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거비 유 합니다. 이거...달빛 유감이라고 이전에 올린 글하고 제목이 비슷한데 비슷한 거야? 뭐 밥 먹고 반찬 따로 먹는 사람 뱃속에서 반찬이 먼저 가는 밥 봤느냐 그런다더니...노루 친 막대 삼년을 우려먹고도 모자라 그 시덥쟎은 반찬불평 또 우려먹게...
우서비 유ㅠ 합니다. 지난번에 먹은 밥이 반찬 없다고 목구멍에 넘어가지를 않는가 보구만..그런데 최근 글의 형식을 통일하고 있다는데...그거 시험하나? 쉼표,를 최소화하고...-로 교체하고 괄호( )를 생략해서 가독성Readablity를 높이고 외국어는 원어 병기하고...
매깨비 유ㅠㅠ 합니다. 뭐 기획자가 박학다식하고 논리정연해서 작가들이 주눅 들고 전시가 위축되느니 단순우직-단순무식한게 미덕일 수 있지. 글 쓰는 사람도 씹는 재미가 있고...기획이란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훈도비평-강단비평을 뽐낼 수도 있을 것이고...에 또...
달빛유감1-달빛유감의 유감의 유감 Media City Seoul-no date, no logic and no modesty
http://cafe.daum.net/miguancf/gJYA/196
달빛유감
...작품은 별도의 분류기준이 필요했다. 음악이나 음향-혹은 소음은 작품들에게서 중요한 부분들이지만 시각적인 현상과 의미, 사상과 철학 그리고 성취 및 전망이라는 관점에서 부수적인 것으로 보았다. 촬영된 비디오와 도록-해설 및 매체기사에서 식별 가능한 작품들을 골라 표상하는 바에 따라 언어-프로세스-시뮬레이션-애니메이션-인터랙티브-인터넷으로 나누었다. 물론 귀납적으로 주제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
1. 긴 불평
2000년 제1회 행사인 「미디어아트서울」에 대한 불신을 딛고 2002년 제2회「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를 맞는다. 서울 토백이들도 경희궁이 어디더라 하고 우왕좌왕했을 정도로 원천적 난맥상을 보여주었던 것이 제1회 행사였다.
올해는 새로 옮겨간 옛 대법원 건물에서 행사를 치른다. 덕수궁 돌담길이나 정동길-시청앞 광장으로 에워싸인 대법원건물이야 인지도가 높으니 일단 1회의 장소성에 따른 난맥상은 해소될 것이다. 그러나 예산이라는 걸림돌이 있다.
예산의 문제는 언제나 모든 예술행사의 발목을 잡는다. 그러므로 2002년 5억(6억)의 예산으로 2000년의 100억(70억) 행사와 같은 규모나 작품내용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괄호 안의 숫자는 매체들마다 다른 수치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시간의 문제 역시 언제나 제약이 된다. 2년이거나 두 달이거나 언제나 시간에 쫓기기는 마찬가지인 것이 이런 행사요 이벤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산과 시간의 논의를 제쳐두고 결과만을 보게 된다. 그 결과 중에서도 문자에 의한 기록이 맨 먼저 구설수에 오른다. 그리고 언제나 원망이 따른다. 왜 이렇게 긴 불평을 늘어놓게 만드느냐는 것이다.
그 첫 번째로는 주제와 범주의 다의적인 해석가능성을 들 수 있다. 주제는 제시된 대로 “달빛흐름”이다. 미디어를 달에 비유하여 미디어와 테크놀로지를 정복의 수단이 아닌 잃어버린 낭만을 건설하는 도구로 제안하고자 한다고 취지문은 밝히고 있다. 달과 정복 혹은 낭만의 건설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달빛흐름을 “Luna's flow”라 표기했다. 일반적으로 달빛이라 할 때는 Moonlight나 Moonbeam으로 표기한다. 호수 위의 달빛을 시적으로 표현할 때는 Moonriver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flow는 일반적으로 끊임없이 흐른다는 뜻이 강조된다. 유동체거나 언변, 또는 차량의 흐름 등이 대상이다. 그런데 Luna가 달빛이던가.
완룩닷컴www.onelook.com에서 찾아보면 Webster's 1913 edition에서 1.달, 2. 은이라는 해석을 볼 수 있을 뿐이다. Wordsmyth English Dictionary-Thesaurus,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등에서는 로마의 달의 여신 Selene로 표기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Luna는 소련의 달 탐사위성 이름으로 표기된다. 오늘날 미국어의 표준으로 여겨지는 Longman Dictionary에서는 Luna가 실리지 않고 대신 Lunar가 실려있다. 그래서 어느 리뷰에는 Lunar flow로 고쳐서 기사화하기도 했다.
그렇게 러시아의 위성이나 달의 여신이라는 뜻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Luna's Flow는 달 탐사위성에서 연료가 새어나온다거나 달의 여신에게서 뭔가 흘러내린다는 정도의 뜻 이상 기대되기 어려운 단어의 조합이다. 어떤 형태이건 Luna's flow를 해석하여 달빛 흐름이 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왜 이렇게 어려운 개념과 단어가 선택되었을까. 주최측의 설명에 의하면 백남준의 표현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백남준은 ‘달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TV’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러므로 백남준의 달이 달빛으로 바뀌고 이윽고 달빛흐름이라는 주제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달과 달빛과 달빛 흐름은 전혀 다른 흐름의 세 단어이자 개념이 된다.
오히려 달TV, 혹은 Moon Television 등으로 단순화하였다면 백남준의 뜻도 살리면서 세계무대에서 하나의 작은 화두로 등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수양산 그늘에 강동 팔 백리를 간다고 백남준같이 어눌한 사람을 업고 세계미술의 흐름에 진입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웠던 모양이다.
