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이야기는 끝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이제 끝이겠지...’ 라고 생각하면 언제나 그에게 다가서는 것은 시작이라는 단어였다. 그리고 그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끝에서 시작한 사나이. 바로 대전 시티즌의 주승진 선수였다.
10월 16일 저녁 대전광역시 중구 문화동에서 주승진 선수를 만나볼 수 있었다. 대전의 자주색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아닌 티셔츠를 입은 모습은 왠지 낯설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사라지지 않는 미소는 인터뷰 내내 편하게 해주었고,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대전의 후기리그
전기리그 3위, 컵대회 4위로 지난 2003년 이후 최고의 성적을 달리던 대전. 하지만 대전은 후기리그에 들어서면서 이관우의 이적, 주전 수비수 최윤열의 부상 등 많은 악재를 겪으며 부진에 빠졌다. 그로인해 팀 내 고참급 선수인 주승진 선수의 안타까움과 마음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음고생이 참 심했어요. 특히 홈에서 펼쳐진 제주와 전북전 패배의 안타까움은 표현을 못할 정도였죠. 그리고 제가 이제 팀 내 고참급 선수이기 때문에 부담감이 더 컸어요. 정말 프로에 처음 입단 했을 때는 형들 따라 열심히 하면 되었는데, 이제 그 위치가 아니잖아요.”
하지만 침체된 분위기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전 최윤겸 감독과 선수들 모두 승리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감독님께서는 항상 한 경기를 치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세요. 실제로 다음에 상대할 팀에 대한 분석을 일주일 내내 하세요. 아마도 상대편 경기 비디오를 10번 넘게 보실 거예요. 저희 선수들에게 상대 요점만 이야기해주시죠. 그리고 항상 저희 선수들을 배려해주시고, 생각해주시는 분이예요. 그래서 더 미안하더라고요.”
“저희 선수들도 미팅을 많이 가졌어요. 정말 모두 잘하려는 의지도, 각자 생각하는 것도 참 많았어요. 그렇게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자주하다보니, 좀 알겠더라고요. 그리고 선수들 모두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 또한 들었죠.”
많은 노력 끝에 대전은 지난 15일 포항과의 경기에서 46일 만에 승리를 거두었다. 주승진 선수 개인에게도 모든 것을 털어낼 수 있는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어제(15일)경기에서 이겨서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마음고생도 털어내고. 결과적으로 많이 아쉽네요. 저희가 후기리그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야 했었는데요. 하지만 아직 리그는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드려야죠.”
자신의 플레이 대한 생각
1975년생으로 대전에서 왼쪽 윙백을 담당하고 있는 주승진 선수의 주변의 평가는 이렇다. 100미터를 12초에 뛸 정도로 빠른 발을 가지고 있고, 경기력의 기복이 없다. 그리고 자기관리가 뛰어난 선수이다.
이렇게 축구 선수가 갖춰야 할 조건을 두루 갖춘 주승진 선수. 하지만 자신이 보는 자신의 플레이는 한없이 작아 보이기만 하다.
“저는 순발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빠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제가 초등학교 3, 4학년 시절 육상 선수를 했습니다. 주로 200미터를 많이 뛰었는데, 그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특히 치고 나갈 때가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기복이 없다고 봐주시면 진짜 고맙죠. 저는 선수가 기복이 없다는 것은 꾸준히 해야 한다는 말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수가 꾸준히 하기 위해서는 항상 경기에 나서야 가능하죠. 그런 면에서 볼 때 제가 참 운이 좋았어요. 부상으로 1달 이상 쉬어 본적인 단 한 번밖에 없었죠. 그래서 기복이 없다는 것 같아요.”
“그리고 솔직히 현대 미포에 있을 땐 여유가 많았어요. 그래서 동료들과 술 한 잔 기울일 때도 있었죠. 하지만 대전에서는 일정이 빡빡하기 때문에, 여유가 없어요. 그리고 제가 실력이 특출 나지도 않기 때문에, 프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생활밖에 없더라고요.”
힘들기만 했던 학창 시절
주승진 선수와 축구의 만남은 다른 축구 선수들과 비슷했다. 빵과 우유. 그리고 친구. 바로 이 세 가지가 좋아서 축구를 시작했다.
