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윤여희
장마비는 부슬부슬 내려 올레 길을 걸을 수도 없고 무얼할까 고민하다 제주의 포도 뮤지엄의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라는 전시를 관람하였다.
소수자가 처한 소외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진정한 공존과 포용의 의미를 모색하기위한 전시라고 소개되었다. 생계유지 또는 안전한 곳을 찾아서 어딘가로 떠나거나 개인의 성장과 자유를 찾기 위해 세계 곳곳으로 이주하게 되는 상황에 대한 전시이다.
영상과 설치 미술 등 다양한 장르로 구성되어 있었다. 화려한 의상과 짙은 화장을 한 광대 마네킹 30명이 앉아 있기도 하고 빈 공간에 보트 한척이 덩그라니 놓여 있어 관객들이 붓을 들고 채워나가는 코너도 있었다. 필리핀에서 호주로 이동하는 가족의 물품 상자 140개가 쌓여있는 작품도 있었다. 여러 전시물 중에서 [사진신부]는 하와이로 이주한 노동자의 아내가 되기 위하여 사진 한 장 들고 태평양을 건너 간 어린 여자들의 모습을 사탕 공예로 조각한 마네킹이다. 한복에 하와이 무궁화를 머리에 꽂은 소녀의 모습이 측은하다. 한편에는 하와이 노동 이민을 상징하는 사탕수수도 심어있었다. 오래 전에 가난과 억압을 벗어나기 위해 하와이로 이주하여 혹독한 노동과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살아내려 애쓴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 삶을 개척하며 끝까지 견디어 낸 그들의 이야기에 가슴이 아렸었다.
또 인상적인 것은 [아메리칸 드림]이란 제목으로 아이들의 목욕 놀이용 노란 오리 인형들을 바닥에 줄지어 놓은 것이었다. 설명을 보면 미국- 멕시코 국경에 있는 사막에서 매년 수많은 러버덕이 발견된다고 한다. 길이가 620km인 죽음의 사막에서 오리 인형이 발견되는 이유는 목숨을 걸고 사막을 횡단하는 사람들이 뒤이어 오는 이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러버덕과 같은 밝은 물건들을 이정표로 두기 때문이란다.
삼 십여년동안 여성 단체에서 봉사자로 활동하던 내게 새터민들의 한국문화 적응프로그램이 진행되니 참여해달라는 요청이 왔었다. 새터민이란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을 말한다. 새터민들이 한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하도록 돕는 일이 통일을 향한 나름의 역할이라 생각하며 성실히 참여하였다. 고궁 나들이와 연극관람. 함께 음식 만들기 등을 하며 친해진 후 제주도 여행으로 마치는 프로그램이었다. 동남아에서 안기부 직원들의 안내로 여권 없이 비행기 뒷좌석에 타고 오신 그분들은 당당하게 캐리어를 끌고 비행기를 타는 게 꿈이라고 하였다. 공항에서 슈트케이스를 끌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십 여년전 함께 했던 그분들이 떠오른다. 새터민들은 주로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숨어 들어가지만 발각되면 본인의 생명뿐 아니라 가족까지 위태로워진다고 한다. 그중에는 중국인과 위장 결혼하여 자식을 낳은 후 탈출 한 분도 있었다. 한국에 정착한 후 아들을 초청하였으나 한국말을 모르는 아들과 중국어를 모르는 엄마가 번역기를 돌리며 소통한다는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었다. 천신만고 끝에 동남아로 탈출하여 한국에 오게 되면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은 후 임대주택과 정착지원금을 받지만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고생하는 분이 많다고 하였다. 생활비뿐만아니라 북한에 남은 가족에게 비밀리에 송금을 해야하므로 일자리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다. 남한 드라마를 보며 안락한 생활을 꿈꿔온 그들에게 주어지는 일자리는 주로 식당 서빙이다. 탈출하며 갖은 고생을 하여 몸이 망가져 힘든 일은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한국 남자와 결혼하여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분도 있었지만 사기를 당하여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하거나 문화적 차이로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이 많았다.
새터민과 함께 여행하며 느낀 점은 언어뿐 아니라 입맛도 많이 달랐다. 우리 김밥은 너무 달아서 그분들은 잘 먹지 못하고 북한 음식인 두부밥은 우리 입맛에는 너무 건강한 맛이었다. 교통수단보다는 주로 걸어 다니는 생활을 한 탓에 차멀미가 심하여 여행기간 동안 힘겨워하신 분도 있었다.
“남한 여자들은 고생을 안해서 얼굴이 늙지도 않는다”라고 하는 분이 계셨다. 옷차림새, 말 한마디가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상처를 줄까봐 더욱 조심하게 되었다. 자유롭고 여유로운 삶을 찾아 목숨을 걸고 오신 그분들을 보며 삶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신분 노출을 두려워하여 기념사진 촬영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프로그램에서는 이름보다는 별칭을 사용하였다. 나의 짝은 별칭이 마음님이었다. 떡집에서 기술을 배우며 자신의 떡집을 갖고 싶어하던 억척스런 여자분이었다. 마음님과 그녀의 친구인 행복님도 가끔 만나서 식사하였다. 갈매기살을 먹자고 하니 날아다니는 새인 갈매기인 줄 알고 깜짝 놀라던 얼굴이 떠오른다. 지방으로 일하러 떠난 뒤 소식이 끊긴 마음님은 지금쯤 떡집 사장님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이주 노동자들과 결혼 이주 여성을 차별하는 뉴스를 보면 가슴이 아프다. 반려견은 왕자님 공주님처럼 귀하게 대접하면서 어찌 인간에게 그리 모질게 대하는지 부끄럽다. 불과 100여년 전에는 우리도 곤궁하고 고달픈 삶을 살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제주시 문예회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시민연극제에 부산의 이주여성 극단 다락방이 참여하였다. 출품작인 [며느리삼국지] 는 중국, 필리핀, 몽골의 며느리가 제사 준비를 하면서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한 내용이었다. 발음은 서툴지만 밝고 건강한 그들의 모습이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이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리라는 기대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