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 DOGS
-미친개들-
개들이 짖고 물어뜯는 것을 즐기도록 그대로 놓아두어라. 신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자나 하늘을 나는 용도 실컷 울부짖고 싸우도록 놓아두는 것이다. 그것 또한 그들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아이작 왓츠-
개는 충성보다 애정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그것은 비록 개가 우리 인간에 대하여는 충성스러웠을지 몰라도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충성스럽지 못했기 때문이다. -클라렌스 데이-
굶주린 개는 데리고 가서 잘 길러주면 주인을 물지 않는다. 이것은 개와 인간의 큰 차이점이다. -마크 트웨인-
우리들이 기르고 있는 개는 아무리 마음씨가 고약한 사람에게도 잘 따르고 복종하는 그 무분별한 충성심 때문에 사람들의 딱한 자만심이 조장되는 것이다. -아그네스 리폴리어-
한 가지 명심해야할 것은 사람은 야생동물인 동시에 인간이지만, 야생동물은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헬렌 후버-
단지 인간의 즐거움을 증진하기 위하여 또는 단지 인간의 생활방식을 고양하기 위하여 동물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전혀 정당성이 없다. -요크의 지구장-
개(포유류)(DOG) : 늑대·재칼·여우등과 함께 개과에 속하는 동물. 개요개과 속하는 동물들은 사냥에 적합한 신체적 특징으로 먹이를 잡기에 알맞은 치아와 강력한 턱 예민한 후각 및 청각을 갖는다. 또 본능적으로 무리를 지어 서로 협조한다. 고양이와 달리 개는 야생생활에 적응이 어려웠으며,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무리의 지도자 혹은 사실상 대리지도자인 사람에 의지하면서 생활해왔다.
광기
이천팔 년 십이월 삼일. 지구상에서 인류를 종말로 몰아넣은 의문의 사건이 시작된 날이다. 그날, 네바다의 카슨시티에 위치한 밀스 공원에서 자신의 취미 활동이자 직업이라는 이름의 일을 행하는 중인 한 여인이 있었다. 피부나이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을 한 듯 했으나 그녀의 실제 나이는 스물여덟 살의 그런대로 젊은 나이였다. 오른손에 들린 짧은 사비연필로 정면에 놓인 이젤 위에 있는 커다란 종이에다가 손님의 얼굴을 그려나가는 거리화가가 그녀의 직업이다. 편안한 의자에 앉아 손님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동안에 누군가가 그녀를 한눈에 봐도 어딘가 좀 불편한 구석이 적지 않게 있는 인상이었다. 눈 밑으로 얕게 깔린 다크서클과 한동안 좀 굶었는지 쏙 들어간 볼 살, 깊게 눌러쓴 모자를 비롯한 추위에 대비해 몸을 따스하게 해줄 옷가지들이 그녀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잘 대변해주었다. 특히 다크서클과 쏙 들어간 볼 살은 이 직업이 얼마나 험한 직업이며 남들이 꺼려하는 직업인지 잘 설명해주었다.
‘오늘은 아무도 안 오려나?’
사실 거리화가를 택한 것도 그랬지만 이런 직업을 택함으로써 그녀는 돈과의 거리를 한참이나 두어야만 했다. 그 대신 가져야 할 건 인내심과 끈기였다. 그 두 가지만 가지고 있다면 거리화가라는 직업이 그리 지겨운 직업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상당히 끌리는 직업도 아니었다. 단지 그녀라는 인격체가 가진 적성에 잘 맞는 직업이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밀스 공원에 와서 손님들을 기다린 지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난 듯했다. 평소라면 적어도 한 두어 명 정도는 일찍 와줬어야 정상이었다. 오늘 밀스 공원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가족과 함께 산책을 나온 듯 보였다. 반면에 개와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개에 대해서는 잘 알지는 못 하지만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개들도 몇 마리 보였다. 보기에도 안쓰러운 작은 치와와와 그에 비해 거대한 몸집을 지닌 골든 레트리버, 그리고 사냥개에 가까운 모습을 한 시베리안 허스키와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분홍 털의 푸들도 보였다. 그중 누구에게나 가장 눈에 띄는 개는 시베리안 허스키와 골든 레트리버일 것이다.
“저기, 혹시 그림 그려주나요?”
기다림에 지치려고 할 찰나에 어린 소녀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머리를 양쪽으로 땋은 금발에 볼에는 홍조를 띈 소녀는 일곱 살 정도로 보였다. 빨간 스웨터에 어울리지 않는 청치마 아래로는 노랑, 분홍, 녹색이 서로 교차되는 스타킹을 신은 소녀였다. 드디어 오늘의 첫손님인가? 앨리샤 리프너는 기쁜 마음으로 오늘의 첫손님을 맞이했다.
“그럼요, 꼬마 아가씨. 뭘 그려드릴까요?”
“헤헤, 제 얼굴도 그려주나요?”
꼬마 아가씨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요, 당연하죠. 거기 의자에 앉으세요.”
앨리샤는 이젤 뒤에 놓인 손님용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그래야만 마음 놓고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흑백이어도 상관없죠?”
앨리샤가 꼬마 아가씨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아이가 흑백이 뭔지 알기나 할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낄낄거리려고 했지만 손님 앞에서 그런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삼가기로 했다.
“네. 괜찮아요.”
아는가보다.
앨리샤는 먼저 사절지에 해당하는 종이에 전체적인 뼈대를 잡아갔다. 먼저 그녀만의 방법으로 사비연필을 이용해 꼬마 아가씨의 기본적인 얼굴 형태를 잡고 양옆으로는 길게 땋은 머리의 형태를 그려 넣었다. 머리를 그려 넣는 과정에서 유난히도 꼬마 아가씨의 얼굴에 홍조가 가득하다는 특이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뭐, 그리는 데에는 상관없겠지. 어차피 흑백인데.
얼굴의 전체적인 틀을 그려 넣은 다음에 행할 두 번째 순서는 눈, 코, 입의 구도를 그려 넣은 차례였다. 다행히 꼬마 아가씨의 얼굴은 단순했기에 구도를 넣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앨리샤는 꼬마의 눈을 그려 넣었다. 동그란 눈과 이젠 보기 드문 파란 눈동자가 정말이지 매력적인 눈동자였다.
“이름이 뭐예요?”
그녀가 눈을 그리면서 물었다.
“리즈.”
꼬마 아가씨가 싱긋 웃었다.
아직 갈지 않은 젖니가 보이도록 그녀는 활짝 웃었다.
“예쁜 이름이네요.”
아이의 눈동자는 옅은 회색빛으로 색칠했다. 태양의 위치와 빛의 방향을 고려해 그림자는 왼쪽으로 치우치도록 그렸고 볼의 홍조는 연필을 옆으로 뉘어서 그렸다. 이제야 안 사실 중 하나가 꼬마 아가씨 리즈의 볼은 앨리샤와 비교가 될 정도로 통통하다는 것이었다.
“자,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 그녀가 말했다. “돈은 됐어요. 아가씨는 특별히 공짜로 해줄게요.”
앨리샤는 이젤에서 종이를 뽑아내어 소녀에게 건넸다.
“우와, 정말요? 고맙습니다.”
소녀는 방긋 웃으며 종이를 들고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아마 같이 산책 나온 엄마에게 달려가는 모양이다. 앨리샤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녀는 다른 손님이 올 때를 대비해 새로운 종이를 이젤에 끼워놓고 언제 올지 모를 다른 손님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앨리샤에게는 청바지와 단추달린 하얀 스웨터, 안에는 하얀 티셔츠, 머리에는 깊게 눌러쓴 모자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따뜻해 보이지 않는 옷차림이었지만 그녀는 나름 따뜻한 옷차림이라고 여겼다. 솔직히 옷을 안 입는 것보다는 낫잖아? 손끝에 간신히 매달린 몽땅 연필은 그녀가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렸는지 말해주었다. 거리 화가라는 직업을 택한 지도 어느덧 1년이 흘렀다. 1년 동안 그녀는 백 명이 넘는 손님들의 얼굴을 그려주었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아왔다. 한 장에 약 이 달러쯤 하는 그녀의 그림은 초상화를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달려와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하기 마련이었다.
대학과정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녀는 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고 싶었는데 거리화가를 택한 거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어릴 적 소원이기도 했던 거리화가에게서 느낀 묘한 매력에 매료된 것이 바로 그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렇듯 앨리샤에게도 남들에게 말 못할 비밀이 있었다. 그건 바로······.
“얼굴도 그려주나요?”
