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독서/ 강세화
안 그래도 물러난 지 오래되어
하릴없이 들앉은 처지로
더구나 시절이 그래서 나다니기도 눈치 보여
어차피 남아도는 시간
책장 앞에서 얼쩡거리지만
그 속에 깊이 들어가기가
예전처럼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원대한 포부를 품은 것도 아니고
능력이나 지식을 과시할 생각을 하지 않아도
무턱대고 열중하던 독서 생활이
언제부턴지 어영부영 게을러졌다.
전에 없이 날씨가 맘에 걸린다거나
세월 탓에 눈앞이 흐린 이유를 댈 것도 없이
끼니때처럼 익숙했던
오랜 습성이 까닭 없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밤낮으로 어루만지고 손때가 묻은
오래된 친구들이 멀찍이
기가 죽어 얌전하게 눈치를 보고 있다.
그러면서 궁금한 마음은 살아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어떤 구절에 이끌려
욕심을 내고 선뜻 거두어서
기껏 데려다 앉혀놓고는 그렇게
살갑게 보살피지 못하는 것을
미안한 말로 사과하기도 그렇고
한때 왕성한 취향으로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아무 책이나
코를 박고 속속들이 파고들었던 적이 언제인지.
‘안광이 지배를 철’하는 의지로
눈을 비비고 밤을 새웠던 때를 말하면
누가 믿을지.
- 강세화,『게으른 독서』(울산문학)
거룩한 독서 / 배영옥
비석은
한 줄로 읽는 망자의 자서전
이름과 문중
그리고 매장 연도만으로도
일대기를 알 수 있다
자간은 좁고
행간은 넓다
짧은 주석 하나 없이
한 생애가
저리 일목요연할 수 있다니
저 두껍고 무거운 책 앞에선
누구도
비평을 달지 못하리라
- 배영옥,『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문학동네)
오래된 독서 / 김왕노
서로의 상처를 더듬거나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누구에게나 오래된 독서네.
일터에서 돌아와 곤히 잠든 남편의 가슴에 맺힌 땀을
늙은 아내가 야윈 손으로 가만히 닦아 주는 것도
햇살 속에 앉아 먼저 간 할아버지를 기다려 보는
할머니의 그 잔주름 주름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도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한 독서 중 독서이기도 하네.
하루를 마치고 새색시와 새신랑이
부드러운 문장 같은 서로의 몸을 더듬다가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는 것도 독서 중 독서이네.
아내의 아픈 몸을 안마해 주면서 백 년 독서를 맹세하다
병든 문장으로 씌여진 아내여서 눈물 왈칵 쏟아지네.
- 김왕노, 『그리운 파란만장』(천년의시작,)
일곱살 때의 독서 / 나희덕
제 빛남의 무게만으로
하늘의 구멍을 막고 있던 별들, 그날 밤
하늘의 누수는 시작되었다 하늘은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것이었던가 별똥별이
떨어질 때마다 하늘은 울컥울컥 쏟아져
우리의 잠자리를 적시고 바다로 흘러들었다
그 깊은 우물 속에서 전갈의 붉은 심장이
깜박깜박 울던 초여름밤 우리는 무서운 줄도
모르고 바닷가 어느 집터에서, 지붕도 바닥도 없이
블록 몇 장이 바람을 막아주던 차가운 모래
위에서 킬킬거리며, 담요를 밀고 당기다 잠이 들었다
모래와 하늘, 그토록 확실한 바닥과 천장이
우리의 잠을 에워싸다니, 나는 하늘이 달아날까봐
몇번이나 선잠이 깨어 그 거대한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날 밤 파도와 함께 밤하늘을
다 읽어버렸다 그러나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가
