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삼랑성 동문 방면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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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삼랑성 동문
[강화 삼랑성(江華 三郞城)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연대 미상의 산성. 1964년 6월 10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번지
1964년 6월 10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넓이 24만 5997㎡, 둘레 약 1km이다.
성의 축조 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다만 단군(檀君)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로 그 이름을 삼랑산성(三郞山城) 혹은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곽의 축성 구조를 보면 잡석(雜石)으로 축조되어 삼국시대 석성구조(石城構造)를 보여 주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보수(補修), 조선시대에 중수(重修)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문은 네 곳에 있으며 문루(門樓)는 남문에만 있어서 종해루(宗海樓)라 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이 소장된 마니산의 사고(史庫)가 옮겨와 보존되었었다. 그리고 성내에는 유명한 전등사(傳燈寺)가 있으며,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에 프랑스군에 승리한 기념비로서 양헌수 승전비(梁憲洙勝戰碑)가 서 있다.
이러한 삼랑성은 특히 마니산 전설과 더불어 단군신화와 관련되는 흥미있는 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강화 삼랑성 동문 옆에 있는
전등사 템플스테이 하는 분들을 위한
식사 장소인
전등각(傳燈閣)
양헌수 승전비에 관한 안내문
양헌수 승전비
[삼랑성 동문~전등사] 구간
탐방로 도중의
전등사 소나무
(사진 왼쪽의 소나무로, 수령이 300년 이상임)
전등사 소나무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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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이 공양간인
전등사 선불당
전등사가 보유한 문화재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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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傳燈寺)
강화도 남부 정족산 정족산성(삼랑성) 안에 있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대웅전, 약사전, 범종 등 대한민국의 보물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사고가 경내에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건축되었다가 고려 시대를 거치며 증축과 개축을 이어오다 광해군 때 화재로 인한 소실로 다시 재건되었다. 창건될 때는 진종사였으나 후에 전등사로 바뀌었다.
전등사로 들어가는 입구는 동문과 남문 두 곳이 있다. 동문에는 전등사가 호국불교의 진원지임을 증명하는 양헌수승전비가 있다. 병인양요 때 전략적 요충지였던 전등사에 쳐들어온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고종 10년인 1873년에 건립한 것이다. 남문에서 종해루를 지나 대조루로 가는 길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700년이 넘은 보호수들로 노승나무, 동승나무로 불린다. 또한 경내에 현대식으로 지은 법당 무설전과 서운갤러리가 있으며, 갤러리에서는 불교미술전이 상시 운영되고 있다.
체험 프로그램으로는 템플스테이가 준비되어 있다. 체험형과 휴식형으로 나누어져 있고, 체험형은 첫날 오후 1시에 시작하며, 사찰 예절, 공양, 108배, 좌선에 이어, 다음날 예불과 스님과의 차담으로 이루어지며 점심 공양 후 끝난다. 이에 비해 휴식형은 첫날 12시에 시작해 사찰 예절, 범종 타종, 예불에 이어 이튿날 예불, 울력(일을 돕는 것), 점심 공양 후 종료한다.
전등사 입장요금 : 무료
전등사 안내도
전등사 강설당
강화 전등사 대웅전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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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전등사 대웅전
[인천 섬 기행] 고건축으로 살펴보는 전등사 대웅보전
인천투데이 기사 입력일 : 2020.10.12.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 천혜의 요새 삼랑성과 전등사 (4)
조선 중기 대표적 건축물인 전등사 대웅보전
어떤 대상을 극도로 존경하면 한편으로는 스스로 위축돼 두려움도 생기게 마련이다. 이를 외경심(畏敬心)이라 한다. 외경심을 가진 대상을 만나면 자연스레 자신을 숙이고 대상을 우러러 보게 된다. 전등사 대조루 밑을 통과하며 대웅보전을 보는 심정이 바로 그렇다. 계단 위 정면으로 고개를 들고 우러러볼 수 있게 절묘한 자리에 현세불인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보전이 위치하고 있다.
대웅보전이 만들어진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1266년(원종 7)에 중건됐다는 ‘전등본말사지’의 기록으로 보아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이다.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1614년(광해군 6)에 불에 모두 타버려 1621년에 새로 지었고, 그 후에 여러 번 중수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규모가 큰 건축물은 아니지만, 건물 외부와 내부가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이다.
대웅보전의 기단과 기둥
대웅보전 기단 형태는 장방형으로 돼있는데, 산지의 경사를 이용해 건물을 지었기에 앞에서 뒤로 갈수록 기단의 높이가 낮아지며 수평을 맞추고 있다. 기단 정면은 매우 큰 자연석 몇 개를 그대로 맞춰놓아 육중한 느낌을 준다. 이에 비해 측면은 가로로 얇은 자연석으로 허튼층쌓기를 해서 날렵한 느낌이 들게 했다.
계단은 원래 기단 정면 왼쪽과 오른쪽, 두 곳으로 올라가게 돼있었는데 기단 왼쪽은 허물고 기단 바깥으로 계단을 만들었다. 그래서 기단 왼쪽은 정면의 큰 자연석들과 어울리지 않게 작은 돌들로 쌓여있다. 정면 가운데 장대석으로 쌓은 넓은 계단은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에 없는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 이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데, 깔끔하게 깎아 자연스럽게 쌓은 기단석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기단 상단부는 검은색의 방전(方甎, 네모난 벽돌)을 깔아 마감했다.
주춧돌(초석)은 모두 자연석을 사용했는데 건물 네 모서리에 있는 것들이 대체적으로 나머지 주춧돌보다 큰 편이다. 자연석 주춧돌은 윗면이 고르지 않고 울퉁불퉁해 위에 올리는 기둥밑동을 돌에 맞춰 깎는 ‘그렝이질’ 기법을 사용했다.
자연석 초석(막돌초석) 위에 올린 배흘림기둥은 기둥 밑에서 3분의 1이 되는 곳의 지름이 가장 크며, 밑동 지름은 기둥머리보다 크다. 마치 항아리를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인데 정면 기둥에는 주련(柱聯, 시구나 문장을 종이나 판자에 새겨 기둥에 걸어둔 것)을 걸어 측면에서 기둥의 모양을 살피는 것이 좋다. 배흘림기둥은 거대한 지붕의 무게를 안정적이고 탄력적으로 받치고 있어 지붕이 내리누르는 느낌을 없애주는 효과가 있다.
건물 네 귀퉁이에 서있는 귀기둥(우주, 隅柱)은 귀솟음과 안쏠림 기법을 사용했다. 이 기법들은 착시를 교정해줘 건물 전체의 균형을 잡아 안정적으로 보이게 한다. 귀솟음은 건물을 정면에서 보았을 때 중앙에 있는 기둥보다 좌우 모서리로 갈수록 기둥의 높이를 조금씩 높여 지붕면이 하단으로 쳐져 보이지 않게 한 기법이다. 안쏠림은 오금법이라고도 하는데 기둥머리를 건물 안쪽으로 약간씩 기울여 건물이 바깥쪽으로 벌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바로잡는 방법이다. 이 두 방법은 매우 정교한 것이어서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데 귀솟음은 눈으로 쉽게 살펴볼 수 있으나 안쏠림은 기울이는 각도가 크지 않아 시각적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대웅보전 공포(栱包)와 창호, 지붕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면 이를 기둥머리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건축부재가 필요한데 이를 창방(昌防)이라고 한다. 이는 공포를 거쳐 전달되는 지붕 하중을 받아 버티며 기둥으로 하중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평방(平防)은 다포계 건축에서 창방 위에 설치해 공포를 직접 받고 있는 부재이다. 대웅보전은 다포계 건축이기에 창방과 평방을 모두 갖추고 있다.
공포는 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춰 댄 나무들을 일컫는다. 건물 지붕의 무게를 분산해 구조적으로 안전하게 하며, 건물의 높이를 높여주고 처마를 더 길게 뽑을 수 있게 해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장식적인 면에서는 그 구성과 공작이 섬세하고 화려해 건물의 격식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공포의 종류는 보통 세 가지로 분류하는데, 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리는 주심포(柱心包)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올리는 다포(多包), 주심포 양식을 간략화한 것으로 새 날개 모양의 부재를 끼운 익공(翼工) 양식이 있다. 대웅보전은 다포양식인데 바깥은 2출목, 안쪽은 4출목을 사용해 내부 공간을 더 확장했다.
공포와 공포 사이에는 좌불 형상의 불상을 그려 넣었다. 창방의 양끝 좌우에 빠져나온 구름과 같은 조각 부분에는 연꽃봉오리를 새겼고, 대웅보전 현판 좌우로 도리(道里, 서까래를 받는 기다란 나무로 원형인 굴도리와 방형인 납도리가 있다)를 받치는 장혀에는 귀면과 용을 새기는 등, 장식적 요소를 증가시켰다.
대웅보전의 창호는 정면 3개소, 우측면 1개소, 좌측면 2개소, 뒷면 2개소가 설치돼있다. 이 창호들 중 빗살문(살대를 45°와 135°로 짜 맞춘 창호)의 문짝을 보면 정면에는 칸마다 세 쪽의 문인 삼분합문을 달아, 들어 올려 걸쇠에 걸 수 있게 만들었다. 고온다습한 여름을 이겨내는 선조들의 지혜가 반영된 것이다. 좌측면과 우측면은 외여닫이로, 뒷면은 이분합 쌍여닫이로 구성됐다. 나머지 좌측면 뒤와 뒷면 서쪽의 문은 문틀을 짜고 널판을 댄 우리판문을 달았다.
