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민중항쟁의 전개와 성격(2)-분단세력과 통일세력과의 대결국면으로 확대
4.3민중항쟁의 전개와 성격
책이름 : 해방전후사의 인식
펴낸곳 : ㈜도서출판 한길사
펴낸날 : 개정 제7판 발행 - 1990년3월5일
글쓴이 : 고창훈 제주대 행정학과 교수
글순서
1부 : 제주 4.3항쟁의 전개와 성격 분석 기준 제시
2부 : 분단세력과 통일세력과의 대결국면으로 확대
3부 : 제주지역의 역사적 전통과 저항정신
4부 : 해방공간의 제주지역 상황과 민중의 대안
5부 : 민중의 3.1평화항쟁의 전개와 내용
6부 : 미군정과의 대립과 평화항쟁의 한계
7부 : 4.3 자주항쟁 발발 전야 민중의 선택
8부 : 제주도 4.3항쟁의 발발과 미군정의 인식
9부 : 자주항쟁의 실질적 주체인 민중과 남로당의 결합
10부 : 4.28평화회담의 개최와 결렬의 책임
11부 : 5.10단독선거 거부로 나타난 민중의 자주적항쟁
12부 : 남북한 정부 출범과 항쟁의 성격 변화
13부 : 제주도 대토벌 정책의 원인과 배경
14부 : 제 4차 민중 대학살의 감행과 실상
15부 : 어느 열세살 소녀의 4.3항쟁 체험기
16부 : 4.3 민중항쟁의 주체는 민중이었다
17부 : 민중의 자치사상과 민족자주정신과 평화사상
2부 : 분단세력과 통일세력과의 대결국면으로 확대
2. 해방공간의 일반 상황
▷ 미국과 소련이 1945년 한국을 반으로 나누어 각각 주둔하면서 분단구조의 고착화가 진행되었다.
- 그 이전 한국은 20세기 전반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서 그 지배를 받으며
고통과 억압을 경험하면서 일제에 항거해왔다.
일본은 한국 민족을 파괴시키면서 제국주의적인 식민지 통치구조를 완성하였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관료체제를 확립하면서 민족의 독립을 말살하고
자주국가의 기틀을 무너뜨렸다.
그들은 제국주의 문화정책을 펴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제국 신민으로서의 교육과 문화를 강요하면서 한국인을 식민으로 길들여나갔다.
거의 모든 저항세력들을 찾아내 처벌하는 동시에
일본 군대에 충성하고 일본 정부에 부역하는 친일세력을 포상하였다.
- 새로운 산업구조로의 개편과 철도, 항만, 도로를 건설하면서
일본의 국익에 따라 철저히 조선경제를 착취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족주의 및 공산주의 저항운동,
친일로 얼룩진 경제, 군사, 문화, 관료 등의 상층계급 및
태평양전쟁으로 시달려 고통에 가득 찬 농민과 노동자계급,
식민지 통치 말기에 강제로 추진된 공업화 등의 요소가
전후 한국을 뒤흔드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 일본의 지배가 남겨놓은 유산은 심대한 것이었다.
- 첫째, 사회경제적 분열구조를 창출하여 지주소작제는 강화되었고,
농민을 점점 영세화시킴으로써 지주와 농민의 계급적 균열을 야기시켰다.
아울러 일본의 전시공업화정책은 일본 독점자본의 비대화와 한국노동자의 착취라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일본 자본과 한국 노동자의 갈등구조를 심화시켰다.
- 전자는 소작쟁의투쟁을 거쳐 적색농민운동으로 발전하여
해방 후 농민조합운동과 인민위원회의 토지개혁운동으로 나타난다.
후자는 일본 자본의 힘에 동화된 조선의 영세기업에 대한 노동자들의 뿌리 깊은 불신으로
작용하였다.
이로 인하여 해방 후 노동자들은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을 전개하였ㅇ며,
중요 산업의 국유화를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 둘째, 일제시대의 식민지 국가는 강력한 친일 관료세력을 육성하였다.
일제 밑에서 부일했던 관료세력과 경찰세력들은
해방 이후 그들의 기득권 유지와 처단의 방지를 위하여 후원자를 필요로 했고,
미군정은 정책의 충실한 이행자로 이들을 수용함으로써 친일세력의 후원자가 되었다.
