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박해의 강도 전과 다르다
중국이 과거와는 또 다른 강도와 방식으로
교회의 ‘목을 조르고’ 있다. 미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중국 교회
지원기관인 China Aid는 최근
몇 주일 간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말했다.
최근 중국 당국은 몇 주일 동안 비등록교회에 대한 단속활동을 강화하는 한편 미성년자들에 대한 종교교육 행위 단속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지 교회들도 마치
지하교회를 뿌리 채 뽑으려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단속이 심하다고 말하며 힘겨워하고 있다는 것이 China Aid의 전언이다.
광동성 광조우의 한 소식통은
"공안이 비등록교회 교인들의 집을 가가호호 방문해 더 이상 교회의 예배에 나가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다니고 있다. 또 일부 중심 교인들은 공안으로 불러들여
이것저것 조사한다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한다. 또 이렇게 구두 경고로 그치지 않고 다시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까지 받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또 교회로 직접 찾아가 소방시설과 설비를
점검한다며 교회의 이 곳 저 곳을 촬영하여 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제지앙성 웬조우의 경우에는
당국이 모든 교회에 공문을 보내 청소년들을 교회에 절대로 출입시키지 말 것과 청소년 관련한 모든 프로그램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다. 이와 같은 명령은 각급 학교에도
하달되었고, 초중고등학교 교사들은
이 명령에 따라 학부모들에게 일일이 연락해 학생과 부모들이 기독교인인지, 교회에 나가는지 묻고, 아이들은 절대 교회에 데려가지 말라고
주의를 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리(Li)라고만 밝힌 웬조우의 한 기독교계
지도자는 당국의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시내의 모든 주일학교가 일거에 문을 당을 수 밖에 없었고, 주일학교 교사들도 혹시 있을 불이익을 위해
학부모와 아이들에게 당분간 교회에 나오지 못하도록 조치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웬조우시는 성인 어른이
미성년자들에게 종교교육을 시키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서 부모가 집에서 아이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가르치려 할 때조차도 매우 조심해야 하는 형편이다. 이후 시당국은 약 100개의 주요 교회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모니터하면서 미성년자들을 상대로 하는 프로그램이 진행되는지 감시하는 조직을 가동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중국 헌법
위반이다. 헌법 36조에는 모든 중국인민들은 신앙의 자유를
갖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
종교사무규정 어디에도 미성년자의 종교활동을 금지하는 조항은 없다. 자신의 이름을 장(Zhang)이라고만 밝힌 웬조우시의 한 교회
관계자는 “이같이 미성년자의
종교활동 금지규정이 어디에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관행적으로 미성년자의 종교 활동을 금한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표방해 왔다. 그러나 각 교회들은 암묵적으로 주일학교나
여름성경학교 등을 운영해 왔다.
그리고 당국도 이를 묵인해 왔다.
그러나 갑자기 철저한 단속에 나서 교회들이 당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짐은 지난 여름부터
있었다. 헤난성의 관영 조직인
삼자애국위원회와 헤난성중화교회위원회 산하 삼자교회의 여름성경학교를 고온으로 인해 건강에 문제가 있다며 금지해 버린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매년 열리던 여름성경학교가
올해만 날씨가 덥다고 금지된 것은 교회 입장에서 볼 때는 당황스러운 일이다. 중국 교회의 한 관계자는 장쩌민이나
후진타오의 집권기에는 비교적 교회의 활동이 자유로웠으나 시진핑이 집권하면서부터 정부가 교회를 손아귀에 쥐고 조종하면서 국민 전체의 이데올로기를
통제하려고 하고 있다고 우려 했다.
그런가 하면 헤난성 난양지역
종교 사무국은 지역 내의 2만 개의
가정교회 교인들에게 가정교회에서 탈퇴하여 삼자교회로 옮길 것을 강력하게 종용하고 있다. 또 삼자교회에 대해서도 통상적인 예배
이외의 모든 활동을 당국에 사전 보고 하도록 명령하는 등 삼자교회에 대한 단속과 검열도 강화하고 있다. 이런 일은 후베이성에서도 있었다. 올해 1월에는 후베이성 에조우시에서는 한 가정교회가
옥외에서 행사를 열려 하자 공안이 들이닥쳐 행사에 사용할 의자와 책상들을 모두 집어갔고, 8월 22일에는 공안과 교인들 사이의 충돌로 교인
6명이 폭행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당시 공안과 함께
정체불명의 괴한들도 출현해 교인들에게 화염병을 던지는 등 공포스러운 폭행을 저질렀다.
지앙수성에서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중심교인들에 대한 노골적인 사찰활동도 벌이고 있다. 특히 교회가 외국의 기독교조직과 교신하며
협력하고 있지 않는지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다.
