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중국 후한의
환관 채륜이 105년경에 발명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채륜은 기존의 중구난방이었던 종이제조법을 체계화해서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인물로서 그 이전까지 종이와 유사한 물체를 제조하거나 발명하려 한 흔적은 중국 전역에 다양하게 남아있다. 실제로 가장 오래된 종이유물들 중에는 기원전 200년이 넘는것들도 꽤 있었는데, 이런식으로 채후지가 등장하기 이전까지의 종이유물들이 수백년에 걸쳐서 중국 전역에서 수백개이상 발견되고 있을 정도이다.
채륜이 종이의 제조법을 체계화하기 시작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 고대 중국에서는
간독이나
비단에다가 주로 글을 쓰곤 했는데 간독은 너무 부피가 크고 불편했으며, 부유층에서 사용한 비단은 한 두번 쓰고 버리는 것이 왕실에 너무 큰 재정적 부담이 되자 당시 왕실재정을 담당하던 채륜이 그걸 보다못해 비단을 대신할 물건을 찾게 되었다. 당시의 글쓰기 방법은 먼저 죽간에다가 초고를 쓰고 정리한 다음에 그걸 엮고, 이를 통해 글이 완성되면 이를 겸백(글쓰는 흰 비단)에다가 베껴서 최종본을 만드는 식이었는데 겸백에 최종본을 만드는 과정이 언제나 한번에 완벽하게 이루어지는것도 아니었고, 겸백 자체를 기록매체로 쓰는것부터가 왕실수준에서도 상당한 사치였다. 이에 따라 채륜이 전국에서 수많은 장인들과 기술을 동원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채륜지라는 물건이다. 이것을 개발하고, 채륜은 황제로부터 포상을 받고
제후의 직위까지 승진한다. 그래서 채륜의 본명은 모르고 채륜의 이름을 '채후'라고 아는 사람도 많다. 그런고로 '채후지'라고도 한다.
[2]이후에도 종이 제작법이 개량되고 출판의 활성화로 종이의 생산과 쓰임은 크게 늘어났으나, 관청이나 상류층만이 사용할 수 있는 비싼 물품이었다.
[3] 송나라는 관청의 폐지를 팔아 회식 비용으로 쓰는 것이 관례였으며,
[4] 청의 옹정제는 일반 문서에 이면지 사용을 관리들에게 권고하였다.
종이가 있기 전에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는 주로 값이 비싼 흰
비단(
겸백)
[5]이나,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더럽게 무겁고 수납도 불편한 대나무 쪼가리(
죽간), 또는 나무 쪼가리(
목독)에다가 글을 썼기에, 종이의 발명은 학문과 예술의 발달을 촉발한 위대한 진보로 여겨지고 있다. 이외에도 동남아시아권에서는 지역 특유의 넓고 두꺼운 종려나뭇잎을 사용한 패엽경이라는 물건도 존재한다.
공자님이
책을 수레 단위로 읽었네 뭐 이런 말이 있는데
[6], 종이가 없던 당시에는 주로 글이 죽간이나 목간과 같은 무거운 물체
[7]에 쓰였기때문에 정말 저런 식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학자들은 문자 그대로 책을 전부 외우고 다니는 일이 많았다. 죽간에 들어가는 텍스트양이 적은 것도 한몫 했지만 많이 들고다닐 수 없으니 들고 다니는 죽간 하나만큼은 달달 외울정도로 읽어대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유명 학자들의 책들이 현대의 책보다 더 짧은 문장들로 구성되어 간략한 분량속에 핵심내용만 있는 형태 위주로 대다수 존재하게 된 것도 이것의 영향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한국에 종이는 3세기경에 유입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전에는
자작나무의 흰 껍질을 얇게 벗겨서 이를 종이처럼 이용하기도 했다.
고구려와
신라에서 주로 썼다고 하는데,
천마총의
천마도(혹은 기린) 그림도 이런 자작나무의 껍질에 그려진 것. 자작나무 껍질의 기름 성분 때문에 잘 썩지 않고 습기에도 강하며,
[8] 자작나무의 껍질이 재생되면 또 벗겨 쓸 수 있다. 이 종이는 기존의 종이와 비교했을 때 놀라울 정도로 내구성이 강해서 기존의 일반 종이에 비해 수십배는 오래 보관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9] 질겨서 쉽게 훼손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일반 종이에 비해 두껍고 무거운 편이라는 단점이 있다.