또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이론과 연관을 짓는 기사도 있다. ‘달빛은 실체가 아니라 태양빛을 반사한 이미지’라는 시뮬라시옹Simulation 이론에서 차용하여 달빛 흐름이라는 주제의식을 충실하게 반영한 디지털 미디어 작품들이 선보인다는 것이다.
출품작 중에서 이용백의 <예수와 붓다사이>는 이원일 총감독이 ‘보드리야르의 컨셉을 가장 잘 응용한 작품’이라 평가한다는 기사가 있다. 그러므로 이감독의 컨셉은 시뮬라시옹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달이나 달의 여신, 신화와는 무관하게 달이 단순한 반사체라는 물리적 견해가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더 단순화하면 시물라숑, 즉 시뮬레이션이 된다. Moon Simulation이라면 더욱 더 근접한 개념이 될 것이다.
이 견해를 바탕으로 전시의 작품들을 해석한다면 매우 쉬운 이야기가 된다. 선언문은 이런 형식이 될 것이다.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미디어를 활용하거나 현실의 리얼리티나 타블로 미학을 벗어난 어떠한 메시지-행위-의지도 좋다. 반사-반영-변질-영상-투사-인터랙티브도 환영한다. 단 실재와의 무관계를 지향한다”는 류의 강령이 발표되었다면 달빛 흐름이라는 주제가 확연히 들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관객이나 전문가 집단 역시 환영했을 것이다.
관객은 예술가들이 자신들과 같은 언어를 쓴다는 사실에 동류의식과 친근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가들 역시 간단명료한 강령에 따라 단순하게 작품을 볼 수 있게 된다. 사실 영어사전에도 없는 말을 짜집기해서 주제를 만드는 전문가들에 대해서는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이렇게 설정된 주제는 작가들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작품에 반영될 수 있을까. 많은 작품들이 주제와 무관한 작품을 제작하는 것은 반드시 주최 측의 개념이 애매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확하게 그들이 이해하는 그들의 모국어로 달빛흐름을 제시하더라도 모든 작가가 달빛흐름을 구현할 수도 없을 뿐더러 이 전시의 성격상 미디어를 구사하여 달빛흐름을 표현하고 전달하여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는 쉽지 않은 과제일 것이다.
그리고 주최 측과 작가와의 사이에 큐레이터들이 있다. 유럽권의 프랑스와 도이칠란드, 영어권의 아메리카와 오스트랄리아, 동양권의 중국-싱가포르-일본 및 한국의 큐레이터들은 주제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들이 언어와 신화, 그리고 논리를 뛰어넘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까. 자못 흥미로운 일이다.
그런데 주제를 이해한다고 치더라도 또 다른 혼선의 가능성을 작가들은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제의 범주가 주제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술관을 중심으로 열리는 본 전시의 취지는 미술관 공간의 유기체적 구조화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미술관은 뼈가 있고 피가 흐르며 땀이 나고 숨을 쉰다는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나아가 피부가 있어 외계와 접촉한다는 점에서 신체를 표방한다고 본다.
여기까지는 미술관의 유기적 생체적 기능을 부여하는 개념화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개념은 근본적으로 주제인 달빛흐름과는 무관하다. 다시 말해서 신화적이건 물리적이건 달빛흐름에서 인간이라는 생체나 유기체가 도출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신체 즉 미술관은 생명성-호흡-탄력-역동성 그리고 인간적 감성을 자극하는 미디어의 흐름을 표현한다고 되어 있다.
이어 본 전시는 Media as body-Brain-Heart-Bone structure로 나뉜다. 그러니까 미술관을 생체로 보았을 때 동체-두뇌-심장-골격으로 나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분류 역시 대주제인 달빛흐름과는 무관하다. 설사 Luna가 달의 여신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분류되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렇게 나눈 분류에 다시 네 개의 항목을 배대시켰다. 즉 동체=(digital) sublime, 두뇌=(cyber)mind, 심장=(Luna's)children, 골격=(Luna) nova가 된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sublime이 형용사라는 점이다. mind, children, nova는 명사이므로 승화라는 뜻으로 배대되려면 sublimity로 쓰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 다음 동체=승화, 두뇌=마음, 심장=아이들, 골격=초신성超新星으로 상식적인 동질화에서 벗어난 느낌을 준다. 다시 괄호안의 내용까지 해석하면 훨씬 더 상식적인 의미를 벗어난다.
동체는 승화의 디지털, 두뇌는 사이버마인드, 심장은 달 여신의 아이들, 골격은 달 여신의 초신성이 된다. 동체가 왜 디지털로 승화를 하는지, 두뇌가 왜 사이버 마인드로 해석되어야 하는지, 달 여신의 아이들이 왜 심장이 되어야 하는지, 달여신에게 초신성이 만약 따른다면 왜 골격이 되어야하는지를 논리적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다시 동체=디지털 승화에서 보면 미술관의 건축공간자체에 심장-두뇌-골격-대동맥-신진대사기관-피부 등이 유기적으로 구성된 신체의 의미를 부여하고 생명성-호흡-탄력-역동성 그리고 인간적 감성을 자극하는 미디어의 흐름을 표현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동체로 분류된 제1항목에 2-3-4항목인 두뇌-심장-골격이 모두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에는 2-3-4 항목을 따로 독립시킬 명분이 약해지게 된다.
다시 제1항목인 동체에는 luna's eye라는 이름의 소주제가 포함되어 있다. 건물의 외관전면 유리창에 눈처럼 쏟아지는 눈snow=눈eyes으로 해석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곤 해설을 붙였다. 그리스 신화 속의 지치지 않는 감시자인 수많은 눈을 가진 아르고스Argos 또는 메두사Medusa를 상징한다고 했다.
그러나 아르고스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 북동부 아르골리스Argolis 주에 있는 도시이름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르고스는 아르고스 파놉테스Argos Panoptes을 일컫는 듯하다. 아르고스 파놉테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눈이 100개인 신이다. 여신 헤라Hera에게서 이오Io가 변신한 암소를 지키라는 임무를 받았지만, 헤라클레스Heracles가 죽였다. 헤라여신은 아르고스 파놉테스의 눈들을 공작의 꼬리에 옮겼다.
