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 구간
탐방로 도중의
길상 초등학교
[전등사~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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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풍양조장
금풍 양조장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금풍 양조장은 1931년 처음 오픈한 이래 양환탁 – 양재형 – 양태석으로 3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주말 기준 하루 150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곳을 보기 위해 강화를 찾는다.
금풍 양조장은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건축 당시의 원형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고, 개항기 이후 강화도 지역의 산업화(양조산업) 과정과 변화·발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인정돼 2022년 10월 04일 인천광역시 등록문화재에 등재되었다.
금풍 양조장과 불과 500m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온수리의 또 다른 명소, 전등사에서도 금풍 양조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전등사에는 종류별로 다양한 장이 담긴 장독대가 줄지어 있는데, 그 중 커다란 항아리들은 원래 금풍 양조장에서 술을 담그던 항아리라고 한다.
금풍 양조장은 양태석 대표가 가업을 이어 나가기 전 10년 정도 술을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 돼 다른 사업자에게 양조장 임대를 했던 적이 있다. 술 항아리를 사용해 술을 빚던 양 대표의 아버지와 다르게 새로운 사업자는 다른 방식을 선택했고, 그동안 사용했던 술 항아리는 2층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오랜 시간을 간직한 술 항아리에 먼지가 쌓이는 것이 안타까웠던 전등사 측은 술 항아리에 장을 담가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해 금풍 양조장은 전등사에 술 항아리를 기증하게 되었다고 한다.
2020년 양태석 대표가 금풍양조장에 돌아와 가업을 이어 나가게 되자, 전등사에서는 빌려 갔던 술 항아리의 일부를 다시 돌려주었다.
이에 대해 양태석 대표는 “그간 전등사에서 항아리를 품어 주셨기 때문에 온전히 양조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거 같아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양 대표는 전등사 측에서 항아리를 보존해 주지 않았다면 오랜 시간 방치되어 폐기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금풍막걸리는 국산 농산물인 강화도 쌀을 가지고 만들어진 지역특산주라 온라인으로 판매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막걸리는 깔끔하게 소비자에게 배송되기 쉽지 않은 품목이다.
“막걸리를 사서 집에 갔을 때 막걸리 양이 줄었던 적 없으신가요?”
탄산이 있는 막걸리는 안에 있는 탄산이 기압차로 술을 밀어내는 효과가 있어 약간 샌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양 대표는 탄산이 있는 막걸리는 유통 과정에서 깔끔하고 세련되게 보내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처음 밀봉됐던 상태와 제일 유사하게 유통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심했다고 한다. 그 결과 탄산을 배제하고 고소한 맛을 최대한 살린 무탄산 막걸리를 선택했다.
막걸리의 주원료는 쌀이다. 한 달에 2000병 가까이 막걸리를 생산하다 보면 그만큼 많은 쌀을 소비하게 되고 그 쌀을 담았던 포대는 버려지게 된다. 이를 활용할 순 없을까 고민하던 양 대표는 그대로 버려지면 쓰레기로 전락할 쌀포대를 깨끗하게 씻고 재디자인해 막걸리 파우치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고 한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만들어진 이색 포장지 ‘쌀포대’는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많고 구입하는 손님들도 즐거워한다고 한다.
금풍 양조장에서는 나만의 막걸리를 만들어 볼 수도 있다. 밑술과 덧술의 과정을 거치는 막걸리는 한 병을 마시기 위해 약 2주간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막걸리 체험을 진행하는 소믈리에님도 막걸리는 사 먹는 걸 추천할 정도로 막걸리 제조는 공이 많이 든다.
밑술 : 고두밥 + 누룩 15분간 치대기
덧술
- 밑술 작업을 마친 막걸리 10일간 매일 하루 두 번 저어주기
- 3일차 새로운 고두밥을 쪄내어 밑술 막걸리와 섞기
- 10일차 걸쭉해진 막걸리를 면보자기에 걸러 맑은 막걸리만 병입
막걸리 만들기 체험이 끝날 무렵, 양조장 앞에서 찍었던 사진은 막걸리 라벨에 깜짝 선물처럼 들어가 있다. 양 대표는 체험을 신청한 손님에 한해 양조장에서 보냈던 시간을 소중히 기억할 수 있도록 기념품으로 만들어 선물한다고 한다. 100년의 시간을 보낸 건축물 앞에서 찍은 흑백사진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뉴트로' 감성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금풍양조는 할아버님이 1969년 금풍양조장을 인수하여 새롭게 양조를 시작한 해를 기념하기 위해 알콜도수를 6.9도로 한다.
양환탁 – 양재형 – 양태석으로
3대에 걸쳐 막걸리를 양조하고 있는
금풍양조장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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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지은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
새로 지은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 입구에 있는
삼종길 표지석
성공회 3대주교가 된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 신부에 의해
1906년 건축된
원래의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의
종루
삼종길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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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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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관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의 종루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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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의
종루
조광원 노아 신부 독립운동 기념비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의 별칭인
성 안드레 성당
새로 지은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
성공회 3대주교가 된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 신부에 의해
1906년 건축된
원래의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
대한성공회 온수리 성당
성공회 3대주교 트롤로프 신부에 의해 1906년에 건축
한국 땅에 성공회가 들어온 것은 천주교가 100년의 박해를 받은 후 개항과 함께 막 선교의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하던 때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거주 및 여행지역을 법으로 제한하였는데, 서울 중심 100리 안에서만큼은 여행 허가증(호조)없이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교역과 그와 관련된 목적으로 토지를 사거나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영국이 강화도를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던 동기는 강화도가 영국 성공회의 뿌리가 되었던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서안에 있는 ‘아이오나(Iona)섬’과 유사한 입지인데다 병인·신미양요를 경험한 강화도민들이 프랑스나 미국에는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수군양성을 위해 강화도에 들어갔었던 영국인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점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강화도는 유배지로 역사적으로 많은 소외와 압박을 받았고, 그전까지는 교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지역으로 파악되었다.
신도들 스스로 땅을 헌납하고 자금을 마련해 건축
강화도에 지어진 대한 성공회의 두 번째 성당인 온수리 성당(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52호)은 강화읍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 자락의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하여 눈앞에는 초지(草芝)들판이 펼쳐지고 염하 물줄기와 서해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이 성당은 강화읍의 강화성당(1900, 사적424호)과 달리 선교본부의 지원이나 선교사들의 주도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신도들 스스로가 땅을 헌납하고, 자금을 마련하고 스스로의 노력봉사로 지은 성당이다.
나중에 성공회 3대주교가 된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 신부에 의해 1906년에 건축되었다. 강화읍 성당과 유사하게 외삼문형식의 종루를 통해 진입하나 당시 무덤이 많았던 주변의 대지조건 때문에 종루와 성당, 그리고 사제관이 일직선 축이 아니다.
온수리 성당의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가운데 지붕은 우진각으로 처리하여 조선 시대 성곽의 망루 같은 분위기를 담고 있다. 실제로 솟을지붕 아래 종을 매달고 사방으로 벽을 터서 종 소리가 퍼져나가게 꾸몄다. 정문을 들어서면 정문과 직각 축으로 바로 만나는 온수리 성당은 정면3칸, 측면 9칸, 도합 27칸 되는 단층 팔작지붕의 일자형(一字型) 전통 한옥이다.
지붕 용마루 양쪽의 십자가 장식과 지붕 양쪽 끝 합각 벽면에 벽돌로 새긴 십자 장식을 빼놓으면 향교나 관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건물 형태다. 내부는 강화성당과 마찬가지로 '바실리카' 양식으로 열두 사도를 상징하는 열두 개 기둥으로 지성소와 회중석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강화성당의 구조와 달리 회중석 가운데 복도가 남녀석을 구분하고, 후진이나 고창(Clear story) 같은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은 생략되었다.
성당과 거의 돌아앉은 사제관(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은 트롤로프신부가 1896년 강화도에 부임하여 선교를 시작하면서 2년 후인 1898년에 건축한 건물이다. 이후 사제관이 퇴락하자 1933년 원형 그대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사제관은 영국 성공회가 선교를 시작하면서 영국인 사제가 한국 전통 주거문화 속에 어떻게 적응하여 왔는가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주거공간이다.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한편 한옥성당 옆에는 2004년에 축성된 새 성당이 있다.
원래의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
내부 모습
원래의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에
전시되어 있는
주교좌
원래의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
내부 모습
원래의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의 모습을 그린
그림
[김한수의 오마이갓] 선상세례·돌림자 신앙·한옥 성당...130년 전 강화도 선교는 달랐다
한교총, 인천-강화 기독교 역사 순례 2
김한수 기자
조선일보 기사 입력일 : 2023.04.19.
“강화도에는 210개 교회가 있습니다.”
지난 4일 오전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탐방단이 방문한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 이사장 최훈철 목사님은 로비 벽에 걸린 강화 지도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강화도 지도 위엔 작은 점이 빽빽히 찍혀 있었습니다. ‘강화도가 큰 섬이라고 해도 그렇지, 교회가 210개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강화도는 2016년 기준 우리나라에서 네번째로 큰 섬입니다.) 개신교가 불과 100여년 사이에 지역에서 이렇게 확산한 것은 분명히 남다른 이유가 있었겠지요? 이날 탐방은 그 이유 혹은 비결(?)을 찾아나서는 여정이었습니다.
강화도 210개 교회들은 주로 기독교대한감리회(감리교)와 대한성공회(성공회) 교단에 속해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초기 선교사들이 선교지역을 겹치지 않도록 나누면서 인천뿐 아니라 강화 지역도 감리교와 대한성공회의 선교지역으로 정했기 때문이었지요.
“인천의 기독교 유적이 ‘처음’이라면, 강화도 기독교 역사 문화의 키워드는 ‘만남’입니다.” 이날 아침 강화도로 향하는 탐방단 버스 안에서 동행한 허은철 총신대 교수는 이렇게 운을 뗐습니다. 한국과 서양이 만나고, 불교 건축과 기독교가 만나고, 양반과 평민이 만나면서 독특한 기독교 문화를 만든 곳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감리교와 성공회, 두 교단이 강화에 정착하게 된 과정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먼저 감리교 선교는 어렵게 시작됐습니다. 외국인 트라우마 때문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강화도는 구한말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라는 외침을 잇따라 겪은 현장입니다. 아펜젤러의 뒤를 이어 인천 내리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존스 선교사는 1892년 강화도 선교에 나섰다가 강화유수에게 퇴짜를 맞았답니다. 외세에 대한 거부감은 관리부터 일반 주민까지 뿌리 깊었던 것이지요.
