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이 다른 어떤 소설보다 독특한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추리소설에는 다른 소설이 흉내 낼 수 없는 공식이 있다. 로널드 녹스나 리처드 헐, S. S. 밴 다인 같은 대가들이 만들어 놓은 추리소설의 공식을 안다면 작가는 물론 독자들도 몇 배나 즐겁게 소설을 읽을 수 있다. 우선 고전적인 공식을 살펴보자.
두뇌 플레이가 기본
추리소설 작가라면 한두 번은 “당신 참 머리 좋은 사람이야. 어떻게 그렇게 교묘한 범죄를 해결할 수 있지?” 하는 질문을 받았을 것이다. 사실 추리소설은 독자를 감탄시킬 수 없으면 쓰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어려운 소설을 쓰는 데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드는 공식이 있다. 추리소설은 인류가 만들어 낸 스토리텔링 중 가장 재미있는 방법이란 말도 있는데, 이는 이 공식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저명한 추리 작가들이 경험에서 우러난 추리소설 작법, 또는 공식을 발표했다. 이들 공식 중 일부는 중견 작가들이 거부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작가에게는 금과옥조가 될 수 있다. 공식을 모르는 작가는 불행하다.
S. S. 밴 다인의 20원칙
S. S. 밴 다인(S. S. Van Dine, 1888∼1939)은 1928년 ≪아메리칸 매거진(The American Magazine)≫에 ‘추리소설 작법 20원칙’을 발표했다. 당시로서는 충격을 던진 획기적인 주장이었지만, 지금은 이 중 3항, 16항, 19항 등이 수정 또는 완화되었다.
탐정소설이 일종의 지적인 게임인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스포츠 경기 종목의 하나로 비유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추리소설을 쓰는 데 극히 명확한 규칙을 따르게 되어 있다. 이들 규칙이 통일되거나 명문화해 있지는 않지만 강력한 구속력을 가지는 것은 틀림없다. 탁월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추리 작가라면 모름지기 이 규칙만큼은 어기지 않는다. 이것은 작가의 신조이기도 하다.
1. 범인을 찾는 게임에서 독자에게도 작중의 탐정과 똑같이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모든 단서는 탐정과 독자가 함께 알 수 있어야 한다.
2. 소설 속 범인이 탐정에 대해서 적당히 속임수를 행하거나, 술책을 부리는 것 외에 독자를 속이는 기술(記述)을 해서는 안 된다.
3. 이야기 중 연애의 흥미를 곁들여서는 안 된다. 요컨대 범인을 재판정에 세우려는 것이지 사랑에 고민하는 남녀를 예식장에 보내려는 것은 아니다.
4. 탐정 자신, 또는 수사 당국 직원 중 한 사람이 범인이라는 결말을 지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구리로 만든 돈을 금화라고 속이는 것과 같다. 명백한 사기 행위다. (그러나 탐정이나 수사 요원이 아닌 일반인이 적극적으로 수사에 관여하거나 협조했는데 알고 보니 범인이었다는 것은 상관없다. 범인이 혐의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기 위해서나 수사 과정을 방해하기 위해서 이런 수를 쓰는 경우가 있다. 이 규칙은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 1890∼1976)가 두 번이나 위반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이 대표적이다.-필자 주)
5. 범인은 이론적 추리를 통해서 판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연, 암호, 동기 없는 자백 등에 의한 결정은 안 된다. 이런 행위는 독자에게 고생스럽게 범인을 찾도록 해놓고 잘 안 되니까 실은 내 손 안에 모든 단서가 있다고 놀리는 것과 같은 비겁한 행위다.
6. 반드시 탐정이 등장해야 한다. 탐정은 모든 단서를 수집·분석하며 그 결과로 범인을 체포해야 한다. 이런 과정이 완벽하지 않으면 문제집의 해답편을 먼저 보는 것과 같은 일이 된다.
