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내내 포근한 날씨가 계속 되었다.
오랜만에 닥친 한파에 정신이 번쩍 들만큼 오늘 아침은 싸늘하다.
부모님을 모시고 세 동생네 가족이랑 여행가는 날이다.
속초시내 아바이마을에서 만나기로 정하고 각자의 집에서 출발한다.
음력 11월, 12월 부모님 두 분 모두 겨울에 태어나셨다.
덕분에 가족여행 계절은 언제나 겨울이다.
한 달 동안 스케줄을 맞추느라 많지도 않은 가족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동해로 최종적으로 조율해서 여행을 떠난다.
집을 나서자마자 미리 예약해둔 낚시 배 선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연 3일째 동해에 풍랑주의보가 떠서 오늘도 출항이 힘들 거 같다고.
다들 잔뜩 기대했는데 조금 실망스럽다.
아우들과 전화를 주고받으며 미시령터널을 지나 속초에 도착했다.
막내는 아바이마을 건너편에 차를 주차해 갯배를 타고 약속장소로 건너온다.
청초항이 마주 보이는 식당에서 반가움과 함께 첫 식사를 마친다.
새파란 겨울 바닷가를 삼삼오오 걷는 조카들
쳐다보기만 해도 든든한 아이들은 이제 다 자라 엄마 아빠의 키를 훌쩍 넘어섰다.
일부는 동명항으로 일부는 속초중앙시장으로 나누어
저녁 먹거리를 장만하러 간다.
TV에 나온 속초시장 맛집을 찾을 거라는 아이들과
동명항으로 횟감을 사러가는 어른들, 누구랄 거 없이 신났다.
영금정에 올라 푸르다 못해 시퍼런 동해바다를 내려다본다.
높은 너울성파도가 방파제를 넘나들고 있다.
하얗게 부서져 희뿌연 해무를 만드는 거센 파도
이런 날 낚시 배는 안타는 게 맞다.
며칠 째 출항 못한 탓에 회 시세가 장난 아니게 비싸다.
제철인 대게는 인원관계상 엄두도 못 내고 회만 사고 만다.
차안 가득 먹거리를 싣고 숙소인 설악에 도착했다.
올 겨울 야박스런 흰 눈을 설악산에 와서야 겨우 본다.
복층인 숙소에서 15명이 복닥거린다.
인원수대로 두실을 예약했지만 한곳만 이용한다.
좁은 방 하나에서 함께 살았던 어릴 적에 비하면 이 정도는 호사다.
자식 넷에 다 자란 손주들까지 함께하는 이 시간이 흡족하신 부모님을 뵈며
내 마음도 뿌듯했다.
밤새 시끌벅적 놀고 느지막이 아침을 시작한다.
케이블카로 권금성에 올라 청명한 동해바다도 내려다보고 황금빛 울산바위도 마주보았다.
카톡에 재미 붙이신 팔순 아버진 설악의 설경을 연신 폰카에 담으신다.
요즘도 혼자서 산행을 다니시는 건강한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그에 비해 많이 쇠약해지신 어머니가 늘 걱정이다.
올 한해도 두 분 모두 건강하고 즐겁게 지내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백담사 입구 백담순두부에서 이번 여행의 마지막 식사를 같이한다.
향긋한 더덕막걸리 두어 잔에 기분 좋아하시는 아버지와 남동생, 그리고 나
밥도 참 맛나다며 즐거운 표정이시다.
22살 아들에게 운전을 맡기겠다며 편안히 한잔하는 남동생
세월이 쏜살같다는 말은 이럴 때 실감한다.
꼬맹이 아이들이 언제 이렇게 자라 어른이 되었을까.
설에 다시 만나자며 아쉬운 작별을 나누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짧은 일정이 아쉬워 내년 겨울엔 2박 3일로 떠나자 약속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정혜윤의 글이 생각난다.
"혹시 가장 큰 선물은 시간을 나눠 갖는 것 아닐까?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었을 시간에 누군가를 위해 내 시간을 소비하는 것.
이 지상에서 선물은 말이야,
자기 자신조차도 완전히 맘대로 할 수 없는 시간일 수도 있을 거야.
시간 속에서 고민과 이야기와 비밀과 눈물과 웃음을 나누다가
공동의 기억과 경험을 만들다가 그러다가 함께 변해가는 거지."
지금 내가 부모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두 분 모두 살아 계실 때 더 자주 만나 시간을 함께 나눠 갖는 것
공동의 기억과 경험으로 같은 추억을 쌓아가는 것.
그건 바로 내게 주는 큰 선물인지도 모르겠다.