지붕의 뼈대를 이루는 서까래는 부연을 달아 보통 격이 높은 건물에 사용하는 겹처마 형태를 보인다. 지붕 역시 대웅보전의 격에 맞게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처마 선을 보면 양쪽 처마 끝을 들어 올려 완만한 곡선을 이루게 했는데 부드러움보다는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처마 끝에 올린 기와는 빗물이 나무 부재에 흘러드는 것을 막기 위해 막새기와로 마감했다. 수막새 위에는 하얀 연꽃봉오리가 일렬로 늘어서 있다. 이를 백자연봉이라 한다. 많은 사람이 이를 보고 혹시 피뢰침을 올린 것 아니냐고 묻는다. 백자연봉은 막새기와가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못(와정)을 박아 고정하는데, 못의 부식을 막기 위해 백자연봉으로 덮은 것이다. 주로 사찰의 대웅전에 사용하는데 실용적인 기능 외에도 법당을 연꽃으로 장식한다는 종교적 의미도 갖고 있다.
대웅보전을 떠받치고 있는 조각상은 나부상(裸婦像)인가?
대웅보전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귀기둥의 귀포(네 모퉁이에 있는 공포) 위에 있는 나부상이다. 마치 지붕을 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장식적인 기능만 한다. 정면 동쪽 앞과 뒤의 나부상은 왼손과 오른손 하나씩 들어 처마를 받치는 모습이고, 정면 서쪽 앞과 뒤의 나부상은 둘 다 양손을 들어 받치는 모습이다. 여기에는 구슬픈 전설이 있다.
옛 전등사 법당을 지은 목수는 세상에 이름난 도편수(집을 지을 때 총책임을 맡는, 목수의 우두머리)였다. 고향을 멀리 떠나온 그는 대웅보전 공사 중에 절 아래 마을 주막을 드나들다 주모와 눈이 맞았다. 그는 공사가 끝나면 주모와 살림을 차릴 생각에 공사 노임을 모두 여인에게 맡겼다.
그런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공사가 끝나갈 무렵 주모는 달아나버렸다. 이에 목수는 그 주모를 닮은 여인상 네 개를 조각해 법당 추녀 끝 네 귀에 앉혀 무거운 법당 지붕을 떠받치게 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을 처음 들었을 때 도편수의 저주도 무시무시하지만 이런 파격을 받아들인 주지스님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이 나부상이 동자상 혹은 인도의 야차(夜叉)에서 유래한 불법수호신이라는 연구가 있다.
‘조선고적도보’에 황해도 황주군 구락면(현 황해북도 연탄군 연탄읍)에 위치한 심원사 보광전에 전등사 나부상처럼 한 손을 들고 처마를 받치고 있는 조각상 사진이 있다. 처마를 받치고 있는 조각상을 귀포에 올리는 방식이 법당을 짓는 양식 중 하나는 아니었을까? 이를 모른 호사가들이 벌거벗은 나부상으로 보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낸 것은 아닐까?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강화 전등사 대웅전의
내부 모습
강화 전등사 대웅전 앞에 있는 문루인
대조루
전등사 관음전
전등사 약사전
전등사 약사전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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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명부전
이영섭 작가의 작품인
마애불
세계 최초로 발굴기법을 사용하여
창작활동 중인
이영섭 작가의 작품세계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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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섭(조각가)
이영섭(1963년~ )은 대한민국의 조각가이다. 세계 최초로 발굴 기법을 고안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소박미, 고졸미, 졸박미 등을 특징을 보이는 한국적인 미를 선보인다. 그의 작업장은 현재 경기도 양평에 위치하고 있다.
생애
경기도 여주시 출신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미술교사로 발령을 받았지만 교사직을 포기하고 대학에서 배운 서양의 미가 아닌 전국 답사를 통해 한국의 미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중학교 3학년 때 땅을 파서 세웠던 2미터가 넘는 조각 작품을 떠올리며 1998년 고달사지에서 진행중인 발굴 현장에서 영감을 얻어, 발굴 기법을 고안해 냈다. 현재에도 한국의 미를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개인전과 단체전 등의 전시를 통해 왕성한 작품 활동 중이다.
작품 초기
테라코타
작품 활동 초기 조각가 이영섭은 테라코타 작업으로 미술계에 등단했다. 그의 '사실적인 작품성'과 '뛰어난 테크닉'을 갖춘 테라코타 작업은 애호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테라코타를 통한 작품이 호평을 받을 수록 작가는 작품 보다도 자신의 기술에 매몰되고 있다고 느끼던 조각가 이영섭은 ‘잘 만드는 테크닉을 넘어’서 ‘흔적과 생성이 공존’하고, ‘풍부한 이야기속 에 인간 삶의 솔직담백함을 담아’내며, ‘과거와 현재·미래가 하나로 융합된 그런 순환적 생명력을 품은’ 작품을 갈망하게 된다. 결국 자신의 기술을 버리고 전국 답사를 다닌 끝에 작가만의 "한국적인 작품의 방향”을 잡았다.
고달사지와 작업의 전환
작업에 대한 고뇌를 하던 조각가 이영섭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들어온 고달에 대한 전설을 쫓아서 고달사지에 정착하게 된다. 그런던 중, 1998년 우연한 기회에 경기 여주 고달사지 발굴 현장을 지켜보게 되었다. 찬란 했던 통일신라 문화가 조선시대 유교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소멸 했다가 1000년 뒤 다시 드러나는 과정이 신기했다. 고달사지 옆 작업실에서 수도 하듯 유물과 출토의 의미를 고민했고, 잘 만드는 조각가가 아니라 ‘시간성’에 대해 얘기하는 작가가 되기로 작정했다. 그는 땅속의 유적과 유물은 물론 불상, 동자석 파편까지 오브제로 삼아 책에 나오지 않은 조각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결국 깎고 쪼아내는 기존 조각이 아니라 자연을 거푸집으로 삼는 조각의 기존 원리를 뒤집은 ‘발굴 조각’이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게 된다. 물론, 작품이 처음부터 마음대로 나온 것은 아니다. 작가는 "거푸집이 무너지거나 작품 형태가 의도한대로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죠. 마음에 들지 않아 깨버린 것도 부지기수고요. 재료의 정확한 비율을 찾는 데만 20년 넘게 걸렸습니다.” 라고 얘기한다.
예술성
발굴 기법
발굴 기법은 나무를 깎거나 돌을 쪼는 보통의 조각과 다르다. 먼저 작가는 한지 위에 조각하고자 하는 모습을 스케치한다. 그는 자신의 기억에 이미지를 각인 시키기 위해 이 과정을 반복한다. 그런 다음 작품의 거푸집이 될 땅 위에 스케치를 한다. 그는 평평한 표면이 3-D이고 그가 바닥 위에 평평하게 떨어진 것처럼 상상하고는 내부에서 바깥쪽으로 파는 것을 시작한다. 그는 유리와 보석처럼 그가 추가하고 싶은 다른 재료를 놓은 후, 작가가 고안해낸 혼합재료를 흙 틀 안에 부어 넣고, 마지막으로 흙으로 그 위를 덮는다. 그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작품을 발굴 하듯이 꺼낸 후 토양을 털어내고, 마지막 단계로써 작품을 물로 씻어낸다. 그렇게 나온 작품은 막 발굴 되어 나온 100년은 넘어 보이는 유물처럼 보인다. 언뜻 보기에, 작품은 거칠고 투박해 보이지만, 그 작품들을 오래 지켜보면 볼수록, 그것들은 정말 자연스러워 보인다.
발굴조각의 특징
흙을 거푸집으로 삼아서 나온 작품은 오랜 세월이 녹아든 듯 유물같은 조각은 자연스럽고 친근하다. 질박하면서도 세련미가 있다. 땅속에 묻힌 조각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 흔적과 질감이 고스란히 배어 나온다. 조각에 시간의 흔적이 됐다. “형상만을 보려는 사람들은 이해를 못할 겁니다. 인간이 오랫동안 추구한 비움의 공간이었습니다.”이라는 작가의 얘기처럼 그의 작품은 서양조각 보다도 반가사유상, 마애불 같은 우리 고유의 조각의 모습을 드러낸다. 또한 과거의 시간을 현재의 시간으로 돌리는 듯한 그의 작업은 18세기 조선시대 분청이나 백자 파편과 현대적인 느낌을 살리는 유리, 스테인레스, 보석 등의 오브제를 사용하면서도 한국의 미를 작품에 잘 살려내고 있다. 한국미의 특성들 가운데 하나는 모자란 듯하지만 세련되고, 투박하지만 편안하고 친근하며, 사유의 공간인 여백이 있다는 점이 있다. 세계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익숙한 어린왕자, 의자 등의 친숙한 소재를 통한 작품을 선보이지만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궁극은 한국의 미이다.
전등사 극락암
전등사 철종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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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철종
전등사 느티나무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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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이 400년을 넘은
전등사 느티나무
[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천혜의 요새 삼랑성과 전등사②
인천투데이 기사 입력일 : 2020.09.14.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전등사 노승나무와 동자승나무 이야기
삼랑성 역사가 깊듯이 이곳을 수백 년간 지켜온 나무도 많다. 나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이곳에서 일어난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텐데, 아쉽게도 아무 말이 없다. 다만 700여 년과 350여 년 된 은행나무만 과거를 들려준다.
전등사 마당에는 두 은행나무가 있는데 노승나무와 동자승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암컷, 수컷이라 해서 애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정성을 드리기도 하는데, 이 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는 맺지 않는다고 한다.