“축구 시작은 남들이랑 똑같죠. 빵과 우유가 좋아서 시작했어요. 그리고 제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육상을 했었는데, 운동회 같을 때, 제가 뛰는 것을 축구부 코치님께서 보시고, 저에게 축구를 하자고 권유하셨어요. 전 그때 당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축구를 시작했죠.”
“그리고 5학년 끝날 무렵 울산에서 펼쳐진 전국 소년 체전에서 저희 학교가 준우승 한 것이 가장 큰 계기가 되었어요. 그 때 즐거운 추억 하나가 있어요. 자랑스럽게 준우승을 하고 학교에 오니, 울산에서 어떤 여자 분이 저에게 팬레터 하나를 보내주셨어요. 처음 받아보는 팬레터였거든요. 그 때 제가 좀 인기가 있었죠.(웃음) 아직도 그 편지는 가지고 있어요. 그 여자 분이 지금 뭐하시는 지 궁금하네요. 아마 아줌마가 되었겠죠?”
즐거운 추억이 가득한 초등학교 시절. 하지만 초등학교 이후 학창 시절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중학교 시절에 제가 축구를 하기 힘들 정도로 키와 체격이 자라질 않았어요. 그런 와중에 저희 집이 수도권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죠. 그래서 부모님께서 축구를 그만하고, 공부하자고 하셨어요. 하지만 전 그때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좋았고, 축구가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만 전주에 남아서 계속해서 축구를 했었죠.”
“부모님과 떨어져 생활하면서 그리운 것이 하나 있었어요. 바로 어머님의 따뜻한 밥 한 공기였죠. 그리고 선후배 간의 엄격한 위계질서가 저를 많이 힘들게 했죠. 하루에 운동을 아침, 점심, 저녁, 밤. 이렇게 4번을 하면서 몸도 많이 지쳤는데. 위계질서 때문에 정신마저 많이 지쳤거든요.”
학창 시절 주승진 선수는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청소년 대표팀에 뽑힌 적이 없었고, 그가 다닌 전주 공업 고등학교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축구를 시작할 때 대표의 꿈을 꾸었는데. 축구를 계속 하디 보니. 제 실력은 대표감이 아니라고 느꼈어요. 한 마디로 평범했죠. 그래서 저는 열심히 하자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달려온 것이 지금의 제가 온 것 같네요.
그리고 고등학교 때 저희 학교 성적이 좋지 못했어요. 연습 시합할 때는 잘 했는데, 꼭 대회만 나가면 예선 탈락하고 되돌아 와야 했죠. 학교 성적이 좋지 않다보니, 부담 많이 되었어요. ‘어떻게 하면 대학에 갈 수 있을까? 아니면 그만 두어야 되나?’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이 정말 많았죠.”
“그나마 저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제가 대학 진학 당시에는 상비군 제도라고 있었어요. 시도별로 선발해서 나가는 대회가 있었는데, 제가 그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고, 상비군에도 뽑힐 수 있었죠. 그래서 제가 상비군 제도에 의해 전주대에 갈 수 있었어요.”
어렵게 진학한 전주대. 하지만 주승진 선수가 재학하던 당시 전주대의 전력 역시 강팀이 아닌 약팀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우승의 달콤함보다 패배의 쓴잔이 많았다. 하지만 약팀에 있다는 것은 그에게 다른 하나를 가르쳐 주었고, 지금의 주승진 선수가 프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다.
“당시 전주대는 체력으로 승부를 거는 팀이었어요. 감독님께서 저희 팀이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선수들에게 많이 뛰는 것을 주문 하셨어요. 그래서 대학교 시절 400M 운동장 트랙을 정말 많이 뛰었어요. 그 때 실력은 부족했지만, 체력 하나는 자신이 있었죠. 지금 뛰는 데도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즐거운 추억이 가득한 현대 미포 시절
주승진은 대학교 졸업 후 바로 K-리그 무대에 뛰어들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고, 새로운 도전을 향해 뛰었다. 주승진 선수가 새로운 마음으로 노크한 팀은 바로 현대 미포였다.
“대학 졸업 후 저는 부산 연습생으로 들어갔어요. 실력이 없었기 때문에 K-리그 무대에 올라갈 수 없었죠. 그리고 그 때가 IMF로 모든 사람이 힘들어하던 98년도였어요. 저도 역시 많이 힘든 시기였죠. 그래서 부산에서 1,2달하고, 운동을 그만 둘 생각으로 나왔어요.