주민 반대로 상륙 못하게 되자 나룻배 위에서 선상 세례
선교는 뜻밖의 계기로 이뤄졌답니다. 강화 출신으로 제물포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이승환이란 사람이 내리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이지요. 그는 세례를 권유받자 어머니보다 먼저 세례 받을 수 없다면서 1893년 존스 선교사를 강화도 북쪽의 고향 마을로 초청했답니다. 한복으로 변장한 존스 선교사가 마을에 도착했지만 이내 주민들에게 들켰다지요. 이 마을 유지였던 김상임은 이승환에게 “선교사를 들이면 그 집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답니다. 그래서 등장한 고육지책이 기발한 ‘선상(船上) 세례’입니다. 마을 땅을 밟지는 못했지만 갯벌에 정박한 나룻배로 찾아온 이승환의 어머니에게 선상에서 세례를 준 것이 교산교회의 시작입니다. 교산교회 앞에는 이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놓여있고, 교회 벽에도 보름달 아래 세례 받는 모습을 그린 벽화가 있습니다.
교인들 ‘한 일(一)’-’믿을 신(信)’ 돌림자로 개명하기도
선상세례로 첫 단추를 꿴 강화 선교는 이후로도 드라마를 방불케하는 역사를 이어갑니다. “집에 불지르겠다”고 윽박지르던 김상임이 회심(回心)해 적극적으로 전도에 나선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바울이 회심해 이방인 전도에 나선 스토리가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또한 홍의교회와 교동교회 초기 신자들은 이름을 바꾸면서 돌림자를 만들기도 했답니다. 홍의교회는 ‘한 일(一)’자를 마지막 글자로 삼아 ‘박능일’ ‘종순일’ ‘권신일’ 등으로 새 이름을 지었답니다. 교동교회 신자들은 ‘믿을 신(信)’자를 돌림자로 삼았다고 하고요.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저는 신앙을 받아들인 교인들이 집단적으로 돌림자를 넣어서 개명(改名)한 이야기는 강화도 교회에서 처음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뜨거운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마태복음 읽고 ‘빚탕감’...”예수 믿는 사람은 다르다”
마을의 부자였던 종순일은 ‘빚탕감’에 앞장서기도 했답니다. 마태복음 18장 ‘자신은 1만 달란트 빚탕감을 받고도 100데나리온 빚을 탕감해주지 않은 종’ 이야기를 읽은 종순일은 자기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모은 앞에서 빚문서를 모두 불살랐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르다’는 소문이 퍼지며 복음화는 빠른 속도로 이뤄졌다고 합니다. 종순일은 후에 목사 안수를 받고 1917년 주문도 진촌교회(현 강화서도중앙교회) 목사로 부임했는데, 이 교회 성도들이 목사의 본을 받아 서로 빚을 탕감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답니다. 역시 ‘삶과 신앙의 일치’만큼 확실한 전도 수단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모범’과 ‘희생’이 강화 복음화의 비결이었던 셈이지요. 또한 이런 뜨거운 신앙은 독립운동과 교육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감리교와 강화도의 만남이 격렬했다면 성공회와 대면은 부드러웠습니다. 조선왕실이 1893년 강화도에 일종의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을 설립하면서 영국인을 교관으로 초빙했답니다. 그러자 영국 해군 군종 장교가 자연스럽게 함께 강화도에 들어오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통제영학당은 1년만에 폐쇄됐답니다. 청일전쟁을 이기고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 일본의 요구 때문이었다지요. 그렇게 통제영학당은 문을 닫았지만 성공회 선교는 이어졌지요.
한옥 성당...건물부터 친근하게 다가선 성공회
성공회는 강화도에서 토착화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강화읍성당은 한옥 성당으로 유명하지요. 강화읍성당은 우선 건물 자체가 가로 10칸, 세로 4칸, 즉 40칸짜리 한옥입니다. 집은 한옥인데 사용법(?)이 다릅니다. 궁궐이나 사찰, 혹은 민간의 한옥은 가로로 긴쪽을 정면으로 삼고 문을 냅니다. 그렇지만 강화읍성당은 4칸짜리 옆면에 정문을 냈습니다. 출입구 위엔 ‘天主聖殿(천주성전)’이란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서양 성당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사찰 법당이 보는 사람 시선에선 가로로 길게 펼쳐지며 전면에 여러 불상이 놓여있는 일종의 ‘파노라마’ 구조라면, 성당 건물은 입구에서 제대까지 긴 복도로 연결되면서 집중되는 ‘소실점’ 구조입니다. 강화읍 성당은 건물은 한옥이지만 구조는 서양 성당식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한 곳으로 모읍니다. 시선의 초점이 모이는 제대 뒷편엔 ‘萬有眞原(만유진원)’이란 글씨가 걸려 있지요. ‘천지만물을 창조한 참 근원’이란 뜻입니다.
요한복음 적은 종, 인도서 가져온 보리수도
또 입구 앞 세례대에는 ‘重生之泉’이라 적혀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다시 태어나는 샘’이란 뜻이지요. 그뿐 아니라 출입구 기둥에는 ‘무시무종선작형성진주재(無始無終先作形聲眞主宰·처음도 끝도 없으니 형태와 소리를 먼저 지은 분이 진실한 주재자이다) ‘삼위일체천주만유지진원(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삼위일체 하느님은 만물을 주관하시니 참 근본이 되신다)’ 등의 내용을 한자로 적은 주련(柱聯)도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겉면에 새긴 종(鐘)도 있지요.
이렇듯 강화읍성당에는 한자 문화와 유교·불교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눈에 띕니다. 성당에 이르는 길 자체도 산사(山寺)를 연상케 합니다. 언덕 아래에서 문 두 개를 통과해 계단을 오르면 성당을 만나게 됩니다. 성당에서는 두 개의 문을 각각 ‘외(外) 산문(山門)’ ‘내(內) 산문’이라 부른답니다. 그 문들에 금강역사나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없다 뿐이지 사찰 입구와 흡사합니다. 성당 뜰 왼쪽에는 잘 자란 보리수도 한 그루 서있습니다. 1900년 트롤로프 선교사가 인도에서 당시 10년 된 보리수나무를 가져와 심었답니다. 보리수나무는 보통 불교를 상징하지요. 나무 한 그루까지도 한국인에게 친숙한 것을 심은 배려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강화읍성당 관할 사제인 이경래 신부는 “강화읍성당의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유소년 축구 발상지...훈련 받으면 잉글랜드 리그 진출도 가능”
성공회 선교사들 역시 강화도에 근대 문화를 선물했지요.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에는 재미있는 사진 한 장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영국인 브라이들 선교사를 중심으로 소년들이 모여 있는 사진인데 제목이 거창합니다. ‘유소년 축구의 발상지 강화’입니다. 브라이들 신부는 영국 성공회 선교지(誌)인 ‘모닝 캄’에 자신이 지도한 축구교실 이야기를 보고했는데요, ‘선수들이 좀더 체계적인 훈련을 받는다면 잉글랜드 리그 진출도 가능하다’고까지 적었다네요.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은 강화도 내 7개 코스로 나눠 순례코스도 만들었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문의해보시고 참가하시는 것도 유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강화의 사진 명소인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
원래의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의
입구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의
종루
일제시대에 강화도의 거부였던 김영각이 지은
조선 전통양식의 기와집으로
우리나라에서 다섯 채 밖에 남지 않은
99간 민간 가옥 중 하나인
고택 우일각
미스터 썬사인의 촬영지이기도 한 우일각!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길 74
2,500여평의 대지 위에 지어진 99간의 잘 보존된 보기 드문 한옥 저택인 우일각은 지금도 각종 드라마나 영화 촬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우일각의 역사
1925년 : 강화도의 거부였던 김영각이 우일각 건축
1998년 ~ 2004년 : (주)니코 우일각 매입 및 테마파크와 연꽃 단지 조성을 위한 주변 토지 매입
2002년 : 우일각 전면 복원 및 개보수
2004년 : 우일각 알콜 도색, 주변 제초작업, 화단공사, 후원 징검다리 보수, 문화재관리청 다도 행사, (주)내셔널트러스트 매화마름 관찰행사, 가양주 발표회
2006년 : 우일각 화재 (행랑채 전소 및 문간채 일부 소실)
2007년 : 박리 작업, 도배, 사고석 매입, 연꽃단지 조성 시작
2008년 : CCTV 설치
2009년 : 연잎차 생산, 연꽃 분양
2011년 : 행랑채 철거, 문간채 복원 및 보수, 수중모터 교체
2013년 : KBS2 TV 드라마 '감격시대' 촬영(명월관이라는 기생집으로 사용되었음)
2014년 : 주차장 및 마당 콘크리트 공사, 대문 밖 보도 사고석 매립, 솟을 삼문 앞 조경,
보현선행회 '작은 음악회'
염춘숙의 춤 '갑비고차의 화접' 공연
2015년 : 우일각 둘레 산책로 조성, 소나무 밭 이전
KBS1 TV 드라마 '우리집 꿀단지'
영화 '해어화' 촬영 [우일각의 정자인 상지정은 1943년 마지막 기생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룬 영화 [해어화](한효주와 천우희가 출연)에서 조선의 마지막 기생들이 모여 수업을 받던 장소로 제공 되기도 했다.]
2016년 : 연못 조경 공사
영화 '대장 김창수' 촬영
2017년 : tvN 드라마 '크로스'
2018년 :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촬영 [애신이 미 영사관에 총 갖다 놓고 넘는 영사관 담장 씬도 우일각에서 찍은 한 컷이었다.]
KBS2 TV 드라마 '슈츠' 촬영
SBS 드라마 '사의찬미' 촬영
강화도의 대지주가 건립한 99칸 규모의 근대한옥
우일각(羽日閣)은 그간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집이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근대한옥으로, 99칸의 규모가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한옥의 변화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집이다. 솟을삼문 옆에 늘어선 대문채와 복도를 통해 안채와 사랑채의 채나눔을 한 본채, 사랑채 복도를 통해 이어지는 별채 등 규모도 규모려니와 공간구성 양식도 특이하다.
팔려고 내놓은 집을 구입해 보수 및 복원
강화도의 길상면에는 삼랑성 외에도 여러 유적이 남아 있다. 전등사를 비롯해 한옥의 전통양식으로 지은 성공회 성당과 사제관도 남아 있고, 조선시대 방어를 위해 쌓았던 초지진(草芝鎭)도 남아 있다. 또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梁憲洙) 장군의 전승비도 있는가 하면 고려시대 대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의 묘도 있다.
