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 & Gray - Run
[이동혁] 미소의 동화
1. 백만분의 일 확률로
1.
설마하던 일이 일어났다. 손에 힘이 풀리면서 굽던 피자빵이 발등 위로 떨어졌다. 늘어진 마요네즈와 케첩이 크록스를 더럽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안경을 앞치마에 문지르고 다시 꼈다. 핸드폰 액정 화면을 확인했다.
<4, 2, 2, 4, 5, 3>
핸드폰 케이스 뒤에 구겨넣은 종이를 꺼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과연 이 종이가 억소리 나는 값어치를 갖느냐 아니냐의 기로에 섰다. 종이에 쓰인 숫자를 천천히 읽어 내렸다.
"사..이...이..사..오..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일치했다. 발에 뭉글하게 밟히는 피자치즈 덩어리에도 웃음이 새어나왔다. 앞치마와 모자를 벗어던지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가장 끝칸에 앉아서 소리를 질렀다.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씨벌!!!!!!! 당첨됐어!!!!!!!!"
제 606회차 연금복권의 당첨자. 20년씩 월 500만원의 주인공. 내가 되었다.
2.
차분히 '그 날'을 떠올렸다. 그 날은 분명 그저 그런날이었다. 딱 한가지만 빼면. 오전 다섯시 십분에 맞춰놓은 알람에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평소라면 벌떡 일어나서 씻었겠지만 떨쳐지지 않은 꿈의 여운이 있었다. 꿈에서 분명 영주이모가 나왔다. 남분할머니의 과수원에서 이모와 내가 사과를 따고 있었다. 사다리에 올라탔다가 잠시 힘들어서 사다리 위에 앉았다. 꿈에서 깜빡 졸고 고개를 든 순간 빨간 사과들이 모두 금색 사과로 변해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만져서 사과를 배어 물었다. 사과에는 잇자국만 나고 입 안으로 밀려들어오지 않았다. 사과 모양을 한 금이었다. 나는 꿈에서 소리를 지르며 깼다.
"복권. 복권 사야돼."
직장을 다니고 나서부터 토요일까지 생명연장을 하려면 복권을 샀었다. 그것도 한 2년갔나, 차라리 그 돈으로 감자떡을 사먹겠다는 마음으로 복권에 흥미를 잃었다. 하지만 오늘 꿈은 범상치않았다. 분명 신이 내게 주신 찬스라고 생각했다. 생각을 하느라 빨리 씻지못해서 머리 감는 것을 포기했다. 그날 출근해서 하루종일 빵을 구우면서도 복권 생각밖에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복권가게로 달려갔다.
"연금복권. 연금복권 주세요."
인생은 한 방이다. 일확천금을 노린다. 침을 꿀꺽삼켰다. 꿈 이외에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감정과 확신이 들었다.
3.
화장실에서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나니 시원해졌다. 청소 어머님이 무슨 일 있냐며 화장실 문을 두드릴 때야 아무렇지 않은척 칸에서 나왔다. 별일 아니라며 인사하고는 제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손목이 시큰거릴만큼 빵을 굽지 않아도 되고, 골머리를 앓으며 스케줄 근무를 짜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 일을 하지 않아도 됐다. 월 500만원, 세금을 뗀다해도 400만원이 통장에 따박따박 꽂힐텐데 무슨 걱정인가.
퇴근하자마자 주임기사님과 전화를 했다. 안그래도 손목수술 때문에 휴직을 할지 사직을 할지 기로에 서있는 상태였다.
"주임님. 오늘로써 일단 지원기사 일 끝났으니까. 저 이제 사직서 쓸게요."
"미소씨. 손목이 많이 아파?"
"그건 아니고... 그래도 결정할 때까지 편의 봐주셔서 감사해요."
손목 대신 심장이 아파요. 너무 쿵쿵뛰어서요. 뒷말은 잇지 못했다. 주임님이 보내준 사직서를 누구보다 빠르게 작성해서 메일로 보냈다.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당장 정리해야할게, 계약기간이 두달남짓 남은 이 전세집과 직장이었다. 직장은 타이밍이 맞물려 정리가 수월했고 집만 정리하면 됐다. 떠날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래전부터 꿈꾸어왔지만 늘 좌절됐던 그 꿈을 이룰 때가 왔다.