이 나무들은 전통차를 파는 죽림다원 아래쪽에 있다. 바로 아래에 있는 나무가 350여 년 된 동자승나무, 그 아래 있는 나무가 700여 년 된 노승나무다. 이 신기한 나무들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는 탄압을 받았다. 유생이나 관원들이 마음만 먹으면 탄압할 수 있을 정도였다. 승려들은 성곽을 쌓거나 다리를 놓는 일에 사역을 나가는 등 노예처럼 부림을 당했고, 사찰에서는 특산물을 공물로 바쳐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등사에 관가 사람들이 찾아와 아주 어려운 요구를 했다. 은행나무에 열매가 열릴 때쯤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열릴 수 있는 은행 열 가마니를 가져갔는데, 이번에는 스무 가마니를 요구했다. 동자승이 이 사실을 노승에게 알렸다. 노승은 동자승에게 그들을 미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저런 고민 끝에 백련사의 도술이 뛰어난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얼마 후 도착한 추송 스님은 은행나무가 더 열리게 하는 3일 기도를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모이고 관리들도 찾아왔다. 한 관리가 그게 가능하겠냐고 비아냥거리자 그의 눈이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 부었다.
드디어 3일 기도의 마지막 날, 추송 스님은 염불을 멈추고 축원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 축원 내용은 나무 열매를 맺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뜻밖의 축원에 모인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축원이 끝나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며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가 무섭게 내렸다.
사람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렸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 스님, 노승, 동자승 모두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날 이후 은행나무는 은행을 맺지 않았고, 전등사는 관가의 탄압에서 벗어났다. 이런 연후로 은행나무들은 노승나무와 동자승나무로 불렸다.
황당한 이야기 같지만 설화가 흥미와 교훈을 주기 위한 구연예술이라고 할 때 이 이야기는 설화의 요건을 충족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 탐관오리나 조세의 불합리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삼랑성 안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와 느티나무
은행나무 앞 길가 큰 바위 위에 비석이 하나 있다. ‘진무중군이공용의애휼승도영세불망비(鎭撫中軍李公容儀愛恤僧徒永世不忘碑)’이다. 진무(鎭撫)는 진무사(鎭撫使)의 준말로 강화도 진무영(鎭撫營)의 으뜸 벼슬을 말하는 것이고, 중군(中軍)은 종2품 무관직으로 각 군영(軍營)의 대장을 의미한다. 진무중군인 이용의가 승려들을 구휼한 것을 영원히 잊지 말자며 이 비를 세웠다.
비의 뒷면에 ‘동치칠년무진십이월 립(同治七年戊辰十二月 立)’이라 썼는데, 동치(同治)는 청나라 연호로 고종 5년(1868) 12월에 세웠다는 뜻이다. 병인양요(1866) 2년 후다. 전등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이용의가 정족산성을 수리했다. 아마도 병인양요 때 훼손된 삼랑성을 보수하는 것이 전등사를 지키는 방편이라 생각했으리라.
비의 앞면에 이를 알 수 있는 내용이 적혀있다. ‘저서루노 영보불우 용귀지공 비아청상(儲胥樓櫓 永保佛宇 傭鬼之工 庇我淸象)’. 저서(儲胥)는 군중(軍中)에 설치돼 적(敵)을 막는 데 쓰이는 울타리이고, 누로(樓櫓)는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성 위에 설치한 지붕이 없는 전망대 또는 망루를 의미한다. 해석하면 ‘삼랑성 망루를 수리한 것은 불당을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고, 넋을 고용한 공사로 나의 청상을 덮는 것이라’이다.
이 비석 건너편에는 400여 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늠름한 자태를 자랑한다. 1614년(광해군 6년)에 전등사가 화재로 모두 타버려 이듬해 중창을 시작해 6년 만에 완료하고 상량식을 거행했다. 이 느티나무는 중창할 때 풍치목으로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전등사(傳燈寺)의 유래와 배치
1942년에 편찬된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를 보면, 전등사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 그 이름을 진종사(眞宗寺)라 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전등사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그러나 당시 강화도는 백제의 영토였고, 백제가 불교를 공식 승인한 때가 384년인 것을 볼 때 강화도에 전등사가 세워지지는 않았다고 추정된다. 혹시 사찰의 격을 높이려는 후대의 윤색은 아닐는지. 그러나 1366년(공민왕 15년)에 제작된 향로에 ‘진종사’라는 절 이름이 나와, 단정적으로 부정할 수만은 없다.
‘고려사’에는 1259년(고종 46년)에 삼랑성 동쪽에 가궐(假闕)을 지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가궐이란 임금이 대궐 밖으로 멀리 떠났을 때 머물던 임시 궁궐을 말한다. 이런 관계로 고려 왕실은 1266년에 진종사를 크게 중창했으며, 16년이 지난 1282년(충렬왕 8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인기(印奇) 스님에게 바다 건너 송나라에서 펴낸 대장경을 구해 전등사에 보관하게 했고 옥등을 시주했다. 이를 계기로 ‘진종사’에서 ‘전등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불가에선 등불을 진리에 비유한다. 그 이유는, 진리는 어두운 곳을 환히 비추는 등불처럼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지혜롭게 하기 때문이다. 전등(傳燈)이란 ‘진리,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스승이 제자에게 서로 전해가는 것’을 의미한다. 불가의 법맥(法脈)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일을 마치 등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되는 것에 비유한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전등사라는 이름은 정화궁주가 옥등을 건네줬기 때문에 붙은 것이라기보다는 인기 스님이 송나라에서 가져온 대장경 중 송나라 승려 도원이 역대 부처와 조사들의 어록과 행적을 모아 엮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근거가 더 있다. 이밖에도 전등사의 대조루를 중건할 때 시주에 동참해주기를 바라는 모연문(募緣文)에 ‘육조의 의발을 상수(相授)하는 뜻에서 전등사로 개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전등사의 가람 배치는 전형적인 산지가람(山地伽藍) 형태를 따랐다. 절 입구인 대조루 아래를 통과하면 정면으로 남향의 대웅전이 중심을 잡고 있다. 대웅전 왼쪽으로 나란히 향로전, 약사전, 명부전이 남쪽을 바라보며 있다. 명부전 앞쪽으로 멀찌감치 담장을 둘러싸서 일곽을 이루고 있는 곳은 적묵당이다. 대웅전 오른쪽으로는 강설당이 있다.
이와 같은 가람 배치와 구성은 전등사의 역사와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실린 사진을 비교해볼 때 사찰의 본래 모습에서 많이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전등사가 강화도의 관광지로 각광받으면서 사세(寺勢)가 늘어 사찰 규모를 확장한 것이리라.
전등사의 문화유물
전등사는 등록된 문화유물을 꽤 많이 보유하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건축물로 대웅전과 약사전이 있다. 송나라 때 범종과 대웅전에 있는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명부전에 있는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일괄, 묘법연화경(법화경) 목판 등도 보물로 지정돼있다.
삼랑성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돼있다. 인천시 유형문화재로는 약사전 현왕탱, 약사전 후불탱, 청동수조, 대웅보전 업경대와 수미단, 약사전 석불좌상 등이 있다.
대조루와 대웅보전 후불탱, 강설당 아미타불탱 등은 인천시 문화재 자료로 지정돼있다. 이밖에 인천기념물인 양헌수 승전비와 인천향토유적인 정족산가궐지와 선원보각지가 있다.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수령이 400년을 넘은
전등사 느티나무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는
전등사 적묵당
전등사 무설전
강화의병 전투지였던
전등사에 관한
안내문
정족산성 진지에 관한
안내문
정족산성 진지에서 바라본
전등사
삼랑성 서문
[삼랑성 서문~정족산 정상]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삼랑성의 성벽
[삼랑성 서문~정족산 정상]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마니산
[삼랑성 서문~정족산 정상]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삼랑성 정상(정족산 정상)
삼랑성 정상(정족산 정상)에 있는
이정표
[인천 섬 기행]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에서 추억을 긷다
인천투데이 기사 입력일 : 2020.08.31.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천혜의 요새 삼랑성과 전등사(1)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ㅣ일 년에 몇 번은 가는 전등사와 삼랑성은 갈 때마다 느낌이 새롭다. 아담한 사찰이지만 꽤나 멋지게 지어진 대웅전과 약사전, 사시사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삼랑성의 풍광에 항상 눈이 호사를 누린다.
이밖에도 고려 가궐지와 정족산 사고가 있고, 이를 수호할 목적으로 설치된 정족산성진지, 병인양요를 승리로 이끈 양헌수 승전비 등 역사가 담긴 터전과 각종 재미있는 설화가 얽혀있어 하루 나들이의 최적 장소로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
30여 년 전에 강화도에 들어갈 때는 버스를 이용했기에 전등사에 가려면 온수리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걸어서 동문으로 올라갔다. 널따란 동문주차장을 지나면 향토음식점들이 나온다. 예전에 문을 닫은 삼학장여관에 여러 차례 묶으면서 강화도를 탐방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차량으로 이동하다보니 탐방 동선을 위해 남문을 이용한다.
사적 제130호인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인 부소, 부우, 부여가 쌓았다고 전해진다. 고려 시대에는 주로 삼랑성이라 불렸으나 조선 광해군 때부터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했다. 아마도 해발 222m인 정족산을 중심으로 봉우리 세 개가 솥의 다리처럼 받치고 있어 정족산성 또는 삼랑성이라 이름 붙였는데 호사가들이 단군이 쌓은 마니산의 참성단과 연결해 세 아들의 이야기를 붙인 것이 아닐런지.
삼랑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다. 그 위에 거칠게 깬 돌을 맞춰가며 쌓았고, 성벽 안에는 막돌을 채운 삼국시대의 축성 기법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쌓은 성으로 추정한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성의 둘레는 대략 2.3km로 포곡식 산성(골짜기를 끼고 주변 산 정상부와 능선을 따라 축조된 산성)이다. 현재 많은 부분을 복원해 멋진 산성 길을 만들었다.
