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2)
부르심을 받은 자
신성종 목사
1절에 보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사실 우리는 다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우리도 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1. 1절에 보면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까? 저는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그 부르심이 막연했습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서 차츰 분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나는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소명감이 있기를 바랍니다.
꼭 같은 일을 해도 소명감을 가진 사람과 갖지 않은 사람은 서로 다릅니다. 일의 능률도 다르고, 표정도 다릅니다. 기쁨도 다르고, 태도도 다릅니다. 자기가 받는 월급에 관계없이 우리는 항상 소명감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2. 지금 우리는 무엇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까?
부르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일반적 부르심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위한 부르심입니다.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마11: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일반적 부르심입니다.
둘째는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특별한 직분을 맡겨주십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엡4:11). 이처럼 모든 직분은 다 하나님께서 불러서 주신 것입니다. 그 때에 사43:1절의 말씀처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불러 주십니다.
2. 부르심의 성격
부르심에 대해 롬8:30절에 그 순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이 구절을 신학에서는 구원의 서정, 즉 구원받는 순서를 말씀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네 가지 순서가 나옵니다. 첫째, 미리 정하심(예정), 둘째, 부르심(소명), 셋째, 의롭다하심(칭의), 넷째. 영화롭게 하심(영화)의 순서대로 구원이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의 성격에 대해 바울의 경우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복음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경우는 사도로 불러주셨습니다. 저의 경우는 목회자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4:11절을 보면 [직분 자로] 부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직분 자가 된 것은 내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러주셔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통하여 부르시게 했습니다. 주인이 종을 통해서 하듯이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직분은 다 하나님의 복음과 직접, 간접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직업이든, 어떤 사명이든, 다 직간접으로 다 복음과 연관되어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과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직업을 영어로 calling이라고 말합니다.
■ 미국에 제가 목회했던 교회에 홍 석구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단기 선교에 은혜를 받고, 평생을 선교에 헌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다가 골프 장갑을 동남아에서 싸게 만들 수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나이키에 그는 장갑의 질과 액수를 제시해서 허락을 받아 지금도 계속해서 하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기선교를 통해서 일약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는 그 바쁜 가운데서도 선교지에 자주 다니면서 직접, 간접으로 복음을 전하고 때로는 자기 집을 담보로 하여 선교비로 십억씩 교회에 바쳤습니다. 마침내 장로가 되어 지금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슨 장사를 해도 다 복음 전파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업에 바쁜데 언제 선교하러 가느냐 하겠지만 그러나 해보면 생각이 세계적으로 변하고, 사업도 세계적으로 변하고, 인격도 세계적으로 변합니다. 그런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복음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1절에서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이란 말은 Gospel, God-spell이란 말인데 본래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주는 보상]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좋은 소식] 자체를 말하였습니다. 좋은 소식이란 Good News, 즉 God News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준비한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소식은 세상 소식과 다른 것은 세상 소식은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습니다. 또 좋아도 좋다 나쁘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한 복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3절에 보면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이어지는 혈통에서 메시아가 나실 것을 구약에 여러 번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족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백성들은 “호산나(save us now의 뜻으로 본래는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외친 것은 그들이 구약의 예언을 기억하고, 주님을 메시아로 고백하였다는 뜻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9:27)라고 외친 것도 그를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고백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육체적 혈통, 즉 왕의 계열인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열이란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은 갑자기 온 것이 아니라 구약의 많은 예언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4절에 나오는 [성결의 영]이란 말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속격(소유격)이나 형용사가 부족하여서 부자를 [부의 아들], 지혜 자를 [지혜의 아들], 성령을 [성결의 영]으로 표현합니다. 4절의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으니”란 말은 오해를 주기 쉬운 번역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 이전에는 인정이 안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차라리 이 [인정되셨으니]란 말은 [선포되어 알게 되었다]는 뜻으로 번역하면 더욱 확실합니다. 다른 말로는 [확인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오실 때부터 메시아로 오셨지만 그러나 그가 메시아인 것을 사람들이 분명하게 깨닫게 된 것은 바로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였다는 뜻입니다.
4. 복음이신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은?
1. 5절에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은혜이고, 둘째는 직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은혜란 말은 [호감]이란 뜻인데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헤란 말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 왜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직분을 주셨습니까? “믿어 순종케 하나니” 즉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믿음이요, 둘째는 순종이라고 했습니다.
3. 6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를 그리스도의 소유물로 택하기 위하여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4. 그러면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은혜요 둘째는 평강입니다.
평강이란 성경에서 여러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완전한 것”으로서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란 뜻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지는 [마음의 평안]을 의미하였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축복]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5. 부르심을 입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삶은 감사하는 삶입니다. 무엇한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2. 우리에게 은혜와 직분을 주신 주님께 온전히 헌신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그의 피 값으로 사셨을 뿐 아니라 직분도 그가 맡겨주신 것입니다.
