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6일 오늘의 역사
2019년 미국 앨라배마 주 임신중지 완전금지, 시술의사 최고 99년형 또는 종신형
2019년 이상화 스케이트 국가대표 은퇴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단거리의 살아있는 전설, 이상화는 서울 중구 더플라자 호텔에서 공식 은퇴식을 열고 선수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휘경여중 재학 시절 성인 선수들을 제치며 태극마크를 처음 달았다. 이상화는 만 16세였던 2005년 3월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500m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며 가능성을 발견했다. 첫 올림픽 무대였던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여자 500m에선 5위에 오르며 한국 여자 빙속 최고 기록을 세웠다. 이상화는 두 번째 올림픽 무대인 2010년 밴쿠버 올림픽 여자 500m에서 깜짝 금메달을 차지하며 국내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메달을 획득했다. 이때까지 세계 스피드스케이팅은 체격 조건이 좋은 서양 선수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이상화는 올림픽 금메달 획득 이후에도 훈련의 강도를 낮추지 않았다. 그는 각종 잔 부상을 이겨내며 월드컵 대회와 세계선수권 대회를 싹쓸이했다. 2012-2013시즌과 2013-2014시즌엔 4차례나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웠다.
2013년 11월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월드컵 2차 대회에서 세운 36초36의 세계신기록은 5년 6개월여가 지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선 여자 500m에서 우승하며 올림픽 2연패를 차지했다. 아시아 선수 최초였다. 2018년 평창올림픽까지 여정은 험난했다. 이상화는 올림픽 직전까지 고질적인 왼쪽 무릎 부상과 오른쪽 종아리 부상으로 시름 했다.
하지만 이상화는 포기하지 않았다. 각종 악조건 속에서도 이를 악물며 모든 것을 쏟아냈다. 그리고 단거리 최강자로 떠오른 고다이라 나오(일본)와 감동적인 경쟁을 펼쳤다. 고다이라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이상화는 은퇴 시기를 놓고 긴 시간을 고민했다. 그리고 평창올림픽이 끝난 뒤 1년 여 만에 은퇴를 공식 선언했다.
2016년 소설가 한강 『채식주의자』로 한국작가 최초로 맨부커상 받음
2015년 단독 ‘3무(無) 요트’ 세계일주 성공한 프리랜서 PD 김승진씨
프리랜서 PD 겸 모험가인 김승진(53) 선장이 세계에서 6번째로 단독 3무(無) 요트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 ‘3무’는 무동력(動力), 무기항(寄港), 무원조(援助)를 말한다. 오직 바람의 힘으로, 항구에 정박하지 않고, 식량 보급 등 아무 지원 없이 홀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인정되는 대기록이다. 1969년 영국의 로빈 녹스 존스톤에 이어 반세기 가까이 일본·호주·중국·인도 등 5개국 출신만 성공했다.
김 선장은 작년 10월 19일 충남 당진 왜목항을 출발, 적도를 건너 ‘바다의 에베레스트’라는 남미 최남단 케이프 혼과 남아공 희망봉, 인도네시아 순다 해협을 거쳐 4만1900㎞를 항해했다. 지난 13일 오후 9시 20분 출발점인 당진 앞바다에 도착해, 16일 210일간 항해를 마치고 환영 행사가 열린 왜목항으로 입항했다.
한국크루저요트협회 박주용(60) 부회장 등 ‘육상 지원팀’ 6명이 24시간 교대하며 기상 정보를 실시간 제공했고, 당진시 부녀회가 고추장·된장·고구마·호박·호두·들기름 등을 미리 마련해줬다. 김 선장은 KBS ‘도전 지구탐험대’ ‘환경 스페셜’을 제작한 다큐멘터리 전문 프리랜서 PD다. TV조선의 ‘크로스미디어 WHY’와 ‘루트 사람사이’도 외주 제작했다. 청주 출신으로, 한성대와 일본 동경비주얼아트 방송예술과를 졸업하고 후지TV에서 방송 제작 경험을 쌓았다.
