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제인문학기행 답사기
글/김경식
■김제기행의 의미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 호남평야다. 김제는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의 중심고을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이순신 장군은 "호남이 없으면 우리나라가 없다"고 하셨다.
호남 사람들의 애국정신과 조선의 곡창지대를 인정한 발언이다.
호남평야의 중심 고을 김제는 백제시대에는 <벽골군>이었다가 통일신라 때에 <김제군>이 되었다. 이미 삼한시대에 저수지 벽골제가 있었던 곳이다. 평야지대에 돌출되어 우뚝 솟아 오른 모악산은 ‘위대한 어머니의 산’으로 미륵불교의 도량인 금산사가 자리 잡고 있다. 금산사는 미륵불을 모신 불교신앙의 중심 사찰로 다양한 역사가 스며있다. 모악산 일대는 내세지향의 민중신앙이 결집된 곳이다. 인근에서 증산교가 융성하였던 지역임에도 금산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것도 특징이다. 미륵불교의 본산인 금산사 입구의 마을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간직한 한옥의 금산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금산교회는 개신교의 성지다. 개척 공신이었던 조덕삼 장로와 그의 마부였던 경상도 출신 이자익 목사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하여 김제를 가다보면 그 끝이 잘 보이지 않는 평야가 있다. 호남평야다. 이 지역 사람들은 ‘김제만경평야’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제는 인문학적인 성찰을 통해 역사와 문학을 가슴으로 느끼며 민족과 자신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이다. 일제는 동양척식회사를 통해 호남평야를 철저하게 수탈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김제는 일제강점기에 토지를 토대로 한 우리 민족의 삶과 죽음의 현장이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토지의 80%를 동양척식주식회사 산하의 농장들이 주인이 되어 농민들을 수탈하였기 때문이다. 조정래의 <아리랑>은 제1~12권을 합쳐 누적판매부수 330만부를 기록하는 등, 일제강점기의 시대 상황을 표현한 대표적 역사소설이다.
작가 조정래가 일제강점기의 작품의 무대로 김제만경을 선택된 이유는 이 지역이‘수탈당한 땅과 뿌리 뽑힌 민초들’이 민족의 수난과 투쟁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가 되었던 것처럼 소설 속 징게맹갱(김제만경)은 강탈당하는 조선의 얼과 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김제는 우리 민족의 곡창지대였으며, 다양한 종교의 성지이다.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는 이때에 일제강점기 수탈의 현장이었던 김제를 작품의 중심무대로 삼아 쓴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를 다시 생각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 금산사(金山寺)
금산사 초입에 서 있는 일주문에는 <모악산 금산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일주문은 신성한 가람에 발을 들여 놓기 전에 세상의 고뇌로부터 탈피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금산사의 일주문은 1975년에 건립한 목조의 맞배지붕이며, 현판 글씨는 일중 김충현(1921~2006)이 썼다. 일주문을 지나 100m 쯤에 작은 개울을 만난다.
이 개울을 건너면 금강문이 기다린다.
금강문은 금강역사를 모시고 있으며, 절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담당한다.
금산사 천왕문은 금강문과 일직선상에 있으며,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인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외호신은 사찰의 외곽을 수호하는 신이며, 동, 서, 남, 북 네 곳을 지킨다.
보제루는 천왕문을 지나 가람의 중심에 세워진 누각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2층으로 승병과 관련 있는 건축물이며, 후에 법회와 대중 집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조선 중기까지 금산사에는 12칸짜리 만세루가 있었다. 금산사 중심에 대적광전이 자리 잡고 있다.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본존불로 모신 건축물로 화엄종에서는 화엄경에 근거하여 봉안한다. 1986년에 화재로 불에 타서 1994년에 복원했다.
신라 때 진표율사는 지금의 미륵전을 금당(金堂)이라고 기록하였으며, 웅장한 규모로 건축된 것은 임진왜란으로 금산사가 전소 된 후에 1635년 수문대사에 의해서였다. 이곳에는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과 여섯 보살을 함께 모셨다. 금산사의 상징은 미륵전이다.
보제루를 지나 금산사의 중심에서 오른쪽으로 미륵전이 눈에 들어온다. 3층의 거대한 건축물로 지어진 미륵전은 국보 제62호로 보기에도 웅장하다. 금산사에 와서 이 건축물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중요한 사찰 건물이다.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인 미륵이 사람들을 교화하는 상징적인 법당이다.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을 절속에 함축한 미륵전은 먼 미래에 도래할 부처의 세상에서 더불어 성불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참회와 소원을 비는 공간이다.
미륵전은 762년과 766년 사이에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세웠다.
건축 당시 미륵장륙상을 본존으로 모시고 남쪽 벽에 미륵과 지장보살에게서 계를 받는 장면을 벽화에 담았지만 안타깝게 정유재란 때 왜적에 의해 소실되었다.
1635(인조13년)에 수문대사가 재건할 당시의 모습이 미륵전의 지금 모습이다.
미륵전은 용화전, 산호전(山呼殿), 장륙전 등의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등의 편액 글씨로 전각의 이름을 달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건축 기술의 발전상을 볼 수 있는 금산사의 미륵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자긍심이 있는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미륵전의 안쪽 벽과 외벽의 공간에는 다양한 벽화가 있다. 보살과 스님들이 수도 정진하는 모습 등이 그려진 벽화가 있기에 건축물의 의미와 아름다움이 크다. 미륵불 본존은 높이가 약 12m이다. 김복진이 1938년에 석고에 도금한 불상이다. 김복진(1901~1940)은 우리나라 근대 조각의 개척자다.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불상이지만 불단 아래 청동대좌는 역사가 매우 오래 되었기에 역사의 수난시기에 소실되었던 불상들의 존재를 알 것 같다.
금산사의 당간지주는 역사와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은 유물이다.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금산사 당간지주는 어느 절에 마찬가지로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홍보하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支柱)이다.
