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길 - 서울 서촌마을(2)
(2023년 10월 21일)
瓦也 정유순
다음으로 찾은 곳은 경복궁 영추문이 마주 보이는 통의동 보안여관이다. 보안여관은 대표적인 친일매국시인이며 어용시인 미당 서정주가 김광균, 오장환 등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한 역사적 공간이다. 이곳은 1942년부터 2005년까지 실제 여관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크게 손보지 않고 골격과 벽지 등을 그대로 둔 채 영업했고, 건물의 훼손을 막기 위해 일체의 냉·난방시설을 하지 않았다. 현재는 전시 공간 등으로 사용한다.
<보안여관 건물>
서정주(未堂 徐廷柱, 1915∼2000)는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미당(未堂)이다. 전라북도 고창(高敞)에서 태어났다. 고향의 서당에서 공부한 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6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으로 등단하여 같은 해 김광균(金光均)·김달진(金達鎭)·김동인(金東仁)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하고 주간을 지냈다.
<서정주>
1942년 7월 매일신보에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이름으로 평론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 시가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친일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1944년까지 친일 문학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에 관여하면서 1943년에는 수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 <인보(隣保)의 정신>, <스무 살 된 벗에게>와 일본어로 쓴 시 <항공일에>, 단편소설 <최제부의 군속 지망>, 시 <헌시(獻詩)> 등을 썼고, 1944년에는 <오장 마쓰이 송가> 따위의 친일 작품들을 발표했다.
<보안여관>
1944년 12월 9일 매일신보에 실린 <마쓰이 오장 송가>라는 시에 언급되는 레이테만(萬)해전은 가미카제가 처음으로 등장한 전투다. 가미카제(カミカゼ)는 신풍(神風, 신푸)이라고도 하며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군이 연합군함대에 시도한 비행기 자폭테러 특공대이다. 폭탄 등을 실은 항공기로 적 군함에 충돌하여 유폭효과를 노려 타격하는 전술이다. 이는 국가가 군인에게 자살을 명하는 것으로 개인의 인명을 극단적으로 경시하는 전쟁범죄다.
<마쓰이 오장 송가>
서정주는 해방 후 반민특위에 끌려가서 “적어도 일제 치하에서 몇 백 년은 더 있을 줄 알았다. 해방이 이토록 빨리 올 줄은 몰랐다”고 고백했다. 이승만으로부터 친일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받고 <이승만 박사 전기>를 집필했으며,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유신체제를 지지했다. 특히 전두환 생일 때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를 썼으며, 1987년 4·13호헌조치를 ‘구국의 결단으로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단군 이래 최고의 미소를 가진 대통령이라고 찬양했다.
<전두환 생일 송가>
서정주는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현대 문학계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거목으로 평가받지만, 친일·친독재행위와 반인륜범죄에 대한 미화 등 기회주의 어용문인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다. 1985년 서정주의 제자이기도 했던 소설가 조정래는 “사과 한 마디에 자유로워질 수 있다”며 설득하였으나 오히려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끝내 억지 변명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행적에도 고창군에서는 국화축제가 열리고, 관악구는 남현동에 살았다는 이유로 관악산공원에 시비를 세웠다. 또 미당문학상은 무슨 짓인가?
<고창 국화축제와 미당문화재 폐지하라>
보안여관에서 청와대 쪽으로 약430여m쯤 가면 종로구 효자동 175-1에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 1892∼1950)가 해방 전후의 시기에 살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해방을 맞이했으며, 1949년 2월 7일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 또 전쟁발발 직후인 1950년7월 12일 그를 북으로 데려가기 위해 북의 혁명시인 리찬이 찾아 온 곳이기도 하다. 춘원은 당시 홍명희, 최남선과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라고 불렀다.
<춘원 이광수가 살던 집터 부근>
이광수는 소설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17년 신한청년당에 가입해 활동자금 마련을 위해 최초의 장편소설 <무정>을 발표하고, 1919년에는 일본 유학생시절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등 한때 민족계몽가로 활동하는 척 했다. 이광수는 변절한 것이 아니라 원래 친일파였던 것 같다. 3·1운동이 일제의 폭압으로 좌절되자 조선의 천재라는 그 역시 일본제국주의 권력 앞으로 방향을 틀고 만다.