2012년 로버트 케네디 2세의 부인 메리 리처드슨 별세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조카며느리인 메리 리처드슨 케네디(52)가 16일 뉴욕 자택에서 홀로 숨진 채 발견됐다.
숨진 메리는 케네디 전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전 상원의원의 며느리로, 남편은 유명 환경전문 변호사인 로버트 케네디 2세다. 메리는 로버트 케네디 2세의 두 번째 부인이었으며, 1994년 결혼 후 자녀 4명을 뒀다.
그는 약물과 알코올 중독 등으로 치료를 받아 왔고, 음주운전으로 두 차례 체포된 전력도 있다. 현지 언론들은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 메리가 자살했다고 단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2011년 중견배우 박주아, 69세 나이로 별세
탤런트 박주아(69·본명 박경자)씨가 암 수술 후 회복 중이던 16일 오전 3시 55분쯤 별세했다.
신우암 초기 판정을 받고 지난달 17일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받은 후 중환자실에서 회복 치료를 받고 있었다. 병원측은 "수술 후유증의 일종인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숨졌다"며 "입원 때 이미 심기능이 저하된 상태였고, 고령인데다 고혈압과 당뇨병 증세까지 있었다"고 했다.
고인은 1962년 KBS 공채 탤런트 1기로, '여로'(1972) '세자매'(1982) '하나뿐인 당신'(1999) '눈꽃'(2000) '제국의 아침'(2002) '온에어'(2008) '시티홀'(2009) 등 수십편의 드라마·영화에 출연, 푸근한 어머니와 카리스마 있는 여장부 캐릭터를 연기해왔다. 지난 3월에도 MBC 일일극 '남자를 믿었네'에 출연했지만 병세가 악화되자 중도 하차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고인은 지난해 한 방송에서 "20년 넘게 부모 병수발을 했다"며 "결혼에 대해서는 별 미련 없다"고 했다. 후배들에게 엄격하게 연기 지도하는 것으로 유명해 "젊은 연기자에겐 박주아가 '약'이다"라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2011년 스트로스 칸 IMF총재 ‘성범죄’ 논란
스트로스-칸 IMF 총재가 뉴욕 맨해튼의 호텔에서 여종업원을 성폭행하려한 혐의 등으로 체포돼 기소됐으며 법원에 의해 보석신청도 기각돼 뉴욕의 라이커스 아일랜드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프랑스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며 세계 경제계와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스트로스-칸 IMF 총재는 ‘성추행 스캔들’ 로 인해 결국 2011년 5월 19일 총재직을 사임했다.
2010년 헤비메탈 밴드 '블랙 사바스' 로니 제임스 디오 별세
헤비메탈 밴드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 보컬이었던 로니 제임스 디오(67)가 2010년 5월 16일 위암으로 별세했다.
딥 퍼플 출신의 유명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Blackmore)가 이끄는 레인보우(Rainbow)를 통해 명성을 얻은 그는 1979년부터 1982년까지 오지 오스본이 떠난 블랙 사바스에 합류해 명반 '헤븐 앤드 헬(Heaven and Hell)'을 만들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앞세운 밴드 '디오(Dio)'로도 성공적인 경력을 이어갔으며 최근에는 '헤븐 앤드 헬'이라는 밴드를 결성, 활동을 지속해왔다.
음산하지만 역동적인 그의 마성(魔性)어린 목소리는 70~80년대 헤비메탈의 빼놓을 수 없는 상징 중 하나였다.
2009년 쿠웨이트, 최초 여성의원 당선
쿠웨이트 헌정 사상 첫 선출직 여성의원이 탄생했다. 쿠웨이트 선관위는 2009년 5월 16일 치러진 총선 개표 결과, 4명의 여성후보가 당선됐다고 밝혔다.