하지만 그 때 정말 시기가 참 잘 맞은 것 같아요. 부산에서 나온 뒤, 현대 미포에서 선수 선발 테스트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서울로 갔죠. 고려대와 경희대에서 연습을 많이 하고, 테스트를 받았어요. 결과는 합격이었죠. 그 때 ‘비록 내가 실력이 부족해서 프로에는 못 갔지만, 실업에서 다시 한 번 새롭게 시작해보자. 그리고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하자.’ 라고 굳은 다짐을 했죠.”
지금 N리그에 속해있는 현대 미포는 98년 당시 신생팀이었다. 신생팀 인만큼 하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했고, 끝에서 기회를 잡은 주승진 선수의 의지 역시 대단했다. 그리고 뜨거운 열의만큼 성적이 뒤따라오는 것은 당연했다.
“제가 입단했을 당시 저는 아직 주전 선수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부터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인내심과 체력이었어요. 그거 하나 믿고 정말 열심히 뛰었어요. 그 때 당시 감독님이었던 조동현 감독님께서 제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셨는지, 저에게 기회를 한 번 주셨어요. 저는 그 기회를 잡기 위해 열심히 했었고, 주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죠.”
“현대 미포에서 뛰면서 축구 인생 처음으로 우승이라는 감격을 누려봤어요. 99년 추계 선수권 대회에서 저희 팀이 우승을 했었죠. 정말 그 때 기쁨은 말로 표현 못 할 정도였죠. 제가 처음으로 우승한 대회였어요. 아마도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는 그 대회인 것 같아요.”
우승의 달콤한 기억을 안겨다 준 현대 미포.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당시 현대 미포 감독이었던 조동현 감독과 이영익 코치와의 만남은 주승진이 한 단계 발전할 수 있게 만든 만남이었다.
“조동현 감독님은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제가 조동현 감독님께 많은 것을 배웠고,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당시 조동현 감독님은 개인 능력을 많이 강조하셨어요. 축구는 1대1능력에서 이겨야 만이 이길 수 있다고 하셨거든요. 그리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많이 키워주셨죠. 그리고 저를 대전에 올 수 있게끔 도와주신 이영익 코치님도 너무 고맙죠. 말없이 저를 많이 도와 주셨거든요.”
주승진 선수는 현대 미포에서 인정을 받았고, 부주장으로 선임될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은퇴 후에도 안정된 직장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주승진 선수에게 도전이라는 단어가 다가왔다. 바로 평소에 꿈꾸던 K-리그 무대로의 진출이었다.
“이영익 코치님께서 대전에 가신다고 하니까, 저는 코치님께 ‘좋은 후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후배들에게 기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말씀 드렸어요. 대표적인 예로 지금 전남에서 뛰고 있는 김효일 선수였거든요. 그런데 정작 기회를 준 것은 바로 저였죠.”
“사실 K-리그 진출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 때 현대 미포에서 팀에 오래있었던 선수들이 은퇴하면 직원으로 채용해 주었어요. 선배들의 선례도 있었고, 저도 1년 만 더 뛰고 직장 생활을 하려고 했었죠. 그런데 정말 운이 좋게도 저는 마지막에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2002년 시즌이 끝나고 휴가 준비를 한창 할 때였어요. 갑자기 전화가 울리는 거예요. 그 전화가 바로 대전에서의 입단 제의였죠. 전 도전해서 실패하더라도, 제 목표인 K-리그 무대 진출을 이루었기 때문에 잃을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망설임 없이 도장을 찍었죠.”
대전 시티즌 3번 주승진
머릿속에 은퇴의 그림자가 그려질 때, 다시 기회를 부여잡은 주승진. 하지만 입단 해인 2003년, 당시 그의 나이는 29살. 신인 치고는 많은 나이였기에, 부담감은 어느 누구보다 많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큰 부담감 같은 것은 갖지 않았어요. 이영익 코치님께서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코치님 얼굴에 먹칠하지 말자는 생각만 했었어요. 제가 주전으로 뛴다는 생각도 없었고, 저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 몫은 최대한 하자였어요. 이렇게 빨리 주전 자리가 저에게 찾아올 줄도 몰랐어요.”