3. 우리의 남은여생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남은여생을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정체성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이 깨달음에서 소명이 나오고, 헌신이 생기고, 충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낭비되지 않는 인생을 살려면
이수관 목사
저는 서른 한살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지난 번에도 잠깐 말씀 드린 적이 있지만 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회사일에만 열심을 내고 있었고, 대학교 1학년때 만나서 8년을 연애를 하다가 결혼한 아내와 예쁜 딸 아이도 낳았으니까 뭐 당시에는 행복하다고 느꼈습니다. 워낙 부모님의 경제적인 도움이 없이 시작한 결혼 생활이어서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열심히 살면 앞으로 좋아 질것이다 하는 확신도 있었구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 마음 가운데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과연 이것이 인생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이란 것이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돈 벌고, 지위가 높아지고 그래서 결국 내 아내와 내 아이를 행복하게 해 주면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다시 얘기해서 이러구 살다가 나이가 들어서 인생을 돌아 보았을 때 내 인생이 낭비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늘 있었습니다. 이 고민은 제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차츰차츰 해결이 되었지만 나중에 휴스턴에 와서 서울 침례 교회를 방문하고 최목사님을 면담했을때, 최목사님도 그런 비슷한 고민이 있었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 아 사람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즉, 다시 얘기해서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간에 인간은 누구나 한번 주어진 내 인생을 낭비없이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자, 과연 누가 낭비하지 않고 인생을 잘 산 사람인가? 하는 것은 인생의 가치관에 따라서 조금은 틀릴 수는 있겠지만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사도바울은 자기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액기스같은 삶을 살았다고 하는데 별 반론들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는 아마 스무살 후반경에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던 그가 십수년이 지난 40대 초반에 전도여행을 시작해서 20년동안 정말 쉴새없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래서 1세기에 세워진 교회를 보면 대부분이 그가 세운 교회였고, 그리고 그가 인생을 마치던 무렵에 썼던 디모데 후서 4:7절을 보면 그는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정말 만족스러운 표현을 합니다. 이 고백을 보면 그는 정말 낭비하는 것 없이, 또 인생을 후회없이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 그럼 어떻게 그는 그런 낭비되지 않는 한결같은 인생을 살수 있었을까? 궁금해 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1장 1-7절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인사말입니다. 그런데 이 인사말이 얼마나 긴지 나는 이 정도 길이의 편지도 써 본지가 오래됐다 싶을 정도 입니다. 그런데 이 인사말을 읽어보면, “아! 이분이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모양이다.” 싶은 몇가지 면들이 눈에 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로마서의 인사 부분을 살펴보면서 낭비하지 않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하는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자아상을 확립한다.
낭비하지 않는 인생을 살려면 우리가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첫번 째 교훈은 분명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전체 인사말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그의 분명한 자아상입니다. 1절을 읽어보면 자기가 예수님의 ‘종’이다 라고 얘기하고 또 부르심을 받았다라고 얘기하고, 또 따로 세우심을 받은 ‘사도’다 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얘기는 5절에 반복됩니다. 나는 은혜로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종이란 말은 그리 어려운 말은 아니지만 사실 이 사도라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원래 사도라는 말은 예수님이 뽑은 12명에게만 사용되던 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람들은 사도는 12명뿐이다라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가롯 유다가 죽고난 후에 맛디아라는 사람을 뽑아서 채워넣거든요.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처음으로 12명외의 사람에게 특히 자기 자신에게 사도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아마 그것이 사도바울과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 사람들과 끊임없이 바울의 사도권 논란의 원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내가 분명히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복음을 위양받고 보내심을 받았으니 나는 사도다라는 분명한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분명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그를 평생 목표를 위해서 뛰게 했고 그것이 바로 그가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낭비되지 않는 인생을 살려면 내가 무엇을 하던 간에 나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영어로 Identity라고 하지요. 바로 내가 누구인가 하는 강한 Identity가 형성이 되어있어야 낭비되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요. 내 자신이 누구인가하는 의식이 강한 사람은 일단 다른 사람의 이목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거기에 반해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이 약한 사람은 누가 이말을 하면 이리로, 다른 사람이 저말을 하면 저리로 흔들리고, 누가 조금만 공격하면 주저앉아 버리는, 그런 약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때 인생은 낭비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의 자아상을 확립할 수 있는가? 두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만나야 한다
첫번째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만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경험이 없이는 건강한 자아상을 가질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이유는 너무너무 많은데 그 중의 한가지만 얘기하자면 그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의식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에 연루되어 삽니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죄가 우리의 성품의 구석구석에 파고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살풋한 죄의식에 시달리면서 삽니다. 그리고 그 죄의식때문에 건강한 자아상을 갖기가 힘드는 겁니다.
저는 이번에 고등학교에 올라간 딸이 하나 있는데 이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하루는 저희가 수요예배에 와서 아이를 사무실에 두고 예배에 들어 갔거든요. 이 아이가 사무실에서 혼자 놀았는데 그 때는 예배당에서 나오는 소리가 스피커로 사무실에서 들릴 때였었어요. 이 아이가 혼자서 사무실에서 놀다가 스피커로 들리는 찬양을 듣다가 갑자기 자기의 죄가 느껴져서 책상밑에 들어가서 끝날 때 까지 그렇게 울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얘 엄마에게 처음 전해 들었을 때 제 반응은 “아니, 그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데요,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자기의 죄성을 알아요. 물론 살다보면 사람들 마다 그런 감각이 무뎌지는 경우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 죄의식이 자기 속에 침잠하고 앉아서 건강한 자아상을 만드는 것을 방해하는 거예요. 나는 죄인이다. 나는 어쩔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건강한 자아상이 만들어 지겠습니다. 불가능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바른 자아상을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내 죄가 용서가 되었고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이 가슴으로 느껴지는 것이 시작입니다. 그 때부터 건강한 자아상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도 바로 그런 예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스데반을 죽일 때 한몫 거들고, 예수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살기가 등등해져서 다닐 때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다고는 했지만 자기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영혼 깊숙히에서는 죄의식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그러다 예수님을 만나서 가장 먼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9:18-19절에 보면 예수님을 만난 후 침례를 받고, 그래서 죄의 용서함을 경험하는 겁니다.
따라서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분은 바른 자아상을 가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우리가 침례받을 때 묻는 말 있지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것을 자꾸 뇌까리고 즐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별 감동이 없다해도 괜찮아요. 감동이 즉시로 확 생기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천천히 생기는 사람이 있으니까 염려마시고 즐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만나셔서 깨끗한 영혼위에다 새로운 건강한 자아상을 세워 가시는 그런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2) 치유를 경험해야 한다.