오늘의 두 번째 손님이다.
남자 손님이었는데 파란 스웨터와 청바지를 입었고 스웨터의 넓은 V자 사이로 하얀 티셔츠가 보였다. 그도 요즘에는 보기 드문 파란 눈동자의 소유자였다. 오늘따라 파란 눈동자가 왜 이렇게 많지?
“네, 그럼요. 거기 앉으세요.”
앨리샤는 방긋 웃으며 의자에 앉기를 권유했다.
“눈이 예쁘게 생기셨네요.”
그녀의 말은 결코 호감이 간다는 뜻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었다. 단순히 거리화가가 그릴 대상의 생김새를 살피며 상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말하는 상투적인 언어에 불과했다.
“좀 오래 걸릴 수도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시길 바래요.”
그녀가 부탁했다.
남자는 삼십대 후반으로 보였다. 삼십대 후반이면 한 가정의 기둥이 되어있을 나이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조금 통통한 얼굴과 뒤로 잘 빗어 넘긴 머리. 거기에 검은 정장을 입으면 작가의 이미지가 딱 떠오르는 얼굴이었다.
“얼마나 걸리는데요?”
손님이 물었다. 왠지 불만이라는 얼굴이었다.
“글쎄요, 손님에 따라 기본적으로 십 분에서 십오 분 정도가 소요돼요. 그런데 손님 같은 경우는······.” 그녀는 진정시킬 목적으로 안정적인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세요. 전 늦어도 십분 안에 손님 얼굴을 정성스럽게 그려드릴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남자는 다행이라는 어조였다.
앨리샤는 꼼 아가씨 리즈의 얼굴을 그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연필로 종이에 전체적인 틀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얼굴의 윤곽을 비롯한 눈의 위치와 코의 위치, 귀의 위치와 머리의 전체적인 생김새까지 그리는 데에 걸린 시간은 고작 해봐야 삼분이었다. 다음 순서로 남자의 구도를 그려 넣을 때 남자는 낡은 모토로라 휴대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기에 이르렀다. 남자는 그녀에게 오른쪽 집게손가락을 들어 보이면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뜻의 손짓을 만들었다.
“오, 잠시만 기다리세요.”
앨리샤는 연필을 쥔 손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숨이 아래서부터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어, 여보. 나? 지금 밀스 공원. 아, 그림 하나 그리고 간다고. 어, 그래그래. 여기 화가 분께서 십 분이면 된다니까 잠깐만 기다려줘······.응, 나도 사랑해.”
남자는 휴대폰에 입까지 맞추며 대화를 끝내고 다시 화가를 위해 준비 자세를 취했다.
“죄송해요, 제 아낸데 집에 열쇠가 없다고 그러네요.”
남자는 대충 넘겨짚었다.
“아, 네······.”
앨리샤는 그림을 마저 그리기 시작했다. 빈종이 위에 희미하게 그려진 남자의 얼굴 위로 주름살의 흔적과 인중, 미간 사이를 그려 넣고 옅은 눈썹도 그려 넣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한 대로 정확히 십분 후 한 장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다 됐습니다, 손님.”
그녀는 손님에게 그림을 넘겨주었다.
“이 달러요.”
그녀가 값을 부르자 손님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정확히 이 달러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두 명의 조지 워싱턴이 앨리샤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밀스 파크의 구석에서 산책 중인 골든 레트리버 한 마리의 짖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왔다. 그림을 건네받고 지갑을 주머니에 넣다말고 손님은 개의 소리가 들려오는 공원의 구석을 바라봤다. 앨리샤는 두 명의 조지 워싱턴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오늘따라 개하고 나온 사람들이 참 많죠?”
그가 물었다.
앨리샤는 손님이 바라보는 방향을 보며 골든 레트리버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러게요.”
“사실은 저희 부부는 결혼한 지 이년이 넘었는데도 아이가 없어서 개를 한 마리 기르고 있어요. 닥스훈트 종인데 오늘은 어디가 아픈지 시내에 있는 동물병원에다가 맡겨놓고 오는 길이예요.”
“아, 네······.”
그녀는 오 분전과 똑같이 ‘누가 물어봤냐고요?’라는 어조로 대답했다. 남자는 그림을 둘둘 말아서 왼손으로 쥐었다.
“그럼 그림 고마웠어요.”
남자 손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그곳에서 떠났다. 앨리샤는 다시 혼자가 됐다는 걸 실감하지 못했다.
밀스 파크의 모든 곳에서 사람들의 즐거운 환호성이 들렸다. 즐거움이 가득한 비명소리는 물론 주인의 명령에 따라 던진 물건을 물고 쪼르르 달려가는 개들의 짖는 소리도 끊기지 않았다. 넓은 잔디밭처럼 깨끗한 하늘에는 서쪽부터 시작해 먹구름이 조금씩 몰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새 종이를 이젤에 꼽고 다리를 꼬고 앉았다.
최근 일주일 동안 알아낸 건데 거의 세 번째 손님부터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두 번째 손님까지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찾아오길 마련인데 세 번째 손님부터는 아예 다가올 생각조차 없는 듯 했다. 뭐, 사실 공원 내부에서 거리화가로써의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혹은 애완동물과 함께 공원으로 오는 이유는 여가 시간을 만끽하고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러 오는 것이지 그림쟁이에게 그림을 부탁하러 오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그림쟁이에게 그려달라는 요구가 안 오면 그녀로써도 약간은 죽을 맛이었다. 지상에서 바라보는 느린 움직임의 구름마냥 더디게 흐르는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지겹고 짜증나는 순간이었다.
“이거 잡아봐, 루시! 어서 잡아보라니까!”
뒤에서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앨리샤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소녀와 함께 달리는 달마시안을 바라봤다. 비쩍 말라 연약해 보이는 다리와 젖소 같은 점박이, 끝이 뾰족한 꼬리는 녀석이 날렵하다는 걸 충분히 증명해주었다. 저 녀석이 수컷이라면 루시라는 이름은 썩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저 녀석은 암컷일거다.
굳이 달마시안이 아니더라도 함께 산책 나온 개들은 많이 있었다. 사자의 갈기 같은 풍성한 갈기를 선보이는 말라뮤트와 앙증맞은 마르치스, 부채를 연상케 하는 큰 귀의 주인 바셋하운드와 버니즈 마운틴도그도 보였다. 공원의 남쪽으로는 불도그의 다리를 늘린 것처럼 생긴 보스턴테리어도 보였다. 여기까지가 그녀가 알고 있는 개의 종류이다. 북쪽으로도 양의 얼굴과 닮은 이름 모를 개도 보였는데 뭔가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 저기 블랙 러시안 테리어도 있었네?
“저기?······”
미처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개들을 바라보던 앨리샤가 놀래면서 세 번째 손님을 바라보았다. 세 번째 손님 징크스도 목숨을 다했나보다. 사십대에 막 접어든 걸로 보이는 세 번째 손님은 장미꽃다발을 든 붉은 머리의 여성이었다. 입은 티셔츠도 붉은 색이었고, 오직 치마와 구두만 검정색이었다. 그러니까 머리와 티는 붉은 장미고, 치마는 흑장미라고 생각하면 편하겠다.
“아, 네. 어서 오세요.”
하마터면 두 번째 손님까지 말한 지루한 대사 “거기 앉으세요.”를 말할 뻔했다.
“그림 그려준다고 해서 왔는데······.정말 그려주나요?”
“그럼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앨리샤는 놀래서 잔디밭 위로 떨어뜨린 연필을 집어 들었다.
“오늘 날씨 참 좋죠?”
“그건 됐으니 어서 그리기나 하세요. 저 정말 바쁜 사람이거든요?”
장미여인이 까칠하게 굴었다.
“아, 그러세요?······”
본부대로 해드리죠, 부인. 앨리샤는 꼬마 아가씨와 작가 스타일의 남자에게 했던 방식과 똑같이 먼저 전체적인 윤곽을 그려갔다. 문득 생각난 건데 지금 그녀의 앞에 앉아 그림을 기다리는 장미여인에게 장미꽃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인상이었다. 차라리 흑장미라면 모를까.
초면에도 말을 잘 거는 그녀의 성격 탓에 무슨 말이든지 장미여인에게 걸어보고 싶었다. 개들이 참 많다고 물을까? 어디 사냐고 물어볼까? 아니면 남편의 직업이 뭐냐고 물어볼까? 애들은 뭐 하세요? 남편은요? 혹시 애완동물 키우세요? 됐다, 때려치우자. 그녀는 장미여인의 눈치를 살피고는 그만두기로 했다.