삼랑성 안의 소소한 볼거리
삼랑성에는 원래 동서남북에 성문이 있었다. 영조 15년(1739)에 적이 접근하기 쉬운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宗海樓)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며 성곽과 문루가 무너졌던 것을 1976년에 지금과 같이 복원했다. 이번 장마로 남문 앞 계단이 무너졌는지 계단을 다 들어내고 공사 중이다.
남문을 통과하면 길이 전등사 쪽으로 쭉 뻗어있다. 예전에는 이 앞에 시냇물이 흐르는 개천이 있었는데 복개했다. 30m쯤 올라가 부도전으로 향하는 길에 자그마한 돌다리가 있다. 복개하기 전에는 이 다리를 건너 전등사로 올라갔다. 앙증맞은 것 같은 느낌의 돌다리는 반달처럼 굽은 모양인데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약간 층이 지게 계단석을 맞췄다. 양쪽 난간도 대나무 모양으로 다리에 붙여 간단하게 표현했다.
난간의 양쪽 끝에는 석수들을 조각해놓았는데 시비나 선악을 판단할 수 있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인 것 같다. 민간에서는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神獸)로 간주한다. 이 정도 작은 규모에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단하하게 새겨진 문양들이 멋진 다리이다. 그런데 한쪽은 복개하면서 흙으로 길을 만들어 대부분의 사람이 무심코 지나쳐가는 것이 아쉽다.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50m쯤 올라가면 부도전이 나온다. 부도(浮屠)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탑과는 달리 덕이 높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탑이다. 구성 요소는 일반 탑들과 마찬가지로 기단부ㆍ탑신부ㆍ상륜부로 돼있지만, 불탑과 달리 상륜부가 간단하게 장식됐다. 형태는 보통 팔각원당형, 방형, 석종형(복발형) 등으로 구분된다. 이곳에는 서운대종사 탑비와 부도를 비롯해 그동안 전등사를 거쳐 간 스님들의 부도 3기가 더 세워져 있다.
정면에 자리 잡은 서운대종사 부도는 조선시대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알려진 보물 제388호인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을 그대로 본떴다. 부도전 양쪽 앞에 있는 쌍사자 석등도 무학대사탑 앞에 있는 석등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것이다. 아마도 서운대종사를 기리는 사람들의 정성이 무학대사탑을 모사한 것이리라.
길을 조금 오르다 동문으로 방향을 틀었다. 동문으로 가는 길 좌우로 수령이 꽤나 되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이 늘어서있다. 그런데 소나무들의 하단부가 껍질이 벗겨진 채 상처를 가지고 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으로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자 마구잡이식 수탈을 자행했다. 곡물과 광물의 수탈 물량을 늘렸고, 철강재도 부족하자 사찰에 있는 종과 집에 있는 놋그릇과 숟가락까지 공출이라는 명분으로 마구 뜯어갔다. 전투기에 쓸 연료를 만든다며 송진 채취를 강요해 농촌, 도시 할 것 없이 소나무가 있는 곳이면 마구 송진을 수탈했다. 이때의 상처가 지금까지 남아 식민지의 아픔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양헌수 승전비
삼랑성 동문 못 미쳐 왼쪽 축대 위에 인천시 기념물 제36호인 ‘양헌수 승전비’가 비각 안에 안치돼있다. 병인양요(1866) 때 정족산성(삼랑성) 남문과 동문으로 쳐들어온 프랑스군을 물리쳐 승리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이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사살된 6명을 포함해 사상자 60∼70명이 발생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조선 침공의 무모함과 더 이상의 교전이 불리함을 깨닫고 강화도에서 철수한다.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의 군대는 전사 1명, 부상 4명의 해를 입었다. 화력이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전과를 올린 것은 양헌수 장군의 뛰어난 전략 덕분이었다.
1873년(고종 10년, 계유년) 2월에 강화도 주민들이 비를 세웠는데, 비의 앞면에는 ‘巡撫千摠梁公憲洙勝戰碑(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라 쓰여 있다. 순무(巡撫)는 순무사(巡撫使)의 준말로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와 전시에 군무(軍務)를 맡아보는 한편, 백성들을 위무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일을 담당하는 임시 관직이다. 천총(千摠)은 조선 후기 각 군영에 소속됐던 정3품 무관직을 일컫는다.
비의 뒷면에는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의 공적이 수록돼있는데 ‘차가운 강화도의 10월에 칼을 휘두르며 군사를 통솔해 서양 오랑캐를 무찔러 깃발이 다시 있지 않았다’라고 공적을 기록했다. 내용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 임금 3년인 병인년(고종 3년, 1866년) 9월에 서양 오랑캐가 강화에 쳐들어왔는데 적의 형세가 더욱 창궐했다. 순무사 이경하가 그곳에 있으면서 중군 이용희와 천총 양헌수를 징발해 통진에 진을 치고 주둔하게 했다. 양공이 분발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별군관인 이기혁ㆍ이현규ㆍ이병숙과 초관인 이렴ㆍ김기명ㆍ이대흥을 거느리고 행군했고, 집사인 이해진ㆍ지홍관은 산포수 500명을 선발해 음력 10월 초하룻날 밤에 손돌항을 건너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초삼일에 적이 성 아래에 가까이 쳐들어오니 양공은 힘을 내어 싸움을 격려해 한꺼번에 총포를 쏘아댔다. 적의 우두머리가 먼저 죽고 오랑캐들이 널브러져 죽자 수레에 시체를 싣고 달아났다. 공이 이에 강화부성을 회복하고 병사와 백성을 위로하니 모두 안도했다. 성의 노인들이 감격해 단단하고 좋은 돌에 공적을 기록해 돌의 결이 갈라지지 않기를 기약했다. 오늘날 강도의 백성들이 부모와 처자 형제가 있어 서로 보양하고 서로 기르게 된 것은 오직 공의 은혜이니 영원토록 사모하노라.”
삼랑성 동문에서 추억을 긷다
삼랑성 동문은 남문처럼 다듬은 돌로 웅장하게 쌓은 것이 아니라 커다란 막돌로 문의 기둥을 쌓고 그 위에 벽돌로 홍예(虹霓,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원형이 되게 만든 것)를 가지런히 올렸다. 아마도 벽돌로 된 홍예는 문루의 무게를 버티기 힘들 것이기에 문루를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벽돌로 홍예만 올린 성문은 전등사 외에는 없는 것 같다. 수원 화성의 암문은 성벽 자체를 다 벽돌로 쌓은 전성(磚城)이기에 이곳과는 다르게 봐야 한다.
이곳 동문에만 오면 머릿속을 간질이며 과거의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예전에 전등사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삼랑성 동문으로 올라왔다. 그래서 동문 바로 앞 길 양쪽으로는 지금도 변함없이 토속음식점이 몇 집 있다. 전등사를 탐방하고 돌아갈 때는 파전에 막걸리를 한잔 걸치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내려갔던 기억도 눈에 선하다.
처음 전등사를 답사하던 때가 30대였는데 무려 강산이 세 번 바뀌어 벌써 60대이니, 세월은 쏜 화살과 같이 빠르게 지나간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전등사와 삼랑성 길을 걷다 보면 땅바닥에 무수히 떨어져 있는 내 추억들을 하나하나 만날 것도 같다. 이렇게 인천을 돌아보는 것이 추억을 긷는 행위는 아닐는지. 아름다운 추억들을 세월 속에 만나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정족산 정상(삼랑성 정상)에서
이성수 등산 배낭
정족산 정상(삼랑성 정상)에서 바라본
진강산과
그 우측에 보이는 길정 저수지
정족산 정상(삼랑성 정상)에서 바라본
김포의 문수산과
사진 좌측에 보이는 길정 저수지
정족산 정상(삼랑성 정상)에서 바라본
김포와 강화도 사이의 염하(강화해협)
뒤돌아본
삼랑성 성벽길
삼랑성 북문
삼랑성 안내도
강화 정족산 사고지
강화 정족산 사고지에 관한
안내문
강화 정족산 사고지
강화 정족산 사고지 옆에 있는
스님들의 거주 공간
강화 정족산 사고지에서
이성수
다시 찾은
전등사 극락암
조각가 이영섭 작가의 독특한 작품인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
‘어린 왕자와 함께하는 전등사의 가을’ 개최
서현욱 기자
불교닷컴 기사 승인일 : 2022.10.20.
조각가 이영섭 작품 전시…작품 SNS 게시 참여 전시 표방
대한불교조계종 전등사(주지 여암 스님)는 22일부터 11월 13일까지 도량 전역에서 조각가 이영섭 작품전시회를 개최한다.
이영섭 조각가의 발굴기법으로 탄생한 작품 20여 점을 도량 곳곳에 전시해 가을 단풍과 함께 전등사를 찾는 관광객과 참배객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영섭 작가는 세계 최초 ‘발굴 조각’으로 조각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다소 생소한 ‘발굴조각’ 기법은 조각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법으로 기존의 조각 원리를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작업방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작가의 작업은 흙 마당에 밑그림을 그리고 흙은 파낸 뒤 그 속에 혼합재료와 유리원석, 보석, 자개, 도자기 파편 등의 오브제를 넣고 흙을 덮는다. 시간이 지난 뒤 흙에서 작품을 꺼내어 발굴하는 작업이다.
전등사는 이영섭 작가가 전등사 회주 학롱 스님의 도반 故 원명 스님의 부도를 제작한 오랜 인연이 있어 이번 전시회를 기획했다. 이영섭 작가의 작품은 전등사가 최근 개최한 삼랑성축제 기간 전시행사 현대작가 ‘관조觀照’전展에도 출품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번 특별 전시회는 이영섭 작가의 독특한 작품인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를 형상화한 작품과 현대적 감각으로 표현한 관세음보살, 의자, 천사 등 널리 알려진 작품 20여 점이 전시될 예정이다.
