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 코흐바의 반란 (132-135년)
1.원인
(1)정치적인 배경
·하드리안 (117-138)은 로마제국의 국경을 공고히 하고 또한 그 영토를 더이상 확장시키지 않으려는 목적을 둔 황제로 알려져 있다. 팔레스틴에서 큰 문제들 중의 하나는 유대 주민과 헬라 주민들 사이의 관계였다. 130년경 하드리안은 팔레스틴에 헬레리즘 건축물들을 건립하였다.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이러한 발전으로 불행하였으며, 또한 예루살렘과 종교적 문제들이 뒤얽혔을 때 훨씬 더 불행하였음이 명백하다.
(2)경제적인 상황
시골에서의 경제적인 상황이 하드리안이 통치하는 동안 또 다시 악화되었다는 암시들이 있다. 특히 임차인들의 지위는 점차로, 더 비참해져 가는 것 같았다.
(3) 직접적인 원인들
하드리안 할례금지와 예루살렘 재건을 약속을 어겼는데 또한 헬레니즘적인 건축물을 세우는것이 반란의 한 원인이 될 수 있었다.많은 학자들은 할례의 금지와 예루살렘 재건계획이 그 반란의 원인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결과로 보인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말로 하자면 이것들은 반란 후에 취해진 조치들이라는 것이다. 복잡한 요인들이 그 반란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 중에서도 경제적인 요인을 빠뜨리면 안된다는 인상을 분명히 받는다.
2.바르 코흐바 라는 인물
(1)인물과 태생
그는 스스로를 시므온 벤 코시바로 불렀지만, 기독교전승에서 , 그는 ‘별의 아들’을 의미하는 바르 코흐바로 불리워지고 있다.
(2)칭호
수많은 화폐에서 바르 코흐바는 ‘이스라엘의 왕자’로 지칭되고 있으며, 문서들과 한 편지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칭되고 있다.
메시아적인 기대들이 바르 코흐바라는 인물과 그리고 반란 그 자체 모두에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3)지도자로서의 바르 코흐바
바르 코흐바는 군사적인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및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그의 권위를 나타내었다.분명히 그의 지도력은 사람들의 삶의 모든 측면에까지 확대되었다.
3.랍비 아키바와 그밖의 랍비들의 역할
유명한 랍비 아키바는 바르 코흐바를 민 24:17에 근거하여 기대되고 있는 ‘다윗의 별’로 생각하였다. 아키바가 바르 코흐바와 관계 있다는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들 대다수 랍비들의 자세와는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밖의 랍비들은 그 반란에 열정적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4.반란의 경과
(1)투쟁의 무대
유대가 그 반란의 주요 무대였으나, 그것이 132-135년 팔레스틴 나머지 지역에서 로마와 어떤 소요나 작은 충돌이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로마군대의 주둔으로 갈릴리는 좀 소홀했는데 그렇다고 바르 코흐바편에 서서 싸우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2)반란의 시작
우리는 그 반란이 132년 초에 시작 되었다고 추정해야 한다. 반란기간은 아마도 3년경의 것으로 말할 수 있다. 반란군들은 곧 많은 요새들과(해로디움을 포함하여), 성채 및 동굴들을 점령하였음에 틀림없으며, 이런 곳들은 일종의 은신처로 사용되었다.
(3)더욱 더 발전된 투쟁
반란의 후기 단계에 가서 하드리안은 그의 가정 유명한 장군들중 한사람인 줄리우스 세베루스에게 그 반란을 진압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전투의 마지막 단계는 벧알 요새를 점령하고 약탈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 도시가 결국 로마에 의해 사로잡혔을때, 비록 후대의 기술이 아마도 다소 과장되었다 해도 다소 유혈상황이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 바르 코흐바와 랍비 아키바가 있었을 것이다.
벧알의 함락이 반란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로마군이 유대광야의 도굴에 있는 저항의 증심지들을 없애는데 더 많은 시간을 들었다는 암시들이 있다.
5. 반란의 결과
유대는 반란으로 실제로 중요한 지방이 로마에 빼앗겨 매우 큰 고통을 겪었다. 훨씬 더 심각한 일은 유대인들에게 나타난 결과였다. 그들 중 무수한 사람들이 노예로 팔렸다. 예루살렘은 이제 아엘리아 카피톨리나 라는 이름 하에 완전히 이방도시가 되었다. 죽음을 당한다는 형별로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반란이후 팔레스틴에 종교적인 박해가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할례, 안식일 준수 및 토라를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반란이후 심히 힘들고 어려운 시대가 유대인들에게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정치 적인 조국을 뺴앗겼기 떄문에, 토라가 이들 백성을 결합시키는 유일한 끈이었다. 역시 바야흐로 이러한 끈이 시간이 경과하면서 얼마나 강해져 왔는가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