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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글 코너 스크랩 빵과 과자의 발전사
박규 추천 0 조회 892 17.02.01 10:32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빵과 과자의 발전사

 

1. 도입기 (1800 ~ 1909)
① 면병(麵餠;밀떡)

우리나라에서의 양과자의 유입은 1794년 비밀리에 입국하여 포교활동을 하다가 1801년 사형을 당한 선교사 주문모(周文模)가 혼배성사(婚配聖事)의식에 쓰여지는 면병(麵餠;밀떡)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랑떡

 당시의 빵은 선교사들이 숯불을 피운 후에 떡시루를 엎고 그 위에 빵 반죽을 올려놓은 다음 오이 자배기(주; 둥글 납작하고 아가리가 쩍 벌어진 질그릇)로 덮어 화로를 만들어 빵을 구웠다. 제품의 모양이 마치 우랑과 같다고 하여 우랑떡이라고 불렸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된 빵과 과자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의 전래

 당시 빵은 ‘면포(중국말로 빵이라는 뜻)’, 카스테라는 ‘설고(중국말로 흰 눈처럼 희다라는 뜻)’라고 정의 할 수 있지만 ‘면병’은 혼배성사 의식으로 사용했으므로 과자의 기원으로는 볼 수 없다. 그렇지만 면병을 만들 때에 양과자 등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 할 수 있을 것이다.

④ 한국근대사에 따르면 외국 상인들이 명동과 종로 뿐만이 아니라 전국 내륙에도 상권을 넓혀 국내 상인들의 토착재정을 점차로 크게 잠식하여 정부에 대해 1886년에는 모든 외국 상인들을 용산과 인천으로 이전토록 요청하였으나 청국 원세개의 반대로 실패하자 결국 1890년 정월 초 종로 상인들은  상점을 일제히 철시하고 모든 외국상인들을 종로에서 철거를 요청하였으나 이 역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이때 일본인은 당과자를, 청국은 호떡을 선보였다.

구한말 일본상인들은 명동 일대를 중심으로, 청국 상인들은 종로 수표교를 중심으로 더욱 활발히 진출해 그 당시 1884년 서울 인구가 19만명일 때 일본상인은 1천 5백명, 청국상인들은 3천명으로 서울 상권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때 일본인 우메마즈간노스게는 ‘야마도겐’이라는 제과점을 차리고 그 때 이미 구성되었던 일본인 양과자동업조합의 조합장도 맡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부산 서정에서는 일본인 제과업자에게 팥, 앙금을 수입, 제조 판매하는 '아베제함’이라는 업체도 생겨났다.

양과자의 공식적인 기원은 1885년으로 보아야 타당할 것으로 본다. 그 이유로는 선교목적으로 빵과 양과류를 주민들에게 만들어 나누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개화기의 한미관계’를 보면 1885년 부활절에 인천항에 상륙한 장로교 목사인 언더우드와 선교사 아펜젤러 등의 식생활에 관한 기록에 나타나 있다. 아펜젤러의 기록에는 ‘알렌의 집에는  선교의 방편으로 조그마한 식료품상을 연상케 할 정도로 각종 식료품들을 쌓아 놓았다.’고  했다.  또 언더우드의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으면’에 보면 1885년 황해도 송내에서 선교사 메캔지는 선교활동 중 그의 집에서 구운 빵과 건포도 푸딩을 비롯하여 각종 과일과 캔류, 설탕, 연유 등을 그곳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1893년 크리스마스에는 선교사들 사이에 빵을 선물로 주고 받았다고 하며, 그 후에 점차로 서울의 상류 부유층들 사이에서도 이 같은 선물이 교환되어 오늘날의 크리스마스 케이크 선물로 발전되어 갔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서양요리를 공식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895년 5월 14일(양력 6월 6일) 창덕궁 연경당 주변의 비원에서 국내외 요인들과 그들의 부인 등 남녀 1천여명이 모여 조선의 독립선언을 축하하는 가든파티를 벌이게 되었다.’라는 기록이 대한국사에 남아 있다. 고종은 당시 32살의 올드미스인 손탁이 양식 시중들고 있었는데 1895년 덕수궁 뒤에 400여 평의 대지를 손탁에게 하사하였고, 손탁은 그 자리에 화려한 서구식 2층 건물을 1902년에 완공하여 정동구락부(손탁호텔)를 개관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호텔이다. 손탁은 아울러 황실의 양물 일체를 취급하는 어용계(御用係)도 맡아보게 되었다. 또한 손탁호텔에서는 러시아의 각종 양과자와 서양각국의 음식을 비롯한 커피와 고급사탕 등을 제조하여 판매하였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양과자의 시초로 볼 수 있다. 손탁은 처음에는 양과자를 만들어 민비에게 선사하기도 하고 서양요리 강습도 해주고 손수 요리도 만들어 바쳤다고 한다.