“아직 안 끝났어요?”
그림그리기를 시작한지 삼분도 안 되었는데 장미여인이 그녀에게 보채는 어조로 물었다.
“네?”
“아직 안 끝났냐고요?”
장미여인이 귀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적어도 십분은 있어야 그림이 완성되는데······.”
“십 분이나요? 오, 맙소사. 제가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것 같네요. 사람들이 모두 여길 추천해줘서 와봤더니······.실망이네요.”
“그래도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앞으로 오 분이면 다 완성되는······.”
“됐어요. 그래도 반은 그려줬으니까······.여기 이 달러죠? 그럼 여기, 일 달러요.”
장미여인은 구겨진 조지 워싱턴의 일 달러를 잔디밭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홀연히 다른 곳으로 떠났다. 앨리샤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억지로 참았다. 그녀는 잔디밭 위에 떨어진 일 달러를 줍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더군다나 장미여인이 그려지다 만 종이는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다. 세 번째 손님 징크스가 잠깐 잠복기를 가졌던 걸까? 어제도 그랬듯 세 번째 손님 징크스는 깨지지 않았다. 유리조각처럼 와장창 깨져버려야 할 징크스는 세상에 수없이 많았는데 그녀에게도 징크스가 있다는 건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거리화가의 꿈을 처음으로 실현시킨 날도 이러지는 않았다. 첫날에도 밀스 공원에서 손님을 받았고 두 번째 날도, 세 번째 날도 그랬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유독 요즘에만 그러는 거지? 안 그래도 그녀의 몸속에서 자라나는 특정한 병(덩어리) 때문에 약값은 물론 병원비도 장난 아니게 나가는 실정이었다. 혼자서 그 모든 걸 감당해내는 것도 신물 나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약값과 병원비 때문에 월수입의 반이나 쏟아 붓는다고 말하면 이런 대답이 날아올 게 뻔했다. “가족에게 손을 뻗어.” 그래, 당신들은 가족이 있겠지. 그녀는 고아였다. 최소한 그녀가 부모에 대해 알고 지내는 건 자신이 갓난아이일 때 어느 미혼모 한명이 뉴욕의 고아원에 버리고 갔다는 사실이다. 그게 전부다. 자신의 부모가 미혼모든, 기혼모이든 상관없다. 어차피 곁에 없는데······.형제는 물론 자기를 버린 미혼모와 성관계를 가진 남자에 대한 소식은 까마득하기만 했다.
앨리샤는 희미한 장미여인이 새겨져있는 종이를 가로로 한번, 세로로 한번 접어서 가져온 가방에 쑤셔 넣었다. 화가 치미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는 건 그녀의 건강을 더 위협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참고 또 참아야했다.
“으악, 루시! 이러지 마!”
현재 시간은 오후 다섯 시, 루시라는 이름의 달마시안과 행복한 한때를 보내던 소녀의 즐거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앨리샤는 이번에도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소녀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소녀를 깔고 올라간 루시가 뭔가를 핥는 듯했다. 뭐, 어디까지나 주인의 입술을 핥는 거겠지. 그럴지도. 아니, ‘그럴지도’가 아니라 그래야 정상이었다.
앨리샤는 돌린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깨끗한 종이가 이젤에 끼워졌다. 루시의 꼬마주인이 또 행복한 비명을 지르자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뭔가가 이상했다. 고개를 돌리자 꼬마주인의 비명은 행복한 비명보다는 공포에 질린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다. 소녀의 위로 올라간 루시가 꼬마주인의 입술에 키스를 하는 것 같았다. 잠깐, 저 빨간 물이 뭐지? 미술을 전공한 앨리샤는 순간적으로 빨간 물감을 뒤엎은 소녀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저건 물감이 아닌데······.오, 저럴 수가. 루시의 입이 소녀의 입술을 물어뜯고 있었다. 윗입술을 물고 고개를 위로 쭉 들어 살을 잡아 째버리는 놈의 실력은 전형적인 야생개의 모습이었다. 화들짝 놀란 앨리샤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고개를 뒤로 쭉 뻗은 루시의 입 끝에서 꼬마주인의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매달려있었다. 소녀의 입술이 반이나 뜯겼고 그 사이로 부러진 앞니와 송곳니가 하얀 점으로만 보였다. 입술을 물고 일어난 놈이 고개를 양옆으로 휙휙 돌렸다. 그 속도에 따라 꼬마주인의 얼굴이 빠르게 요동쳤다. 하염없이 쏟아져 나오는 붉은 물결이 녹색으로 가득 찼던 잔디의 바다 중 일부를 붉게 물들였다.
루시의 의외적인(다소 폭력적인) 모습을 보고 달려온 사람들이 모두 달마시안의 꼬리와 뒷다리, 몸통, 허리를 잡고 뒤로 끌어내기에 바빴다. 앨리샤도 현장으로 달려가 도울까 생각해봤는데 선뜻 나서기가 힘들었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공포심 때문이었다.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순간에도 루시는 꼬마주인의 입술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미 광기에 젖은 사나운 눈빛이 소녀의 처참한 얼굴을 노려봤다. 빨간 모자를 쓰고 파란 조끼와 청바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반팔티셔츠를 입고 나온 한 늙은 남자가 루시에게 달려가 힘을 보탰다. 그는 두 손으로 사나워진 달마시안의 입술을 부여잡고 밑과 위로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폭력적인 루시는 꼬마주인을 놓아주고 다음 타자로 자기 입을 건드린 조끼 사나이를 지목했다. 조끼 사나이의 위로 올라탄 광기의 달마시안 꼬마주인을 물었던 더러운 입으로 사나이의 뺨을 똑같은 방법으로 물어뜯었다.
다른 곳에서도 행복한 비명에서 두려움의 비명으로 바뀐 처절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앨리샤는 소리가 나는 모든 곳으로 고개를 돌려 비명의 근원지를 쳐다보았다. 골든 레트리버와 말라뮤트에게 물어뜯기는 산책 족들과 어린 강아지들의 단체적인 공격을 받는 이십대 여성, 거대한 버니즈 마운틴도그가 물고 늘어지는 어린 아이, 데이트 중인 남녀에게 달려가 남자의 정강이를 물어버린 바셋 하운드까지······.순식간에 밀스 공원의 모든 개들이 미쳐버린 것 같았다. 그중 가장 심하게 공격을 하는 개는 말라뮤트와 골든 레트리버, 버니즈 마운틴도그였다.
앨리샤는 고개를 다시 돌려 루시가 있던 곳을 쳐다봤다. 달마시안은 이미 조끼 사나이 외에도 무려 세 명의 여성들을 물어뜯은 뒤였다. 현재 녀석은 다음 사냥감으로 지목된 어린아이의 뒤를 추격하는 중이었다. 달마시안의 비쩍 마른 다리에서 가공할 스피드감이 느껴졌다. 추격하는 데에 성공한 사냥감은 뒤통수와 목덜미가 갈가리 찢겨나갔다.
골든 레트리버 한 마리가 피범벅이 되어 도망치는 산책 족들 중 한 사람의 종아리를 낚아챘다. 녀석의 사냥감이 된 사람은 간편복차림의 남자였다. 아이팟을 귀에 꼽고 도망치다가 꼬리가 잡힌 그는 넘어지자마자 광분한 골든 레트리버의 공격을 받았다. 탄성 있는 고무(껌)처럼 길게 늘어진 남자의 종아리 살이 보였다.
“살려주세요! 거기 아가씨! 저 좀 도와주세요!”
그가 앨리샤를 보며 애타게 외쳤다.
그녀는 남자가 자기를 발견했다는 걸 직감하고 서둘러 고개를 돌리고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젤을 접고 가방에 넣는 과정에서 그녀는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종이가방에서 스무 장 가량의 깨끗한 종이들의 잔디밭 위로 쏟아졌다. 앨리샤는 황급히 몸을 숙여 종이를 챙겼다. 그때 등 뒤에서 야생동물의 그르렁 소리가 들렸다. 개과 동물의 소리였는데 상당히 분노한 소리였다. 앨리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기를 응시하는 짐승의 눈과 마주했다.
전체적으로 초콜릿처럼 검은 색이지만 달콤하지는 않고 하악골 부위가 쿠키 같은 거친 황갈색의 짐승은 쭉 뻗은 늘씬한 다리를 가진 날렵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간단히 말해 도베르만 종으로 보였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입가에 피를 묻히고 조금 찢어진 입술 사이로 부러진 이빨이 보이는 놈이었다.
