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아리스토불루스2세와 히르카누스2세가 분쟁하고 있는 동안 이두메의 통치자인 안티파터(안티파스)는 히르카누스와의 우정과 아리스토불루스에 두려움 때문에 아리스토불루스와 대립했다. 안티파터는 히르카누의 배후에서 실력자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과 반목관계에 있어 온 에돔인이었던 안티파터에 대한 유대인들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주전40년 페르샤 동쪽 영토를 차지하고 로마에 정복당하지 않았던 파르티아인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3년간 지배했다. 파르티아인들은 이 사이에 아리스토불루스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를 유대의 왕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로마는 파르티아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축출했다.
로마의 안토니우스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댓가로 형식상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해준 안티파터의 아들 헤롯을 실제로 유대인의 왕으로 세웠다(주전37-주후4). 경쟁적인 유대인의 왕이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했던 헤롯은 예수께서 탄생했을 때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헤롯은 파르티아인들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한 이후에 즉시 바벨론 출신의 하나니엘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으며, 하스몬가의 마리암네와 결혼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마리암네의 어머니는 히르카누스2세의 손자인 아리스토불루스를 대제사장으로 세우기로 결심하고 계략을 짰다.
마리암네의 어머니는 애굽의 클레오파트라에게 연락하여 클레오파트라와 동맹을 맺고 있었던 안토니에게 연락하여 헤롯을 압박하여 하나니엘을 해임시키고 아리스토불루스를 대제사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대제사장 아리스토불루스는 헤롯의 계략에 의하여 연못에 빠져 익사하고 말았다.
마리암네의 어머니는 다시 클레오파트라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안토니는 헤롯을 소환했다. 헤롯은 숙부뻘 되는 요셉에게 국정을 맡기고 떠나면서 만일 자신이 안토니에게 사형선고를 받으면 즉시 마리암네를 죽이고 왕권을 지킬 것을 은밀히 부탁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암네에게 헤롯의 부탁을 일러 바쳤고 마리암네의 어머니는 헤롯이 죽으면 왕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헤롯은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안토니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얻어 가지고 살아서 귀국했다. 헤롯은 마리암네 살해계획이 폭로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요셉과 마리암네 사이에 부정한 관계가 있었다고 결론내리고는 요셉을 죽여 버렸다.
주전32년 안토니와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안토니가 패배하고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통치자로 등장하자 헤롯에게는 다시 위기가 찾아 왔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헤롯이 안토니우스에게 보여준 우정과 충성을 듣고 같은 충성을 자기에게도 쏟아 줄 것을 확약받고 헤롯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헤롯의 왕권은 더욱 공고해졌다.
헤롯은 정치에서는 성공했지만 가정문제가 다시 괴롭혔다. 헤롯은 옥타비아누스를 만나기 위하여 로즈(Rhodes)로 가면서 시종 소헤무스에게 국정위탁을 하면서 역시 자신이 옥타비아누스에게 사형선고를 받으면 마리암네를 죽이라는 지시를 내리고 떠났다. 그런데 이 지시가 다시 마리암네의 귀에 들어갔다. 헤롯이 다시 살아서 돌아왔을 때 이 지시가 폭로된 것을 알아차린 헤롯은 소헤무스를 처형하고, 마리암네와 그녀의 어머니를 한꺼번에 처형해 버렸다.
유대인들에게는 헤롯에 대한 적대감정이 강했다. 헤롯은 유대인들의 세금을 1/3 감면해 줌으로써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지만 적대감을 줄일 수 없었다. 헤롯은 건축분야에서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사마리아를 아구스도에게 바치는 세바스테로 바꾸었고, 사마리아는 방파제와 10개의 망대를 갖춘 세바츠테로 개조했으며, 욥바의 북동쪽에는 안디바드리, 북쪽 요단 계속에는 파사엘리스, 아그리페이온, 헤로데이온, 알렉산드레이온, 히르카니아, 마카에루스, 마사다 요새 등을 건축했다.
특히 통치18년째 되는 해(주전20-19)에 성전재건사업을 시작하여 성전 본 건물을 일년 반 만에 완성하여 매일 끊임없이 제사를 드렸으며, 성전 뜰은 완성하는데 8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성전은 전체구조가 계단 모양으로 되어 있었고, 낮은 뜰과 높은 뜰이 있었다.
바깥뜰은 이방인들과 불결한 자들, 여인의 뜰과 이스라엘인의 뜰은 성전의 경내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여인들과 남자들을 위하여 제공되었다. 성전주변건물건축작업은 예수님의 사역 기간 중에도 계속되었다. 이 작업은 알비누스 총독 때에 완성되었으나(주후62-64), 불과 몇 년이 못되어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하여 파괴되고 말았다.
헤롯의 말년은 음모와 모반으로 점철되었다. 헤롯의 장자인 안티파터는 왕위의 경쟁자인 다른 아들들인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루스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반역의 조작된 증거서류를 근거로 교살시켰다. 그러나 안티파터 자신도 헤롯을 독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쳐 사형선고를 받았다.