전등사는이번 전시회를 관객들이 어린왕자를 비롯한 작품들을 찾아 SNS에 적극적으로 올리도록 독려해‘참여하는 전시’를 표방한다.
주지 여암 스님은 “아름다운 가을 단풍과 함께 전등사에서 개최되는 조각가 이영섭의 ‘어린왕자와 함께 하는 전등사의 가을’ 전시회에 시민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로 익어가는 가을을 느끼시길 바란다.”며 많은 참여와 관심을 부탁했다.
세계 최초로 발굴 기법을 사용하여 창작하는
이영섭 작가에 관한
안내문
전등사 대조루
전등사 범종각
법당이자 복합 문화공간인
무설전의 지하 공간
범종각(좌)와 대조루(우)
조각가 이영섭 작가가
발굴 기법으로 창작한 작품인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
찻집인 죽림다원
삼람성 남문 문루인
종해루
삼람성 남문 방면에 관한
안내문
지나온
삼람성 남문
삼람성 남문 문루인 종해루 아래쪽의
소나무 숲
삼람성 입구에 있는 식당인
강화섬 설렁탕
2023년12월10일(일요일) 강화 나들길 제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 탐방기 탐방지 : 강화 나들길 제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 [강화 나들길 제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 : 온수 공영주차장~(0.2km)~전등사~(km)~성공회 온수성당~(2.4km)~갈정 저수지~(2.9km)~이규보 묘~(3.8km)~곤릉~(1.9km)~석릉~(5km)~가릉 [탐방거리 : 16.2km, 소요시간 : 5시간30분] 제3코스 명소 전등사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은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등사에는 대웅보전, 약사전, 범종 등 보물급 유적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대웅전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은 벌거벗은 여인을 묘사하고 있어, 대웅전 중수를 맡은 도편수가 달아난 여인에 대한 배신감으로 조각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온수리 성공회성당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기법에 서양 그리스도교 교회 양식을 적용한 동서 절충식의 목조건물이다. 1906년 영국인 주교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가 세웠으며, 성 안드레 성당으로도 불린다. 본당과 종을 달아놓은 2층 문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당은 정면 9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용마루 양끝에 십자가를 장식해 놓았으며, 종루에는 본래 서양식 종이 달려 있었으나 1945년 일제에 징발당한 뒤 1989년 새로 우리나라 전통양식의 종을 제작하여 걸었다. 이규보 묘 명조 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이듬해 부친이 작고하자 천마산으로 들어가 호를 백운거사라 하고 글을 쓰며 지냈다. 그는 그곳에서 ‘천마산지’ 등을 썼는데 특히 영웅 서사시 ‘동명왕 편’은 민족의 영웅 동명왕의 생애와 발자취를 노래한 서사시로서 우리 문학사에 남긴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고려의 이태백’이라고 불렸다. 고려 왕릉 현재 강화도에 남아 있는 고려의 능은 석릉, 곤릉, 홍릉, 가릉의 4기뿐인데 규모는 아주 작고 봉분과 망주석과 혼유석 정도의 시설 밖에 없으며 호석과 난간석을 갖춘 전형적인 왕릉 구조는 찾아볼 수가 없다.] 탐방코스 : [ 전등사 동문 버스 정류장~(564m)~삼랑성 동문~(731m)~전등사~(0.6km)~삼랑성 서문~(0.5km)~정족산 정상(삼랑성 정상)~(0.2km)~삼랑성 북문~(150m)~정족산 사고~(150m)~전등사~(0.3km)~삼랑성 남문~(1.7km)~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0.5km)~고택 우일각~(1.1km)~청송국수~(2.2km)~길정 저수지~(2.9km)~이규보 묘~(3.8km)~강화 곤릉~(1.9km)~강화 석릉~(5km)~강화 가릉~(0.8km)~탑재 버스 정류장 ] [탐방거리 : 23.1km] 탐방일 : 2023년 12월 10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강화군 길상면 : 최저기온 2도C, 최고기온 12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6시간57분 소요) 07:14~07:47 구산역에서 6호선 지하철을 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서 공항철도 전철로 환승하여 김포공항역 3번 출구로 나옴 [33분 소요] 07:47~07:56 롯데몰.김포공항역 정류장으로 도보로 이동한 후 전등사 동문 정류장으로 가는 60-5번 버스 승차를 대기 07:56~09:20 60-5번 버스를 타고 롯데몰.김포공항역 정류장에서 전등사 동문 정류장으로 이동 [1시간24분 소요, 21개 정류장 이동] 09:20~09:32 전등사 동문 버스 정류장에서 탐방 출발하여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 41-3 번지에 있는 강화 삼랑성(江華 三郞城) 동문으로 이동 [강화 삼랑성(江華 三郞城)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연대 미상의 산성. 1964년 6월 10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번지 1964년 6월 10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넓이 24만 5997㎡, 둘레 약 1km이다. 성의 축조 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다만 단군(檀君)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로 그 이름을 삼랑산성(三郞山城) 혹은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곽의 축성 구조를 보면 잡석(雜石)으로 축조되어 삼국시대 석성구조(石城構造)를 보여 주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보수(補修), 조선시대에 중수(重修)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문은 네 곳에 있으며 문루(門樓)는 남문에만 있어서 종해루(宗海樓)라 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이 소장된 마니산의 사고(史庫)가 옮겨와 보존되었었다. 그리고 성내에는 유명한 전등사(傳燈寺)가 있으며,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에 프랑스군에 승리한 기념비로서 양헌수 승전비(梁憲洙勝戰碑)가 서 있다. 이러한 삼랑성은 특히 마니산 전설과 더불어 단군신화와 관련되는 흥미있는 성이라고 할 수 있다.] 09:32~09:37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번지에 있는 전등사(傳燈寺)로 이동 [강화도 남부 정족산 정족산성(삼랑성) 안에 있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대웅전, 약사전, 범종 등 대한민국의 보물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사고가 경내에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건축되었다가 고려 시대를 거치며 증축과 개축을 이어오다 광해군 때 화재로 인한 소실로 다시 재건되었다. 창건될 때는 진종사였으나 후에 전등사로 바뀌었다. 전등사로 들어가는 입구는 동문과 남문 두 곳이 있다. 동문에는 전등사가 호국불교의 진원지임을 증명하는 양헌수승전비가 있다. 병인양요 때 전략적 요충지였던 전등사에 쳐들어온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고종 10년인 1873년에 건립한 것이다. 남문에서 종해루를 지나 대조루로 가는 길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700년이 넘은 보호수들로 노승나무, 동승나무로 불린다. 또한 경내에 현대식으로 지은 법당 무설전과 서운갤러리가 있으며, 갤러리에서는 불교미술전이 상시 운영되고 있다. 체험 프로그램으로는 템플스테이가 준비되어 있다. 체험형과 휴식형으로 나누어져 있고, 체험형은 첫날 오후 1시에 시작하며, 사찰 예절, 공양, 108배, 좌선에 이어, 다음날 예불과 스님과의 차담으로 이루어지며 점심 공양 후 끝난다. 이에 비해 휴식형은 첫날 12시에 시작해 사찰 예절, 범종 타종, 예불에 이어 이튿날 예불, 울력(일을 돕는 것), 점심 공양 후 종료한다. 전등사 입장요금 : 무료] 09:37~09:50 전등사를 탐방 09:50~09:56 삼랑성(三郞城) 서문으로 이동 09:56~10:06 정족산(鼎足山, 220m) 정상으로 이동 [정족산 정상이 삼랑성 정상이기도 하다.] [정족산(鼎足山)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산. 높이 : 220m 문화재 : 전등산 약사전(보물 179호),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호), 삼랑성(사적 135호), 전등사 대조루(시지정 문화재 7호) 마리산(469m)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생긴 높이 220m의 산이다. 생김새가 마치 세 발 달린 가마솥과 같다 해서 이름을 정족산(鼎足山)이라 하였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전등사와 강화 삼랑성(정족산성) 등 많은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는 삼랑성은 사적 제130호로,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고 하는 석성이다. 남문루와 동문·서문·북문 터가 남아 있고 성 안에 고구려 시대에 창건된 전등사가 있다. 산행은 전등사를 기점으로 시작한다. 전등사 요사채를 돌아 오른쪽으로 난 길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터로 가는 길이며, 곧바로 올라가면 산 정상에 이르는 길이다. 정상에 오르면 노송과 나무숲에 둘러싸인 전등사 부근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쪽으로 마리산, 남쪽으로 인천 앞바다의 섬들이 보인다. 산행 시간은 왕복 2시간 정도 걸린다.] 10:06~10:10 사진촬영 10:10~10:13 삼랑성(三郞城) 북문으로 이동 10:13~10:16 정족산 사고(鼎足山史庫)로 이동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조선왕조 실록 및 정부문서의 보관소.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 내 전등사 부근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 내부의 전등사(傳燈寺) 서쪽에 있었으며, 실록의 보관이 중심 업무였다. 강화도에 사고가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1595년(선조 28)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춘추관(春秋館)과 충주(忠州) ·성주(星州)의 사고가 불타고 유일하게 남은 전주(全州)사고의 실록이 해주(海州)를 거쳐 강화부 관아 건물에 보관되었던 것이다. 그 후 그것은 다시 영변의 보현사(普賢寺)와 객사(客舍)을 거쳐 1603년 새로 설치된 강화도 마리산(摩利山) 사고에 옮겨져 복간되었다. 정족산사고는 1653년(효종 4) 마리산 사고에 화재가 일어남으로써 건립이 추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효종대 이후로 강화도가 국가의 위기에 대처할 기지로 적극 개발되었으므로 그 곳에 사고를 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1660년(현종 1) 정족산성이 완성되고 실록을 성 내의 사고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관례대로 장사각(藏史閣)과 함께 선원각(璿源閣)이 세워졌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고로 실록이 옮겨진 것은 1678년(숙종 4)이었다. 이후 실록이 새로 만들어지는 대로 1부씩 보관하였고 그 밖에 왕실 족보나 의궤(儀軌)를 비롯한 여러 정부문서를 함께 보관하였다. 춘추관에 소속되어 그 곳에서 관장하였으나 현지의 관리는 수호사찰인 전등사에서 맡았다. 