7. 추리소설에는 반드시 시체가 있어야 한다. 살인이 아닌 범죄를 다루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살인보다 가벼운 죄를 가지고 수백 쪽의 책을 읽게 할 수는 없다. 독자의 노고에 보답해야 한다.(2010년 한 보험 살인 사건에 대해 법원 1심에서 시체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대법에서 파기 환송되었다.−필자주)
8. 범죄의 수수께끼는 엄격한 자연법적 법칙으로 풀어야 한다. 범인을 잡기 위해 점을 친다든가 심령술·최면술 등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독자는 이성적 추리력이 있는 탐정과 머리싸움을 해야 승산이 있는 것이지 영계(靈界)와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다.
9. 소설 속 탐정, 즉 추리의 주역은 한 사람이어야 한다. 탐정이 여러 명이면 독자의 흥미가 분산되고 논리 체계가 흐트러진다.
10. 범인은 소설 속에서 어느 정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독자가 관심을 갖게 해야 한다. 전혀 관심 밖 인물이 범인으로 결론 나서는 안 된다.
11. 심부름이나 하는 하인을 범인으로 설정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논점이 약해지고 사건이 쉬워진다. 범인은 좀처럼 혐의를 두기 어려울 만큼 상당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12. 범죄가 몇 번이나 일어나도 범인은 한 사람이어야 한다. 동조자나 공범자가 있는 것은 무방하나 범행의 책임을 지는 자는 한 사람이어서 독자의 의심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도록 해야 한다.
13. 비밀 결사, 마피아 조직 등을 추리소설에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 상당히 절묘한 범행 수법이라고 감탄하고 있는데, 배후에 전문적이고 거대한 조직이 있다고 하면 흥미가 반감된다. 추리소설에서 범인에게는 십중팔구 도주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배후에 그런 조직이 있다면 도망치는 것은 당연하고 쉬운 일일 것이다.
14. 살인 수법과 이에 대응하는 수사 방법은 과학적이어야 한다. 공상적이고 비과학적인 수법은 추리소설의 살인일 수 없다. 이는 모험소설일 뿐이다.
15. 통찰력 있는 독자에게는 사건의 진상이 의심의 여지없는 명백한 것이어야 한다. 사건의 결말을 알고 난 뒤에, 소설을 다시 복기한다면 모든 단서의 제시나 복선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탐정과 같은 지능을 가진 독자라면 결론 부분까지 가지 않더라도 혼자서 범인을 알아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16. 장황한 서술적 묘사, 지엽적인 일에 대해 문학적인 설명, 지나친 성격 분석, 분위기에 도취된 묘사 같은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런 것은 사건 해결을 위해 중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줄거리 진행을 산만하게 하고 독자의 관심을 딴 곳으로 유도하게 한다. 추리소설의 주목적은 사건의 설명, 분석, 추리, 해결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진실성을 묘사하는 데 필요한 정도의 자연 묘사, 성격 묘사로 족하다.
17. 추리소설에서는 직업적 범죄자(살인청부업자)가 범인인 것은 좋지 않다. 강도나 절도에 의한 범죄는 경찰 관할이지, 추리소설가나 재치 있는 아마추어 탐정이 다룰 범죄는 아니다. 교회의 중진이라든가 자선가로 소문난 귀부인이 저지르는 범죄 등이 제격이다.
18. 사고 또는 자살이라고 결말지어서는 안 된다. 애써서 추리를 해 왔는데 알고 보니 사고로 죽은 것이라고 한다면 독자는 허무할 것이다.
