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뷰에 앞서 본인은 결코 시온주의자가 아니며 리쿠드와 하마스,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노랫말로 시작하는 리뷰
이번에도 노랫말 하나로 리뷰를 시작하겠습니다.
כֹּל עוֹד בַּלֵּבָב פְּנִימָה נֶפֶשׁ יְהוּדִי הוֹמִיָּה, וּלְפַאֲתֵי מִזְרָח קָדִימָה, עַיִן לְצִיּוֹן צוֹפִיָּה;
עוֹד לֹא אָבְדָה תִּקְוָתֵנוּ, הַתִּקְוָה בַּת שְׁנוֹת אַלְפַּיִם, לִהְיוֹת עַם חָפְשִׁי בְּאַרְצֵנוּ, אֶרֶץ צִיּוֹן וִירוּשָׁלַיִם. | 이 마음에 유대인의 영혼이 여전히 갈망하는 한 저 멀리 동방의 끝을 향하여 시온을 향해 바라보고 있는 한
우리의 희망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2천 년간 이어져 온 그 오랜 희망은 우리의 땅에 속박 없는 나라를 세우리라는 시온과 예루살렘의 그 땅에 |
이 노랫말은 현재 이스라엘의 국가(国歌)로서 불리는 하티크바(Hatikvah)라는 곡입니다. 시온주의 색채가 강하긴 하나 어쨌든 2004년 이후 정식 국가로 채택됐습니다. 리뷰에 앞서 이 얘기를 한 이유는 오늘 리뷰할 펜이 이스라엘과 관련했기 때문입니다.
델타를 계승한 레오나르도
1982년 나폴리에서 개업한 델타는 돌체 비타(Dolce Vita) 시리즈로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특히 오버사이즈 모델의 인기가 대단했죠. 하지만 경영 악화로 2017년 2월, 폐업을 하고 말았어요. 델타의 폐업 소식은 만년필 애호가들에게 큰 충격이요, 슬픔이었어요. 하지만 델타의 생산 라인에서 일하던 마트로네(Matrone) 가문이 레오나르도 오피치나 이탈리아나(Leonardo Officina Italiana)를 설립했고 델타의 제품을 관리 감독하던 니노 마리노(Nino Marino)는 마이오라(Maiora)라는 브랜드를 설립, 후에 델타를 인수하게 됩니다.
이번 펜은 레오나르도 오피치나 이탈리아나(이하 레오나르도)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델타와 레오나르도의 접점에 대해 얘기할 겁니다. 델타는 1998년에 이스라엘 건국 50주년 기념 펜을 출시했습니다. 하얀 배럴에 파란 캡, 스털링 실버로 된 중결링, 롤러가 달린 다소 심심한 모양의 클립, 델타의 여느 모델과 다를 바 없는 펜촉을 갖추고 있었지요. 2008년에는 건국 60주년 기념 펜을 출품했는데 50주년 모델보다 모든 면에서 진보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소 밋밋했던 배럴은 곡선미를 더했고 클립은 토라 야드(Torah Yad) 모양으로 다듬었으며, 배럴에는 탈리트를 묘사한 듯한 가로 줄 두 개를 넣었습니다. 펜촉에는 다윗의 별을 각인함으로써 좀 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졌어요. 안타깝게도 이 시점에서 저는 이 펜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미 내보냈거든요. 대신 75주년 기념 펜을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델타를 계승한 레오나르도가 구현한 이스라엘 건국 75주년 기념 펜'
전체적인 외형을 보면 50주년과 60주년 기념 펜의 중간 정도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60주년 모델에 비해 종교적 색채는 옅어졌으나 다윗의 별과 메노라(Menorah)는 그대로 넣었습니다. 로듐으로 도금한 청동을 두른 배럴에는 히브리력과 그레고리력으로 건국 연도와 현재 연도를 새겼고 그 하단에는 이스라엘의 국기를 그려넣었어요. 델타의 60주년 모델이 유대교의 성물을 주로 묘사한 반면 레오나르도의 75주년 모델은 역사성에 좀 더 무게를 둔 모양새입니다. 레오나르도가 델타를 계승했다고는 하나 엄연히 다른 브랜드이기에 델타와 연결점을 남기면서도 델타와는 거리를 두는 상반된 태도를 펜에 투영했다고 봐야겠습니다.