당간지주를 절의 입구에 설치하는 이유이다. 금산사 당간지주는 장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당간을 받치던 간대(竿臺), 지주를 놓던 기단석 등이 아직도 그대로다.
당간지주의 설치연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중창하던 766년 무렵으로 추정한다.
금산사에는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계단의 중앙에는 석종형(石鐘形) 부도가 서 있다. 이 부도는 보물 제26호로 지정될 정도로 역사적인 유물이며, 방등계단은 의식법회 장소로 한국 불교의 특징을 보여준다.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는 불교 신앙의 기본 토대이다. 방등계단은 또 다른 의미로 도솔천(兜率天)을 형상화한 표현의 장소이다.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인 금산사에서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을 건축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실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실천했다.
김시습(1435~1493)이 금산사를 탐방하여 방등계단에서 쓴 시가 있다.
김시습이 금산사에서 쓴 시를 차운한 윤증(1629~1714)시 금산사에서 쉬며 김열경의 시에 차운하다(遊金山寺 次金悅卿韻)을 읽어보면, 당시 금산사의 서정을 느낄 수 있다. 김열경은 김시습의 호다.
부세수여차지관(浮世誰如此地寬) 부질없는 세상에 이곳처럼 한가한 곳 또 있으랴
세심태경도청단(細尋苔徑度淸湍) 이끼 낀 오솔길과 맑은 시냇물을 따라 걷네.
소번자문수등정(疎煩自問垂藤井) 등나무 그늘 아래 우물에서 번뇌를 씻네
선승선등노회단(選勝先登老檜壇) 늙은 전나무가 서 있는 석단(石壇)에 올랐네
답장증하추색힐(沓蒸霞秋色?) 첩첩의 산봉우리 가을빛이 깊었구나
만임비우간성한(滿林飛雨澗聲寒) 숲속에는 비가 내리고 시냇물 소리가 차갑네.
청풍홀억동봉자(淸風忽憶東峯子) 맑은 바람이 불고 갑자기 동봉자가 생각나네
삼창유편야이란(三唱遺篇夜已?) 쓰여진 시를 읽고나니 밤이 벌써 깊었네
윤증은 금산사의 방등계단으로 올라 가을 풍경을 감상한다. 김시습의 심정을 생각하고 그의 시를 떠올린다. 시의 제목인 김열경과 동봉자는 김시습의 호다.
윤증의 문집 〈명재유고〉1권에는 아들에게 감금된 견훤의 이야기와 목은 이색의 지조 있는 삶을 풍자한 시가 전한다.
제목은 이목은의시에차운(又次李牧隱韻)이다.
쌍계명옥향산중(雙溪鳴玉響山中) 산속에서 소리치는 쌍계의 물소리가
승지장래제일공(勝地裝來第一功) 아름다움을 만들어 준 제일의 공신이네
장불앙장전동부(丈佛昻藏專洞府) 큰 미륵보살은 이 고을을 압도하지만
종대청형부림궁(鍾臺淸逈俯琳宮) 종소리 청아하게 울리니 금산사를 품네
견훤사업천년취(甄萱事業千年臭) 견훤이 이곳에서 당한 사건은 천 년의 추문이며
목노시편백세풍(牧老詩篇百世風) 목은 이색이 남긴 시들은 삼천 년의 청풍이네
총시유인진려절(摠是遊人塵慮絶) 이런 것이 나그네에게 속세를 떠올리게 하네
추광사의의난궁(秋光徙倚意難窮) 가을볕 아래 방황하니 마음이 번잡하네.
사즉견훤소창 기후훤자신검 수훤어차사(寺卽甄萱所創 其後萱子神? 囚萱於此寺)
‘이 사찰은 견훤이 창건하였는데 그의 아들 심검에 위해 이 절에 감금당하다“라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윤증은 견훤이 아들 관리를 잘 하지 못하여 자기사 세운 사찰에 감금당한 사건을 1000년 동안 부끄러운 치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 목은 이색이 이곳에 와서 쓴 시는 사람들의 욕심을 줄이며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할 수 있다고 쓰고 있다.
윤증(尹拯1629-1711)은 대학자였다. 조정의 관직 임명을 여러 번 고사했으며, 우의정 임명을 거부하여 백의정승이라 불리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가 금산사를 찾아와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은 지조 있던 삶에 기인한 것이리라.
적멸보궁은 방등계단 옆에 세워진 예배각이다. 방등계단의 중앙에 있는 사리탑에 예불을 하는 곳이다. 불전 내부에는 불상이 없다.
대적광전 뒤에 나한전이 자리잡고 있는데, 나한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신앙을 결단하는 전각이다. 나한은 소승불교의 최고의 경지에 오른 부처이며, 아라한(阿羅漢)의 준말이다.
아라한(阿羅漢)은 살적(殺賊), 응공(應供), 응진(應眞)이란 다양한 이름을 가진다.
‘살적’은 번뇌를 삭제하고, ‘응공’은 사람과 하늘의 공양을 받는 공을 말하며, ‘응진’은 진리를 실천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나한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시고 보통 5백 명의 모신 오백나한전과 16나상을 모신 응진전으로 구별된다.
미륵전의 북쪽 위에 오층석탑이 자리 잡고 서 있다. 이 석탑은 높이가 7.2m로서 보물 제25이며 본래는 9층탑이었다. 1971년 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에 979년(경종4)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기록이 있기 전까지는 견훤이 세웠다고 전해왔다. 기록은 이렇듯 중요하다. 중창기와 함께 금동관음상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이 발견되어 금산사의 역사를 확실하게 증언해 주었다.
금산사는 서기599년(백제법왕1년)에 창건되고, 통일신라 시기 경덕왕때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금산사에서 숭제법사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을 하던 진표율사는 27세 때에 변산 부안의암에서 철저한 수행에 전념하였다. 17년 동안 몸을 돌보지 않는 고행을 통하여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간자와 계본을 전해 받게 된다.
이후 진표율사는 금산사로 다시 돌아와 금산사의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6년에 걸쳐 가람을 대규모로 일으켜 세웠다.