길상면에서도 온수리(溫水里)는 그 지명처럼 따뜻한 물이 나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 온수리에 일제 때 건축한 99칸 대규모 저택이 있다. 우일각은 일제시대에 강화도의 거부였던 김영각이 지은 조선 전통양식의 기와집으로 우리나라에서 다섯 채 밖에 남지 않은 99간 민간 가옥 중 하나이다. 당초 지었던 원형 거의 그대로의 상태로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집을 지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경우는 안동과 봉화, 영주 등 경북지방과 녹우당 등 호남 일부지역뿐이다.
이 집을 관리하는 이의 설명에 따르면 당초 이 집은 주인의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집을 팔기 위해 매물로 내어놓았다. 이 땅을 사려던 이는 넓은 땅을 활용해 아파트나 연립주택을 지으려고 했다. 이를 알게 된 한 기업체의 경영자가 우리 전통가옥을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를 사들여 보수하고 복원해 오늘에 이르렀다.
이 집과 관련된 몇몇 기록을 살펴보면 강화도에는 99칸 규모의 집이 모두 3채였다고 한다. 그중 지금까지 남은 집은 이 집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이 집을 구입한 업체관계자에 따르면 집을 구입한 이후 그간 40억원을 들여 이 집을 보수 및 복원했다. 지금도 이 집을 유지 관리하는데 매년 2억원 가량이 들어간다.
우일각이 당초 지어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처럼 집을 구입한 이의 노력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이 집을 구입한 이후 업체측에서는 전통가옥을 테마로 한 파크설립 구상도 했다. 한동안은 체험숙박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당초의 계획이 실현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이 집은 그간 일반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집이다. 취재하는 입장에서도 우선 문화재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강화도에서 이 집의 존재를 거의 알지 못했다. 시청을 통해 집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에도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근대가옥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높게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집을 둘러보면서 이런 생각은 사라진다.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근대건축으로서 우일각이 지니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당시 전통한옥의 변화과정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실용적인 면이 가미된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윤보선 대통령 가옥이나 가회동 등의 한옥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전통적인 한옥구조에서 양식(洋式)의 실용성이 가미된 형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을 취재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이는 실로 절묘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전통적인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여기에 실용적인 면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일제 감점기 중기 이전까지의 전통가옥들은 기본적으로 우리네 한옥의 기본양식을 따르고 있는 반면, 후기의 전통가옥들은 좁은 중정을 중심으로 한 일본적인 양식이 많이 가미되고 있다.
집을 지은 강화 거부와 관련된 이야기들
우일각을 지은 이는 김영백(金永伯)이다. 그와 관련된 자료는 ‘강화도 남부의 토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거부’라는 것 외에는 거의 나와 있지 않다. 다만 1924년 8월에 발행된 잡지 ‘개벽’과 1998년 1월25일자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에 그에 관한 언급이 나와 있다.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먼저 ‘개벽’에 나온 내용은 ‘을인(乙人)’이라는 필자가 강화도를 답사한 내용을 기록한 ‘강도답사기(江都踏査記)’에 나온 것이다. ‘강도’란 강화도의 옛 지명이다. 여기에는 강화도의 특성이나 산업, 그리고 손돌목 등 강화도의 내력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강화의 2대 명물을 소개하고 있다.
‘군내에서 600석 이상 추수하는 부자가 50여호나 되어도 사회사업이라면 모두 머리를 흔드는데 그들 중에서도 길상면 김영백군 부부가 보통학교 건축비로 3630원을 희사했다’는 내용이 명물 중 하나로 소개돼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당시 김영백이라는 인물이 강화도내에서 상당한 거부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규태 코너에 소개된 이야기는 김영백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거부가 됐는 지와 관련된 내용이다. 이야기인 즉슨 이렇다.
“강화 길상면 온수리에 아흔아홉칸짜리 기와집을 짓고 살았던 김영백이라는 거부가 있었다. 한말까지 대대로 이곳에 움막을 짓고 살았던 그는 어느날 헛간을 짓고자 뒷 둔덕을 파내리다가 괭이 끝에 쇠붙이가 닿는 소리를 들었다. 자그마한 녹슨 솥이 묻혀 있어 이를 파내 뚜껑을 열어보니 주먹만한 금덩이로 채워져 있었다.
이 횡재 소문을 듣고 강화유수가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고 방을 붙여 금괴를 묻은 장본인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김영백에게 불로소득의 10분의 1인 십일세만 물고 그 금덩이들을 차지하게 한다.
강화도는 고려시대 이래 국난이 있을 때마다 서울의 왕족이나 고관대작들의 피난지였다. 국난 중에 모아 두었던 금덩이를 갖고 강화에 피난온 누군가가 몰래 묻어 두었을 것이다. 피난온 상류층의 일가 전원이 몰살당한 사례가 적지 않았으며 금괴를 묻어둔 은밀한 장소가 소재불명된 경우가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추정된 것이다.”
이 날짜 이규태 코너에는 이 이야기와 함께 당시 서울에서도 우연히 발견된 금덩이를 얻은 실화가 적지 않다면서 ‘일사유사’에 나오는 서울 과부 김학성 모에 관한 이야기도 소개하고 있다. 이들 얘기를 미루어보면 당시 이같은 일이 드물게 있었던 듯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경기도사 7권-일제강점기편’에도 나온다. 이책 제3장 제4절 ‘경기도민의 일상생활과 의식주’에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농촌지주의 기와집이 소개되고 있다. 당시 이집에 대한 내용은 전통한옥 전문가인 김홍식 전 명지대 교수가 보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내용은 ‘1925년에 지어진 이 집은 전형적인 품(品)자 형을 지니고 있으며, 강화도 남부의 토지 대부분을 소유했던 대지주 김영백(1873~1928)이 자신의 부를 현실화시키면서 지어졌다. 그가 언제 이러한 토지를 보유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원래 초가에 살던 김씨가 1924년 소문난 목수를 불러서 99칸에 이르는 대저택을 기와집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별채 정자와 부엌마루 등 특이공간 눈길
이 집의 규모는 이미 높은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한 대문채에서부터 느껴진다. 솟을삼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문간방들이 길게 이어진다. 문간마당을 사이에 두고 다시 안채 및 사랑채로 이어지는 중문과 담장이 있다. 이 집을 관리하는 분의 얘기에 따르면 당초 문간마당에도 행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안채로 통하는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ㄷ’자 형의 몸채가 눈에 들어온다. 이 몸채는 안채와 사랑채가 함께 이루고 있는 건물로, 복도를 통해 채나눔을 하고 있다. 안채 대청을 중심으로 대청의 왼쪽 편인 안방과 부엌, 아랫방, 그리고 대청 오른쪽의 건넌방까지가 안채의 공간이다. 그리고 복도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로 사랑방과 누마루가 위치한 사랑채 공간이 자리잡았다.
이 집의 안채 대청은 삼겹형태에 정면 3칸 규모여서 매우 크다. 이 집을 조사했던 김홍식 교수도 ‘거의 홀에 가까운 큰 공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안채 대청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안방문이나 건넌방 문이 모두 들어열개로 돼 있는 점이다.
안채 공간에 들어열개를 설치한 경우는 전통민가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이것이 근대한옥이어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방도 기다란 형태로 매우 넓다. 안방 복도 끝에는 2층으로 된 깊숙한 수납공간이 있다.
대갓집답게 안방 부엌도 매우 넓은 공간이다. 특히 이곳 부엌 한쪽에는 넓은 마루공간이 설치돼 있다. 이런 형태의 부엌도 전통 사대부의 민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많은 손님을 맞이할 때나 혹은 가족들이 많이 모이는 제사 등에 부엌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미리 음식을 준비하기 위한 공간이 아닌가 싶다.
안채의 뒤뜰은 마당보다 높게 구성돼 있다. 경사진 지형의 형태를 그대로 살린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에 별채형태의 정자가 서 있다. 특히 이 정자는 안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정자로서의 성격을 충분히 살리고 있다. 또한 이 정자는 밖에서도 출입할 수 있지만, 사랑채 복도와도 연결돼 있어 사랑채로 찾아온 손님을 바로 정자로 안내할 수 있도록 돼 있는 구조다.
문간마당과 몸채를 나누는 각 담장마다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한쪽 담장에 새겨진 글씨를 보면 ‘수(守)’, ‘신(信)’, ‘교(交)’, ‘붕(朋)’이다. ‘친구와의 사귐에 있어서는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터다. 비단 이 글자들뿐만 아니라 이곳 담장에는 교훈이 될 만한 글귀들이 안팎으로 쓰여 있다.
이 집의 안채 대청 퇴앞으로 비상 피난통로가 설치된 점도 눈길을 끈다. 사랑채 복도 밑으로 난 작은 통로를 통해 안마당에서 사랑채 뒤쪽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안채 부엌 뒤쪽으로는 커다란 장독대가 놓여 있고 그옆에 역시 커다란 우물이 있다. 우물 뚜껑을 열어보니 깊이가 꽤 깊다.
한 집안의 흥성과 쇠락이 함께 담긴 건물
한편 앞서 언급한 김홍식 교수의 조사자료에 따르면 1930년대 이후 이 집의 사랑채는 주로 소작을 관리하는 마름들의 사무실로 사용됐다고 한다. 이 집에서는 마름을 통한 토지경영을 했는데 수확한 작물을 집으로 가져오지 않고 마름이 직접 인천으로 가져가 거래를 한 후 현금으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실제 이 집에는 다른 지방의 대농 지주처럼 곡식을 쌓아두기 위한 넓은 마당이 없다.
한편 이 집은 한때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문화재 지정에 따른 여러 제약요건 때문에 소유자 측에서 해제를 요구해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다. 그러나 인천시 측에서는 문화재급의 가치를 지닌 이 집의 보존과 활용을 위해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다.
인터넷 블로그에는 50여년전 이 집에 묵었던 사람의 회고담이 소개돼 있다. 당시 그는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이곳으로 왔는데, 홀로 살며 집을 지키던 여주인이 이 집을 숙박시설로 이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우일각에는 한 집안의 흥성과 쇠락의 역사가 함께 담긴 셈이다. 어쨌든 99칸 규모의 저택이 그 규모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럽다.