“감독님과 코치님께서 이른 기회를 주셨고, 저는 인정을 받고 싶어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나마 욕 안 먹어서 다행 이예요. 시간이 지나서 이영익 코치님께서 저에게 ‘너 영입하면서 많이 힘들었다. 나이도 많지, 경력도 없지. 그렇기 때문에 부담이 많았었다.’ 말씀을 해주셨어요. 정말 내색 한 번도 해주신 적 없거든요. 제가 적응을 다 하니까 해주시더라고요. 정말 고마웠어요.”
운이 정말 좋았다. 2002년 팀 해체 위기를 겪던 대전은 팬들의 사랑과 지원 속에 다시 태어날 수 있었고, 최윤겸 감독이 새롭게 부임하면서 팀이 바뀌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주승진 선수는 입단했다. 팀이 새롭게 시작하기에, 신인 주승진 선수는 이른 기회에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K-리그를 치루기 전에 저희 팀이 AFC 챔피언스 리그에 나갔어요. 그 대회가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 경기에서 긴장도 많이 하고, 실수를 진짜 많이 했어요. 그런데 감독님께서는 저를 계속 투입하시면서 기회를 주셨어요. 감독님께서 저에게 큰 배려를 해주신 것 같아요. 그리고 팀이 새롭게 변화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저에겐 큰 도움이 된 것 같네요.”
“챔피언스 리그에서 큰 무대를 미리 경험했었지만, K-리그 개막전이었던 성남과의 경기에서도 긴장이 되는 건 마찬가지였죠. 정말 그 때 실수만 하지 말고, 제가 맨투맨 했던 선수를 잘 막자 등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했어요. 그 때 신태용 선수와 이기형 선수를 막았는데, 배태랑에다가, 정말 잘하는 선수들이잖아요. 저보다 잘 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마음 놓고 열심히 뛰었죠.”
2003년 대전은 컵 대회에서 팀 역사상 최고 성적인 2위에 올랐다. 주승진 선수 역시 4월 2일 포항과의 경기에서 첫 어시스트를 한 이후 상승세를 타면서, 팀 성적의 버팀목이 되었다.
“포항전 어시스트 이후 전 자신감이 붙었고, 게임이 재밌어 졌어요. 특히 포항전 어시스트는 제가 좋아하는 크로스 였어요. 이영표 선수처럼 감아서 올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슈터링처럼 강한 크로스를 올렸는데, (김)종현이 형이 넣어주었죠. 그 골로 (김)종현이 형도 상승세를 타고, 저도 상승세를 타는 계기였죠. 자연스럽게 팀 성적도 많이 올랐고요.”
“정말 2위 할 때는 다른 세계에 와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프로에 와서 많은 관중앞에서 경기도 하고, 팀 성적도 많이 좋아지면서, 저는 처음으로 정말 축구하길 잘 했다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그리고 그 땐 정말 진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어요. 한 골 먼저 실점해도, 우리는 역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실제로 역전승도 많았죠,”
대전 성적만큼 대전 시민들의 사랑도 대단했다. 특히 2003년 6월 2일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 4만 3천여 명의 관중이 찾은 울산과의 경기는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정말 그 때는 제가 붕 떠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표정에서 항상 웃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나타났죠. 그리고 꽉 찬 경기장을 보니, 정말 월드컵 때 이런 분위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하지만 경기에서는 저희가 4대0으로 졌죠. 정말 선수들끼리는 이기자는 열의가 대단했었는데요. 그 이후로 저희 팀이 울산에게 약해졌어요.”
다시 끝으로...
은퇴를 앞두고 선택한 도전. 그 도전은 그에게 다시 한 번 성공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하지만 2004년 시즌을 앞두고 주승진 선수에게 찾아온 부상은 다시 끝으로 향하게 했다.
“2004년 시즌 앞두고 남해 전지훈련에서 연습 경기를 하다가 아킬레스건을 밟혀서 부상을 당했어요. 제가 그 때까지 운동하면서 단 한 번도 한 달 이상 쉬어본적이 없었는데,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3달을 쉬어야했죠. 재활이 잘 되지 않아서, 수술의 기로에 서기도 했었을 정도로 고생이 심했어요.”