여성후보 당선인은 쿠웨이트 첫 여성 장관인 마수마 알-무바라크, 대학교수인 아실 알-아와디, 여성인권 운동가 로라 다시티, 대학교수 살와 알-자사르 등 4명이다. 특히 무바라크 당선인은 자신의 선거구에서 다른 남성후보들을 누르고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쿠웨이트 총선은 5개 선거구에서 10명씩 모두 50명을 선출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자신의 선거구에서 10위 안에만 들어도 의원에 당선된다. 이번 총선에는 남성 194명, 여성 16명 등 모두 210명이 출마했다.
여성의원의 당선은 1963년 쿠웨이트 의회 개원 이후 최초의 일이다. 2005년 알-무바라크가 기획ㆍ행정발전담당 장관에 임명되면서 당연직 의원으로 활동한 적은 있지만 국민투표에 의해 여성이 의원직을 차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쿠웨이트 의회는 직선제 의원 50명과 당연직 각료 15명으로 구성된다.
쿠웨이트 여성에게 참정권과 피선거권이 부여된 것은 2005년이며 이후 2006년, 2008년 총선에 모두 54명의 여성 후보가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2007년 에베레스트 박영석팀 등반대 대원 2명 사망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 등반에 나섰던 박영석 대장팀의 오희준(吳熙俊·36·제주 영천산악회), 이현조(李鉉祚·33·전남대산악부 OB) 대원이 16일 등반사고로 숨졌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머물고 있는 실버원정대가 이날 위성전화로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두 대원은 제5캠프 박스텐트(가파른 벽에 로프로 고정 설치하는 텐트) 안에 있다가 눈사태로 추정되는 충격에 의해 텐트가 해발 8100m에서 6500m의 제2캠프까지 1600m를 굴러떨어지면서 사망했다.
밤중에 눈이 쌓이자 이날 밤 1시쯤 불안감을 느낀 오희준 대원이 베이스캠프의 박영석 대장에게 “어떻게든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다” 며 무전 교신을 하다가 갑자기 교신이 끊어졌다. 이에 곧바로 수색에 나선 한국 산악인들은 이날 오후 3시쯤 제2캠프 근처에서 두 대원의 시신을 발견했다.
사망한 두 대원은 박영석 대장과 트리오를 이루었다고 할 만큼 항상 등반에 동행했던 베테랑 산악인. 오희준 대원은 박 대장과 더불어 이미 8천 미터 거봉 9개를 등정했고, 이현조 대원 역시 8천 미터 봉의 난벽 중 하나인 낭가파르바트 루팔 벽을 비롯해 8천 미터급 4개 봉 등정, 남극점 도보 탐험 등 풍부한 경력의 소유자다.
2007년 프랑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취임식
오전 11시 니콜라 사르코지(Sarkozy ·52)가 프랑스 역사상 23번째, 프랑스 제5공화국의 6번째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자크 시라크(Chirac·74) 대통령은 12년간의 재임 기간을 접고 ‘시민 시라크’로 돌아갔다.
오전 10시 57분 파리 시내 포부르 생토노레 거리.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검은 리무진이 엘리제궁 뜰로 들어섰다. 시라크 대통령이 현관까지 나와, 붉은 카펫 위로 내려서는 사르코지를 맞았다. 두 사람은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핵무기 코드를 넘겨주는 것이 대통령 권한 인수인계의 핵심이다. 30여분 걸렸다.
오전 11시 40분, 시라크를 떠나보낸 사르코지가 100여명의 귀빈이 기다리는 엘리제궁 홀에 나타났다. 장 루이 드브레(Debre) 헌법위원회 의장이 “사르코지가 프랑스 대통령으로 취임했다”고 선포하는 순간, 멀리 나폴레옹 무덤이 있는 앵발리드에서 21발의 예포가 울려퍼졌다.
2006년 1세대 맥북이 갑자기 공개됐다.
2005년 남북 차관급 회담(2005.5.16-19 개성)
2003년 이라크 긴급 의료지원단 발대식, 요르단 암만으로 출발
2001년 산악인 엄홍길, 히말라야 로체봉 등정에 성공.