이때가 경덕왕 21년인 762년부터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이르는 기간이다.
금산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금산사사적"의 내용을 근거로 불 때 599년 백제 법왕의 자복사찰로 창건되었으며, 이 후 진표율사에 의한 6년여의 중창으로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 메김 한 것은 진표율사 때부터이다
금산사는 미륵을 모신 사찰이다. 미륵은 미래에 오실 부처님이다. 미륵신앙은 가난하고 억울했던 백성들에게 희망의 부처였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미륵을 자처하며 백성들을 속인 자들도 있었지만 이로 인해 미륵은 더욱 민중들과 가깝게 되었다.
미륵은 인도어 'Maitreya'의 발음에서 따왔다. 의역하면 “자비를 갖춘 분”이라는 뜻을 지녔다. 자비는 포용력을 지니며 기쁨과 슬픔을 대변하고 적극적인 종교적 실천 의지를 가지고 있는 단어다.
석가모니 부처가 설파한 미륵신앙은 미륵상생신앙과 미륵하생신앙 두 가지로 구분된다.
미륵상생신앙은 미륵이 수행하고 있는 도솔천을 이상세계로 보고 이 세상을 떠난 후에 도솔천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신앙형태다.
죽은 사람이 도솔천에서 살아나기 위해서는 십선도를 실천하고 참회 수행하여야 하는 신앙이다. 미륵이 하생할 때는 미륵과 더불어 지상으로 내려와 깨달음의 길로 인도 받는 것은 믿는 신앙이다.
미륵하생신앙은 모든 사람들이 자비심을 지니고 십선을 많이 실천할 때에 고통과 고난 받는 세상에 출현하여 불쌍한 민중들은 구원 하신다는 것을 믿었던 신앙이다. 모든 사람들이 십선을 열심히 실천하여 자비와 평화의 불국토를 만든 세상에 미륵부처가 출현하여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3회의 설법을 통해서 죄를 삭제하고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미륵 하생신앙이다. 십선도는 다음과 같다.
불살생(不殺生) 생물을 죽이지 말라
불투도(不偸盜) 도독질 하지 말라
불사음(不邪淫) 간음하지 말라
불망어(不妄語) 거짓말하지 말라
불기어(不綺語) 혼미한 말을 하지 말라
불악구(不惡口) 험담을 하지 말라
불양설(不兩舌) 이간질을 하지 말라
불탐욕(不貪欲) 탐욕하지 말라
부진에(不瞋) 화를 내지 말라
불사견(不邪見) 사악한 편견을 하지 말라
미륵신앙은 신라 때는 미륵이 화랑도와 결합되었으며, 후고구려의 궁예에 의해 이용당하기도 했다. 고려말기 우왕 때에 ‘니금’은 미륵불을 자칭하다가 처형당했다. 조선 숙종때는 승려 ‘여환’이 석가시대는 가고 미륵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미륵신앙을 선교하다가 처형당했다.
그러나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륵은 민중불교의 큰 줄기로 후천개벽을 통행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등불같은 신앙이 되었다.
■금산교회
금산교회는 1905년에 전주선교부의 테이트 선교사에 의해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290-1에 세워졌다. 지금 한옥교회는 1908년 옮겨 신축한 건축물로 남북방향으로 놓여진 장축의 평면은 5칸의 장방형과 동쪽으로 2칸이 덧붙여져 ㄱ자가 형태이다.
한옥 형태의 내부는 ㄱ자 형태의 만나는 꼭지점 공간에 강단을 설치했다.
공간이 긴 남측은 남자석, 공간이 짧은 동측은 여자석으로 분리한 것이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남여의 출입도 분리하였으며 강단 뒤쪽에는 목사가 출입하는 작은 문을 내었다. 강단은 신자석보다 2단 높게 설치했다. 교회 내부 바닥은 장마루의 형태이며
내부 벽체 및 천장부에는 목부재를 제외하고는 흰색 수성페인트로 칠을 했다.
교회 내부의 중앙에는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휘장으로 가리고 좌와 우의 남녀의 예배공간을 구분하였다.
이런 금산교회의 건축은 초기 교회건축의 토착화과정을 보여 준다는 의미도 담고 있지만 더 큰 미담은 따로 있었다.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의 이야기가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금산리는 노령산맥의 모악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100여 세대가 살고 있는 이 마을에 금산교회는 신앙과 삶의 교훈을 안겨준다.
1904년 교회 설립당시에 지주이며 금광을 했던 조덕삼 장로(1867~1919)은 자신의 사랑채에 데이트 선교사를 모시고 예배를 드렸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데이트 선교사는 언더우드를 만나 우리나라를 향한 선교사가 될 수 있었다.
테이트 선교사는 미국 남장로교회 소속 신학생이었다. 언더우드선교사가 안식기간 중 귀국하여 미국의 멕코믹신학교에서 조선선교 보고를 할 때 감동받아 선교사의 뜻을 품게 된다. 결국 데이트는 1892년 7월7일 미국 남장로교회 해외선교부에서 7인의 선교사와 함께 파송된다. 1892년11월3일 제물포항으로 입국하여 한국 선교를 시작한다.
이자익은 경남 남해도에서 아버지 이기진과 어머니 박정근 사이에 태어났다.
6세가 되기 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매일 그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높은 산에 올라가 육지를 자라 보았다. 육지를 드나드는 뱃사공에게 육지에 갈 수 있기를 부탁하며, 남해도를 떠난다. 당시 어린 이자익은 육지에서 머슴살이라고 하면서 밥을 많이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당시 토지가 많고 비단장사와 인삼 그리고 마방을 하는 금산면 금산리 용화마을의 재력가는 조덕삼이었다. 조덕삼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마부와 머슴으로 지내던 중 테이트 선교사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테이트 선교사는 당시 전주에 거점을 확보하고 김제 금산 지역까지 순회하며 사역을 감당했다. 이때 조덕삼은 테이트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로 개종한다. 조덕삼이 살던 용화마을은 점차로 기독교인이 증가하고 예배할 장소가 없게 되어 교회를 신축한다. 한편 이자익은 데이트 선교사의 주례로 1905년 김제 금구 출신 김선경과 결혼을 한다.