또 교회의 미래의 청사진이나 발전계획, 내년의 년중 행사계획이나 사업계획 등을
입수해 살피면서 외국교회와의 연계단서를 찾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이란지진과
선교단체의 구호활동
11월 11일과 12일, 이라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란
국경지대에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구조대원과 이란인 생존자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필사적인 수색과 구조작업을 펼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아마도 정식 집계가 끝나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망자가 통계로 잡히게 될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이란긴급의료국은 13일에 생존자의 추가 구조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공식적인 수색 종료를 선언했다.
이란의 한 지진학자들은 이번
지진이 이란 서부 지역에서 발생한 지진으로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규모라고 밝혔다. 실제로 지진계에 기록된 바로는 진도
7.3의 지진이 일어났고, 사망자의 규모는 아마도 500명을 넘기게 될 것이 분명하며 부상자는
8천 명 이상일 것으로 관영
매체들은 예측하고 있다. 또 수 십
만 명의 주민들이 추가 여진의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혹은 이미 무너져 버려 들어갈 집이 없어서
거리에서 날을 지새고 있는 중이다.
겉으로 보면 멀쩡해 보이는
건물도 지진의 충격으로 매우 약해져 있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가거나 수색하기는 조심스럽다. 또 건물의 잔해로 인해 도로가 차단되어
마을로 구조대가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다.
때문에 생존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한 노력도 필사적으로 진행 되고 있다. 이란 정부는 한편으로는 13일의 생존자 수색 종료 선언과 함께
사흘간의 공식 애도기간을 선포하는 한편으로는 생존자 구조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지질학적으로 이란은 아라비아판과
유라시아판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이란에서 이런 류의 자연재해는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진의 특성상 예측이
불가능하고, 충분히 피해를
예방하기도 어렵다. 2003년에도
남동부 밤이라는 도시에서 진도 6.6의 강진이 발생해 무려 2만 6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란은 과거에도
이런 끔찍한 재난을 주기적으로 겪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구조와 구호에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이재민들은 대충 짐작은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평소 이란의 복음화를
위해 꾸준한 노력을 해 온 단체들은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구호에 동참하려고 하고 있다. Heart4Iran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 단체의 콜센터
책임자이자 대변인 격인 나자닌 바게스타니는 현지의 협력 단체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긴급한 구조에 참여할 구조팀을 편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단체들은 이미 여러 차례
자연재해에 대응하여 활동을 벌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면 절대로 허둥거리지 않는다. 그들은 우선 순위도 이미 정해두고
있다. 나자닌 바게스타니는
“가장 급한 것은 임시 숙소를
공급하고 밤에 춥지 않도록 숙소의 온도를 유지해 주는 일이다. 그리고 생필품을 공급해야 한다. 이미 우리는 이런 상황을 맞은 사람들에게
어떤 생필품이 필요한지 그 목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병원과의 거리가 멀고 병원으로 수송할 수송로도 지진으로 막혀 있기 때문에 응급처치를 통해 시간을 벌어 줄 의료진을 현지에
파견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정신적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한 상담사가 꼭 필요하고 이러한 상담은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예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공포와 상실감이 큰 사람들은 복음에 마음이
열려 있기 마련이다.
Heart4Iran도 현지에 상담자와 콜센터를 파견하고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짐바브웨,
무가베 치하에서 경제는 어떻게 망가졌나?
37년
간의 독재 정치 끝에 군부에 의해 사실상 퇴진하게 된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93)은 집권 기간 동안 경제를 파탄에
빠뜨린 지도자로도 유명하다.
16일(현지시간) CNN에 따르면 1960~70년대 백인 정권에 대항한 무장
투쟁에 참여했던 무가베 대통령은 짐바브웨가 198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초대 총리로
취임했다.
짐바브웨는
1980년대 중반까지 아프리카에서
부국으로 통했다. 특히 일년 내내
농사를 지을 수 있어 담배 생산지로 유명했다.
무가베 집권 초기에는 경제가 순항하는 듯 했다. 제조업과 농업 분야의 수출이 꾸준히 늘었고
교육과 보건 관련 정책도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1983년 자신과 정적 관계가 있던 조슈아
은코모 전 부통령을 측출하고 짐바브웨 2대 부족 은데벨레족의 거주지 마타벨레랜드
지역에서 약 2만 명을 학살하는 등
잔혹한 독재자의 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90년 들어 단행한 토지개혁이 경제 붕괴의 출발점이
됐다. 짐바브웨가 1992년 도입한 토지취득법은 정부가 지주들의
토지 소유권을 회수해 이를 재분배할 수 있도록 했다. 무가베 대통령은 토지개혁에 반발하던 백인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해외로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2000년대 들어 무가베 정권의
토지개혁으로 약 4000명의 백인
농부들이 땅을 포기하고 짐바브웨를 떠났다.