‘작은 탱크’로 불리는 산악인 엄홍길씨가 2001년 5월 16일 히말라야 로체봉 (8516m) 등정에 성공, 세계 8번째이자 동양인 최초로 8000m급 14좌를 모두 등정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엄씨는 이날 새벽 3시30분 7500m 최종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5시간 45분 만인 9시 15분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엄씨는 2000년 7월 31일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K2 정상에 올라 세계에서 7번째로 14좌 모두를 정복했으나 그동안 국제산악연맹으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해왔다. 1995년 로체봉 등정을 입증할 수 있는 사진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14좌 완등은 1986년 오스트리아의 라인홀트 매스너가 처음으로 성공한 뒤, 이제까지 7명밖에 이루지 못했던 전세계 등반인의 꿈이었다.
1960년 경기도 의정부시 도봉산 골짜기에서 태어난 엄홍길은 어려서부터 도봉산을 오르내리며 산악인의 꿈을 키웠다. 1m68cm, 60kg의 작은 체구지만 최정예 부대인 해군 수중파괴대(UDT)에서도 잠수실력을 인정받을 정도로 엄청난 폐활량과 지구력의 소유자였다. 25세때인 1985년 에베레스트 첫 원정과 1986년 두번째 원정에서 정상정복에 실패했으나, 1988년 비로소 세계 최고봉에 오르면서 그의 히말라야 도전 성공사가 시작됐다. 1998년 안나푸르나 등정 때는 추락하는 셸파를 구하려다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고 낭가파르바트 원정 때는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잘라내기도 했다.
2000년 40년동안 백악관을 출입한 UPI통신 헬렌 토머스 女기자 사직
지난 40년동안 백악관을 출입, 산 증인이나 다름없었던 헬렌 토머스(79) 기자가 2000년 5월 16일 UPI통신을 떠나겠다고 밝혔다. 57년동안 몸담아왔던 UPI를 그가 떠나게 된 이유는 이 통신사를 문선명씨의 통일교재단 소유인 `뉴스 월드 케뮤니케이션`사가 사들이면서였다.
그는 새벽 5시30분 백악관에 제일 먼저 나오는 기자로도 유명했다. 1920년 켄터키주 렉싱턴에서 레반논계 이민자의 딸로 태어난 그는 1942년 웨인주립대를 졸업했다. 이듬해 UPI의 전신인 UP에서 주급 24달러짜리 지방기자로 언론에 발을 디딘 그는 1960년 존 F.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플로리다주 팜비치에서 휴가중이던 당선자 가족을 취재한 것이 계기가 돼, 케네디 대통령 부인 재클린 여사를 전담하는 백악관 출입기자가 됐다.
그는 1976년 세계연감에서 `미국의 가장 영향력있는 25명의 여성`에 선정됐으며 수많은 상과 명예학위를 받았다. 회고록 `백악관 앞줄의 여기자`를 낸 바 있다.
1997년 한석봉 친필서첩 발견
조선시대 명필인 한석봉과 그의 아들 민정이 쓴 글을 합본한 서첩이 발견됐다. 일본 긴키대학의 이원식교수에 의해 1997년 5월 16일 한석봉과 그의 아들 민정의 작품이 담긴 한씨양세묵묘서첩이 공개됐다.
석봉 한호는 1543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열심이어서 집밖에서는 다리 난간에 글씨연습을 하고 산속에 들어가서는 나뭇잎에 글씨를 썼다는 기록도 있다. 석봉은 왕희지로부터 직접 글씨를 받은 꿈을 두번이나 꾸었을 정도로 그의 정묘한 필법을 익히는 것을 필생의 목표로 삼았다. 석봉은 15세 때 향시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하는데 25세에 진사에 합격할 때까지 이곳에서 공부했다. 진사 합격 후 곧 승문원 사자관에 임명됐다. 조선시대 최초의 공식 사자관이었다. 그 후 57세가 돼 가평군수를 맡을 때까지 내직을 돌면서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공신교서 등 수많은 국가문서를 써냈다. 선조는 늘 그를 곁에 두고 붓과 벼루는 물론 때때로 좋은 술과 비단을 하사해 그를 격려했다고 한다.