2. 유년기 (1910 ~ 1945)

① 제과업의 싹을 틔우는 유년기는 한일합방 이후 일본을 통해 그들의 화과자와 양과자가 유입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일본인들은 알사탕과 막과자를 진고개(지금의 명동)에 팔았다고 하며, 찹쌀떡은 이미 인천 등지에서 판매되고 있었다고 한다.

과자업자들은 차츰 남대문 시장에 모여 도매상을 열었고, 소매상들은 주로 종로에 운집해 있었다. 당시 대표적인 과자로는 개당 1전하는 접과자와 생과자, 알사탕 등이 있었으며 도매상들이 이를 만들어 소규모 구멍가게나 지방업자 들에게 공급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제과업의 초창기 모습이라 할 수 있다.

1899년 9월 18일 경인철도 개통을 시초로 경부선, 경의선이 개통됨에 따라 한반도와 만주까지의 철도가 완성되면서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을 경유하여 만주로 이동함에 따라 철도역 주변의 숙박시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철도회사가 자체적으로 건설하고 운영하게 되었고, 이에 부산 역사를 2층으로 건립하여 1층은 대합실로, 2층은 호텔 객실로 꾸며 개관하였는데 이 호텔이 우리나라 철도호텔의 효시이다.

이어 1914년 조선호텔에 이르기까지 많은 호텔이 개관하였다. 호텔에서는 빵과 아이스크림, 푸딩, 쿠키 등이 만들어져 식탁에 올랐다.

1914년 일본은 시정 5주년 기념회장을 한 나라의 황제가 기거하며 통치한 궁전에 열어 매점, 술집, 유흥장을 설치하였으니 나라를 잃은 서러움으로 한민족의 가슴에 못을 박은 일이 있었다.

1925년부터는 우리나라 기술자와 자영업자가 나타나기 시작한 때이다. 당시‘밀림성림’이라는 한국인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로‘삼덕당’이라는 제과점을 열고 현미빵을 제조하여 판매하였다.

1925년 이 후 제과점은 꾸준히 성장하여 전체 150여개의 업소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하는 제과점만 30여개에 달했다고 한다. 판매방법도 오늘날의 테이크아웃의 형태인 가두판매 위주로 행하여졌으며 그 다음이 배달 판매 그리고 약간의 좌석 판매도 선보였다고 한다.

⑨ 그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운영하는 제과점들은 그 상호명 끝에 당, 실, 옥, 상점, 상회라는 말을 많이 썼다고 한다.

1935년 김관욱은 일본의‘모리나카제과학교’를 졸업하고 신의주 넘어 안동에 중국인직공 3명, 일본인 기술자 1명을 채용하고‘천수당과자포’를 개점한다. 이 후 서울의 중앙우체국 자리에‘고영제과’와’명보제과’를 운영하다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이전하여‘우미당’과’보수당’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그는 차츰 제과산업에서 전문 제과인이 필요할 때 아쉽게도 1956년 5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39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갑자기 물자가 부족하게 되어 통제경제로 모든 물자는 배급을 통해서만 입수할 수 있었다.

일제 말기에는 제빵과 제과의 주원료인 밀가루가 품귀해지자 자연히 대용품을 찾게되어 온갖 잡곡가루와 심지어는 콩깨묵(비료로 쓰이는 대두)까지 선을 보였는가 하면 조개 껍질을 미세하게 분쇄한 헬즈라는 상품을 배급하여 소맥분과 혼용토록 하였다. 또한 팥앙금 대신 도토리 앙금도 생겨 났다. 설탕은 제과 생산품의 산출 기준이 될 정도로 중요 원료인지라 생산실적 조사의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설탕 배급량이 줄어들어 더 이상 제과점을 경영할 수 없어 폐업하고 지방으로 이전한 제과업자도 있었다. 이당시 일본인들은 제빵과 제과기술을 우리나라 사람에게 전해주지 않아서 우리고유의 제조 기술을 가진 제과점이 생겨나기 어려운 시기었다.

미군들의 진주와 함께 원조 물자로 밀가루와 설탕이 대량으로 들어오게 되고 빵에 대한 원조물자도 늘어나면서 서울의 시계확장과 인구증가, 그리고 많은 제과업자의 진출로 과자 소비가 큰 폭으로 증가하기 시작한다.