흑인들이 토지를 차지했지만 농업 경영이 미숙해 농업
생산량은 급격히 떨어졌다.미숙한
수확 기법과 건조한 기후가 맞물리면서 짐바브웨는 60년 만에 최악의 기근을 맞았다. 생활 필수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운데
중앙은행은 수입품을 조달하기 위해 돈을 찍어냈다. 무분별한 발권력 동원은 급격한 물가 상승을
불러왔다. 2008년 초인플레이션 현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물가가 하루에
두배씩 뛰기도 했다. 경제학자들은
이 해 짐바브웨의 월간 물가상승률이 79억%에 달한 것으로 추정했다. 실업이 급증하고 공공 서비스가 붕괴되면서
경제는 18%나 후퇴했다.
결국 짐바브웨는 2009년 자국 통화를 포기하고 달러화와
남아프리카공화국 랜드화 등 7개
통화로 대체했다. 무가베 대통령은
2010년 국제사회가 자국의 언론
및 인권 침해를 이유로 경제 제재를 가하자 자국 내 서방 자산을 모두 몰수하겠다는 위협으로 맞서기도 했다. 2010년대 들어 짐바브웨는 다이아몬드 채굴 등 광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무가베 정권의 광산
국유화는 사실상 권력자들의 돈줄을 마련하기 위한 계획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또 제조업은 사실상 붕괴
상태에 빠져 주로 달러에 의존하는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2016년에는 극심한 가뭄과 만성적인 현금 부족이 겹쳐 은행 예금
인출 사태가 여러 차례 발생했다.
하지만 경제 파탄 속에서도 대통령과 그의 가족들은 호화스러운 생활을 유지해 많은 비판을 받았고, 군부에 의해 측출되는 계기가 됐다. 무가베 대통령은 올해 2월 약 200만 달러를 들여 자신의 93세 생일 파티를 열었다. 그가 대통령직을 물려주려 했던 부인
그레이스 무가베는 짐바브웨 내에서 '구찌 그레이스'로 통한다. 수많은 보석과 초호화 저택, 고급 차량 등을 보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치와 허영의 상징이 됐다. - 뉴시스
인도의 여성차별과 여아
낙태(4)
구자라트주 등 성비가 극단적인 불균형을 이루는 나라에서는 아내대여업이라는 황당한 비즈니스 모델이 존재한다. 성비 불균형으로 돈은 있으나 결혼을 못하는
여자와 찢어지게 가난한 가족 사이의 이해관계에 따라 발생한 황당한 비즈니스 모델이다. 가난한 집의 아내를 결혼 못한 남자에게
빌려주고 매월 8천 루피(한화 18 만원) 정도를 받는 것이다. 이런 아내 대여를 알선해주는 브로커는 매월
20만 루피의 고소득을 올리는 인기
직종이라고 한다.
인도의 여성 차별과 지참금
문제, 그리고 이로 인한 여아 낙태
및 영아 살해 문제까지 살펴 봤다면 그 해결책을 찾아볼 차례다.
첫째로, 법이 법대로만 지켜져도 상당히 해결될 수
있다. 인도는 법률적으로는
신분차별, 성차별, 결혼지참금, 낙태가 모두 불법이다. 그러나 실제 민간인들의 실생활 속에서는 이
뿌리가 깊다. 게다가 낙태까지는
그렇다하더라도 이미 태어난 영아를 살해하는 것은 살인의 죄이다. 그러나 제대로 단속도 처벌도 되지
않는다. 법이 법대로 지켜지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뿌리
깊은 문화와 전통에 대한 집착,
낮은 교육수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 공권력의 엄정한 집행을 위한 충분한
치안조직이 갖춰 지지 않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둘째로, 여성인권을 포함한 인권의식의 계몽과 함께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부족하나마 우리나라의
경우를 살펴 보면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
신생아 비율이 남성 116에 여성
100으로 심각한
남초국가였다. 우리나라도 쉬쉬하지만
낙태가 상당히 심각한 수준으로 자행되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수치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비율이
105 : 100으로
개선되었다. 여전히 남초국가이기는
하다. 여전히 여아 낙태수술이
어딘가에서 시술되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많이 개선된 것도 사실이다.
그것이 그냥 얻어진 결과는 아니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남성중심의 사회이고, 갈길이 아직 한참 멀었지만, 그래도 20-30년 전과 비교해보면 여성들의 사회
고위직 진출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여러 기업들의 신입사원 중 여성의 비율, 사법고시 등 주요 고시에서의 여성 합격자
비율, 정치권에서의 여성 의원의
비율, 여성 장관의 비율, 아직은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기업 임원
중 여성의 비율, 심지어 군 장교
가운데 여성의 비율도 확실히 늘어 났다.
참담한 실패도 있었지만 여성 대통령도 있었다.
인도도 여성의 사회 진출에
대한 확실하고 가시적인 조치가 있어야만 여아 낙태를 막을 수 있음을 시사해 주는 현상을 우리나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