농부의 꿈. 오래전부터 남의 과수원을 돌아다며 일을 도와주고 삯을 받던 이모가 생각났다. 그 돈으로 내가 학생일 때 돈을 부치고 뒷바라지 생각해준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했다. 당장 날이 밝으면 모아둔 적금을 모두 해지해서 이모 앞으로 갖다바칠 것이다. 과수원을 사랑하는 이모에게 과수원을, 농부가 되는 것을 바라는 내 자신에게 그 꿈을.
4.
일이 잘되려니까 끝도 없이 잘됐다. 전세집도 주인의 배려로 먼저 집을 비우고, 새 세입자가 들어오는대로 돈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하나도 조급하지 않았다. 과수원을 살 돈은 이미 적금과 퇴직금으로 충당해도 됐고, 전세자금은 들어오는대로 다시 적금에 넣으면 됐다. 그리고 생활비는 연금복권 당첨액으로 쓰면서 보내도 됐다. 하나도 엉키지 않은 실뭉치가 부드럽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평일 오전은 사람이 없었다. 텅 빈 도로를 달리는 택시를 타고 청량리역 앞에 섰다. 이틀동안 온갖 짐과 가구를 다 버려버리고는 정말 필요한 것을 상자에 싸서 이모네집으로 택배보냈다. 손에 들린 것은 작은 에코백 하나와 20인치 캐리어였다.
기차역 또한 한적했다. 도착시간에 딱 맞춰 들어오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안내방송에서는 지나가는 역들의 이름을 훑어주었다. 게 중 '풍기역'이라는 단어만 내 귀에 꽂혔다. 나의 목적지였다. 이모가 살고, 내가 전에 살았던 나의 고향. 캐리어를 좌석 밑으로 내리고는 앞 좌석으로 다리를 쭉 뻗었다. 돈이 생기니까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전에부터 기차를 타면 꼭 해보고 싶었던, 한적한 기차에 좌석 4개를 예매하고 돌린 후 혼자 누워서 자는 것. 전에는 왕복기차값도 손이 덜덜 떨렸는데 이제 그렇지 않았다. 마치 내 카드는 블랙 무한대로 싹 긁어버려와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눈을 붙일까 하다가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몇번 울리지않고 이모가 바로 받았다. 아마 딱 점심즈음 시간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이모."
- 엉. 웬일이냐
"사과 먹고싶어."
빠알갛게 익은 영주의 특산품 영주사과. 한입 배어물면 상큼한 사과 과즙과 자연스러운 단맛이 입안을 돌아다니는 그 맛.
- 아이구. 아래께 얘기하지 그랬나. 박씨 아지매가 좀 준다는거 먹을 사람 없다고 안받았는데.
아래께 : 며칠 전에
이모의 다정한 목소리가 전화를 타고 넘어왔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아까워하는 표정이 눈에 선했다. 웃음이 나왔다. 기차 창문 옆으로 보이는 초록풀의 세계가 새롭게 느껴졌다.
_ 지금 일손이 없어서 메란도 읎다.
메란없다 : 정신 없다
이모의 귀여운 투정이 이어졌다. 잠자코 눈을 감고 들었다.
"내가 가서 도와야겠다."
- 나보다 더 메란없는 애가 무슨. 미소야 잠깜만. 지금 갑니더!
"남분 할머니?"
- 엉 밥 다됐다고 오란다. 밥 잘챙겨묵고. 시간나면 전화도 좀 자주 하고 그래. 알겠나.
"알았어. 이모. 곧 보자."
그런 이모에게 달려가 안고 싶었다. 달큰한 사과향이 나는 이모에게로, 풍기역으로, 영주시 부석면으로 나는 간다.
5.