19. 살인의 동기는 모두 개인적인 것이어야 한다. 국제적인 음모나 정치적 동기에 의한 살인은 장르상으로 스파이 또는 비밀 요원 행위에 속한다. 추리소설에서는 개인적인 것을 다루어 어떤 형태로든 독자 자신의 억압된 감정과 욕망의 탈출구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
20. 끝으로 내 신조를 20항으로 끝내기 위해 자존심이 없는 작가라면 써먹을지도 모를 수법을 열거하고자 한다. 이런 것들은 너무 많이 써먹은 것이어서 범죄 문학의 애호가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인용해서 쓴다면 작가의 무능을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① 범행 현장에 남아 있는 담뱃갑과 범인이 애용하는 담배의 종류가 일치한다는 것으로 범인을 단정하는 일
② 최면술로 범인을 억압해 자백을 받아 내는 것
③ 지문 위조
④ 대용품을 이용한 알리바이 조작
⑤ 무고한 쌍둥이 또는 근친자를 진범으로 단정하는 일
⑥ 개가 짖지 않았다고 잘 아는 사람의 범행으로 보는 것
⑦ 피하주사와 맹독
⑧ 경찰 개입 후 일어나는 밀실 살인
⑨ 유죄 판정을 위한 언어의 연상 테스트
⑩ 결말에 가서 탐정 혼자만 알고 있는 암호 풀이
- 겁나 중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로널드 녹스의 10계
로널드 녹스(Ronald Knox)는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 집안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대학 재학 시절엔 학생회장을 지냈다. 수석으로 졸업한 녹스는 성공회 주교를 지냈으며 1917년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1919년에 옥스퍼드대학 사제로 취임했다. 저명한 수필가이면서 추리 작가로도 명작과 평론집을 남겼다. 1925년에 발표한 『육교 살인 사건(The Viaduct Murder)』은 완벽한 추리소설로 평가받았다.
녹스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추리소설 작법 10계’다. 그는 미국에서 S. S. 밴 다인이 ‘추리소설 20원칙’을 발표한 다음 해인 1929년에 『영국 추리소설 걸작선(Best Detective Stories of the year)』(1928)을 발간하면서 그 서문에 이 10계를 발표했다. 영국 추리 단편의 연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 프로젝트는 다음 해에 중단되었지만, 이 10계만은 길이 남게 되었다.
범인은 이야기 초기 단계부터 등장해야 한다
범인은 초기 단계부터 등장해야 하지만 속마음의 움직임을 독자가 미리 알고 있어서는 안 된다. 독자가 알지도 못하고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인물이 느닷없이 나타나고 (해외로부터 돌연 귀국한 경우가 많다) 이 사람이 범인이라고 한다면 공정한 게임이라고 할 수 없다. 마음의 움직임이 독자에게 알려져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애거서 크리스티는 이 규칙을 위반하면서 훌륭한 작품을 여러 편 쓰기도 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다. “추리 작가들은 진범에게 이상한 행동을 시켜 독자의 판단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초자연적인 마력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
이런 수법을 쓴다는 것은 몰래 숨겨 둔 모터를 이용해서 보트 레이스에서 이기는 것과 같다.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 1874∼1936)의 브라운 신부에게는 이런 문제점이 있다. 브라운 신부는 걸핏하면 범죄가 마력에 의한 것이라고 해서 독자를 놀라게 한다. 그러나 그가 추리소설의 규칙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글을 쓰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런 방법을 동원한 것은 아니다. 그의 수수께끼는 풀어 볼 만한 요소가 많고 음미해야 하는 용의자도 충분하며 스릴도 있기 때문이다.
비밀의 방이나 통로는 하나면 족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건의 무대가 되는 건물에 비밀 장치가 있다고 해서 별 이상할 것이 없을 때 사용하라는 말이다. 앨런 알렉산더 밀른(Alan Alexander Milne, 1882∼1956)의 『붉은 집의 비밀(The Red House Mystery)』(1922)에서도 어떤 비밀장치가 있는데 설명이 공평하다고 보기 어렵다. 현대식 건물에 그런 비밀장치가 있다고 한다면 막대한 건축비가 들 뿐 아니라 소문도 크게 날 것임으로 추리소설의 무대가 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독극물과 긴 설명을 필요로 하는 과학적인 장치 등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인체에 상상 외의 작용을 하는 독극물은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은 쓰지 말아야 한다. 공정한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리먼의 손다이크 박사 시리즈에 자주 나오는 일이다. 그 독약의 이학적 결함은 적은 것이지만 강의를 듣는 것 같은 긴 설명에서 오는 결함은 매우 큰 것이다.