석봉은 당시 대표급 문인인 차천로·최립·허균 등과 교류할만큼 문학적 소양도 상당했다. 특히 도연명과 이백의 시를 좋아했다. 흡곡 현령을 끝으로 고향에 돌아간 석봉은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다 1605년 세상을 떠났다.
1997년 모부투 세세 세코가 콩고 민주 공화국의 대통령직에서 쫓겨났다.
1995년 옴 진리교 주교 아사하라 쇼코 체포
일본 경찰은 1995년 5월 16일 오전 12명의 사망자와 5천여명의 피해자를 낸 동경 지하철 사린 독가스살인사건의 주범으로, 옴진리교의 아사하라 교주를 체포 구속했다. 경찰은 이날 새벽 5시30분쯤부터 전국 옴진리교 시설에 대한 일제 수색을 벌여, 약 4시간만인 오전 9시45분쯤 야마나시 가미쿠이시키 본부 제6사티안 건물에 은신 중이던 아사하라를 발견, 체포했다.
옴진리교의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는 옴 진리교에 비판적인 인물들에게 테러를 가하고 교단에서 탈퇴하려는 신자들을 납치, 살해한 뒤 흔적도 없이 사체를 처리하는 등 악질적인 범죄를 자행하다 경찰의 손길이 뻗쳐오자 공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독극물 사린에 의한 무차별테러를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1995년 한국-카자흐스탄, 과학기술협력협정-문화협력협정 체결
1993년 술레이만 데미렐, 터키 대통령으로 선출
술래이만 데미렐 총리가 1993년 5월 16일 터키의회 3차 투표에서 전체 4백50표 중 2백44표를 획득함으로써 대통령에 선출됐다. 데미렐 총리의 대통령 피선은 투르구트 외잘 전 터키 대통령이 사망한지 4주만에 이뤄진 것이었다. 술레이만 데미렐 총리는 7번이나 총리를 역임하면서 2차례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적이 있을 만큼 터키의 불안한 정치현실을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이었다.
아나톨리아주 서부 이슬람코이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이스탄불대학에서 공학을 전공, 미국에 유학한 뒤 돌아와 정부의 도시계획 업무에 관여하는 한편, 대학 강단에도 섰던 학자 출신의 정치인이다. 군부 쿠데타로 정부가 붕괴되는 등 정국이 어수선했던 지난 1960년 보수노선의 정도당에 입당,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1964년에 당수자리에 올랐으며, 그 이듬해 선거에서 승리,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총리에 오르는 행운을 누렸다.
1993년 스파이 볼프강 로츠 사망
이집트의 군사기밀을 탐지, 지난 1967년의 중동전에서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두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전설적인 스파이 볼프강 로츠가 1993년 5월 16일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독일에서 출생한 로츠는 이스라엘의 비밀첩보기관인 모사드의 요원으로 지난 1961년 이집트에 침투한 뒤 돈 많은 플레이보이로 위장, 군 간부들에게 접근해 각종 기밀을 빼내는 공훈을 세웠다.
로츠는 극비 군사정보를 탐지하기 위해 자금을 마음껏 사용했었는데 이집트 경찰총수 딸의 코성형수술 비용을 대기도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로츠는 1965년에 아내와 함께 이집트당국에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1968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양국의 포로교환으로 풀려났다.
1990년 북한 조평통 대변인 대남 비난
1989년 1월 정주영 씨 방북 중 체결한 금강산 공동개발은 남한정부 방해로 무효가 되었으며, 현대그룹과는 어떤 거래도 하지 않겠다, 남한정부의 불순한 정치적 목적 비난하며 현대그룹이 북한에 보낸 장비 인수거부
1989년 정명훈, 국립바스티유오페라단 음악총감독 겸 상임 지휘자 취임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씨가 1989년 5월 16일 파리 국립바스티유오페라단 음악 총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다.
