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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외성(江華 外城)
종목 사적 제452호(2003년 10월 25일 지정)
면적 255, 544.9m2
시대 고려시대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원(강화도 동해안 일대)
강화 외성(江華 外城)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원에 위치한 성곽이다.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가 2003년 10월 21일에 지정 해제되고, 2003년 10월 25일 사적 제452호로 승격되었다. 그러다가 2014년 4월 18일 강화 외성의 성곽과 진해루지(鎭海樓址)로 확인된 구역을 추가 지정하였다.
강화외성은 고려 제23대 고종이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후 고종 20년 (1233년)에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적북돈대로부터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축조된 성이다.
강화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읍성이다. 외성은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는데 몽고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고종 24년(1237)에 강화외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비상시에 국왕의 피난처인 도성(都城)의 외성(外城)으로 광해군 10년(1618)에 보수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숙종 때 병자호란기(1636)에 허물어진 외성을 돌을 이용하여 다시 쌓았고 돈대(墩臺)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영조때 강화유수 김시혁(金始爀)이 비가 오면 성의 흙이 흘러내려 나라에 건의하여 영조 19년(1743)에서 이듬해에 걸쳐 벽돌을 이용하여 다시 쌓았다고 한다.
2001년 동양고고학연구소에서 실시한 오두돈 주변의 전축성 구간에 대한 지표조사 결과에 의하면, 뻘층을 기초로 머리돌을 올리고 그 위에 대형석재로 석벽의 중심을 삼고 그 위에 머리돌을 올리고 다시 전돌을 여러 단 쌓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성은 높이 20척, 폭 5척이며, 6개의 문루(조해루·복파루·진해루·참경루·공조루·안해루)와 암문 6개소, 수문 17개소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강화외성은 고려 후기∼17세기 후반 도성의 구조와 축성기법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 성은 벽돌로 개축한 전축성(塼築城)이 오두돈 주변(남측)에 남아 있어 수원 화성(사적 제3호)과 더불어 전축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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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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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좌측에 보이는
김포의 문수산
문수산(文殊山)
경기 김포시 월곶면(月串面)에 있는 산.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북단에 위치한 산이다(고도:376m).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는 비아산(比兒山)으로 되어 있으며, 통진현 북쪽 6리 지점에 있고 진산(鎭山)에 해당한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문수산은 일명 비예산(imagefont晲山)이라 하였으며 통진부에서 북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져 있으며, 부평 안남산(安南山)에서 북쪽으로 줄기가 이어져 읍치의 주맥을 형성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산에 건축된 문수산성은 둘레가 15리에 달한다. 『팔도군현지도』에는 문수산성이 표기되어 있다. 김포시 내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조선 시대 숙종 때 축성한 문수산성(文殊山城)이 있으며,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이곳을 점령하였던 적이 있다. 산성 안에 문수사(文殊寺)가 있으며, 흥룡사(興龍寺)도 문수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화 갯벌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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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갯벌
우리나라 최대 규모 연안습지
유형 : 갯벌(Tidal Flat)
행정 구역 : 인천광역시 강화군 남단
GPS 좌표: 북위 : 37˚33´44˝~37˚38´25˝, 동경 : 126˚28´21˝~126˚35´06˝
목차
갯벌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갯벌의 구분 및 갯벌 생태계
갯벌은 자연의 콩팥
강화도 갯벌의 표층퇴적상
갯벌의 개발과 보존
강화도 갯벌은 강화도 남단 길상면·화도면 연안에 인접해서 발달한 갯벌을 가리킨다. 김포에서 48번 국도를 타고 강화도 방면으로 가면 356번 지방도로를 만난다. 이 지방도로 진입한 후, 초지대교를 건너 동막해수욕장 방향으로 가다보면 해안가를 따라 광활하게 펼쳐진 갯벌을 볼 수 있다.
강화도 남단 지역은 경기만 해역으로서 황해의 해수가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을 통하여 유출되는 담수에 의하여 희석되어지는 염하구환경이며, 갯벌의 발달 형태 또한 복잡하게 나타나고 있다.
강화도 갯벌은 347.4㎢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의 갯벌로 우리나라 서남해안 간석지의 11.4%, 경기도 간석지의 41.1%를 차지하고 있다(고철환, 2004). 최근 들어 갯벌의 경제적·생태적 가치의 중요성이 증대되면서 갯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졌고, 개발보다는 보존이 더 중요하다는 시각이 차츰 확산되고 있다.
갯벌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갯벌 또는 간석지(tidal flat)는 조류에 의하여 운반되는 점토·실트 등의 세립물질이 일반적으로 파랑의 작용을 적게 받아 잔잔한 해안에 퇴적됨으로서 생기는 평탄한 지형을 가리킨다. 갯벌은 만조시에는 침수되나 간조시에는 대기 중에 노출되는 것이 특색이다. 갯벌의 발달에는 조차가 심하고 거파의 영향이 적고 해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여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황해안은 이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어 세계적인 갯벌 발달 지역 중의 한 곳이다.
현재로부터 약 18,000년 B.P.(Before Present) 쯤에는 해수면이 현재보다 120~140m 정도 낮았었다. 그리고 대략 10,000년 B.P. 쯤부터 6,000년 B.P. 쯤에 이르는 사이에는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하였다. 해수면이 대략 현재의 위치에 도달한 것은 6,000년 B.P. 쯤이며, 그 이후에는 현 해수면 내외의 고도에서 미변동을 계속하여 온 것으로 알려졌다. 오늘날 갯벌이 형성되어 있는 대소의 만입지나 큰 강하구의 삼각강(estuary)은 모두 이때의 해수면 상승에 따른 침수에 의해 생긴 것이다.
갯벌이 형성되려면 후미나 내만(內灣)으로 어느 정도 폐쇄되어 해안을 침식하는 파랑의 작용이 약해야 하고 유입 하천에 의한 토사의 퇴적작용이 있어야 한다. 또 간조 때 노출되는 평평한 부분이 넓게 펼쳐지려면 조차가 커야 하며 모래나 펄이 쌓이기 위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갯벌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규모의 크고 작음은 있어도 반드시 나타난다. 따라서 하천은 갯벌이 형성되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유입 하천은 토사를 운반 할 뿐만 아니라 풍부한 영양염류나 기타 해산동물(海産動物)의 먹이가 되는 유기쇄설물(有機碎屑物)을 육상으로부터 간석지에 공급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갯벌은 큰 강과 연결되는 중조차 또는 대조차 해안의 하구역이나 내만, 석호(潟湖) 등의 반폐쇄적인 환경에 잘 발달한다.
우리나라 갯벌은 캐나다의 동부 해안, 미국의 동부 해안과 북해 연안, 아마존강과 더불어 세계 5대 갯벌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특히, 우리나라 서남해안은 조차가 크고 바다가 얕으며, 규모가 큰 강 들이 많이 유입되고, 해안선이 복잡하며, 섬들이 많아 갯벌 발달에 유리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갯벌의 구분 및 갯벌 생태계
우리는 흔히 갯벌이라면 황해안과 남해안에만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갯벌의 정의가 '밀물과 썰물의 사이에 대기에 드러나는 부분'을 말하므로 동해안에도 매우 좁지만 갯벌이 존재하며, 전 세계의 모든 연안환경에 갯벌은 다양한 넓이와 형태로 분포한다. 갯벌은 조차, 지형, 에너지/공급물질 및 퇴적물 분포에 따라 분류 할 수 있다.
퇴적상에 따른 분류를 보면, 먼저 퇴적물이 주로 평균 0.2~0.7㎜의 모래질이 90% 이상을 차지하는 사질(모래) 갯벌이 있다. 대표적인 지역으로는 백령도의 사곶해빈, 영광군 염산면 두우리 일대 갯벌, 안면도 바람아래 갯벌 등이다. 다음으로 모래질이 차지하는 비율이 10% 이하에 불과하나 반대로 펄 함량이 90% 이상에 달하는 점토질(펄) 갯벌이다. 주로 평균 입자의 지름이 0.031㎜ 정도인 강화도, 순천만, 벌교만 갯벌이 이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모래와 펄이 각각 90% 미만으로 섞여 있는 갯벌을 혼성 갯벌 또는 모래펄 갯벌이라 불리며, 인천 송도 및 천수만 주변 갯벌이 대표적이다.
갯벌은 만조선과 간조선을 기준으로 조상대 갯벌, 상·중·하부조간대, 조하대 갯벌로 구분한다. 퇴적물의 입자 크기는 조간대의 높이에 따라 차이가 나타나는데, 보통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갈수록 조립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갯벌은 자연의 콩팥
갯벌은 환경·생태학적 측면에서도 매우 가치가 높은 지역이다. 갯벌은 육상생태계와 해양생태계를 연결하는 점이대 지역으로 두 생태계의 완충기능을 가지고 있다. 갯벌의 기능 중 중요한 것은 자연정화 활동으로 흔히 갯벌을 '자연의 콩팥'이라고 부른다. 갯벌에 서식하는 많은 생물들은 염생식물과 함께 하천에서 바다로 유입된 육상의 오염 물질을 분해하는 정화조와 같은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갯벌이 사라지면 우선 해안 양식장 어패류가 피해를 입고, 장기적으로는 해양자체가 오염되는 피해를 입는다. 황해안 지역에서 적조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것은 갯벌의 정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규조와 같은 식물성 플랑크톤이 광합성으로 배출하는 산소량은 지구에서 만들어지는 산소량의 약 70%라고 한다.
