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출된 기러기아빠의 변(辯)
산에는 진달래 들엔 개나리 산새도 슬피우는 노을진 산골에 엄마 구름 애기 구름 정답게 가는데 아빠는 어디갔나 어디서 살고 있나 ......................
기러기 아빠...
어렸을때로만 생각될뿐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무심코 따라 부르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잊혀진 단어중의 하나인 “기러기 아빠”는 그후 내게는 늘 외로움의 상징이었다.
내가 사회생활을 준비할 무렵엔 실제 “기러기 아빠”를 자주 접하고는 했다. 아빠는 멀리 중동에 돈벌러 가고 집에는 엄마랑 아이들만 남아있는 선배들의 모습으로 내게는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기러기아빠의 원조는 1960~1970년대 월남 파병용사라고도 하고 해외건설붐을 타고 가족을 떠나 홀로 사우디아라비아등 중동에서 일을 하던 산업전사들이라고도 하는데 그 당시에 유명했던 가수 이미자씨가 애절한 목소리로 불렀던 노래 ‘기러기아빠’를 떠올리게 된다.
기러기는 평생 일부일처로 지내고 뜨거운 부부애가 특징이어서 결혼식의 예패로 쓰이며 암수 중 한 놈이 먼저 죽으면 짝 잃은 놈이 구슬피 울며 갈대숲을 서성인다.
항상 같이 있어야 행복한데 한쪽이 떨어져 있는 안타까움이 커서 혼자 남아 있는 아빠를 ‘기러기 아빠’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기러기 아빠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불릴 정도로 인기있는 직업으로 해외근무수당으로 미화 천불이상을 따로 받았으니 국내 대기업의 직원의 월급이 이십만원 정도 할때로서는 파격적임을 틀림없었다.
이런 현상은 경제적으로 여렵지 않게 기반을 잡기도 해서 신랑감 후보 직업으로 몇 손가락안에 들어갈 정도였다.
지금의 교육형 기러기 아빠와는 사뭇 다른 생계형 기러기 아빠. 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가장이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 없다.
그 특권(?)을 누렸던 건설족, 막말로 노가다. 원래 일본말 도가다(土方)를 뜻하는 것이지만 요즈음에는 건설 현장에서 기능공이 아닌 막일을 하며 하루벌어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 인생'을 뜻하기도 한다.
나 역시 건설족이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건설현장에서 근무해야 했던 친구들 대부분이 중동 기러기 아빠가 되었었지만, 국내에서만 근무했던 나 역시 그런 생활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소위 주말 부부 또는 격주 부부라는 말까지 스스럼 없이 들어가며....
나보다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하니 내 자식인것만은 분명한데 돌이켜보면 어떻게 애들을 만들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전공이 토목공학인 덕분(?)에 건설 현장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았고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
신혼의 맛을 알기도 전에 이별아닌 이별을 겪어야 했었고 특히 분당과 일산 신도시가 건설될 무렵에는 그 정도가 극에 달해서 회사 숙소에서 살림을 차린거나 다름 없었다. 다행히 식사는 물론 방 청소 그리고 빨래까지 회사에서 해결해 주어 사는데는 불편한 것이 없었지만 가족과 소원해지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당당히 “내가 집밖에 나가 있으면 남의 남자라고 생각하라”는 말로 서로의 처지를 받아들이라고 했지만 나 자신은 물론 아내에게 위로가 될리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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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네 식구는 서울로 이사했다. 연희는 아이들 교육 문제가 늘 마음에 걸린 듯 했고 작은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도 눈앞으로다가와 더 이상 고향에 머무를 수도 없었다. 농장에는 처분 되지 않은 나무들이 조금 남아 있었지만 큰 미련을 두지 않았다. 연희는 땅도 좀 쉬어야 한다며 다음 일은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 여유를 부렸다.