“그리고 제가 한창 더워질 시기인 6월 달에 복귀 했어요. 그런데 몸 상태가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에, 체력도 부족했고, 패스미스도 상당히 많았죠.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주변에서 다치고, 플레이가 살아나지 못하니까, 2년차 징크스라고 힘내라는 말을 많이 들었죠.”
2년차 징크스와 부상에서 벗어나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었던 2005시즌. 하지만 주승진 선수에게 다가오는 것은 어두운 그림자일 뿐이었다.
“2005시즌은 아무것도 모르고 프로에 와서 하다 보니, 제 체력이 다운이 되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운동도 꾸준히 해보고, 몸에 좋다는 것 다 먹어도 회복이 안 됐어요. 정말 떨어지는 것을 잡을 수 없었고, 제가 무엇을 해야 될지를 몰랐었어요. 그래서 자신감도 많이 떨어졌고, 은퇴해야겠다는 생각을 심각하게 했었죠.”
“그 때 임기한 코치님께서 저와 미팅을 자주 해주시면서, ‘괜찮아. 극복할 수 있어.’라는 말과 함께 자신감을 많이 심어 주셨어요. 그리고 제가 ‘팀에 도움이 안 돼서 너무 부끄럽습니다. 은퇴하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더니, ‘그건 아니다. 더 떨어진다. 극복해야한다.’라며 힘을 불어 넣어 주셨어요. 정말 너무 고마웠어요.”
은퇴의 기로에 서서
“올 해 시작 전 ‘올해 못하면 정말 은퇴해야겠다. 50% 이상의 모습을 보여드려야, 운동을 계속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각오도 어느 해보다 남달랐고요. 다행히 올해는 작년과 같이 자신감 없는 플레이가 아닌, 뭔가 하려는 플레이를 한 것 같아서 위안이 되죠.”
올해 주승진 선수는 분명 지난 시즌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현재 32경기 출장하여 2골과 3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주승진 선수의 개인 시즌 최다 골과 어시스트를 기록 중이다. 또한 4월 5일 제주와의 경기에서 프로 통산 100경기 출전 기록을 세우며 제 2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다.
“올해 초에 100경기를 돌파했어요. 한 경기, 한 경기 뛰다 보니 이렇게 쌓였더라고요. 대전에서 게임 조금 뛰는 걸로 만족했었는데. 50경기, 100경기 뛰다 보니까 욕심이 생겼죠. 200경기까지 목표로 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계산해보았을 때, 힘들 것 같아요. 사실 오늘 (장)철우형과 이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200경기 목표로 뛰어 보래요. 그래야 제가 운동에 매진할 수 있다고. 200경기를 목표로 뛰어야 겠어요..”
10년 후, 주승진의 모습
처음에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당연히 주승진 선수가 한 가족의 가장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가장이 모습이 아닌, 이제 곧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의 모습이었다.
“결혼이요? 곧 해야죠. 이야기는 오가고는 있는데, 아직은 날짜는 잡지 못했어요. 곧 있으면 해야죠.”
이제 어느 덧 한 시즌이 끝나가고 있다. 그리고 축구 선수 주승진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의 주승진 선수를 그려볼 시기가 되었다. 그래서 이 질문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10년 뒤, 주승진 선수 어떤 모습일까요?
“사실 오늘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나의 10년 뒤에 모습을 물어보지 않을까? 그 전까지 은퇴를 하면 지도자를 하겠다는 확신이 없었어요. 그러나 이제 점점 해보고 싶어요. 특히 유소년 선수들을 키우고 싶네요. (주승진 축구 교실 어때요?) 제가 국가대표 경력이 있었다면, 축구 교실 같은 것 해봤겠지만, 전 없잖아요. 감독님이나, (최)은성이형이 한다면 모를까? 아마 축구 교실 코치는 가능할 것 같은데요. 전 아이들에게 기본기를 가르쳐 주고 싶어요.”
K-리그 명예기자 김정현
첫댓글 진짜 좋은 선수 ㅠㅠ
알레 !!!!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전북전 제주전 질때,, 아쉬웠죠,, 기복없는 주승진 선수 내년에도 만날수 있겠죠?
알레 시티즌 최고 !!
주승진 선수 앞으로도 좋은 활약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