당시 예배에 참석했던 신도는 조덕삼씨 부부와 이자익 청년, 박화서부부, 왕순칠, 박동호 김윤찬, 조영호등이었다.
1905년 10월 11일, 최의덕(데이트) 선교사의 집례로 조덕삼, 이자익, 박희서등이 세례를 받았다. 금산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세례자 중에 이자익 목사(1879~1958)은 고향이 경남 남해였다. 3살 때 아버지와 6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다. 살기 위해 걷고 걸어서 곡창지대였던 김제 금산리까지 왔다.
그가 걸어왔던 곳은 여수, 남원, 전주를 거쳐 금산리의 삼거리 길에서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까 고민했다. 이자익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오른쪽으로 힘없이 걸어 당도한 곳이 금산리의 부호 조덕삼의 집이었다. 그는 조덕삼 집의 머슴이 되었다. 그가 왼쪽으로 걸어갔다면 스님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금산사(金山寺)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자익은 충실한 머슴과 마부가 되어 주인 조덕삼을 정성을 다해 섬긴다.
이러 가운데 금산교회는 부흥되어 장로를 선출하게 되는데 공교롭게 조덕삼과 이자익이 장로 후보가 된다. 교인들은 이자익을 투표를 통해 금산교회의 장로로 선택한다. 놀랍게도 주인 조덕삼은 교인들에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는 이자익 장로를 모시고 금산교회와 하나님 섬기는 일을 더욱 열심히 봉사 하겠습니다”고 발언했다.
조덕삼 집에서는 주인과 마부의 관계였지만, 교회에 출석하면 장로와 평신도의 관계가 되었다. 주일마다 이자익은 설교를 했다. 조덕삼은 자신의 머슴 설교를 들었다.
조덕삼은 1908년 가을, 금산교회 장로가 되었다. 조덕삼은 이자익이 장로에 머물지 않고 목회자가 되는 것을 원했다. 총명하고 신실했던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에 보내어 졸업하게 하게 한 것은 조덕삼의 재정적인 후원에 의해서였다.
이자익은 1915년 평양신학교 졸업하고 목사가 된다. 조덕삼은 이자익을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초빙한다. 이자익은 이후에 한국교회의 거목으로 거듭나며 인생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다. 한국장로교단 총회장을 3번이나 역임하고 장로교의 개혁헌법을 기초하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영원한 스승 된 이자익 목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대전신학대학교에 있다. 이자익 목사가 경남 남해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김제군의 대지주 조덕삼(조세형 전 국회의원 증조부)을 만난 것은 그가 17세 되던 해였다.
조덕삼이 이자익을 눈여겨 본 것은 마부로 일하면서 한글과 한자공부를 하고 있던 성실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이트선교사가 없었다면 주인과 머슴의 신분은 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남장로교 최의덕(Lewis Boyd Tate) 선교사를 조덕삼이 만나고 그를 통해 최 선교사를 통해 예수를 영접했다. 1909년 금산교회에서 최초의 장로 1인을 선출 할 때 교회설립자인 조덕삼 집사를 선택하지 않고 이자익을 장로로 선택한 것은 당시 남아 있던 신분사회에서는 이변이었다.
조덕삼은 오히려 이자익장로를 평양신학교에 입학시키고 5년 뒤 그를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하였으니 감동적인 선교 역사의 모범이 되었다. 이자익 목사는 분열 이전의 장로교단 총회장을 세 차례나 역임(13대, 33대, 34대)하였으며, 전국에 20여개의 교회를 설립하는 등 선교로 헌신했다.
이자익 목사의 삶은 항상 청빈했다. 큰 교회의 청빙을 거절하였으며, 작은 시골교회에서 헌신했다. 친구였던 함태영 부통령의 장관 수락을 거부한 것은 유명하다. “장관보다는 목회자로 종신하겠다”며 단호하게 거절할 줄 알았던 소명의식을 가진 목회자였다.
한국교회 130년 역사를 통틀어 이런 분이 몇 명이나 될까?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충실하였으며, 변질이 없었던 거목이었다.
■소설아리랑의 줄거리
감골댁은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였다가 세상 떠난 부군의 약값으로 김가에게 18원의 빚을 지게 된다. 빚 때문에 감골댁의 큰아들 방영근은 20원에 하와이 이민을 떠난다. 일본인들은 김제만경평야의 토지를 사들이고 우체국 조직망을 통해 정보를 수집한다.
아전출신 기회주의자 백종두는 일본이 세상이 된 것을 인식하고 일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보부상 출신 장덕풍은 잔존 동학군을 밀고하면 출세할 수 있다는 말을 믿고 그들을 찾는데 혈안이다. 우체국장 하야가와는 조선의 정보를 알기 위해 어린이들에게 사탕을 사주며 인심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영사관 서기 쓰지무라에게 한일조약에 대비한 준비를 당부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난 120명은 죽을 고생한 한 후에 하와이에 도착한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노예와 같은 생활이 시작되었다. 7월 열대 햇빛 속에서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노동착취에 시달린다.
일본 대농장의 상무인 모리야마는 총지배인 요시다와 김제 만경평야의 넓에 감탄하고 논을 구입하기 시작한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주재소에 협조를 얻어 논 매입에 나선다.
영사관 서기 쓰지무라는 우체국 소장 하야가와와 논의 한 뒤 백종두를 친일 단체인 일진회의 회장으로 선출한다. 장덕풍은 아들을 설득해 일진회에 가입시키고, 백종두는 머리를 깍고 군산지부 일진회의 발단식을 거행한다.
감골댁의 큰 아들 방영근이 없는 살림살이는 가난했다. 큰 딸 보름이를 첩으로 삼으려는 자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감골댁을 이를 거절한다.