중국인을 중요한 인물로 등장시키지 않는 것이 좋다
왜 이것이 규칙의 하나가 될까? 명확한 설명을 하기는 쉽지 않으나 대개 서양인들 사이에는 ‘중국인들은 머리가 좋지만 도덕적으로 뒤지는 사람이 많다’라는 편견이 뿌리 깊기 때문이다. 내가 관찰한 것만을 이야기하겠는데, ‘친구의 깊게 찢어진 눈’이라는 묘사가 나온다면 아예 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어니스트 윌리엄 해밀턴 경(Lord Ernest William Hamilton, 1858∼1939)의 『멤워스의 네 비극(Four Tragedies of Memworth)』만은 예외다.
탐정이 우연히 죽을 고비를 넘겼다든가, 근거 없는 직감이 적중했다는 등의 일은 피하는 것이 좋다
이는 좀 지나친 말인지 모르지만, 탐정이 영감·직감 등의 도움을 받더라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는 반드시 그 진실성을 성실히 검토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 수사에서는 번개처럼 영감이 떠올라 사건의 진상을 잡을 수 있겠지만 추리소설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탐정의 직감만으로 잃어버린 유서를 벽시계 속에서 찾아냈다면 졸렬한 방법이 된다. 그러나 탐정이 범인의 입장에 서서 유서를 감출 수 있는 장소를 떠올려 벽시계를 뒤지게 되었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이 된다. 진상의 해명에서 탐정은 자신이 생각한 사건의 과정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모든 일에 대한 정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탐정 자신이 범인이어서는 안 된다
이 규칙은 탐정이 진짜 탐정임을 작가가 보증하는 경우에 한해서다. 크리스티의 『침니가의 비밀(The Secret of Chimneys)』에서와 같이 범인이 탐정으로 위장, 많은 엉터리 증거를 조작해 다른 등장인물을 속이는 플롯은 그런대로 괜찮다.
탐정이 단서를 발견했을 때는 이를 곧 독자에게 알려야 한다
아무리 미숙한 작가라도 다음과 같이 써서는 안 된다.
“위대한 명탐정 셜록 홈스는 갑자기 몸을 구부려 지면에서 무엇인가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친구에게 보여 줄 생각을 않고 혼자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이것은 수수께끼 작성법으로는 비논리적이다. 독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단서로 삼아야 할 것인지도 판단하지 못한다. 탐정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고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 독자의 추리력에 도전해야 하며, 그때도 독자가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을 때 역량 있는 작가가 되는 것이다.
탐정의 우둔한 친구, 즉 왓슨 역의 사나이는 그가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을 숨김없이 독자에게 알려야 한다. 그리고 그의 지능은 독자보다 조금 낮아야 한다
이 규칙은 완벽을 기하기 위한 것이고 추리소설의 본질상 왓슨 역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왓슨 역이 등장할 때 그 비중은 권투 선수의 스파링 상대 정도여야 한다. 작품을 다 읽은 독자가 “작가한테 졌다. 하지만 나는 왓슨 같은 멍청이는 아니니까 다행이군”이라는 반응을 보이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 추리소설에서 모든 작품에 홈스와 왓슨 역할을 등장시킨 작품은 노원의 하영구 경감과 맹달수 형사, 이상우의 추병태 경감과 강형사 두 케이스뿐이다.
쌍둥이 또는 쌍둥이라 할 만큼 닮은 사람을 등장시킬 때에는 그 존재 이유를 독자들에게 인식시켜야 한다
이런 종류의 트릭은 독자를 속이기에는 안성맞춤이지만 납득시키기는 어렵다. 이 규칙을 더 보충하는 뜻에서 덧붙인다면, 범인에게는 보통 사람 이상의 변장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범인인 사람이 무대에 선 경험이 있어서 변장술이 뛰어났다는 예비지식을 독자에게 주었을 때는 별문제다. 에드먼드 벤틀리(Edmund Bentley, 1875∼1956)의 『트렌트 최후의 사건(Trent’s Last Case)』(1913)에서는 이 문제를 잘 처리했다.