이렇게 갯벌은 뛰어난 자정 능력을 가진 생태계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곳이다. 이런 갯벌에 지속적으로 인위적인 힘을 가한다면 해양 생태계는 결국 파괴라는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화도 갯벌의 표층퇴적상
강화도 남쪽해안과 옹진군 장봉도, 지도 및 신도의 북쪽 해안에 걸쳐있는 강화도 갯벌은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갯벌 중의 하나이다. 즉, 강화도 갯벌은 규모면에서 북한지역의 갯벌과 연결 될 뿐만 아니라, 강화도 북서쪽 갯벌 모두가 북한에서는 규모가 큰 갯벌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강화도 지역의 갯벌은 동서남북 어디에서나 볼 수 있어서 갯벌의 섬이라고 할 수 있다. 북으로는 매봉산 끝자락인 해주항에서 시작하여 연평도와 강화도, 교동도를 연결하는 해안이 모두 갯벌이며, 남으로는 장봉도, 영종도, 용유도, 무의도로 연결되어 있다. 강화도 갯벌에는 한강에서 유입되는 각종 오염물질들이 유입되며, 이곳에서 분해되고 그 오염농도가 줄어 든 후 먼 바다로 퍼져 나간다. 강화도 갯벌은 자연정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장소이다(고철환, 2004).
강화도 지역의 조석은 전형적인 반일주조로 최대조차가 약 9m에 이른다. 이곳에는 한강과 임진강 등으로부터 많은 양의 육성 퇴적물이 유입되어 하구형 갯벌을 이루면서도 삼각주 환경과 전이적인 특성을 보이고 있다.
강화도 갯벌은 동서로는 최대 10㎞, 남북으로는 최대 5㎞의 폭을 가지고 있다. 동막리의 동쪽에 분포하는 점토질 갯벌에서는 조류세곡이 잘 발달한다. 경사도는 동막리 앞 갯벌에서 1/462, 여차리 앞 갯벌에서 1/1,059, 장화리 앞 갯벌에서 1/618과 장봉도 북단에 형성된 갯벌에서 1/606로 상대적으로 높은 편으로, 여차리 앞 갯벌이 가장 넓고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해양수산부, 2005).
일반적으로 갯벌의 표층퇴적물의 분포는 갯벌환경에 서식하는 각종 어패류의 서식조건을 결정하는 중요한 지표이다. 강화도 갯벌은 점토질 갯벌이 우세하며, 특히 강화도 남단에 넓게 분포한다. 반면에 사질갯벌은 강화도 서부의 수로와 조하대에서 우세하다.
해양수산부(2005)에서 이 지역의 퇴적상을 조사한(2003년) 결과에 따르면, 1997년 보다 혼성 갯벌은 동검도 동쪽으로 확장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단기 퇴적율 측정 결과, 여름과 가을철에 동쪽인 흥왕리 갯벌은 퇴적되었고, 여차리와 장화리 갯벌은 침식되었다. 주상 시료에 대한 퇴적학적 분석결과, 사교층리 모래, 괴상 점이층리 사질 실트, 실트-점토 호상엽층리 실트, 생물교란 실트 등 네 개의 퇴적상이 인지되었다. 이들 퇴적상의 분포는 조수로 인근 지역이 전반적으로 퇴적률이 높으며, 특히 동검도 동쪽 조간대에서 최근 급격한 퇴적작용이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강화도의 현재 해안선은 고려시대 이후부터 간척사업에 의하여 거의 대부분 직선화되었다. 1910년과 1997년 지형도를 비교하면, 일제시대 이후 간척사업으로 강화도 남부지역의 염생습지는 거의 사라졌고, 간척사업과 한강담수의 유입에 따른 퇴적과 침식현상으로 석모수로 방향의 해안선은 바다 방향으로, 염하수로 방향은 오히려 강화도 방향으로 상당히 이동하였다.
최근 강화도 남쪽의 인천국제공항과 해안 구조물 건설은 강화도 주변의 해안선을 변화시켜 조류의 흐름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강화도 주변의 주기적인 퇴적물 순환에 변화가 일어나 갯벌 퇴적물 특성과 생태계의 지속적인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갯벌의 개발과 보존
강화도 갯벌은 수도권과 근접하여 과거부터 개발 압력이 높아 개발과 보존의 논리가 항상 대립하였던 곳이다. 인천국제공항과 같은 대규모 건설 사업은 강화도 갯벌의 퇴적환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근 갯벌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정부는 2000년에 강화도 남단과 석모도, 볼음도 등 주변 3억 7,066만 ㎡의 갯벌을 보호·관리토록 하였으며, 이곳을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는 세계적인 희귀종인 저어새를 천연기념물 제419호로 지정 하였고, 그 후 2004년 8월에는 인천의 영종도~무의~영흥도 주변 갯벌 156㎢를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갯벌 보호정책은 갯벌을 소중한 자연유산으로 지키려는 발걸음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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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갯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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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갯벌과
사진 중앙에 보이는 김포의 문수산
[오두돈대~광성보]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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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갯벌과
사진 중앙에 보이는 김포의 문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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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운 의교비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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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운 의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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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 어재연 장군 동상
어재연(魚在淵)
시호 : 충장(忠壯)
출생 – 사망 : 1823년(순조 23) ~ 1871년(고종 8)
대표관직(경력) : 조선후기 공충도병마절도사, 회령부사 등을 역임. 병조판서지삼군부사(兵曹判書知三軍府事)에 추증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성우(性于). 어용인(魚用仁)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무과에 급제, 1864년(고종 1) 장단부사(長湍府使), 1866년 공충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66년 프랑스 로즈(Roze,P.G.)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을 때(병인양요)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廣城鎭)을 수비하였다.
이어 회령부사가 되어 북쪽 변경지방의 비적을 토벌, 치안을 확보하였다. 또한 이 때 장시(場市)를 개설하는 등 변경 무역을 활성화하였다.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의 강화도 내침으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6월 1일 손돌목(孫乭項) 포격사건이 발생해, 한미간에 최초의 군사충돌이 일어났다. 이를 보고하자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되어 광성보(廣城堡)로 급파되어 6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보에 부임, 미군과 대치하였다.
6월 10일 미군은 강화도상륙작전을 전개, 초지진(草芝鎭)을 점거하였다. 6월 11일 덕진진(德津鎭)을 함락한 미군은, 마지막으로 광성보공략에 나섰다. 이 때 어재연은 광성보에 수자기(帥字旗)를 게양하고 침공해 오는 미군을 격퇴할 태세를 취하였다.
미군은 광성보에 대한 수륙양면작전을 개시해서, 해상에서는 함포사격, 지상에서는 야포사격으로 초토화작전을 전개하였다. 드디어 광성보로 돌입한 미군과 어재연군 사이에는 육박전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어재연은 임전무퇴의 결의로 칼을 손에 잡고 적을 무찔렀고, 대포알 10여 개를 양손에 쥐고 적군에 던져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충장공 어재연 장군 동상
주위에 있는
어재연 장군
전투 조형물 부조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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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 어재연 장군 동상
주위에 있는
신미양요 때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부조 작품
광성보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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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
소재지 :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23-1
한국NGO신문 기사입력일 : 2023.01.01.
기자명 : 정진해 문화재전문 대기자
덕진진에서 강화해협의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약 2km의 거리에 자리하는 광성보에는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위치한다. 광성보가 처음 이곳에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는 고려시대 때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강도시기(1232~1270년)에 지금의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대의 해안에 흙과 돌을 이용하여 축성했다.
조선시대에 오면서 강화가 국가의 보장지로 주목받으면서 관방시설이 수차에 걸쳐 정비되었다. 1618년(광해군 10)에 외성이 보수 되었고, 1658년(효종 9년)에 광성보를 만들게 되었다. 다시 1691년(숙종 17)에 허물어진 상태의 외성을 보수하면서 여장까지 갖춘 외성이 완성(1692년)에 완성되면서 광성보 소속 광성돈대, 오두돈대, 용두돈대, 화도돈대 등이 완성됐다.
광성보는 신미양요(1871년) 때 백병전의 현장이다. 당시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했다. 이때 이미 해병 450명으로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자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병사가 열악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다. 포탄이 부족하면 칼과 창으로 싸웠고 돌과 주먹으로 싸웠으나 한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백병전을 벌였지만, 지휘관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 군관과 49인의 장사, 200여 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이때 파괴되어 폐허가 되어 있던 것을 1977년 옛 모습을 복원하게 되었다.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 보수 정화됐다.
안해루는 영조 21년에 광성보를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했는데 이를 안해루(按海樓)라 명명했다. 광성보는 해안에 세운 소규모의 성곽으로, 안해루는 성의 안과 밖을 오가는 문이다. 홍예문을 안과 밖이 같은 모양이며 2단의 홍예 기석을 쌓고 그 위에 홍예석과 선단석을 연결함으로써 문이 완성되고 홍예문 위에는 여장을 설치하고 안쪽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누각을 두었다. 성문의 안쪽 좌우에는 누각을 오르내리는 계단을 두었고 북쪽으로는 성벽이 광성돈대와 연결되어 있다. 누각의 좌우에는 각각 협문을 두었다.
