로 들어온 외화 송금에 힘입어 당시 내수산업과 수출이 성장하여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37] 전투병 파병 직전인 196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3달러에서 한국군 철수가 끝난 1974년엔 5배가 넘는 541달러로 국민 소득을 향상시켰다.[37] 베트남 파병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베트남 파병이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는 비판도 있다.[38]

        2000년대 이후의 평가

2000년대 들어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리고 있다. 반역자 및 기회주의자, 독재자, 지역주의의 씨앗을 뿌린 장본인이란 부정적인 평가와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한 대통령, 민족 중흥을 실현한 통치자 등의 긍정적인 평가가 병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견 차는 대한민국의 진보주의보수주의를 나누는 하나의 상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원한관계와 이해관계에 의한 상반된 평가가 상존하고 있으며 일부 언론에선 박정희의 구체적 친일 행적을 취재, 보도하여 박정희가 친일파인가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정치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대통령으로 꼽히기도 하였다.[39] 특히 IMF 사태 이후 박정희의 인기는 높아졌는데, 이를 '박정희 신드롬'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상지대 경제학과 교수 조석곤은 이러한 박정희 신드롬을 '박정희 신화'로 평가하며, 일종의 영웅사관이라고 비판한다.[40] 성공회대 조현연 교수도 "독재자 박정희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신화 속의 허구"라 비판하며, "청산해야 할 독재통치 18년"으로 평가한다.[41]

이들은 박정희 신드롬을 비판하면서, 박정희의 업적이라고 알려진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그들에 의하면,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성장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후퇴를 가져왔다. 또한, 박정희가 서민적이고 검소한 대통령이라는 주장 역시, 각종 비리 의혹사건, 3분 폭리사건, 장준하가 폭로한 3분 밀수사건, 전두환 정권 때 밝혀진 김종필의 200억대 부정축재 사건 등으로 볼 때 설득력이 없다고 한다. 이들은 박정희 신드롬이 "개발독재의 단맛을 독점해온 사회 곳곳의 수구적 보수세력과 특히 그들과 결탁된 조중동 보수언론"이 부추긴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박정희 신드롬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바 있는 강준만월간말의 투고글에서 IMF 사태 이후의 박정희 신드롬을 조선일보, 조갑제, 군사독재의 후신들 등에 의한 박정희 미화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박정희에 대한 해외의 긍정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김재홍 동아일보 논설위원의 《박정희의 유산》이라는 책을 인용하며, "(3선 개헌 직전인 1970년) 한국의 로비스트가 미국의 영향력 있는 대학 교수 겸 프리랜서에게 박정희의 얼굴을 타임지 표지사진으로 게재하게 주선해 주면 5만 달러를 제공하겠노라고 제의"하는 등 박정희에 대한 해외의 호의적인 반응의 원인을 진단하고 있다.[42]

박정희에 관련된 사항은 2008년 현재 정확한 규정이 어려우며 핵개발 등의 비화와 미국과의 갈등 등은 아직도 베일에 쌓여 있다.

 사후 영향력

박정희 사후 집권한 전두환은 박정희를 부정하였다. 박정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헌법에서 소위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하였다. 또한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로 엮어서 제거하고,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하였다.[43] 1987년 전두환의 신군부의 독재에 반대한 6월 항쟁이 일어난 후, 대통령 직선제가 다시 실시되었고, 하나회 계열이 아닌 공화당 출신 세력들도 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43]

전두환 시절에 몰락했던 공화당의 주요 세력들은 6월 항쟁 이후 김종필신민주공화당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으나 통일민주당김영삼민주당 출신 정치인들과의 불협화음으로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DJP연합정부가 세워지고 김종필이 정계은퇴한후 자유민주연합은 군소정당으로 있다가 2006년 한나라당과 통합하였다. 한편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며, 박정희의 5·16 군사 정변쿠데타가 아닌 혁명으로 평가하는 등, 박정희의 정치 이념도 계승하고 있다. 정치계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정당 외에는 뉴라이트 계열 정치운동단체들이 박정희 집권기를 일부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포럼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많은 현행 국사 교과서 대신, 박정희 정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주가 되는 자신들의 교과서로 바꿀 것을 주장하고 있다.[44]

또한 새로 창립된 민주공화당의 총재 허경영은 자신이 박정희의 비밀 정책보좌관이었다고 주장하며 '제2의 박정희'를 자칭하고 있다.(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 참조)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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