“마, 맙소사.”
그녀는 다급히 이젤가방을 집어 들고 달려오는 도베르만의 옆얼굴에 한방 먹였다. 광기로 젖은 도베르만이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그제야 앨리샤는 방금 저지른 끔찍한 실수의 뒤를 이을 두 번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내가 미쳤지. 옆에 의자도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이젤이 든 가방으로 내려친 건지 알 수 없었다. 이걸 사려면 돈 꽤나 깨질 텐데······.약값은 그렇다 치고 병원비도 부족한 마당에 이젤까지 망가졌으니 당분간은 가난하게 생활해야할 것 같았다.
이미터 정도 나가떨어진 도베르만이 다시 일어나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앨리샤는 부러진 이젤을 놓아두고 옆에 있는 의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녀석이 달려오는 거리를 대략적으로 계산해 의자를 휘둘렀다. 낡은 목제 다리에 얻어맞은 녀석의 옆얼굴이 찢어지면서 빨간 피가 쏟아져 나왔다. 다시금 이미터 앞으로 나가떨어진 녀석의 뺨에서 일이초에 한 번씩 피가 왈칵 쏟아졌다. 심장박동으로 인해 흐르는 피들 중 갈 곳 잃은 피들이 저 녀석의 상처 사이로 흘러나오는 듯 했다. 두 번의 공격 끝에 쓰러진 도베르만이 비로소 개다운 낑낑 소리를 냈다.
흥분한 앨리샤는 이젤가방을 휘두르는 행동의 제조과정 중에서 펄럭인 스웨터 주머니의 약통이 떨어졌다는 걸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뱃속의 덩어리에서 욱신거리는 아픔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깟 고통 때문에 여기서 멈추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앨리샤는 서둘러 부러진 이젤가방과 더러워진 그림종이를 들고 황급히 자리에서 떠야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떠날 때가 돼서야 스웨터 주머니에서 약통이 사라졌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약통? 어디 갔지? 맙소사, 안 돼, 잃어버렸으면 큰일인데, 어디 갔지?”
그녀는 고개를 숙여 당혹스러운 눈으로 주변 잔디밭을 살폈다. 이리저리 불규칙적인 왕복운동을 하는 시야 안으로 하얀 약통이 들어올 리 없었다.
“안 돼, 어디 있는 거야? 내가 떨어뜨렸나? 어디다 떨어뜨렸지?”
도무지 약통은 보이지 않았다. 손바닥만 한 플라스틱 원통에 겉에는 ‘자궁암용’이라고 대문장만 하게 적혀있는 약통이 주변에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앨리샤의 목숨을 챙겨주는 약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녀는 더한 노력을 기울여서 약을 찾기에 나섰다.
이번에도 뭔가에 몰두할 때 등 뒤에서 개과 동물의 그르렁 소리가 들렸다. 앨리샤는 뒤를 돌아보려다가 그만 두고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그런데도 눈동자는 항상 주변 삼 미터 반경 내에 있을 거라고 믿는 약통을 찾고 있었다. 그때 시야 안으로 들어온 하얀 원통의 물체가 사 미터 앞에 있었는데 아마 약통 같았다. 그녀의 내부에서 약통을 들고 도망칠까하는 생각과 도망치지 말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개가 다른 곳으로 갈 때까지 기다리라는 생각이 서로 부딪혔다. 내면적인 의견이 서로 부딪혀서 빚어낸 내적갈등이 그녀를 조금씩 숨 조여 왔다. 이럴 때 어릴 적 친구의 어머니가 한 말씀이 떠올랐다. ‘사나운 개가 있을 때에는 절대로 그 개와 눈을 마주치지 말거라.’ 인생선배로써의 지혜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호기심 반, 불안함 반으로 그분의 말씀을 어기고 말았다. 슬며시 고개를 돌린 것이다.
적갈색의 바탕에 회색 얼룩이 드문드문 찍혀있는 대형견 한 마리가 서있었다. 어깨높이가 아무리 짧아도 최소 칠십 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녀석이었다. 비 맞은 개처럼 젖어있는 녀석의 털 곳곳에는 빨간 피도 함께 묻어있었다.
앨리샤의 눈동자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존적인 본능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도망치는 중간에 잔디밭 위에 있는 하얀 물건을 집기 위해 팔을 뻗었다. 행운의 여신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아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갑자기 흥분한 개들에게 단체로 공격받는 인간들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앨리샤도 그러했다. 하얀 물건을 향해 손을 뻗은 그녀는 발을 헛딛고 넘어져버렸다. 추격본능으로 그녀를 뒤 쫒아간 미친개가 몸을 번쩍 들어 점프를 하려는 순간이 점점 다가왔다. 멍청하게도 그녀는 바닥으로 넘어지면서까지 소유하려고 한 하얀 물건을 그 개에게 던지고 다시 재빨리 일어서려 몸부림쳤다.
탕! 흔히 만화책에서 총을 쏠 때 총구 옆에 적어 넣는 수식어다. 그 수식어의 실체가 방금 막 공원 내부의 어딘가에서 바람처럼 스쳐지나갔다. 처음에는 길게 밀다가 나중에는 빠르게 끌어당기는 중저음은 분명히 총성이었다. 중저음의 효과 한 가운데에서 회전운동을 하는 금속의 뾰족한 콩알 하나가 앨리샤를 향해 질주하는 개의 뒤통수에 정확히 꼽혔다. 너무 갑작스러운 총성 앞에서 그녀는 몸부림치다말고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자기가 던진 하얀 물건에 대한 집착은 잠시 사라진 듯했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정신을 차리려면 적어도 십분 간은 가만히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총을 쏜 장본인은 바이볼스(상체와 하체가 연결된 작업복) 작업복을 입은 나이 지긋한 남자노인이었다.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은 낯설다 못해 투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의 손끝에서 작은 리볼버의 총구가 담배 연기 같은 죽은 회색 연기를 피어내고 있었다.
“괜찮아요, 아가씨?”
카우보이모자는 총을 거두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어이, 아가씨? 괜찮아요?”
“네?”
그녀는 마치 신대륙에 도착한 미개인처럼 행동했다.
“괜찮으냐고요?”
“네, 네. 괜찮은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그녀는 사태파악이 되는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여기 그쪽 것 같은데?······”
사나이는 앨리샤가 던진 하얀 물건을 집어 들었다. 손바닥만 한 플라스틱 원통에 겉에는 ‘암환?悶濡?이라는 단어가 대문장만 하게 적혀있는 통이다. 바로 그녀가 찾는 약통이었다.
“네?”
또 미개인처럼 굴었다.
“아, 맞다.”
그녀는 무례하게 사나이의 손에서 약통을 뺏어오듯 가져왔다.
“고마워요.”
“어디 다친 덴 없어요?”
“네?”
“어디 다친 데 없냐고요?”
그녀의 계속되는 미개인적 행동에 사나이는 약간 신경질이 난 듯했다.
“아, 네. 없어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어설픈 행동으로 약통을 스웨터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혹시 무슨 일인지 아세요?”
그녀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갑자기 개들이 미쳤어요. 이곳 말고도 지금 네바다 전체가 그런 것 같은데 아직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미국 전체가 이런 건지 아니면 이곳만 이런 건지.”
“혹시 개들이 왜 미쳤는지 알고 계세요?”
바보 같은 질문이다. 그걸 알고 있다면 카우보이모자를 쓴 투박한 남자가 감히 이러고 서있기만 하겠는가? 되돌아온 대답도 당연하다는 질문이었다.
“제가 그걸 알면 이러고 있겠어요?”
그가 신경질적으로 말하고는 아까 두 번째 손님의 휴대폰과 똑같은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내들었다. 낡은 것만 빼면 똑같은 기종의 모토로라 휴대폰이었다.
“여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카우보이모자는 간단히 통화를 끝내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일단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떠나세요. 개들이 어떻게 됐든지 간에 이건 쉽게 끝날 일이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들이건 개들이건 아무도 믿지 마세요. 특히 개들은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
사나이는 입고 있는 바이볼스와 시대에 덜 떨어지는 카우보이모자만큼이나 이해 안 되는 단어들로 가득한 말을 주절거리고 그녀에게서 떠나갔다. 왜 떠나라는 거지? 거야 당연히 개들이 돌아버렸으니까. 아니, 그럼 왜 돌아버렸다는 건데? 그야 그도 모르지. 앨리샤는 무의식적으로 카우보이모자 사나이의 말대로 행동을 실천했다. 부러졌더라도 언젠간 다시 쓸 일이 올지도 모르는 부러진 이젤(가방)과 종이가방을 품에 안고 밀스 공원에서 나가기로 했다.