안해루의 북쪽에는 광성돈대가 자리한다. 반원형의 돈대로 서벽은 직선이고, 동벽은 볼록한 반원형으로, 마치 다리미 바닥모양으로 둘레가 142m이다. 광성보 전투에서 활약을 보였지만, 신무기로 무장한 미국 해군을 맞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미군은 9인치, 8인치 등 85문의 대포를 쏘았으나 조선군은 정조준도 어려운 대포와 소포로 적과 마주했다. 홍이포는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후 포 뒤쪽 구멍에서 점화해 사격하는 포구장전식 화포이다. 사정거리 700m정도, 포알은 화약이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지만, 포알은 폭발하지 않았다. 소포는 불량기라 하여 프랑스군이 쓰던 것으로, 사정거리 300m로 포알은 대포와 같다. 미군의 전쟁사에 ‘48시간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는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 군대는 어재연 장군을 포함해 430여 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광성보와 돈대들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1977년 전적비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광성돈대가 복원되고 포좌 4개소와 포 3문을 복원 설치했다.
안해루에서 손돌목돈대로 가는 길에는 뿌리를 드러낸 나무들이 옛 강화외성의 흔적을 잡고 있고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는 순국한 용사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비로, 비문 뒷면에는 한글로 신비양요가 일어났던 당시 우리 수비군의 활약상을 기록하여 놓았다. 쌍충비각에는 신미양요 때 중군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의 순절을 기념하는 비와 함께 당시 순국한 장병들의 충절을 기리는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가 세워져 있다. 어재연, 어재순 형제를 기린 비문은 ‘凜乎忠勇(름호충용) 日月光輝(일월광휘) 兄弟賓從(형제빈종) 視死如歸(시사여귀) '늠름한 충성과 용맹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 형제가 서로 뒤따라서 죽음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이 하였네.' 兄死於國(형사어국) 弟死於兄(제사어형) 一門忠友(일문충우) 百世風聲(백세풍성) '형은 나라 위해 죽고 아우는 형을 위해 죽으니, 한 가문의 충성과 우애, 오랜 세대를 두고 이를 날리리라.'
<광성파수순절비>에는 본영 천총(千摠) 김현경과 본진 별장(別將) 박치성의 추모 시문이 있고, 뒷면에는 전사한 병사 49명의 명단이 있는데, 마지막 구절에 '半百武士(반백무사) 一心殉國(일심순국) 危忠卓節(위충탁절) 千秋不泐(천추불륵) '반백의 무사가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높은 충성 높은 지조와 절개를 긴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으리.' 나라를 위해 몸바친 순국의 의미를 새겼다. 쌍충비 앞에는 순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라는 7기의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신미양요 때 목숨을 잃은 무명용사들의 신원을 알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묻은 묘이다.
손돌목 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쌓은 48개 돈대 중 하나로 신미양요 때 미군과 치열한 전투 벌였던 격전지로, 광성보에서 가장 높은 구릉 정상부에 둥근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와 포좌 3개가 있었지만,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이때 격렬한 전투로 인해 모두 파괴되었던 돈대를 1976~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복원했다. 일명 손석항(孫石項)돈대로도 불리며 남북 간 지름이 30m, 동서 간은 34m로 평면 원형에 가까운 돈대로, 둘레는 108m, 돈대 넓이는 778㎡에 달한다.
손돌목 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용두돈대가 있으며, 그 앞의 염하(강화해협)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른다. 손돌목의 손돌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피난 가던 고종 임금을 배에 태웠던 뱃사공의 이름에서 따왔다. 배에 오른 고종이 이곳을 지날 때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손돌 뱃사공이 자신을 죽이려고 배를 이곳으로 몰았다고 의심한 나머지 손돌을 처형했다. 손돌은 죽기 전 임금이 건너갈 수 있도록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반드시 뱃길이 트인다"고 말한 후 죽음을 맞았다. 정말 바가지를 따라가니 뱃길이 열리고 고종은 무사히 강화 땅에 오를 수 있었다. 비로소 자신이 오해한 것을 안 고종은 손돌뱃사공을 후하게 장사지내 주도록 했다. 염하 건너편 동남쪽에 덕포진이 있는데, 덕포진 언덕 위에 손돌의 묘가 있어 늘 염하의 물살을 지켜보고 있다.
손돌목돈대 아래에는 용의 머리처럼 염하강에 불쑥 나와 있는 용두돈대가 자리한다. 길게 바다로 향해 굽어진 길이 용의 머리 같아 붙인 이름으로 이곳은 염하와 바로 맞대고 있는 천혜의 요새이자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며, 신미양요 때 미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른 격전지이기도 하다. 용두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되어 있으며 강화 54돈대 중 가장 마지막으로 합류한 돈대이다. 광성보 내 강화외성의 부속시설이었던 해안가의 용도를 돈대로 명명함으로써 돈대 대열에 올랐다.
용두돈대에는 포좌와 출입문이 없다. 강화도의 돈대 중 바다 쪽으로 가장 돌출된 암반 위에 지어진 돈대는 암벽 상단 모양에 따라 축성하여 돈대 앞머리는 부채꼴을 하고 있다. 또한 단층 구조를 하고 있으며, 긴 용도를 갖고 있다. 용도 양편으로 총안이 뚫린 여장이 설치되어 있다.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돈대 중앙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쓰인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비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손돌목돈대 아래 해안에는 12좌의 광성포대가 있다. 이 포대는 고종 11년 용진진, 광성진, 덕진진, 초진지에 포대를 설치할 때 함께 만들어진 포대이다. 광성포대는 손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되었는데 각각 9좌, 4좌, 3좌의 포좌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 중 가장 규모가 큰 중앙포대는 길이 80m, 포좌의 크기 약 6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외세에 문호를 개방함에 따라 파괴되었던 것을 2004년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되었다.]
[덕진진에서 강화해협의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약 2km의 거리에 자리하는 광성보에는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위치한다. 광성보가 처음 이곳에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는 고려시대 때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강도시기(1232~1270년)에 지금의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대의 해안에 흙과 돌을 이용하여 축성했다.
조선시대에 오면서 강화가 국가의 보장지로 주목받으면서 관방시설이 수차에 걸쳐 정비되었다. 1618년(광해군 10)에 외성이 보수 되었고, 1658년(효종 9년)에 광성보를 만들게 되었다. 다시 1691년(숙종 17)에 허물어진 상태의 외성을 보수하면서 여장까지 갖춘 외성이 완성(1692년)에 완성되면서 광성보 소속 광성돈대, 오두돈대, 용두돈대, 화도돈대 등이 완성됐다.
광성보는 신미양요(1871년) 때 백병전의 현장이다. 당시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했다. 이때 이미 해병 450명으로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자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병사가 열악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다. 포탄이 부족하면 칼과 창으로 싸웠고 돌과 주먹으로 싸웠으나 한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백병전을 벌였지만, 지휘관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 군관과 49인의 장사, 200여 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이때 파괴되어 폐허가 되어 있던 것을 1977년 옛 모습을 복원하게 되었다.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이 보수 정화됐다.]
광성보에 관한
안내도
광성보의 성문인
안해루(按海樓)
광성보에 관한
안내문
광성보의
광성돈대에 관한
안내문
광성보의
광성돈대
광성돈대의
내부 모습
광성보의 성문인
안해루(按海樓)
광성보에 있는
쌍충비각
쌍충비각 옆에 있는
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 추모비
쌍충비 비문 해설
쌍충비에 관한
안내문
[쌍충비~손돌목 돈대] 구간
탐방로 도중의
신미 순의총에 관한
안내문
[쌍충비~손돌목 돈대] 구간
탐방로 도중의
신미 순의총
[신미양요 때 순국한
무명용사들의 묘이다.]
손돌목 돈대에 관한
안내문
광성보의 3개의 돈대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손돌목 돈대
손돌목 돈대에 관한
안내문
조선 숙종 5년(1679)에 쌓은
48개 돈대 중 하나로
신미양요 때
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격전지였던
손돌목 돈대
손돌목 돈대에서 바라본
염하(강화해협)
출입구에서 바라본
손돌목 돈대
손돌목 돈대 옆에서 바라본
염하(강화해협)
[손돌목 돈대~용두돈대] 구간
소나무 숲길
해안 절벽에 세워진
용두돈대에 관한
안내문
용두돈대
용의 머리처럼
염하(강화해협) 쪽으로
불쑥 나와 있는
용두돈대
용두돈대로 가는 길
용두돈대에 있는
대포
용두돈대에서 바라본
염하(강화해협)
용두돈대에서
이성수
막다른 길에 위치한
용두돈대
[용두돈대~쌍충비각]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염하(강화해협)
[용두돈대~쌍충비각] 구간
탐방로에서 뒤돌아본
용두돈대
[용두돈대~쌍충비각]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손돌목 돈대
[용두돈대~쌍충비각]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손돌목 돈대
다시 돌아온
쌍충비각
[쌍충비각~안해루] 구간
소나무 숲길
강화대교와 초지대교의
사이에 있는
보와 진과 돈대에 관한
안내문
광성보 근방에 있는
어재연 장군 충장사
[강화군은 신미양요에서 순국한 충장공 어재연 장군과 무명용사 351명의 위패를 모시는 ‘충장사’를 2022년3월31일 준공했다.
