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석남동 14.6.20 게재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 考 44 140606
해안경비 병사들이 번을 섰던 번작리 석남동
고잔 옻우물 바그메 등 정겨운 지명들은 사라져
서구 석남동(石南洞)은 원적산(元積山) 기슭에 발달한 마을로 지난날 부평부 석곶면 소속에 번작리(番作里), 고잔(高棧), 옻우물, 박가뫼말〔朴家墓村〕등 네 개의 자연취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1789년 간행한 《호구총수》에는 대표 취락인 번작리가 법정리로 기록되어 있다. 1911년 발간 《조선지자자료》에는 번작리에 소리(小里 자근말)와 큰말(大里 큰말)이, 고잔리에는 칠정리(漆井里,옷우물), 굴내리(屈內里 굴안말)이라는 자연취락 이름이 실려 있다.
일제강점기 지명은 무라가미초(村上將町)였다. 러일전쟁 때 인천 앞바다 해전을 지휘한 함대사령관 무라가미(村上)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번작리는 번지기로도 불린다. 옛날에 포구였고 군대의 기지와 초소가 있어 근무당번을 정해 번을 섰던 터라 그런 지명이 붙었다. 오늘날 ‘거북시장’이라 이르는 저자와 그 아랫쪽 마을이 옛날의 번작리이다.
고잔은 해변을 향해 쭉 뻗어간 지역을 이르므로 많은 동명이소(同名異所)가 있다. 인천에도 오늘의 중구 일대, 남구 고잔동, 그리고 경서동까지 4곳이나 있었다. 석남동의 고잔이 특이한 것이 있다면 유독 높을 고(高)자를 쓴다는 것이다. 이 곳 고잔은 1960년대만 해도 인가가 두세 채에 불과했다.
옻우물은 북쪽 마을이다. 발음되는 대로 ‘오두물’이라고도 불렀다. 옛날에 우물이 있었는데, 옻이 오른 사람이 와서 몸을 씻으면 잘 낫는다 하여 붙여졌다. 옛날에는 계곡에 숲이 우거지고 맑은 샘물이 흘렀다. 작은 규모의 간장공장이 있었고 노송들이 키를 자랑하며 서 있었다. 지금 석남초등학교가 들어선 곳부터 거북시장의 위쪽(북쪽) 끝, 그리고 신도로 옆의 지금 강남시장이라 부르는 곳까지가 옛날의 옻우물 마을이다. 지난날 병을 낫게 한 우물샘이 있던 그 자리는 지금도 석남약수터라 불리며 물통을 든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다.
박가외말은 동쪽 산밑에 있었으며 ‘바그메’라고도 불렀다. 이 곳에 박씨의 묘가 있어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 전하는데, 이 곳에서 평생을 산 주민들은 박씨보다는 배(裵)씨가 더 많았다고 말한다. 이 곳에서는 초콜릿 빛깔의 찰흙이 많이 나와 아이들이 맛있게 먹기도 했다. 이 곳에는 약 40년 전부터 ‘마가의 다락방 기도원’이 자리잡고 있다.
검정다리마을은 큰길 옆에 있었다. 일제 때 주민들을 강제부역시켜 만든 국방도로에 검정색 콜타르를 칠한 목제 육교 2개가 1960년대 초까지 놓여 있었다. 저절로 이 육교 근방에 가옥들이 들어서고, 그 취락을 검정다리마을이라 불렀다.
독굴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옻우물 마을에서 원창동 쪽으로 나갈 때, 도당재산 밑의 골짜기를 바라보며 걷게 되어 있었다. 이 골짜기에서 독을 구웠다 하여 독골이라 하였고, 여기 취락이 들어서자 독굴마을이라 불렀다.
오늘의 행정동명인 석남동은 옛 석곶면의 남쪽에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번작리 포구는 사람을 실어 나르기보다는 인근 밭에 줄 인분을 실은 ‘똥배’가 많이 와서 서 있었다. 원적산이 마을의 동쪽을 감싸고 있는데 이 산은 북구 산곡동(山谷洞)에 닿아 있다. 석남동에서 오래 살아온 노인들은 철마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심곡동과 가정동에 닿아 있는 철마산의 한 지맥이라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고잔산은 바닷가에 있는 산이다.
고작천(高作川)은 이 곳이 고작리로 불리던 시절에 명명된 이름이다. 원적산에서 발원하여 석남동의 중앙을 흐르는 작은 하천이었는데 지금은 복개되어 있다.
지난날 석남동 아래쪽은 광활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둔전(屯田)들’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군대에 소속된 토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의 번지기라는 지명과 연계하면 옛날에 이 곳이 상당한 규모의 군대가 주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들판에는 윗방죽, 아랫방죽, 안방죽 등 세 개의 제방이 있었다.
석남동에는 위에서 설명한 독골, 박가의 묘가 있던 박가뫼골, 갯가에 있었다는 먼갯골, 이렇게 세 개의 골짜기가 있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하천, 들판과 함께 모두 도시화되면서 시가지로 변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