메두사는 괴물 고르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괴물이다. 뱀으로 된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이다. 메두사의 머리를 본 사람은 누구나 돌로 변하므로 페르세우스는 거울에 비친 메두사를 죽였다. 메두사는 엄밀히 말해서 눈eyes=snow을 연상케 하는 괴물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르고스나 메두사는 수많은 눈을 가졌다는 의미와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주제인 달빛흐름과는 정녕 무관하다.
이어 사이버 마인드는 두뇌와 연결된다. 정보의 민주성-전체속의 통합이 중심이 된다. 네크워크나 인터넷 등을 활용한 작품을 보여준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루나의 아이들은 심장에 배대된다. 젊은 예비 작가들이나 어린이들이야 말로 우리의 심장이라는 의미라 했다. 그래서 어린이 관객과 부모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한다는 의도로 설명된다.
루나 노바, 즉 달 여신의 초신성이거나 소련의 달 탐사우주선은 사적 주거공간의 환경화-인공자연에서의 명상으로 연결되어 설명된다. 이들 역시 달빛흐름의 해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달빛흐름이라는 주제와 미술관을 유기적으로 연관 지은 시도는 지극히 감성적이다. 그리고 본 전시 구성의 구조도를 보면 매우 시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논리적이고 딱딱한 구조화보다는 훨씬 참여 작가들에게 여유 있고 풍부한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작가들이 지레 짐작을 하거나 방만한 주제해석으로 주최 측의 개념을 오도할 가능성이 많아진다.
주최 측의 개념의 난맥상은 여기저기에서 도출된다. ‘전시의 핵심은 숭고미’라는 구절이 보인다. 타고르Tagor의 시 제목인 「기탄잘리Gitanjali」가 인용되고 암스트롱Neil Armstron이 달에서 느낀 경외심과 두려움까지 동원되었다. 이태백의 달, 동화적인 달도 거론되었다. 그러나 절망스럽게도 이 개념들은 작품과 무관하다. 왜냐하면 달을 소재로 한 몇 점의 작품들조차도 숭고미나 신화-동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캐릭터로 등장하는 ‘달따라’ ‘달무리’ 역시 달빛흐름과는 거리가 있다. 달따라는 달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얼굴이 달덩이처럼 된 밤이슬이다. 그 달따라를 따라 다니는 친구들이 달무리란다. 달이라는 정겨운 존재를 캐릭터화했다. 거기에는 미디어도, 달의 신화도, 그리고 백남준이나 보드리야르의 사상도 없다. 단지 사랑과 아름다움을 나눌 수 있는 친구로서 캐릭터들은 형상화되었다.
웹 사이트는 그 난맥상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보도자료에 웹 사이트의 주소가 명기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보도 자료가 작성될 무렵 구축 중이었던 저간의 사정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그렇게 접속에 시간이 걸려야 할까.
오늘날 대부분의 웹디자이너가 기피하는 인트로Intro의 도입-플래시의 과용-서버 과부하 등 많은 문제점이 보인다. 그래서 디지털 아트의 현란함을 보여주려고 의도한 것처럼 보이는 색띄들은 우중충한 흉물로 자리 잡았다.
문제는 속도와 사용자 편이User Interface라는 인터넷의 기초문법에 있다. 오늘날 초고속통신망에서 5초이상 화면이 멈칫거릴 때 기다려주는 네티즌은 없다. 부득이 필요한 경우에도 10초가 지나면 불평이 터져 나온다. 그 원인이 이미지에 있다면 이미지를 줄일 일이다.
자바 스크립트Java Script나 플래시Flash 창이 문제라면 고전적인 HTMS로 돌아갈 일이다. 단지 마우스를 올려놓으면 작품위치를 보여주는 마우스 오버Mouse Over거나 명단정렬-시간의 경과를 뜻하는 둥근 플래시 로고Flash Logo만을 과시하기 위해서 시간 걸리는 자바나 플래시창을 강요한다면 너무나 비싼 낭비와 사치가 아닐까.
웹사이트에 등록된 20편도 안 되는 기사자료를 내려 받기 하는데 무려 20분 이상이 걸렸다. 이 정도라면 모든 파일을 하나로 묶어 제공하는 기본 매너가 필요할 것이다. 그나마 내려 받기라도 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제목줄은 이미지처리가 되어 아예 선택이 되지를 않는다. 시스템 자체가 다운되는가 하면 전시코너의 데이터는 아예 내려 받기가 되지 않도록 했다. 이유가 뭘까.
2. 못다 한 불평
개념의 혼선은 짧은 시간 동안 이벤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작품과 밀접하면 할수록 전체를 보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는 사람들은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일망무제의 지평이 제시되기를 바란다.
전시이벤트의 난맥상이야 여러 각도에서 제기될 수 있다. 개념쯤이야 팜플렛을 안 보거나 설명조차 안 듣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문제는 작품을 보는 사람의 혼선과 혼돈이다. 보는 사람이라는 이름의 관중이라는 집합명사에는 전문가집단과 대중 집단이 혼재되어 있다.
대중집단이야 워낙 결집력이 없는 아둔한 집단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Haluk Akalce의 <Blood Pressure>를 보고 낭패한 표정으로 나오는 50대가 하소연하는 대목이 기사화되었다. “저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뭔가 예술에 대해 알아야할 것 같소”라 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평면회화-수묵화나 풍경화에도 대중들은 주눅이 든다. 그러나 그렇다고 대중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 사람들이 입장수입을 올려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신문기사에는 많은 참여작가들이 재미있는 하이테크 기재들-DVD-비디오게임-컴퓨터모니터와 하드 드라이브-디지털 사진-다중TV 스크린 등을 사용하는데 이들이 시각적으로는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많은 혼란이 야기되며 오히려 일반대중들을 예술에서 멀리 떨어지게 할 수도 있다고 썼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전문가집단에서 이 개념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 주최 측이 웹 사이트에 등록한 기사들의 대부분이 주최 측이 제시하는 보도자료를 인용하는 정도이다.