나는 이젠 가족은 같이 살아야 한다며 서둘러 새로운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아이들은 달라진 도시 생활이나 학교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고 연희는 촌티를 벗어갔다. 나는 다른 현장으로 옮겼지만 수도권이라 집에서 다닐 수 있어 다행이었고 그러한 변화 속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내 마음도안식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농장은 언제나 연희의 몫이었다. 그 동안 연희는 웬만한 일이 아니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으며 투정이나 불평도 하지 않았다. 내가 정말 괜찮으냐고 물었을 때에도 내 생활에나 전념하라고 할 뿐 들어설 틈 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한 연희의 태도는 나를 무시한다거나 자신의 능력을 믿어서가 아니라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안감의 표현이었고 나에 대한 당부이기도 했다. 연희는 내가 오랫동안 그리고 반복되는 현장 생활에 지쳐 가고 있었고 또 갈등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내가 무슨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불쑥 한마디 내뱉은 이후로 그 생활을 얼마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연희에게 그것은 생각하기 조차 싫은 것이었다.
야전 사령관으로 일컬어지는 현장 소장은 팔방미인 소리를 들어야 했다. 현장내 품질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외부의 바람막이도 잘해야 했고 정보 수집 능력도 있어야 인정 받았다. 특히 현장 주변지역에 대한 개발 정보는 회사의 사업 우선 순위를 바꿀 정도로 민감했고 정보의 선점은 신규공사의 입찰이나 후속공사의 수주 과정에서 연고권이나 기득권으로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래서 정보 수집은 현장 소장의 또 다른 업무중의 하나였으며 항상 주변에 눈과 귀를 집중시켜야 했다. 동료 현장 소장은 회사를 그만 두면서 자신의 위치가 그렇게 막강한지 몰랐다고 푸념했다.
내가 겪은 것도 다를 바 없었다. 착공할 때부터 시시 때때로 들어오는 청탁(請託)은 참 당혹스러웠다. 하청업체 소개부터 자재납품, 현장 일용직 고용까지 무차별이었으며 현장 직원의 식사를 위한 ‘한바’도 이권 중에 하나였다. 하나 같이 커다란 배경을 동원했다. 지역구나 건설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정계의 실세가 거론 되기도 했으며 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행세하는 사람도 늘어 갔다. 내 권한 밖의 일이거나 해결하지 못한 것이 항시 쌓여 머리를 무겁게 했다.
“잘 알았습니다. 힘닿는 데 까지 해보겠습니다.”
부탁이 들어오면 내가 할수 있는 말은 그것이 고작이었다.
“김 소장만 믿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당사자도 모두 실현되리라고 믿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중요한 결정은본사에서 했지만, 본사 핑계를 대거나 곤란하다고 하면 눈총 받기가 십상이었다.
현장 소장의 관록은 별을 얼마를 달았는가에 나타나기도 했다, 먼지 난다고 고발 당하거나 시끄럽다고 주민들이 항의라도 하면 최소한 벌금형을 받아야 하고 안전사고가 나면 감방에 가야 해야 했다. 또 준공 후 예상했던 이익이 나지 않거나 하자(瑕疵)로 문제가 생기면 그만 둘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것을 포기 할 만큼 감당하기 어렵다거나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내가 힘들어 하고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언제까지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었고 그렇게 살아갈 자신이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 결혼 이후로 연희와 나는 부부라고는 하지만 많은 시간을 떨어져 살아야 했다. 내가 이 현장 저 현장으로 떠돌아 다닐 동안 연희 혼자 아이들을 키워야 했으며 어쩌다 얼굴이라도 보게 되면 아이들은 내게 오기는 커녕 울먹이며 엄마 품에서 떠나지 않았다. 신혼 초에 내가 연희와 떨어져 현장 숙소에서 머문 데도 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언제 또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떠돌이의 삶이고 부평초 인생이었다.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라도 끝까지 있는다는 보장이 없었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잠시 늦추어지는 것일 뿐 언젠가는 다른곳을 찾아가야 했다.
연희 또한 어릴 때부터 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떠돌아 다녀야 했다. 그것이 그녀의 운명인지 나를 만난 후에도 그지긋한 유랑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여러 사람 고생시키지 말자. 차라리 혼자 떠돌자.’