정씨는 같은 해 2월부터 이 오페라단의 음악감독 취임 교섭을 받고 그동안 관계자들과의 협의를 거쳐 이날 5년 임기의 음악감독에 취임한 것이다.
프랑스정부가 혁명 2백주년 기념 문화사업의 본보기로 추진한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은 프랑스는 물론 세계최고수준의 오페라극장을 목표로 총4억3천만달러를 들여 건립됐다.
세계 음악계에서 한국출신 음악가로는 가장 중요한 직책에 임명된 정씨는 정명화 정경화 등 두 누나와 함께 세계무대에 알려진 음악가족의 막내로, 1974년 세계최고의 권위를 지닌 소련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피아노 부문 2위를 차지함으로써 화제가 된 바 있다.
최근까지 이탈리아 플로렌스 오페라단 수석 객원지휘자이며 서독 자르브뤼켄방송 교향악단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를 맡아 왔다.
1985년 노신영, 제18대 국무총리 취임
1983년 대규모 신석기 유적지 울진서 발굴 발표
1982년 밀카 프라니노, 유고 첫 여자수상에 피선
1980년 일본 중의원 대평내각 불신임안 가결
1977년 가계수표제도 서울에서 첫 실시
1977년 최규하 총리 지스카르 프랑스 대통령과 회담, 양국 경협강화 논의
1975년 일본여자등반대 다베이 준코가 여성 처음으로 에베레스트산 등정 성공.
1975년 한국-미얀마, 국교수립
1973년 점보기 미주노선 첫 취항(대한항공 KAL)
1973년 대한일보 폐간
1970년 서울대교 개통
한강과 여의도를 가로질러 마포와 영등포를 직결하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서울대교가 착공 2년2개월16일 만인 1970년 5월 16일 개통됐다.
총공사비 15억9천8백만원과 연인원 23만5천명이 동원된 이 다리의 길이는 1천3백90m, 폭 25m의 6차선으로 다리양가에는 각 2m의 보도를 갖췄으며 4백W짜리 수은등 72개가 가설됐다. 이로써 한강엔 광진교, 제 1ㆍ2ㆍ3 한강교에 이어 다섯 번째 다리가 놓였다.
이 다리가 개통됨에 따라 서대문-당인리-용산방면을 거쳤던 약1만5천대의 차량이 매일 이 다리를 통해 지나갔으며 도심지에서 강남까지 30분 걸리던 것이 10분 단축됐다. 또, 서울대교의 마포쪽 입구엔 7억원을 들인 입체교차로가 세워져 서대문, 당인리, 용산방면의 교통량을 논스톱시스템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됐다.
1967년 한국-일본 항공협정 조인
1967년 처음으로 한국법정에서 외국인 공판
1966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됐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66년 5월 4일부터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의 북경확대회의에서 모택동 주석의 승인을 받은 `5ㆍ16 통지(通知)`를 발표했다. 이로써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게 됐다.
이 통지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깃발 아래 학술, 교육, 보도, 문화, 예술, 출판계의 브루조아 반동사상을 철저하게 비판해 지도권을 탈취하며 당과 정부, 군대내의 브루조아계급 대표자를 비판해 일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화대혁명의 직접적인 발단은 1965년 11월10일 4인방중 한명인 요문원이 일간지 `문회보`에 신편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를 발표한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이것이 그후 10년을 진동시키는 문화대혁명의 봉화였다.