혹시 주관적인 견해를 피력하더라도 역시 객관화되기는 어려울 뿐 아니라 주최 측이 내세우는 개념과는 무관한 논지를 펼치고 있다. 그 많은 자료들에서 어느 누구도 달빛흐름의 주제가 인간의 신체와 연결되어야 하는지, 작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밝힌 기사가 없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 것이다.
미술작품이거나 미디어이거나 기본적으로 대상이 되는 것은 작품이다. 그 작품에 대한 해석은 비록 이론가의 언어와 논리와 개념을 빌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차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일차자료라면 작품 앞에서 진술하는 작가의 사상과 발언일 것이다. 그 바탕에서 평론가나 이론가는 작품을 해석하고 미술사와 미술사상-미학이나 이론에 비추어 작품의 형식과 내용 및 감성과 논리를 읽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작품을 바탕으로 하는 발언-작품관-예술관을 제시하지 않았을 경우에 평론가나 이론가는 자의적인 해석을 가하거나 그 작품 자체를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몇 작품이 빠진다고 전시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통일된 전시의 공감대가 형성될 수 없는 전시가 아닌가.
2002 서울국제미디어비엔날레의 전시작가는 모두 77(79|79)명이다. 한국인 35(37|38)명, 외국인 45(42)명이다. 웹 전시작가 50명이 16개의 모니터에 과정을 보여준다. 총 200여점이 미술관의 전시와 야외전시를 통해서 보여 지도록 되어 있다.
괄호 안의 숫자는 매체들마다 다른 인원을 보도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자료의 혼선은 주최측의 행정착오거나 보도당시까지 작가가 확정되지 않았거나 혹은 정확한 통계가 어려웠던 사정을 이야기해준다.
전시는 야외전과 본 전시로 나뉜다. 야외전시로는 돌담 위의 영상산책-나이트 미디어 아트 전시 등이 소개된다. 그러나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몇 개의 깃발이 보일 따름이지 그 길에서 뭔가가 일어난다는 시각적 정보와 물증은 제시되지 않고 있었다.
안수진은 덕수궁 돌담길을 배경으로 작품을 보여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서 10월 6일 일요일 밤 7:30-8:30이라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여기에서 모월 모일 모시에 이런 행사가 있었습니다 라는 현수막이거나 기록사진 등이 게시될 수도 있지 않을까. 숲에 레이저 빔Laser Beam을 쏘는 나이트 갤러리Night Gallery는 작가 사정으로 취소되었다는 기사도 있었다.
전시장에서 전시홍보팀의 취재협조는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보도자료 및 자료의 접근성에는 약간의 배려가 필요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를테면 보도 자료는 유인물이나 MS-word 파일로 배부된다. 유인물은 필요한 내용을 재입력해야한다는 불편이 따른다.
MS-word 파일은 한국인의 대부분이 사용하는 글과는 호환되지 않는다. 텍스트파일로 변환하여 글에서 불러와야한다는 불편이 있다. 이미지 파일 역시 워드 프로세서에서는 활용이 어렵다.
그러한 불편을 해소하면서 고해상도의 이미지파일을 매체에 제공하기 위해서는 CD-Rom이나 DVD의 이용이 바람직할 것이다. 팸플릿이나 도록보다 시의성이 높고 접근성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전자메일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용량이 큰 파일이라면 웹하드www.webhard.co.kr 서비스 등에 등록하고서 필요한 사람에게 가져갈 수 있도록 한다면 많은 수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전시장 운영과 전시장 투어 등은 전시행정에서 돋보이는 부분이다. 설명의 내용 역시 간명하고 정확하여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언어에 의한 설명을 듣지 않고서 작품의 내용을 알 수 없다면 미디어의 본질에 대한 접근방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실증이 된다.
이를테면 작품 전시실 입구에 작가 및 작품소개를 하면서 작품성격-작가발언-동원미디어-인터랙티브Interactive 방식 등을 체계적으로 도표화하거나 소개판대신 VCD|DVD player로 작품을 즐기는 방법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전시공학의 문제이다. 작품의 체계적인 분류-전시실의 유기적 결구-작가와 작품의 조직적 안배를 바탕으로 관객의 관람과 휴식 등의 생체리듬에 따라 동선을 효율화했다 하더라도 전시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보는 사람의 알 권리가 무시된 전시는 현학이요, 관객모독이 될 수 있다.
전시에 관한 또 하나의 문제는 해설기사들이 작품과 유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작품에 대한 해설은 작품의 도판사진과 함께 기사화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도판사진은 해설하고자 하는 작품의 사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전시회 팜플렛의 대부분은 전시작품과 다른 도판을 싣고 있다. 그룹전이거나 기획전-초대전의 경우는 더욱 그 횡포가 심하다.
주최 측의 협조를 얻어 비디오로 이번 전시를 촬영했다. 홍보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인터랙티브 작품에 대한 해설을 듣고 해설대본과 도록을 얻을 수 있었다. 전시장의 작품 전체를 찍고 나오면서 미술관 창문의 스타인캠프Jennifer Steinkamp의 눈 내리는 풍경까지 촬영했다.
혹시 누락된 자료가 있을까 하여 인터넷의 기사까지 내려 받기를 했다. 현장의 공기 속에서 숨 쉬는 작품의 분위기 혹은 주최 측에서 말하는 아우라Aura을 바탕으로 충분한 담론이 가능할만한 자료가 취합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자료의 유기적 연관성이 문제가 되었다. 촬영된 작품의 해설대본을 보고서 찾아낼 수 있는 작품이 몇점 되지 않는다는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팸플릿은 전시작품과 무관한 도판과 해설이 실려 있다.