나는 내 가족에게 까지 그러한 고통을 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두번 찾아오는 집은 이미 나의 공간이 아니었고 잠깐 어디에 들렀다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집이 낯설기만 했고 옆에 잠든 아내가 불편하게 느껴져 잠을 설치기도 했다. 가족으로부터 유리(遊離)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이들과 어느 한때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했고 아내도 아이들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상의 하지 않았다. 막상 같이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아이들이 어떻게 커가고 있는지 알 수도 없었고 가끔 아내에게서 듣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관심을 쓸 여유도 없었다.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가끔 외식을 같이 하거나 장난감이나 사주는 것 뿐이었다. 아이들에게는 물론 아내에게도 이방인(異邦人)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무를 가꿀 때도 마찬가지로 돈 몇 푼 쥐어준 것 이외에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의 도움이 있었지만 대부분 연희가 결정하고 도맡아 했으며 나는 가끔 둘러보는 게 고작이었다. 서로의 일에 충실한다는 건 핑계에 불과했다. 연희를 위한 취미 활동이나 여가 생활은 꿈도 꾸지 못했고 그 흔한 영화 구경 한번 같이 가지 못했다. 그리고 아이들과 같이 뒹굴어 주지도 못했다. 그것은 내게 예정된 운명이었고 그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을 뿐이었다.
연희를 만난 후 나의 구애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연희는 좀처럼 내게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고 마음을 쉽게 열지도 않았다. 나를 만나면서도 생각이 복잡한 것 같았고 갈등도 하고 있었다. 연희는 나의 생활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조경회사에 다니고 있었던 터라 남자들의 공사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거친생활에 호감도 없었고 더구나 부평초처럼 떠돌아 다니는 인생들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생활을 꿈꾸지 않았다고했다. 신혼 초부터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을 새벽에 떠나 보내고 나면 그 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도 없는 빈방에 들어가기가 그 무엇보다 싫었다고도 했다. 아이 둘이 태어난 이후에도 몸만 바빴지 달라진 것은 없었고 그러한 생활을 언제까지 할 자신도 없어졌다. 나무를 기르자고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무엇이든지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고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고 돌파구였다.
서울로 올라와 같이 생활하게 된 이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혼자 살아 오며 길들여진 습관에 익숙해져 있었고 아이들이 떠들거나 저희들끼리 싸우기라도 하면 자신도 모르게 예민하게 반응하고는 했다. 연희는 그런 나에게 불만이 없을 수 없었지만 어떠한 부탁이나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다만 일요일 저녁 즉 일주일에 하루,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내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아파트 단지 내 부부모임으로 매주 일요일 저녁에 모여 볼링이나 식사도 하기도 했는데 내가 연희를 위하여 시간을 할애 하는 것은 그것이 유일했지만 그 약속도 반밖에 지키지 못했다. 가끔 미안한 생각이 들면 쉬는 날 새벽 사진 찍는 것이 유일한 취미인 연희를 차에 태우고 목적지도 없이 돌아 다니다가 점심 때면 돌아오기도 했다. 아직 아이들이 여려서 집을 오래 비울 수는 없었지만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오직 그것 뿐이었다.
“한 일이년 백수 생활 해보는 게 소원이다.”
마누라 일이나 도와 운전을 해주거나 아침 저녁 가게 문을 열고 닫는 셔터맨이 부럽다고도 했다.
“끔찍한 소리 하지도 말아요.”
연희가 펄쩍 뛰며 말을 막았다.
“그냥 해 본 소리야.”
“하긴 우리가 좋아서 사는 건지 아니면 아이들이나 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는 건지 잘 모르겠어."
이러한 연희의 푸념을 들을 때면 나 역시 가슴이 답답해지고는 했다.
< 중략 >
<건설 근로자>
IMF 사태가 닥친 지 얼마 후 나는 직장을 그만 두었다. 당시 현장소장(現場所長)으로 근무하던 공사가 마무리 되자 마땅히 갈 만한 자리도 없었다.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소장급은 더욱 그러했다. 수주(受注) 물량은 급격히 떨어졌고, 회사에서 분양하는 아파트도 연체와 해약 사태로 회사의 자금 사정이 한계에 달한 듯 했다. 자재 구입이나 장비 임대도 현금 거래가 아니면 불가능했고, 어음은 받지도 않았다.