1966년 국세청 녹색신고제 실시
1965년 월남의 미군기지 비엔호아에서 폭발사고, 94명사상, 비행기 41대 손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 첫 미국 공식방문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1965년 5월 16일 존슨 미국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존슨 대통령의 특별전용기인 보잉708편으로 김포공항을 출발, 미국을 공식방문했다. 박 대통령은 2박3일간 워싱턴에 머무는 동안 존슨대통령과 두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박대통령과 존슨대통령은 17일 오후 5시5분부터 1시간40분 동안 제1차 회담을 한데 이어 18일 오후 5시부터 40분동안 제2차회담을 한 후, 합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공동성명에서 월남 공화국 지원과 관련해 긴밀한 협조체제를 갖추는 한편, 미국이 한국내에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미국과 제휴, 한국군의 전력을 증강할 것을 밝혔다. 이밖에도 한국군 월남파병에 대한 보상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대통령 내외 일행은 10일간의 방미일정을 마치고 27일 존슨대통령의 전용기편으로 귀국했다
1963년 해군최초 구축함인 충무함 인수
충무함은 1943년 미국 Bath Iron Works 조선소에서 건조된 전투함으로, 1963년 5월 16일에 대한민국 해군으로 인도되었다. 충무함은 해군의 주력 전투함으로 활동하였으며, 활동 기간 동안 6차례의 간첩선을 격침·나포하는 등의 혁혁한 전과를 올린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충무함의 활동 기록을 살펴보면, 1965년 3월에 거진 근해에 침투한 간첩선을 나포하고 간첩 8명을 생포하였으며, 1966년 10월에 울릉도 근해의 간첩선을 격침시켰다. 또한, 1968년 8월 서귀포 근해에 접근한 간첩선을 격침하는 과정에서 간첩 3명을 생포하고 11명을 사살하였으며, 1969년 6월 어청도 근해의 간첩선 1척을 나포하고 간첩 11명을 사살하였다. 1969년 10월에는 소흑산도 근해의 70톤급 간첩선을 격침시켰고, 1974년 7월에 어청도 근해의 간첩선을 격침하며 간첩 10명을 사살하는 등 많은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이후의 과정에서 한국형 구축함들이 자체 건조되는 경향에 따라 충무함은 1993년 3월에 퇴역하게 되었다. 충무함이 퇴역한 후, 충무함의 활동 기간 동안 대한민국 해군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데 충실히 전공을 세운 역사적인 사실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전쟁기념관 해군실에 충무함을 복원시켜 놓았다.
1961년 그린 미국 대리대사,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 합헌정부지지 공동성명
1961년 5ㆍ16 군사혁명
5ㆍ16 군사정변은 당시의 정치ㆍ사회적 문제와 군 내부의 문제라는 두 가지 배경을 갖는다. 정치권은 집권당인 민주당이 신ㆍ구파간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군 내부에서는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고급 장성의 부정부패와 승진의 적체현상을 공격하는 `하극상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8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명 및 사병 3,500여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중앙청과 국방부, 중앙방송국, 중앙전신국 등 주요기관을 점령했다. 이것이 그 뒤 32년 간에 걸쳐 군인이 지배하는 역사의 시작이었다. 혁명 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권을 장악하면서 군사혁명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이 군부 정권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육군 참모총장인 장도영을 앉히고 박정희는 부의장으로 머물렀다. 3일 뒤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했다. 7월 3일에는 장도영을 중심으로 한 44명의 군인들이 반혁명의 죄목으로 제거되고, 박정희 부의장이 의장에 취임했다. 이로써 3년 간의 군정통치가 시작됐다.
이 군사정변은 초기에 미8군사령관 C.B.매그루더, 야전군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쳤지만,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 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의 묵인 등에 의해 성공했다.
1960년 파리 동서수뇌회담 개최
1956년 영국 몬테베로섬서 원폭실험
1956년 첫 TV 방송
1951년 볼리비아 군부쿠데타 발생
1951년 국회, 제2대 부통령에 김성수 선출
1948년 아랍해방군 예루살렘 침입 제1차 중동전쟁(팔레스타인전쟁) 일어남
1942년 사회인류학의 창시자인 말리노프스키 사망
말리노프스키는 처음으로 현지언어에 숙달하여 장기적 참여관찰을 실천함으로써 전문적인 문화인류학의 현지조사(fieldwork) 방법을 `창출`했다.