두번째 우리가 옳바른 자아상을 가지려면 우리가 치유를 경험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자기만의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일 수도 있고, 아니면 성장해 오면서 반복적으로 받은 상처일 수도 있는데 많은 경우는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내면 깊숙히에 자리를 잡고 있게 되고 그 생각은 여러가지 행동으로 나타나지요. 성격에 따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정 반대로 뭐든지 자신이 없어서 숨는 사람이 있지요. 이런 사람의 경우 옳바른 자아상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옳바른 자아상을 가지려면 그런 상처로부터 치유를 받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긍국적인 치료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이루어 지는데 어째튼 그 시작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기본은 자기의 배우자로부터의 치유입니다.
사람은 말이죠, 배우자가 더 없는 사랑을 베풀어 줄 때 그 속사람이 치유를 받습니다. 제가 바로 그런 Case 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정말 부모님으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특히 무서운 아버지, 무서운 형 밑에서 자랐으니 제 자아상은 정말 엉망으로 삐뚤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교 때 제 아내를 만났는데 제 아내는 정말 저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아니, 사랑이야 다 해주지요. 그러니까 결혼하지요. 그런데 제 아내는 저를 정말 대우해 주었습니다. 믿어주고 인정해 주었어요. 예를 들면, 그 때까지 전 한번도 생일상을 받아 본적이 없었는데 제 집사람이 자기집으로 제 친구들을 초대해서 생일 잔치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처가집 식구들이 그렇게 저를 대우해 주었어요. 식사를 해도 남자라고 가장 중앙에 앉히고, 무슨 얘기를 해도 경청해 주고, 내가 무엇을 결정하던지 따라주고, 정말 섬겨 주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돌아 보면 그런 오랜 시간들을 지나면서 제가 그 사랑에 치유를 받았던 겁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내 속에 꼬여있던 아집과 고집 이런 것들이 눈처럼 녹은 거예요.
그럼 나는 제 아내에게 사랑만 받은 사람이냐 그렇지 않지요. 저도 잘해 줬지요. 제 집사람은 대학교 2학년 때 갑자기 엄마를 잃었습니다. 집안의 가장 같았던 엄마였기 때문에 엄마가 갑자기 떠난 자리는 온 가족에게 상당히 컸습니다. 그런데 그 때 아내옆에 제가 옆에 있어 준 겁니다. 그랬기 때문에 지나고 보니까 가족 중에서는 그래도 가장 상처가 적은 것이 제 집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배우자를 치료해 주고 세워주기 위해서 사실 부르심을 받은 겁니다. 하나님이 치료자의 역할을 하라고 우리를 불러 주신 겁니다. 그런데 우린 그것도 모르고 서로 상처만 주고 삽니다. 그래서 이제 막 결혼하신 부부들은 서로 치료하는 치료자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내가 치료자로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상대를 치료해 주는데 목표를 두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런 치료자의 삶을 살지못하는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저 사람이 날 치유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래요. 틀림없습니다. 자매들에게 어떤 남자를 만나고 싶습니까 하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는 줄 아십니까? 나만을 사랑해 줄 수 있는 남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니까 어려운 거예요. 저 사람이 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저 사람이 날 치유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안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어렵겠지만 내가 일년만 세게 마음을 먹고 내가 저사람을 치유해 보리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저 상처뿐인 사람을 치유하고 세워주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라고 생각하고 아끼고 사랑하고 인정해 주고 섬겨주어서 배우자가 치료되고 그러면서 본인도 치료받고 아름다운 가정을 꾸미는 그런 여러분들 다 되시기 바랍니다.
2. 복음을 정확히 이해한다
두번째 우리가 본문에서 발견하는 것 인생을 낭비없이 살려면 복음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은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 인생을 낭비없이 사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고 의문을 가지실 분도 있겠지만 분명히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보면 어느날 예수님을 믿고 확 바껴서 사역도 열심히 하고, 기쁘게 사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분들 중에는 자신에게 어려움이 오거나, 아니면 내가 하나님의 일에 힘썼을 때 기대했던 그런 일들이 일어 나지 않을 때, 한때 뜨거웠던 사역의 열정이, 또는 예수님을 만난 기쁨이 오래 가지 못하고 식어버리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왜 그런가? 많은 경우 복음에 대한 확고함이 그 바탕에 있지 않기 때문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럴때 인생이 낭비됩니다.
그에 비해서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은 분명한 복음의 진리위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이 짧은 구절안에 어쩌면 이렇게 복음의 핵심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는지 놀랍습니다. 그가 얘기하는 복음은 예언을 통한 성경의 약속,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 성령으로는 부활,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 다섯마디에 잘 농축되어 있습니다. 이런 확실한 복음에 대한 기초가 있으니까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신뢰를 보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중에서도 제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그의 신앙 고백의 균형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두 가지를 얘기합니다. 자기가 만났던 부활하신 예수님과 성경에서 증거한 예수님. 즉, 자기가 체험적으로 만난 예수님을 성경적 지식에 의해서 아는 예수님을 균형을 취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균형 속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신앙의 기초가 있으니까 위기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반복해서 얘기하는 것이지만 우리도 내가 생활 가운데서 내가 만나고 경험하는 예수님은 반드시 내가 성경에 만나는 예수님으로 확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체험은 많은데 성경적인 지식이 부족하다 싶으신 분들은 반드시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또 교회 성경공부도 하시구요. 또 내가 성경은 열심히 읽고 지식은 많은 데 현실에서의 체험이 부족하다 싶으신 분들은 믿음을 자꾸 행동으로 옮기셔서 하나님을 자꾸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경험과 이론이 잘 조화된 신앙의 터를 쌓아서 그 위해서 시련이 와도 흔들림이 없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분명한 목적과 비젼을 가진다
세번 째 우리가 본문에서 발견하는 낭비되지 않는 인생을 살려면 분명한 목적과 비젼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5절을 읽으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미래를 보는 그의 Scale에 놀랐습니다. 이 로마서는 그가 3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 머물면서 썼다고 추정이 됩니다. 그러니까 로마서를 쓸 이 당시는 AD56년경 이제 막 기독교가 조금 알려지기 시작한 때였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막 씨앗이 조금 뿌려지기 시작한 그런 상황이예요. 게다가 뒤에 읽어보면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자기에게 닥칠 고난을 예감하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전하면 모든 민족이 믿고 순종한다는 그런 엄청난 scale을 가질 수 있는가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대단한 비젼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가 어떻게 그런 엄청난 비젼을 가질 수가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한가지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가 가지고 있는 복음에 대한 Single Focus가 그를 그런 비젼가가 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지난 10년동안 자기를 단순화하고 한가지 생각만 했거든요. 그러니까 비젼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사람은요 자기를 단순화하고 한가지 일에 한 10년을 매달리면 이런 비젼가가 되는 모양입니다. 제가 재미있는 얘기하나 해드릴까요. 2년전인가 저희가 가정교회 사역원을 만들때 몇몇 집사님들하고 몇분이서 가정교회 사역원 비젼을 만들었거든요. 그 때 최목사님이 내놓은 가정교회 사역원의 비젼이 "전세계의 교회를 가정교회로 만든다." 였어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아이고 욕심도 많으시다." 그랬거든요. 그런데 지금 보니까 바울과 같잖아요. 최목사님도 한 10년 이상 가정교회 하나만 보고 뛰어 왔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런 비젼을 받잖아요. 그리고 그 비젼이 이루어져 가고 있구요.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런 비젼가가 될 수 있는가? 아직은 뭐 씨앗도 없잖아요. 그쵸?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나에게 그런 비젼의 씨앗이 발견될 때까지 나를 단순화하고 내 장점에 힘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짐 콜린스라는 분이 쓴 “Good to Great”이라는 책을 읽어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위대한 기업의 특징은 자기 단순화에 성공한 기업이다. 