헐의 추리소설 10훈
헐의 본명은 리처드 헨리 샘슨(Richard Henry Samson)인데 어머니의 성인 헐을 필명으로 썼다. 1896년 런던에서 태어나 럭비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대학에 가려 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에 소집되었다. 전후에 회계사로 취직했다가 뒤에 개인 회계 사무실을 차렸다. 그러나 사업이 잘되지 않아 늘 한가했다. 그는 한가로운 시간을 이용해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34년에 발표한 처녀작 『백모 살인 사건』이 성공함으로써 도서(倒敍) 추리소설의 걸작 중 하나가 되었다. 여기에 소개하는 해설과 10개의 규칙은 『캐슬 문학 백과사전』(1935)의 ‘탐정소설’ 항목에 실렸던 것이다.
추리소설의 요건
탐정소설은 엄격한 의미에서 정의하면 다음과 같은 세 요소에 의해 성립되는 단편 또는 장편소설이다.
① 범죄 사건의 존재
② 범인이 1인 또는 다수일 가능성
③ 프로 또는 아마추어 탐정에 의한 사건 해결
고대 그리스 라틴 문학 중에도 어렴풋하나마 탐정소설적인 요소를 가진 것이 있으나, 정확한 의미에서 탐정소설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현대에서도 탐정소설의 형식이 너무 다양하고 또 탐정소설과 유사한 장르의 소설도 많아 이들 사이의 구별이 애매하다. 영웅적인 범죄자의 모험 이야기라든가, 범인이 누구인지는 이미 밝혀져 있고, 다만 그에게 어떤 판결이 내려지는가를 문제로 하는 형식의 소설 또한 탐정소설과 유사하다. 스릴러소설, 스파이소설, 비밀조직소설, 모험소설, 유령 이야기 등도 탐정소설과 유사하다. 그러나 범인 찾기 추리가 없고 범죄의 해결이 없고 추리성이 없기 때문에 추리소설이라고 정의하기 어렵다.
추리소설의 기원은 비교적 최근의 일로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1809∼1849) 작품에서 그 발단을 찾을 수 있다. 『마리 로제의 비밀』의 무대는 파리지만 포가 그린 것은 당시 뉴욕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메리 세실리아 로제의 살인 사건이었다. 포는 이 사건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조언한 일이 있고 그것은 실제로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863년 에밀 가보리오(Émile Gaboriau)가 출판한 『르루주 사건(L’Affaire Lerouge)』이 최초의 장편 추리소설이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는 윌리엄 콜린스(William Collins, 1824∼1889)의 『월장석(The Moonstone)』(1868)이 출판되었다. 이 소설에 등장한 형사부장이 장미를 좋아한 것이, 영국 수사 요원들이 장미를 좋아하게 되는 전통이 되었다.
일반 독자들이 가장 많이 읽은 추리소설은 1891년부터 ≪스트랜드 매거진(The Strand Magazine)≫에 연재되었던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 1859∼1930)의 셜록 홈스 시리즈였으며 이후로 추리소설이 본격적으로 독자의 전유물이 되었다. 1892년에 홈스의 단편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셜록 홈스 이야기에는 보석이나 귀중한 사진 도난 사건, 경주마에 마약을 먹인 사건 등이 나왔으며 때로는 범죄가 전혀 아닌 것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홈스 외의 탐정소설에서는 예외 없이 한 가지 종류의 범죄, 즉 살인만이 취급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탐정소설이 권선징악이라는 교훈적인 의미를 가지는 쪽으로 기울게 된 원인이 된 듯하다. 그뿐 아니라 이야기의 서스펜스를 고조시키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최고로 소중한 생명을 건 승부라야 했고, 따라서 살인 외의 범죄로는 불충분했던 것이다.