1884년 폴란드(당시는 오스트리아 영토)의 크라코프에서 태어난 말리노프스키는 야겔로니안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해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08년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 2년 간 심리학과 경제사를 공부했다. 인류학자로서 말리노프스키의 학문 인생은 1910년 폴란드 정부 장학금을 받고 영국 런던정경대(LSE)로 건너가면서 시작됐다. 그는 1920년 LSE에서 강의를 시작해 1927년 사회인류학 정교수가 됐다. 1937년 경쟁자인 래드클리프-브라운이 옥스포드대 교수가 될 때까지 영국 대학 유일의 사회인류학 교수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1931년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단체 ‘신간회’ 해산
신간회(新幹會)는 일제 강점기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대립과 갈등을 지양하고 힘을 합쳐 공개적으로 일제에 대항한 국내 최대의 민족운동단체였다.
1927년 2월 15일에 열린 창립식에서 이상재 조선일보 사장이 초대 회장에 선출되고, 간부·발기인 51명 가운데 신석우·안재홍 등 조선일보 출신이 12명이나 이름을 올려 총독부는 조선일보를 사실상 신간회 기관지로 생각할 정도였다.
한때 전국 140여곳에 지회가 설치되고 회원수도 4만여명에 달할 만큼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신간회가 내리막을 걸은 것은 1929년 12월의 민중대회 사건 때부터였다.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민중대회를 강행하려다 일제의 탄압으로 관련자 수십명이 연행·구속된 것이다. 민족주의 진영에 비해 열세였던 좌익 진영도 내분을 부추겼다. 신간회를 계급적 투쟁목표가 선명한 조직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해소론(解消論)’을 내세우며 전체대회를 요구한 것이다. 1931년 5월 15∼16일, 이틀간 신간회 전체대회가 열렸다. 창립 4년4개월 만에 처음 열린 대회였다.
민족주의 진영은 ‘해소론’을 비판하고 신간회를 계속 존속시킬 생각으로 대회에 임했고 결과도 낙관했다. 하지만 16일의 투표결과는 찬성 43, 반대 3, 기권 30. 해소안이 가결된 것이다. 일제는 “해소는 해체와 같다”며 신간회 활동을 금지시켰다.
1929년 제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1929년 5월16일, 제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헐리우드 내 루스벨트호텔에서 열렸다. 참석자는 250명. 5분간 진행된 대회 입장료로 10달러를 받았다. 1927년∼1928년의 작품을 대상으로 심사한 결과 여우주연상은 재닛 게이너가, 남우주연상은 에밀 야닝스가 수상했고 감독상은 루이스 마일스톤과 프랭크 보제이즈가 공동수상했다. 작품상은 2개 부문으로 나뉘었는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상은 윌리엄 웰만 감독의 ‘날개’가, 예술적인 작품상은 무르나우 감독의 ‘선라이즈’가 수상했다.
주최측인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는 당시의 영화 추세가 토키영화(발성영화)로 이행되는 전환기였지만 무성영화 만을 심사 대상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첫 해에는 자막상(字幕賞)도 있었다. 최초의 토키영화 ‘재즈 싱어’는 특별상을 수상했다.
수상자에게 주어지는 트로피를 ‘오스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아카데미 사무국 직원이 그 상(像)을 보고 마치 자신의 삼촌 ‘오스카’를 닮았다고 한데서 연유한다. 6회 시상식에서 한 영화평론가가 캐서린 햅번의 첫 여우주연상 수상을 거론하면서 ‘오스카’를 언급한 후부터 ‘오스카’로 불린 것으로 전해진다.
1922년 조선일보, 신활자를 주조하여 신문활자를 개선
1920년 제1회 전조선 체육대회 개최
1920년 함경선 개통
1875년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에 지진 16,000명 사망
1858년 청-러시아간에 애혼(愛琿)조약. 흑룡강을 국경으로하고 연해주를 공유.
1831년 탄소 마이크로폰을 발명한 미국의 휴스 출생
1605년 교황 바오로 5세가 233대 로마 교황에 취임.
1429년 정초(鄭招), 농사직설(農事直說) 찬진
1401년(조선 태종 1) 백색의복 착용금지
928년(신라 경순왕 2) 견훤 서라벌 공격
682년(신라 신문왕 2) 만파식적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