정조대에 강화부 관아 위쪽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이 설치되어 국왕의 초상화나 친필 외에 많은 서책이 보관되었지만, 이 사고는 그것과 별개로 계속 운영되었으며 외규장각과 달리 병인양요 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10년 이후 보관 서적들은 규장각 도서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모여져 함께 관리되었고 지금의 서울대학 규장각도서로 이어졌다. 원래의 건물은 1930년경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장사각과 선원각의 현판만이 전등사에 보관되어 있다.] 10:16~10:21 사진촬영 10:21~10:23 전등사(傳燈寺)로 회귀 10:23~10:30 삼랑성(三郞城) 남문으로 이동 10:30~10:32 사진촬영 10:32~10:52 금풍양조장을 지나서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길38번길 14 번지에 있는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으로 이동 [금풍 양조장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금풍 양조장은 1931년 처음 오픈한 이래 양환탁 – 양재형 – 양태석으로 3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주말 기준 하루 150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곳을 보기 위해 강화를 찾는다. 금풍 양조장은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건축 당시의 원형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고, 개항기 이후 강화도 지역의 산업화(양조산업) 과정과 변화·발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인정돼 2022년 10월 04일 인천광역시 등록문화재에 등재되었다. 금풍 양조장과 불과 500m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온수리의 또 다른 명소, 전등사에서도 금풍 양조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전등사에는 종류별로 다양한 장이 담긴 장독대가 줄지어 있는데, 그 중 커다란 항아리들은 원래 금풍 양조장에서 술을 담그던 항아리라고 한다. 금풍 양조장은 양태석 대표가 가업을 이어 나가기 전 10년 정도 술을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 돼 다른 사업자에게 양조장 임대를 했던 적이 있다. 술 항아리를 사용해 술을 빚던 양 대표의 아버지와 다르게 새로운 사업자는 다른 방식을 선택했고, 그동안 사용했던 술 항아리는 2층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오랜 시간을 간직한 술 항아리에 먼지가 쌓이는 것이 안타까웠던 전등사 측은 술 항아리에 장을 담가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해 금풍 양조장은 전등사에 술 항아리를 기증하게 되었다고 한다. 2020년 양태석 대표가 금풍양조장에 돌아와 가업을 이어 나가게 되자, 전등사에서는 빌려 갔던 술 항아리의 일부를 다시 돌려주었다. 이에 대해 양태석 대표는 “그간 전등사에서 항아리를 품어 주셨기 때문에 온전히 양조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거 같아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양 대표는 전등사 측에서 항아리를 보존해 주지 않았다면 오랜 시간 방치되어 폐기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금풍막걸리는 국산 농산물인 강화도 쌀을 가지고 만들어진 지역특산주라 온라인으로 판매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막걸리는 깔끔하게 소비자에게 배송되기 쉽지 않은 품목이다. “막걸리를 사서 집에 갔을 때 막걸리 양이 줄었던 적 없으신가요?” 탄산이 있는 막걸리는 안에 있는 탄산이 기압차로 술을 밀어내는 효과가 있어 약간 샌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양 대표는 탄산이 있는 막걸리는 유통 과정에서 깔끔하고 세련되게 보내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처음 밀봉됐던 상태와 제일 유사하게 유통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심했다고 한다. 그 결과 탄산을 배제하고 고소한 맛을 최대한 살린 무탄산 막걸리를 선택했다. 막걸리의 주원료는 쌀이다. 한 달에 2000병 가까이 막걸리를 생산하다 보면 그만큼 많은 쌀을 소비하게 되고 그 쌀을 담았던 포대는 버려지게 된다. 이를 활용할 순 없을까 고민하던 양 대표는 그대로 버려지면 쓰레기로 전락할 쌀포대를 깨끗하게 씻고 재디자인해 막걸리 파우치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고 한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만들어진 이색 포장지 ‘쌀포대’는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많고 구입하는 손님들도 즐거워한다고 한다. 금풍 양조장에서는 나만의 막걸리를 만들어 볼 수도 있다. 밑술과 덧술의 과정을 거치는 막걸리는 한 병을 마시기 위해 약 2주간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막걸리 체험을 진행하는 소믈리에님도 막걸리는 사 먹는 걸 추천할 정도로 막걸리 제조는 공이 많이 든다. 밑술 : 고두밥 + 누룩 15분간 치대기 덧술 - 밑술 작업을 마친 막걸리 10일간 매일 하루 두 번 저어주기 - 3일차 새로운 고두밥을 쪄내어 밑술 막걸리와 섞기 - 10일차 걸쭉해진 막걸리를 면보자기에 걸러 맑은 막걸리만 병입 막걸리 만들기 체험이 끝날 무렵, 양조장 앞에서 찍었던 사진은 막걸리 라벨에 깜짝 선물처럼 들어가 있다. 양 대표는 체험을 신청한 손님에 한해 양조장에서 보냈던 시간을 소중히 기억할 수 있도록 기념품으로 만들어 선물한다고 한다. 100년의 시간을 보낸 건축물 앞에서 찍은 흑백사진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뉴트로' 감성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금풍양조는 할아버님이 1969년 금풍양조장을 인수하여 새롭게 양조를 시작한 해를 기념하기 위해 알콜도수를 6.9도로 한다.] [대한성공회 온수리 성당 성공회 3대주교 트롤로프 신부에 의해 1906년에 건축 한국 땅에 성공회가 들어온 것은 천주교가 100년의 박해를 받은 후 개항과 함께 막 선교의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하던 때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거주 및 여행지역을 법으로 제한하였는데, 서울 중심 100리 안에서만큼은 여행 허가증(호조)없이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교역과 그와 관련된 목적으로 토지를 사거나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영국이 강화도를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던 동기는 강화도가 영국 성공회의 뿌리가 되었던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서안에 있는 ‘아이오나(Iona)섬’과 유사한 입지인데다 병인·신미양요를 경험한 강화도민들이 프랑스나 미국에는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수군양성을 위해 강화도에 들어갔었던 영국인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점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강화도는 유배지로 역사적으로 많은 소외와 압박을 받았고, 그전까지는 교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지역으로 파악되었다. 신도들 스스로 땅을 헌납하고 자금을 마련해 건축 강화도에 지어진 대한 성공회의 두 번째 성당인 온수리 성당(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52호)은 강화읍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 자락의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하여 눈앞에는 초지(草芝)들판이 펼쳐지고 염하 물줄기와 서해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이 성당은 강화읍의 강화성당(1900, 사적424호)과 달리 선교본부의 지원이나 선교사들의 주도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신도들 스스로가 땅을 헌납하고, 자금을 마련하고 스스로의 노력봉사로 지은 성당이다. 나중에 성공회 3대주교가 된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 신부에 의해 1906년에 건축되었다. 강화읍 성당과 유사하게 외삼문형식의 종루를 통해 진입하나 당시 무덤이 많았던 주변의 대지조건 때문에 종루와 성당, 그리고 사제관이 일직선 축이 아니다. 온수리 성당의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가운데 지붕은 우진각으로 처리하여 조선 시대 성곽의 망루 같은 분위기를 담고 있다. 실제로 솟을지붕 아래 종을 매달고 사방으로 벽을 터서 종 소리가 퍼져나가게 꾸몄다. 정문을 들어서면 정문과 직각 축으로 바로 만나는 온수리 성당은 정면3칸, 측면 9칸, 도합 27칸 되는 단층 팔작지붕의 일자형(一字型) 전통 한옥이다. 지붕 용마루 양쪽의 십자가 장식과 지붕 양쪽 끝 합각 벽면에 벽돌로 새긴 십자 장식을 빼놓으면 향교나 관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건물 형태다. 내부는 강화성당과 마찬가지로 '바실리카' 양식으로 열두 사도를 상징하는 열두 개 기둥으로 지성소와 회중석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강화성당의 구조와 달리 회중석 가운데 복도가 남녀석을 구분하고, 후진이나 고창(Clear story) 같은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은 생략되었다. 성당과 거의 돌아앉은 사제관(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은 트롤로프신부가 1896년 강화도에 부임하여 선교를 시작하면서 2년 후인 1898년에 건축한 건물이다. 이후 사제관이 퇴락하자 1933년 원형 그대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사제관은 영국 성공회가 선교를 시작하면서 영국인 사제가 한국 전통 주거문화 속에 어떻게 적응하여 왔는가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주거공간이다.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한편 한옥성당 옆에는 2004년에 축성된 새 성당이 있다.] 10:52~11:10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을 탐방 11:10~11:17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길 74 번지에 있는 고택인 우일각(羽日閣)으로 이동 [미스터 썬사인의 촬영지이기도 한 우일각!