언론매체들의 기사는 몇몇 이름 있는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주최 측의 보도자료를 인용하거나 주관적인 묘사로 일관하고 있었다. 영문인터뷰기사는 비교적 작가와 밀착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역시 이번 전시와 연관이 없는 작가자신의 작품론이 대부분이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해설기사를 종합하더라도 주최 측이 내거는 범주는 물론이고 주제는 결코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것인가.
3. 짧은 평문
작품은 별도의 분류기준이 필요했다. 음악이나 음향-혹은 소음은 작품들에게서 중요한 부분들이지만 시각적인 현상과 의미, 사상과 철학 그리고 성취 및 전망이라는 관점에서 부수적인 것으로 보았다. 촬영된 비디오와 도록-해설 및 매체기사에서 식별 가능한 작품들을 골라 표상하는 바에 따라 언어-프로세스-시뮬레이션-애니메이션-인터랙티브-인터넷으로 나누었다. 물론 귀납적으로 주제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언어-신화와 서정
백남준의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에서 신화 및 아키타입과 연결되는 한민족의 달과 그 정서를 280개의 모니터에 재구성했다. 까치설날은 태음력으로 섣달그믐이다. 태음력은 달의 주기를 기준으로 하는 역법이다. 서울 랩소디 2002를 재구성한 이 작품은 그러나 제목만 바꾸어도 작품의 성격과 주제가 달라질 수 있는 다이내믹Dynamic한 개념화를 보여준다.
고경호의 <반영-명멸하는 희미한 빛>은 간헐적으로 양동이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만드는 동심원이 비디오 카메라의 눈을 통해 벽면에 투사된 달에 동심원의 궤적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물리적인 달이지만 서정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이경호의 <전자 달>은 달에 투사된 인간의 모션을 인터랙티브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벽에 투사되는 둥근 달을 차단하면 센서가 감지하여 이지러진 달의 모양을 산출해낸다.
디지털-언어-데이터
피터 로빈슨Peter Robinson은 <Bad Faith:the Presence & Absence of God>에서 디지털문법의 전형적인, 이제는 클리세Cliche 즉 상투어라고 할 수 있을 0과 1의 디지털 언어가 교호작용하는 장면을 형상화했다.
에두아르도 폴라Eduard Pola은 <Alma>에서 캔버스 위에 디지털 이미지를 프린트 했다. 디지털 가공에 의한 근세 미술의 언어를 채용한다. 아킴볼도Giuseppe Arcimboldo의 채소인간은 그래픽 소프트웨어인 포토샵 레이어Photoshop Layer를 구사해 분할된 여러 이미지를 합성했다.
알마는 역시 그래픽 소프트웨어인 페인터Painter로 가공했다. 그래픽 소프트웨어에 의해 가공되는 디지털 이미지는 종래 회화 및 그래픽 디자인의 전 분야에서 착실하게 그 대권을 잠식하고 있다.
캐더린 이캄Catherine Icam의 <Yoona 1>은 디지털 사진을 후지크롬Fuji Chrome 종이에 인쇄했다. 디지털 사진으로 회전하는 얼굴을 포착한다. 형상은 빈 공간과 모핑Morphing의 방식으로 합성되어 배경 속으로 찢겨져 녹아 들어간다. 후지크롬은 종래 슬라이드필름 인화에 사용하던 고해상도 인화지를 일컫는다. 전통사진의 언어가 디지털 언어와 합성되어 새로운 언어로 탄생하는 것이다.
죤 에프 사이먼 주니어John F.Simon.Jr.의 <Color Panel v. 1.5>에서는 호프만Tobias Hoffmann이나 알버스Josef Albers의 화면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 작업이 순차적으로 완성되는 프로세스를 보여준다. 컴퓨터 코드는 그 자체 프로그래밍 언어이면서 미술의 언어가 된다.
로버트 라자리니Robert Lazzarini은 디지털 언어의 차원을 한층 드높이는 작업을 보여준다. 컴퓨터에서 가공한 3D이미지를 현실에서의 3D 이미지로 환원한다. 이 작업 자체도 신비화되어 있지만 해골의 경우 골분을 재료로 사용하는 등 의식적인 신비화가 동반된다.
코디 최Cody Choi은 <Twin Funeral>에서 디지털 이미지베이스를 회화언어로 재구성한다. 장례식 장면들을 웹에서 다운로드 후 확대하여 깨진 이미지를 12미터의 캔버스에 옮긴다. 이것을 데이터베이스 페인팅이라 했다. 착시를 통해 미술이 갖는 재현과 실재-표현의 의미를 장례한다.
작가는 말한다. 어느 날 딸아이를 동물원에 데리고 갔다. 돌아와서 그날 보았던 호랑이를 그리라 했다. 그랬더니 컴퓨터를 뒤져 수많은 호랑이 그림에서 하나를 다운로드받아 약간 땜질한 후 프린트를 하는 것이었다. 이미 딸아이의 세대만 하더라도 컴퓨터에 모든 데이터가 들어 있고 언제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각인된 세대라는 것이다.
인터뷰 내용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예술창작에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한다. 프린팅 기술도 사용한다. 소프트웨어는 어떠한 차원이라도 만들게 해준다. 나는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그리곤 파일을 파괴한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자신의 제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제가 만약 달빛 흐름이 아니라 햇빛확산이라도 이 제작태도는 바꿀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디지털 -프로세스
강주원의 <Point Animation>은 웹 키네틱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화면 위에 도트 혹은 픽셀이라 할 수 있는 점들이 난무하다가 어떤 일정한 질서를 향하여 정열 한다. 글자나 모양을 만드는 과정이 섬세한 감성으로 표출된다.