‘충장사’는 불은면 덕성리 47-3번지(광성보 일원) 1770㎡ 부지에 사업비 15억원을 투입해, 사당, 재실 등을 갖춘 연면적 81㎡ 규모의 전통 한옥 건축물로 건립됐다.
‘충장사’ 건립으로 어재연 장군과 무명용사의 위패를 사당에 안정적으로 모시고 기상여건에 관계없이 추모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어제연 장군과 무명용사를 기리는 ‘광성제’ 제향은 음력 4월 24일에 광성보 쌍충비각 앞에서 봉행해왔으나, 2002년부터는 충장사에서 개최된다.
어재연 장군은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선봉장이 돼 광성보를 '수(帥)'자기를 높게 걸고, 미군에 대항해 결사항전한 가운데 350여 조선군이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미군의 우세한 군사력에 밀려 광성보는 끝내 함락됐다.
미국 공사 로우의 보고서에는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장렬하게 싸우면서 아무런 두려움없이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가 전사했다.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고 기록돼 있다.]
신미양요에서 순국한
충장공 어재연 장군과
무명용사 351명의
위패를 모시는
어재연 장군 충장사
2023년12월03일(일요일) 강화 나들길 제2코스(호국돈대 길) 탐방기 탐방지 : 강화 나들길 제2코스(호국돈대 길) ['강화나들길'은 심도기행에서 출발했다. 2005년 '강화역사문화연구소'에서는 화남 고재형 선비의 '심도기행'을 강독하는 모임을 시작했다. 그리고 선비가 나귀를 타고 다녔던 길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강화나들길을 있게 한 시초였다.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1846-1916)은 과거에 급제는 하였지만, 벼슬길에 나서지는 않은 선비였다. 그는 당시 강화군의 17개면 100여 마을을 나귀를 타고 다니면서 두루 다 돌아보고 그 감상을 256편의 시와 산문으로 남겼다. 자신이 사는 두두미마을을 시작으로 해서 노정(路程)의 순서대로 글을 썼으니 '심도기행(沁都記行)'이 바로 그것이다. 심도(沁都)는 강화의 옛 지명이다.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로 온 고려 무신정권은 39년 동안 난리를 피해 강화에서 살았다. 그때 강화의 인구는 삼십만 명이 넘었고 개경의 궁궐을 본떠서 강화에도 궁궐을 지었다. 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았으며 부처님의 힘으로 적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 조판도 시작했다. 심도의 '도(都)'는 39년간 한 나라의 도읍이었음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강화도 사람들은 강화가 한때 나라의 수도였음을 상기하며 지금도 강화를 강도(江都)라고 부르기도 하며 강화가 심도였음을 잊지 않는다. 강화도는 오래전부터 나라를 지켜낸 소중한 터전이자 외국의 문화와 물자가 들고 나던 관문이었다. 그만큼 외국과의 교류 및 충돌이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이다. 특히, 광성보는 1871년 4월 미국이 통상을 요구하며 함대를 이끌고 침공할 당시,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렇듯 강화나들길 2코스에는 항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갑곶돈대, 광성보 등 진, 보, 돈대가 다른 코스에 비해 유독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나들길 명칭도 ‘호국돈대길’이다.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길이지만 풍경만은 전국의 여느 코스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강화나들길 2코스는 갑곶돈대에서부터 초지진까지 총 17km의 둑길로 6시간 정도가 소요되지만 유적지마다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와 시원한 바다풍경 그리고 고즈넉한 숲길을 걷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다. 여기에 계절별로 다르게 피어 있는 들꽃을 보는 재미 또한 강화나들길 2코스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다.] 탐방코스: [강화도 갑곶리 현대아파트 버스 정류장~(1.1km)~갑곶순교성지~(0.3km)~강화 전쟁박물관~(0.3km)~갑곶돈대~(3.3km)~용진진~(1.7km)~용당돈대~(1.4km)~화도돈대~(1.0km)~오두돈대~(0.2km)~강화전성(강화외성)~(2.9km)~광성보(광성돈대&손돌목돈대~용두돈대)~(0.6km)~어재연 장군 충장사~(2.3km)~덕진진~(2.7km)~초지항~(0.7km)~초지진~(0.9km)~초지대교 버스 정류장] (약 19.4km) 탐방일 : 2023년 12월 03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강화군 강화읍 : 최저기온 영하 5도C, 최고기온 3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5시간20분 소요) 07:31~07:51 구산역에서 6호선 지하철을 타고 합정역으로 가서 합정역 6번 출구로 나와 합정역 정류장까지 도보로 이동 07:51~07:55 합정역 버스 정류장에서 3000번 버스 승차 대기 07:55~09:19 3000번 버스를 타고 합정역 버스 정류장을 출발하여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있는 현대아파트 정류장으로 이동 [1시간 24분 소요, 32개 정류장 이동] 09:19~09:33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있는 현대아파트 정류장에서 탐방 출발하여 인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1366번길 35 번지에 있는 갑곶순교성지로 이동 [갑곶순교성지(甲串殉敎聖地)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있는 천주교도의 순교성지이다.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 삼아 1871년 군함을 앞세우고 강화도 해역을 침범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난 후 대원군은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다. 미국 군함이 물러간 후 고종은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교서를 내리게 되는데 이때 미국 함대에 왕래했던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제일 먼저 잡혀 갑곶진두(갑곶나루터)에서 목이 잘려 효수되었다. 천주교 인천교구는 문헌상에 나와 있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그 터를 매입한 후 2000년에 순교성지로 조성하였고, 2001년 9월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한 박순집의 묘를 이장하였다. 박순집은 참수 희생자는 아니지만 목숨을 걸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안장하고, 순교자의 행적을 증언하였으며 성직자들을 보호한 인물이다. 갑곶순교성지는 순교자 묘역과 박순집의 묘, 성당,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09:33~09:44 갑곶순교성지를 탐방 09:44~09:47 인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1366번길 18 번지에 있는 강화 전쟁박물관으로 이동 [강화 전쟁박물관은 강화에서 일어난 전쟁과 관련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강화도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항쟁의 역사가 많은 곳이다.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강화에서 일어난 각종 전쟁 유물 120점을 전시하고 있다. 총 4개의 주제로 구성된 전시관에서 제1전시실은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주제관으로, 돌화살촉, 고리자루칼 등을 전시하고 있고, 제2전시실은 고려시대의 철제은입사투구, 철투구, 철도자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제3전시실에서는 신미양요 때 어재연 장군이 광성보에 걸고 싸웠던 깃발인 수자기와 면제 갑옷 등을 볼 수 있다. 제4전시실에는 조선시대 주력 화포인 불랑기포, 항일 의병들이 사용한 화승총 등 근현대 유물이 전시돼 있다. 이 밖에도 항일 의병을 체험하는 코너와 포토존도 있다.] 09:47~09:51 강화 전쟁박물관을 관람 09:51~09:53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22 번지에 있는 갑곶돈대(甲串墩臺)로 이동 [갑곶돈대(甲串墩臺)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 1366번길 18 좌강돈대에서 북쪽으로 염하 해변을 따라 약 1.5km 거리에 강화도의 관문인 강화대교와 인접한 곳에 갑곶돈대가 있다. 이곳을 ‘갑곶’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 (甲比古次)라 불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고려 고종 19년)부터 1270년(고려 원종 11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돈대 주위가 113보(步)였고, 성곽에서 몸을 숨기기 위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인 여장(치첩)은 40개였다. 포좌가 있는 본래의 갑곶돈대는 옛 강화대교 입구의 북쪽 언덕에 있었으며, 지금 사적으로 지정된 갑곶돈대는 제물진과 강화 외성의 일부인 치성이다. 갑곶돈대는 조선 인조 22년(1644)에 설치된 제물진(갑곶진)에 소속된 돈대로 숙종 5년(1679년)에 48개의 돈대를 축조할 당시 갑곶나루에 만들었는데, 이때는 ‘갑구지돈대’라고 불렀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프랑스의 극동 함대가 6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鼎足山城)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梁憲洙)가 이끈 부대에 패해 물러났다. 패한 뒤 약탈한 수많은 문화재를 갖고 돌아갔다.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혹독한 박해가 시작됐고 갑곶성지가 보이는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 1875년(고종 12년) 갑곶돈에 갑곶포대가 설치됐다. 이때 갑곶돈대, 망해돈대, 제승돈대, 염주돈대 등 세 포대와 함께 제물진(濟物鎭)의 관할에 속했다. 1876년에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가 6척의 함선을 이끌고 와 이곳으로 상륙한 뒤 운요호 사건의 책임을 물어 강압적으로 강화도 연무당(鍊武堂)에서 조선의 접견대관 신헌(申櫶)과 강화도 조약(한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그 뒤 갑곶돈은 허물어져 일부만 남았던 것을 1977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09:53~09:59 갑곶돈대(甲串墩臺)를 탐방 09:59~10:38 인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216 번지에 있는 용진진(龍津鎭)으로 이동 [용진진(龍津鎭)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진(鎭).