<춘원 이광수와 소설 무정>
유부남인 이광수는 상해로 찾아온 허영숙과 애정도피 여행을 떠나고 안창호의 만류에도 1921년 그녀와 함께 귀국하여 5월 다시 결혼했다. 당시 이광수는 여러 글에서 귀국하면 자신이 징역을 살 것처럼 썼으나 허영숙과 함께 온 그는 간단한 조사만 받았다. 9월에는 사이토 총독과 면담을 하는 등 화려하고 세속적인 출세가도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결국 1922년 자신의 변절을 상징하는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조선청년들을 분노케 하였다.
<춘원 이광수가 살던 집터>
그는 <민족개조론>에서 3·1만세운동의 과격성을 비판하고, 조선은 열악한 민족성으로 ‘쇠퇴 또 쇠퇴’라고 하면서 그 구제의 길은 오직 민족개조운동에 있다고 강조한다. 동아일보에 1924년 1월 2일자부터 5일에 걸쳐 실린 <민족적 경륜>이라는 연속 사설 2편에서 “우리는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무장투쟁을 펼치던 독립운동 노선을 비현실적이라 비판한다.
<민족개조론>
이러한 정황으로 인하여 소설가 박종화는 ‘이광수의 변절은 총독부의 밀정으로 파견된 허영숙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광수는 1905년 을사조약 직후 일본 유학시절부터 이미 마음속으로 친일 경향을 보여 왔다. 일본 군국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으며, 조선침략의 선동가로 알려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에 대하여 이광수는 그야말로 “하늘이 일본을 축복해 내린 위인”이라며, 자신 또한 ‘조선의 후쿠자와’를 꿈꿨다고 말했다.
<동아일보에 실린 '민족적 경륜'>
이미 그에게 일본은 ‘연민의 대상’이며 ‘조선의 희망’이었을 뿐이다. 그런 마음을 가졌기에 “조선 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이광수가 아니라 천황의 신민인 고야마 미타로(香山光郞)일 뿐이었다. 1942년 이광수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칭송하며 순수 일본인 뺨치는 광신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재일본조선유학생들의 성토문>
이러했던 이광수에게 해방은 지옥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해방이 되자 친일청산의 폭풍을 피해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에서 약1년 간 은둔하였고, 1946년 5월 전처를 버리고 온갖 비난과 의심 속에서 재혼한 허영숙과 이혼을 한다. 이에 대하여 1946년 6월 13일자 <서울신문>은 “장차 이광수가 전범으로 걸려들 때를 걱정하여, 자식과 재산의 보호를 위해서 취하는 잇속 빠른 길이 아닌가 보고 있다”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1942년 진주만습격 찬양 글>
어쨌든 그는 미군정 속에서 발 빠르게 정세를 파악했다. 아직 좌우대립의 혼돈의 상태에 있던 1947년 그는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를 통해 <도산 안창호>를 집필하였으며, 백범 김구(金九)를 찾아가 그가 기록해 둔 항일일기를 자신이 편집하게 해달라고 하여 <백범일지(白凡逸志)>는 이광수의 윤문이라는 꽃단장을 통해 재탄생 한다. 이런 행동이 자신에게 방패막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김구의 백범일지를 윤문으로 각색하는 이광수 - 네이버캡쳐>
이런 이광수의 행동에 대하여 심산 김창숙은 노발대발하였다. 친일파의 더러운 손으로 중요한 광복사료들을 더럽혔다는 것이다. 어쨌든 백범이 한자로 쓴 항일투쟁의 일기는 이광수의 손을 거쳐 원문의 대대적인 첨삭과 한글로 포장하여 ‘나의 소원’이란 명문으로 우리 앞에 <백범일지>로 재탄생했다. 그러나 1949년 2월 7일 반민특위에 의해 문학예술인 제1호로 체포되었지만, 이승만 정권에 의해서 불과 한 달도 못 돼 석방된다.
<백범일지 원본 - 네이버캡쳐>
이광수는 1948년 12월 <나의 고백>에서 “나는 민족을 위하여 살고, 민족을 위하다가 죽은 이광수가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다”라고 자신의 친일행위를 정당화하여 청산 자체를 거부하는 논리로 친일청산을 반대하는 주요이론을 제공한다. 해방 후 이광수가 효자동에 살 때 보여줬던 그의 모습은 마치 우리 현대사의 축소판 같다. 해방-친일청산-좌우대립-단독정권-전쟁-분단 이 모든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참으로 슬픈 역사를 지닌 곳이다.
<춘원 이광수의 '나의 고백'>
https://blog.naver.com/waya555/223247733530
첫댓글 팩트에 근거한 와야님 글 읽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