제니퍼 스타인캠프Jennifer Steinkamp의 <The fall>에서 미술관 창문마다 비디오들을 설치하여 ‘떨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눈일 수도 있고 디지털 픽셀일 수도 있다.
이용백의 <예수와 부다사이>는 모핑기법에 의한 두 이미지의 합성과 분해과정을 보여준다. 파리와 모기가 윙윙거리는 소리를 배경 음향으로 사용한다. 종교의 권위를 되돌아보게 한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해설에서는 사람들이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예수와 부처의 이미지를 만들어놓고 실재처럼 믿고 따르는 맹점을 코믹하게 지적했다고 했다. 더욱 코믹한 것은 서구에서 개조한 이콘의 예수들이 예수로, 부다와 보살이 섞인 이미지들이 부다로 소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참여코너에서는 클레이메이션을 디지털애니메이션으로 바꾸어준다.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한 캐릭터를 움직여가며 비디오카메라로 코마촬영을 한후 정상속도로 재생하면 움직이는 캐릭터가 탄생한다. 리모콘을 사용하여 기계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은 고려대상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카메라의 흔들림에 따라 화면은 ‘인간적으로’ 휘청거린다.
디지털- 시뮬레이션-반어적 상황
문형민은 <무제>에서 표지판이 없는 도시와 약 이름이 적히지 않은 약국 진열대의 약상자들을 보여준다. 정보전달의 수단이 되는 문자를 제거하고서 세상을 바라본다. 과연 우리는 문자라는 괴물의 위광암시나 잠재의식에 침투한 사인의 횡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에바 스텐람Eva Stenram의 <EU palaces: Der Kongelige Slott, Oiso>는 유럽연합 내의 일곱 왕조의 궁전 이미지들을 디지털 가공한다. 창문과 깃발 등을 제거하여 기념관이나 기념품-무덤을 상기하도록 한다는 의도가 있다. 권력을 무효화한다는 해설이 붙어 있다.
카타르지나 코지나Katarzyna Kozyra은 <Boys 2002>에서 남자들은 뒤집혀진 튤립형의 여성상징으로 성기를 가리고 자신의 성적 매력을 뽐낸다. 넵튠Neptune의 조각상 아래서, 신고전주의풍 건물계단에서 노닥거리는 그리스 조각 같은 남자들의 모습은 반어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디지털-시뮬레이션-정어적 상황
문주의 <움직이는 새장>은 회전하는 모니터에도 불구하고 모니터 안의 부부 잉꼬는 평형을 유지하는 고전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유관호와 타카시 고쿠보는 <디지털 숲>에서 앙포르멜Informal을 연상케하는 멀티스페이스Multi-space의 그림 숲을 만든다. 바닥에는 음향센서와 연결된 전구가 덮힌 채로 멀티 레이어를 형성한다. 음악과 귀뚜라미 소리 등의 멀티 사운드에 반응한다.
미하일 쿤제Michael Kunze의 <8th Noon>은 일상의 풍경에 거대한 세트나 변질된 상황을 도입함으로써 초현실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화면 자체로는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에 의한 대상들의 배치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상황은 무미건조할 정도로 디지털화한 오늘의 것이다.
강홍구는 <해수욕장 시리즈>를 통해 뻔한 해수욕장의 상투적인 풍경과 행태를 디지털 구성하여 마치 가공하지 않은 스트레이트 포토처럼 보여준다. 초현실적인 풍경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싱숭생숭함 즉 데페이스망이 지극히 현실적인 것에서 이루어진다는 면에서 본다면 미학적 성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3D와 게임-애니메이션
양만기의 <대화 프로젝트>에는 3D 홀로그램Hologram이 화면에서 떠올라 부유한다. 인스털레이션Installation의 경우 700x700x700cm라면 홀로그램에서도 대작에 속할 것이다. 기술적인 성취로 본다면 아직 상업적인 수준의 샘플을 능가하지는 못하겠지만 오히려 그 점이 예술적 혹은 회화적인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페트라 뫼르직 & 장 프랑소아 모리소Petra Mrzyk & Jean-Francois Moriceau의 <Don't be light>는 아라베스크Arabesque를 연상케 하는 문양이 쉴 새 없이 증식하고 변형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은 선묘에서 입체영상으로 유도하므로 써 일상에서 초현실의 세계를 경험하게 해준다.
밀토스 마네타스Miltos Manetas은 <Abstract Super-Mario>에서 ‘neen’이라고 이름 지은 반어적인 수퍼 마리오Super Mario 게임을 재구성한다. neen은 ‘규정되지 않은 시각예술가 세대들’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규정되지 않는 세대에 대한 새로운 규정인 셈이다. 비디오 게임의 한 장면을 프린트 한 후 마르기 전에 티슈로 닦아낸다. 말린 후에 Fedex라는 기법을 사용하여 이미지를 확장한다.
수퍼 마리오를 보는 아이들은 형광 색 풀 동산에서 졸고 있는 마리오를 주시한다. 어른들은 비디오게임의 한 장면을 암시한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별 볼일 없이 다음 작품으로 이동한다.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왜 언제나 머리를 비튼 풍뎅이처럼 바둥 바둥 움직이면서 구름을 타고 다니는 마리오가 낮잠을 자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만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이기도 하다. 아케이드 게임에서 사람들을 축출하겠다는 것이다.
인터랙티브-터치스크린
인서트 사일런스 & 비요크Insert Silence & Bjork는 자체로서도 스스로 운행하되 터치스크린의 터치를 따라 움직이는 문양을 만든다. 제작중인 비디오의 스틸 이미지를 스캔하여 동영상화한 후 음악을 넣었다. 단조로운 이미지는 서정적 패턴이 된다.
정영훈의 <꽃들>에서는 하나의 터치스크린에서 다른 스크린으로 나비를 ‘던질’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인간과 인류, 나와 사회와의 알고리듬을 진술하고자 하는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것을 혈통 프로그램이라 부른다.