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215번지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군사적 요새로 조선시대인 1656년(효종 7)에 축조되었다. 가리돈대(加里墩臺)·좌강돈대(左岡墩臺)·용당돈대(龍堂墩臺) 등 3개의 돈대를 관할하였으며 돈군과 군보급품을 관리하였다. 용진진은 본래 병마만호(兵馬萬戶)의 관리 아래 있었고 군관 24명, 사병 59명, 진군 18명 등 모두 101명의 병력이 주둔하였으며 포를 놓는 자리인 포좌 4문, 총을 놓는 자리인 총좌 26개소의 시설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석축 대부분이 없어지고 홍예 2문만이 남아 있었던 것을 1999년에 문루를 복원하였다. 왼쪽 홍예의 높이는 2.57m, 폭 4.15m, 두께 60∼61cm이고, 오른쪽 홍예의 높이는 2.14m, 폭 4.8m, 두께 50∼60cm의 규모이며 석재는 대리석이다.] [좌강돈대(左岡墩臺) : 용진진(龍津鎭)에서 성벽을 따라 연결된 돈대 용진진의 홍예문은 북서쪽의 좌강돈대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곳을 용진나루, 용담포 등으로 불렀다. 용진진(인천시 기념물)은 조선 효종 7년(1656)에 축조된 진으로 군인이 머물러 있던 무장 성곽지역이며, 육군인 병마만호의 관리하에 있었다. 만호는 조선시대 무관 관직으로 지방 군영의 장수로 품계는 종4품이다. 이곳의 진에는 각궁, 교자궁, 목궁 등의 무기와 조총, 불랑기 등 각종 중화기로 무장한 군관 24명, 사병 59명, 진군 18명 등 101명의 병력이 주둔했었다. 이뿐만 아니라 선박 3척, 토졸의 위답이 20섬지기, 군향미 174섬, 조가 25섬, 장이 8점을 보유하였다. 시설로는 포좌 4문, 총좌 28개소가 있었으나 신미양요와 병인양요를 거치면서 석축 부분이 없어지고 홍예문만 남아 있던 것을 1993년에 문루와 연결된 좌강돈대가 복원되었다. 홍예의 높이는 2.57m, 폭은 4.15m, 두께는 60cm~61cm, 우측 홍예의 높이는 2.14m, 폭은 4.80m, 두께는 50~60cm의 규모이며 석재는 대리석이다. 복원된 용진진의 홍예문 전면에는 지대석 위에 2단의 홍예기석을 놓고 그 위에 홍예돌을 올렸다. 선단석으로 홍예를 마감하고 무사석을 전면으로 쌓았다. 염하 쪽으로 성을 복원하지 않고 대각선으로 마감하였고 서쪽 편으로는 좌강돈대와 연결한 성을 9단을 올리고 미석으로 마감했다. 홍예문 위 2단 높여 미석을 두고 좌우에 누조를 마련했다. 미석 위에는 총안 1구만 낸 여장을 8개를 설치하고 홍예문 안쪽 좌우로 누각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을 두었다. 참경루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두 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을, 각 칸에는 정면과 후면에는 판문을 달았고 좌우의 측면에는 판문을 달았다. 좌강돈대는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48개 돈대 중 하나이다. 염하에 접한 돈대 중에 비교적 낮은 구릉 위에 축조되었다. 가까이에 용진진의 홍예문이 있어 성벽과 연결되어 축조하였다. 돈대의 형태는 원형이며 포좌는 염하 쪽으로 4좌가 있으며, 출입문은 서쪽에 배치된 평거식이다. 돈대의 축조는 화강암을 사각형으로 다듬어 8단으로 쌓고 그 위에 사각의 돌로 2단의 미석을 두고 여장은 복원하지 않는 상태이다. 기록에 의하면 여장은 37개, 둘레는 96보라 하였다. 또한 돈대 축조에 사용되었던 석재는 매음도(지금 석모도)의 해명산에서 박석을 캐서 강화 해안의 축조 현장까지 운반하여 축조하였다. 돈대의 지름은 32m이고, 돈대 내에는 창고와 주둔 병사의 숙소가 있었는데, 복원되지 않고 전체를 잔디로 깔았다. 돈대의 북쪽에는 수로가 있는데, 당시 이 수로를 따라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되지 않았나 추정된다.] 10:38~10:46 강화 5진 가운데 하나인 용진진(龍津鎭)과 좌강돈대(左岡墩臺)를 탐방 10:46~10:59 인천 강화군 선원면 연리 산 4-11 번지에 있는 용당돈대(龍堂墩臺)로 이동 [화도돈대에서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1.2km(1,390보) 거리인 선원면 연리 1번지에는 용당돈대(龍堂墩臺)가 있다. 용진마을 남쪽의 소구산에서 염하로 이어지는 능선의 동쪽 끝자락 정상의 지형에 맞추어 축조되었다. 평면은 동서 방향으로 긴 타원형이며 북서와 남동 방향은 강화외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용당돈대는 숙종 5년(1679) 강화도 해안방어를 목적으로 강화 해안선을 따라 축조된 48개 돈대 중 하나로 가리산돈대, 좌강돈대와 함께 응진진에 소속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4개의 포좌와 36개의 여장을 갖춘 것이라고 하지만, 어떤 연유로 성체와 여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기단석과 몇 단의 성돌만 남고 거의 유실된 상태로 남았었다. 2000년에 토축의 형태로 윤곽을 확인하고 돈대의 출입문과 성벽, 포좌를 복원하였지만, 현재까지 미완으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성상에는 잡석만 가득 메워 있고 포좌의 지붕돌인 장대석만 덮여 있다. 또한 있어야 할 여장의 자리에 잡석만 깔려 있고 복원되지 않았다. 돈대 내부에는 7x5m 규모의 건물터가 있는데, 상주하던 병사들의 숙소와 무기고 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돈대 내에는 갈참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어떤 연유로 이곳에 갈참나무가 자라는지 알 수 없지만, 낮에는 해를, 밤에는 별을 보며 돈대를 지켰다는 덕담에 돈대의 마스코트가 되어 '별나무'란 별명까지 갖게 되었다.] 10:59~11:04 용당돈대(龍堂墩臺)를 사진촬영 11:04~11:19 인천 강화군 선원면 연리 54 번지에 있는 화도돈대(花島墩臺)로 이동 [오두돈대에서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약 1km의 거리에 위치한 화도돈대(花島墩臺)는 강화군 선원면 연리에 있다. 오두돈대와 함께 1710년에 화도보가 폐지되면서 광성보의 관리하에 감시소와 방어진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강화외성과 연결되어 있으나 현재는 주변의 외성이 소실되어있는 상태이다. 동쪽으로 나 있는 수구 옆에는 강화유수 한용탁이 1803년에 세운 ‘화도수문개축기사비(花島水門改築記事碑)’가 있다. 예전에는 이 수문을 통해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무너진 상태 남아 있었으나 북쪽에는 약간 있었지만, 성벽의 터만 남아 있을 뿐 완전히 소실된 상태로 내부는 과수원으로 사용되었다. 남쪽에는 연못이 조성되어 돈대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포좌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어 추정이 불가능하였다. 돈대는 절벽 쪽으로 장축을 기대고 있는 남북 면의 길이 35m, 동서 면은 32m로 직사각형의 구조이며 둘레가 129m이다. 기록에 의하면, 둘레는 92보, 여장(성가퀴)은 42개였다고 한다. 2002년 육군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한 후 성벽의 기단과 출입문의 무사석만 복원한 상태이다.] 11:19~11:23 화도돈대(花島墩臺)를 사진촬영 11:23~11:37 인천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 3번지에 있는 오두돈대(鼇頭墩臺)로 이동 [오두돈대는 신미양요로 인해 무참히 부서지고, 허물어지면서 손을 쓸 수 없어 그대로 방치되었다. 오두돈대는 광성돈대와 화도돈대와 함께 7보 5진 중 하나인 광성보의 관리하에 방어진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돈대는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 산1에 자리 잡고 있다. 지형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자라의 머리와 같은 지형에 설치되어 있으며,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지름이 32m에 달한다. 벽체의 두께는 3.5m, 둘레는 107m에 이른다. 처음에는 화도보에 속했으나 1759년(영조 35)에 광성보 관할 하에 들어갔다. 오두돈대는 원형으로 자라의 머리처럼 해안으로 불쑥 나와 있는 염하의 첫 물굽이여서 좌우의 관측이 유리하여 방어력과 공격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장점에서 설치한 것으로 본다. 돈대의 동쪽과 남쪽으로 4개의 포좌를 배치하였고, 출입문은 서북쪽에 두었다. 돈대의 내에서 빗물을 배수할 수 있는 석조 누조가 설치되어 있는데 돈대의 지면에서 5단 높이에 있다. 성벽은 아래에서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축조되었고 성벽 위에 미석은 성돌의 높이로 쌓고 그 위에 다듬은 돌로 여장을 쌓았는데, 총안은 두지 않고 타와 타 사이 타구를 두고 여장의 가운데에 다듬은 돌을 두고 위가 열린 총안 하나씩 두었다. 돈대의 남쪽에는 조선시대 강화 8경의 하나인 오두정이 있었던 오두정지가 있는 이것은 권율 장군의 정자터로 알려져 있다. 바로 옆에는 1742년 강화유수 김시혁에 의해 2년 동안 개축한 벽돌로 쌓은 강화 전성이 자리한다. 이 전성은 수원 화성(정조 18년, 1794년)보다 50년이나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 남쪽 일부 구간은 최근 복원하였다. 전성 성벽 위에는 축성 당시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긴 세월 풍화로 무너진 전성 사이로 나무뿌리가 뻗어 더 이상 무너지지 않게 잡고 있는 듯하다.] 11:37~11:41 오두돈대(鼇頭墩臺)를 사진촬영 11:41~11:45 인천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 563 번지에 있는 강화전성(강화외성)으로 이동 [강화 전성(江華塼城) 시대 조선 건립시기 : 1743(영조 19)~1744(영조 20) 성격 성곽, 전성 유형 유적 크기 약 270m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 563 일원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해안가에 있는 조선후기 벽돌로 축조된 성곽. 전성. 시도 기념물. 강화 전성(江華塼城)은 조선 영조 때 강화유수 김시혁(金始㷜)이 벽돌로 쌓은 성으로,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강도(江都) 시기(1232~1270년)에 조성된 토성 위에 쌓았다. 현재 강화 외성(江華 外城)의 일부 구간에 해당된다. 역사적 변천 고려는 1232년(고종 19) 6월 몽골군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로 천도하면서 궁궐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하였다. 