현장의 어려움은 더 심했다. 중장비에 들어가는 유류는 인근 주유소에 한달 치에 해당하는 현금을 예치해 놓지 않으면 받을수 없었고, 주유소에서도 현찰이 아니면 정유사에서 기름 공급이 안 된다며 아우성이었다. 그 동안 거래해 왔던 문방구나 사진관도 마찬가지였으며 외상 거래는 꿈도 꾸지 못했다. 어느 현장 소장은 자신의 돈으로 현장을 운영하고는 나중에 본사에서 받기도 했다.
협력 업체의 연이은 부도(不渡) 사태는 매일 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공사 대금은 이미 지불 했지만 노임(勞賃)을 제대로 못 받은 하청업체의 노무자들은 먼저 책상부터 엎었다. 계약조건(契約條件)이고 뭐고 자리 깔고 누우면 그만 이었다. 관청에서나 무슨 의원 행세 하는 자들은 빨리 해결하라고 목소리만 높였지 제대로 된 해결 방법하나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회사에서 어느 정도 부담해야 했지만 그것 뿐 아니었다.
새로 발주한 공사에서는 발주처(發注處)에서 선금급(先金給)을 주어 회사의 자금난을 덜어주고 있었다. 어느 정도 선불을 받고 공사하는 것인데 이 돈은 협력 업체에도 나누어 주어야 했다. 그런데 선금을 받은 협력 업체가 부도가 나서 파산했고 업주는잠적했다. 회사는 손실을 입었고 현장 소장은 그 책임을 져야 했다. 발주처나 본사에서도 법이나 계약조건에 의해서 승인한 것으로 그건 현장소장이 책임 질 일은 아니었지만 그 불똥은 엉뚱한 데로 튀었다.
회사의 구조조정(構造調整)이라는 칼날 앞에 누구도 무사할 수 없었다. 나는 한 지방의 공사 현장으로 발령 받았다. 그 현장은 저가낙찰(低價落札) 현장으로 회사에서는 후속 공사를 수주할 목적으로 저가에 투찰(投札)하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애물 단지에 불과했다. 많은 사람이 못 견디고 회사를 떠났다. 기업의 구조조정이라는 것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이른바 군살 빼기였지만 실제는가장 손쉬운 것으로 사람 줄이는 것이 전부였다. 제일 먼저 대상에 오르는 것이 현장 요원이었고 다음이 연구직이거나 기술직이었다. 관리직은 언제나 그런 풍파에서 안전했고 소위 힘깨나 쓰는 기획실이나 비서실은 꿈적도 안 했다.
내 자신에 대한 한계를 느끼며 초라한 미래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당장 뾰족한 수가 없었지만 이대로 뻔히 눈뜨고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디가 끝인지는 몰라도 새로운 시작을 해 보자고 결심했다. 회사에 명예 퇴직을 신청하고 털어 놓았을 때 연희는 무척 황당해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슨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지만내게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실직자가 많은 듯 했다. 아이들도 눈치챈 것 같았다. 텔레비전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로만 듣다가 우리집도 닥치는구나 하는지딸 아이가 눈물을 글썽였다. 큰 아이가 학교에서 실직자 가정에는 급식비를 면제 해준다고 신청 용지를 가져왔다. 나는 창피한 것이 아니라며 너희들과더 많이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랬다고 했다.
"‘저는 괜찮아요"
그렇게 대답하는 아이는 반에 실직자 가정이 많다며 신경 쓰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는 연희의 마음은 착잡한 듯했다.
<流景의 장편소설 /해바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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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퇴직이라는 명예를 안고 회사를 그만둔지 일년이 조금 더 지나 우리 가족은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나는 기러기 아빠에서 완전히 퇴출되었다.
직장을 그만두고나서는 그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들을 보러가거나 그동안 미루었거나 하고 싶었던 일, 그리고 골프 배운답시고 연습장에서 하루의 반을 보냈기 때문에 집에 붙어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 시간들은 꿀맛같은 하루하루였고 그 얼마간의 백수 생활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캐나다에서의 일상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하루의 반이상으로 늘어날수 밖에 없었다. 특히 비지니스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족과 함께라는 말을 실감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따라 달라진 생활환경은 오히려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내와도 자주 마주치게 되고 부딪히면서 때로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했다.