늘어나는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많은 제과제조기술자가 필요하게 되고 손에서 하는 일들을 드릴을 가지고 거품기를 만드는 등의 공작기계를  응용한 아이디어 제품들도 생겨나 양산성에 도움을 주게 된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벽돌로 발효실을 짓고 오븐도 장작오븐에서 숯과 연탄을 이용한 제품으로 발전해 간다.
3. 소년기 (1945 ~ 1960)

1945년 8월15일 광복으로부터 1960년 전까지는 제과업계가 급속히 팽창하는 시기이다. 일제기간동안 민족적 차별에 의해서 우리나라 사람이 제과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전쟁말엽에는 일본인들의 인력난으로 우리나라 사람의 제과기술을 습득할 기회가 많아져서 광복 이후 이들은 우리 제과업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판매 형태는 지금과 달리 단일 점포가 있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도소매가 확실히 구분되어 도매 업자는 생산시설을 갖추고 소매점에 제품을 제공하였다. 그러던 것이 광복과 더불어 자가제조, 자가판매의 형태로 판매구조의 변화를 가져와 전국의 제과점 수는 500여개에 달했다.

1947년 뉴욕제과(창업주;김봉용)는 처음에 충무로에 ‘월화당’이라는 상호로 최모씨와 동업으로 빵과 양과자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후 1949년에 부산으로 내려가 광복동에 ‘뉴욕제과’라는 상호로 개업하였다.

광복이후부터 2004년까지 3대를 이어 온 고려당(창업주;김동환)은 1947년 종로1가에서 창업했다.

태극당(창업주;신창근)도 광복 이후 충무로2가 일본인 소유의 점포를 인수하여 제과점을 경영하다 1953년 3층 건물로 신축한 건물에‘과자 중의 과자점’을 창업한다. 이후 본점인 명동과 종로점, 혜화점, 장충동점을 개설하고 1975년에는 강남구 역삼동에 거대한 본점을 개설한다.

1947년에는 영일당(현 크라운제과 창업 주;윤태일), 1954년에는 독일빵집(창업주;이백이)은 정통 독일식 빵을 주요 아이템으로 동작구 노량진동에 본점을 개설하고 종로점, 영등포점, 신촌점을 개설한다. 1976년에는 경기도 오산에 양산공장을 신축한다.

6.25 전쟁 후 제과업계가 확장되면서 원부재료를 모두 외제 품에만 의존했던 것과는 달리 점차 국산품을 사용하여 빵, 과자를 만들게 되었다.

1952년에는 전쟁으로 페허가 된 과거 일본제분주식회사의 설비를 보강하여 대한제분주식회사 인천공장이 완공되었다. 또한 1953년에는 제일제당 부산공장이 설립된다.

1957년에는 조흥화학과 서울식품공업에서 쇼트링과 마아가린, 드라이이스트가 1961년에는 생 효모가 국내 생산으로 공급되어 제과업계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풍년제과는 부산 국제시장 옆인 부평동에서 창업하여 제과업계에서는 처음으로 1953년 2월 제빵용 강력분을 홍콩으로부터 직접 수입하기도 했다.

덕수제과(창업주;이봉상)는 이북 청진서‘옥춘’이라는 캔디공장을 운영하다 6.25전쟁으로 남하하여 거제도 포로 수용소 근처에서 제빵공장을 운영하다가 전쟁 끝나고 1960년에 광화문에 덕수제과를 개설한다. 6.25전쟁 이  후 우리나라의 제과산업은 본격적인 좌석 판매시대로 전환 되었다.

4. 청년기 (1961 ~ 1970)

1963년 전 까지는 ‘빵집’이라고 일컫는 영세한 가판형태의 단일 점포 체제의 자영제과점 형태가 주종이었으나 1963년 부터는 기업의 체제를 갗춘  양산체제의 제과산업이 등장하게 되었다.

1963년 6월 28일 ‘삼립산업제빵공사’이라는 회사가 가동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빵은 새로운 모습과 방법으로 대량생산이 되어 시중의 각 식품점으로 공급이 되기 시작했다.

‘삼립산업제빵공사’는 예상외로 호조를 보이며 매출이 상승하자 1965년도에는 유지업을 하던 서울식품공업도 제과업에 가담하게 되고 이어 1970년도에는 신동아 그룹의 한국콘티넨탈식품 Co.가 설립되었다.

④ 청년기의 특징은 당시 식생활 개선의 일환으로 분식을 장려하고 이는 제과점이 국가 정책에 순응하는 성격이 되어 양산업체 태동의 시기이다.


5. 성년기 (1971 ~ 1980)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과업계는 단일점포 체제에서 규모가 큰 제과점들이 프랜차이즈(franchise)형태로 점차 영업형태를 확대해 간다.