추리소설에서는 살인 방법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묘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간결하게 묘사하는 것이 작품의 품위가 더 살아나고 수수께끼가 어려워진다. 너무 자주 사용된 둔기에 싫증나서 새로운 살인 방법을 창안해 내려는 작가도 있다. 도로시 세이어스(Dorothy Sayers)의 『나인 테일러스(The Nine Tailors)』(1934)에서는 실제로 살인을 범한 것은 교회의 종이었다는 결말에 이른다.
그러나 추리소설의 독자들이 강조하는 여러 가지 약속 중 하나는 이러한 새로운 방법의 창안에 일정한 한계를 두자는 것이다.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가령 독약을 쓰는 경우에도 그 독약은 충분한 과학적인 해명이 되어야 하며 그것이 인체에 미치는 효력도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전혀 이해할 수 없고 믿기 어려운 무기나 과학적인 장치를 이야기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만들어 낸 사건은 어디까지나 사실인 것처럼 느껴져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에서 (경찰의 수사 경험에서 본다면) 하나의 범죄에 두 사람 이상의 범인이 있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경찰은 최종적인 유죄 판결을 받아 내려고 합법적인 증거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탐정소설 작가들이 하는 것과 같은 방법을 더러 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쉽게 해치우는 경우가 많다. 살인 동기도 알고 보면 흔히 있는 평범한 것들이고 그리 야단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추리소설 작가는 가져다 붙일 만한 확실한 이유가 있는 한 얼마든지 자유롭게 쓸 권리가 주어진다. 공갈 협박을 하는 자는 애인을 배반한 남자라도 좋고 행방불명된 유산 상속자라도 좋다. 세상을 등지고 사는 일개 촌부가 위조 우표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또는 대규모 마약 조직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괜찮다. 다만 독자가 조금이라도 거짓말 같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실패다.
탐정소설에서는 독자를 납득시킬 수만 있다면 동일 범인이 제1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제2, 제3의 범행을 저지를 수 있다. 제2, 제3의 범행이 다른 사람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해도 괜찮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아무래도 기술적인 무리가 따르고 비현실적인 감이 있어서 어색하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퀴즈를 동적으로 만들 수 있고 또 액션을 추가할 수 있어서 좋다는 견해도 있다. 미국의 추리소설은 영국보다 훨씬 더 많은 폭력적 액션을 요구하고 있다.
영국의 추리소설이 탐정성 위주의 정적인 것인데 반해 미국은 동적인 하드보일드다. 이 점을 들어 영국 평론가들 중에는 미국 추리소설을 혹평하는 사람도 있다.
“적어도 영국 경찰은 갱들의 뇌물은 받지 않는다. 미국 경찰은 갱 조직의 압력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는 시장이나 정치가들이 마피아와 내통하기도 한다. 이런 나라의 하드보일드가 무슨 추리소설인가?”
추리 작가 지망생들은 추리소설이 그 나라의 법과 제도 및 국민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풍속 소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통순경도 실탄 든 권총을 휴대하는 미국의 추리소설과 대부분의 경찰관이 곤봉밖에 휴대하지 않는 영국의 탐정소설이 같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의 추리 작가 지망생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사건 해결과 그 해결 방법을 절대적으로 독자가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법정에서 유죄 판결의 자료로 연결되느냐 안 되느냐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유죄의 법적인 입증을 테마로 하는 소설일 경우에는 별개 문제다. 범인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교묘하게 범행을 수행해야 하나 그렇다고 해서 완전범죄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범행의 진행 과정과 술수에도 빈틈이 없다고 믿게 해 주어야 하지만 탐정은 그것을 뒤집어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모든 독자의 의견이 일치한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쉽게 해결하도록 범행이 엉성해서는 재미있는 소설이 될 수 없다. 책을 다 읽고 난 독자가 ‘나라도 그런 마음만 먹었다면 그랬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납득할 것이고, “속았다”라고 생각하면 화가 날 것이다. 그러므로 추리소설은 규칙이 많으며 그것을 지켜야 한다.