송수익의 사랑채 학교는 일제에 의해 문들 닫는다.
학교 운영에 관해 만석꾼 집안의 큰 아들이며 글벗이었던 정재규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한다. 논을 팔라고 회유하는 일본 앞잡이를 혼내주었던 정재규는 주재소에 끌려가고 문중의 요구로 겨우 풀려난다.
마을로 돌아온 지삼출은 송수익을 통해 일진회의 정체를 파악하고 일본세상이 되는 것을 한탄한다.
가난으로 감골댁 큰 딸 보름이는 밥을 짓지 못한다. 김제 호남평야에 펑펑 내리는 눈을 부질없이 바라본다. 지삼출은 마을 주민들과 참새몰이를 하면서 금산사 미륵불이 통곡했다는 소문을 듣는다. 지삼출은 대나무 숲의 바람소리가 동학농민전쟁 때에 죽어간 혼들이 내는 통곡소리로 들었다. 요시다는 정재규의 담보물인 논을 고의적으로 빼앗는다.
군산은 점차 일제의 항구가 되어갔다. 소비 상품들이 들어오고 쌀을 실어가는 배들로 난삽 스러웠다.
군산은 더욱 번적거리기 시작하였으며 금산사 미륵불과 은진미륵이 통곡을 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더니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송수익은 의병을 모으기 시작한다. 하야가와는 의의병가담자들을 색출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와이로 이민 같던 방영근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며 살고 있다. 그와 함께 하와이로 이민을 갔던 주만상은 세상을 떠난다. 조선식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아리랑이 통곡의 만가가 되어주었다.
군대해산으로 의병활동은 산불처럼 조선 전역으로 퍼져갔다. 전라도에서도 최익현과 임병찬이 의병의 지도자가 되고 송수익과 임병서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쓰지무라는 백종두와 일진회원들을 동원하여 의병활동의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혈안이 된다. 일진회원들은 지삼출의 기지에 넘어가 죽임을 당하고 지삼출과 손판석은 총을 탈취한다. 태인에서 의병이 일어났지만 패배한다.
호남평야 이곳저곳에 신작로가 나기 시작한다.
방영근과 남용석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같은 삶에서 해방된다. 계약기간이 끝났지만 배 삯이 없어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장인환과 전명운이 스티븐스를 암살한다. 하와이 이민자들은 모금운동을 벌여 통역자로 왔던 이승만을 믿었지만 그는 떠나버리고 실망과 원망으로 바뀐다. 일제의 의병 대토벌작전에 의해 의병 활동이 소멸 될 즈음에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물을 처형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의병에 차여 했던 송수익은 어느 사찰에 숨어든다.
1910년 8월 29일 강제적으로 한일합방조약이 공포되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된다.
백종두는 일진회가 해산된 후 죽산면장으로 임용되고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다는 정보를 쓰지무라에게 얻는다.
절에서 은신하던 송수익은 공허의 안내를 받아 신세호와 임병서를 만난다. 송수익은 신세호에게 신채호의 저서 성웅이순신과 을지문덕을 읽으라고 권한다.
신세호와 임병서는 산을 내려와 송수익이 말한 책들이 금서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1910년 경술국치는 하와이의 조선사람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하와이 이민자들은 대한국민회 하와이 지역 총회에서 일본성토와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무주로 시집갔던 보름이는 남편이 의병과 내통했다하여 총살당한다.
죽산면 면장 백종두는 장칠문을 순사보로 고용하여 의병과 배일자들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하시모토는 토지조사사업전에 죽산면의 농지경작 실태를 조사를 지시하고 장칠문은 순 신세호를 주재소로 끌고 간다. 신세호가 신채호의 금서를 소유한 혐의로 신민회 간부로 지목받았기 때문이었다.
송수익은 만주행을 위해 의병을 해산시킨다. 그들은 아리랑 노래를 주고 받으며 이별한다. 지삼출과 손판석은 하산하여 군산으로 거처를 옮긴다. 군산은 이미 인구가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운둔하기에 좋았다.
호남선은 강경선이 제일 먼저 개통되고 감골댁은 지삼출과 손판석을 따라 군산으로 숨어든다. 정재규는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 재산으로 화투와 주색잡기로 나날을 보내며 결국 어머니도 세상을 떠난다.
송수익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빈소를 찾아 조문한 공허는 순사에게 체포되지만 논길에서 순사와 순사보를 살해하고 도망친다.
통감부에서는 토지조사령을 공포하고 많은 토지들을 국유화 한다. 국유화된 농토의 7할 이상을 통감부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겨 주었다. 농토를 빼앗긴 외리와 내촌 사람들은 외리마을 박병진과 내촌마을 김춘배를 대표로 동양척식회사에 항의한다.
오히려 대표자 둘은 구속되고 나머지는 심하게 태형을 당하고 일부 불구자가 된다. 화전민촌으로 피신한 수국이는 자살을 기도하지만 지삼출 등에 발견되어 살아난다. 공허스님의 설법을 듣고 만주로 떠날 결심을 한다.
만주에서 송수익은 부하들이 오기전에 최적의 투쟁지를 고른다.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종합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는 통화로 기지를 정한다. 지삼출과 천수동, 김판술, 배두성등 같이 의병으로 활동했던 부하들이 오자 송수익은 교양교육과 정신무장을 시켜 독립군으로 만든다.
이회영이 설립한 신흥강습소 견학한 송수익은 가슴벅찬 희망으로 조선의 청년들을 독립군으로 양성하기 헌신할 다짐을 한다.
공허는 군자금을 위해 결사 조직을 결심한다. 총독부는 사찰령을 내려 절들의 조직체계를 재정비하고 재산을 불려주었다. 이제 의병으로 나서는 자가 없었으며 양반과 지주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느라 나라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시모토는 그의 농장에서 생산된 쌀과 소금을 일본으로 송출 할 때는 군산부두에 나가곤 했다. 더 많이 송출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정재규는 재산 분할을 하고 현금으로 받은 돈을 공허의 비밀결사대에게 빼앗긴다. 공허의 비밀결사대는 김제의 가진 자들에게는 무서운 공포가 된다.