이러한 일제 잔재세력의 수용은 민중들에게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 미군정은 일제시대의 식량공출, 징용, 징병, 강제노역, 여자정신대의 동원 등에 앞장서
민중에게 고통과 억압을 주었던 그들의 지위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강화시켜주었다.
민중들은 이를 통해 미군정에 의한 해방이 거짓된 해방임을 깨닫고,
민중들 스스로의 진정한 해방을 모색하게 되었다.
제주지역의 민중들이 보여준 실천운동과 항쟁 역시 이러한 민중해방에의 소망을 담고 있다.
- 셋째, 일제의 가혹한 탄압은 이에 저항하는 민족투쟁세력들이 지역적으로, 계급적으로,
사상적을 다양하게 분산되어 존재하게끔 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하에서 통합된 단일세력이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해방 후 민족독립국가를 세워야 하는 시기에 민족적 대안이 형성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미군정의 등장과 더불어 복잡한 사회적, 경제적 갈등과 대결이 야기되었다.
▷ 한국 민중들은 이러한 혹독한 경험과 갈등 속에서 1945년 해방을 맞이했다.
- 그러나 그 해방은 진정한 해방이 아니라 외세의 침략과 갈등에 의한 분단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 시기의 연표는 분단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보여준다.
1945년 8월 15일 : 미군 일반포고령 제 1호 발표.
미국이 38도 이남의 남한을 접수한다. 소련은 이를 승인했다.
9월∼10월 :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서울에 중앙정부를 두다.
9월 8일 : 미군, 남한에 들어오다.
9월말 : 김일성, 한국에 돌아오다.
10월 16일 : 이승만, 한국에 돌아오다.
12월 12일 : 미국이 인민위원회를 불법화하다.
12월 27일 :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의 독립계획 합의하다.
1946년 3월∼5월 : 미소공동위원회 서울에서 열렸으나 결렬(1947년 5월 10일에 다시 열림)
10월∼11월 : 대구인민항쟁이 일어나다.
1947년 9월 : 소련, 미,소 동시 철수를 제안. 미국는 한국문제 유엔에 상정하다.
1948년 4월초순 : 제주도에서 항쟁이 일어나다.
4월하순 : 이승만을 제외한 남북 정치지도자가 평양민족회의 남한단독선거 반대
5월 10일 : 5.10선거 실시되다.
8월 15일 : 서울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되다.
9월 9일 : 평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되다.
10월 : 남한에 봉기가 다시 일어나다.
- 이 연표는 분단 3년사가 외세의 개입, 민족의 여러 세력과 민중간의 대결과
갈등의 연속이었음을 한눈에 확인시켜주고 있을 뿐더러,
4. 3 항재이 미국과 이승만세력의 분단고착화에 대한 최대의 항쟁이었음을 보여준다.
▷ 이 항쟁의 근원은 미국의 점령정책에서 찾아진다.
- 해방이 되던 날 발표된 포고령은 한국의 해방이 아니라
남한과 북한의 미, 소 분할점령을 공식화하고, 특히 미국은 남한의 점령국임을 명백히 하였다.
그래서 남한에 미군정이 실시되고(포고령 1호)
미군정의 체계는 행정권의 독점 관장(제 1조),
공무원 및 공공단체 종사자에 대한 감독지휘권(제 2조),
점령군에 대한 반항운동의 금지와 처벌(제 3조),
소유권 존중(제 4조),
영어를 공용어로 선포(제 5조) 등을 구체화되었고,
계속 발동된 포고령에 의해 보완되었다.
- 미국이 포고령 전체를 통해서 분명히 한 것은
일본 제국주의 통치를 그대로 이어받아 남한을 점령하고 남한을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마크 게인의 증언은 이를 뒷받침하는데, 그는
"우리는 해방군이 아니었다.
우리는 점령하기 위해서, 한국인이 항복조건에 복종하는가 안하는가를 감시하기 위해 온 것이다.
우리는 상륙 첫 날부터 한국인의 적으로서 행동했다." 고 고백했다.
그들의 한국인에 인식 역시 식민지 민중에 대한 멸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 이러한 미국의 점령에 맞선 한국 민중의 결집된 의지는 '건준'을 통해 나타났다.
-'건준'의 결성 의도와 과정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그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에 건준은 한국민이 젯할 수 있는 대안이었다.
이 대회에서 국호를 '조선인민공화국'이라고 하고 임시조직법을 채택하고,
9월 14일에는 27개 조의 시정지침을 마련했다.