다음 10가지의 추리소설 작법 원칙을 제시한다.
1. 추리 작가는 하나의 사실에 대해 모순되는 두 가지 기술을 해서는 안 된다.
2. 단서나 증거가 되는 사실을 최후까지 감춰 두어서는 안 된다.
3. 고의로 허위 진술이나 오해를 초래할 만한 진술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단, 믿을 수 없는 등장인물을 통해서 하는 것은 무방하다.
4. 의학이나 법률에 관한 내용이 스토리의 일부분이 될 경우에는 어느 전문가가 보더라도 틀린 곳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일부러 틀린 말을 해야 할 경우는 예외다.
5. 독자에게는 실마리가 될 만한 단서를 제시해야 한다.
6. 틀린 실마리라도 최종적으로 해명된다면 얼마든지 제시해도 된다. 그러나 산만한 결론은 맹렬한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7. 탐정소설 작가의 정신 상태는 온전해야 하며 그에 의한 인물 묘사도 확실해야 한다. 단, 범인의 인물 묘사에는 어느 정도의 융통성이 있다. 처음에는 동정 받을 만한 인물로 등장시켰다가 차츰 사악한 본성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상대를 속이려면 반대쪽을 노려야 하기 때문이다.
8. 좋은 문장, 어느 정도의 유머는 절대 필요하다. 연애의 재미를 첨가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반드시 첨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9. 결말 부분에서는 예측하지 못했던 의외의 이야기들로 진행되어야 한다.
10.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최종적으로는 범인의 체포나 자백으로 막을 내려야 한다.
런던 탐정 클럽 서약
탐정 클럽(속칭 런던 탐정 클럽)은 1928년 앤서니 버클리(Anthony Buckley)가 창설했다. 창설되자 곧 버클리는 그의 명저 『독이 든 초콜릿 사건』(1887)에서 이를 소개했다. 초대 회장은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이었다.
회원 수는 많지 않으나 탐정소설의 거장들은 모두 회원이 되었다. 회원이 되려면 엄격한 심사를 거쳐 가입 승인을 얻어야 하고, 또 ‘서약’이라는 의식을 거쳐야 했다. 클럽의 수입은 회원의 작품을 수록해 부정기적으로 출판하는 작품집에서 얻어진다. 다음에 소개하는 회원 서약은 이 클럽의 높은 지적 수준을 나타내고 클럽의 실체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추리소설의 본가는 미국인데, 작가협회의 본가는 영국이다. 미국의 협회는 영국보다 늦게 생겼고 회원 서약과 같은 의식도 없지만 영국 작가들이 부러워하는 멋진 라틴어 슬로건이 있다.
“Qui Fecit?(누가 범인?)”
영국 런던 탐정클럽 회원 서약의 의식은 다음과 같다.
회장이 가입 희망자에게 말한다.
“○○○ 님. 귀하는 본 탐정 클럽에 가입함을 진정으로 원합니까?”
“진실로 원합니다.”
회장이 다시 묻는다.
“귀하는 귀하 작품의 탐정이 기지를 발휘해 의뢰받은 사건을 기술적으로, 또 성실한 자세로 추적하게 할 것이며, ‘하늘의 계시’, ‘여성의 직감’, ‘맘보잠보신[스탠턴(Staunton)족의 미신적 수호신(서양의 토속 잡신)-필자 주]의 야바위’, ‘우연한 일치’ 등에 절대로 의존하지 않게 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귀하는 갱, ‘음모’, ‘살인광선’, ‘유령’, ‘최면술’, ‘중국인’, ‘초능력’, ‘광인’ 등을 사용함에 절도를 지킬 것이며, 과학과는 관계 없는 ‘미지의 독약’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귀하는 킹스 잉글리시(Kings English, 표준 영어)에 대해 경의를 표합니까?”