네시간 이십분을 달린 기차가 풍기역에 멈춰섰다. 확실히 도시와는 달랐다. 조용하고 역에 내리는 사람도 얼마 없었다. 캐리어가 아스팔트에 끌리는 소리가 제일 컸다. 역 앞에 몇대 서있는 택시를 잡고는 이모네 집으로 향했다.
"부석면 마을회관으로 가주세요."
택시 창문을 내렸다. 공기부터 서울과는 확연히 달랐다. 공기 중에 상큼한 사과향이 섞여있는 느낌. 나에게 있어 이모는, 부석은, 사과는 너무나도 소중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남분할머니 과수원으로 달려갔다. 부석에 온지 꽤 됐건만 발걸음이 기억하고 있었다. 뛰어가는 와중에 사과 문방구도 보았다. 혹시 먼저 알아보실까 싶어 얼굴을 가리고는 빠른 속도로 뛰어갔다.
과수원 앞에 섰다. 은색 짧은 사다리를 밟고 일을 하고 있는 이모가 보였다. 배에 힘을 가득 모았다. 소리를 더 크게 지를 수 있는 힘이 모였다 싶었을 때 밖으로 내질렀다.
"영주이모!!!!!!!!!!!!!!!!!!"
영주에서 태어났다고 영주라고 이름이 지어진 나의 이모.
"아이고. 한데서 일을 많이 하니까 헛것이 보이나봅니더."
한데서 : 바깥에서
이모는 목장갑을 낀 손으로 눈을 부볐다. 옆에 있는 남분할머니가 이모의 등짝을 세지 않게 쳤다. 이모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바구니가 밑으로 낙하했다. 안에담겨있던 설익은 사과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남분할머니!!!!!"
할머니도 눈을 크게 떴다. 천천히 걸어오는 할머니와 이모쪽으로 내가 빠르게 달려갔다. 그 품에 안겼다. 금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꿈 그대로, 과수원은 변한 것이 없었다.
5.
저녁즈음 마을회관에서는 잔치가 열렸다 금의환향이라도 한 사람처럼 어른들은 나를 반겨줬다. 그도 그럴법한게, 마을 할머니할아버지들이 키우던 자식들과 손녀들은 모두 제각기의 삶을 찾아 떠났다. 영주시 부석면의 인구는 날이갈수록 줄었고 그들을 뒷바라지해주던 사람들만 남아있었다. 요새는 그나마 귀농 바람이 불기도 하고, 영주 사과가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다시 마을 차원에서 부흥을 하고자 세운 사과 문방구덕분에 관광객이 꽤 온다고 했다.
"우리 디안 두베던 미소가 이리컸네. 아이고... 얼마만이야"
디안 : 뒷뜰
두베다 : 뒤지다
"성호이모. 이모 언제적 얘기를 하는거야. 그래도 직장 다니고 몇번 연차내서 왔잖아."
"나는 보지도 못했지. 너 대학 다닌다구 훌쩍 서울갔을 때나 봤지. 서울가서 아들네 아 봐주느라고 이제야 제대로 얼굴보네."
성호이모는 부석면 마을회관에서 유일하게 가까운 슈퍼를 운영하고 있었다. 영주이모와 제일 친하게 지내는데, 손녀들을 봐주러 서울을 왔다갔다한다더니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늙었고 말라있었다. 괜히 마음이 이상해졌다. 그래서 이모가 건네는 막걸리 잔을 죽죽 마셨다.
"아 이모! 요짜에 부어서 어느세월에 먹어요. 그냥 병째로 먹읍시다."
요짜에 : 여기에
강판에 잘게 갈아서 밀가루와 섞고 얇게 부친 감자전과 두부김치가 먹음직스러웠다. 끝없이 들어가는 안주와 막걸리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다 먹지 못할 것 같았던 막걸리도 동이났다.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워 입맛을 다시다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모! 지금 아저씨 가게에 있죠?"
"엉. 있다. 밤에 가끔 담배사러 오는 아재들 있다고 안온대잖냐."
"제가 가게가서 술 더 사올게요."