고택 우일각이
출입금지 지역임을 알리는
경고문
2018년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촬영지인
우일각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길정저수지] 구간
탐방로 도중의
기독교 대한감리회 새빛교회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길정저수지] 구간
탐방로 도중의
청송국수
청송국수에서 점심식사로 먹은
떡만두국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길정저수지]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사진 좌측의 진강산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길정저수지] 구간 탐방로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진강산
길정저수지 둑 밑에 있는
카페 춘
길정저수지 둑에서 바라본
마니산
[ 위 사진부터 이어지는 6장의 사진은
길정저수지 둑에서
시계바늘 방향으로
360도 파노라마 조망하면서
촬영한 사진들이다.]
길정저수지 둑에서 바라본
진강산
길정저수지 둑에서 바라본
길정저수지와
사진 좌측에 보이는 태양광 발전시설
[길정저수지는 강화도 양도면에 위치한 497,000㎡ 규모의 저수지로, 수심이 깊어 항상 파란빛의 물을 만날 수 있는 넓은 저수지이다.
인천시는 2018년3월28일 길정저수지에서 인천 최초의 수상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하고 준공식을 개최했다.
길정 저수지의 태양광발전소는 한국농어촌공사 강화지사가 13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길정저수지 유휴 수면에 설치했다.
발전소 시설용량은 500kW로, 연간 142가구(가구당 월 350kWh 기준)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600MWh의 전력을 생산한다.
이는 석유 연간 10만리터의 대체 효과를 가지며, 약 274톤의 이산화탄소(CO2) 절감을 기대할 수 있는 양이다.]
길정저수지 둑에서 바라본
길정저수지
길정저수지 둑에서
동남쪽으로 바라본
풍경
길정저수지 둑에서 바라본
마니산
[ 이상으로 파노라마 조망 끝 ! ]
길정저수지 둑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마니산
길정저수지 둑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사진 좌측의 진강산
길정저수지 둑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길정저수지의 태양광 발전시설
길정저수지 태양광 발전시설의
발전량 계측기
서해랑길 강화 101코스에 관한
안내문
[길정저수지~이규보 묘] 구간 탐방로
주위 풍경
이규보 묘에 관한
안내문
이규보(李奎報)
[동명왕편]을 남긴 고려 시대의 문인
출생 – 사망 : 1168 ~ 1241
광세(曠世)의 문인인가, 시대의 아부꾼인가. 이규보(李奎報, 1168~1241)를 두고 내려지는 평가는 극단적이다. 그만큼 문제적 인물이었으며, 복잡다단한 시대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느 쪽의 비판대상이 되었던 이규보는 13세기 문학사에서 하나의 지평을 열었다는 데 이론이 없다.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가 이룩한 문학의 핵심을 정리해본다.
샘 속의 달을 노래함
이규보는 13세기 한국문학사의 지평을 넓힌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문학인으로 크게 자부했으며, 더불어 문필을 가지고 시대에 봉사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이 극악스러운 최씨무인정권이었는데도 그랬다. 한마디로 이규보는 문제적 인간이었으며,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에도 극단으로 갈려 나온다.
문학적 감수성이나 세계인식이 얼마나 뛰어난 것이었냐는 이규보의 다음과 같은 시로 적절히 설명할 수 있다.
산승이 달빛을 탐하여 山僧貪月光
병 속에 물과 함께 길어 담았네 甁汲一壺中
절에 다다르면 바야흐로 깨달으리라 到寺方應覺
병 기울이면 달빛 또한 텅 비는 것을 甁傾月亦空
‘영정중월(詠井中月)’ 곧 샘 속의 달을 노래한다는 뜻의 제목을 가진 시이다. 어렵지 않은 글자만 가지고도 정확히 운을 맞추고,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불교 논리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시화한 작품이다.
달빛을 사랑하는 스님이라면 벌써 그것으로 공(空)의 생애를 충분히 실천한 분이련만, 그조차 욕심이요, 병 속의 가득찬 물을 쏟아내면 달빛 또한 사라지니, 완벽한 공(空)의 세계를 향한 치열한 싸움이 아닐 수 없다. 절묘한 표현이다. 샘물에 비친 달빛조차 색(色)의 세계로 여길 정도이니, 인식의 철저함을 넘어 시적 형상화의 수준에도 혀를 내두를 만하다.
불운한 시절 속의 모색
이만한 문학세계를 구축한 이규보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1168년에 태어났다. 이 해가 의종 22년이었는데, 그로부터 꼭 2년 뒤에 무신란이 터졌다. 집안이 그다지 번성해 보이지 않으나, 그럴수록 글로써 벼슬을 살고 집안을 일으켜야 할 형편에, 태어나자마자 만난 이런 시국의 비상사태는 그에게 결코 유리할 것이 없었다. 한미(寒微)하기는 하나 그 또한 문인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는 춘경(春卿)이요 처음 이름은 인저(仁低)였는데, 벌써 아홉 살 때 시를 짓는 신동으로 알려지고, 그의 호 가운데 하나가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거니와, 특히 술을 좋아하기로는 벌써 소년시대 때부터였다. 술 자체를 좋아했는지, 시대의 울분을 술로 달랬는지 모르겠으나, 자유분방한 성격에 과거 시험 같은 딱딱한 글은 마음에 차지 않아, 어려서의 소문과는 달리 시험에는 20대 초반까지 합격하지 못하였다. 대신 강좌칠현(江左七賢) 같은 이들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강좌칠현은 죽림고회라고도 하는데, 무신란의 와중에 자리를 잃고 현실세계에 염증을 느낀 이인로·오세재·임춘·이담지·조통·황보항·함순 등 7인으로 구성되었다. 중국 진(晉)나라 때 자유방임적인 노장사상(老莊思想)에 심취하여 시주(詩酒)를 벗 삼던 죽림칠현을 본떴던 것이다. 그들은 이규보에게 함께 하자고 권했다. 그러나 이규보는 함께 어울리면서도 정작 동참의 권유에는 완곡하게 거절하면서 이런 글을 보냈다.
“대나무 아래의 모임에 참여하는 영광을 차지하고서 술을 함께 마셔서 기쁘지만, 칠현 가운데 누가 씨앗에 구멍을 뚫을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실은 중국의 죽림칠현 가운데 인색한 사람 하나가 자기 집의 좋은 오얏 씨앗을 다른 누가 가져다 심을까 염려해 모두 구멍을 뚫어 놓았다는 고사가 있다. 은거를 표방하되 제 먹을 것 챙기기는 재빨랐던 이가 있었으니, 그와 마찬가지로 이규보는 죽림고회의 한계와 이중성을 꿰뚫어 보았다. 속으로는 벼슬길을 바라면서 겉으로 초월한 듯 살아가는 이들에게 보내는 야유이기도 했다.
이규보는 그만의 길을 걸었다. 백운거사(白雲居士)를 자처하고 시를 지으며 장자(莊子) 사상에 심취했다. 그가 새로운 역사의식을 갖추어 나가는 모습은 25세 때 지은 [동명왕편(東明王篇)]이나 [개원천보영사시(開元天寶詠史詩)]같은 작품에 드러난다. 이때는 지방을 돌다 개성에 돌아와 궁핍한 생활을 할 때였다. 우리 역사에 대한 지극한 자긍심과 함께 문란한 정치와 혼란한 사회를 보고 크게 각성한 결과였다. 특히 [동명왕편]은 민족 영웅 서사시로 오늘날의 평가 또한 극진하다.
입신양명의 길로 나가
한 바탕 풍운의 시기가 지난 다음 이규보는 현실적인 길을 찾기로 하였다. 무신정권은 최충헌에 이르러 방향을 잡고 있었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고 실권을 잡은 것이 1196년, 이규보의 나이 28세 때였다. 이규보는 최충헌의 동향을 유심히 살폈으며, 그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시문을 지어 보냈다. 그런 그를 최충헌이 알아보고 등용한 것은 이규보의 32세 전후로 알려져 있다.
이규보는 1207년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되었고, 최충헌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최이가 정권을 물려받은 다음에는 더욱 총애를 받아, 1220년 예부낭중기거주지제고(禮部郎中起居注知制誥)에 올랐고 국자좨주한림시강학사(國子祭酒翰林侍講學士)를 거쳐 1230년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를 지냈다. 한때 위도(渭島)에 유배되기도 했지만 얼마 안 있어 복직되었고, 1237년에는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의 전성기를 누리던 때 벼슬이다.
이런 그의 행적이 오늘날까지 처신에서의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1970~80년대의 대표적인 논객인 평론가 김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규보로 대표될 수 있는 무인정권하의 기능적 지식인은 권력에 대한 아부를 유교적 이념으로 호도하며, 그것을 유교적 교양으로 카무플라지한다. 가장 강력한 정권 밑에서 지식인들은 국수주의자가 되어 외적에 대한 항쟁의식을 고취하여 속으로는 권력자에게 시를 써 바치고 입신출세의 길을 간다. 그가 입신출세하는 한, 세계는 여하튼 태평성대다.”
한마디로 권력에 아부한 지조 없는 문인이라는 평가이다. 그에 반대되는 입장에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무신정권에서 벼슬을 하는 것을 주저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기회가 오자 당당하게 나아가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최씨정권의 문인들 가운데 으뜸가는 위치를 차지했다. 그 점을 두고 이규보를 낮게 평가하려는 견해는 수긍하기 어렵다. 벼슬을 해서 생계를 넉넉하게 하자는 것은 당시에 누구에게나 공통된 바람이었다. 정권에 참여해 역사의 커다란 전환에 기여하고자 한 것이 잘못일 수 없다. 무신란이 중세전기를 파괴한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규보는 중세후기를 건설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국문학자 조동일의 평가이다. 학계의 일각에서 나오는, 몽골 항쟁에 강한 영도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정권에 협조했다고 보는 시각과 궤를 같이 한다.
실상 문인 관료를 척결하고 일어선 무인정권에서는 국가 사무 특히 외교 문서를 맡아 할 전문 관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과거 정권에 때 묻지 않은 사람을 찾으려는 풍조는 오늘날도 마찬가지 아닌가. 문인이라곤 시골의 서당 선생 하나도 남기지 않고 내몰아 버린 무인정권으로서는 정신 차리고 보니 중국에 보낼 공문 하나 만들기 어려웠다. 그런 그들에게 새로운 문인, 자신들에게 거부감을 갖지 않는 문인, 과거 문인에 뒤지지 않을 실력이 갖춰진 문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거기서 이규보가 나타났다. 그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춘, 무인정권이 갈망하던 인재였다.