헤롯이 병들어 죽음이 임박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자 바리새인들은 헤롯이 세워 놓은 성전 대문 위의 황금독수리를 부숴뜨렸다. 그러자 헤롯은 이 유대 지도자들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이 유대 지도자들 중에는 유다와 마티아스라는 인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전4년4월1일에 헤롯은 장암과 수종 때문에 죽었다. 헤롯은 심술은 아기예수에게까지 미쳐서 아기 예수가 왕으로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베들레헴과 그 지경에 있는 아이들을 두 살 밑으로 다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11. 근동의 생활과 문화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헬레니즘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두가지로 나타났다. 한편은 헬레니즘에 매력을 느끼고 헬레니즘과 히브리사상을 종합하고자 시도한 반면, 다른 무리들은 헬레니즘을 율법의 규정과 반대되는 생활 방식을 전하는 사상으로 보고 배척하는 하시딤(경건한 자들)운동을 시작했다. 이런 반응을 중심으로 유대인들 사이에 몇 개의 종파들이 형성되었다.
a. 바리새파. 바리새파는 요한 히르카누스의 통치시절(주전134-104)에 처음으로 이름이 언급된다. 바리새라는 말은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구별되었다는 말은 헬레니즘과의 영향으로부터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이들은 의식과 청결에 관한 율법을 세심하게 준수했다. 의식이 불결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죄인”으로부터는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어느 것 하나도 사지 않았다. 바리새인은 자기 집에서는 죄인을 대접할 수 있었어도 죄인의 집에서 먹어서는 안되었다.
사두개인들이 하스몬 왕조가 지배하는 동안 성전 제사의 주도권을 잡은 반면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회당을 예배와 교육의 중심지로 삼았다.
주전 1세기 동안 두명의 바리새파 교사가 등장하여 두 학파를 구성했다. 하나는 힐렐이다. 힐렐은 온건한 율법해석을 지향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대했고, 로마의 관례를 유대교와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인정. 다른 하나는 샴마이다. 샴마이는 엄격한 율법해석가였고, 로마인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다. 샴마이학파의 입장은 젤롯당으로 표현되었다. 탈무드 안에는 두 학파 사이의 논쟁에 관한 기록이 316가지나 등장한다.
사두개인들은 토라만을 권위있는 경전으로 받아 들였고, 중세시대의 종파인 카라이트(Karaite)파도 성경 그 자체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전통을 율법에 대한 주석으로 뿐만 아니라 성경 자체의 수준으로 높였다. 심지어는 구전율법은 기록된 율법인 토라와 함께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까지 주장했다.
생활과는 거리가 먼 헌법 (기록된 토라) 보다는 보통 사람의 생활에 보다 밀접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전법이 더 엄격하게 준수되어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는 큰 희생을 치르면서라도 자기자신을 불결함으로부터 구분하였던 사람들의 경건에 대한 열심이 율법의 가르침을 준수한다는 종교적인 교만으로 변질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야생식물의 십일조까지 바칠 정도로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려고 애썼지만(마23:2;눅11:42), 동시에 빈궁한 자들을 압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마23:14).
b. 사두개파. 사두개파는 예루살렘 귀족들과 대제사장들로 구성된 종파로서, 정치권력자들과 교분을 맺어 부요하고 영향력있는 지위를 획득했다. 성전의 관리와 제사가 이들에게 주어진 고유한 책임이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대중들로부터는 인기를 얻지 못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의 구전법을 인정하지 않았고, 토라만을 받아 들였다. 부활이나 여이나 천사의 존재도 믿지 않았다(막12:18; 눅20:27; 행23:8). 바리새인들이 개종자들을 환영하고 찾아 다닌 반면에(마23:15), 사두개파는 폐쇄적이었다. 대제사장과 예루살렘 귀족일가 외에는 아무도 사두개인이 될 수 없었다. 주후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당하자 사두개파는 종언을 고했다.
c. 엣세네파. 엣세네파는 바리새파와 같이 핫시딤의 신앙고백을 계승했으나 바리새파가 유대교의 구조 안에서 엄격한 정통을 유지하고자 했다면 엣세네파는 유대교의 구조를 거부하고 따로 분리되어 독립된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했다. 이들은 주로 쿰란이라고 불리우는 지역에서 엄격하고 간소한 수도생활을 했다.
이들은 성경과 기타 종교서적들을 연구하고 복사했으며, 자급하기 위하여 근육노동을 했다. 재산은 공유되었고 감독자 아래에서 엄격한 훈련을 실시했다. 숫자는 4천명 정도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엣세네파는 불멸은 믿었지만 육체부활교리는 믿지 않았다. 이같은 입장은 엣세네파에 물질은 악하다는 헬레니즘사조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육체는 물질이고 물질은 악한 것이므로 구원은 육체를 벗어나는 것이어야 하며 따라서 육체부활은 바람직한 것이 못되었다. 엣세네파는 결혼을 단념시키거나 금지했지만 바리새파는 남작 18세가 되면 모두 아내를 취하도록 했다.