얼마만에 만난 가족과 같은 사람들인데 이대로 끝낼 수 없었다. 슬리퍼를 신고는 길을 달렸다. 저녁 시간이 지나 해가지고 몇개 없는 가로등이 깜빡거렸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여름바람이 기분을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다. 시작은 연금복권 당첨이었지만 그 이상의 것을 얻었다.
"공기 좋다."
핸드폰 알람을 없애고 내일 출근때문에 걱정하지 않고 술을 마셔도 된다는 것. 직장때문에 자주 보지 못하는 이모를 볼 수 있다는것. 나의 고향인 부석에 돌아왔다는 것. 나를 기쁘게하기 충분한 요소들이었다. 위장에서는 시큼한 막걸리가 출렁였지만 아무렴 좋았다. 내일 토를하더라도 지금은 술을 더 마셔야했다.
오분여정도 선선한 바람을 맞고 걸어서 <성호슈퍼>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낡은 간판에서 얼마 전 대기업의 간판바꾸기 사업으로 깔끔하게 바뀐 간판에 눈에 띄었다. 흰 바탕에 고딕체로 꾹꾹 눌러 쓴 것 같은 간판이 세련됐다. 점점 걸음을 빨리하자 더 가까워졌다.
"어..."
도착하자마자 몰래 문을 열어서 아저씨를 놀래켜주려던 욕심을 접었다. 가게 앞을 비추는 가로등 앞에 누군가 우두커니 서있었다. 뒷모습을 보니 젊은 남자같았다. 까만 뒷통수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도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함부로 더 걸어갈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주황색 가로등빛은 그의 뒷모습을 반사해 바닥에 그림자를 그렸다. 움직일 생각이 없는 남자에 괜시리 겁을 먹었다. 지금 내가 취해서 헛것을 보는건가? 설마. 귀신인가? 두려운 마음이 왈칵 들었다.
분명 이상했다. 이 마을엔 제일 젊은 사람이 영회삼촌인걸로 아는데. 영회삼촌도 이제 50이 다되었다. 그러면 전혀 중년남성 같지 않고 기껏해봐야 내 또래일 것 같은 사람의 뒷통수는 뭐란 말인가. 반팔이 미쳐 가리지 못한 팔뚝이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침이 무겁게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저. 아저씨?"
왼손으로 오른쪽 팔뚝을 꼬집었다. 아팠다. 분명 꿈이 아니다. 내가 부르는 소리에 검은 뒷통수가 천천히 돌아갔다.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그림자가 움직였다.
"……"
"……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정말 내 또래의 남자아이였다. 눈을 찌를듯한 앞머리가 그의 눈가를 가리고 있어서 정확히 볼 수 없었다. 덮수룩하게 덮인 머리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심장이 벌렁였다. 지금이라도 도망가야할까. 막걸리를 사오겠다고 한게 잘못된걸까.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아저씨가 가게 안에서 듣고 뛰쳐나와줄까. 숨을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더디게 숨을 뱉었다.
"저.."
내가 입을 열자마자 바람이 불어왔다. 닭살 돋은 나의 팔뚝을 쓸고, 그 남자아이의 앞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가려진 눈이 그제서야 드러났다. 흑요석같이 까만 눈동자가 나에게 와 닿았다. 점점 그의 눈이 커지더니 뒷걸음질 쳤다.
"저기요.."
"……"
용기내서 한번 더 건넨말에 남자아이는 빠르게 뒷걸음을 치더니 아예 몸을 돌려서 도망갔다. 그렇게 가깝지도 않은 거리였는데 내게 술냄새라도 심하게 난 것일까. 저 남자아이는 누굴까. 남자아이의 운동화와 뜨거운 아스팔트가 마찰되는 소리가 정적을 울렸다. 그 소리만이 존재했다. 다급하고 무언가에 쫓기는듯한 소리였다. 거나하게 취해있던 막걸리의 기운이 싹 사라졌다.
재업입니다!
제가 분명...미소의 동화 쓸 때 만들어뒀던..썸네일을 백업해놨는데...엑박 뜨면서 없어져부렀네요...
책을 넘기면서 부제목이 하나씩 채워지는 이미지였습니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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