[10]고대 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Paper 의 유래)라는 식물을 가공해서 종이처럼 사용했다.
[11] 파피루스의 경우 잘만 가공하면 실제 종이 못지 않은 효율을 발휘할 수 있었기에
중동과
유럽을 아울러 각광받았고 이집트의 전성기 때에는 주요 수출품으로서 매우 선호되었지만,
로마 제국 시대를 거쳐 알렉산드리아를 위시로한 쇄국정책으로 인해 파피루스의 수출이 금지되기 시작한다. 다만, 6세기 경부터는 그래도
이탈리아 등지에서
파피루스를 재배하기도 했고, 때문에
양의 가죽으로 만들어서 상대적으로 값이 비쌌던
양피지 대신으로 파피루스가 엄청나게 많이 이용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갈릴레오 갈릴레이 쓴 저작물 중에도
파피루스로 된 종이에다 저술한 문헌이 있을 정도다.
[12] 중세 서양에서도 카르타 린테아라고 하는 아마포를 종이로 사용한 바 있다. 직물가공과 관련해서 파피루스나 아마지를 종이로 인정하지 않는 시각도 있으나 이건 어디까지나 협소한 시각이다. 실제로 중국의 채륜이 최초로 발명한 종이는 직물과 천을 복합적으로 가공한 종이였으며 마찬가지로 한국의 한지도 직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종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에서 완성된 종이는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사로잡힌
당나라의 제지공에 의해 이슬람 문화권으로 전파되었는데, 실제로 793년 즈음에는 바그다드에 공식적인 제지공장이 만들어졌고 이것이 약 900년대에 들어서 이집트로 유입된 후 1100년대에는
서양에까지 전파되었다. 구대륙과는 독립적으로 남아메리카의 마야 문명에서도 '아마틀'이라는 종이가 발명되었다. 구체적인 시기는 기록으로 남은 것이 없지만 대략 5세기 경에 발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양에서 제대로 된 제지소가 만들어진 것은 이슬람에서 수력 제지소가 만들어진 이후의 일이다. 거기에 공장식 제지소는 끝내 발명하지 못했다. 공장식 제지소는 겨우 100년 후인 13세기에 아라곤 왕국에서 처음으로 설립된다. 이후 15세기까지 유럽 전역으로 확대된 공장식 제지소는 종이의 가격을 폭락시키고 출판 혁명에 크게 기여한다.
[13] 오늘날 중국은 종이의 종주국임을 자부하지만 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를 더 먼저 언급한다.
비정상회담에서 이집트인 참가자
새미 라샤드가 파피루스를 종이의 원류로 자랑한 적이 있는데 중국인 참가자
장위안이 "종이는 중국이 먼저"라고 반론하던 적도 있다. 사실 종이를 영어로 쓴 페이퍼도 이 파피루스에서 나온 말이긴 하다. 다만 비정상회담에서의 논지는 종이의 발명은 파피루스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현대 종이의 원류는 중국의 종이지 결코 파피루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파피루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쇄국정책 이후 유럽지역에서는 크게 보편화되지 못하였고, 한동안 양피지를 중심으로 사용하는 공백기가 이어지다가 이슬람을 거쳐 이집트에 중국의 제지기술이 도래된 이후 무어인들이 지금의 스페인 지역에 제지공장을 만들면서 유럽에 제지기술이 전파되어 일반적인 종이로 쓰였기때문에 현대 제지 기술 자체의 원류를 따지고보면 중국의 종이를 원류로 치는게 맞다. 즉 단순히 기록매체라는 점에서만 따지면 파피루스가 더 오래된건 맞지만, 제지기술의 발전 계통으로 따지면 파피루스를 이용한 제지기술은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쇄국 이후 사실상 끊겨버렸고, 중국의 제지기술 계통을 바탕으로 이슬람, 유럽의 제지기술이 발전한 것이다.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