즉 성공의 비결은 단순화에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무조건 단순화하는 것이 아니고 내 장점을 발견해서 거기에 focus하고 잔 가지를 치고 한 우물을 파라는 얘기입니다. 말이 되지요. 성공하신 분들은 다 이렇게 자기의 장점을 가지고 한 우물을 판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의 장점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 분의 말에 따르면 나의 장점은 단순히 내가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 내가 주로 Energy를 쏟는 곳과, 내가 평소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 곳, 그리고 이거 하나는 내가 남들 보다 잘 할 수 있겠다 싶은 곳이 합쳐지는 부분이 자기 장점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 장점을 발견하고 거기에 집중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바로 바울이 이것을 했어요. 당시 본격적으로 사명을 받을 때 보면 그가 가장 시간을 많이 들이던 일이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고 가르치는 일이었어요. (사도행전 11:26) 거기에 그의 열정이 뭐 였습니까? 이방인에 대한 마음이었지요.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그가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은 뭐예요. 논리적인 말솜씨였어요. 사도행전 17:18에 보면 알 수 있지요. 오죽 말이 논리적이었으면 말쟁이라고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그가 집중해야 하는 일이 나오지요. 이방인을 모아서 말씀을 가르치고 그러면서 모임을 갖는 것 즉 교회를 세우는 것 그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것에 집중하다 보니까 그는 자연스럽게 Vision을 가질 수가 있었고 그 비젼에 평생을 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점을 개발하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는 한사람 한사람 하나님이 주신 강점이 있습니다. 이제껏 나를 이끌어 오신 하나님이 심어놓은 곳. 거기에 내가 열정을 가지고 있고, 그러면서 남보다 잘 할 수 있는 곳. 지금부터 그것을 찾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이리 저리 휩쓸리지 말고, 이거 했다가 저거 했다가 하지말고 한가지를 향해서 꾸준히 노력할 때 그럴때 거기에 기초해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평생을 걸 수 있는 비젼을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4. 비전을 나누어 받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된다.
자, 낭비되지 않을 인생을 살려면 마지막 우리가 바울의 삶가운데서 발견하는 것은 그 비전을 나누어 주고 나누어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절부터 7절을 읽어 보면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뭔가 설득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지요. 내가 부름을 받은 것처럼 여러분들도 예수님께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즉,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로마사람들에 대한 Identity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서 결국은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나처럼 그런 복음 전하는 일에 동참하십시요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8절부터 내가 로마를 왜 방문하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왜 방문하려고 한다는 얘기를 하면서 결국 편지의 후반에 가서는 자기의 Spain 사역에 동참하라고 얘기합니다. (15:22-24) 즉, 사도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에게 이편지를 씀으로 로마 교인들의 믿음을 점검하는 목적이 있지만, 결국은 그들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같은 부르심으로 초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Vision을 나누어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도 낭비되지 않은 인생을 살려면 비전을 나누어 받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만약 나누어 줄 수 없다면 그것은 더이상 비젼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나누어 받을 수 없다면 그것은 비젼이 아니지요. 그것은 그냥 자기 망상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의 비젼에 대한 중요한 사항을 한가지 알고 지나가야 하는데 그것은 비젼은 절대로 나에게 단독으로 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비젼은 전염되는 거예요. 특별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젼은 더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위에서 감이 뚝떨어지듯이 나한테 비젼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비젼은 이어받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끝없이 이어지는 어떤 연속선상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독특한 비젼을 주시기를 기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바람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여호수아는 그의 비젼을 모세에게서 옮겨 받았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누구에게 옮겨받았나요? 없나요? 그가 스스로 받았나요? 아니에요. 희미하지만 출애굽기 13:19절을 보면 모세는 요셉에게서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모세는 400년전에 요셉이 한 말 “언젠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인도해 내신다”라는 말을 했는데 특별히 그 말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겁니다. 요셉의 비젼은 야곱에게서, 야곱은 이삭에게서, 이삭은 아브라함에게서 이렇게 비젼은 나누어 주고 나누어 받는 겁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꿈이 우리들의 세대를 통해서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비젼을 전해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를들면 이제 사역박람회가 끝나고 새로운 부서에서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 분들이 새로운 부서에 가서 “자, 이제 내가 이러이러한 비젼을 가지고 일을 시작해야지.”라고 생각하시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선은 이 부서의 비젼이 뭐였나?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어떻게 역사해 오셨나를 먼저 보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것은 부서도 마찬가지고 또 새로운 사역지를 찾아 가시는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새로운 임지에 가시면 우선 그 생각부터 하시는 겁니다. “자, 내가 이러이러한 비젼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겠다.” 이런 자세로 일을 시작하니까 하나님의 사역이 끊기고 낭비되고, 또 그래서 얼마나 많은 문제가 일어 납니까? 당연히 이 교회에서 이제까지 일해 오신 하나님의 손길이 무엇인가? 내가 여기서 무엇을 이어받을 것인가? 거기서 시작을 해야지요 그러구나면 그럼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그림이 그려지겠지요. 그래서 먼저 비젼을 전해 받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비젼이 참 많습니다. 가정교회를 통해서 교회를 바로 세우겠다는 비젼, 선교 사역을 통해서 주님의 오실 날을 당기겠다는 비젼, 자녀교육을 책임지는 교회가 되어 다음 세대를 책임지겠다는 비젼, 한어회중과 영어회중이 잘 공존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서 모델 교회가 되어 보겠다는 비젼. 그리고 이런 비젼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제껏 우리교회에서 역사해 오셨습니다. 저희 교회에 새로 오신 분들은 이런 비젼들을 잘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정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시고 거기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럴때 언젠가 그 비젼이 여러분의 비젼이 되고 여러분들도 비젼가가 되어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게 비젼을 나누어 받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나라에 없어서는 않될 사람들이 다 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이규현 목사