보름이 시아버지는 토지조사사업으로 밭을 뺏기게 되자 측량하던 면서기를 괭이로 공격하였다가 총살당한다. 보름이는 어린 아들 삼봉이와 둘만 남게 된다.
하와이의 방영근은 10년 세월동안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박병진은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고 외리의 주민들은 이제 박병진의 아들 박건식을 땅찾기 운동의 대표자로 뽑는다.
공허는 만주의 송수익에게 군자금을 전달하러 가다가 ‘통화’로 가는 마차에서 대종교도 한법린을 만난다.
장칠문의 첩이 된 보름이는 그의 아내에게 폭행을 당하고 유산한다. 경찰서 계장 세끼야의 눈에 띄어 보름이는 그의 첩이 되는데 서무룡은 장칠문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다.
하와이에서 말녀는 이승만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봉사한다. 국민회의 박용만과 외교점진론자인 이승만의 의견충돌이 시작되었다.
면장직을 면직당한 백종두는 호남친화회를 발족하고 회장을 하면서 기가 살아난다. 경성에서 유학하던 정도규는 물산공진회에 조선인들이 북적거림을 보고 추태라며 부끄러워한다. 고무신이 조선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가늠하던 정도규는 일본의 상술에 가슴이 흔들렸다.
물산 공진회가 끝나자 조선의 많은 곳에서는 고무신 바람이 분다. 공허는 김제포교당 도림스님에게 신한독립사의 복사를 부탁하고 각 서당의 젊은 훈장들을 만나 한국통사를 전달한다.
방대근이 신흥 무관학교를 졸업하는 날 감골댁과 수국이는 가슴이 설레였다.
졸업식날 감골댁, 수국이, 송수익, 지삼출, 배두성, 필녀등이 참석했다. 졸업식장에 참석한 송수익은 졸업생 윤주협, 노병갑, 김시국, 권혁도등을 소개 받고 그들에게 공화주의를 강조한다. 방대근에게 졸업선물로 "백호"의 필서를 선물 한다.
박건식, 남상명등은 동척에 빼앗겼던 논이 하시모토에게 넘어간 사실을 알게 된다. 신세호네 동네에서는 소작마저 떼이고 살 길이 없어진 네 가구가 간도로 떠난다. 배웅 나온 신세호는 네 사람의 가장에게 당산나무 아래 흙을 한 주먹씩 건네준다. 조국을 잊지 말라는 징표였다.
전주고보에 재학중인 송중원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창가보급회 회원이 된다. 그는 조회시간에 일본 국가를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훈육 주임에게 구타를 당한다. 양치성은 총독부에서 정신 재무장을 위한 교육을 받아 첩보원이 되어 압록강변의 일본군 나남수비대에 배속된다.
송수익은 통화현 대종교 교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주해오는 동포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 일제는 통화현 대종교 간부교도를 체포하려고 하여 송수익은 한법린과 함께 무송현으로 피신하여 무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훈련을 가르친다.
국내에서의 서당교육은 독립군양성과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한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는 <서당규칙>을 공표하여 서당활동을 제한했다.
독립지사 39인의 이름으로 범민족의 대표성을 확보한 최초의(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된다.
상해 신한청년단 모임은 여운형, 김구, 장덕수, 조동호, 신석우등 독립운동가들이 선언서를 읽어보면, 파리 강화회의와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독립건의서를 전달하기로 결정한다.
동경 조선인 유학생 5백여명이 모여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하다 경찰들에 줄줄이 잡혀간다. 하와이 국민군단 훈련소 방영근을 비롯하여 하와이에 이주해 온 조선남자들은 목총을 가지고 열심히 군사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이해가 되지 않음에 방황하며 토론하나 속뜻을 몰라 답답하긴 교관이나 훈련생들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위임통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조선의 위임통치를 부탁하는 청원서를 미국에 제출한다. 모든 운동세력들의 대연합 기독교, 불교, 천도교 할 것 없이 모든 종교세력들이 연합하여 독립운동선언에 참가하기로 한다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의 선창을 따라 긴 대열을 이룬 군중들이 계속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공허는 도림으로부터 건네받은 독립선언서와 지하신문인〈조선독립신문〉을 배포한다.
전주, 이리, 강경에서 만세운동이 확산된다. 김제 장날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중 김춘배는 순사의 칼에 찔려 죽고, 박건식은 여러 시위대들과 밤이면 일인들의 농가를 기습해 불을 지른다. 백종두는 친화회의 건달패들을 이끌고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가 야간기습을 당해 몰매 맞아 죽는다. 누군가의 밀고로 야간 활동이 경찰에 알려지자 도망다니던 박건식은 가족들과 함께 목포로 피신 이주한다.
3.1독립운동은 만주 서간도에는 여러 개의 단체가 생기고 그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군정부와 대한독립단이었다.
방대근이네 세 식구는 송수익의 소개로 북간도로 이주하여 정의단의 환대로 정착하게 된다. 3.1만세 소식으로 하와이도 들뜨며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3.1운동에 참가 했던 젊은이들은 중국 각처로 몸을 피하고 독립군 단체들 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하여 배속된다.