다만 이 때 왕궁과 도성 시설을 모두 갖추지는 않고, 1234년 1월부터 송도(松都)의 것과 비슷하게 도성과 궁궐, 각 관청을 건립하였다. 강화 외성의 경우, 1233년(고종 20)부터 축조한 성으로 그 길이가 약 23㎞(적북돈대∼초지진)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강화 전성은 유수 김시혁이 건의하여 1743년(영조 19)부터 1744년(영조 20)까지 오두돈대 주변의 외성을 벽돌을 이용하여 개축하였다. 강화 전성은 1972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가 강화군을 경기도로부터 편입하며 1995년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한편 강화 외성은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03년 10월 25일 사적으로 승격되었다. 강화 외성이 사적으로 승격될 때, 강화 전성 역시 강화 외성의 일부라고 판단되어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에서 해제되었다. 내용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로 천도한 고려 조정은 강화도를 방어 요새로 구축하고자 하였다. 『강도지(江都誌)』에 의하면 강화의 성은 내성, 중성, 외성의 3중 방어 체계로 이루어졌다. 내성은 둘레 약 1.2㎞의 길이로 쌓은 토성으로 1234년(고종 21) 1월부터 축조되었다. 중성은 둘레 약 9㎞의 길이로 쌓은 토성으로 1250년(고종 37) 내성을 지키기 위하여 축조되었다. 외성은 강화도 섬을 두른 토성으로 1233년(고종 20)부터 쌓기 시작하여 1237년에 일차 완성되었다. 이 세 개의 성은 1259년 고려가 몽골과 강화할 때 모두 헐렸다. 조선시대에 들어 강화가 국가의 보장지(保障地)로 주목받으며 강화의 관방 시설이 수차례 정비되었다. 국난시에 도성의 외성으로서의 역할이 중시되어 1618년(광해군 10)에 보수된 바 있고, 병자호란(1636~1637) 때 허물어진 것을 다시 쌓고 돈대를 설치하였다. 영조 때에 강화유수 김시혁이 청의 번벽법(燔甓法)을 도입하여 벽돌을 구워 오두돈 일대의 외성을 정비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강화 전성이다. 특징 강화 전성을 포함하는 강화 외성의 길이는 약 23㎞이고, 그 중 강화 전성은 약 270m로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아래쪽은 돌을 다듬어서 쌓고 위쪽은 벽돌을 8~10단으로 쌓아 올렸는데, 벽돌은 강회붙임으로 연결하고 어긋매김 공법으로 축조하여 허물어짐을 방지하였다. 관리 소홀로 허물어진 채 있던 강화 전성을 현대에 들어 재정비하였다. 의의와 평가 강화 전성은 수원 화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전축성(塼築城)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특히 강화 전성은 1794년에 축성하기 시작한 수원 화성보다 50여년 정도 이른 시기에 축성된 것이다.] [강화 외성(江華 外城) 종목 사적 제452호(2003년 10월 25일 지정) 면적 255, 544.9m2 시대 고려시대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원(강화도 동해안 일대) 강화 외성(江華 外城)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원에 위치한 성곽이다.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가 2003년 10월 21일에 지정 해제되고, 2003년 10월 25일 사적 제452호로 승격되었다. 그러다가 2014년 4월 18일 강화 외성의 성곽과 진해루지(鎭海樓址)로 확인된 구역을 추가 지정하였다. 강화외성은 고려 제23대 고종이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후 고종 20년 (1233년)에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적북돈대로부터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축조된 성이다. 강화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읍성이다. 외성은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는데 몽고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고종 24년(1237)에 강화외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비상시에 국왕의 피난처인 도성(都城)의 외성(外城)으로 광해군 10년(1618)에 보수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숙종 때 병자호란기(1636)에 허물어진 외성을 돌을 이용하여 다시 쌓았고 돈대(墩臺)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영조때 강화유수 김시혁(金始爀)이 비가 오면 성의 흙이 흘러내려 나라에 건의하여 영조 19년(1743)에서 이듬해에 걸쳐 벽돌을 이용하여 다시 쌓았다고 한다. 2001년 동양고고학연구소에서 실시한 오두돈 주변의 전축성 구간에 대한 지표조사 결과에 의하면, 뻘층을 기초로 머리돌을 올리고 그 위에 대형석재로 석벽의 중심을 삼고 그 위에 머리돌을 올리고 다시 전돌을 여러 단 쌓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성은 높이 20척, 폭 5척이며, 6개의 문루(조해루·복파루·진해루·참경루·공조루·안해루)와 암문 6개소, 수문 17개소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강화외성은 고려 후기∼17세기 후반 도성의 구조와 축성기법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 성은 벽돌로 개축한 전축성(塼築城)이 오두돈 주변(남측)에 남아 있어 수원 화성(사적 제3호)과 더불어 전축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11:45~12:20 인천 강화군 불은면 해안동로466번길 27 번지에 있는 광성보(廣城堡)로 이동 [광성보(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 소재지 :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23-1 한국NGO신문 기사입력일 : 2023.01.01. 기자명 : 정진해 문화재전문 대기자 덕진진에서 강화해협의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약 2km의 거리에 자리하는 광성보에는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위치한다. 광성보가 처음 이곳에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는 고려시대 때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강도시기(1232~1270년)에 지금의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대의 해안에 흙과 돌을 이용하여 축성했다. 조선시대에 오면서 강화가 국가의 보장지로 주목받으면서 관방시설이 수차에 걸쳐 정비되었다. 1618년(광해군 10)에 외성이 보수 되었고, 1658년(효종 9년)에 광성보를 만들게 되었다. 다시 1691년(숙종 17)에 허물어진 상태의 외성을 보수하면서 여장까지 갖춘 외성이 완성(1692년)에 완성되면서 광성보 소속 광성돈대, 오두돈대, 용두돈대, 화도돈대 등이 완성됐다. 광성보는 신미양요(1871년) 때 백병전의 현장이다. 당시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했다. 이때 이미 해병 450명으로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자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병사가 열악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다. 포탄이 부족하면 칼과 창으로 싸웠고 돌과 주먹으로 싸웠으나 한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백병전을 벌였지만, 지휘관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 군관과 49인의 장사, 200여 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이때 파괴되어 폐허가 되어 있던 것을 1977년 옛 모습을 복원하게 되었다.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 보수 정화됐다. 안해루는 영조 21년에 광성보를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했는데 이를 안해루(按海樓)라 명명했다. 광성보는 해안에 세운 소규모의 성곽으로, 안해루는 성의 안과 밖을 오가는 문이다. 홍예문을 안과 밖이 같은 모양이며 2단의 홍예 기석을 쌓고 그 위에 홍예석과 선단석을 연결함으로써 문이 완성되고 홍예문 위에는 여장을 설치하고 안쪽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누각을 두었다. 성문의 안쪽 좌우에는 누각을 오르내리는 계단을 두었고 북쪽으로는 성벽이 광성돈대와 연결되어 있다. 누각의 좌우에는 각각 협문을 두었다. 안해루의 북쪽에는 광성돈대가 자리한다. 반원형의 돈대로 서벽은 직선이고, 동벽은 볼록한 반원형으로, 마치 다리미 바닥모양으로 둘레가 142m이다. 광성보 전투에서 활약을 보였지만, 신무기로 무장한 미국 해군을 맞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미군은 9인치, 8인치 등 85문의 대포를 쏘았으나 조선군은 정조준도 어려운 대포와 소포로 적과 마주했다. 홍이포는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후 포 뒤쪽 구멍에서 점화해 사격하는 포구장전식 화포이다. 사정거리 700m정도, 포알은 화약이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지만, 포알은 폭발하지 않았다. 소포는 불량기라 하여 프랑스군이 쓰던 것으로, 사정거리 300m로 포알은 대포와 같다. 미군의 전쟁사에 ‘48시간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는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 군대는 어재연 장군을 포함해 430여 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광성보와 돈대들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1977년 전적비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광성돈대가 복원되고 포좌 4개소와 포 3문을 복원 설치했다. 안해루에서 손돌목돈대로 가는 길에는 뿌리를 드러낸 나무들이 옛 강화외성의 흔적을 잡고 있고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는 순국한 용사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비로, 비문 뒷면에는 한글로 신비양요가 일어났던 당시 우리 수비군의 활약상을 기록하여 놓았다. 쌍충비각에는 신미양요 때 중군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의 순절을 기념하는 비와 함께 당시 순국한 장병들의 충절을 기리는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가 세워져 있다. 