흔히 무엇을 믿느냐고 하면 기독교를 믿는다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엄격히 말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해야 정확합니다. ‘기독’은 ‘그리스도’의 한자어이고, 여기에 ‘교’자가 붙어 종교의 의미가 됩니다. 사실 우리는 ‘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종교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어떤 면에서 그 안에 다분히 인간적인 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종교적인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가, 예수를 따르는 신자인가 분별을 해야 합니다. 주일에 예배의 자리에 나온 것은 종교적 활동이지만, 진짜 거듭난 신자인가 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종교적인 활동에 열심이라고 해서 구원받은 신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종교 자체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무슨 활동을 해서 마음의 위안과 만족을 얻지만, 영생을 얻는 길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병을 낫게 하는 좋은 약 성분을 추출해서 조제하면서 사람의 손길을 거치다 보면 다른 것들이 첨가되기도 하고, 변질되기도 하는데 그것들은 약이지만 효력을 기대하기가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가능하면 약 성분이 잘 보존된 것이 좋은 약입니다. 마찬가지로 진리가 사람들에 의해 더 명확하게 드러난 부분도 있지만, 왜곡된 부분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중세기에 특히 그랬습니다. 마틴 루터나 종교 개혁자들이 개혁을 하려 했던 이유도 기독교가 인간들에 의해 변질이 심화되면서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도가 심각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문제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진리를 진리 그대로 지켜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변질된 기독교란 그 안에 진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이나 신앙의 중요한 부분들이 상당히 결여된 상태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의 길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단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기독교 이단들은 유사성을 보이지만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적인 방식들을 취하지만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독이 있습니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냄새가 많이 나고, 인간에 의해서 얼마든지 훼손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신학자들이 교리를 체계화시키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존 칼빈도 장로교의 교리에는 탁월했지만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가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범죄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기독교의 진리가 왜곡되지 않게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내가 신앙의 진정성을 가지고 제대로 믿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이미 복음을 들었지만 좀 더 복음의 진리를 견고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바울이 보낸 편지입니다. 특히 1세기에는 거짓된 가르침과 교사들이 성행하고 기독교가 체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갓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진수를 다시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안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도 복음을 계속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고,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 안에 생명이 있고, 사람을 변화시키고, 능력이 있습니다. 이 복음은 처음 믿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오래 예수를 믿어온 사람에게도 필요합니다.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에는 감동과 기쁨, 황홀함이 있지만, 믿음 생활을 하다 보면 시큰둥해져 감격을 잃어버린 채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때 다시 복음을 듣고 영적 회복과 변화가 일어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다시 살리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너무나 귀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무엇인가요? 복음을 아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복음을 더 들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게 몇 마디로 정의하고 끝날 내용이 아닙니다. 그래서 로마서 전체를 통해서 복음을 좀 더 종합적이고, 다각적이고, 깊이 있게 살펴보면서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무슨 도가 아닙니다. 교회에 와서 쓸만한 교훈을 몇 가지 얻고 가는 정도로 끝나면 안 됩니다. 복음은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는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잘 다져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도 기초공사를 잘해놓으면 견고한 집을 세울 수 있는 것처럼 이번 로마서를 통해서 기초를 확실히 닦아 놓으면, 이단이나 삶의 환란과 풍파에도 흔들림이 없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알려면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암이 무서운 것은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 있다가 한참 진행이 된 후에 알게 되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즘 병원에는 초정밀 입체 영상 진단기(MDCT)를 갖추고 인체 안을 훤히 들여다보며 아주 작은 종양까지도 찾아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에 대한 진단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정확히 볼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보는 눈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란 기준이 무너진 상태로, 나를 보는 눈도, 남을 보는 눈도, 하나님도 못 봅니다. 무엇이 죄인지에 대한 기준이 없습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얼마나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는가를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초고속 초정밀 입체 진단기 역할을 해서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가를 보게 합니다. 앞으로 로마서 전반부에서 인간이 얼마나 심각하게 부패하고, 소망이 없는 존재인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 자체가 소망의 시작이고, 은혜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고, 법 없이도 살고, 문제가 별로 없는 사람으로 자신을 미화해서 죄인 됨을 지적당하면 화를 내고 부정합니다. 이것은 죽는 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받을 때 자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의 죄의 끔찍함을 폭로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3)」 처음에는 매우 불쾌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위장된 모습을 들춰내야 비로소 치료와 회복이 시작됩니다. 말씀으로 인해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것들 이 드러날 때 방어하거나 변호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 앞에서 사는 길은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인정하면 사는 길이 열립니다. 이사야가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한 후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는 탄식이 터져 나온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모두 자신을 정당화하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자존심을 북돋아 주고 약점을 숨겨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신이 멍한 가운데 그저 요식적인 절차를 거치면서 아멘 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의 십자가 앞에 정면으로 마주치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우리 자신이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붙들고 자랑해왔던 모든 자존심들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을 맞아야 합니다. 인간의 자존심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죄로 인해 똘똘 뭉쳐진 인간의 자아가 그렇게 간단하게 죽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를 뒤집어쓰고 냄새 나는 끔찍한 존재인 것을 인정하고, 예수가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나는 죽을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십자가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죄의 무게가 얼마나 큰가를 알게 됩니다. 그 죄의 무게가 자신의 인생을 짓누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도무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때 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야만 했는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복음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복음을 정확하게 경험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절에서 6절까지를 보면 매 구절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상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반석 위에 신앙을 세우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기독교의 독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구원의 길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설정이나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기준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왜 여러 길을 만들지 하나만 제시하느냐고 따지며 이의를 제기할 자격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바다에서 조난을 당해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빨간색 구명보트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다른 색깔의 보트를 가져오라고 떼를 쓴다면 기가 찬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는 말씀을 듣고 나에게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반응을 한다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들었을 때 나에게 호의적인 반응이 일어나고 그 앞에 굴복한다면 나는 목자의 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뿐이라는 것이 복음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의 지성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냥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왜 바울은 그리스도만이 복음이라고 합니까? 왜 그리스도가 복음이 됩니까?