북간도의 대한북로군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 수비대에 승리하지만 서간도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합동수색대에 의해 독립군 소탕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송수익의 마을에 들어온 토벌대에 의해 배두성이 살해되고 천수동은 잡혀간다. 만주땅의 군벌 장작림의 묵인아래 일본군은 서간도 일대를 수색했다. 마적떼들의 신흥무관학교 습격이 자주 일어나자 폐교시키고 학생들은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의 독립군으로 편성 하게 된다. 봉오동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이 장작림에게 압력을 가하여 독립군을 토벌하기로 결정하자, 중국군과 독립군은 서로 타협하여 교전하지 않기로 한다. 일본은 중국군의 토벌이 전혀 실효가 없자 훈춘사건을 조작해 북간도 일대의 조선인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마을을 불질러댔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비롯하여 여러 단체들은 연합하여 청산리 골짜기에서 전투를 벌인다. 김좌진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소대장으로 청산리 백운평 전투에 참가 한 방대근 부대는 완전한 승리를 하며,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그 연합부대는 완루구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독립군들은 청산리 일대와 반대쪽으로 길을 떠난다
간도 출병에 대패한 일본은 독립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농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양치성은 농민들의 토벌이 시작되기 전에 영사관 임형사와 모의하여 수국이를 체포한후 토벌대를 안내하여 감골댁과 그녀의 마을 주민들을 몰살 시킨다. 동생 방대근의 거처를 대라고 취조당하던 수국이는 임형사에게 강간을 당한 후 양치성에게 넘겨진다. 양치성은 수국이와 함께 감골댁의 시신을 찾아 장사를 치러주는등 가면의 선심을 쓴다. 독립군들을 뒤쫓다 놓쳐버린 일본군들은 조선농민들 토벌을 더 확대하고, 시교당 예배당 등을 포함 3천여채 이상을 소각하고 1만여명을 살해하였다. 이를 경신참변이라 한다.
만세시위의 주모자로 수배 당하던 공허스님은 금강산으로 들어가려는 도림과 헤어지고 경성역에서 밤기차를 타게 된다. 장칠문에게 체포되지만 열차에서 뛰어내려 대전 포교당에서 다친 다리를 치료한 후 홍씨 집으로 피신한다.
정도규는 동경유학시절 사회주의를 접하고 사상서적을 들여와 유승현에게 전한다. 유승현은 만세사건으로 2년 6월의 형을 살고 나오며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 되어 공허스님을 정도규에게 소개한다. 조선 노동공제회, 서울청년회, 동경고학생동우회등 사회주의 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해 진다.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이 소작인들을 조종하여 여러 곳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나자 총독부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단속방침을 발표한다.
1923년 9월 1일 일본내에서는 지진과 동시에 발생한 많은 화재가 조선노동자들이 한 일이라는 음해보도로 조선인들은 수없이 살해당했다.
중국상인으로 변장하고 조선에 들어온 방대근은 호남선을 타고 군산에 도착한다. 방대근은 큰누나 보름이와 만나고 한성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정도규는 ‘민족개조론’을 쓴 이광수와 ‘일선동조론’을 쓴 최남선등을 친일파라고 비판한다.
사회단체들의 난립현상은 사회주의 사상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데 공허스님은 사회주의도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 같다는 언급을 한다.
1925년 상해 임정 의정원에서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이 의결되자 하와이 이민자들의 분노와 동요가 심해진다.
송수익은 결혼한 지 30년, 고향을 떠나온 지 15년 만에 아내에게 안부 편지를 쓴다.
한성 단성사에서 "아리랑"영화가 7일을 넘기고 10일이나 연장하며 초만원을 이룬다. 영화"아리랑"은 나운규의 작품으로 일본인을 감독으로 내세워 총독부의 검열을 피해 상영되면서 조선사람들 전부의 가슴을 뒤흔들고 눈물을 흘리게 했던 것이다. 허탁, 홍명준은 "아리랑"을 관람하고 문학이 독립 투쟁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송중원이 문학을 하려고 하는 이유를 깨닫는다.
1927년 장개석이 쿠데타를 일으켜 남경국민정부를 조직함에 따라 국공(국민당과공산당)분열이 이루어지게 되자 광동 중국 혁명군에 가담했던 조선의용군들은 크게 낙담하여 분산한다.
조선공산당은 파벌간의 싸움으로 당의 분열과 소모를 초래하고 상대측을 경찰이나 헌병대에 밀고하는 등 자멸하여 붕괴된다.
일본 사람들이 신식기계로 사금 채취를 한다는 소문과 금산면과 금구면 일대에 금바람이 불며 그 일대의 땅임대료가 솟는다.
김제군의 동척소작인 천여명이 신간회의 조종으로 소작료 인하 및 수리조합비 면제를 주장하며 소작쟁의를 일으킨다. 서당 사건과 송수익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신세호는 공허의 권유로 신간회의 간부자리를 맡게 되며 차득보는 청년회원으로 가입한다.
1929년 나주에서 일본학생들이 조선여학생들을 희롱 하는 것을 본 조선학생과 일본학생들 사이의 싸움이 민족감정으로 충돌하여 전국학생운동으로 점화되었다. 1930년 3월까지 계속되며 학생운동에 참가한 학교는 194개교, 투옥된 학생 580여명, 퇴학 및 무기정학 당한 학생이 2,330여명에 이르렀다.
신채호선생은 무정부주의 투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한 대량의 유가 증권을 옮기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여순감옥에 갇힌다.
송수익은 신채호선생의 체포와 3부통합의 실패를 보며 무정부주의 투쟁을 하기로 결심한다. 3부통합은 고질적인 분파의식과 주도권다툼으로 실패하며 어느 파당이나 자리에 연연해 하지 않은 신채호선생이 무정부주의였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의 1국 1당 조처로 의열단은 만주 각처로 활동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조처가 취해졌다. 방대근과 이광민도 만주로 가게 되며 윤주협은 간호사 민수희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길림에 도착한 방대근이 송수익에게 이광민을 소개하자 이광민은 이미 20년전에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송수익을 보고 놀란다. 게다가 송수익은 자신과 가장 친했던 후배이자 동료인 송중원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의 관동군들이 만주를 침략한다. 자기네 관할구역에서 스스로 폭발 사건을 일으킨 뒤 중국측의 소행이라고 뒤집어 씌우는 동시에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던 것이다.
송가원과 민동환은 상해사변 승리 축하장인 흥구공원에서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의사가 일본 백천대장 및 고급군관 고관료 10여명을 폭살시킨 사실을 통쾌해 하나 앞날을 걱정하며 명창옥비가 일하고 있는 상춘관을 찾는다.
