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본문은 ‘삼삼삼 기도운동’ 등과 같은 기도의 권면이나 열심이나 운동에 있어 가장 많이 사용되는 구절 중 하나이고, 아주 큰 소망과 도전과 능력들이 되는 말씀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응답과 역사들이 나타나고 경험케 되는 기도와 간구들이 되기 위해서는 맹목적인 기도나 기복적인 간구가 아닌 제대로 알고 사모할 수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영적 원리나 이치들, 상황과 배경들을 잘 이해하고 분별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생각 이상으로 필요하고 실제적이며 중요합니다..
특히 예레미야서는 죄악으로 인한 애통과 심판들의 경고와 계시들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선지서이고, 실제로 예레미야는 다윗왕의 계보를 잇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남유다가 오랜 경고와 예고의 말씀대로 반복되고 갈수록 더 심각해진 죄악들로 인해 정말 바벨론에 의해 비참하게 패망케 되며, 그 가운데 남은 자들이 이방 땅으로 처참하게 포로되어 가는 것을 그 한 가운데에서, 게다가 바로 앞에서 두 눈으로 지켜보며 체감했던 선지자인 것이고, 그 상황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우며 비참했는지는 예레미야 애가에 상세하게 잘 기록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래 본문인 소위 ‘삼삼삼’ 구절을 위시해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모든 응답과 회복과 구원의 약속들은 반드시 전제와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죄가 아닌 말씀에서의 기도, 곧 죄와 세속과 불신앙들 등을 숨기고 반복하는 거짓되고 병든 것과 같은 신앙 아닌 신앙에서의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도가 아니라 반대로 먼저 각성하고 자복하면서 그 어떠한 상황들에서도 오직 말씀으로 돌이키며 몸부림치고 그 무엇보다 우선해서 말씀으로 살고 죽자고 하는 살아 있고 깨어 있는 말씀의 신앙에서의 부르짖음과 전적으로 직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도 강조하신 것이지만 원론적으로는 말씀이 아닌 죄악들과 벗하고 반복하면서 무조건 ‘주여주여’하며 아무리 부르짖는다 한들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있어서 응답과 구원의 역사들은커녕 외식과 위선의 깊이만 더해지는 것이고 오히려 진노와 가증스러움들이 될 수도 있는 것이며, 진정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백성들에 있어서는 더욱 사랑하셔서 라도 하나님의 시간까지 응답과 승리와 복들 등은 막으시는 대신 하루 바삐 먼저 죄악들을 멈추고 각성하며 참회하고 제대로 된 믿음으로 온전히 돌이킬 수 있도록 사람막대기와 인생채찍들 등 같은 징계들을 아끼지 않으시곤 하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그렇게 감추고 반복하는 죄악들의 모양과 정도와 강도들에 따라 얼마든지 더욱 심각해지고 처참하기까지 한 징계들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기도들,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역사하시는 제대로 된 기도들, 특히 사람이 못하고 세상이 짐작도 못할 하늘의 힘과 은혜들로 생생하고 풍성하게 응답하시고 경험케 하시며 예비하시는 기도들은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각성하면서 범한 죄악들에서는 최대한 빨리 자복하고 돌이키면서 구하고 싸우는 자들, 실상 다른 그 무엇보다 말씀에 서고 사모하며 몸부림치고 결단하는 자들의 기도들이 아닐 수 없는 것이고, 다름 아닌 바로 그러한 말씀의 신앙이 깨어 있는 신앙인 것이자 응답에 합당한 신앙인 것이며, 그와 함께 말씀대로의 모든 약속과 역사들을 말씀 그대로 받게 되고 경험하는 신앙인 것이고, 무엇보다 근원적으로 그러한 모든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중심이시자 근본이시며 실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야 말로 본질적으로는 바로 말씀 그 자체이시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다 실행하시고 모두 이루시는 분이기에 그러한 모든 이치와 원리와 실제들은 지극히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상 아래 본문의 ‘삼삼삼’ 구절과 그 뒤의 내용들에 있어서의 약속들도 가장 힘들고 어려우며 두려운 상황과 현실들 속에서도 목숨을 걸면서 처절하게 말씀대로 행하며 말씀 그대로 외쳤던 예레미야 선지자를 향하시고 통하신 약속이면서 훗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 죄악과 진노들에서 돌아서서 각성하고 자복하며, 오직 말씀대로 주님께로 나아가는 신실한 말씀의 백성들로 다시 서고 단련되며 준비케 되었을 때를 위한 약속이자 계시인 것이며, 모든 응답과 회복들, 진정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에 있어서의 예비하심이자 실제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곧 직접적으로는 죄악들을 아파하고 슬퍼하며 끝까지 말씀으로 살고 죽고자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선포했던 예레미야를 위한 약속이자 계시이고, 가깝게는 대략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 후 정금 같은 신앙으로 훈련받아 예루살렘으로 포로 귀환케 되는 남은 자들을 위한 약속이자 예비하심들이며, 근본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 참예한 백성들, 참으로 더 이상 죄악과 어둠들의 편에 서기 보다 구주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에 참예케 되어 하나님의 것, 곧 말씀이신 하나님의 백성, 다시 말해 말씀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원론적으로는 이 험한 세상에서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순간순간 어떤 식으로든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며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로 죄, 세속들과는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다른 무엇보다 우선으로 말씀을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실천하며 증거하는 등의 말씀의 신앙, 참으로 깨어 있고 살아 있는 믿음으로 몸부림치는 말씀의 백성들을 위해 온전히 약속된 은혜이자 응답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근본적으로는 복음의 능력들인 것이고, 또한 다른 면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실제, 실체와 본질적으로 다를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면 모든 기도 응답의 전제는 죄가 아니라 말씀이고, 그 한 가운데에는 죄에서의 돌이킴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인데 결국 구주 예수님만이 절대적인 방법인 것이며, 사실상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그 예수님으로 인해 죄가 아닌 말씀의 백성된 자들이 전제인 것일 뿐만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처음의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며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를 덧입어 더 이상의 죄와 세속과 불신앙들이 아닌 날마다 말씀으로 살고 죽고자 하는 말씀의 신앙이 뜨거울수록 더욱 기도의 응답과 역사들이 생생하고 강렬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다름 아닌 바로 그러한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과 함께 약속되고 예비된 역사들인 것으로 특히 직접적, 현실적으로는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인한 모든 응답과 회복들, 온갖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실제와 경험들인 것이고, 근원적으로는 말씀으로 하나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뻐 역사하심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생생함과 강력함들인 것인데..
그 누구보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들과 바로 지금 이 시간 그 백성된 자들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있어서도 조금도 다를 수 없는 사실과 이치들인 것이고, 특히 지금 우리들이 벗하며 반복하고 있는 크고 작은 모든 죄악들에 있어서의 각성과 자복들, 참회와 갱신들에 대해 자각하고 갈망하며 실행함과 함께 하는 바로 그러한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이야 말로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자리들, 사역의 현장들에서의 모든 기도와 결단들에 있어서, 그 가운데 예비된 그 응답과 역사들의 실제와 경험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사안이자 과제인 것이며, 특히 모든 응답과 역전들 등에 있어서의 생생함과 강렬함들에 있어 동일한 원리이고 열쇠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페북두란노서원66'중에서 인용과 추가/밀알서원)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3년 7월 6일(목)2/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