어쩌면 밀스 공원에서만 개들이 빡 돌아버린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이었다. 개들이 미친 건 공원 외부도 마찬가지였다. 미친개들은 주인의 얼굴도 못 알아보고 아무에게나 덤비기 일쑤였다. 점프해서 주인의 목과 얼굴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는가하면 손이나 팔, 다리 근육을 찢어버리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밀스 공원의 주차장도 아수라장이었다. 개를 태우고 드라이브 나온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놈들에게 물어뜯기거나 운 좋으면 신체의 일부가 잘리는 정도로 끝났다. 어떤 남자는 그레이하운드가 팔을 문 상태로 뛰어 다니며 고통을 호소했다. 러닝셔츠를 입고 추위에 저항이라도 하겠다는 듯 반바지를 입고 드라이브 나온 남자의 팔에 매달린 미친 그레이하운드가 연신 으르렁거렸다. 드라이브 족들의 자동차들 중 비싼 고급 스포츠카도 한 대 있었는데 이미 보기 흉한 꼴이 되어 있었다. 차체는 완전히 뒤집어지고 공기가 빠진 타이어에는 불이 붙어있었다.
공원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캐릭터풍성을 파는 잡상인들의 풍성이 천진난만한 아이의 미소 같은 하늘로 치솟았다. 놀란 까마귀들과 비둘기들도 동시에 하늘로 비상했다. 마벨 코믹스의 스파이더맨이 그려진 파란풍성이 하늘로 솟아오르자 뒤이어서 울버린 풍성도 솟아올랐다. 디시코믹스의 배트맨이 비상한 건 그로부터 이초 후였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만화계의 영웅들은 그만 바람에 떠밀려 힘없이 좌초된 난파선마냥 떠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
어떤 여성은 두 마리의 닥스훈트에게 집중공격을 받고 있었다. 미용실에서 방금 막 머리를 정리하고 나온 듯한 헤어스타일이 모조리 망가지는 순간임과 동시에 하나의 여성에게는 패배의 쓴맛을 알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기껏 정성들여서 머리를 했는데 이깟 작은 개들에게 무너지다니. 두 마리의 닥스훈트가 위태로운 짧은 다리로 사냥감에게 쪼르르 달려가 머리를 물고 집중적으로 흔들어댔다. 눈 주변의 얇은 피부조직이 치킨의 닭 껍질처럼 길게 뜯겼다.
주차장까지 나온 앨리샤는 이곳도 그다지 안전한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수라장의 한 가운데에서 주차장까지 나온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비교적 한적해 보이는 동쪽 워싱턴 스트리트까지 달려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북쪽 루프 스트리트와 동쪽 워싱턴 스트리트의 교차로도 사정은 밀스 공원과 마찬가지였다. 광적으로 미친개들이 사람들을 공격하는가하면 50번 도로이자 동쪽 윌리엄스 스트리트에서는 우회전을 시도하는 자동차들이 서로 거리 한복판에서 엉키고 말았다. 방금 밀스 공원 주차장에서 나온 자가용 한대가 북쪽 루프 스트리트를 통해 동쪽 윌리엄스 스트리트로 가는 길목으로 좌회전을 시도하다가 브레이크를 헛잡은 나머지 두 바퀴나 구르고 전복되었다.
어디선가 폭발음이 들렸다. 남쪽의 동쪽 로빈슨 거리에서 발생한 폭발음이었는데 그녀가 서있는 교차로에서도 그 폭발음이 명확하게 들렸다. 지옥의 붉은 버섯구름도 보였다. 가스통이나 차가 폭발한 것 같았는데 분명한 사실은 거대한 폭발이 있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폭발음은 동쪽 윌리엄스 스트리트에서 들렸다. 더 끔찍했던 건 폭발음 사이로 사람의 비명소리와 미친개들의 처절한 울부짖음도 섞여 있었다는 거다. 세 번째 지옥의 비명은 동쪽 앤더슨 스트리트에 위치한 주택에서 들렸다. 집 전체가 폭발하면서 건물의 골조를 이루는 목재와 철근 따위가 하늘로 치솟았다. 충격파로 집 주변의 나무가 거세게 흔들렸고 나무에 앉아서 여유로운 휴식을 즐기는 새들이 모두 일제히 날아올랐다.
동쪽 캐롤라인 스트리트에서 빨간 자가용 하나가 빠르게 질주하다가 그만 브레이크를 잡지 못하고 북쪽 루프 스트리트에서 달려오던 트럭과 부딪히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트럭과 자가용 모두 차체가 완전히 찌그러졌다. 곧 이어서 소형 버섯구름도 피어오르고 찌그러진 해골의 비릿한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개소리도 들렸다. 아마 개가 함께 타고 있던 차는 빨간 자가용일 것이다. 왜냐면 뭔가에 쫓기듯 질주하고 있었으니까. 폭발한 트럭의 잔해가 공중으로 높게 날아올랐다. 덕분에 잠시나마 사람들의 비명과 미친개들의 분노가 자아낸 울부짖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죠?”
갓난아이를 안고 산책에 나온 걸로 보이는 삼십대 초반의 여성이 옆에 있었다. 주황빛으로 보이는 금발머리에 오늘로 벌써 세 번이나 보는 파란 눈동자를 가진 여성이었다. 푸른색의 얇은 스웨터(앨리샤와 똑같이 단추가 달려있었다.)와 안에는 검은 테두리로 그린 미키마우스가 새겨진 하늘색 긴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으며, 하의로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입는 남색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품에 안긴 아기는 난데없는 총성과 폭발음, 개들의 광적인 행동에 놀란 나머지 울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갓난아이의 엄마가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혹감에 매료된 앨리샤에게서 원하는 해답을 얻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저도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동쪽 캐롤라인 스트리트에서 총기를 소지한 남성 두 명이 뛰쳐나와 광분한 개들을 향해 총을 쏴댔다. 만일 사람의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다면 그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권총으로 무장한 사내들의 뒤로 세 마리의 보르조이들이 달려와 그들의 뒤통수를 쳤다. 피가 묻은 놈들의 털이 햇빛에 비쳐 붉은 광택을 유발시켰다. 두 마리의 보르조이는 남자의 뒤통수와 옆구리 살을 잡아 뜯는 임무를 수행했고, 다른 한 마리는 권총을 든 남자의 손목을 물어뜯었다. 녀석들의 으르렁 소리가 앨리샤와 갓난아이의 엄마가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
밀스 공원 주차장에서 광적으로 미친 콜리 한 마리가 풍성한 갈기를 휘날리며 달려왔다. 피로 물든 장밋빛 입을 벌리고 달려오는 녀석의 눈에서는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짙은 광기가 표출되고 있었다. 뒤돌아서 녀석의 움직임을 포착한 갓난아이의 엄마가 먼저 앨리샤의 곁을 떠나 멀리 도망쳤다. 뜬금없이 도망치는 갓난아이의 엄마를 보자 앨리샤도 고개를 돌려 뒤를 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상황파악을 할 만큼 여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도 갓난아이의 엄마가 도망친 것처럼 동쪽 워싱턴 스트리트를 향해 있는 힘껏 질주했다. 등 바로 뒤에서 콜리의 거친 숨결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미친 녀석의 발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동쪽 워싱턴 스트리트로 건너간 그녀의 몸이 갑자기 앞쪽을 기울여지면서 중심이 흐트러졌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시체의 발에 걸려 자빠지고 만 것이다. 정상인이 봐도 바보천지 같은 모습이었다. 그 충격으로 스웨터 주머니에서 약통이 굴러 나왔다. 손에 들렸던 이젤가방과 종이가방이 공중으로 붕 뜨며 삼 미터 정도 거리의 앞으로 처참하게 버려졌다. 지퍼를 닫지 못한 종이가방 안에서 더러워진 종이가 마구 쏟아졌다. 뒤에서 달려온 콜리가 그녀와 점점 가까워지자 급격히 속도를 낮추었다.
그렇지만 아직 행운의 여신이 존재하긴 하나보다. 녀석의 발걸음이 서서히 가까워질 무렵 북쪽 루프 스트리트에서 달려오다가 방향감각을 잃은 오토바이 한 대가 콜리의 옆구리에 그대로 코를 처박고 지나갔다. 옆구리에 심각한 충격을 입은 녀석이 개다운 낑낑 소리를 내며 오토바이와 함께 그대로 자가용들이 서있는 주변 건물의 주차장을 향해 돌진했다.