하시모토는 대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실시하는 농촌 계몽운동을 방해한다.그는 학생들의 바람을 막기위해 면사무소를 통해 매일밤 동네마다 강연회를 열게 한다.
1934년 9월 조선 혁명당군의 지휘자 양세붕 장군이 일본밀정에게 기습당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일본군인들은 양세붕 장군의 시신을 조선인 마을로 옮기고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조선농민들 강압하여 시신에 가해를 하고 목을 자른다.
송수익은 15년형 언도를 받고 봉천감옥에 수감된다. 송수익의 작은 아들 송가원은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위해 만주로 거처를 옮기기로 작정한다.
일본인 의사 하야시를 통해 부친의 병보석이 가능하도록 조치하나 송수익은 거절한다. 병보석의 조건으로 쓰게 되는 전향서는 독립운동의 포기와 일본천황에 대한 충성 맹세였고 송수익으로서는 사형선고와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1937년 6월 5일 동아일보 호외로 독립군들이 함경남도 보천보기습에 대해 보도한다.
20만명을 실은 유형 열차 국경산악에 삭풍은 불고 있었다.
일본군의 만주독립군에 대한 토벌 작전은 1934년부터 3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동북항일연군이 그 세력을 확장하자 막대한 병력을 토벌에 투입한다. 방대근은 항일연군 제1군 제3사 사장을 맡고 이광민은 제3사 2단장 직책을 맡으며 보천보전투로 항일연군의 사기를 높인 김일성은 제2군 제6사의 사장을 맡았다. 필녀 및 수국이와 오삼봉은 후방대에서 활동하였다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천산산맥 부근의 타슈켄트 황무지에 강제 이주당한 조선아이들과 노인네들이 물이 달라지면서 생긴 풍토병에 의해 줄줄이 죽어갔다.
일본군의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포위작전은 만주 항일연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많은 문호인들이 친일파로 전향하면서 변절자가 된다.
1939년 10월부터 41년 3월까지 실시하며 7만 5천명의 대병력을 투입했다. 항일연군 간부들에게 막대한 현상금이 붙은 전단이 뿌려지며 항일연군은 많은 피해를 입은 채 소부대로 분사하여 일본군을 피하고 있었다. 굶주림과 피로에 지칠대로 지친 천상길,오삼봉,필녀,수국은 전사하고 방대근은 부대원들과 후일을 기약하고 총을 땅에 묻고 해산한다.
하시모토는 김제지역을 행정력으로 장악하기 위해 김제읍장으로 취임하며 군산 상공회의소장, 도회의원을 겸임한다. 송중원은 아이들을 모아 옛날 이야기를 통해 민족의식을 깨우친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중경의 임시정부에서는 종전 후 조선에 대한 영국의 처칠 수상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신탁통치설"에 반대하는 집회를 한다.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각자 가진 이념을 초월하며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방대근은 비밀감찰 대장의 직책을 맡는다. 중경에 잠입하고 있는 첩자나 밀정들을 색출해 내는 것이 그 조직의 임무였다.
총독부에서는 대학,고등학교까지 일제히 징집영장을 발급하며, 중추원에서는 학병 불지원자는 휴학시켜 징용키로 결정했다.
복실이와 순임이는 종군위안부 모집인의 꾀임에 속아 위안부로 팔려나간다. 남자들이 다 군대에 나갔기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며 매달 30원씩 노임을 준다며 꾀였던 것이다. 복실이와 순임이는 중간에 머무른 부산 수용소에서 아무도 모르게 잡혀온 처녀들이 예닐곱이나 된다는 사실에 놀란다. 공장에 간다는 말이 앞뒤가 안맞음을 깨닫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그들은 오사카와 시모노세끼로 끌려가 하루에 5-10차례 군인들을 맞이해야 했고, 복실이는 사이공을 지나 랑군으로 끌려갔다.
창씨개명은 1940년 2월 11일부터 실시되었다
사할린 탄광촌에 끌려간 김장섭 등 조선인 징용자들은 배고픔에 시달리며 하루에 12시간 이상의 채탄작업을 해야 했다.
일본이 군용위안소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만주를 침략한 직후인 1931년이었다. 그때는 유곽에서 몸을 팔던 여자들을 모아 데려갔으나 중일전쟁이 터진 1938년 일반처녀들 1백여명으로 일본군이 육군위안소를 개설하면서 일본군은 낭인패들과 조선의 친일파 매춘업자들을 동원해 “돈벌이 좋은 공장에 취직 시켜준다”, “여접원을 하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 는 등의 거짓말로 사기극을 벌이며 처녀들을 군용위안부로 끌어 갔다. 그러다가 1941년 7월 조선총독부와 일본군이 직접 나서 종군위안부로 끌어가려고 여자사냥을 시작하고 정신대 문제로 민심의 동요가 심각해진다. 일본은 가급적 도회지와 중류층 이상은 피하면서 비밀리에 실시하여 민심의 동요를 최대한 막으라는 지시를 각 도청에 하고, 이런 연락을 받은 하시모토는 변두리 지역의 하층민을 중심으로 정신대의 대상이 되는 딸을 가진 집들을 사오십가구 조사하라고 총무과장에게 지시한다. 상점에서 도둑질 한자 등을 협박하여 그의 딸들을 정신대로 끌어갔다
해방 그리고 비극 남만석네 집단 부락에서는 뜻밖의 외침에 놀라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났다. "왜놈덜이 다 없어졌다! 왜놈덜이 다 도망갔다아!" 집집마다 사람들이 뛰쳐 나오고 있었다. 해방이었다.
( 소설아리랑의 줄거리는 김제아리랑문학관 홈페이지 자료를 참고하고 인용하여 정리하였다)
|
첫댓글 공부를 해야 겠네요^*^
발품팔기 고생하시며 적어 놓으신 귀한 기록을
고마운 마음으로 모셔갑니다
바르고 옳은 곳에 걸어놓고 여러분 함께 즐겨 읽도록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김 시인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