새로운 세기를 건설하는 방향의 제시
앞서 조동일은 이규보를 ‘중세후기를 건설하는 방향을 제시’했다고 하였다. 새로운 세기를 건설하는 방향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규보의 문학은 자유분방하고 웅장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동명왕편]에서 보여준 바였다. 1193년 명종23년이었다. 이 해는 곧 무인정권이 시작한 지 23년째임을 말한다. 무인정권의 두 번째 실권자 이의민이 10년째 그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이의민이 누구인가? 아버지는 소금과 체를 파는 장사꾼이요, 어머니는 절에서 일하던 노비였다. 오직 힘만으로 권력을 잡고 전횡을 부리던 시절의 풍운아였다. 살벌한 세월, 왕은 있으나 허울뿐이고, 같은 무인끼리도 더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죽이는 사이, 나라는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였다. 고려인이 그토록 사모해 마지않던 송나라는 북쪽 오랑캐에게 쫓겨 남쪽으로 옮겨간 지 오래되었다.
비극적인 시대에 태어난 이규보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옛 영웅을 떠올린다. 앞선 시기의 김부식이 버렸던 자료 무더기 속에서 그는 먼저 동명성왕 주몽을 만난다. 그의 고백은 이렇게 시작한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서 귀신이고 환상이라 생각했는데, 세 번 거푸 탐독하고 나니 점차 그 근원에 이르게 되어, 환상이 아니고 성스러움이며, 귀신이 아니고 신(神)이었다.”
환상이 아니며 성스러움이고, 귀신이 아니라 신이었다는 언표는 고구려가 다름 아닌 우리 민족사의 줄기에 오롯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과, 역경을 이겨내는 슬기로운 왕의 모습을 통해 후손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자는 뜻을 품은 것이었다. 이야말로 고구려의 역사를 우리의 것으로 자리매김하고 웅변한 일대 사건이었다. 김부식의 시대였다면 있을 수 없는 민족사의 자랑이다.
이규보의 문학론은 기의(氣意)와 신의(新意)에 이르러 하나의 봉우리를 이룬다. 기의는 기골(氣骨)와 의격(意格), 신의는 신기(新奇)와 창의(創意)를 말한다. 시대적·민족적인 문제의식과 만나 바람직한 문학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의는 [동명왕편] 같은 작품으로 현실화했다. 더불어 용사(用事)로 가득한 기존의 시를 비판한 것이 신의이다. 용사는 과거의 사적이나 시구에서 따와 시를 만드는 방법이다. 이것이 지나쳐 인순과 답습에 지나지 않는 문학으로 도배되는 현실이었다.
이규보가 재미난 비유로 쓴 ‘시에서 마땅하지 않은 아홉 가지’라는 글이 있다. 그 가운데서 ‘재귀영거체(載鬼盈車體)’와 ‘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가 돋보인다. ‘재귀영거’는 귀신을 수레에 가득 싣고 다닌다는 말로, 죽은 이들의 이름을 한없이 나열하는 것을 말한다. 게다가 옛날 것은 무조건 좋다 여기고, 그다지 뛰어나지도 않은 표현을 슬쩍 훔쳐서 자기 것이라 말했다가 금방 들통 나는 어리석음에 대해 통렬히 비난한다. ‘졸도이금’이다. 이것은 바로 지나친 용사에 대한 비판이고, 여기에서 신의로 새로운 세기를 건설하는 방향이 잡혔다.
이규보 묘역
백운재로도 불리는 사가재의
입구
백운재로도 불리는 사가재
이규보의 영정을 모신
유영각
유영각
이규보 묘역
이규보 묘
이규보 묘(李奎報 墓)
면적 668.9m2
시대 고려시대
소유 여주이씨 문순공파 종중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까치골길 72-17 (길직리)
이규보 묘(李奎報 墓)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릭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 선생의 묘소이다.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고려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선생의 묘소이다.
고려의 무신정권 하에서 태어나 무신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문인의 한 사람으로, 명종 19년(1191)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시문에 능하였던 선생은 중국의 모방이 많았던 당시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이야기를 서사시로 엮는 등 민족정신에 바탕을 두고 글을 썼다. 또한 몽고군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해서 대장경을 만들 때 민족수호의 충정이 담긴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을 지었다. 선생이 남긴 문집은 ’동명왕편’을 비롯하여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등 55권으로, 모두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묘역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망주석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
이규보 묘비
이규보 묘 앞에서 내려다본
풍경
백운정사
백운정사 현판
백운재로도 불리는 사가재
백운재로도 불리는 사가재
[이규보 묘~곤릉] 구간
탐방로에서 뒤돌아본
이규보 묘역
[이규보 묘~곤릉] 구간 탐방로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이규보 묘역
[이규보 묘~곤릉] 구간 탐방로 도중의
길직리 부부 느티나무
길직리 부부 느티나무에 관한
안내문
[이규보 묘~곤릉] 구간
탐방로 도중의
기독교 대한감리회 권능교회
기독교 대한감리회 권능교회의
입구
2023년12월10일(일요일) 강화 나들길 제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 탐방기 탐방지 : 강화 나들길 제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 [강화 나들길 제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 : 온수 공영주차장~(0.2km)~전등사~(km)~성공회 온수성당~(2.4km)~갈정 저수지~(2.9km)~이규보 묘~(3.8km)~곤릉~(1.9km)~석릉~(5km)~가릉 [탐방거리 : 16.2km, 소요시간 : 5시간30분] 제3코스 명소 전등사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은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등사에는 대웅보전, 약사전, 범종 등 보물급 유적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대웅전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은 벌거벗은 여인을 묘사하고 있어, 대웅전 중수를 맡은 도편수가 달아난 여인에 대한 배신감으로 조각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온수리 성공회성당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기법에 서양 그리스도교 교회 양식을 적용한 동서 절충식의 목조건물이다. 1906년 영국인 주교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가 세웠으며, 성 안드레 성당으로도 불린다. 본당과 종을 달아놓은 2층 문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당은 정면 9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용마루 양끝에 십자가를 장식해 놓았으며, 종루에는 본래 서양식 종이 달려 있었으나 1945년 일제에 징발당한 뒤 1989년 새로 우리나라 전통양식의 종을 제작하여 걸었다. 이규보 묘 명조 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이듬해 부친이 작고하자 천마산으로 들어가 호를 백운거사라 하고 글을 쓰며 지냈다. 그는 그곳에서 ‘천마산지’ 등을 썼는데 특히 영웅 서사시 ‘동명왕 편’은 민족의 영웅 동명왕의 생애와 발자취를 노래한 서사시로서 우리 문학사에 남긴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고려의 이태백’이라고 불렸다. 고려 왕릉 현재 강화도에 남아 있는 고려의 능은 석릉, 곤릉, 홍릉, 가릉의 4기뿐인데 규모는 아주 작고 봉분과 망주석과 혼유석 정도의 시설 밖에 없으며 호석과 난간석을 갖춘 전형적인 왕릉 구조는 찾아볼 수가 없다.] 탐방코스 : [ 전등사 동문 버스 정류장~(564m)~삼랑성 동문~(731m)~전등사~(0.6km)~삼랑성 서문~(0.5km)~정족산 정상(삼랑성 정상)~(0.2km)~삼랑성 북문~(150m)~정족산 사고~(150m)~전등사~(0.3km)~삼랑성 남문~(1.7km)~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0.5km)~고택 우일각~(1.1km)~청송국수~(2.2km)~길정 저수지~(2.9km)~이규보 묘~(3.8km)~강화 곤릉~(1.9km)~강화 석릉~(5km)~강화 가릉~(0.8km)~탑재 버스 정류장 ] [탐방거리 : 23.1km] 탐방일 : 2023년 12월 10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강화군 길상면 : 최저기온 2도C, 최고기온 12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6시간57분 소요) 07:14~07:47 구산역에서 6호선 지하철을 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서 공항철도 전철로 환승하여 김포공항역 3번 출구로 나옴 [33분 소요] 07:47~07:56 롯데몰.김포공항역 정류장으로 도보로 이동한 후 전등사 동문 정류장으로 가는 60-5번 버스 승차를 대기 07:56~09:20 60-5번 버스를 타고 롯데몰.김포공항역 정류장에서 전등사 동문 정류장으로 이동 [1시간24분 소요, 21개 정류장 이동] 09:20~09:32 전등사 동문 버스 정류장에서 탐방 출발하여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 41-3 번지에 있는 강화 삼랑성(江華 三郞城) 동문으로 이동 [강화 삼랑성(江華 三郞城)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연대 미상의 산성. 1964년 6월 10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번지 1964년 6월 10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넓이 24만 5997㎡, 둘레 약 1km이다. 성의 축조 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다만 단군(檀君)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로 그 이름을 삼랑산성(三郞山城) 혹은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곽의 축성 구조를 보면 잡석(雜石)으로 축조되어 삼국시대 석성구조(石城構造)를 보여 주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보수(補修), 조선시대에 중수(重修)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문은 네 곳에 있으며 문루(門樓)는 남문에만 있어서 종해루(宗海樓)라 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이 소장된 마니산의 사고(史庫)가 옮겨와 보존되었었다. 그리고 성내에는 유명한 전등사(傳燈寺)가 있으며,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에 프랑스군에 승리한 기념비로서 양헌수 승전비(梁憲洙勝戰碑)가 서 있다. 이러한 삼랑성은 특히 마니산 전설과 더불어 단군신화와 관련되는 흥미있는 성이라고 할 수 있다.] 09:32~09:37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번지에 있는 전등사(傳燈寺)로 이동 [강화도 남부 정족산 정족산성(삼랑성) 안에 있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대웅전, 약사전, 범종 등 대한민국의 보물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사고가 경내에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건축되었다가 고려 시대를 거치며 증축과 개축을 이어오다 광해군 때 화재로 인한 소실로 다시 재건되었다. 창건될 때는 진종사였으나 후에 전등사로 바뀌었다. 전등사로 들어가는 입구는 동문과 남문 두 곳이 있다. 동문에는 전등사가 호국불교의 진원지임을 증명하는 양헌수승전비가 있다. 병인양요 때 전략적 요충지였던 전등사에 쳐들어온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고종 10년인 1873년에 건립한 것이다. 남문에서 종해루를 지나 대조루로 가는 길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700년이 넘은 보호수들로 노승나무, 동승나무로 불린다. 또한 경내에 현대식으로 지은 법당 무설전과 서운갤러리가 있으며, 갤러리에서는 불교미술전이 상시 운영되고 있다. 체험 프로그램으로는 템플스테이가 준비되어 있다. 체험형과 휴식형으로 나누어져 있고, 체험형은 첫날 오후 1시에 시작하며, 사찰 예절, 공양, 108배, 좌선에 이어, 다음날 예불과 스님과의 차담으로 이루어지며 점심 공양 후 끝난다. 이에 비해 휴식형은 첫날 12시에 시작해 사찰 예절, 범종 타종, 예불에 이어 이튿날 예불, 울력(일을 돕는 것), 점심 공양 후 종료한다. 