“경의를 표합니다.”
“귀하는 이 맹세를 신성시합니까?”
“이 맹세를 신성시하며 성실히 지킬 것을 서약합니다.”
“귀하는 본 클럽의 회원으로 있으면서 귀하의 작품 판매를 올리고 싶다는 이유로 이상의 맹세를 어기는 일 없이 성실하게 지켜 나갈 것을 맹세합니까?”
“엄숙히 맹세합니다. 나아가 본 클럽을 위해 봉사할 것을 맹세하며, 회원 여러분이 취중이나 기타 어떤 사정에도 출판 이전에 플롯·수수께끼를 도용하거나 누설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이 대목에서 회장은 입회한 회원들에게 묻는다.
“이의가 있으신 분은 말씀하시오.”
이의가 있으면 재토의 일시·장소를 지정하지만 이의가 없으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시장기가 드는군요. 더 이상의 논의는 필요 없게 된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은 신입 회원을 우리의 손님으로 초대합니다. 귀하는 아까 하신 말씀, 어떠한 경우에도 플롯이나 수수께끼의 도용 또는 누설을 하지 않겠다는 그 엄숙한 약속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서약 행사가 끝나면 신입 회원을 위한 파티를 열고 입회를 축하해 준다. 회장은 이 입회식에서 서약을 어긴 작품을 썼을 때는 가혹한 벌칙이 있다는 것을 주지시킨다.
참고로 한국추리 작가협회의 가입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문단의 등단 절차를 마친 자
2. 단편집 및 장편 추리소설을 1편 이상 출판한 자
3. 협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에서 신인상을 받은 자
이상의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협회의 취지에 찬동한다면 이사 2인 이상의 추천을 받아 이사회에서 심의 결정하고 회장이 가입을 승인한다. 이상은 정회원의 경우고 준회원, 명예회원 제도도 있다.
딕슨 카의 4대 공리
이상에서 소개한 S. S. 밴 다인의 20원칙, 녹스의 10계, 헐의 10훈, 런던 탐정 클럽 서약 등은 모두 추리소설을 쓰는 사람이면 필수적으로 알아 두어야 할 공식이다. 작가나 작가 지망생뿐 아니라 독자들도 더 재미있게 추리소설을 읽으려면 필요한 상식이다.
이 밖에도 밀실 트릭의 대가인 존 딕슨 카(John Dickson Carr, 1906∼1977)의 4대 공리도 있다.
카는 그가 편집한 『10대 장편 추리소설』(1947)의 서문에 이 4대 공리를 썼다. 스스로 ‘황금의 4대 공리’라고 할 만큼 S. S. 밴 다인과 녹스의 규칙에서 4개항을 발췌해 약간 표현을 바꾸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 범인은 탐정 또는 하인 등 우리가 범인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2. 범인은 좀처럼 의심할 수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3. 범인은 한 사람이어야 한다.
4. 범행은 분명하게 서술되어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추리소설의 공식 (추리소설잘쓰는공식, 2014. 4. 15., 이상우)
핀 포인트
중국인을 중요한 인물로 등장시키지 않는 것이 좋다
왜 이것이 규칙의 하나가 될까? 명확한 설명을 하기는 쉽지 않으나 대개 서양인들 사이에는 ‘중국인들은 머리가 좋지만 도덕적으로 뒤지는 사람이 많다’라는 편견이 뿌리 깊기 때문이다. 내가 관찰한 것만을 이야기하겠는데, ‘친구의 깊게 찢어진 눈’이라는 묘사가 나온다면 아예 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어니스트 윌리엄 해밀턴 경(Lord Ernest William Hamilton, 1858∼1939)의 『멤워스의 네 비극(Four Tragedies of Memworth)』만은 예외다
[출처] 추리소설의 공식(두고두고 볼 것)|작성자 YouS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