물론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만 원래 누가 옆에서 간섭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에다 사소한것 까지 혼자 모든것을 결정하며 살아온 자유로움에 어떤 구속감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요령도 터득하기 시작했다. 교묘하게 마주치는 것을 피해가기도 했고 특히 아침 저녁으로 일하는 시간이 서로 다를때는 얼굴을 마주치는 것도 잠깐이었다. 특히 새벽에 일을 하게 될때는 다른 방에서 자는 서로에 대한 배려(?)도 자연스러워졌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 아빠는 그 무엇보다는 좋은 최상의 선물이었다. 지금은 머리가 컸다고 살갑게 굴지도 않지만 아이들에게 언제나 나는 “빽”이 틀림없다.
아이에게 아빠는 지켜만 보고 있어도 든든하니까…
이민와서 온 가족이 캐나다에 살면서도 기러기 아빠는 적지 않은 것 같다. 집이 대도시이고 내가 사는 동네 근처에서 비지니스 하시는 분의 말이 생각난다. 집에 다니러 가면서 와이프한테 공항에 차가지고 나오라고 전화했더니 골프약속 때문에 못나온다고 했다면서 “몸이 멀이지는니까 마음도 멀어지더라” 라는 넋두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면서 자신은 여기서 살고 싶지만 아이때문에 쉽지 않다면서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면 이쪽으로 이사올거라고 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짝잃은 기러기 아니 멀리 떨어져 있는 짝을 기다리는 기러기는 언제나 슬프다. 마음 한구석엔 늘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남아있다. 이 공허함을 메워나가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가족 이외에 그 어느것도 대신 할수 없고 다른것이 채워져서도 않될 것이다. 시간이 흐른뒤 제일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퇴출된 기러기 아빠 똘아씨
윗글은 한국에 살면서 가족과 떨어져 살았던 흔적 그리고 이민을 통해서 함께 하게 된 이야기입니다
기러기 부부가 되어야 하는 오늘의 현실은 우리 모두의 슬픈 자화상이고 기러기 아빠나 엄마는 모두 힘드신 분들입니다
누구나 삶의 목표와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을 것이고 때로는 잠시이긴 하지만 원하지 않은 길을 가게 되는 것 또한 인생입니다.
기러기 부부는 건설업 종사자나 해외에서의 자녀교육 때문에 떨어져 사시는 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도 교원 공무원 직업군인분들이 그러하고 전국 곳곳에 사업체가 있는 기업에 종사하시는 분들 해외가 사업장인 건설업 그리고 무역업에서 일하시는 분들 또한 중국이나 동남아의 사업장에서 근무하시는 분도 마찬가지지요.
할 수 있다면 기러기 아빠, 엄마가 되지 말아야겠지만 불가피 한 선택을 했다면 비록 함께 하는 시간이 적더라도 가정이라는 가치가 우선된다면 외로움은 극복할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분이 더 힘든것은 사실이고 허전함이 고통으로 다가온다면 그것은 잘못된 선택일수 있습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러한 생활에 대한 회의나, 더 나아가서 서로에 대한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는 때가 오게 되면 과감히 퇴출당하십시요. 기러기 아빠, 기러기 엄마에게서...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이 길어지면 나중에는 같이하는 시간들이 불편하게 느껴질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껍떼기만 남을수도 있으니까요.
가정에서 부부와 자식은 어느것 하나 소홀히 할수 없을뿐더러 편중될수 없는 소중한 가치이고 가족의 의미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그 구성원이 함께 살아야하는 당위성은 그 어느것 보다도 큽니다.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가 희생해야 한다거나 더 나아가서 버려야 한다면 가족이라는 의미를 벗어난 참 슬픈일입니다. 부부 당사자는 물론 아이들에게도…
쉽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선택의 문제입니다. 세상에는 모든것을 다 누리며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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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소설에서 인용한 부분은 저의 직접적인 경험이 아닌 하나의 사례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10여년 전에 이런 정보와 삶에 대한 여려 의견들을 알았으면 얼마나 행운이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일주일동안 많은량의 비가 오는 밴쿠버 우울하기보다 반가운것은 조금은 적응이 되었다는 것이겠지요.