양민하의 <정원>에는 웹 키네틱 물고기들이 부유한다. 먹물을 길게 뿜으며 화선지위를 부유하는 날렵한 은어처럼 느껴진다. 관객은 앞쪽에 놓여진 터치패드에서 물고기를 이동시킬 수 있다. 프로세스는 간단할지 모르지만 수묵화와 같은 이런 애니메이션과 인터랙티브의 구현은 예술적 완성-기술적 성취와 함께 헐리웃 애니메이션에 대적할 상업적 활용도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인터랙티브-센서
김수정의 <Two- eye lands, sky>는 천장의 스크린에 영상을 투사했다. 동작센서에 의해 관객이 감지되면 영상은 비디오 효과기로 조작하거나 세 개의 거울로 조립한 만화경 안의 물체처럼 변형된다.
켄 파인골드Ken Feingold의 <카드의 집 House of Card>에서, 투사된 인형의 머리에게 영어로 질문하면 인형이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하여 답변한다. 인터랙티브 환경에서 언어-의식-감성 등 통하여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이해하는 것을 예술의 전략으로 삼고 있다는 작가는 1991년 이래 예술이란 매체나 도구가 아니라 관객과 함께 창조하는 개념과 경험이라는 신념을 이 작품에서 심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자신의 관심사는 우리의 내면적 실재가 어떻게 외부에 있는 실제의 세계와 교감하는가를 심리적인 방법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홀로그래피와 같은 비물질적 세계가 우리의 몸과 마찬가지로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참 경이로운 세계라고 말한다.
이 인터뷰는 순전히 자신의 작품의 내면적 동기와 작품의 프로세스, 그것이 가지는 인터랙티브의 심리적 철학적 개념적 의미를 논하고 있다. 이번 전시의 주제인 달빛 흐름이나 그 범주인 머리 심장 등은 비록 작품에서 고려되었을망정 언급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서 주제가 없더라도 이 작품들은 제작되고 전시되어 관객들과 인터랙티브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터랙티브- 공유와 참여
아츠히로 이토<Atsuhiro Ito>는 색색의 형광등을 보다가 흰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망막에서 형성되는 잔상을 작품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또 단속적으로 꺼졌다가 켜지는 형광등의 단조로운 음향까지 보는 사람의 의식으로 연결하므로 써 작가와 의식을 공유한다.
폴 존슨Paul Johnson은 R.G.B로 표상되는 디지털 삼원색을 각각의 게임으로 배대한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각각의 게임들은 상호 영향을 미치는 프로그램으로 발전된다. 나아가 이들 게임들은 인터넷을 통한 네트워킹으로 서로 자원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게임의 규칙과 게임장을 만들어주고 게임의 요소들이 새로운 언어와 문법을 창조해나간다는 것이다.
죤 톤킨John Tonkin은 <Elastic Masculinities>에서 관객이 미리 설정된 몇 가지 요소를 변형하므로써 일종의 사이버 성형수술을 가능하게 해준다. 나아가 관객이 자신의 얼굴을 촬영하여 톤킨의 방식대로 변형할 수 있도록 한다.
인터넷
50명의 작가들이 인터넷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 중의 한 화면은 대형화면을 통해 실시간 방송된다. 모니터에 비친 영상은 모니터의 물리적 실체를 가상의 이미지에 파묻어버린다.
죠셉 네크바텔의 <Lunar Voluptuary>는 플래카드를 통해 작품을 설명한다. 자세히 읽어보면 바이러스에 감염된 하드 드라이브가 서서히 깨져가는 과정을 미술관 벽에 투사하여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작품들을 디지털과 인터넷으로 분류했다.
이것은 경이적인 일이다. 200여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국제이벤트에 작품과 해설과 도판이 일치하는 작품이 불과 20여점이라는 사실이 그러하고 주최 측이 제시하는 주제와 범주를 한결같이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또 하나 경이적인 일이 있다. 테크놀로지 자체는 도이칠란드의 도쿠멘타Documenta나 ZKM 등의 활동에 비하여 단순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의 사상과 미학은 보다 인간적이고 미술적으로 느껴진다. 나아가 미술적인 성취와 아울러 상업적인 전망까지 가늠케 하는 작품도 있다.
그리고 비록 전체 작가의 작품은 아니지만 이렇게 물리적인 관점에서 작품을 분류하고서 귀납적으로 그 주제를 이끌어내면 이번 전시의 특징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주제를 Moon TV 혹은 Moon Simulation이라 했더라면 전시의 논리가 훨씬 선명하게 부각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분류와 분석에 의해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은 디지털 환경과 인터넷 네트워킹에서 작가들이 이제 스스로 문법과 언어를 만들어나갈 뿐 아니라 작품 자체가 스스로 자신의 언어를 증식하고 구축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미학적 발전을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이것은 21세기의 미술에 있어서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종래 미니멀 이후 개념미술과 테크놀로지 아트 등에서 ‘관객참여에 의해 마무리되는 분위기’는 불가결의 미학적 요소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이 ‘자체증식의 언어’로 바뀌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수동적으로 작품의 일부분으로 물리적 형상을 빌려주었던 관객이 이제는 ‘감탄하고 감명받는’ 관중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관객과 정서적 반응까지 교감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다.
4. 서정성
한양대학교의 「한국예술철학」수업에서 한 패널의 학생들이 「미디어 시티 2002」를 선택했다. 학생참여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패널 디스커션에서 학생들은 참여하는 수업의 목표에 따라 교재-강의-과목-현장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이 과목은 2002년-2003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보호학문연구 프로젝트로 지정되어 연구기금을 지원받고 있다.
수업은 사회와 세 명의 주제발표자로 표면적인 진행이 이루어지되, 자료-기록-촬영-편집까지 포함되는 총체적 미디어 수업형식을 띈다. 최종보고는 문서와 비디오 혹은 CD-Rom이나 DVD 그리고 파워포인트 등 사용미디어와 참고 정화상 및 동영상을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 학생들은 교수면담과 그룹회의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는 일방 미디어시티취재 및 주최측과의 인터뷰와 함께 발표준비까지 부산한 모습이었다.