어재연, 어재순 형제를 기린 비문은 ‘凜乎忠勇(름호충용) 日月光輝(일월광휘) 兄弟賓從(형제빈종) 視死如歸(시사여귀) '늠름한 충성과 용맹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 형제가 서로 뒤따라서 죽음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이 하였네.' 兄死於國(형사어국) 弟死於兄(제사어형) 一門忠友(일문충우) 百世風聲(백세풍성) '형은 나라 위해 죽고 아우는 형을 위해 죽으니, 한 가문의 충성과 우애, 오랜 세대를 두고 이를 날리리라.' <광성파수순절비>에는 본영 천총(千摠) 김현경과 본진 별장(別將) 박치성의 추모 시문이 있고, 뒷면에는 전사한 병사 49명의 명단이 있는데, 마지막 구절에 '半百武士(반백무사) 一心殉國(일심순국) 危忠卓節(위충탁절) 千秋不泐(천추불륵) '반백의 무사가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높은 충성 높은 지조와 절개를 긴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으리.' 나라를 위해 몸바친 순국의 의미를 새겼다. 쌍충비 앞에는 순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라는 7기의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신미양요 때 목숨을 잃은 무명용사들의 신원을 알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묻은 묘이다. 손돌목 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쌓은 48개 돈대 중 하나로 신미양요 때 미군과 치열한 전투 벌였던 격전지로, 광성보에서 가장 높은 구릉 정상부에 둥근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와 포좌 3개가 있었지만,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이때 격렬한 전투로 인해 모두 파괴되었던 돈대를 1976~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복원했다. 일명 손석항(孫石項)돈대로도 불리며 남북 간 지름이 30m, 동서 간은 34m로 평면 원형에 가까운 돈대로, 둘레는 108m, 돈대 넓이는 778㎡에 달한다. 손돌목 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용두돈대가 있으며, 그 앞의 염하(강화해협)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른다. 손돌목의 손돌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피난 가던 고종 임금을 배에 태웠던 뱃사공의 이름에서 따왔다. 배에 오른 고종이 이곳을 지날 때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손돌 뱃사공이 자신을 죽이려고 배를 이곳으로 몰았다고 의심한 나머지 손돌을 처형했다. 손돌은 죽기 전 임금이 건너갈 수 있도록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반드시 뱃길이 트인다"고 말한 후 죽음을 맞았다. 정말 바가지를 따라가니 뱃길이 열리고 고종은 무사히 강화 땅에 오를 수 있었다. 비로소 자신이 오해한 것을 안 고종은 손돌뱃사공을 후하게 장사지내 주도록 했다. 염하 건너편 동남쪽에 덕포진이 있는데, 덕포진 언덕 위에 손돌의 묘가 있어 늘 염하의 물살을 지켜보고 있다. 손돌목돈대 아래에는 용의 머리처럼 염하강에 불쑥 나와 있는 용두돈대가 자리한다. 길게 바다로 향해 굽어진 길이 용의 머리 같아 붙인 이름으로 이곳은 염하와 바로 맞대고 있는 천혜의 요새이자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며, 신미양요 때 미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른 격전지이기도 하다. 용두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되어 있으며 강화 54돈대 중 가장 마지막으로 합류한 돈대이다. 광성보 내 강화외성의 부속시설이었던 해안가의 용도를 돈대로 명명함으로써 돈대 대열에 올랐다. 용두돈대에는 포좌와 출입문이 없다. 강화도의 돈대 중 바다 쪽으로 가장 돌출된 암반 위에 지어진 돈대는 암벽 상단 모양에 따라 축성하여 돈대 앞머리는 부채꼴을 하고 있다. 또한 단층 구조를 하고 있으며, 긴 용도를 갖고 있다. 용도 양편으로 총안이 뚫린 여장이 설치되어 있다.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돈대 중앙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쓰인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비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손돌목돈대 아래 해안에는 12좌의 광성포대가 있다. 이 포대는 고종 11년 용진진, 광성진, 덕진진, 초진지에 포대를 설치할 때 함께 만들어진 포대이다. 광성포대는 손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되었는데 각각 9좌, 4좌, 3좌의 포좌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 중 가장 규모가 큰 중앙포대는 길이 80m, 포좌의 크기 약 6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외세에 문호를 개방함에 따라 파괴되었던 것을 2004년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되었다.] [덕진진에서 강화해협의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약 2km의 거리에 자리하는 광성보에는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위치한다. 광성보가 처음 이곳에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는 고려시대 때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강도시기(1232~1270년)에 지금의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대의 해안에 흙과 돌을 이용하여 축성했다. 조선시대에 오면서 강화가 국가의 보장지로 주목받으면서 관방시설이 수차에 걸쳐 정비되었다. 1618년(광해군 10)에 외성이 보수 되었고, 1658년(효종 9년)에 광성보를 만들게 되었다. 다시 1691년(숙종 17)에 허물어진 상태의 외성을 보수하면서 여장까지 갖춘 외성이 완성(1692년)에 완성되면서 광성보 소속 광성돈대, 오두돈대, 용두돈대, 화도돈대 등이 완성됐다. 광성보는 신미양요(1871년) 때 백병전의 현장이다. 당시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했다. 이때 이미 해병 450명으로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자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병사가 열악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다. 포탄이 부족하면 칼과 창으로 싸웠고 돌과 주먹으로 싸웠으나 한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백병전을 벌였지만, 지휘관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 군관과 49인의 장사, 200여 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이때 파괴되어 폐허가 되어 있던 것을 1977년 옛 모습을 복원하게 되었다.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이 보수 정화됐다.] 12:20~13:01 광성보(廣城堡)에 있는 광성돈대(廣城墩臺), 손돌목돈대(孫乭項墩臺), 용두돈대(龍頭墩臺,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산 125 번지)를 탐방 13:01~13:07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47-3 번지에 있는 어재연 장군 충장사로 이동 [강화군은 신미양요에서 순국한 충장공 어재연 장군과 무명용사 351명의 위패를 모시는 ‘충장사’를 2022년3월31일 준공했다. ‘충장사’는 불은면 덕성리 47-3번지(광성보 일원) 1770㎡ 부지에 사업비 15억원을 투입해, 사당, 재실 등을 갖춘 연면적 81㎡ 규모의 전통 한옥 건축물로 건립됐다. ‘충장사’ 건립으로 어재연 장군과 무명용사의 위패를 사당에 안정적으로 모시고 기상여건에 관계없이 추모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어제연 장군과 무명용사를 기리는 ‘광성제’ 제향은 음력 4월 24일에 광성보 쌍충비각 앞에서 봉행해왔으나, 2002년부터는 충장사에서 개최된다. 어재연 장군은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선봉장이 돼 광성보를 '수(帥)'자기를 높게 걸고, 미군에 대항해 결사항전한 가운데 350여 조선군이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미군의 우세한 군사력에 밀려 광성보는 끝내 함락됐다. 미국 공사 로우의 보고서에는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장렬하게 싸우면서 아무런 두려움없이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가 전사했다.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고 기록돼 있다.] 13:07~13:09 어재연 장군 충장사를 사진촬영 [어재연(魚在淵) 시호 : 충장(忠壯) 출생 – 사망 : 1823년(순조 23) ~ 1871년(고종 8) 대표관직(경력) : 조선후기 공충도병마절도사, 회령부사 등을 역임. 병조판서지삼군부사(兵曹判書知三軍府事)에 추증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성우(性于). 어용인(魚用仁)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무과에 급제, 1864년(고종 1) 장단부사(長湍府使), 1866년 공충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66년 프랑스 로즈(Roze,P.G.)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을 때(병인양요)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廣城鎭)을 수비하였다. 이어 회령부사가 되어 북쪽 변경지방의 비적을 토벌, 치안을 확보하였다. 또한 이 때 장시(場市)를 개설하는 등 변경 무역을 활성화하였다.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의 강화도 내침으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6월 1일 손돌목(孫乭項) 포격사건이 발생해, 한미간에 최초의 군사충돌이 일어났다. 이를 보고하자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되어 광성보(廣城堡)로 급파되어 6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보에 부임, 미군과 대치하였다. 6월 10일 미군은 강화도상륙작전을 전개, 초지진(草芝鎭)을 점거하였다. 6월 11일 덕진진(德津鎭)을 함락한 미군은, 마지막으로 광성보공략에 나섰다. 이 때 어재연은 광성보에 수자기(帥字旗)를 게양하고 침공해 오는 미군을 격퇴할 태세를 취하였다. 미군은 광성보에 대한 수륙양면작전을 개시해서, 해상에서는 함포사격, 지상에서는 야포사격으로 초토화작전을 전개하였다. 