카우보이모자 사나이와 오토바이 덕택에 오늘만 해도 두 번의 행운을 얻은 앨리샤는 서둘러 탈출을 시도한 약통을 집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콜리와 오토바이가 충돌해 날아간 지점을 바라봤는데 둘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이십년은 되어 보이는 자가용에 머리를 처박은 녀석은 이미 죽은 지 오래였고 여전히 오토바이의 코는 콜리의 옆구리에 박혀있었다. 오토바이의 주인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신이시여, 맙소사.”
평소에 종교를 믿지 않는 그녀의 입에서 신이라는 단어가 나온 건 이번이 삼 개월만이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시간이 촉박하다는 걸 알고 있는 그녀는 황급히 그곳에서 떠나기로 했다. 종이가방과 이젤가방도 챙겨가려고 했었는데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거리로 엎질러진 종이에는 먼지가 잔뜩 묻은 더러운 종이가 되어있었고 오늘 몇 번을 구른 건지 알 수 이젤가방은 더 이상 고쳐도 쓸 수 없는 녹초가 되어있었다. 불행히도 세상이 괜찮아지기만 한다면 돈이 더 깨질 일만 남았다.
밀스 공원에서부터 시작된 미친개들의 행진은 북쪽 벨리 스트리트까지 이어졌다. 난장판이 된 거리에는 어린아이의 시체부터 시작해 노인의 시체까지 시체로 따지자면 없는 게 없었다. 거리 한복판에 쓰러져있는 여노인의 시체를 파먹다가 다른 사냥감을 포착하고 질주해대는 녀석이 보였고 그런 녀석과 경쟁하기 위해 앤더슨 스트리트에서 북쪽 벨리 스트리트까지 순식간에 달려온 녀석도 있었다.
밀스 공원에서 한번쯤은 본 걸로 여겨지는 아이스크림 판매원의 줄행랑은 앨리샤가 지나온 동쪽 워싱턴 스트리트부터 시작해 북쪽 스튜어트 거리까지 계속됐다. 파란 바탕에 갈색 테두리의 톰(월트 디즈니의 고양이 캐릭터)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달리는 아이스크림 판매원이 거의 북쪽 벨리 스트리트에 다다랐을 때 왼쪽에서 불쑥 튀어나온 버니즈 마운틴도그가 그를 덮쳤다. 톰과 제리라는 만화에서 고양이가 불도그에게 붙잡히면 말 그대로 죽을 만큼만 얻어맞듯 톰이 그려진 아이스크림 판매원은 불도그 대신 버니즈 마운틴도그에게 딱 죽을 만큼만 깨물릴 것이다. 그러고 보니 버니즈 마운틴도그의 뒤를 졸졸 따라온 블랙 러시안 테리어도 두어 마리 보였다. 광적으로 미친놈들은 모두 아이스크림 판매원을 물어뜯어서 죽이길 원했다.
아는 종업원이 운영하는 북쪽 스튜어트 스트리트의 너겟 모텔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는 앨리샤는 힘에 부치더라도 조금 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등 뒤로 아이스크림 판매원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려왔건만 그녀는 무시하기로 했다. 톰의 얼굴이 갈가리 찢기고 판매원의 얼굴 살과 가슴살이 갈기갈기 찢기는 잔혹한 영상이 보지 않고도 눈앞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북쪽 스튜어트 스트리트에서 동쪽 워싱턴 거리로 우회전을 시도한 포드사의 자동차 한 대가 난데없이 그녀의 정면으로 질주해왔다. 앨리샤는 자가용과 자신이 충돌하기 전에 달리면서 좌측으로 방향을 꺾었다. 재수 없으면 그녀와 부딪힐 수도 있었던 자가용은 타이어에 불이 붙도록 빠른 속도로 질주하며 아이스크림 판매원에게 뒤늦은 구원의 손길을 뻗었다. 방향감각을 제멋대로 휘어잡은 자가용이 버니즈 마운틴도그와 블랙 러시안 테리어 한 마리를 치고 지나갔다. 두 녀석의 끼깅 소리가 들리는데도 자가용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녀석들의 목과 옆구리, 복부에서 팍하고 터져 나온 피가 자가용의 타이어를 가득 적셨다. 다른 블랙 러시안 테리어는 그대로 자가용 뒷바퀴에 깔리고 말았다. ‘안녕, 여러분. 저 먼저 우리 개들의 천국으로 떠날게요.’
동쪽 워싱턴 스트리트와 북쪽 스튜어트 스트리트가 서로 교차하는 사거리도 상황은 처참했다. 개들의 미친 질주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대형견 다섯 마리가 두 남녀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비참하면서도 즐거운 사냥을 즐기는 중이었다.
주차장에서 급히 우회전을 하고 동쪽 로빈슨 스트리트에서 북쪽 스튜어트 스트리트로 좌회전한 트럭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도로 한중간에서 트럭이 방향감각을 잃고 좌우로 마구 흔들리다가 너겟 모텔 앞에서 차체가 옆으로 기울여졌다. 그리고 차체가 완전히 뒤집어지며 도로 한복판에서 전복되고 말았다. 잠시 후 트럭 운전사의 것으로 보이는 다리가 트럭 문을 부수고 나왔다. 다리가 부러졌는지 오른손으로 오른다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모자와 빨간 조끼, 남색과 보라색이 서로 교차하는 남방, 페인트 얼룩이 묻은 청바지가 곧이곧대로 보였다. 트럭에서 탈출에 성공한 남자는 자꾸 뒤돌아보며 누군가가 쫓아오는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렇지만 신도 그의 편은 아니었다. 쫓아오는 개는 없었지만 동쪽 캐롤라인 스트리트에서 달려온 달마시안 두 마리가 그의 옆얼굴을 덮쳤다. 무의식적으로 앨리샤는 “그만 둬, 루시!”라고 외칠 뻔했다. 무심결에 꼬마주인의 루시로 단정 지은 것이다. 한 녀석은 잘린 꼬리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고, 다른 한 놈은 하악골의 피부가 완전히 찢어져 있었는데 턱 끝에 살가죽이 너덜너덜하게 매달려 있었다. 보기 흉했다. 앨리샤는 상황을 보고 놈들이 다른 곳으로 갈 때까지 기다리다가 너겟 모텔 주차장을 통해 건물 안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와주세요! 거기 아가씨! 저 좀 도와주세요!”
남자가 그녀를 향해 사정없이 외쳤다.
“죄, 죄송해요. 전 못 도와드리겠어요.”
그녀는 중얼거리며 놈들의 정신이 그 남자에게 집중됐다는 것을 확신하고 너겟 모텔 주차장까지 죽어라 뛰었다. 뒤에서 분노한 아프간하운드 한 마리가 쫓아오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은 미친 아프간하운드로 하여금 추적본능을 일깨워주도록 만들었다. 분노에 가득 찬 아프간하운드가 금빛 털을 휘날리며 앨리샤의 꽁무니를 뒤쫓았다.
“존! 존!”
그녀는 너겟 모텔을 운영하는 남자의 이름을 목청껏 불렀다. 그 때문에 트럭남자에게 신경이 쏠려있던 두 마리의 달마시안들도 앨리샤에게 시선을 집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달마시안 두 녀석들은 한꺼번에 달려오지 않았다. 한 놈은 방금 막 잡은 따끈한 남자의 곁을 지키고 그녀를 추격하는 건 하악골 피부가 완전히 찢겨진 놈이었다.
“존! 문 열어요! 존!”
그녀는 개들의 짖는 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너겟 모텔을 향해 외쳤다.
“젠장, 문 열라고요! 존! 존!”
모텔에 도착해서 문이 열리지 않자 앨리샤는 사정없이 마른 손으로 너겟 모텔 출입구를 내려쳤다.
“존! 존!”
“앨리샤!”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반가운 얼굴로 뒤돌아섰다가 안면으로 날아든 아프간하운드의 앞다리 때문에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불행히도 고통은 아래서부터 시작됐다. 면상으로 점프한 아프간하운드는 멈추지 않고 달리다가 너겟 모텔 벽에 그대로 코끝을 처박았다. 녀석의 입에서 끼깅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발목에서 뭔가에 깨물린 듯한 화끈한 고통이 느껴지자 앨리샤는 마구잡이로 다리를 휘둘렀다.
“놔! 이거 놔!”
그녀는 애타게 소리를 지르며 멀쩡한 반대쪽 다리로 달마시안의 눈과 눈 사이를 걷어찼다. 그 다음 발등으로 녀석의 옆얼굴에 한방을 먹이고 가까스로 일어섰다.