전등사 입장요금 : 무료] 09:37~09:50 전등사를 탐방 09:50~09:56 삼랑성(三郞城) 서문으로 이동 09:56~10:06 정족산(鼎足山, 220m) 정상으로 이동 [정족산 정상이 삼랑성 정상이기도 하다.] [정족산(鼎足山)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산. 높이 : 220m 문화재 : 전등산 약사전(보물 179호),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호), 삼랑성(사적 135호), 전등사 대조루(시지정 문화재 7호) 마리산(469m)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생긴 높이 220m의 산이다. 생김새가 마치 세 발 달린 가마솥과 같다 해서 이름을 정족산(鼎足山)이라 하였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전등사와 강화 삼랑성(정족산성) 등 많은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는 삼랑성은 사적 제130호로,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고 하는 석성이다. 남문루와 동문·서문·북문 터가 남아 있고 성 안에 고구려 시대에 창건된 전등사가 있다. 산행은 전등사를 기점으로 시작한다. 전등사 요사채를 돌아 오른쪽으로 난 길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터로 가는 길이며, 곧바로 올라가면 산 정상에 이르는 길이다. 정상에 오르면 노송과 나무숲에 둘러싸인 전등사 부근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쪽으로 마리산, 남쪽으로 인천 앞바다의 섬들이 보인다. 산행 시간은 왕복 2시간 정도 걸린다.] 10:06~10:10 사진촬영 10:10~10:13 삼랑성(三郞城) 북문으로 이동 10:13~10:16 정족산 사고(鼎足山史庫)로 이동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조선왕조 실록 및 정부문서의 보관소.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 내 전등사 부근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 내부의 전등사(傳燈寺) 서쪽에 있었으며, 실록의 보관이 중심 업무였다. 강화도에 사고가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1595년(선조 28)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춘추관(春秋館)과 충주(忠州) ·성주(星州)의 사고가 불타고 유일하게 남은 전주(全州)사고의 실록이 해주(海州)를 거쳐 강화부 관아 건물에 보관되었던 것이다. 그 후 그것은 다시 영변의 보현사(普賢寺)와 객사(客舍)을 거쳐 1603년 새로 설치된 강화도 마리산(摩利山) 사고에 옮겨져 복간되었다. 정족산사고는 1653년(효종 4) 마리산 사고에 화재가 일어남으로써 건립이 추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효종대 이후로 강화도가 국가의 위기에 대처할 기지로 적극 개발되었으므로 그 곳에 사고를 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1660년(현종 1) 정족산성이 완성되고 실록을 성 내의 사고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관례대로 장사각(藏史閣)과 함께 선원각(璿源閣)이 세워졌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고로 실록이 옮겨진 것은 1678년(숙종 4)이었다. 이후 실록이 새로 만들어지는 대로 1부씩 보관하였고 그 밖에 왕실 족보나 의궤(儀軌)를 비롯한 여러 정부문서를 함께 보관하였다. 춘추관에 소속되어 그 곳에서 관장하였으나 현지의 관리는 수호사찰인 전등사에서 맡았다. 정조대에 강화부 관아 위쪽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이 설치되어 국왕의 초상화나 친필 외에 많은 서책이 보관되었지만, 이 사고는 그것과 별개로 계속 운영되었으며 외규장각과 달리 병인양요 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10년 이후 보관 서적들은 규장각 도서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모여져 함께 관리되었고 지금의 서울대학 규장각도서로 이어졌다. 원래의 건물은 1930년경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장사각과 선원각의 현판만이 전등사에 보관되어 있다.] 10:16~10:21 사진촬영 10:21~10:23 전등사(傳燈寺)로 회귀 10:23~10:30 삼랑성(三郞城) 남문으로 이동 10:30~10:32 사진촬영 10:32~10:52 금풍양조장을 지나서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길38번길 14 번지에 있는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으로 이동 [금풍 양조장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금풍 양조장은 1931년 처음 오픈한 이래 양환탁 – 양재형 – 양태석으로 3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주말 기준 하루 150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곳을 보기 위해 강화를 찾는다. 금풍 양조장은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건축 당시의 원형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고, 개항기 이후 강화도 지역의 산업화(양조산업) 과정과 변화·발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인정돼 2022년 10월 04일 인천광역시 등록문화재에 등재되었다. 금풍 양조장과 불과 500m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온수리의 또 다른 명소, 전등사에서도 금풍 양조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전등사에는 종류별로 다양한 장이 담긴 장독대가 줄지어 있는데, 그 중 커다란 항아리들은 원래 금풍 양조장에서 술을 담그던 항아리라고 한다. 금풍 양조장은 양태석 대표가 가업을 이어 나가기 전 10년 정도 술을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 돼 다른 사업자에게 양조장 임대를 했던 적이 있다. 술 항아리를 사용해 술을 빚던 양 대표의 아버지와 다르게 새로운 사업자는 다른 방식을 선택했고, 그동안 사용했던 술 항아리는 2층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오랜 시간을 간직한 술 항아리에 먼지가 쌓이는 것이 안타까웠던 전등사 측은 술 항아리에 장을 담가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해 금풍 양조장은 전등사에 술 항아리를 기증하게 되었다고 한다. 2020년 양태석 대표가 금풍양조장에 돌아와 가업을 이어 나가게 되자, 전등사에서는 빌려 갔던 술 항아리의 일부를 다시 돌려주었다. 이에 대해 양태석 대표는 “그간 전등사에서 항아리를 품어 주셨기 때문에 온전히 양조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거 같아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양 대표는 전등사 측에서 항아리를 보존해 주지 않았다면 오랜 시간 방치되어 폐기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금풍막걸리는 국산 농산물인 강화도 쌀을 가지고 만들어진 지역특산주라 온라인으로 판매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막걸리는 깔끔하게 소비자에게 배송되기 쉽지 않은 품목이다. “막걸리를 사서 집에 갔을 때 막걸리 양이 줄었던 적 없으신가요?” 탄산이 있는 막걸리는 안에 있는 탄산이 기압차로 술을 밀어내는 효과가 있어 약간 샌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양 대표는 탄산이 있는 막걸리는 유통 과정에서 깔끔하고 세련되게 보내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처음 밀봉됐던 상태와 제일 유사하게 유통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심했다고 한다. 그 결과 탄산을 배제하고 고소한 맛을 최대한 살린 무탄산 막걸리를 선택했다. 막걸리의 주원료는 쌀이다. 한 달에 2000병 가까이 막걸리를 생산하다 보면 그만큼 많은 쌀을 소비하게 되고 그 쌀을 담았던 포대는 버려지게 된다. 이를 활용할 순 없을까 고민하던 양 대표는 그대로 버려지면 쓰레기로 전락할 쌀포대를 깨끗하게 씻고 재디자인해 막걸리 파우치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고 한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만들어진 이색 포장지 ‘쌀포대’는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많고 구입하는 손님들도 즐거워한다고 한다. 금풍 양조장에서는 나만의 막걸리를 만들어 볼 수도 있다. 밑술과 덧술의 과정을 거치는 막걸리는 한 병을 마시기 위해 약 2주간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막걸리 체험을 진행하는 소믈리에님도 막걸리는 사 먹는 걸 추천할 정도로 막걸리 제조는 공이 많이 든다. 밑술 : 고두밥 + 누룩 15분간 치대기 덧술 - 밑술 작업을 마친 막걸리 10일간 매일 하루 두 번 저어주기 - 3일차 새로운 고두밥을 쪄내어 밑술 막걸리와 섞기 - 10일차 걸쭉해진 막걸리를 면보자기에 걸러 맑은 막걸리만 병입 막걸리 만들기 체험이 끝날 무렵, 양조장 앞에서 찍었던 사진은 막걸리 라벨에 깜짝 선물처럼 들어가 있다. 양 대표는 체험을 신청한 손님에 한해 양조장에서 보냈던 시간을 소중히 기억할 수 있도록 기념품으로 만들어 선물한다고 한다. 100년의 시간을 보낸 건축물 앞에서 찍은 흑백사진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뉴트로' 감성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금풍양조는 할아버님이 1969년 금풍양조장을 인수하여 새롭게 양조를 시작한 해를 기념하기 위해 알콜도수를 6.9도로 한다.] [대한성공회 온수리 성당 성공회 3대주교 트롤로프 신부에 의해 1906년에 건축 한국 땅에 성공회가 들어온 것은 천주교가 100년의 박해를 받은 후 개항과 함께 막 선교의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하던 때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거주 및 여행지역을 법으로 제한하였는데, 서울 중심 100리 안에서만큼은 여행 허가증(호조)없이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교역과 그와 관련된 목적으로 토지를 사거나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영국이 강화도를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던 동기는 강화도가 영국 성공회의 뿌리가 되었던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서안에 있는 ‘아이오나(Iona)섬’과 유사한 입지인데다 병인·신미양요를 경험한 강화도민들이 프랑스나 미국에는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수군양성을 위해 강화도에 들어갔었던 영국인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점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강화도는 유배지로 역사적으로 많은 소외와 압박을 받았고, 그전까지는 교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지역으로 파악되었다. 신도들 스스로 땅을 헌납하고 자금을 마련해 건축 강화도에 지어진 대한 성공회의 두 번째 성당인 온수리 성당(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52호)은 강화읍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 자락의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하여 눈앞에는 초지(草芝)들판이 펼쳐지고 염하 물줄기와 서해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이 성당은 강화읍의 강화성당(1900, 사적424호)과 달리 선교본부의 지원이나 선교사들의 주도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신도들 스스로가 땅을 헌납하고, 자금을 마련하고 스스로의 노력봉사로 지은 성당이다. 나중에 성공회 3대주교가 된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 신부에 의해 1906년에 건축되었다. 강화읍 성당과 유사하게 외삼문형식의 종루를 통해 진입하나 당시 무덤이 많았던 주변의 대지조건 때문에 종루와 성당, 그리고 사제관이 일직선 축이 아니다. 온수리 성당의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가운데 지붕은 우진각으로 처리하여 조선 시대 성곽의 망루 같은 분위기를 담고 있다. 실제로 솟을지붕 아래 종을 매달고 사방으로 벽을 터서 종 소리가 퍼져나가게 꾸몄다. 정문을 들어서면 정문과 직각 축으로 바로 만나는 온수리 성당은 정면3칸, 측면 9칸, 도합 27칸 되는 단층 팔작지붕의 일자형(一字型) 전통 한옥이다. 지붕 용마루 양쪽의 십자가 장식과 지붕 양쪽 끝 합각 벽면에 벽돌로 새긴 십자 장식을 빼놓으면 향교나 관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건물 형태다. 