이 시대에는 일본, 대만, 미국 등과도 국제교류가 활발했다. 특히 늘어나는 제과업계에 부족한 인력난과 제3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었던 1971년부터는 빵, 양과자업계의 성년기라 볼 수 있다.

미국의 원호물자는 1970년대 초를 정점으로 해마다 감소를 가져왔고 정부에서는 백미 소비 억제책으로 국제시장 가격이 저렴한 소맥을 수입하여 적극적인 분식 장려를 하기에 이르렀다.

④ 따라서 급속한 빵류의 소비증가는 빵.양과자업계 발전의 기폭제가 되기도 하였다. 종전 빵.양과자점에서만 팔던 빵이 식생활 개선이란 바람을 타고 급증하는 소비추세에 따라 부산, 대구 등 지방에서는 양산 공장이 늘어났다.

1972년도에는 삼립계열인 샤니가 한국인터내셔날식품 Co.이란 상호로 등장하였다. 이로서 양산업체는 총 7개사에 이르렀다.

그러나 1976년에는 삼우식품이 경쟁에서 낙오되고, 같은 해에 삼미식품이 샤니에 흡수되므로서 양산업계는 5개사가 되어 틀이 잡히게 되었다.

1973년 고려당은 종로에 8층 건물을 짓고 공장시설을 최신화 하였고 태극당도 같은 해 장충동에 직영점을 개설한다.

1974년에는 뉴욕제과가 강남에 안테나 삽을 개설하고 1977년 지금의 군포시에 2500여평 대지에 연건평 1600여평 규모의 공장을 신축하고 80여개의 체인망을 구축한다.

고려당, 태극당, 뉴욕제과는 프랜차이즈 체인망을 확장해 시내 요소마다 체인을 늘려 1970년 말에는 약 190여개의 체인망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체인망 확대는 제과산업에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1979년부터 호텔이 과자류 제조업 허가를 취득해냄에 따라 신라, 프라자, 워커힐 호텔 등이 1년 동안 20여개의 업소를 오픈 하면서 이 중 일부 호텔은 이후 별도 법인으로 독립하여 신라명과나 프라자제과의 전신이 되기도 하였다.

6. 성숙기 (1981 ~ 2000)

1980년대 소비자의 구매형태 및 업계의 변화와 제품의 소비형태를 살펴보면 1980년대 초반까지 하더라도 식빵과 단과자류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케이크의 경우도 버터크림 케이크의 선호도가 높았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중반부터는 보리빵, 옥수수빵, 건강빵, 케이크에 있어서도 당도가 낮고 크림양이 적은 제품을 찾게 되었다.

또한 1980년대 후반기에는 수입 자유화로 바게뜨 등 프랑스 빵과 페이스트리 제품의 유럽 명품 제품이 국내에 보급되면서 한층 고급화되었다. 특히 다이어트식의 확대로 건강빵류의 신장세가 두드러졌다.

1990년대에 들어서 제과업계의 최근 변화라면 아무래도 수도권에서 포화상태에 이른 각 프랜차이즈 업체들의 지방 진출과 그에 따른 지방공장 준공을 들 수 있다. 또 대기업의 제과산업에 대한 진출도 이미 1980년대 초부터 예상되어온 바였지만 최근에 더욱 적극적인 모색과 진출이 이루어지고 있다.

④ 외국 제과업체와 기술합작의 형태도 차츰 대형화가 될 전망이다.

 

7. 정착기 (2001 ~ 현재)

① 그동안 제과산업의 소비형태의 특징은 배가 고파 먹는 시대를 지나 입맛으로 먹는 시대, 그리고 눈으로 먹는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소비자의 구매형태 및 업계의 변화와 제품의 소비형태를 살펴보면 건강을 생각하면서 먹는 시대가 열리었다.

③ 웰빙바람으로 기능성식품, 유기농식품 등이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점차 고객층을 확보해가고 있다.

④ 쌀과 곡물을 이용한 빵과 케익, 과자류 등이 다양한 메뉴의 개발과 매출이 늘어나고 있다.

⑤ 국내의 기술과 자본으로 해외 진출 브랜드가 늘어나고 있다.

⑥ 소규모 자영업은 전문화 제품과 차별화된 서비스로 변모하고, 프랜차이즈는 카드사와 제휴하여 마일리지 적립제도를 도입하여 각각의 고객을 확보하고 있다.

⑦ 고객에게 만족스런 제품 및 접객서비스를 통한 매출 극대화로의 사업전환에 제과산업 전체가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www.coffee-bak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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