“앨리샤! 뒤에 조심해!”
존의 목소리와 함께 달마시안에게 리볼버의 총알 하나가 날아들었다. 정확히 귀를 관통하고 지나간 총알이 건물 벽에 박혔다. 귀에서 피를 쏟아내며 옆으로 튕겨나간 달마시안은 그대로 두세 바퀴 구르더니 분노의 운동을 멈추기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 건 한쪽 귀가 찢긴 아프간하운드였다. 앨리샤는 뒤돌아서서 녀석의 분노에 가득 찬 시선과 마주쳤다.
“오, 맙소사, 존?”
앨리샤가 존을 불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존의 총알이 그녀를 구원시켜주었다. 그녀는 얼굴을 조금 숙였다가 아프간하운드가 힘없이 풀썩 쓰러지자마자 사태가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그녀의 옆으로 더러운 러닝셔츠와 체크무늬 반바지 차림의 배가 튀어나온 남자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앨리샤, 괜찮니?”
그녀의 당황한 얼굴은 카우보이모자 사나이의 도움을 받았을 때처럼 신대륙의 미개인처럼 그를 쳐다봤다.
“괜찮아요?”
“네?”
“괜찮으냐고요?!”
“네, 네.”
그녀가 말했다.
“고마워요.”
“자, 어서 들어갑시다.”
존의 왼손은 총을 든 반면, 오른손은 모든 주머니를 뒤지다가 간신히 왼쪽 주머니에서 모텔 열쇠를 꺼내었다. 모텔 출입구로 달려간 그는 짧은 다리로 까치발을 서서 출입구의 위쪽에 있는 열쇠구멍에다가 열쇠를 꼽아 넣고 오른쪽으로 돌렸다.
“어서 좀 해봐요, 어서요!”
그녀가 보챘다.
“아, 좀 기다려봐, 누군 들어가기 싫어서 이러는 줄 알아?”
존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곧 그가 문을 열어젖히자 기다렸다는 듯 앨리샤가 쏜살같이 들어갔다. 다음 순서로 러닝셔츠 차림의 존이 리볼버로 북쪽 스튜어트 거리를 겨누며 모텔 안으로 들어간 후 문을 꼭 걸어 잠갔다.
모텔 안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 휴가를 나온 것인지 아니면 제대 한 것인지 분간이 안 가는 군복차림의 흑인 군인과 동양인 관광객들로 보이는 사람들 세 명, 그리고 분홍티셔츠와 하프코트, 검은 면바지를 입은 임산부 한명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 중 한명의 아내이거나 혼자 외출을 나왔거나 너무 갑작스럽게 변한 주변 환경에 적응 못하고 이곳으로 들어와 몸을 숨긴 여인일 것이다. 적응하지 못 한건 앨리샤도 마찬가지였다. 캄캄한 모텔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카운터로 들어가 계산대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공포에 질린 이십대 여성이 보일 법한 전형적인 행동패턴이었다.
“바깥 상황은 좀 어때요?”
군인이 존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아까?壙? 말했지만 여전히 바깥은 개판이에요. 오, 하느님.”
“정말 갑자기 왜 이렇게 변한 건지 모르겠어요.”
임산부였다.
“이봐요, 거기 아가씨? 어디 다친 데 있어요?”
그녀가 물었다.
두려움에 빠진 앨리샤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도대체 갑자기 개들이 왜 미쳤는지 알고 있는 분 계세요?”
관광객들 중 늙은 여노인 한명이 그들을 상대로 물었다. 역시 그들은 앨리샤에게 첫 번째 행운을 선사한 카우보이모자 사나이처럼 “내가 그걸 알면 이러고 있겠어요?” 식이었다.
“우리가 그걸 알고 있으면 이러고 있겠어요?”
군인이 성실히 대답해주었다.
그때 출입구 문을 두들기는 소년 한명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피로 범벅이 된 힙합스타일의 청바지(허리에 체인이 달린)와 지퍼가 달린 잠바, 평범하기 그지없는 검은 티셔츠를 입은 소년이 문을 두드리며 모텔 내부의 사람들을 상대로 애걸하게 외쳤다.
“문 열어주세요! 아저씨! 문 좀 열어주세요!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맙소사, 트레인, 소년이에요!”
흑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존(트레인은 그의 성이다.)에게 말했다. 군인이 일어나 출입구를 향해 달려가자 존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웃기지 마쇼, 군인양반. 내가 여기로 들어온 이상 그 누구도 내 허락 없이는 문을 못 열어요. 그러니 거기로 가서 조용히 앉으시죠?”
맙소사. 존은 주머니에 고이 간직해둔 리볼버를 꺼내어 군인의 가슴팍을 겨누었다. 거의 협박에 가까운 어조로 말하는 그의 또 다른 면은 여태껏 앨리샤가 알아온 존 트레인이라는 남자의 잔인하고 인정머리 없는 면이었다.
“이것 보세요, 트레인. 지금 바깥에서 소년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잖아요? 그런데도 모른 척 하자고요? 당신 미쳤어요?”
“아니, 미친 건 당신이야. 지금 바깥을 봐. 염병할 개새끼들이 미쳐서 날뛴다고. 그런데 내가 문을 열어줬다가 놈들이 같이 들어오면 어떻게 할 건데? 어? 그러면 어떻게 할 거냐고?”
그의 리볼버가 군인의 왼쪽 가슴을 정확히 겨누었다.
“당신이 책임질 수 있어요?”
“문 열어주세요!”
존의 협박적인 어조와 소년의 애걸한 목소리가 동시에 모텔 내부의 분위기를 흔들었다. 군인은 슬며시 눈을 아래로 내려 리볼버의 뒤통수를 확인했다. 불행히도 존의 리볼버는 장전되어있지 않았다. 약간의 기회가 생겼다고 판단한 그는 존에게 살며시 말했다.
“트레인 씨. 경고하는데 그 총 치우는 게 나을 겁니다.”
그가 경고하는 어조로 말하자 그제야 존이 철컥 소리를 내며 총을 장전시켰다.
“총은 내가 갖고 있어. 그러니 당신은 내말 듣는 게 좋을 거야.”
“당신······.완전히 미쳤군요.”
임산부가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어이, 거기 아줌마. 당신도 애를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거기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거야.”
존은 임산부에게 경고하면서도 흑인의 가슴에게서 총구를 떼어놓지 않았다.
“이봐, 거기 백인양반. 내 인생선배로서 경고하리다. 지금 당장 문 열어주고 저 소년을 들여보내는 게 좋을 거요.”
관광객 노인이 말했다. 늙은이여서 그런지 전혀 경고에 가까운 어조로 느껴지지 않았다.
“당신은 그냥 닥치고 앉아있어. 늙었으면 무조건 인생선배인줄 아나?”
“트레인! 진정하고 당장 문 열어서 저 소년을 들어오게 하세요!”
“웃기지마. 결정하는 건 나야. 총을 들고 있는 사람도 나고. 그러니 당신이 아무리 군인이라 해도 날 막진 못해. 알았어? 잘 알아들었으면 당신자리로 가서 조용히 앉아있어. 잘 알아들었어?”
그의 은빛 총구가 잔뜩 흥분해서 지진을 일으킬 것만 같은 군인의 가슴팍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 어서 가서 앉으실까, 우리의 군인양반?”
군인은 기회를 봐서 존 트레인의 얼굴에 주먹을 한방 날리려 했는데 그럴 만한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도 않았다.
“좋아. 당신 말대로 해주지. 하지만 당신 때문에 저 애가 죽는다면 당신은 평생 벌 받을 거야.”
“어련하실까?”
존이 비웃었다.
흑인은 자리로 가는 한편 고개를 돌려 존의 어깨너머로 소년의 동태를 살폈다. 그런데 소년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출입구에는 여러 개의 피로 이루어진 손바닥 자국만 쓸쓸히 남아있었다. 그는 원망의 눈초리로 존을 한번 째려봤다. 존은 총으로 군인에게 어서 자리로 되돌아가라는 손짓만 했다.
“빌어먹을 놈.”
그가 말했다.
“오호, 왜 이러시나? 거기 임산부가 있으니 말조심하라고, 이 친구야.”
존이 그를 비웃었다. 장전된 총의 아가리가 바닥을 향했다.