내부는 강화성당과 마찬가지로 '바실리카' 양식으로 열두 사도를 상징하는 열두 개 기둥으로 지성소와 회중석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강화성당의 구조와 달리 회중석 가운데 복도가 남녀석을 구분하고, 후진이나 고창(Clear story) 같은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은 생략되었다. 성당과 거의 돌아앉은 사제관(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은 트롤로프신부가 1896년 강화도에 부임하여 선교를 시작하면서 2년 후인 1898년에 건축한 건물이다. 이후 사제관이 퇴락하자 1933년 원형 그대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사제관은 영국 성공회가 선교를 시작하면서 영국인 사제가 한국 전통 주거문화 속에 어떻게 적응하여 왔는가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주거공간이다.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한편 한옥성당 옆에는 2004년에 축성된 새 성당이 있다.] 10:52~11:10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을 탐방 11:10~11:17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길 74 번지에 있는 고택인 우일각(羽日閣)으로 이동 [미스터 썬사인의 촬영지이기도 한 우일각!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길 74 2,500여평의 대지 위에 지어진 99간의 잘 보존된 보기 드문 한옥 저택인 우일각은 지금도 각종 드라마나 영화 촬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우일각의 역사 1925년 : 강화도의 거부였던 김영각이 우일각 건축 1998년 ~ 2004년 : (주)니코 우일각 매입 및 테마파크와 연꽃 단지 조성을 위한 주변 토지 매입 2002년 : 우일각 전면 복원 및 개보수 2004년 : 우일각 알콜 도색, 주변 제초작업, 화단공사, 후원 징검다리 보수, 문화재관리청 다도 행사, (주)내셔널트러스트 매화마름 관찰행사, 가양주 발표회 2006년 : 우일각 화재 (행랑채 전소 및 문간채 일부 소실) 2007년 : 박리 작업, 도배, 사고석 매입, 연꽃단지 조성 시작 2008년 : CCTV 설치 2009년 : 연잎차 생산, 연꽃 분양 2011년 : 행랑채 철거, 문간채 복원 및 보수, 수중모터 교체 2013년 : KBS2 TV 드라마 '감격시대' 촬영(명월관이라는 기생집으로 사용되었음) 2014년 : 주차장 및 마당 콘크리트 공사, 대문 밖 보도 사고석 매립, 솟을 삼문 앞 조경, 보현선행회 '작은 음악회' 염춘숙의 춤 '갑비고차의 화접' 공연 2015년 : 우일각 둘레 산책로 조성, 소나무 밭 이전 KBS1 TV 드라마 '우리집 꿀단지' 영화 '해어화' 촬영 [우일각의 정자인 상지정은 1943년 마지막 기생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룬 영화 [해어화](한효주와 천우희가 출연)에서 조선의 마지막 기생들이 모여 수업을 받던 장소로 제공 되기도 했다.] 2016년 : 연못 조경 공사 영화 '대장 김창수' 촬영 2017년 : tvN 드라마 '크로스' 2018년 :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촬영 [애신이 미 영사관에 총 갖다 놓고 넘는 영사관 담장 씬도 우일각에서 찍은 한 컷이었다.] KBS2 TV 드라마 '슈츠' 촬영 SBS 드라마 '사의찬미' 촬영 강화도의 대지주가 건립한 99칸 규모의 근대한옥 우일각(羽日閣)은 그간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집이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근대한옥으로, 99칸의 규모가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한옥의 변화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집이다. 솟을삼문 옆에 늘어선 대문채와 복도를 통해 안채와 사랑채의 채나눔을 한 본채, 사랑채 복도를 통해 이어지는 별채 등 규모도 규모려니와 공간구성 양식도 특이하다. 팔려고 내놓은 집을 구입해 보수 및 복원 강화도의 길상면에는 삼랑성 외에도 여러 유적이 남아 있다. 전등사를 비롯해 한옥의 전통양식으로 지은 성공회 성당과 사제관도 남아 있고, 조선시대 방어를 위해 쌓았던 초지진(草芝鎭)도 남아 있다. 또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梁憲洙) 장군의 전승비도 있는가 하면 고려시대 대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의 묘도 있다. 길상면에서도 온수리(溫水里)는 그 지명처럼 따뜻한 물이 나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 온수리에 일제 때 건축한 99칸 대규모 저택이 있다. 우일각은 일제시대에 강화도의 거부였던 김영각이 지은 조선 전통양식의 기와집으로 우리나라에서 다섯 채 밖에 남지 않은 99간 민간 가옥 중 하나이다. 당초 지었던 원형 거의 그대로의 상태로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집을 지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경우는 안동과 봉화, 영주 등 경북지방과 녹우당 등 호남 일부지역뿐이다. 이 집을 관리하는 이의 설명에 따르면 당초 이 집은 주인의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집을 팔기 위해 매물로 내어놓았다. 이 땅을 사려던 이는 넓은 땅을 활용해 아파트나 연립주택을 지으려고 했다. 이를 알게 된 한 기업체의 경영자가 우리 전통가옥을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를 사들여 보수하고 복원해 오늘에 이르렀다. 이 집과 관련된 몇몇 기록을 살펴보면 강화도에는 99칸 규모의 집이 모두 3채였다고 한다. 그중 지금까지 남은 집은 이 집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이 집을 구입한 업체관계자에 따르면 집을 구입한 이후 그간 40억원을 들여 이 집을 보수 및 복원했다. 지금도 이 집을 유지 관리하는데 매년 2억원 가량이 들어간다. 우일각이 당초 지어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처럼 집을 구입한 이의 노력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이 집을 구입한 이후 업체측에서는 전통가옥을 테마로 한 파크설립 구상도 했다. 한동안은 체험숙박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당초의 계획이 실현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이 집은 그간 일반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집이다. 취재하는 입장에서도 우선 문화재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강화도에서 이 집의 존재를 거의 알지 못했다. 시청을 통해 집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에도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근대가옥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높게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집을 둘러보면서 이런 생각은 사라졌다. 일제 강점기때 지어진 근대건축으로서 우일각이 지니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당시 전통한옥의 변화과정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실용적인 면이 가미된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윤보선 대통령 가옥이나 가회동 등의 한옥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전통적인 한옥구조에서 양식(洋式)의 실용성이 가미된 형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을 취재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이는 실로 절묘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전통적인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여기에 실용적인 면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일제 감점기 중기 이전까지의 전통가옥들은 기본적으로 우리네 한옥의 기본양식을 따르고 있는 반면, 후기의 전통가옥들은 좁은 중정을 중심으로 한 일본적인 양식이 많이 가미되고 있다. 집을 지은 강화 거부와 관련된 이야기들 우일각을 지은 이는 김영백(金永伯)이다. 그와 관련된 자료는 ‘강화도 남부의 토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거부’라는 것 외에는 거의 나와 있지 않다. 다만 1924년 8월에 발행된 잡지 ‘개벽’과 1998년 1월25일자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에 그에 관한 언급이 나와 있다.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먼저 ‘개벽’에 나온 내용은 ‘을인(乙人)’이라는 필자가 강화도를 답사한 내용을 기록한 ‘강도답사기(江都踏査記)’에 나온 것이다. ‘강도’란 강화도의 옛 지명이다. 여기에는 강화도의 특성이나 산업, 그리고 손돌목 등 강화도의 내력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강화의 2대 명물을 소개하고 있다. ‘군내에서 600석 이상 추수하는 부자가 50여호나 되어도 사회사업이라면 모두 머리를 흔드는데 그들 중에서도 길상면 김영백군 부부가 보통학교 건축비로 3630원을 희사했다’는 내용이 명물 중 하나로 소개돼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당시 김영백이라는 인물이 강화도내에서 상당한 거부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규태 코너에 소개된 이야기는 김영백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거부가 됐는 지와 관련된 내용이다. 이야기인 즉슨 이렇다. “강화 길상면 온수리에 아흔아홉칸짜리 기와집을 짓고 살았던 김영백이라는 거부가 있었다. 한말까지 대대로 이곳에 움막을 짓고 살았던 그는 어느날 헛간을 짓고자 뒷 둔덕을 파내리다가 괭이끝에 쇠붙이가 닿는 소리를 들었다. 자그마한 녹슨 솥이 묻혀 있어 이를 파내 뚜껑을 열어보니 주먹만한 금덩이로 채워져 있었다. 이 횡재 소문을 듣고 강화유수가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고 방을 붙여 금괴를 묻은 장본인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김영백에게 불로소득의 10분의 1인 십일세만 물고 그 금덩이들을 차지하게 한다. 강화도는 고려시대 이래 국난이 있을 때마다 서울의 왕족이나 고관대작들의 피난지였다. 국난 중에 모아 두었던 금덩이를 갖고 강화에 피난온 누군가가 몰래 묻어 두었을 것이다. 피난온 상류층의 일가 전원이 몰살당한 사례가 적지 않았으며 금괴를 묻어둔 은밀한 장소가 소재불명된 경우가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추정된 것이다.” 이 날짜 이규태 코너에는 이 이야기와 함께 당시 서울에서도 우연히 발견된 금덩이를 둔 실화가 적지 않다면서 ‘일사유사’에 나오는 서울 과부 김학성 모에 관한 이야기도 소개하고 있다. 이들 얘기를 미루어보면 당시 이같은 일이 드물게 있었던 듯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경기도사 7권-일제강점기편’에도 나온다. 이책 제3장 제4절 ‘경기도민의 일상생활과 의식주’에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농촌지주의 기와집이 소개되고 있다. 당시 이집에 대한 내용은 전통한옥 전문가인 김홍식 전 명지대 교수가 보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내용은 ‘1925년에 지어진 이 집은 전형적인 품(品)자 형을 지니고 있으며, 강화도 남부의 토지 대부분을 소유했던 대지주 김영백(1873~1928)이 자신의 부를 현실화시키면서 지어졌다. 그가 언제 이러한 토지를 보유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원래 초가에 살던 김씨가 1924년 소문난 목수를 불러서 99칸에 이르는 대저택을 기와집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별채 정자와 부엌마루 등 특이공간 눈길 이 집의 규모는 이미 높은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한 대문채에서부터 느껴진다. 솟을삼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문간방들이 길게 이어진다. 문간마당을 사이에 두고 다시 안채 및 사랑채로 이어지는 중문과 담장이 있다. 이 집을 관리하는 분의 얘기에 따르면 당초 문간마당에도 행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안채로 통하는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ㄷ’자 형의 몸채가 눈에 들어온다. 이 몸채는 안채와 사랑채가 함께 이루고 있는 건물로, 복도를 통해 채나눔을 하고 있다. 안채 대청을 중심으로 대청의 왼쪽 편인 안방과 부엌, 아랫방, 그리고 대청 오른쪽의 건넌방까지가 안채의 공간이다. 그리고 복도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로 사랑방과 누마루가 위치한 사랑채 공간이 자리잡았다. 이 집의 안채 대청은 삼겹형태에 정면 3칸 규모여서 매우 크다. 