이스라엘 75주년 Chai는 브론즈, 스털링 실버, 솔리드 골드 등 세 가지 모델로 출시됐습니다. 브론즈는 948자루, 스털링 실버는 148자루, 솔리드 골드는 18자루 한정으로 나왔는데 저는 돈이 없어서 브론즈 모델로 골랐습니다. 마지막 사진에 나와 있듯 제 것은 948자루 중 8번째 모델입니다. 바로 예약 주문을 넣어서인지 매우 빠른 번호를 배정 받았네요.
레오나르도는 주로 피스톤 필러를 많이 채택해 쓰고 있고 이스라엘 75주년 Chai도 예외는 아닙니다. 모멘토 제로를 기반으로 만들긴 했는데 피스톤은 모멘토 제로의 그것보다 다소 거칠고 투박하게 움직입니다.
세 번 놀란 펜
모과 얘기를 먼저 해볼게요. 모과를 보면 세 번 놀란다고 합니다. 울퉁불퉁한 게 참 못생겼습니다. 처음엔 워낙 못생겨서 놀랍니다. 그 다음엔 못생긴 주제에 새콤달콤한 향기를 풍깁니다. 그래서 그 향기에 놀랍니다. 마지막으로 그 향기를 믿고 한 입 깨뭅니다. 생모과 드셔보신 적 있으신가요? 시고 떫습니다. 그 맛에 놀랍니다.
저도 이 펜에 세 번 놀랐습니다. 처음엔 크기에 놀랐습니다. 제원표를 보고 어느 정도 체급이 있겠구나 생각은 했지만서도 실물로 본 펜은 크기가 상당했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펜들 중 가장 키가 큽니다.
펜의 크기는 길이보다는 지름을 우선합니다. 지름이 같다면 길이를 보고요. 올해의 펜하고 지름은 비슷하나 길이는 월등합니다. 배럴의 직경은 15.7mm나 됩니다. 배럴이 15mm가 넘는 펜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이 정도면 오버사이즈는 아니어도 풀사이즈 정도는 될겁니다. 캡을 닫은 전체 길이도 150mm나 되니 길이도 짧지 않고요. 그립 존은 12.6mm 정도로 그렇게까지 크진 않지만 그렇다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크기에 비해 무게는 생각보다 가볍습니다. 금속 장식이 들어가긴 했으나 주 원료는 레진이라 그런 것 같아요. 종합하면 풀사이즈급 크기에 미드사이즈급 무게를 갖췄기 때문에 사용성도 뛰어납니다.
필기감은 우람한 체급에 맞지 않게 유려하고 눅진합니다. 전형적인 레오나르도 B촉의 필기감이에요.
저는 최대한 자사 잉크를 사용합니다. 자사 잉크만을 사용해야 하는 법은 없지만 펜의 성능을 가장 잘 구현하려면 자사 잉크를 사용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서 그래요. B촉에 자사 잉크를 넣고 쓴 글씨입니다. 레오나르도의 14k 펜촉은 물처럼 즉각적이기보다는 기름처럼 ⅓박자 늦게 반응합니다.
이 펜이 완벽한 것은 아닌데 장시간 필기를 하면 출력이 급격히 낮아집니다. 펜촉에 비해 빈약해 보이는 피더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레오나르도의 고질적 문제인 것 같아요. 최근에는 8호 펜촉에 대형 피더를 꽂아넣은 모델도 나왔는데도 이스라엘은 아직 6호 펜촉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6호든 8호든 펜촉은 별로 개의치 않지만 피더를 좀 더 큰 것으로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한정판으로 출품했으면서 모멘토 제로의 플랫폼으로 만든 것도 저는 아쉽게 생각합니다. 좀 더 새로운 디자인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요. 건국 80주년 모델이 나온다면 바뀔지 모르겠습니다.
또 무게 중심은 상대적으로 뒤에 있어요. 그래서 평소 펜을 세워 잡고 쓰시는 분은 이 펜을 사용하기에 불편할 수 있습니다. 무지(拇指)와 식지(食指)는 그립 존의 허리를 잡고, 하삼지(중지, 무명지, 계지)는 그립 존의 등을, 제1등쪽뼈사이근(무지와 식지 사이)은 배럴을 받치도록 기울여 쓰는 게 피로도가 덜할 것 같습니다.
내가 시온주의자라고?