바리새파는 비정통인 사두개인들의 지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성전예배에 참석한 반면에, 엣세네파는 자신들만이 유일하게 참되고 순수한 이스라엘이라고 여기고 부패한 성전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 엣세네파는 바리새파보다 율법을 더 엄격하게 준수했다. 예를 들어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 짐승을 끌어 올리는 일을 허용했으나, 엣세네파는 이 조치조차도 반대했다.
엣세네파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반대되는 것이었다. 엣세나파는 자신들보다 낮은 계급의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불결하게 한다고 하여 반대했지만 예수는 주저하지 않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마11:19;눅7:34).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에 순종하셨지만 율법은 짐이 아니라 인간을 축복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임을 분명히 했다.
곧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었다(마12:1-12; 막2:23-26; 눅6:6-11, 14:1-6). 물질은 악하다는 엣세네파의 사상과는 달리 예수는 악한 것은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성전 안의 악폐를 비난하면서 그 때문에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지만, 성전 예배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d. 사독파. 사독파는 1910년 솔로몬 쉐히터(Solomon Schechter)가 Fragments of a Zadokite Work 라는 연구서를 발표하면서 주목받게 되었다. 주전2세기초 영적인 기질을 가진 한 무리의 제사장들이 세속을 떠나 “사독의 아들들”이라는 새로운 종파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사독이라는 이름을 취한 이유는 이들이 대제사장의 적통을 잇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다메섹으로 도망한 이유는 안티오쿠스 에파파네스 당시에 오니아스3세의 대제사장직을 해임한 사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다메섹으로 이주하여 “별” 또는 “의의 교사”라고 알려진 어떤 인물의 지도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 젤롯당(열심당). 로마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유대인들이 에스키아스의 유다스의 지휘아래 모여서 하나의 집단을 형성했다. 이들은 로마에 세금내는 것을 거부했고, 가이사에 대한 충성을 인정하는 것을 죄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젤롯당은 많은 백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무장독립투쟁을 벌이다가 주후70년 예루살렘 멸망에 이어서 벌어진 마사다 전투에서 자결하는 것으로 종언을 고했다.
12. 헬레니즘 시대의 마지막 2세기와 기독교시대의 최초1세기동안 묵시라고 불리우는 문학 양식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발전했다. 묵시(apocalypse)라는 말은 드러남이라는 뜻이다.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운 계시를 드러낸 문헌이라는 뜻이다. 묵시문학의 형식들은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 요엘, 스가랴, 요한계시록과 같은 문헌들에도 나타나 있으며, 에녹과 바룩, 12족장계약서, 에스라4서 등과 같은 위경(僞經, 가명으로 발간된 문헌들)에서도 발견된다.
묵시문학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가혹학 박해가 진행되는 동안 위로를 주는 멧세지를 담고 있다. 이 시대의 사상가들은 악인들에 대한 비판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멧세지를 오래된 권위를 가진 이름을 빌려서(에녹처럼) 비유적인 표현을 이용하여, 그리고 신비스러운 분위기 안에 감싸서 표현하였다. 국가는 바다에서 나온 용으로, 사람은 동물들로, 유대인은 양이나 가축으로, 유대인 지도자는 어린 양 또는 황소 등으로 표현했다.
묵시문학은 하늘의 비밀들을 환상이나 꿈을 통하여 계시하는 형식을 가진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하나님 자신으로 직접 계시를 받았다면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천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계시를 받은 것으로 주장한다. 선지자들은 현재에 관하여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미래에 관하여 많은 말을 하고 있고, 임박한 종말론을 제시했다.
묵시문학에서 오는 메시아개념이 주제로 살아났다. 묵시문학이 그린 완전한 왕자는 다윗가문에서 나와서 로마인들을 타도할 출중한 정치지도자를 의미했다. 이 왕자는 “기름부음 받은 자,” “의인,” “인자” 등으로 호명되었는데, 마지막 명칭은 다니엘서7장13절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하다.
묵시문학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묘사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이 나라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나라로 묘사되기도 하고 모든 나라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배하는 자들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의 풍요로움을 묘사하는데 대담한 묘사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땅이 너무나 비옥해서 포도나무 하나가 만개의 줄기를, 한 개의 줄기가 만개의 가지를, 한 개의 가지가 만개의 작은 가지를, 작은 가지 하나에 만개의 포도송이가, 포도송이 하나에 만개의 포도알이, 포도알 하나가 225갤론의 포도주를 생산해내는 곳으로 묘사된다.
묵시문학에는 페르샤의 천사론과 빛과 어두움의 이원론의 영향이 나타나 있으며, 헬레니즘과 애굽사상도 들어가 있다. 터무니없는 상징주의, 과장된 국수주의, 숫치계산 등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성취된다는 신념과 이 목적들을 실현할 다윗의 자손의 강림에 대한 확신이 깔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