흑인은 일단 소년을 포기하기로 하고 자리로 되돌아가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년이 있던 자리에 홀로 남은 핏자국들은 다시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미친개들의 미친 질주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놈들은 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의 피부를 걸레조각처럼 찢어버리고 피부를 젖은 종이마냥 축축이 젖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거리를 가득 매웠다. 자전거선수로 보이는 남자도 있었는데 그는 동쪽 로빈슨 스트리트에서 너겟 모텔 앞까지 자전거를 몰고 오다가 얼굴 위로 날아든 시베리안 허스키의 거대한 앞발에 그만 얼굴이 짓눌리고 말았다. 녀석의 송곳니가 그의 관자놀이를 유압기처럼 양 옆에서 압력을 가했다. 모텔 안에서 남자의 잔혹한 운명의 실타래를 바라보는 존의 입에서 온갖 욕이 흘러나왔다. 흑인 군인에게 욕을 하지마라고 경고한 장본인이 오히려 욕을 해대니 웃길 노릇이었다.
모텔로 들어오자마자 계산대 아래로 기어들어간 앨리샤가 걱정됐는지 임산부는 만삭의 배를 안고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보기 안쓰럽게 여긴 관광객 노인네가 그녀를 도와 앨리샤에게 걸어갔다.
계산대 아래서 앨리샤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맑은 콧물 두 줄기가 인중 위로 흘러내렸다. 눈물 두 줄기도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수돗물처럼 뺨 위를 타고 흘렀다. 임산부와 노인네에게는 그녀를 진정시키려면 한세월은 걸릴 것 같았다.
“저기, 괜찮아요?”
임산부가 먼저 물었다. 앨리샤는 대답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울음을 그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위로가 되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게 잠재의식 속에 묻힌 부모든, 아니면 이십팔 년 동안이나 필요가 없던 걸로 여겨진 남자친구든 상관없었지만 곁에서 위로를 해줄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설마 그게 옆으로 다가온 임산부와 관광객 노인네가 아니겠지?
“젊은 아가씨, 괜찮아요? 어디 안 다쳤어요?”
관광객 노인네였다.
“저기요, 왜 그렇게 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하고 고개를 들어봐요. 알았죠?”
임산부가 그녀를 토닥였다. 앨리샤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행동을 실천에 옮겼다. 눈물과 콧물로 세수를 한 듯한 그녀의 얼굴이 임산부의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을 바라봤다. 끝에 약간 웨이브를 친 길고 검은 생머리와 요즘에 흔한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게다가 피부과에서 특급진료를 받았는지는 몰라도 피부가 상당히 깨끗한 편에 속했다.
“제 이름은 셀리예요. 그쪽은요?”
임산부가 물었다.
“앨리샤······.리프너요.”
그 정도는 말해줄 수 있었다.
“반가워요, 리프너. 이분은 텍사스에서 온 루시 엔델이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리프너 양. 난 루시라우.”
검은 선글라스와 축 늘어진 하얀 피부, 거칠어진 피부를 잘 감싸주는 검은 장갑, 그리고 장례식에 가는 것 같은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솔직히 선글라스까지 덧붙이면 루시라는 노인네는 장례식장에 가기 위한 모든 준비를 철저히 마친 예의바른 학생 같았다. 루시가 앨리샤에게 악수를 요청하는 뜻으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노인의 부드러운 장갑을 받아들였다.
“반가워요, 저도······.”
“어디 다치기라도 했어요?”
셀리가 물었다.
“네, 아까 어떤 놈이 발목을 물었는데······.지금은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리프너 양. 이제 여기로 왔으니 우린 안전하다우. 곧 있으면 군인들이 와서 상황정리를 할 겁니다.”
루시라는 노인은 마치 모든 것을 전부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제가 잘 아는데 군인들은 아마 여기까지 안 올 겁니다.”
흑인 군인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군인양반?”
루시가 따지듯 군인에게 물었다.
“아마 지금쯤 그들은 전부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명령이 떨어지면 총을 들고 탱크를 몰고 오겠죠. 그리고 하늘에서는······.”
군인은 마치 폭탄이 터지는 걸 설명이라도 하듯 주먹 쥔 손을 쫙 펴보였다.
“쾅! 하고 미사일을 퍼붓겠죠. 그리고 군인들이 총을 쏴댈 거고, 탱크가 폭탄을 쏘겠죠. 그럼 놈들과 섞여있는 우린 재수 없으면 죽던가. 혹은 살던가. 둘 중 하나겠죠.”
“그쪽이 뭘 그리 잘 안다고 떠드는지 어디 한번 설명 좀 들어봅시다.”
루시가 따지고 들었다.
“제가 군인이고 군대에 있어봐서 압니다. 됐어요?”
군인이 까칠하게 말했다.
“이름은요? 아니면 계급이라던가?······”
셀리가 물었다.
“클라크 로벨리아 상병입니다.”
“그럼 언제 제대해요?”
“그건 왜요?”
클라크가 신경질적인 말투로 물었다.
“아뇨, 그냥······.”
샐리는 말끝을 흐렸다.
“사실 제 남편도 군인이거든요. 지금쯤 어디서 뭘 할지, 제대는 언제 할지, 놈들로부터 안전하기는 할지······.단지 궁금해서요.”
궁금증과 의심, 그리고 알고 싶은 모든 것. 셀리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위험한 발상에 사로잡혀있었다.
“아마 그쪽 남편은 잘 있을 겁니다. 공군이면 비행기를 타고 하늘 위에 있거나, 육군이면 탱크나 총을 들고 싸우거나, 혹은 해군이면 배타고 바다 한 가운데에 있겠죠. 아무튼 군인이니 자기몸 하나는 잘 지킬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클라크는 생각 외로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 그럴까요?”
셀리가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그런데 그쪽 양반은 총 쏠 줄 아우?”
뜬금없이 루시가 물었다.
“당연한 걸 물어요? 그보다, 거기 아가씨는 이제 좀 괜찮아요?”
“네. 그런 대로 괜찮아졌어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앨리샤는 감정하나 담겨있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밤이 다가오고 있어.”
존이 말했다.
거리는 아직 정리되지 않고 있었다. 너겟 모텔 앞으로 수많은 자가용과 트럭, 오토바이와 자전거, 그리고 사람의 시체들이 서로 엉키고 섞였다. 난데없이 거리를 질주해오는 버스와 정면 추돌한 개의 시체들이 거리를 나뒹굴었다. 머리가 사라진 놈이 있는가하면 머리 한 가운데에 총알을 박고 자살한 시체도 있었다. 입에 사람 손목을 물고 거리를 활보하는 도베르만이 존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장전한 리볼버를 꺼내어 혹시나 모를 위험을 대비했다. 주인이 누군지 모를 사람의 손목을 물고 나타난 도베르만 녀석이 너겟 모텔 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순간 사위가 고요해졌다.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출입구의 자그마한 틈새로는 탄내가 조금씩 기어들어왔다.
“어이, 트레인. 총은 쏠 줄 압니까?”
클라크가 비꼬는 듯이 물었다.
“이래봬도 불법 사냥대회에서 우승한 몸이라고. 괜히 무시했다가 큰코다치는 수가 있어.”
그의 말 중 클라크와 앨리샤, 셀리, 루시, 그리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두 명의 관광객들이 유일하게 알아들은 말은 ‘불법’이라는 단어뿐이었다.
“오호라, 그러셔?”
클라크였다.
손목을 물고 나타난 도베르만은 멍청한 눈으로 너겟 모텔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동쪽 로빈슨 스트리트 쪽으로 유유히 사라져갔다. 모텔 안에 갇힌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도베르만을 보지 못한 앨리샤만 제외하고.).
“다행이야.”
존이 장전한 리볼버를 아래로 향하고 클라크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쪽은 뭐 쓸 만한 무기 없어? 군인이라면서? 격투기는?”
“그러는 당신은 군인이 휴가 나올 때 무기 들고 나오는 거 봤습니까?”
존은 클라크를 못마땅히 여기는 시선이었다가 눈썹을 한번 치켜올리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정말 무슨 일인지 몰라도 개들이 미친 것만큼은 확실해.”
존이었다.
“혹은 세상 전체가 미쳤거나.”
클라크가 뒷부분을 맡았다.
“그런데 정말 군대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는 건가요?”
셀리가 물었다.
“사실상 아직까지는 그런 것 같습니다. 만일 무슨 대책이 있었다면 제 휴대폰으로도 부대로 귀대해서 무장하라는 연락이 왔을 겁니다.”
클라크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어느덧 시간이 벌써 오후 여섯시를 향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사람의 모습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이 그들을 도왔는지 미친개들의 모습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밤의 어둠이 스멀거리며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