첫째, 성경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려는 초점은 그리스도입니다. 2절에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 1:2)」 참 귀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아들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는 갑자기 나타나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절대적인 기준은 성경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구원자가 과연 그리스도이신가 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절대적인 기준도 성경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것에 대해서 예언했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경을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관심을 가져야 할 핵심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스토리입니다. 「30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것을 구속사적인 읽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만약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면 성경을 읽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바닷물에 빠졌다가 나오면서 물을 본 적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태양이 떠올랐는데도 빛이 없다고 한다면 태양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감겨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일관되게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에 집중했습니다. 신약 사복음서의 기자들의 일관된 초점은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빼면 성경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슨 특이한 것을 깨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책을 읽은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성경의 이상한 구절에 매여서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성경의 목적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이 세상의 책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심으로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 1:3)」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 교리는 구원의 사건에 매우 중요합니다. 이성적인 접근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계 안에 갇혀 계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육신 하신 예수를 믿지 못하면 다른 것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나님이신 분이고 동시에 인간이 되십니다. 인간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죄 없는 사람이 인간의 죄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 완전하신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이 되셨고, 동정녀를 통해 나셨기 때문에 죄가 없으신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자로서 중요한 조건을 갖추신 것입니다. 죄로 인한 심판이 인간의 육체에 찾아왔습니다. 인간이 치러야 할 죄의 대가는 무슨 사상이나 철학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형상화된 이미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 형상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2천 년 전에 예수께서 십자가라는 형틀에 매달려 육체에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당하셨고, 그 죽음은 몸으로 오시지 않았다면 고난받는 것이 불가능했고, 고난을 대신 받으신 것이 없다면 우리의 죄는 처리될 수 없었습니다. 온몸으로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 문제에 대해 완벽한 처리를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몸에는 죄로 인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나이가 들면 자꾸 몸이 아프고, 늙는 과정들이 그런 것입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음의 권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죽음의 의미는 새로워졌습니다. 예수 안에서 죽음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암에 걸리고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이 나아도 축복이고, 안 나아도 주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대가가 지불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죽음은 영생의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절차일 뿐인 것입니다.
셋째,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1:4)」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예수가 구원자라는 사실을 입증하신 가장 중요한 사건이 바로 예수의 부활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신 사건만으로 끝났다면 복음은 미완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리스도가 구원자이심을 확정시켜주셨고, 그리스도가 구원자이심을 천하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싸늘한 땅에 묻힌다고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 세상에 살면서 아무리 실패하고 별일을 다 당해도 죽음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죽음의 저주는 한번에 모든 것을 무(無)로 돌아가게 하고 결코 복구할 수 없게 만듭니다. 세상은 죽음의 영으로 가득하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애를 써보지만 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로 모든 것은 역전되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죽음의 저주가 끝났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소망이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이 주어집니다. 부활이 없다면 잠깐 동안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생명이 전혀 없는 존재입니다. 마치 나무에서 잘려진 나뭇가지가 처음에는 푸른 잎사귀가 붙어있고 생기가 있어 보이지만 며칠만 지나면 완전히 말라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강한 죽음의 권세가 그리스도의 부활 앞에서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희소식, 위대한 기적이 있을까요? 인간을 뒤덮고 있는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 것, 이것이야말로 복음입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것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 세상의 중심인 로마에 복음이 핵폭탄처럼 터져서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꿈꾼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고, 그의 존재 이유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부활로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내 인격이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는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우리 인생의 모든 해답이 있습니다.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를 초월하는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습니다. 인생의 근원적인 질문들에 해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죄로 인한 저주를 말끔히 씻어내는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집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 복음을 만나 자유를 얻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와서 봉사와 수고를 하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그것을 잠시 내려놓고 복음을 정확하게 경험하고, 구원의 풍성함 속에 빠지면 그 복음의 능력이 나를 어디론가 이끌어갈 것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보다 더 앞서 복음을 만나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의 고리가 바로 꿰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고, 설명할 수 없는 이 복음에 감염되어 십자가와 부활이 내 심장에 부딪히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내 죄의 실체가 드러나 그리스도로 인해 해결 받고 영원을 위해 내 삶을 올려드리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결의 영
로마서 1:4-7 / 박봉수 목사
아마도 최근 각종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실린 한 집회 광고를 한 두 번쯤은 보신 일이 있으실 것입니다. 박옥수 목사의 집회광고 말입니다. 저하고 이름이 비슷하지만 전혀 무관한 사람입니다.