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길 74 2,500여평의 대지 위에 지어진 99간의 잘 보존된 보기 드문 한옥 저택인 우일각은 지금도 각종 드라마나 영화 촬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우일각의 역사 1925년 : 강화도의 거부였던 김영각이 우일각 건축 1998년 ~ 2004년 : (주)니코 우일각 매입 및 테마파크와 연꽃 단지 조성을 위한 주변 토지 매입 2002년 : 우일각 전면 복원 및 개보수 2004년 : 우일각 알콜 도색, 주변 제초작업, 화단공사, 후원 징검다리 보수, 문화재관리청 다도 행사, (주)내셔널트러스트 매화마름 관찰행사, 가양주 발표회 2006년 : 우일각 화재 (행랑채 전소 및 문간채 일부 소실) 2007년 : 박리 작업, 도배, 사고석 매입, 연꽃단지 조성 시작 2008년 : CCTV 설치 2009년 : 연잎차 생산, 연꽃 분양 2011년 : 행랑채 철거, 문간채 복원 및 보수, 수중모터 교체 2013년 : KBS2 TV 드라마 '감격시대' 촬영(명월관이라는 기생집으로 사용되었음) 2014년 : 주차장 및 마당 콘크리트 공사, 대문 밖 보도 사고석 매립, 솟을 삼문 앞 조경, 보현선행회 '작은 음악회' 염춘숙의 춤 '갑비고차의 화접' 공연 2015년 : 우일각 둘레 산책로 조성, 소나무 밭 이전 KBS1 TV 드라마 '우리집 꿀단지' 영화 '해어화' 촬영 [우일각의 정자인 상지정은 1943년 마지막 기생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룬 영화 [해어화](한효주와 천우희가 출연)에서 조선의 마지막 기생들이 모여 수업을 받던 장소로 제공 되기도 했다.] 2016년 : 연못 조경 공사 영화 '대장 김창수' 촬영 2017년 : tvN 드라마 '크로스' 2018년 :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촬영 [애신이 미 영사관에 총 갖다 놓고 넘는 영사관 담장 씬도 우일각에서 찍은 한 컷이었다.] KBS2 TV 드라마 '슈츠' 촬영 SBS 드라마 '사의찬미' 촬영 강화도의 대지주가 건립한 99칸 규모의 근대한옥 우일각(羽日閣)은 그간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집이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근대한옥으로, 99칸의 규모가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한옥의 변화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집이다. 솟을삼문 옆에 늘어선 대문채와 복도를 통해 안채와 사랑채의 채나눔을 한 본채, 사랑채 복도를 통해 이어지는 별채 등 규모도 규모려니와 공간구성 양식도 특이하다. 팔려고 내놓은 집을 구입해 보수 및 복원 강화도의 길상면에는 삼랑성 외에도 여러 유적이 남아 있다. 전등사를 비롯해 한옥의 전통양식으로 지은 성공회 성당과 사제관도 남아 있고, 조선시대 방어를 위해 쌓았던 초지진(草芝鎭)도 남아 있다. 또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梁憲洙) 장군의 전승비도 있는가 하면 고려시대 대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의 묘도 있다. 길상면에서도 온수리(溫水里)는 그 지명처럼 따뜻한 물이 나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 온수리에 일제 때 건축한 99칸 대규모 저택이 있다. 우일각은 일제시대에 강화도의 거부였던 김영각이 지은 조선 전통양식의 기와집으로 우리나라에서 다섯 채 밖에 남지 않은 99간 민간 가옥 중 하나이다. 당초 지었던 원형 거의 그대로의 상태로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집을 지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경우는 안동과 봉화, 영주 등 경북지방과 녹우당 등 호남 일부지역뿐이다. 이 집을 관리하는 이의 설명에 따르면 당초 이 집은 주인의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집을 팔기 위해 매물로 내어놓았다. 이 땅을 사려던 이는 넓은 땅을 활용해 아파트나 연립주택을 지으려고 했다. 이를 알게 된 한 기업체의 경영자가 우리 전통가옥을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를 사들여 보수하고 복원해 오늘에 이르렀다. 이 집과 관련된 몇몇 기록을 살펴보면 강화도에는 99칸 규모의 집이 모두 3채였다고 한다. 그중 지금까지 남은 집은 이 집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이 집을 구입한 업체관계자에 따르면 집을 구입한 이후 그간 40억원을 들여 이 집을 보수 및 복원했다. 지금도 이 집을 유지 관리하는데 매년 2억원 가량이 들어간다. 우일각이 당초 지어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처럼 집을 구입한 이의 노력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이 집을 구입한 이후 업체측에서는 전통가옥을 테마로 한 파크설립 구상도 했다. 한동안은 체험숙박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당초의 계획이 실현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이 집은 그간 일반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집이다. 취재하는 입장에서도 우선 문화재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강화도에서 이 집의 존재를 거의 알지 못했다. 시청을 통해 집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에도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근대가옥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높게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집을 둘러보면서 이런 생각은 사라졌다. 일제 강점기때 지어진 근대건축으로서 우일각이 지니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당시 전통한옥의 변화과정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실용적인 면이 가미된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윤보선 대통령 가옥이나 가회동 등의 한옥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전통적인 한옥구조에서 양식(洋式)의 실용성이 가미된 형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을 취재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이는 실로 절묘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전통적인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여기에 실용적인 면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일제 감점기 중기 이전까지의 전통가옥들은 기본적으로 우리네 한옥의 기본양식을 따르고 있는 반면, 후기의 전통가옥들은 좁은 중정을 중심으로 한 일본적인 양식이 많이 가미되고 있다. 집을 지은 강화 거부와 관련된 이야기들 우일각을 지은 이는 김영백(金永伯)이다. 그와 관련된 자료는 ‘강화도 남부의 토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거부’라는 것 외에는 거의 나와 있지 않다. 다만 1924년 8월에 발행된 잡지 ‘개벽’과 1998년 1월25일자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에 그에 관한 언급이 나와 있다.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먼저 ‘개벽’에 나온 내용은 ‘을인(乙人)’이라는 필자가 강화도를 답사한 내용을 기록한 ‘강도답사기(江都踏査記)’에 나온 것이다. ‘강도’란 강화도의 옛 지명이다. 여기에는 강화도의 특성이나 산업, 그리고 손돌목 등 강화도의 내력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강화의 2대 명물을 소개하고 있다. ‘군내에서 600석 이상 추수하는 부자가 50여호나 되어도 사회사업이라면 모두 머리를 흔드는데 그들 중에서도 길상면 김영백군 부부가 보통학교 건축비로 3630원을 희사했다’는 내용이 명물 중 하나로 소개돼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당시 김영백이라는 인물이 강화도내에서 상당한 거부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규태 코너에 소개된 이야기는 김영백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거부가 됐는 지와 관련된 내용이다. 이야기인 즉슨 이렇다. “강화 길상면 온수리에 아흔아홉칸짜리 기와집을 짓고 살았던 김영백이라는 거부가 있었다. 한말까지 대대로 이곳에 움막을 짓고 살았던 그는 어느날 헛간을 짓고자 뒷 둔덕을 파내리다가 괭이끝에 쇠붙이가 닿는 소리를 들었다. 자그마한 녹슨 솥이 묻혀 있어 이를 파내 뚜껑을 열어보니 주먹만한 금덩이로 채워져 있었다. 이 횡재 소문을 듣고 강화유수가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고 방을 붙여 금괴를 묻은 장본인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김영백에게 불로소득의 10분의 1인 십일세만 물고 그 금덩이들을 차지하게 한다. 강화도는 고려시대 이래 국난이 있을 때마다 서울의 왕족이나 고관대작들의 피난지였다. 국난 중에 모아 두었던 금덩이를 갖고 강화에 피난온 누군가가 몰래 묻어 두었을 것이다. 피난온 상류층의 일가 전원이 몰살당한 사례가 적지 않았으며 금괴를 묻어둔 은밀한 장소가 소재불명된 경우가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추정된 것이다.” 이 날짜 이규태 코너에는 이 이야기와 함께 당시 서울에서도 우연히 발견된 금덩이를 둔 실화가 적지 않다면서 ‘일사유사’에 나오는 서울 과부 김학성 모에 관한 이야기도 소개하고 있다. 이들 얘기를 미루어보면 당시 이같은 일이 드물게 있었던 듯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경기도사 7권-일제강점기편’에도 나온다. 이책 제3장 제4절 ‘경기도민의 일상생활과 의식주’에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농촌지주의 기와집이 소개되고 있다. 당시 이집에 대한 내용은 전통한옥 전문가인 김홍식 전 명지대 교수가 보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내용은 ‘1925년에 지어진 이 집은 전형적인 품(品)자 형을 지니고 있으며, 강화도 남부의 토지 대부분을 소유했던 대지주 김영백(1873~1928)이 자신의 부를 현실화시키면서 지어졌다. 그가 언제 이러한 토지를 보유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원래 초가에 살던 김씨가 1924년 소문난 목수를 불러서 99칸에 이르는 대저택을 기와집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별채 정자와 부엌마루 등 특이공간 눈길 이 집의 규모는 이미 높은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한 대문채에서부터 느껴진다. 솟을삼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문간방들이 길게 이어진다. 문간마당을 사이에 두고 다시 안채 및 사랑채로 이어지는 중문과 담장이 있다. 이 집을 관리하는 분의 얘기에 따르면 당초 문간마당에도 행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안채로 통하는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ㄷ’자 형의 몸채가 눈에 들어온다. 이 몸채는 안채와 사랑채가 함께 이루고 있는 건물로, 복도를 통해 채나눔을 하고 있다. 안채 대청을 중심으로 대청의 왼쪽 편인 안방과 부엌, 아랫방, 그리고 대청 오른쪽의 건넌방까지가 안채의 공간이다. 그리고 복도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로 사랑방과 누마루가 위치한 사랑채 공간이 자리잡았다. 이 집의 안채 대청은 삼겹형태에 정면 3칸 규모여서 매우 크다. 이 집을 조사했던 김홍식 교수도 ‘거의 홀에 가까운 큰 공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안채 대청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안방문이나 건넌방 문이 모두 들어열개로 돼 있는 점이다. 안채 공간에 들어열개를 설치한 경우는 전통민가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이것이 근대한옥이어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방도 기다란 형태로 매우 넓다. 안방 복도 끝에는 2층으로 된 깊숙한 수납공간이 있다. 대갓집답게 안방 부엌도 매우 넓은 공간이다. 특히 이곳 부엌 한쪽에는 넓은 마루공간이 설치돼 있다. 이런 형태의 부엌도 전통 사대부의 민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많은 손님을 맞이할 때나 혹은 가족들이 많이 모이는 제사 등에 부엌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미리 음식을 준비하기 위한 공간이 아닌가 싶다. 안채의 뒤뜰은 마당보다 높게 구성돼 있다. 