당시 대회위원장인 여운형의 연설을 통해 건준의 상황인식과 과제르 알아보자.
전후처리의 국제 해결에 의하여 우리 조선에도 해방의 날이 찾아왔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서는 수많은 투쟁과제가 남아 있다.
우리들의 새로운 국가는 노동자, 농민, 일체의 근로대중을 위한 국가가 아니면 안된다.
우리들의 새로운 정권은 전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요구를 완전히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 정권이 아니면 안된다.
따라서 우리들은 일제의 잔재세력과 또한 반동적, 반민주주의 세력과도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공'은 지도자 내부에 복장한 대립요인을 갖고 출발하였기 때문에
강력한 중앙정부로서의 기능을 완수하지 못하였지만,
그것이 내건 정강과 지방 인민위원회의 운동에서 볼 때
그것은 민중이 지향하는 정치적 소망을 담지하는 것으로서
미군정에 대항할 수 있는 대안이었다.
- 민중은 자발적 의지와 각성을 통해 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민중의 자치정부로 활성화시켜나간다.
민중의 자치운동이 결집된 인민위원회는 각 지역의 행정기관을 접수하고
지역의 자치정부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민중자치운동은 일제의 잔재 청산, 토지개혁, 교육운동 등
반봉건, 반식민지의 과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민중의 삶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 그러나 미군정은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 인공을 인식하여 인공을 거부하고 불법화시켜버렸다.
민중은 미군정이 인민위원회의 자치성과 자주성을 부정하는 데 좌절과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좌익세력의 중앙지도부는 미군정의 '인공' 거부조치로
'인공'이 정부기능을 사실상 잃어버리자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으로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으로 각자 독자적인 조직활동을 강화시켜 나갔으며,
이는 민중의 의지를 하나로 결집시켜나가지 못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 그러나 각 지역에서는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의 지방 당원들이
지역자치운동의 주역이 되어 민중의 역량을 정치적으로 결집시켜
각 지역의 지배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갔고
토지개혁과 일제 청산의 과제를 수렴해나가는 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에 조직된 각 지역 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의 탄압과 중앙지도부의 부재로
1946년 초에 이르러 일부는 해체되고,
일부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산하 단체로 흡수되어갔다.
▷ 1946년에 들어서면서
- 미국과 소련 그리고 국내의 각 세력간에 분단구조 수립을 둘러싼 각축이 본격화되고,
그것은 미소공동위원회에서의 대립에서부터 단선, 단정의 강행과 저지운동으로 비화되었다.
분단구조화와 관련지어 각 행위자들이 지향하고 있던 것을 살펴보자.
- 소련은 장래에 소련에 우홎적일 뿐더러 자국에 대한 공격의 기초가 되지 않을
진정한 민주국가 수립을 지향하면서
북한에 우호적인 정치세력이 지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본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들은 1946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수립까지는 허가와 협조의 차원에서,
그 이후는 방관적 자셀 역할을 축소시킬 수 있을 만큼 미국보다 유리한 위치를 구축하였다.
- 한편 미국은 트루만의 정책에서 표현된
"소수 무장세력과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맞서 싸우는 자유인민을 보호하는" 원칙에서 출발하여
한국문제의 유엔에서의 해결을 지향한다.
이러한 지향은 미국의 세계전략구도에 따른 한국적 적용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소련과의 대항이라는 차원에서 이승만, 김구 같은 우익 지도자들을 지원할 수 밖에 없는"
정책으로 구체화된다.
- 이러한 미국의 입장은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1946.1)
이승만의 정읍발언(1946. 6), 제2차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1947.9)등으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또한 이러한 구상은 모스크바협정의 찬반 논쟁인 찬탁, 반탁의 대결과 맞불리며,
단선, 단정의 분단세력과 통일정부의 통일세력과의 직접적인 대결국면으로 확대되었다.
- 1946년의 대결은 미군정의 좌우합작 정책의 실패와
남로당의 10월 인민항쟁으로 특징지어진다.
1947년의 대결은 미국의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 추진과 더불어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을 초래했다.
이러한 분단구조화의 구체화 작업에 통일정부세력은
합법적인 총파업투쟁과 비합법적인 투쟁으로 맞섰다.
1948년의 대결은 미국과 단독정부파의 강행과 이에 맞선 제주항쟁으로 집약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