곳곳에 프랑카드를 걸고 홍보 요원의 전단지 살포는 기본이고, 주요 일간지에 커다란 하단광고에 심지어 TV의 30초 광고까지 엄청난 광고료를 들여가면서 집회광고를 했습니다. 바로 지난주 3월 19일에서 23일까지 무려 5일간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계속된 집회 광고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미혹되어 참석했었고, 또 많은 신자들은 도대체 무슨 집회 길래 저렇게 돈을 들여 홍보하고 야단인가 아마 의아해했을 것입니다.
박옥수 목사는 세칭 구원파라고 알려진 이단의 한 분파이자, 본류인 권신찬의 기독교 복음침례회의 한 아류인 대한 예수교 침례회의 대표입니다. 그는 중3을 중퇴한 학력에 신학교도 다니지 않은 채 목사라고 행세하는 사람입니다. 그저 구원파의 대부격인 권신찬의 영향을 받아서 나름대로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면서 스스로 성경을 통달한 사람으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성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기성교인들의 신앙적 허점을 파고들어 나름대로 그 세력을 키워왔습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입니다. 그는 기존 신자들에게 다짜고짜 구원받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았다고 하면 언제 구원받았느냐고 또 묻습니다. 기존 신자들 가운데 그럴 사람들이 별로 없겠지만 날짜까지 대면 지금 죄가 있느냐고 또 묻습니다... 이렇게 집요하게 죄 문제 구원문제를 파고들어 기성교회 교인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그 믿음을 뒤흔들어서 미혹합니다.
이 구원파들의 결정적인 주장은 한 마디로 구원은 깨달음으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담의 원죄로 인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보혈로 자신의 죄가 단번에 영원히 용서받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을 가진 자들이 구원받은 것인데 이들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회개할 필요도 없고, 더 이상 죄 용서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기성 교회교인들이 죄사함을 위해 눈물로 통회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아직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강변합니다.
정말 우리가 한번 구원받고 나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일까요? 한번 회개하고 나면 그 이후에 지은 죄까지도 미라 한꺼번에 용서받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의 결정적인 착각이자 실수는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실제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결의 필요성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는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특별히 죄와 관련해서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는 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롬 3:26을 보면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하려 하심이니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겠다는 말씀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이 의를 힘입어서 의롭다 여겨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 용서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의로워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덧입어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것뿐입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칭의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과거의 죄를 묻지 않으시겠다는 선언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분상의 의인이지 존재론적인 의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딤 1:15절에 보면 바울은 자기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위의 13절을 보면 자신이 훼방자요, 행악자였었다는 사실을 과거 시제로 고백하고 나서, 이제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할 때는 현재 시제를 쓰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하나님 보실 때 과거에도 큰 죄를 저질렀지만 현재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처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 때문에 고민하고 있고, 그 죄사함을 받기 위해 힘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여전히 현재 짓고 있는 죄 때문에 고민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요 8장을 보면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주님은 이 여인의 죄를 다 사해주시고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은 용서받았지만 그래서 과거의 죄는 다 씻겨졌지만 현재와 미래에 또 다시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짓지 않으려고 힘써서 노력하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장신대 오성춘 교수가 쓴 ‘영성훈련’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고 크게 공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과거에 범죄한 죄의 사실들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살아서 나를 죄악 가운데로 끌고 가려고 하는 죄의 세력 때문에 고민하기 시작했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거룩한 장소를 찾아 거기에서 하나님의 경건을 이루고자 했으나 '죄의 세력'은 세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속에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거룩한 장소를 찾아가도 죄는 나를 넘어지게 하고 있었다. 내가 그리스도를 전하려고 할 때 죄는 그곳에 나와 함께 있었고 하나님께 무릎 꿇고 경배하는 내 속에 아직도 살아 있었다. "겸손하라"고 입으로 외치는 내 속에 교만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고 외치는 내 속에 섬김을 받으려는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또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가르치는 나의 심령은 세상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해방될 수 없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이런 고민에 빠져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현주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지었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심령 깊은 곳에 여전히 아담에게서 유전된 죄의 세력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우리 안에 원죄의 부패성은 아직도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자주는 못 갑니다만 가끔 부모님 산소에 가면 한 동안 본격적인 벌초는 아니더라도 봉분과 횃대 부분의 떼를 손질하게 됩니다. 잡초는 할 수 있으면 뿌리째 뽑아야 하는데 하도 그 뿌리가 깊어서 뿌리째 뽑다보면 봉분 자체가 손상을 입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겉에 잎사귀하고 줄기부분까지만 뜯어내곤 합니다. 그런데 다음 번에 다시 가보면 영락없이 더 크게 자라서 산소를 볼품없게 만들곤 합니다.
잡초는 뿌리째 뽑아내야 합니다. 잎이나 줄기만 뜯어내면 겉으로 볼 때 없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뿌리가 다시 줄기를 만들어내고 잎을 냅니다.
히 12:15를 보면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죄가 그렇습니다. 원래 쓴 뿌리가 우리의 심령 속에 박혀있습니다. 이것이 좋은 여건과 상황을 만나면 줄기를 내고 잎사귀를 내서 무성해 집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저지르는 구체적인 죄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줄기와 잎사귀를 잘라내는 것과 같습니다. 한 번 회개했다고 다시는 죄를 짓기 않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3월 1일 대도 조세형이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는 네 가지 혐의로 기소가 됐습니다. 주거 침입, 절도, 총포도검법 위한, 공무집행방해입니다.