드디어 광성보로 돌입한 미군과 어재연군 사이에는 육박전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어재연은 임전무퇴의 결의로 칼을 손에 잡고 적을 무찔렀고, 대포알 10여 개를 양손에 쥐고 적군에 던져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13:09~13:37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355 번지에 있는 덕진진(德津鎭)으로 이동 [초지돈대에서 직선거리로 약 1.7km의 거리에 덕진돈대가 자리한다. 1679년에 축조된 덕진돈대는 용두돈대와 함께 덕포진의 관할에 속했다. 덕포진은 원래 강화에 있었는데 1666년(현종 7)에 통진(지금의 김포시 대곶면)으로 옮겼다. 그 자리에 덕진진이 설치됐다. 당시 강화유수 서필원의 계청으로 첨사를 통진땅 덕포로 옮기고 이곳에 별장을 두었으며, 1677년 유수 허질의 계청에 따라 만호로 승격시켰다. 덕진진 배치 인원은 만호 1명 군관 26명 사병 100명 돈군 12명 군량미 115석, 콩 26석, 첨향미 103석, 간장 5독, 진선 2척, 군기와 군용품 약간이었다. 덕진진은 1874년(고종 11)에 축조된 남장포대와 덕진포대를 관할하는,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강화 12진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 군대에 의해 점령당했다. 이때 여장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지만 남게 되었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했다. 덕진돈대는 남쪽으로 온수천과 이어지는 갯골과 인접해 있으며, 서쪽으로 강화외성과 내측과 외측으로 각각 4혈 포좌를 설치했다. 돈대의 북쪽으로 15혈의 남장포대를 설치했다. 포대의 설치는 온수천으로 들어오는 적선을 막는 역할과 손돌목으로 북상하는 적선을 저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돈대의 내부에는 토축으로 둘려 있고 4개의 포좌를 갖추었으며, 원형은 여장이 40개로 갖추어진 둘레 90보의 석성 돈대였다. 복원하면서 여장은 복원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출입문은 평거식으로 기단석 위에 반듯하게 가공된 기석을 좌우로 놓고 그 위에 반듯한 돌을 올리고 장대석을 가로로 놓아 문을 만들었다. 입구의 안쪽에는 3단의 계단을 두었고 올라서면 평탄한 돈내 내부가 네모나게 평탄하고 돈대의 내탁은 흙을 채워 45도 경사지게 하였다. 4개의 포좌는 다듬은 돌로 반듯하게 쌓았고 성상로로 오를 수 있게 돌계단을 두었다. 정확한 여장의 형태를 알 수 없으며 상성로에는 잔디가 덮여 있다. 돈대의 외벽은 가공된 돌을 8단으로 쌓았으며 위쪽으로 쌓으면서 안쪽으로 경사지게 쌓았다. 돈대의 앞쪽에는 경고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에는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가 새겨져 있다.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기에 외국 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라는 내용이다. 이 비는 조선 고종 4년(1867년)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강화 덕진첨사가 건립한 것으로 개화기에 외국 선박의 출입을 통제하겠다는 척화의 의지를 담고 있는 비이다. 비의 크기는 높이 140cm, 너비 54.5cm, 두께 28cm이다. 덕진진의 성문인 공조루는 19세기 외세의 침탈을 제1선에서 막아냈던 성문이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을 거치면서 치열한 항쟁을 거치면서 성문인 공조루도 철저히 파괴되었다. 특히 신미양요 때는 미국 극동함대에 맞서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지만, 마침내 초지진에 상륙한 미해병대에 점령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누각도 사라지고 튼튼한 방어력이 되었던 성벽과 함께 허물어져 홍예만 남았었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덕진진의 문루를 다시 세웠으며 남장포대와 당시의 대포를 복원해 설치했다. 문루의 현판은 “바다를 제어한다”는 뜻의 ‘공조루控潮樓’라고 쓰여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4면은 판벽을 하고 가운데에 판문을 달았다. 누각의 좌우에는 협문을 두어 계단을 오르내리며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성문의 천정에는 동쪽을 상징하는 구름 속의 청룡이 그려져 있다. 공조루 앞에는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은 이곳에서 근무했던 병사들의 식수였다고 한다. 성문을 나서면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으며, 성벽 위에는 벽돌을 이용하여 하나로 연결된 연속평여장에 근총안과 원총안이 마련되어 있다.] 13:37~13:51 덕진진(德津鎭)을 탐방 13:51~14:24 인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16-78 번지에 있는 초지항을 거쳐서 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58 번지에 있는 초지진(草芝鎭)으로 이동 [초지진은 길상면 초지리에 있는 성(城)이다. 바다로 침입해 오는 적을 막기 위해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구축하고 조선 숙종 때인 1679년에 축성된 요새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와 『강화부지(江華府志)』에 따르면 1716년에 설치되었으며, 1726년(영조 2)에 진장(鎭將)으로 종4품 무관인 병마만호(兵馬萬戶)가 배치되었다. 1763년에는 진장을 종3품 무관인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다. 1866년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극동 함대와 1871년 4월 무역을 강요하며 침략한 신미양요 때 미 군함 모노카시호와 팔로스호 등의 포격, 미국 해병 450명의 상륙공격으로 초지진이 미군에 점령되면서 군기고(軍器庫), 화약고, 진사(鎭舍) 등이 모두 파괴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당시 지휘관이었던 한 미군 대령이 "조선군은 근대적 무기도 한 자루 보유하고 있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로 근대적 화기로 무장한 미군을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 모두 전사했지만,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민족을 그리고 국가를 위해 그토록 처절하고 강력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1875년 8월에 침공한 일본 군함 운요호의 포격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또다시 초지진은 큰 피해를 보았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외세에 문호가 개방되면서 초지진의 할 일이 없어지면서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은 전투의 현장은 허물어진 상태로 그대로 방치하게 되었다. 1973년 강화 전적지 보수 정비사업 때 초지돈만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초지진은 원래 경기의 안산에 설치되었던 진이었으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이후 국왕의 피난처로 정해졌던 강화의 방어체제 강화를 위해 1656년(효종 7) 강화유수 홍중보(洪重普)의 건의로 강화의 동남쪽 해안인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설치했다.초지진에는 군관 11인, 사병 98인, 돈군(墩軍) 18인, 목자(牧子) 210명 등이 배속되어 강화해협을 수비했다. 최초에는 초지진의 방어 책임자로 감목관(監牧官) 1인이 겸임해 임명되었으나 방어체제의 강화를 위해 1665년(현종 6) 서필원(徐必遠)의 건의로 진장(鎭將)으로서 종4품의 무관인 만호(萬戶)가 임명되었다. 또한 초지돈대, 장자평돈대, 섬암돈대 등 세 곳의 돈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 돈대와 본진 간의 협공체제를 통해 수비력을 극대화했다. 초지진에는 군선(軍船) 3척이 배속되어 있었고, 부속된 3곳의 돈대에는 각각 3개의 포좌(砲座)를 마련하고 화포를 설치하여 강화 해협을 수비했다. 그러나 현재 초지진 주변은 음식점 등 각종 건축물 등이 들어서 축조 당시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1973년 복원된 초지돈대가 초지진을 대표하고 있다. 높이 4m 정도에 장축 114m의 모서리가지지 않는 삼각형 형태의 돈대로, 내부에는 3곳에 포좌와 여장을 설치했으며, 여장마다 1~3개의 총안이 총 100여 개 있다. 내부에는 전면 3칸, 측면 1칸의 보호각에 당시 사용되었던 대포 1문이 전시되어 있다. 숙종 초 돈대를 최초 건설할 당시 책임을 맡았던 김석주(金錫冑)의 기록에 따르면, 초지진에 속한 섬암돈대 등 세 돈대는 모두 방형으로서 둘레는 90보 전후였고 치첩(雉堞)의 수효는 40개 이내였다고 한다. 외부의 성돌은 다듬은 네모난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는데, 기단석 위에 7~8단을 쌓고 그 위 성벽에 비해 약간 앞으로 나오게 네모난 돌로 미석을 놓았다. 미석 위에는 벽돌을 이용하여 11단을 쌓아 여장을 만들고 위에 지붕돌을 얹었다. 출입문은 평거식으로 기단석 위에 3단의 기석을 놓고 그 위에 가로로 장대석을 올려 문을 만들었다. 돈대 내에는 성상로를 두고 내탁으로 흙을 채워 경사지게 하고 오를 수 있게 계단을 두었다. 돈대 밖 남쪽에는 수령이 약 400년 된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포탄을 맞은 상흔이 남아 있는데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를 상상할 수 있다.] 14:24~14:30 초지진(草芝鎭)과 초지돈대(草芝墩臺)의 큰 소나무를 사진촬영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초지돈대를 지키고 있다. 강화유수 홍중보가 1656년에 초지진을 설치할 때 심었다 하니 이 소나무는 처음부터 초지진의 풍상을 지켜봤을 터다. 신미양요 때 포를 맞은 흔적이 나무에 남아 있다.] 14:30~14:39 인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있는 초지대교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강화 나들길 제2코스(호국돈대 길) 탐방 완료 14:39~14:50 초지대교 버스 정류장에서 김포공항역으로 가는 60-5번 버스 승차 대기 14:50~15:50 60-5번 버스를 타고 초지대교 버스 정류장을 출발하여 김포공항역으로 이동 [1시간 소요, 16개 정류장 이동] 15:50~15:53 김포공항역 3번 출구까지 도보로 이동 15:53~16:11 김포공항역에서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는 공항철도 전철 승차 대기 16:11~16:42 김포공항역에서 공항철도 전철을 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31분 소요] 강화 나들길 제2코스(호국돈대 길)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