이 집을 조사했던 김홍식 교수도 ‘거의 홀에 가까운 큰 공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안채 대청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안방문이나 건넌방 문이 모두 들어열개로 돼 있는 점이다. 안채 공간에 들어열개를 설치한 경우는 전통민가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이것이 근대한옥이어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방도 기다란 형태로 매우 넓다. 안방 복도 끝에는 2층으로 된 깊숙한 수납공간이 있다. 대갓집답게 안방 부엌도 매우 넓은 공간이다. 특히 이곳 부엌 한쪽에는 넓은 마루공간이 설치돼 있다. 이런 형태의 부엌도 전통 사대부의 민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많은 손님을 맞이할 때나 혹은 가족들이 많이 모이는 제사 등에 부엌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미리 음식을 준비하기 위한 공간이 아닌가 싶다. 안채의 뒤뜰은 마당보다 높게 구성돼 있다. 경사진 지형의 형태를 그대로 살린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에 별채형태의 정자가 서 있다. 특히 이 정자는 안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정자로서의 성격을 충분히 살리고 있다. 또한 이 정자는 밖에서도 출입할 수 있지만, 사랑채 복도와도 연결돼 있어 사랑채로 찾아온 손님을 바로 정자로 안내할 수 있도록 돼 있는 구조다. 문간마당과 몸채를 나누는 각 담장마다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한쪽 담장에 새겨진 글씨를 보면 ‘수(守)’, ‘신(信)’, ‘교(交)’, ‘붕(朋)’이다. ‘친구와의 사귐에 있어서는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터다. 비단 이 글자들뿐만 아니라 이곳 담장에는 교훈이 될 만한 글귀들이 안팎으로 쓰여 있다. 이 집의 안채 대청 퇴앞으로 비상 피난통로가 설치된 점도 눈길을 끈다. 사랑채 복도 밑으로 난 작은 통로를 통해 안마당에서 사랑채 뒤쪽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안채 부엌 뒤쪽으로는 커다란 장독대가 놓여 있고 그옆에 역시 커다란 우물이 있다. 우물 뚜껑을 열어보니 깊이가 꽤 깊다. 한 집안의 흥성과 쇠락이 함께 담긴 건물 한편 앞서 언급한 김홍식 교수의 조사자료에 따르면 1930년대 이후 이 집의 사랑채는 주로 소작을 관리하는 마름들의 사무실로 사용됐다고 한다. 이 집에서는 마름을 통한 토지경영을 했는데 수확한 작물을 집으로 가져오지 않고 마름이 직접 인천으로 가져가 거래를 한 후 현금으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실제 이 집에는 다른 지방의 대농 지주처럼 곡식을 쌓아두기 위한 넓은 마당이 없다. 한편 이 집은 한때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문화재 지정에 따른 여러 제약요건 때문에 소유자 측에서 해제를 요구해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다. 그러나 인천시 측에서는 문화재급의 가치를 지닌 이 집의 보존과 활용을 위해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다. 인터넷 블로그에는 50여년전 이 집에 묵었던 사람의 회고담이 소개돼 있다. 당시 그는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이곳으로 왔는데, 홀로 살며 집을 지키던 여주인이 이 집을 숙박시설로 이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우일각에는 한 집안의 흥성과 쇠락의 역사가 함께 담긴 셈이다. 어쨌든 99칸 규모의 저택이 그 규모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럽다.] 11:17~11:35 인천 강화군 길상면 강화남로 100 번지에 있는 청송국수로 이동 11:35~12:04 청송국수 식당에서 떡만두국으로 점심식사 [식사비용 : 8천원] 12:04~12:18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690-1 번지에 있는 길정 저수지로 이동 [길정저수지는 강화도 양도면에 위치한 497,000㎡ 규모의 저수지로, 수심이 깊어 항상 파란빛의 물을 만날 수 있는 넓은 저수지이다. 인천시는 2018년3월28일 길정저수지에서 인천 최초의 수상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하고 준공식을 개최했다. 길정 저수지의 태양광발전소는 한국농어촌공사 강화지사가 13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길정저수지 유휴 수면에 설치했다. 발전소 시설용량은 500kW로, 연간 142가구(가구당 월 350kWh 기준)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600MWh의 전력을 생산한다. 이는 석유 연간 10만리터의 대체 효과를 가지며, 약 274톤의 이산화탄소(CO2) 절감을 기대할 수 있는 양이다.] 12:18~12:24 사진촬영 12:24~13:24 인천 강화군 길상면 까치골길 72-17 번지에 있는 이규보 묘로 이동 [이규보 묘(李奎報 墓) 면적 668.9m2 시대 고려시대 소유 여주이씨 문순공파 종중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까치골길 72-17 (길직리) 이규보 묘(李奎報 墓)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릭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 선생의 묘소이다.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고려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선생의 묘소이다. 고려의 무신정권 하에서 태어나 무신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문인의 한 사람으로, 명종 19년(1191)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시문에 능하였던 선생은 중국의 모방이 많았던 당시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이야기를 서사시로 엮는 등 민족정신에 바탕을 두고 글을 썼다. 또한 몽고군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해서 대장경을 만들 때 민족수호의 충정이 담긴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을 지었다. 선생이 남긴 문집은 ’동명왕편’을 비롯하여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등 55권으로, 모두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묘역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망주석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 13:24~13:35 이규보 묘(李奎報 墓)를 탐방 13:35~14:16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75 번지에 있는 강화 곤릉(江華 坤陵)으로 이동 [강화 곤릉(江華 坤陵) 면적 1,091m2 강화 곤릉(江華 坤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강종의 부인 원덕태후 유씨의 무덤이다. 1992년 3월 1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70호 곤릉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개요 원덕태후는 고종의 어머니로 강종 1년(1212)에 왕비가 되고 연덕궁주라 하였다. 뒷날 원덕태후는 추대되고 1253년에 정강의 시호가 더해졌는데, 언제 사망하였는 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석물은 없어졌고 봉분과 무덤을 둘러싼 담도 무너졌던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사적 승격 사유 이 유적들은 고려시대 왕릉 또는 왕비릉으로서 묘제상으로는 지정가치가 없으나, 역사성이 인정되고, 고려 공양왕 고릉(사적 제191호)과 고려 고종 홍릉(사적 제224호)이 이미 사적으로 지정된 바 있으므로 경기도 지정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승격 지정] 14:16~14:23 사진촬영 후 물을 마시면서 휴식 14:23~15:00 어두 고인돌을 거쳐서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182 번지에 있는 강화 석릉(江華 碩陵)으로 이동 [강화 석릉(江華 碩陵)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182 강화 석릉(江華 碩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희종(재위 1204∼1211)의 무덤이다. 1992년 3월 1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70호 석릉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개요 희종(熙宗)은 신종의 첫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선태후 김씨이며, 부인은 성평왕후 왕씨이다. 1204년 왕위에 올랐고,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희종 7년(1211)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 교동으로 갔다. 고종 24년(1237) 57세의 나이로 죽자 낙진궁으로 옮겼으며, 10월에 덕정산 남쪽에서 장례를 지내고 석릉이라 하였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찾아내어 다시 무덤을 쌓았는데, 그 뒤 석물도 부서지고 무너진 무덤을 1974년 손질하여 고쳤다. 석릉 주변에는 최근에 고려시대 귀족의 무덤이라 생각되는 돌방무덤(석실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사적 승격사유 이 유적은 고려시대 왕릉 또는 왕비릉으로서 묘제상으로는 지정가치가 없으나, 역사성이 인정되고, 고려 공양왕 고릉(사적 제191호)과 고려 고종홍릉(사적 제224호)이 이미 사적으로 지정된 바 있으므로 경기도 지정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승격 지정] 15:00~15:11 사진촬영 후 간식 15:11~16:05 진강정을 지나서 인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 16-1 번지에 있는 강화 가릉(江華 嘉陵)으로 이동 [강화 가릉(江華 嘉陵)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16-2번지 강화 가릉(江華 嘉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위치한 고려 원종(재위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능(陵)이다. 1992년 3월 1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70호 가릉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개요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서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지금의 자리에는 고종 31년(1244)경 사망한 뒤 모신 것으로 짐작한다. 고려 원종 3년(1262) 정순왕후로 추대되고 충렬왕이 즉위(1274)하여 순경태후로 높여졌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부서져 없어졌고, 봉분도 무너진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사적 승격사유 이 유적은 고려시대 왕릉 또는 왕비릉으로서 묘제상으로는 지정가치가 없으나, 역사성이 인정되고, 고려 공양왕 고릉(사적 제191호)과 고려 고종홍릉(사적 제224호)이 이미 사적으로 지정된 바 있으므로 경기도 지정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승격 지정] 16:05~16:07 사진촬영 16:07~16:17 인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에 있는 탑재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6:17~16:52 탑재 버스 정류장에서 화도공용버스터미널로 가는 71번 버스 승차 대기 16:52~16:56 71번 버스를 타고 화도공용버스터미널로 이동 [4분 소요] 16:56~17:25 롯데몰.김포공항역 정류장으로 가는 60-5번 버스 승차 대기 17:25~18:51 화도공용버스터미널 정류장에서 60-5번 버스를 타고 롯데몰.김포공항역 정류장으로 이동 [1시간26분 소요] 18:51~18:53 김포공항역 3번 출구까지 도보로 이동 18:53~19:00 김포공항역에서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는 공항철도 승차 대기 19:00~19:30 김포공항역에서 공항철도 전철을 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30분 소요] 강화 나들길 제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 지도 강화 나들길 제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의 명소에 관한 안내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