그는 지난해 11월 24일 도쿄 시부야구 주택가에서 절도행위를 하다가 발각되자 출동한 일본 경찰관에게 흉기를 휘두르며 반항하다 오른쪽 턱과 팔에 전치 3개월의 총상을 입고 붙잡혔습니다.
장말 안타까운 것은 15년형을 받고 출소할 때 매스컴이 기독교 신앙으로 대도 조세형이 새사람이 됐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교회에 다니며 신앙간증을 했고, 앞으로 신학공부를 하여 주의 종이 되겠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일본에 간 것도 일본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전도하여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은 부인을 만나서 결혼도 했고 수입도 만만치 않아서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일본에서 또다시 절도죄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부인은 얼마나 혼란스러울까요?
많은 사람들은 조세형이 참회하고 새롭게 결단했다고 정말 새사람이 된 줄 알았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겉으로 드러난 죄의 잎사귀와 줄기는 잘라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지독한 죄의 쓴 뿌리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보통의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더 강한 죄의 쓴 뿌리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죄의 쓴 뿌리가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겉에 나온 죄의 잎사귀나 줄기를 잘라내는 일도 해야 하지만 이 죄의 쓴 뿌리의 세력을 무력화시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성결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성결이라는 말은 우리말로는 '거룩하고 깨끗함'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성경의 원어는 구약의 히브리어로는 카도쉬, 신약의 헬라어로는 하기오스라는 말입니다. 이 두 원어의 의미는 같은데 '분리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 구별되었다, 하나님을 위해 분리해 놓다'라는 뜻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 속하기 위해 죄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결이란 우리를 반 하나님적인 것들,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분리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속적인 가치관, 세상적인 욕망, 세상 풍조들로부터 우리를 분리시켜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결하게 되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쓴 뿌리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마치 밝고 건조하고 깨끗한 환경에서 곰팡이나 세균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번식도 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니까 성결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쓴 뿌리가 그 세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만들 뿐 아니라 점점 그 힘도 약화시키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도 필요하지만 사실 성결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성결해지지 않으면 회개거리는 끝도 없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점차 성결해 지게 되면 회개거리는 점점 더 줄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결의 영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결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까? 한 마디로 성결은 성결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성결은 전적으로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6:11을 보면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령 안에서'만 성결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결은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성결의 영인 성령은 죄로부터 우리를 격리시킵니다.
갈 5:16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임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우리 안에 육체적인 욕망이 이글거리고 있는데 가만 두면 거기에 끌려가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죄의 쓴 뿌리가 여러 가지 죄를 저지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의지적으로 노력하고 끌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쳐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 안에서 육체적인 욕망과 싸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 지을 생각을 없애주시고, 죄 지을 현장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행동하지 못하도록 제어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은퇴하셨습니다만 언론계에서는 누구라면 다 아실만한 거물이시고 지금은 교회 장로님으로 수고하시는 분과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아내 덕에 교회는 그분 표현대로 개 끌려가듯이 끌려 다녔답니다. 그런데 이분에게는 정말 끊을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답니다. 하나는 담배고 다른 하나는 도박이었답니다. 교회 갈 때도 깜빡 잊고 와이셔츠 윗 주머니에 담배 갑을 넣고 갔다가 부끄러움을 당한 일도 많을 정도로 골초였답니다. 그리고 도박 때문에 수 차례 아내로부터 이혼하겠다는 협박까지 받을 정도로 너무 심각했던 때가 있었답니다.
물론 이 두 가지를 끊어보려고 정말 안 해 본 것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번번히 실패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역시 아내에게 개 끌려가듯이 끌려서 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답니다. 계속 졸다가 마지막 날 밤 집회에서 함께 기도하는데 글쎄 마음이 뜨거워지더랍니다. 그랬더니 극성스러운 아내가 부흥 강사에게 자기를 데리고 가더니 안수기도를 받게 하더랍니다. 역시 안수기도를 받고 나니까 그 마음이 더 뜨거워지더랍니다.
그리고 나서 놀라운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담배를 피우려고 물었는데 갑자기 구역질이 나더랍니다. 담배 맛이 전과 같지 않고 너무 쓰더랍니다. 그 이후로 자연스럽게 담배를 끊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던 도박을 하려고 포카 판에 앉았는데 그렇게 힘이 들더랍니다. 며칠 밤도 새우던 자기인데 두 세시간을 견디기가 힘이 들더랍니다. 그러면서 또한 자연스럽게 도박과도 거리를 두게 됐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를 성결하게 다듬어 가시는 성결의 영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쓴 뿌리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우리를 막아주십니다. 죄의 쓴 뿌리가 세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없애 주십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육체의 욕망과 육체의 소욕이 들끓고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이 소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의지로는 이 욕망을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이런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성결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출 19:2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의 몸을 성결케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또한 출 29:32을 보면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거기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인을 새겨 넣어 제사장들의 관 전 면에 달라 명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은 성막에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결에는 헌신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성결한 삶이란 곧 헌신하는 삶을 말합니다.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되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쓴 뿌리는 점점 힘을 잃게 되게, 점점 우리 안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죄의 쓴 뿌리는 모양만 남게 되고 어떤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 5:22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적극적인 헌신의 삶을 살게 하시므로 우리 삶 속에 이렇게 아름다운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우리 심령을 사랑으로 채우십니다.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니다. 이 땅에 평화를 이루게 하십니다. 인내하게 하시고, 착한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진실하게 하시고 온유하게 하시고 또한 절제하게 하십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지만 성령께서 이렇게 살게 하십니다.
우리 안에 이런 성령의 열매들이 맺히게 되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쓴 뿌리들은 그 힘을 잃게 됩니다. 모양은 있으나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결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성결을 이루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이 성결은 하루 아침에 은혜 받았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조금씩 평생토록 이루어 가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은 우리 힘으로는 이 성결을 결코 이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결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만 성결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