하늘의 한 페이지를 훔쳤다는걸,
그 한 페이지를 어느 책갈피에 끼워 넣었는지를
- 나희덕, 『어두워진다는 것』(창작과비평)
유월의 독서 / 박준
그림자가
먼저 달려드는
산자락 아래 집에는
대낮에도
불을 끄지 못하는
여자가 살고
여자의 눈 밑에 난
작고 새카만 점에서
나도 한 일 년은 살았다
여럿이 같이 앉아
울 수도 있을
너른 마당이 있던 집
나는 그곳에서
유월이 오도록
꽃잎 같은 책장만 넘겼다
침략과 주름과 유목과 노을의
페이지마다 침을 묻혔다
저녁이 되면
그 집의 불빛은
여자의 눈 밑 점처럼 돋아나고
새로 자란 명아주 잎들 위로
웃비가 내리다 가기도 했다
먼 능선 위를 나는 새들도
제 눈 속 가득 찬 물기들을
그 빛을 보며 말려갔겠다
책장을 덮어도
눈이 자꾸 부시던
유월이었다
- 박준,『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
캄캄한 독서 / 김명인
책장을 펼쳐놓고도 하루 종일 글자가 눈에 들지 않았으니
이 생각도 이제 덮어야만 할 갈피
겨울로 드는지 서둘러 연구실 창밖이 지워지고 있다
저만치 어둠 속으로 혼불인 듯 불빛 한 덩이 날아간다
이런 시간에는 누군가 곁에 바짝 붙어 서서 묻는다
채움과 비움의 차이는 무엇이냐?
늦가을 저녁은 연무로 채워지고 나는 천천히 비어서
창밖 나무들과 스산하게 지우는데
나 모르는 시절의 골똘함, 그 메마른 집착이
탁류 훑고 가는 건천 바닥인 듯 가슴을 저민다
그리하여 가지 휘는 바람 소리
감고 푸는 귀가 있다 하자, 한 귀는
아우성 속으로 퍼뜨리고 또 한 귀는
침묵 속으로 닫아거는 걸
나는, 어떤 전말에도 비켜서느라 그 풍파에
얹히고 싶지 않았다
어둠은 때로 빈자의 꿈을 몰아 반란의
활자들을 키운다, 동행할 수 없을 때
그리움 따윈 꺼내놓지 말아라, 쥐어뜯어야 할 듯 숨 가빠와도
후회는, 끝내 가담하지 않았던 그 망설임 판독하는 것
- 김명인, 『여행자나무』(문지)
연못의 독서 / 길상호
그날도 날아든 낙엽을 펼쳐들고
연못은 독서에 빠져 있었다
잎맥 사이 남은 색색의 말들을 녹여
깨끗이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초겨울 가장 서둘러야 할 작업이라는 듯
한시도 다른 데 눈을 돌리지 않았다
침묵만 남아 무거워진 낙엽을
한 장씩 진흙 바닥에 가라앉히면서
물살은 중얼중얼 페이지를 넘겼다
물속에는 이미 검은 표지로 덮어놓은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연못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오래 그 옆을 지키고 앉아 있어도
이야기의 맥락은 짚어낼 수 없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나는 그림자를 뜯어
수면 아래 가만 내려놓고서
비밀처럼 깊어진 연못을 빠져나왔다
- 길상호, 『우리의 죄는 야옹』(문학동네)
게으른 독서/ 류윤
스마트폰에 혼을 빼고
헛되이 살다 보니
계절이 오는지 가는지
모처럼
교외로 드라이브 나선 길
자연의 책을 펼쳐
게으른 독서나 해볼까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
봄비 촉촉
자연의 책갈피 펼쳐
아껴 읽다보면
비발디의 사계
음표들 뽀족뾰족 돋아나고
씀바귀 냉이 지칭개
지난 혹한을
어금니 악물고 이겨낸
미약한 신음소리 들리네
종횡 무진의 들판을 잇대고
두르르
재봉틀 소리로 박아놓은
초원의 책갈피 펼치는
발로 읽어내는
게으른 독서
류운모 『게으른 독서』(시산맥)
[출처] 시 모음 529. 「독서」|작성자 -바람아래
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게으른 독서는 게으른 찾음이기도 할라나... 드문드문 들어와 자리나 안 잊고 사는 시간이 무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