결론부터 말하면 저는 공석에서든 사석에서든 시온주의를 옹호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리뷰 시작 전에 제가 시온주의자가 아님을 밝힌 건 이유가 있어요. 다른 커뮤니티에서 활동할 때 이스라엘 건국 60주년 기념 펜을 리뷰한 적이 있었는데 엉뚱하게 제가 시온주의자라고 공격 받은 적이 있었거든요. 시온주의는 고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 유대민족주의 운동입니다. 한국 뉴스에도 종종 언급되는 리쿠드(Likud)가 시온주의 정당이지요(이스라엘 노동당도 시온주의 정당이긴 하나 이들은 팔레스타인과 평화 공존을 표방함). 저는 팔레스타인 조상도 없고(유전자 검사를 하면 나올지 모를 일이지만) 유대교를 믿는 사람도 아닙니다. 어떻게 일단락되긴 했는데 입맛이 쓴 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펜후드 회원 여러분께서는 그러시지 않으리라 믿지만 혹시 있을지 모를 사적 공격이 들어올 경로를 차단하고자 합니다.
리뷰에 사용된 소품
이제까지 저는 책상에 실크 겹보나 홑보를 깔아서 사진을 찍어 리뷰를 작성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색다른 소품을 사용했어요.
리뷰할 펜이 이스라엘이니 만큼 실크 보자기를 사용하지 않고 탈리트(Talit)를 썼습니다. 탈리트는 유대인 남성이 기도를 할 때 두르는 숄입니다. 2014년 이스라엘 방문 때 기념품 삼아 사왔는데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네요.
탈리트를 두르는 정석적인 방법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탈리트의 크기도 제각각인 데다 유대인들도 머리까지 덮기도 하고 어깨에만 두르기도 하는 걸 보면 특별한 양식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아요.
여전히 긴장 상태인 이스라엘, 그리고 팔레스타인
전술했듯 이스라엘의 건국 75주년을 기념해서 출시한 펜입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펜 자체는 상당히 잘 만들었고 저는 아시아를 모티프로 한 물건들을 선호하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70만 원이 넘는 큰돈을 지불했습니다. 이 펜이 이스라엘의 문구점에서도 팔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2015년 이후로 이스라엘을 방문한 적이 없어서요. 그래서 저는 올해 여행 차원에서 이스라엘을 방문하고자 했습니다. 이 펜을 가지고요. 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긴장 상태가 길어지고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가면서 저는 계획을 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하마스의 선제 공격으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습니다. 하마스는 죄 없는 민간인과 외국인을 납치했고 이스라엘은 피의 보복을 선언하며 가자 지구 일대를 봉쇄한 채 맹공을 퍼붓고 있습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고통 받는 것은 참전한 병사와 민간인입니다. 그나마 지금은 인질 석방에 대한 협상이 오가고 있고 휴전이 가까워졌다는 뉴스도 들려오네요. 이 전쟁이 조속히 끝나기를 바랍니다.
레오나르도 뿐 아니라 콘클린과 오마스도 이스라엘 건국 기념 펜을 출시한 것으로 압니다. 펜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선택지가 늘어나니 좋은 일이지요(나 또한 그렇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건국 기념에만 너무 치중한 나머지 그 이면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도 합니다.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저런 이스라엘 건국 기념 상품들이 팔레스타인 사람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하고요. 1993년 9월에 오슬로 협정(팔레스타인의 자치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는 합의)으로 인해 별다른 반감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오슬로 협정은 사실상 휴지 조각이 됐지만 이스라엘 인구의 20%가 아랍인이고 적어도 제가 보기엔 유대-아랍인 간의 갈등은 정치적인 이유가 큰 탓이지 민족적 이질감은 그렇게 크지 않아 보이니까요.
언젠가는 이 펜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방문하기를 희망하면서 리뷰를 마칩니다.
첫댓글 아름다운 펜이지만, 요즘 전쟁 중인 상황이 참 마음이 아프네요. 멋진 펜 소개글 감사합니다. ^^
정말 아름다운, 잘 만들어진 펜인데 이스라엘의 사정은 그렇지 못하지요. 조속한 정전과 급진, 극단주의자들이 설쳐댈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기를 바랍니다.
멋진펜 잘봤습니다. 별개로 해당지역에 평화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더는 사람들이 다치지않기를
태생적으로 평화로울 수가 없는 곳이 서아시아인데 그럴수록 온건파들이 과격파를 단속하고 억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펜은 가격이 저렴하고 디자인은 정말 뛰어나리 많큼 예쁩니다.
그래서 몇개 사서 쓰고 있는데, 문제가 상당합니다.
잉크가 마름이 심하고 , 흐름이 너무 않좋아요..지금은 서랍에 그냥 넣어둔 상태 입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는 B촉, 자사 잉크를 쓰는 게 제일 좋습니다. 마름이 심하다는 건... 제 관점에서는 유럽 연합에 있었던 표준화 논쟁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