경사진 지형의 형태를 그대로 살린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에 별채형태의 정자가 서 있다. 특히 이 정자는 안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정자로서의 성격을 충분히 살리고 있다. 또한 이 정자는 밖에서도 출입할 수 있지만, 사랑채 복도와도 연결돼 있어 사랑채로 찾아온 손님을 바로 정자로 안내할 수 있도록 돼 있는 구조다. 문간마당과 몸채를 나누는 각 담장마다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한쪽 담장에 새겨진 글씨를 보면 ‘수(守)’, ‘신(信)’, ‘교(交)’, ‘붕(朋)’이다. ‘친구와의 사귐에 있어서는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터다. 비단 이 글자들뿐만 아니라 이곳 담장에는 교훈이 될 만한 글귀들이 안팎으로 쓰여 있다. 이 집의 안채 대청 퇴앞으로 비상 피난통로가 설치된 점도 눈길을 끈다. 사랑채 복도 밑으로 난 작은 통로를 통해 안마당에서 사랑채 뒤쪽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안채 부엌 뒤쪽으로는 커다란 장독대가 놓여 있고 그옆에 역시 커다란 우물이 있다. 우물 뚜껑을 열어보니 깊이가 꽤 깊다. 한 집안의 흥성과 쇠락이 함께 담긴 건물 한편 앞서 언급한 김홍식 교수의 조사자료에 따르면 1930년대 이후 이 집의 사랑채는 주로 소작을 관리하는 마름들의 사무실로 사용됐다고 한다. 이 집에서는 마름을 통한 토지경영을 했는데 수확한 작물을 집으로 가져오지 않고 마름이 직접 인천으로 가져가 거래를 한 후 현금으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실제 이 집에는 다른 지방의 대농 지주처럼 곡식을 쌓아두기 위한 넓은 마당이 없다. 한편 이 집은 한때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문화재 지정에 따른 여러 제약요건 때문에 소유자 측에서 해제를 요구해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다. 그러나 인천시 측에서는 문화재급의 가치를 지닌 이 집의 보존과 활용을 위해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다. 인터넷 블로그에는 50여년전 이 집에 묵었던 사람의 회고담이 소개돼 있다. 당시 그는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이곳으로 왔는데, 홀로 살며 집을 지키던 여주인이 이 집을 숙박시설로 이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우일각에는 한 집안의 흥성과 쇠락의 역사가 함께 담긴 셈이다. 어쨌든 99칸 규모의 저택이 그 규모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럽다.] 11:17~11:35 인천 강화군 길상면 강화남로 100 번지에 있는 청송국수로 이동 11:35~12:04 청송국수 식당에서 떡만두국으로 점심식사 [식사비용 : 8천원] 12:04~12:18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690-1 번지에 있는 길정 저수지로 이동 [길정저수지는 강화도 양도면에 위치한 497,000㎡ 규모의 저수지로, 수심이 깊어 항상 파란빛의 물을 만날 수 있는 넓은 저수지이다. 인천시는 2018년3월28일 길정저수지에서 인천 최초의 수상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하고 준공식을 개최했다. 길정 저수지의 태양광발전소는 한국농어촌공사 강화지사가 13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길정저수지 유휴 수면에 설치했다. 발전소 시설용량은 500kW로, 연간 142가구(가구당 월 350kWh 기준)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600MWh의 전력을 생산한다. 이는 석유 연간 10만리터의 대체 효과를 가지며, 약 274톤의 이산화탄소(CO2) 절감을 기대할 수 있는 양이다.] 12:18~12:24 사진촬영 12:24~13:24 인천 강화군 길상면 까치골길 72-17 번지에 있는 이규보 묘로 이동 [이규보 묘(李奎報 墓) 면적 668.9m2 시대 고려시대 소유 여주이씨 문순공파 종중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까치골길 72-17 (길직리) 이규보 묘(李奎報 墓)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릭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 선생의 묘소이다.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고려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선생의 묘소이다. 고려의 무신정권 하에서 태어나 무신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문인의 한 사람으로, 명종 19년(1191)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시문에 능하였던 선생은 중국의 모방이 많았던 당시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이야기를 서사시로 엮는 등 민족정신에 바탕을 두고 글을 썼다. 또한 몽고군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해서 대장경을 만들 때 민족수호의 충정이 담긴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을 지었다. 선생이 남긴 문집은 ’동명왕편’을 비롯하여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등 55권으로, 모두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묘역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망주석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 13:24~13:35 이규보 묘(李奎報 墓)를 탐방 13:35~14:16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75 번지에 있는 강화 곤릉(江華 坤陵)으로 이동 [강화 곤릉(江華 坤陵) 면적 1,091m2 강화 곤릉(江華 坤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강종의 부인 원덕태후 유씨의 무덤이다. 1992년 3월 1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70호 곤릉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개요 원덕태후는 고종의 어머니로 강종 1년(1212)에 왕비가 되고 연덕궁주라 하였다. 뒷날 원덕태후는 추대되고 1253년에 정강의 시호가 더해졌는데, 언제 사망하였는 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석물은 없어졌고 봉분과 무덤을 둘러싼 담도 무너졌던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사적 승격 사유 이 유적들은 고려시대 왕릉 또는 왕비릉으로서 묘제상으로는 지정가치가 없으나, 역사성이 인정되고, 고려 공양왕 고릉(사적 제191호)과 고려 고종 홍릉(사적 제224호)이 이미 사적으로 지정된 바 있으므로 경기도 지정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승격 지정] 14:16~14:23 사진촬영 후 물을 마시면서 휴식 14:23~15:00 어두 고인돌을 거쳐서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182 번지에 있는 강화 석릉(江華 碩陵)으로 이동 [강화 석릉(江華 碩陵)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182 강화 석릉(江華 碩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희종(재위 1204∼1211)의 무덤이다. 1992년 3월 1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70호 석릉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개요 희종(熙宗)은 신종의 첫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선태후 김씨이며, 부인은 성평왕후 왕씨이다. 1204년 왕위에 올랐고,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희종 7년(1211)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 교동으로 갔다. 고종 24년(1237) 57세의 나이로 죽자 낙진궁으로 옮겼으며, 10월에 덕정산 남쪽에서 장례를 지내고 석릉이라 하였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찾아내어 다시 무덤을 쌓았는데, 그 뒤 석물도 부서지고 무너진 무덤을 1974년 손질하여 고쳤다. 석릉 주변에는 최근에 고려시대 귀족의 무덤이라 생각되는 돌방무덤(석실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사적 승격사유 이 유적은 고려시대 왕릉 또는 왕비릉으로서 묘제상으로는 지정가치가 없으나, 역사성이 인정되고, 고려 공양왕 고릉(사적 제191호)과 고려 고종홍릉(사적 제224호)이 이미 사적으로 지정된 바 있으므로 경기도 지정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승격 지정] 15:00~15:11 사진촬영 후 간식 15:11~16:05 진강정을 지나서 인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 16-1 번지에 있는 강화 가릉(江華 嘉陵)으로 이동 [강화 가릉(江華 嘉陵)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16-2번지 강화 가릉(江華 嘉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위치한 고려 원종(재위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능(陵)이다. 1992년 3월 1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70호 가릉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개요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서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지금의 자리에는 고종 31년(1244)경 사망한 뒤 모신 것으로 짐작한다. 고려 원종 3년(1262) 정순왕후로 추대되고 충렬왕이 즉위(1274)하여 순경태후로 높여졌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부서져 없어졌고, 봉분도 무너진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사적 승격사유 이 유적은 고려시대 왕릉 또는 왕비릉으로서 묘제상으로는 지정가치가 없으나, 역사성이 인정되고, 고려 공양왕 고릉(사적 제191호)과 고려 고종홍릉(사적 제224호)이 이미 사적으로 지정된 바 있으므로 경기도 지정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승격 지정] 16:05~16:07 사진촬영 16:07~16:17 인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에 있는 탑재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6:17~16:52 탑재 버스 정류장에서 화도공용버스터미널로 가는 71번 버스 승차 대기 16:52~16:56 71번 버스를 타고 화도공용버스터미널로 이동 [4분 소요] 16:56~17:25 롯데몰.김포공항역 정류장으로 가는 60-5번 버스 승차 대기 17:25~18:51 화도공용버스터미널 정류장에서 60-5번 버스를 타고 롯데몰.김포공항역 정류장으로 이동 [1시간26분 소요] 18:51~18:53 김포공항역 3번 출구까지 도보로 이동 18:53~19:00 김포공항역에서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는 공항철도 승차 대기 19:00~19:30 김포공항역에서 공항철도 전철을 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30분 소요] 강화 나들길 제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 지도 강화 나들길 제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의 명소에 관한 안내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