저도 기러기 5~6년하다가 이쪽으로 비지니스를 옮겨 그냥 눌러 앉았습니다.
기러기 청산 잘하셨습니다.
제가 사는 알버타주에는 비대신 눈보라입니다.
영상과 영하의 날씨가 그렇게 차이가 나네요
@똘아씨 알버타 비지니스 찾아 많이 다녔습니다. 반갑습니다
노래도 구슬프고..벤쿠버의 빗방울로 마음도 울적해지는데..기러기 이야기 하시니...ㅎㅎ..
어느덧 고국산천 떠나 10여년 세월은 흐르고..중장년에서 노년으로..세월만 흘러가니...ㅋ..
애들은 다 성장해서..애들 키우는 재미도 없구...지들 조은 짝 만나 행복하면 조을듯 하구...추천...꾹..!!!!.
타국사는 재미도 이젠 별로이구...맨날 비만오네..하면서 꿍시렁을 ..내달에는 서울이나 나가 볼꺼나? ㅎㅎ..ㅋ.
날씨가 꿀꿀하면 마음도 갈아앉습니다. 다음달이면 밴쿠버날씨도 좋아지지 않나요?
그전에 서울에 나가셔서 한바퀴 돌고 오십시요.
비가와서 집에 빈둥거리니까 주방 칼이 무디다고 날세우라네요
오늘은 골프대신 칼가는것으로 하루를 대신합니다 우울할 시간이 없네요 저는 포트무디에 살아요 소주생각나면 연락주세요
기러기 아빠...하기 싫어서 이민온 듯도 합니다...
사랑 하는 딸 유학보내구..마실 오듯 가볍게 왓지만..살다보니 10년이예요..ㅠㅠ..
뭐 하러 이민왓노? 저에게 매번 질문하구...잘 온것인지..ㅎㅎ..내만 한국타령 하는 듯..ㅎㅎ..
몇년 살아보구..돌아가려 햇건만...것두 마음대로 안되구요...ㅋ..서울- 벤쿠버..양쪽살림으로 ...ㅋ..
10년이 곧 ㅡ
2-5년 되기도 쉽습니다 ... ㅉㅉ
말씀하신 사례들을 살펴보니 생각보다 비자발적 (직장에 의해 어쩔 수 없는) 거리기 가족이 많군요.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게 가족일텐데 행복을 위해서 떨어져서 살아야 한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산업이 다양해지면서 직장인들의 기러기생활이 늘어나는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때는 같이 살수 있었지만 그 지역에서 근무기간이 짧다보니 이사를 자주해야 하니까
나중에는 지치더군요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어쩔수 없이 기러기가 될수밖에 없었지요
공감하는 부분이 참 많았어요.
40년도 훨씬 넘게 유럽에 사는 나 자신은 기러기 가정과는 멀지만, 제 주위에선 많이 보아왔지요.
70년대 초에 중동으로 떠난 지인, 식구들은 영국에 데려다 놓고 자신은 늘 사우디로 일 다니던
그런 분이 계셨었죠. 그렇게 40여 년을 사셨는데, 부인의 향수병이 심해 한국으로 완전 귀국하셨어요.
영국에서 학위 받은 아들도 한국에서 자리 잡고....
그런데 남편분은 한국에서 얼마 사시지도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오히려 건강이 안 좋아 고향으로 돌아간 부인은 아직도 건강히 살아 계시고요.
평생을 기러기 가족으로 살다가 마지막으로 한국에 모여 살자고 했더니
이번엔 하늘이 막고 말았네요. 운명......
부부의 인연이 거기까지라면 너무 안타깝네요
세월이 기다려주지 않는 것인 인생인가봅니다.
이런삶 저런삶,...모든것이 미완성,... 휴먼도 삶도,...완벽함을 결코 없나 봅니다,...글 잘 읽었습니다.
완벽한 삶을 추구하지만 완전하지 못한것 또한 인생이겠지요.
삶의 터전인 직업 그리고 소중한 가족 모두 합께하기가 점점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댓글 다신 분들의 진솔한 이야기에 힘을 얻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