첫 학생의 발표는 미디어의 성립배경으로서 아방가르드Avant-Garde를 들고, 피카소Pablo Picasso 및 브라크Georges Braque를 거쳐 뒤샹Marcel Duchamp으로 이어지다가 소비시대의 미학이 이미지로 바뀌게 되는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약간 방만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학생들이 이만큼 의욕적으로 미디어의 배경을 추구하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의욕을 살만했다.
두 번째 학생은 플럭서스Fluxus나 팝아트Pop Art를 거쳐 뉴 미디어New Media를 가능하게 했던 컴퓨터 등을 테크놀로지 아트와 비교했다. 세 번째 학생은 디지털을 달에 비유한 신선함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많은 작품들에 보이는 서정성을 지적했다.
이를테면 달이라는 서정성의 원천이 있고 전시된 작품들에서 도출되는 서정성과 일맥 상통하는 바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도 처음에는 미디어 아트가 프로그래밍처럼 보일 수 밖에 없다는 말까지 인용할 정도로 미디어에 근접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질의가 따른다. 왜 이 발표가 교과-강좌-과목과 연관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답변은 서양이 자연이나 우주를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데 반해 동양인은 물아일체의 동화를 우선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발언이 이어졌다. 많은 작품들에서 서정성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예술철학의 중요한 착안점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패널 디스커션에 참가한 학생들은 연극영화과 2-3학년이었다. 다시 말해서 일반대중과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이다. 비록 각국의 작가들이 출품했다 하더라도 그 주제인 달의 표상에서 인류적인 공감대를 형성했을 때 서정성이라는 요소가 도출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은 전문가적인 비판과 무관히 이번 전시이벤트의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과제는 매우 중요한 단서를 미디어시티 2002에 제공한다고 믿어진다. 즉 일반대중들 혹은 그 정도의 교양을 가진 사람들에게 미디어시티 2002는 달이라는 이름만 제시하더라도 충분히 그 작품을 감상하고 스스로 구성하고 개념을 도출할 만큼 충분한 개념이요, 범주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사족이거나 군더더기일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의미를 붙이더라도 이해하기가 어렵다면 오히려 관중에게 그 해석을 매끼는 것도 이러한 미디어의 경우에 합리적일 것이라는 뜻이다.
패널 디스커션이 끝난 후 지도교수의 총평이 이어진다. 거기에서 우리미술 나아가 미디어의 정체성이란 테크놀로지나 엄청난 장비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땀 냄새에 있다고 판단되었던 20세기의 미학이 간략하게 소개된다.
또한 자칫 국제적인 작가군의 현란한 테크놀로지에 현혹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한국적 서정성의 단서를 이끌어내어 한국예술철학의 한 특징으로 내세울 수 있는 학생들의 예지와 통찰력에 대한 칭찬이 뒤따른다.
이렇게 비전문가 집단이 자의적으로 미디어 미술에 접근하고 칭찬을 통해 심화의 동기가 유발되는 과정에서 미루어볼 때, 미술은 대중들에게 너무나 친근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패널 디스커션Panel Discussion에서 재삼 확인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전문가들의 전문가 의식이다.
미술의 전문가 집단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현학과 오만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었다. 대중은 미술 자체가 아니라 전문가에게 식상하고 그것을 미술에 전가한다. 그렇게 미술을 혐오하고 멀리하면서 말없는 다수의 냉소적인 대중이 된다.
5. 짧은 불평과 긴 평문을
2004년 세 번째 미디어시티전이 열릴 수 있을 것인가. 10분의 1로 삭감된 2002전은 2년후의 전망을 어둡게 한다. 지금부터 2004년 팀을 가동하여 움직이더라도 졸속일 수밖에 없는 전시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크다. 전시 중에 도록이 발간되는 등의 부작용이 재발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외부기획팀에 맡겨지는 전시 이벤트인 만큼 더욱 가변적이다.
그러므로 먼저 2004년 이벤트가 열린다는 가정 하에 2004년 팀과 2006년 팀을 구성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2004년 팀에는 미술관의 큐레이터나 행정요원 및 2006년 팀의 절반정도가 참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06년 팀은 1회와 2회의 실적을 검토하고 작가와 큐레이터 등을 섭외하며 그 과정 과정을 인터넷 전시-기획전-세미나 등으로 발표하도록 하는 방안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충분한 시간을 두고서 많은 의견들에 부대끼면서 진행을 할 때 짧은 불평과 긴 평문이 가능해질 것이다. 최소한 스탭들의 논리결구능력을 검증할 시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장기적인 계획이 수립되면 미래지향적인 비전이 가능해진다. 무궁무진한 아이디어가 가능할 것이다. 하나만 예를 들자. 이를테면 덕수궁 돌담길을 미디어로 무장하려 한다고 하자.
작가의 아이디어와 스케치를 온라인-오프라인에서 공모-전시한다. 미술관은 기업과 연계시킨다. 아이디어가 실현되면 사시사철 실시간 돌담길이 대형화면에 중계된다. 시민들은 대형화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즐기고 미술관측은 원격조정 카메라로 제어한다.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문형 비디오 테입이나 인터넷 파일이 제공된다. 이미지제고를 노리는 기업의 협찬 하에 안방으로 파고드는 미디어의 꿈이 실현되는 것이다. 어찌 그 하나뿐이겠는가.
그러므로 굳이 이벤트라는 이름으로 한정된 기간의 행사를 벌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사전에도 없는 단어나 현학적인 문구를 내세워 대중을 백안시하는 전시를 펼칠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누리고 즐기면서 함께 꾸며가고 개념화해나가는 이벤트를 향해 지금부터 전열을 재정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2008-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